소설리스트

69화 (69/79)

정이 이정에게 웃으며 말했다.

“단원들을 잘 부탁합니다. 이 대협!”

그것으로 책임의 한계가 지어졌다. 같이 가겠다는 말을 꿀꺽 삼킨 이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싸우려 하지 마시오. 데리고 돌아오시오.”

두 사람은 이정에게 밝게 웃고 당우리의 뒤를 따랐다. 이정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서있었다. 그리고 그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그때 한 사람, 오환이라는 별 특출 나지 않은 단원이 고개를 까닥이고서 그를 스치고 지나쳤다.

이정은 말리려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는 일보에 오 장이 넘는 보폭으로 벌써 한 참이나 멀어져가 있었다.

백의인들이 그렇게 힘없이 무너진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백무강 등의 눈에는 운청산의 모습이 빤히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고작 흙기둥 몇 개 속에 그가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 안으로 막 몸을 날린 백의인들의 동작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한 순간이지만 멈칫한 것 같았다.

백무강은 피를 뿌리며 다시 진 밖으로 튕겨 나오는 백의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그렇게 단번에 당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비록 운청산의 능력에는 못 미친다지만 개개인이 이 장이 넘는 도강을 내뿜을 수 있는 백영무단의 소속원들이었다.

내궁 전주들과 외궁 문주들이 모두 서로 가겠다고 나섰다. 백무강은 고개를 젓고 낮게 말했다.

“누가 있어 십 장의 검강을 뻗어내는 저 아이의 적수가 될 것인가? 문턱도 넘지 못하리라. 내가 직접 간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자 모두가 침묵했다. 백무강은 백무극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군. 중요한 시기에 이 늙은이가 사감을 앞세워 시간을 지체시킵니다. 용서하시지요.”

모두가 백무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당연히 말릴 줄 알았건만 백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고 길을 뚫어주시지요.”

백무강은 고개를 숙이고 진으로 걸었다. 그때 천기신사가 말했다.

“어르신! 들어서는 순간 큰 변화가 있는가 봅니다. 그러나 변화는 모두 허상.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백무강은 백의인들이 주춤거린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걸었다.

“어쩌시려고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천기신사가 묻자 백무극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막아봤자 들으실 양반이 아니잖나?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환도의 죽음에 상심이 크셨던 것 같아. 거기에 자존심까지 무척이나 상하신 것 같으니 지금 막는다면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일 걸. 하지만 눈에 다 보이지 않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때 들어가면 그뿐. 물론 무강 아저씨야 화를 내겠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넘어가겠지.”

모두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 모두가 백무극을 바라보았다.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니 백무강의 패배를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우상 어르신께서 당해내지 못할 거라 말씀하십니까, 지금?”

소불이 자신이 따지듯 물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눈을 치떴다. 백무극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냐.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실력은 비슷한 것 같은데, 사천의 앞길을 막은 각오가 남달라 보인다 할까?”

그 말을 끝내는 순간 백무강이 진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다시 그 둘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두 놀랐다.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줄 알았던 운청산이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백무강을 안으로 편하게 들인 탓이었다. 그리고 공손하게 포권을 취해 보인 탓이기도 했다.

백무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상황에서도 예의를 차리는가? 쯧! 나중에 찝찝해지겠군.’

백무극은 못마땅한 표정을 금새 감추고 두 손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쉑!

운청산의 검첨에서 푸른 구슬 하나가 빛살처럼 튀어나갔다. 백무강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급히 뒤로 물러서며 도를 휘저었다.

혈라성홍(血羅成虹)!

줄줄이 풀려나온 한 필의 붉은 비단 같은 도기가 연이어지면서 백무강의 전면에 겹겹이 막을 쌓아 나갔다. 유성분천의 초식에 실은 검환은 백무강의 도기를 뚫고, 뚫고 또 뚫었다. 그 순간 백무강이 도를 휘돌렸다. 도홍을 꿰뚫고 있던 검환은 붉은 장막에 휘감겨 옆으로 비켜나갔다.

백무강은 도로부터 도기를 끊어버리고 방향을 바꾸어 운청산에게로 쇄도했다. 운청산은 그의 전면을 향해 돌아서며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두 사람이 원을 그리며 휘돌자 주변의 풍광들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설경이 뜨거운 사막이 되고 다시 망망대해로 돌변했다. 그러나 두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에 무감한 듯 했다. 아무런 동요도 없이 서로의 눈빛만을 마주볼 따름이었다.

“핫!”

백무강이 먼저 튀어나왔다. 망망대해를 밟아 물을 튀기며 도를 내뻗었다. 붉은 도기가 실 풀리듯 계속 흘러나왔다. 운청산도 지지 않고 검을 내뻗었다.

쿠쿵!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빛 기운이 백무강의 혈라도천과 맞부딪쳤다.

쾅!

운청산의 뇌전교격과 백무강의 혈라도천은 모두 극강의 패도를 추구하는 검법과 도법이었다. 두 기운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니 그 여파는 엄청난 폭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리라.

두 사람이 동시에 피를 토하며 뒤로 미끄러졌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운청산의 눈에는 백무강이 끝도 없는 초원을 뒷걸음질치고 있었고, 백무강의 눈에는 운청산이 한없는 빙원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이 크게 덜컥거리며 동시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앞으로 쇄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태풍을 능가하는 강한 강기풍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두 사람은 우선 호신강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고 왼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가락 틈새로 서로를 살폈다. 서로 보는 풍광은 달랐지만 그 경관들이 휘청거리고 일렁이는 것은 똑 같았다. 두 사람의 충돌로 인해 생긴 충격파가 진의 끝에 가서 튕겨 나온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진 안으로 들어선다면 그 강기의 폭풍만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말리라.

요동을 치던 경관들이 미약한 흔들림을 남기고 제 자리를 찾으려는 그 순간 먼저 움직인 사람은 운청산이었다. 등에 강한 충격을 받고 멈춰선 순간 자신이 진을 이루는 기둥에 닿았다는 것을 깨달고 왼발로 기둥을 차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던 것이었다.

운청산의 검신이 바르르 떨렸다. 또 다시 유성만건곤이 펼쳐지는 그 순간 그는 허공에서 중심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왼손을 옆으로 내뻗었다. 뒤늦게 움직인 백무강은 이를 악다물고 도를 놓고서 대신에 손목을 휘돌렸다.

도가 백무강의 손목을 감싸며 맹렬하게 휘돌았다. 도기가 일고 선풍이 흘러나와 원반을 이루었다.

투투투투투투투퉁!

푸른 유성들이 붉은 원반에 닿았다. 원반이 계속해서 눌리고 일그러졌다. 백무강은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손목이 더 빠르게 휘돌았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의해 금시라도 뚫릴 것 같던 붉은 원반이 원상을 복구했다.

유성만건곤의 초식이 거두어지려는 순간이었고 운청산과 그의 거리가 삼 장으로 좁혀진 순간이었다. 백무강은 눈에 차가운 한기를 담으며 붉게 물든 왼손을 내뻗었다.

바로 그때,

“헉!”

백무강은 갑자기 오른쪽 어깨로 갑자기 다가드는 항룡유회의 기운을 느끼고 왼손의 방향을 비틀었다.

펑!

백무강은 울컥 피를 토하면서 왼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 탓에 전신에 힘을 뺐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운청산의 검에 산적이 되었으리라.

백무강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운청산의 검극에 푸른 기운이 뻗어 나와 조금 전에 그가 있던 곳을 후려쳤다. 운청산은 바닥과 닿는 순간 바로 허공으로 튀어 올라 다시 백무강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백무강은 미끄러지는 순간 무릎으로 바닥을 찍으며 휘돌았다. 그의 전신이 사막의 모래를 흩어놓으며 휘도는 순간 그의 혈도 역시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혈홍단천(血虹斷天)!

붉은 빛이 강한 도홍이 허공을 횡으로 가르며 공간을 가득 메웠다. 쇄도하던 운청산은 바로 바닥에 벽공장을 내질러 가라앉던 신형을 다시 띄웠다.

용유운상. 용이 구름 위에서 노닌다는 초식명과 걸맞게 운청산은 두 다리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젓고 두 팔을 흔들어 붉은 도홍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콰콰콰콰콰!

운청산의 발끝에서 발산되는 경력과 혈홍단천의 기운이 부딪치자 천둥이 이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의 발끝에서 붉고 푸른 기운이 뒤섞여 번개처럼 불꽃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회오리 되었다가 사라졌다.

운청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순간 그의 검 끝에서 휘돌던 구슬 같은 기운이 뻗어나갔다. 백무강은 또 다시 한 주먹의 선혈을 토하고 약해진 혈홍단천의 기운을 거두어 모래 위를 굴렀다.

운청산의 검환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오 장을 뻗어나갔다. 그 순간 그는 검극을 다시 백무강에게 돌리며 검을 잡아 빼는 시늉을 했다.

백무강은 계속해서 굴렀다.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도 어쩔 수 없이 모래를 튀기며 구르고 또 굴렀다. 그러나 그가 구르는 속도보다 운청산이 검극의 방향을 트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때 운청산의 뒷머리에 운경산의 경고가 느껴졌다. 운청산은 할 수 없이 검을 잡아 빼며 몸을 휘돌리고 태청구벽기를 일으켰다.

운청산이 검을 빼내는 순간 오 장을 나아갔던 그의 검환은 백무강의 왼쪽 어깨를 꿰뚫고 돌아왔다. 그러나 운청산은 그것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운경산의 경고처럼 강력한 기운이 등 뒤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휘돌린 검환이 등 뒤로 돌아가며 힘을 잃고 사 장의 검강으로 바뀐 순간 억지로 진기를 급전시킨 운청산은 한 줄기 핏물을 흘리면서도 기어이 뒤돌아섰다.

푸른 검강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기운이 부딪쳤다.

쾅!

운청산은 또 다시 피를 토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세 발이나 연달아 물러섰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좌우로 두 개의 하얀 장환이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태청구벽기가 발동하여 푸른 기운들이 세 겹, 네 겹 연이어 운청산을 감싸는 순간 그는 왼손을 들어올려 손목을 휘돌렸다. 왼쪽에서 날아오던 하얀 장환이 그 손에 휘감겨 방향을 비틀었다. 그때 오른쪽에서 날아온 장환이 태청구벽기를 두드렸다.

콰콰쾅!

세 겹의 호신강기가 계속해서 뚫리는 순간 운청산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발을 휘저어 반무릎을 꿇은 채 왼쪽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백무강의 어깨를 왼발뒤축으로 후려 찼다.

“크흑!”

겨우 일어서려던 백무강이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피를 토하는 순간 운청산의 신형도 아득히 멀리 있는 것만 같던 산맥에 부딪쳤다. 겨우 버티고 서있던 그의 신형이 산을 등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백무극이 넘어진 백무강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 뒤로 소불과 혈응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급변하는 경관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백무강을 넘겨받았다.

“저놈, 치울까요?”

혈응이 묻자 백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우상 어르신부터 구완하라. 내 손으로 하겠다.”

두 사람이 급히 백무강을 부축하여 진을 빠져나갔다. 백무극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차가운 눈빛으로 운청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죽어서는 안 될 양반이라서 말이야.”

운청산은 선혈이 가득한 입 주변을 씰룩거리며 검으로 바닥을 짚고 산에 등을 기댄 채 힘겹게 일어섰다.

뼈아픈 실수였다. 처음에는 백무강을 상대하면서도 진 밖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싸움 자체에 몰입하다보니 호승심이 일었고 시간을 지체시킨다는 애초의 의도보다 이기겠다는 생각이 앞서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실수는 이미 저질러버린 것. 결국 운청산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진의 뒷문을 생각에서 지워버렸다.

‘오늘만 열다섯을 죽였으니 하늘이 용서할 리 없겠지. 이미 용서하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운청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려고 노력했다. 백무극은 여전히 냉정한 눈빛으로 후들거리는 그의 두 다리를 살폈다.

운청산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좁혔다.

“어-언젠가 본 사람이군요.”

백무극은 처음으로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의 사유하였지?”

운청산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대신했던 검을 중단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백무극은 고개를 내저으며 운청산의 검에 감도는 푸른 기운을 살폈다. 검신 주변에서 흐릿한 아지랑이를 느낄 정도로 미약한 기운이었다.

“아쉽군. 내 사람이었다면 밑에 두지 않고 나란히 섰으리라. 정말 아쉽다. 진심이야.”

거리는 겨우 오 장이었다. 태청구벽기가 있더라도 조금 전과 같은 장환을 맞는다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청산은 쉬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백무극은 이미 많은 이들이 진 안으로 들어와 기다리고 서 있음을 알고도 운청산이 이 장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운청산은 다시 왼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갑자기 눈에 생기를 되찾으며 왼발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망망대해가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운청산의 신형이 선풍을 일으키며 백무극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청룡구전의 신법을 펼쳐 순간이동을 하듯 백무극의 좌측에 갑자기 나타난 운청산이 검을 내뻗었다. 검기가 겨우 일 장을 뻗어나가는 미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거리는 겨우 일 장 반. 아무리 약한 검기라도 사람을 꿰뚫는 것은 마찬가지이리라.

보고 있던 이들이 눈을 치떴다. 백무극이 꼼짝 하지도 않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의 험상궂은 얼굴이 꿈틀거렸다.

‘할 만큼 한 거지? 우리. 안녕히!’

마지막으로 적의 수괴 하나를 동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운청산은 얼굴을 꿈틀거림으로써 만족한 웃음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무극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운청산을 보지도 않고 왼손을 내뻗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한 손이 검기에 닿고 검기를 짓누르고 검신마저 수수깡처럼 부셔버렸다. 그의 손이 결국 검파에 닿았다. 그 순간 하얀 빛 무리가 번져 나오고 운청산의 신형은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사람들이 그의 신형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운청산이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진의 후면에 자리한 역삼재의 후문으로 튕겨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백무극은 그 투명한 문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음 짓다가 사방으로 손을 뻗었다. 장환이 난무하는 순간 폭음이 일고 지금껏 공간을 지배했던 모든 풍광들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흙더미들과 칙칙한 하늘뿐이었다.

백무극은 고개를 숙였다.

“흠! 아직도 살아있나? 질긴 게 목숨이라더니---.”

고개 아래쪽으로 삼십여 장이나 굴러가서 길 구석에 처박힌 운청산이 널브러진 채 사지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끌고 오너라.”

순간 백의인 두 명이 앞으로 나아갔다.

백무극은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

“우상 어르신은?”

백영담이 대답했다.

“상처가 작지는 않아 당장 움직이시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운가가!”

당우리였다. 산모퉁이를 막 돌아선 그녀가 백의인들과 거의 동시에 운청산을 향해 마주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별 다른 명이 없었음에도 또 다시 두 명의 백의인들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앞서 달려 나간 두 백의인들은 뒤에 사람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운청산을 스쳐 당우리에게로 나아갔다.

채챙!

도가 뽑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당우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다시 푸들거리는 운청산을 확인한 그녀는 거의 동시에 두 손을 녹의의 틈새로 집어넣었다.

백의인들과의 거리는 십여 장. 그들의 도에서 삼 장에 이르는 도기가 뻗어 나왔다. 당우리는 눈을 치뜨고 입술을 깨물며 두 손을 섬전같이 내뻗었다.

수십 줄기 새털 같은 은침이 약해진 빗발 사이사이를 뚫고 백의인들에게로 날아갔다. 순간 백의인들이 도를 휘돌렸다. 은은한 빛의 붉은 도막이 두 사람의 전면을 가렸다.

치치치치칭!

은침들이 도막에 퉁겨 사방으로 흩어지는 순간 두 백의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도막을 거두고 다시 도를 내뻗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하얀 은침 몇 가닥이 도를 지나고 팔을 지나서 두 사람의 눈과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좌우에서 생각지도 못한 은침들이 일시에 쏟아졌다.

“크으으윽!”

두 백의인들은 동시에 도를 놓고 얼굴을 감쌌다가 뒤로 퉁겨 널브러졌다.

운청산에게 거의 이르렀던 후미의 백의인들이 다시 당우리에게로 쇄도했다.

당우리는 방금 그녀가 죽인 두 사람의 시신을 외면하며 오직 운청산과 그 앞에 이른 두 백의인들을 바라보고는 다시 품속에 손을 넣었다.

다시 튀어나온 그녀의  두 손에는 한 자 길이의 가는 대나무 여섯 가닥이 들려 있었다.

퓨퓨퓨퓨퓨퓩!

매화수전 여섯 개를 연달아 쏘아대니 백의인들이 달려드는 기세를 늦추고 도를 휘둘렀다.

치치치치치칭!

매화수전 한 통에 든 소전의 수는 모두 여섯. 당우리가 일시에 발사한 수는 서른여섯이었다. 그러나 백의인들은 이미 두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본 터라 태만하지 않고 세차게 도를 휘둘러 전신을 보호했다.

서른여섯 개의 매화수전이 모두 튕겨버린 후에도 백의인들은 계속해서 도를 휘두르며 당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거리는 겨우 육 장. 한 발만 더 뛰며 두 가닥의 세찬 도기들이 당우리의 전신을 난자해 버리리라.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좌우로 흩어지면서 당우리를 일도양단할 기세로 도를 내리쳤다.

당우리는 눈을 차갑게 굳히며 몸을 낮추고 왼쪽에서 다가오는 백의인을 향해 추뢰신법을 펼쳤다.

도를 내리치던 백의인이 눈을 치떴다. 당우리가 지금까지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르게 너무나 빠른 속도로 도세 아래로 들어왔던 탓이었다.

그러나 백의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도세를 지나쳤더라도 그녀의 머리는 도첨 바로 아래쪽에 있었다. 내리 그으면 그 자리에서 도신에 양단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도 당우리를 베었다.

깡!

백의인이 눈을 치떴다. 당우리의 하얀 손이 그의 도신을 받히고 있었다. 그대로 손을 잘라내고 어깨를 내리누르고 사타구니를 갈라버렸어야 할 도신은 맥없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었다.

당우리는 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내며 한령수를 믿고 손바닥으로 도신을 훑었다. 도인을 타고 도파까지 이른 그녀의 두 손이 도를 떠나 백의인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비독무영수가 작렬하는 순간 백의인은 피를 토하며 뒤로 퉁겨나갔다.

그때 하나 남은 백의인이 악독한 눈빛으로 당우리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당우리의 왼손이 품속에 들어갔다 나온 후였다. 매화수전에 비해 세 배는 더 굵을 것 같은 짧은 대나무 통이 백의인의 가슴으로 뻗어나갔다.

푸슈!

낮은 소음이 나는 순간 이화폭우침통이 발사되고 은빛 침들이 수백 개의 유성이 되어 터져나갔다.

“크아아아!”

백의인은 얼굴과 가슴에 수 백 가닥의 이화침들을 꽂은 채 삼 장이나 튕겨져 나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겨우 삼 장 앞에서 이화폭우침을 맞은 백의인은 한 번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즉사해버렸다.

평생 처음 사람을 향해 암기를 뿌렸다. 그 결과로 한 번에 네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이 맞으리라.

당우리가 고개 위에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수십 명의 백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운청산을 보듬어 안았다.

백무극이 그녀를 바라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흠! 당가의 여식인 것 같은데, 사랑인가? 마지막 가는 길이 쓸쓸하진 않겠군.”

그가 다시 손을 들려는 순간이었다.

“소군!”

백무극은 손을 내리고 소리를 지르듯 자신을 부른 백영담을 주시했다. 그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백무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하거라.”

백무극은 자신에게 허리를 접어보이고 활을 드는 백영담을 보고는 백무강에게로 몸을 날렸다.

운청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당우리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슬픔보다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한 살의를 느꼈다. 그때 그녀가 느끼는 만큼이나 싸늘한 살의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고개 위에 우뚝 선 사람들 가운데 훤칠한 청년 하나가 전통에서 먹빛 화살을 꺼내면서 노려보고 있었다. 당우리도 지지 않고 청년을 노려보며 운청산을 무릎에서 내려놓고 그의 앞을 막았다.

한령수를 낀 두 손에서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그 순간 당우리가 먼저 허리춤에서 두 대의 무형뇌전을 꺼냈다. 그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를 눈에 담고 궁사를 겨냥하여 무형뇌전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녀가 간관한 것이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무형뇌전의 사거리는 사십여 장이 넘으나 이십여 장이 지나면 그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암기였다.

백영담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활을 비틀어 무형뇌전을 퉁겨냈다. 그리고 천천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때 당우리의 뒤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우리! 도-도망-가아.”

당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운청산이 사지를 이용하여 그녀에게로 기어오고 있었다. 당우리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워 있어요. 죽은 체 하란 말이에요.’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무시하고 운청산은 꿈틀거리며 기어왔다. 당우리는 두 대의 무형뇌전을 다시 꺼내어 백영담을 바라보았다.

그가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한 살의가 느껴졌다. 암기와 투사병기라면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이 알고 있는 당우리였다. 그러나 백영담의 기파와 살의 그리고 은빛 화살촉이 달린 먹빛 오호전을 보는 순간 그것이 지닌 위력만큼은 감히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당우리는 백영담과 그 주변에서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많은 시선들을 보고서 무형뇌전을 쏘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우리는 무형뇌전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운청산을 돌아보았다. 칠공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운청산은 기고 또 기었다. 그녀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눈물 흘리고 또 웃음 지었다.

“안녕! 내 사랑!”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백영담이 당우리를 겨냥했다. 그녀는 두 손을 뻗어 살기가 닿아 따끔거리는 가슴을 겹으로 막았다. 그리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으어어어어어! 아-안돼!”

운청산이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을 걸어 손을 뻗었다. 당우리의 허리를 잡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한 발이라도 운청산에게서 멀어지려고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화살이 그녀의 왼 주먹을 꿰뚫었다. 그리고 오른 주먹을 꿰뚫었다. 호신강기를 뚫고 도검을 잡을 수 있다는 한령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피가 튈 사이도 없이 화살은 당우리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그녀의 등을 잡아채려던 운청산의 머리마저 꿰뚫고 말았다.

당우리가 무너졌다. 운청산도 무너졌다.

백영담은 무정한 눈으로 당우리와 운청산을 내려다보았다. 통쾌해야 하리라. 그러나 아니었다. 사천의 앞을 홀로 막아선 운청산의 기개와 죽음 앞에서 한 치도 그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던 당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치 점창의 벽령자를 죽였을 때처럼 씁쓸한 감정이 먼저 느껴졌다.

백영담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비틀어 두 사람의 시신을 외면했다. 그때 백무극이 백무강에게 대권을 인수받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 화살에 동시에 꿰어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리라. 금강포구까지 전속전진.”

그가 먼저 몸을 날리자 백의인들이 남김없이 뒤를 따랐다. 아무도 당우리와 운청산을 바라보지 않았다. 비에 젖은 흙을 튕겨 두 사람의 시신을 더럽혔을 따름이었다.

백라천궁의 행렬이 채 반도 지나기 전에 운청산의 머리에서, 정확히 말하면 화살이 꽂힌 그의 왼쪽 눈에서 여덟의 혼령들이 튀어나왔다.

운경산이 생각을 퍼뜨렸다.

‘어찌된 거지? 우리가 소멸하지 않은 것을 보면 청산은 아직 살아있어.’

돌이켜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백영담의 화살은 이백 장을 직선으로 나는 괴물이었다. 겨우 삼십 장의 거리에서 쏘았는데 청산이 살아있을 턱이 없었다. 그 앞에 당우리가 막아섰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어야 하리라.

운추산이 생각을 전했다.

‘우리가 한 일이 효과가 있었나?’

그랬다. 여덟 영혼들은 분명히 무언가를 했다. 비록 물리적인 힘을 막아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화살 앞에 먼저 오는 기세만은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고 여덟 영혼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화살의 기세에 대응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모두 화살의 기운에 밀려 운청산의 왼쪽 눈 속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들이 아는 검은 화살의 위력은 너무나 강했다. 그들은 운청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당우리에게로 갔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아가씨였는데---.’

운명산이 생각하자 운현산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힘이 약해졌지만 소멸되지는 않았으니 청산은 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데---, 그래도 큰일이군. 청산이 이 가여운 아가씨의 죽음을 견뎌낼까?’

그때 운추산의 생각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것들 봐요.’

그들은 운추산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 모두 눈을 치떴다. 그녀의 가슴에 붙은 오른 주먹 끝에 화살의 전우가 걸려있었고 그 주먹 위로 얇은 막 같은 것이 있었다. 한령수였다. 당우리는 한령수를 믿고 주먹을 쥠으로써 무려 여덟 겹의 한령수로 만약을 대비하여 화살의 위력을 죽였던 것이었다.

‘특별한 수갑인가 보구나. 이것이 청산을 살렸어.’

운명산이 슬픈 눈으로 당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경산이 손을 뻗었다.

‘그뿐이 아닌 것 같군요.’

그의 손을 따라 가보니 당우리의 가슴에서 굴러 떨어졌을 것이 뻔한 토막 난 비수가 있었다. 반동가리가 나버린 백접비였다.

‘후!’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백라천궁의 행렬이 모두 금강포구 쪽으로 사라졌다.

푸른산, 붉은 구름에 뒤덮이고

정명단과 함께 후위에 배치되어 있던 점창의 제자들이 금강포구에 들어섰다.

앞서 도착해 있던 사대파의 세력들이 포구를 중심으로 강을 등진 채 반원진을 치고 있었다.

벽송 등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외면했다. 반겨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무표정을 가장한 냉대를 받을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바라보지 않은 것이었다.

벽송 등은 기왕 왔으니 일각을 책임지라는 듯 자리를 비워주는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시선들을 등에 두었다.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사천으로 돌아가는 즉시 무림련을 떠나리라. 천하를 떠돌면서 제자를 거두고 힘을 키우리라. 수 십 년, 아니 수 백 년이 걸려도 좋다. 점창수복은 점창의 힘으로 하고 말리라.’

벽송은 주먹을 쥐어 손의 경련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가 왔던 곳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나 이탈했다. 누구보다도 힘이 되었던 벽인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벽정이었다. 아무리 참고 기다려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포기한 것이리라. 한시적이지만 점창에 적도의 그림자가 사라졌으니 그 속에 숨어든 것이리라.

‘너희들 어디 있느냐? 너희들이 필요하단 말이다. 돌아오너라.’

벽송이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반원진을 헤치고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걱정스런 얼굴로 식골령 쪽을 바라보았다.

“당가의 취화발향전이 효과를 거둔 모양이오. 수고하셨소.”

현상자가 전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당유연에게 말했다. 당유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사히 돌아간 다음에 들어야 할 소리 같습니다. 아직 정명단도 도착하지---.”

당유연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내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주목했다.

청의. 정명단이었다.

모두가 안쓰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완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여 장 앞으로 다가온 정명단원들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었다. 한 마디로 살았다는 안도감이리라.

신수사태와 공명 선사 그리고 당유연은 직접 앞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맞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밀어 지친 걸음에 힘을 보태 주었다.

이정과 공명 선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정은 급히 합장을 하여 고개를 숙였다. 공명 선사는 희미한 미소를 드리우고 이정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때 당유연이 물었다.

“이보게. 이 단주. 부단주가 안 보이는군.”

이정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당유연의 시선을 외면하는 순간 그는 또 한 사람의 당황한 얼굴을 발견했다. 당명인이었다.

그때였다.

“배다. 배가 들어온다.”

뒤쪽에서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당유연은 물론 수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고, 반원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강으로 몸을 돌렸다.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

운녹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소란스러움은 가셨지만 강변을 떠도는 기운은 기쁨 그 자체였다. 무사히 탈출했고, 대부분이 무사히 포구에 도착했으며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배 또한 도착했으니 기쁨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때 이정이 당명인을 힐끔 보고서 각오를 한 듯 당유연에게 말했다.

“적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수뇌진들이 놀라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돌아선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대로 걸려있었다.

취화발향전 때문에 적의 발을 묶은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당유연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정은 적들이 한때 백 수십 장 뒤를 쫓았고 그래서 운청산이 그것을 지체시켜보겠다고 홀로 갔다는 사실도 전했다. 그리고 당명인을 향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당명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소?”

공명선사가 무거운 얼굴로 말하자 신수사태와 당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강을 바라보았다. 배들이 방향을 돌리기 위해 포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첫 배가 빨리 닿아도 일 각은 걸리리라.

당유연이 침중하게 말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다는 소리군.”

패배가 두려워 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천 대 구백. 숫자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싸움은 붙어봐야 아는 것. 두려워한 것은 공멸이었다.

그들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탓이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이 원한 것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힘이 구백뿐인 것이 아니었기에 싸움을 미룬 것뿐이었다. 하지만 싸울 수밖에 없다면 이제 이기는 것을 생각해야 하리라.  세 수뇌들은 현상자와 운녹산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남은 이들은 오직 당명인과 이정 뿐이었다. 당명인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다시 무언가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차마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 순간 이정은 침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십여 장 앞에 운청산이 있었다. 그리고 당우리가 있었다. 그러나 강정은 쉽게 그들을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작은 한 발을 내밀고, 시신을 다시 보고 한 동안 주저하고, 그리고 다시 외면하여 또 한 발을 내디뎠다.

그때 문취옥이 강정의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

“우린 도울 수가 없었어. 나갔어도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었을 거야. 말 그대로 개죽음. 차라리 청산과 우리의 시신이라도 거두는 게 나아.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우리 자책은 뒤로 미루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문취옥마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걷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은 결국 한 화살에 꿰어진 당우리와 운청산의 앞에 이르렀다.

강정은 외면했던 눈길을 운청산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렸다.

“으흐흐흐흑! 미안하다. 청산!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겠다고 쫓아왔건만 너희들이 죽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었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강정은 운청산의 머리맡에 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비틀어 외면하고 있던 문취옥도 끝내 눈물을 흘리며 강정의 구부러진 등을 감쌌다.

강정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운청산의 머리를 향해 뻗었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흙기둥의 파편이 가득한 고개의 정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물을 훔쳤다.

두 사람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눈빛을 드리우고 천천히 일어나서 도파를 잡았다.

새로 나타난 이들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만든 듯 거칠었지만 그래도 누워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편하게 보이는 이동침상을 가운데 둔 스물두 명의 백의인들이었다.

강정과 문취옥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은 정명단을 이탈할 때의 바로 그 각오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때 침상에 누워있던 우상 백무강이 두 사람을 쓰윽 훑어보고서 말했다.

“몇 남아서 치우고 뒤따라오너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이동침상을 든 여덟 명의 백의인들이 먼저 움직였고 뒤이어 그 기도가 남다른 장년 백의인 여덟이 호위하듯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강정 부부의 몇 발자국 앞을 스치고 지나치면서도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강정 부부는 백의인들이 멀어지는 순간 긴장을 풀고 남은 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겨우 여섯이 남아 있었다. 강정 부부는 동시에 도를 뽑아들었다. 백의인들도 같이 도를 뽑았다.

강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 같이 감정의 변화가 격렬한 날은 겪어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이 하늘에 닿을 것 같더니만, 바로 전에는 불같은 분노가 치솟았었다. 그런데 막상 여섯 명의 백의인들이 뿜어내는 도기가 삼 장이 넘는데도 여유가 있어 보이니, 분노는 수그러들고 허무함만 남는 것이었다.

“결국 아무 것도 못하는구나. 죽음이 두려워 움츠리더니 이제는 청산의 시신도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취옥! 미안하오. 그러나 지금껏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오. 그것으로 무능한 나를 용서하시오.”

문취옥이 고개를 슬쩍 비틀고 웃었다.

“아정! 그동안 고마웠어. 나,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늘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내생에는 더 행복하자, 우리.”

강정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 속의 모든 분노를 기합을 내질렀다.

“하압!”

두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갔다. 백의인들도 같이 쇄도했다.

강정과 문취옥은 거의 동시에 도를 휘둘러 여섯 명의 백의도객들을 반으로 쪼개 놓았다. 결국 강정 부부는 등을 맞대고 서고 여섯 도객들은 두 사람을 둘러선 형국이 된 것이었다.

강정 부부를 중심으로 도기가 난무했다. 상대는 여섯 명의 강정과 같은 존재들, 수적인 열세가 곧 힘의 열세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강정 부부는 절묘하게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태극처럼 등을 맞댄 채 원을 그리며 휘돌며 등의 부딪침과 엉덩이의 비껴짐 그리고 팔의 엉킴으로 서로의 상태를 파악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했다.

강정이 위기에 빠지면 문취옥은 서슴없이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먼저 막고 그 순간 강정은 다시 휘돌아 문취옥의 등에 떨어지는 도기를 퉁겨냈다.

문취옥이 힘들 때면 강정은 어느샌가 몸을 낮춰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상대의 다리를 공격했고 그 사이에 그녀는 허공을 휘돌아 그의 배후를 지켰다.

그러한 움직임은 정해진 초식에 맞춰 수련한 결과가 아니었다. 십여 년이 넘도록 거친 강호를 떠돈 두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 만들어낸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쉬지 않고 다가오는 여섯 줄기의 도기를 막아내는 것에 불과할 뿐, 상대의 수를 줄이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두 사람은 점점 지쳐갔고 냉정한 백의도객들의 도를 점점 거세어졌다.

쉐쉐쉐쉐쉑!

순차적으로 다가오던 여섯 줄기의 도기가 한꺼번에 닥쳤다. 강정은 다급한 눈빛으로 왼팔을 뒤로 돌려 문취옥의 왼팔을 꼈다. 문취옥 즉시 알아차리고 몸을 퉁겼다. 두 사람이 동시에 휘돌면서 도를 휘돌리니 도기가 선풍이 되어 여섯 줄기의 도기를 퉁겨냈다.

백의도객들이 물러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그만 끝내자.”

무정하던 눈빛에 한기가 더한 도객들이 일제히 도를 비켜드니 여섯 자루의 도에서 사 장이 넘는 도기가 뻗어 나왔다. 여섯 도객들은 원진을 포기하고 세 사람씩 뭉쳐 섰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섰다.

“쳐라!”

서로를 위한다는 것, 그것이 때로는 서로에게 부담이 될 때도 있었다. 강정은 눈을 감고 싶었다. 나란히 선 세 사람이 천지인을 동시에 공격해오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길이 있다면 오직 피하는 뿐인데 등을 맞댄 문취옥이 있으니 그 또한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취옥의 생각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녀의 등 근육과 엉덩이가 긴장을 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강정은 눈을 부릅뜨고 도를 내뻗으며 왼손을 뒤로 하여 문취옥의 허리춤을 잡았다.

문취옥은 눈을 치뜰 수밖에 없었다. 강정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허리춤을 쥔 적이 없는 탓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문취옥은 허공을 휘돌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섯 줄기의 도기가 강정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데도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문취옥도 웃었다.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 간발의 차이에 불과할 따름이건만 강정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여섯 줄기의 도기가 강정을 꿰뚫었다. 강정은 절로 찡그려지는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선혈이 흘러나오는 입을 벌려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바보! 나도 사랑해.”

문취옥은 웃으며 말하고 허공에서 서서히 낙하했다. 그 순간 강정이 기합을 터뜨리며 사방으로 휘돌았다. 여섯 도객들이 일시에 물러섰다. 그 사이에 문취옥이 휘돌다가 쓰러진 강정의 곁에 내려섰다.

여섯 도객들이 다시 도를 비켜들었다. 그러나 문취옥은 강정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도객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순간 문취옥의 손에서 도파가 굴러 떨어졌다.

도객들이 오히려 놀라 흠칫 멈춰 섰다. 그러나 곧 그들 가운데 입을 열었던 그 사내가 홀로 도를 치켜들며 문취옥에게 다가섰다.

문취옥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강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이걸 생각한 거야? 한 칼만 맞고 고통이라도 덜 받으라고? 그랬다면 고마운데, 먼저 눈감지 못하고 죽은 널 봐야하는 지금의 내 심정도 계산했어? 내가 손해야. 이 바보.”

그때 도객의 도에서 두 자 가량의 도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도가 떨어졌다.

“아옥! 안돼!”

문취옥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몸을 비틀었다. 순간 도기가 그녀의 가슴을 비켜 왼쪽 팔을 날려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그러나 문취옥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강정의 옆에 털썩 주저앉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눈에 이상한 사람이 보였다. 얼굴의 반을 얇은 철판으로 가린 사내, 오환이었다. 그는 단 걸음에 칠 장을 뛰어 순식간에 근처에 이르렀다.

다섯 도객들이 즉시 마주쳐갔다.

쭝!

옆으로 뻗은 오환의 도에서 일 장에 이르는 도강이 뻗어 나와 진흙탕을 갈랐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백의도객들이 눈을 치뜨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환의 도가 선풍처럼 휘돌았다. 도강에 휘말린 진흙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백의인들의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순간 백의인들의 도기들이 여지없이 흩어져버렸고, 그 사이에 오환의 신형은 문취옥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를 베었던 도객이 급히 도를 뻗어냈다. 오환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르려는 도기를 무시하고 그 밑을 파고들었다. 어깨에서 가는 핏줄기가 튀는 순간 오환의 도강는 어느새 도기를 가르고 도를 부수고 백의도객마저 갈라버렸다.

오환은 급히 돌아서서 백의도객들을 응시하며 천천히 무릎을 꿇고 문취옥을 안았다.

“왜? 왜 그랬느냐? 왜 그냥 죽으려 한 것이냐? 넌 독한 애잖아? 왜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살려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문취옥이 입술을 푸들거렸다. 웃음이리라.

“사형이었군요. 지금껏 우리와 함께 있었군요.”

“대답해라. 왜?”

문취옥은 또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란 계속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 아정이 없는 세상은 내게 무의미해요.”

“그러냐? 저 녀석이 그렇게도 좋았더냐? 허허허허!”

오환이 문취옥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또 미소를 지었다.

“사형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내게는 사형일 뿐, 사랑이 될 수는 없었어요. 미안해-요.”

오환은 문취옥의 목이 꺾이는 것을 보며 또 다시 너무 커서 비애가 느껴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허허! 아옥! 평생 너의 그림자만을 쫓아왔거늘 끝까지 잔인하게 구는구나.”

오환은 문취옥의 머리를 무릎 위에서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백의도객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주었구나. 고맙다고 해야 할까?”

오환은 도를 뻗으며 백의도객들에게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히죽히죽 미소가 감돌았다. 환각이 보이고 환청이 들렸다. 아니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고, 콧등 주변에 몇 개의 주근깨가 서린 어여쁜 소녀가 그의 연무를 바라보면서 손뼉을 쳤다.

‘사형! 대사형! 제비 같아요. 멋져요.’

그 표정과 목소리에 고무된 오환은 연신 히죽거리며 도기가 난무하는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췄다.

‘아니야. 아닐 거야. 이건 틀림없이 꿈일 거야.’

운청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뇌를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 화살을 잡았다. 그리고 거칠게 뽑았다. 순간 화살이 너무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눈을 떴다. 화살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화살이 떨렸고 눈앞에서 녹의가 부르르 떨렸다. 운청산은 천천히 화살을 놓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악을 쓰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당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청산은 힘겹게 일어서서 그녀의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흔들었다.

“우리야. 우리야. 일어나야지? 안돼. 안된단 말이야. 우리야. 으허허허허!”

운청산은 당우리를 품안으로 당겨 그녀의 볼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비틀리면서 화살이 땅에 닿아 상처가 벌어졌다. 고여 있던 피가 또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는 순간 운청산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 소리쳤다.

“제가 기꺼이 죽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용서하지 마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하십니다. 정녕 너무하십니다. 왜 절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왜 제 곁에 사랑을 남겨두지 않는 것입니까? 너무하십니다. 당신들을 저주하겠습니다. 우아아아아!”

악을 쓰는 순간 꿰뚫린 그의 왼쪽 눈에서 검붉은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운청산은 오른 쪽 눈을 하얗게 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찧은 운청산은 당우리의 얼굴을 가슴에 품은 채로 또 다시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벽송은 절규하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눈을 후벼 파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더욱 더 크게 부릅떠질 따름이었다.

하얀 백의의 물결 속에 유독 드러나 보이는 두 벌의 도복. 그 주인은 바로 벽인과 벽정이었다.

벽송은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틀림없이 사로잡힌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쓰러운 얼굴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다. 비록 활과 전통은 없었지만 왼쪽 머리 옆으로 검파가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두 팔과 두 다리가 한없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벽령 대사형을 죽인 백영담의 옆이었다.

벽송은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해낼 수 있었다. 길목에 뿌려놓은 삼일취혼산을 상대가 어찌 피해왔는지 알 것 같았고, 단 한 번 적을 향해 날린 적이 없는 활과 화살을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세상의 눈이 오직 벽송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점창의 영령들이 통곡을 하는 것만 같았다.

“왜?”

그가 한 마디 뱉자 주변의 점창인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벽인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벽인도 그를 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벽인의 근처에 있던 중년인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와아아아아아!”

백의의 물결이 사천무림련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쳐라!”

현상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벽송과 점창의 제자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 선두에서 치달렸다. 오직 벽인과 벽정을 향해.

하얀 물결과 파란 물결이 서로 부딪쳤다. 검광도풍이 난무하고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포구에서 뒤엉키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만 요란할 뿐, 물결은 충돌로 인하여 한 동안 정체되었다.

그러나 사천 대 구백. 개개인의 무위와는 상관없이 압도적으로 수자가 많은 백의인들이 서서히 사천무림련을 강변 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첫 번째 배인 용문비선 일호가 포구에 이르렀다. 배가 채 정지하기도 전에 백여 명에 이르는 가사를 입은 장년승들이 뛰어내렸다. 그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앞쪽으로 나아가자 흰 물결들은 또 다시 정체되었다.

곧이어 두 번째 배, 용문비선 이호가 닿았다. 그곳에서 뛰어내린 이들은 녹의를 입은 장년인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허공으로 튀어 올라 뒤로 밀리는 사천무림련 사람들의 어깨를 밟고 또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사이에 두 손이 동시에 녹의에서 빠져나오고 수백 줄기 빛살들이 백의인들에게로 뻗어나갔다.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백의인들이 검은 물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삐이이익!

백의인들의 뒤쪽에서 귀청을 찢어놓을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쉬지 않고 전진하던 백의인들이 일제히 썰물이 되어 물러났다.

기세를 얻은 사천무림련이 쫓아가려는 순간 현상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멈춰라. 대오를 정렬하라.”

쫓아가던 사람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흩어져있던 동료들을 찾아 자리를 돌아갔다.

“정명단과 노호단 그리고 사대문파의 젊은이들은 중앙으로!”

그들이 명에 따라 물러나자 새로 투입된 당가의 장년인들과 아미의 장년승들이 전방으로 나서고 기존의 군룡전 고수들이 나뉘어 좌우에 포진했다.

“대오를 흩트리지 말라. 맡은 바 위치를 고수하라.”

그때였다. 좌측의 전나무 숲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대오를 정리하던 백의인들 앞쪽으로 포진했다. 사천무림련 사람들은 일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새로 나타난 이들이 아침햇살을 받자 금빛으로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첩동갑인들이었다. 그것도 이백이 넘는 수자였다.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은 순식간에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로 인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백여 명의 첩동갑인들. 그들의 모습은 창상산관에서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숨어있었더라도 그들 같은 중갑병이 금강포구까지 따라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근처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첩동갑인들의 존재는 사천무림련 수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금강포구에서 대기할 정도라면 첩동갑인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식골령은 물론 오는 길 어느 곳에서라도 기습을 가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공격받지 않았으니 오히려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같은 혼란을 느끼는 원인 중에는 운청산의 행사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만약 운청산이 백라천궁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정신없이 도주하는 사천무림련 사람들을 뒤에서부터 야금야금 해치웠으리라. 정명단은 물론 노호단과 뒤로 처졌던 사파 사람들은 벌써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으리라. 그리 되었더라면 지금처럼 팽팽한 대치 국면이 아니라 피와 혼란 가득한 끔찍한 상황에 이르러 있었으리라.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전장은 잠시 동안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 있었다. 누군가가 먼저 한 발을 움직인다면 그 즉시 수천 명이 동시에 움직여 피의 폭풍이 휘몰아칠 기세였다.

수뇌들 가운데 안색이 가장 나쁜 이는 당유연이었다. 조금씩 변하는 벽라천궁의 포진은 완전히 당가를 겨냥한 것이었다. 지난 번 싸움에서는 장창을 쓰던 첩동갑인들이 꽤나 두꺼워 보이는 방패를 든 채 사 척이 넘는 대도를 들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백의인들이 첩동갑인들을 방패삼겠다는 듯 그들 뒤에서 일렬로 늘어섰다. 장거리에서 위력을 발하는 당가의 암기, 특히 무형뇌전이 그 효용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다른 수뇌들도 그것을 눈치 챘다. 백라천궁의 포진이 당가에 대한 대비일뿐만이 아니라 사천무림련의 전술 자체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멀리서 당가가 적들을 곤경에 빠뜨리면 나머지 삼파가 돌진하여 깨뜨리는 것이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사용되어왔던 전술. 그런데 그것이 힘들게 된 것이었다.

당유연이 동생이자 암호전주인 당유평에게 명했다.

“첩동갑인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회선표 중심으로 공격하라.”

당유평이 급히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때 운녹산이 은밀한 눈빛으로 말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소이다. 당가가 주저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만.”

당유연은 그 속뜻을 이해하고 놀라서 눈을 치뜨며 운녹산을 주시했다. 그러나 운녹산은 냉정함을 유지한 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유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오. 그럴 수는 없소. 이곳 금강포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소. 독을 대량으로 사용할 수는 없소이다. 절대로.”

당유연은 말을 하는 중에도 계속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비가 옵니다. 멀리 퍼지지는 않을 것이오.”

당유연은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미혼산이라면 몰라도 독은 비에 쓸려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오이다. 강으로 흘러들어서도 안 되고, 사람들의 식수에 섞여서도 안 되는 일이오. 난 못하오. 당가가 그런 식으로 독을 쓸 수는 없는 일이오.”

“사천무림련을 다 죽이시겠소?”

운녹산이 지지 않고 당유연을 노려보았다. 그때 신수사태와 공명선사는 물론 현상자까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현상자가 못을 박듯 말했다.

“그것은 안 되는 일이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양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소이다. 그리고 응원군이 도착한 이상 우리가 불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오.”

모두가 반대하고 나서자 운녹산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그때 당유연이 눈을 치떴다.

“그렇군. 그 수가 있었어.”

모두가 당유연을 주시했다. 그가 말했다.

“잠깐 물러서겠소이다. 일단 부딪치더라도 다시 한 번 지금의 상태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는 우리가 무사히 철수 할 수 있도록 해보이겠소.”

현상자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복안이 있소이까?”

당유연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화발향전만큼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저들이 나를 악독한 사람이라고 여겨만 준다면 우리가 승선을 하더라도 감히 뒤를 치지 못할 것이오.”

“알겠소이다. 조처해 주시지요.”

당유연은 모두에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 당가 사람들이 타고 왔던 용문비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천무림련의 진형이 바뀌었다. 치고 나올 듯한 기색으로 반원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던 당가의 고수들이 흩어져서 반원진 곳곳에 골고루 퍼졌다.

백무극이 진형의 변화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흠! 첩동갑인을 뚫기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군. 일단은 버티겠다?”

백무극은 턱수염을 매만지다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천궁의 제자들이여! 우리는 오늘 역사에 기리 남을 대승리를 취하게 되리라. 그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닐 것이다. 본궁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역사에 남을 대장정의 제일보가 될 것이다. 나아가자. 적을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사천으로 나아가자. 쳐라!”

사천이 넘는 백라천궁 사람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천군께 영광을!”

둥둥둥둥둥둥!

백의인들 뒤쪽에서 대고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첩동갑인을 시작으로 백의인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점점 그 속도를 더해가며 사천무림련을 압박해가기 시작했다. 사천무림련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조금씩 물러서려 했고 그러다 보니 반원진을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쳤다

그때 사천무림련에서도 현상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사천무림의 정예. 숫자가 문제될 것은 없다. 기세를 잃지 마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반원진에서 가장 먼저 청성의 고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좌측으로 아미의 고승들이 나서고 우측으로 운가의 고수들이 한 발 나섰다. 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떨치니 검기와 도광이 수 장씩 뻗어나갔다. 순간 움찔했던 정명단이 조원들끼리 반원진 속에서 다시 오행십자진을 치고 각문파의 젊은이들이 용기백배하여 병장기로 바닥을 후려쳤다.

“가자!”

누군가가 소리치는 순간 사천무림련과 백라천궁의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안돼!’

운현산을 비롯한 여덟 영혼들이 동시에 운청산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운청산이 당우리의 시신을 옆에 두고 운공을 시작했다. 더 이상 천지자연의 기운을 흡수하지 못하는 운현산 등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백회혈을 빠져나와 활짝 핀 꽃송이처럼 팔방을 점한 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기운이 그의 전신을 거세게 휘도는 순간 운현산 등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천계의 빛이 흘러들지 않을 턱이 없는데, 여덟 영혼들은 아무런 기색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몸 안의 기운이 폭주하여 운청산과 그들을 이어주는 실 같은 기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운청산의 기운 속에 내포된 뭔가 섬뜩한 것이 기운을 따라 여덟 영혼들에게까지 퍼져 올라오고 있었다.

운현산 등은 기운을 계속 발산하여 거꾸로 올라오고 있는 차갑고 섬뜩한 기운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모자랐다. 벌써 그들의 영체를 침범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요?’

운추산이 절규하듯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거세게 올라온 기운은 어느새 그들의 목 아래까지 차올랐다.

‘진원지기마저 다 뽑아내는 것 같구나. 끝장이다.’

운현산이 포기를 하려는 그 순간 그 괴이한 기운은 다시 운청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살피던 그때, 그가 외눈을 떴다.

‘앗!’

모두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운청산의 외눈에 언뜻 혈광이 비친 탓이었다. 그러나 한 번 눈이 꿈쩍이는 순간 어느새 회색빛 무정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운현산이 직접 그의 눈앞으로 날아갔다.

‘괜찮으냐?’

운청산은 운현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운현산이 반응으로 이상하게 여겨 다시 살펴보니 운청산은 그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운현산 그를 지나 뒤쪽 먼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운청산이 일어섰다. 모두가 그의 머리 위에 모였다.

운현산이 생각을 전했다.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것 같아. 그저 칙칙하고 무거울 따름이야.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겠어.’

운명산이 맞장구치면서 의아함을 드러냈다.

‘정말 모르겠군.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우려하던 마경?’

순간 모두가 얼굴을 굳혔다.

그때 운청산이 움직였다. 그는 당우리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오호전을 빼내고 그녀의 가슴에서도 빼내었다. 오호전을 팽개치려던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운청산은 손끝에서 파란 기운을 내뿜어 가느다란 강철로 이루어진 오호전의 화살촉 바로 뒤쪽을 끊어냈다. 그리고 내력도 돋우지 않은 맨손으로 날카로운 화살촉을 꼭 쥐었다. 움켜진 주먹 사이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 같은 행동을 보고 있던 운현산 등은 다시 한 번 운청산의 생각을 읽어보려 했으나 그들이 느낀 것은 암울한 감정일 뿐 생각은 아니었다.

운청산은 다시 무릎을 꿇고 당우리의 비틀어진 시신을 바로 하여 하늘을 보고 눕게 만들었다. 두 손도 펴서 허벅지에 가지런히 붙여주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도 매만졌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다가 두 손 검지로 그녀의 입술 양 끝을 살짝 밀어 올렸다.

“안돼. 이게 아니지. 그 예쁜 미소가 아니야.”

그냥 슬픈 목소리가 아니었다. 넋두리를 듣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저은 운청산은 조심스럽게 당우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때 그의 눈길이 잠깐 그녀를 벗어났다. 그는 반쯤 들어올렸던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주변의 시신들을 향해 걸어갔다.

분시가 된 여섯 명의 백의인들을 봤고 세 명의 청의인들을 확인했다. 그들이 강정 부부와 오환인 것도 확인했다.

운현산 등은 운청산의 생각을 기대했다. 적어도 강정 부부가 근처에서 죽어있는 이유 정도는 짐작해 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약간의 슬픔 감정을 느꼈을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길 바깥으로 나가 두 손을 내뻗었다.

콰쾅!

두 개의 구덩이가 동시에 파졌다.

운청산은 강정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하나의 구덩이에 넣고 오환을 그 옆의 구덩이에 넣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장력을 일으켜 작은 흙구덩이 몇 개를 파고 그 흙들로 그들을 덮었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대한 바위를 발견하자 주저 없이 다가가 두 손으로 후려쳐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돌로 세 사람을 파묻은 구덩이 위에 얹었다.

운청산은 엉성하게 만든 무덤을 잠시 바라보고는 “나중에”라 말하고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백의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찢어진 옷들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더 가늘게 찢고 꼬아서 긴 끈을 만들었다.

운청산은 다시 당우리에게로 돌아가 그녀를 등에 업고 끈으로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 그리고 그녀의 두 팔을 자신의 몸과 함께 묶었다.

떠날 준비를 마친 운청산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화살촉을 다시 꺼냈다. 그는 피가 묻어있는 화살촉을 바라보다가 빗물을 받아 화살촉의 피를 씻어냈다. 오호전의 살대와는 달리 은빛으로 이상하게 반짝거리는 화살촉이었다. 그는 화살촉을 바라보며 입술을 실룩거리고 나서 다시 품속에 넣었다.

잠깐 동안 멍하게 서있던 운청산은 돌연 왼손 엄지와 검지를 들어 왼쪽 눈에 찔러 넣었다. 운현산 등이 또 다시 기겁하는 사이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얼마 전까지 눈이었던 안구의 찌꺼기를 끄집어내었다.

휑하게 뚫린 왼쪽 눈과 희색 빛으로 물든 오른쪽 눈이 동시에 금강포구 쪽으로 돌아갔다.

운청산은 무표정한 그 얼굴 그대로 금강포구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오직 죽이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다가간 사람들이 부딪치니 금강 포구는 인세가 아니라 지옥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처음 거리가 벌어져 있을 때 맞부딪쳤던 고수들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리고 하수들의 칼부림이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 사람에겐 눈이 있으나 병장기에 눈이 없는 탓이었다. 삼사 장의 검기와 강기들이 난무하다보면 원하지 않아도 같은 편을 베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공포가 흥분까지 곁들이게 되면 오직 자신 말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극한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하수들과 젊은이들이 전장을 지배하자 안 그래도 좁은 지역에 자리한 사천무림련이 점차 강변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시신들이 넘쳐나고 피는 빗물에 쓸려 강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현상자가 소리쳤다.

“밀어붙여라.”

그냥 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약속되었던 의미 깊은 소리였다. 그 순간 한동안 뒤로 밀렸던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젊은이들과 정명단 사람들이 급히 뒤로 빠졌다.

콰콰콰콰콰콰쾅!

대여섯 자 혹은 병기 그 자체가 난무하다가 갑작스럽게 수 장을 뻗는 검기들 수십 줄기가 사천무림련 진영의 선두에서 동시에 백의인들에게로 뻗어나갔다.

청성이 먼저 밀어붙이니 아미의 웅후한 장력과 날카로운 계도가 뒤를 이었다. 운가의 고수들이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기세로 상대를 압도하여 밀어버리자 당가의 암기가 사방으로 빗발쳤다.

갑작스럽게 전술이 변화하여 백의인들의 비명소리가 높아가고 진영이 흐트러지자 계속해서 독려하던 대고소리가 일시에 변했다.

두둥! 두둥! 두두둥! 두둥! 두둥! 두두둥!

대고 소리의 변화에 따라 백의인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그 사이에 사천무림련이 복잡하게 뒤엉켰던 진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원독에 찬 눈빛으로 백의인들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무기를 내뻗었던 이들이 안보인 탓이었다. 그 결과 사천무림련이 구축한 반원진은 처음의 삼분지 이 크기로 줄어들었다.

당가의 암기가 미치지 않는 오십 장 밖에서 새로이 진영을 정비하던 백의인들의 수자 역시 적잖게 줄어들었다. 두 진영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 백의인들의 수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숨을 고르는 듯 대고 소리가 조금 줄어든 채로 느리게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사천무림련의 뒤쪽에서 한 대의 화살이 외롭게 날아올랐다. 칠십여 장을 날아간 화살은 백의인들의 중앙에 떨어져 내렸다.

겨우 한 대의 화살이니 누가 거기에 겁을 집어먹을까. 그러나 잠시 후 바닥에 꽂힌 화살의 시괄 뒤쪽에서 시뻘건 가루들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와 삽시간에 방원 사여 장을 물들였다. 많은 백의인들이 그 가루들을 뒤집어썼다.

“끄으으으으윽!”

가루를 조금이라도 뒤집어 쓴 백의인들은 하나같이 목을 붙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독이다. 물러나라.”

백의인들이 일시에 화살로부터 사방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화살 주변에 나뒹굴면서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고 결국 피를 토해내는 삼십여 명을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사천무림련의 반원진 앞쪽으로 녹의 초로인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바로 당유연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적도의 수장은 들으라. 나 사천무림련의 호법이며 당가의 가주 당유연이다. 지금껏 양민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독의 사용을 자제하여 왔다. 그러나 공멸할 지경에 이른 지금 내가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이대로 끝장을 보자 하면 결국 그쪽도 우리 쪽도 모두 죽는 수밖에 없으니 오늘의 싸움은 이것으로 접고 승부를 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를 원하노라. 어찌할 것인가?”

충분히 전달될 만큼 우렁차고 느린 음성이었다. 그러나 백라천궁에서는 당장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유연은 오호궁을 든 백영담의 행동을 주시하며 손을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순간 반원진을 그리고 있던 사천무림련 사람들이 당유연이 서 있는 중앙을 비우고 좌우로 물러섰다. 바로 그 뒤쪽에 오십여 명의 궁수들이 전방을 겨냥하고 일제히 시위를 당긴 채 서있었다.

그때서야 백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하라는 말인가?”

당유연이 소리쳤다.

“나는 독가의 지존. 어찌 독을 사용하여 승리를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마는 지금 이 자리, 이 시간만은 쓰기를 주저하노라. 그대들은 본가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이백 장 밖으로 물러서라. 그리하면 우리는 독전을 쓰지 않고 이곳을 떠나겠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승선하기 전에 이백 장 안으로 들어온다면 독전을 날려도 좋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백무극은 주변을 살폈다. 우측의 전나무 숲, 좌측은 산이며 뒤쪽은 식골령으로 향하는 길이라, 아무리 봐도 지형 상 넓게 퍼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백무극은 어금니를 꽉 물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소리쳤다.

“받아들이겠다.”

그 한 마디가 울려 퍼지는 순간 백의인들이 일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백 장을 물러서자 사천무림련 측에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뛰어나와 청의와 녹의 그리고 도복과 가사를 입은 시신들을 거두어들였다.

삼백십여 구의 시신들이 짐짝이 되어 배에 실리고 사대문파 사람들이 승선했다. 배가 선착장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배가 닿기를 몇 차례 반복하자 강변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은 당가의 녹의궁수들뿐이었다.

녹의궁수들은 활에 화살을 걸어둔 채로 뒷걸음질하여 마지막 남은 배에 몸을 실었다. 그들마저 선착장을 떠났다. 그 순간 백의인들이 서서히 움직여 선착장 쪽으로 다가갔다.

백무극과 천기신사 그리고 내전과 외문의 문주들이 선착장까지 내려와 떠나가는 배들을 바라보았다. 이동침상에 몸을 맡긴 백무강까지 백무극의 옆에 이르렀다.

백무강이 이를 악다물고 말했다.

“그 한 놈 때문에 쓸데없이 희생이 컸습니다.”

그때 백영담이 뒤쪽에서 다가와 말했다.

“사상자가 구백이 넘습니다.”

백무극은 눈살을 찌푸리며 칠십 장 거리로 멀어진 마지막 배를 바라보았다.

“희생이 큰 것은 이미 지나간 일. 하지만 우리에게는 당장 저들을 끝장 낼 수단이 있지 않습니까? 영담! 신호전을 날려라.”

백영담은 왼손을 뒤로 뻗어 화살들을 더듬었다. 그리고 신호전을 꺼내어 시위에 걸었다. 불을 붙이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목을 꺾고 시위를 당겨 하늘을 향해 신호전을 날렸다. 근 백여 장을 솟구쳐 오른 화살이 허공에서 붉은 빛으로 토하면서 서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여도사 반정은 사형 음도 곽서음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몰래 산을 내려왔다. 어차피 할 일이 끝났으니 없다고 야단맞을 일은 아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산기슭을 내려오는 순간 불에 타는 듯한 화끈한 기운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운에 화들짝 놀랐으리라. 철석간담을 지닌 사람이라도 뒤를 돌아보기는 했으리라. 그러나 여도사는 그 기운의 정체를 아는 듯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흐흥! 얌전하던 산룡이 화룡이 되어 강으로 뛰어들었으니 그 뒤는 안 봐도 뻔하지. 아우! 찌뿌듯해. 저 짓거리하겠다고 도대체 얼마나 굶은 거야? 객고나 풀어볼까?”

여도사 반정은 염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산을 완전히 내려섰다. 그리고 길 중앙에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가야 적당한 물건이 있을까? 에, 이쪽은 백라천궁 사람들로 가득할 테고, 이쪽은 계족산 올라가는 길인데---. 백라천궁 사람을 꼬드겨 맛보면 나중에 문제 되려나? 하지만 이리로 가면 사람보기도 힘들 텐데, 어쩌지?”

미간을 찌푸리던 여도사 반정은 고갯길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건장한 남자가 알아서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가 오십여 장 앞까지 다가오자 반정은 안력을 돋워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미소가 감돌던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염병할! 뭐야? 애꾸잖아?”

반정은 낙담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녀는 점차 다가오는 사내의 주변을 살폈다. 보였다. 희끗한 기운들이 사내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어라! 신기한 녀석일세. 좀 못생겼으면 어때? 얼굴은 옷자락 덮어 두면 될 것이고---, 잘 꼬드기면 좋은 물건이 되겠어.”

반정은 구겼던 얼굴을 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반정은 다시 얼굴을 구겼다. 삼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등 뒤에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업고 있었다.

“늘어진 게 송장이군. 아유, 재수 없어. 흥! 그렇다고 저런 물건을 포기할 수는 없지.”

사내가 이십 장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미소를 가장하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반정은 당장 사내를 패죽이고 싶었다. 잠깐 사이에 그녀를 얼마나 괴롭혔는가. 그런데 또 다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대개 그녀가 한길에 서 있으면 추파는 던지지 않더라도 훔쳐보는 정도는 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내는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반정은 부글부글 끓는 내심을 가라앉히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염정미공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내의 앞길을 막았다. 순간 그녀의 은빛 나는 백발이 바람에 펄럭이듯 휘날렸고 그녀의 옷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리라. 염정미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반정은 향기에 휩싸이고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다. 그것이 그녀를 성스럽게 만들고 또 한편으로 요염하게 포장한다. 한 번 눈이라도 마주치면 사내의 이성은 그 즉시 마비되고 마니 취향이 특이하거나 요상한 방법으로 욕구를 푸는 사내가 아니라면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쪽같은 선비도, 목석같은 승려도 염정미공을 일으킨 그녀 앞에서는 개가 되고 말았다.

반정은 빛이 나는 듯한 젖가슴을 가린 듯 드러낸 듯 자랑하며 부드러운 눈빛과 따뜻한 미소로 사내 운청산을 맞이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누이처럼 따뜻하게 손짓하고 교태어린 여인처럼 화끈하게 품어주면 그뿐이었다.

이 장 앞에서 멈춰선 운청산이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반정은 또 다시 놀랐다. 그 눈에서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안달이 났다. 그냥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면, 또 주변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포기해 버렸겠지만 자신이 알아보는 것을 알아채고 숨어버린 여덟의 인간정령들을 확인한 후라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반정은 내심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요. 다쳤군요. 그리고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이리 오세요. 내가 편히 쉬게 해줄게요. 이리로 오세요.”

그녀의 손짓을 빤히 바라보던 운청산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비켜라.”

반정은 그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며 염정미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당신은 지금 따뜻한 손길이 필요해요. 이리로. 이리로 와요.”

살랑이는 손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숨결에서마저 향기가 뻗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운청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비켜라.”

반정의 따뜻한 눈길에 잠깐 동안 독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 더 참기로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왜 힘겹게 시신을 업고 있는 거지요? 내가 고이 묻어줄 테니 내려놓고 편히 쉬어요.”

순간 지금껏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운청산의 얼굴에 변화가 어렸다. 그러나 반정은 그 반응에 놀라 흠칫 물러섰다.

‘개자식! 내가 이렇게 비참할 정도로 애걸을 하는데 오히려 화를 내? 죽여 버리겠어.’

그녀는 내심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끝에는 차가운 한기를 실었다. 그 순간 꿈틀거리던 운청산의 눈이 다시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반정은 한음수(寒陰手)의 공력을 일으킨 손을 뒤에 감춘 채 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그녀가 조금 전 산에서 느꼈던 화룡의 기운보다 더 강렬한 화끈거림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뭐지?’

생각해 보니 청홍의 빛이 동시에 반짝이는 것 같던 손이 꿈틀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 정도 미약한 움직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을 느끼면서도 한음수를 내뻗으려던 반정은 문득 미간과 코를 가르고 지나가는 뜨거운 기운에 놀라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졌다.

“피?”

그 한 마디 말이 반정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평생 단 한 번 남자를 잘못 고른 덕에 다시는 남자를 안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운청산은 머리가 반으로 쪼개어진 여도사 반정을 보지도 않고 스쳐지나갔다. 이백여 장을 더 걸어 산모퉁이를 도니 금강포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백의의 시신들 수백 구가 줄을 지어 놓은 듯 가지런히 놓여있고 강변 쪽에는 살아 움직이는 백의인들이 강을 따라 구경꾼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멀리 강 중심에는 십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강을 내려가고 있었다.

운청산은 멀리 떠나가는 배들은 일별한 후에 다시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백의인들만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활을 지닌 사람을 찾았다. 있었다. 선착장 위에 서있는 몇 사람들 가운데 먹빛 끈 같은 것을 어깨에 걸친 이가 분명히 있었다.

운청산은 오직 한 사람만을 노려보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사천무림련 사람들을 실은 배가 벌써 강의 중심에 접어들어 이백여 장 이상을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바람은 없고 비가 내려 망정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으리라.

백무극은 갈증을 느꼈다. 실제로 목이 마르다기보다는 기다리는 것이 보이지 않아 속이 바짝 타는 것이었다.

백무극은 다시 배의 꽁무니를 바라보고는 천기신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리 더딘가? 너무 늦으면 심천신문과 오행신문의 준비와 기다림이 헛것이 될 수도 있네.”

천기신사 백진궁이 대답하기에 앞서 백무궁이 힘없이 웃으며 먼저 말했다.

“소군. 너무 속 태우지 마십시오. 지금의 속도라면 가볍게 뛰어도 배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늦어도 성공하기만 하면 무령과 함도 역시 어렵지 않게 일을 해낼 것입니다.”

백무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때 천기신사가 편안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조짐이 보이는군요. 저기 보시지요.”

천기신사는 배들과는 정 반대쪽인 금사강의 상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모두가 고개를 비틀었다. 계족산에서부터 금강포구까지 이어지는 산자락이 강에 이르러 고개를 숙이는 지점에 포말이 이는 듯 했다.

“그리고 저길 보시지요.”

천기신사는 다시 정면의 강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다른 곳은 별 다른 흐름을 보이지 않는데 유독 강 중앙에만 물결이 일었다. 강의 흐름을 거스르며 삼십 장 이상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백무극은 다시 포말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물결이 조금 더 거세어졌을 따름이었다.

“아!”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내지르고 눈을 부릅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물결이 잠시 사라진 것 같더니만 갑자기 굵은 물기둥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순간 포말이 일던 강변 근처에서 또 하나의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거의 십여 장 이상 솟구친 두 개의 물기둥이 서로를 향해 넘어졌다. 그리고 뒤엉켰다. 수십 개의 물기둥들이 솟구쳤다가 가라앉더니 물살 두 개가 뒤엉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용돌이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물살들이 계속 뒤엉키고 파동치자 그 여파가 강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우와!”

백무극과 주변의 인물들뿐만이 아니었다. 강을 따라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 하며 지켜보던 백의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두 개의 물살이 소용돌이를 일으킨 곳은 백여 장이나 위쪽이었는데 어느새 선착장 바로 앞쪽까지 파도가 치더니 이내 선착장 위로 튀어 올랐다.

백무극 등은 분분히 몸을 날려 물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번 성이 난 물결들은 선착장을 넘어 수천의 백의인들이 늘어선 강변 위쪽까지 솟구쳐 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경이로운 광경에 넋을 잃은 그때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소란이 일고 백의인들이 돌아섰다.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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