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79)

구름이 낀 듯 달은 보이지 않았다. 당가의 녹의 한 벌을 빌려 입은 운청산은 초지에 납작 엎드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적진과의 거리는 겨우 백여 장. 곳곳마다 횃불을 환히 밝혀놓은 터라, 안력을 돋운 운청산의 시력이라면 사람의 성별 정도는 능히 구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적진은 조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 별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 저들이 과연 희로애락을 아는 사람들인가? 저 정도만 해도 대략 사오백은 될 것 같은데 어찌 떠드는 사람들 하나를 볼 수 없단 말인가? 거기다가 저 정도 인원이 여덟 단위는 족히 될 것 같으니 정말 많군. 그런데 도대체 수뇌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사천무림련의 수뇌진들이 머물던 그 막사 역시 살폈지만 상대의 수뇌들이 머물고 있다는 확증은 잡지 못했다. 그가 확인한 것은 대강의 인원수와 금강포구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이들이 검은 가사의 승려들이라는 것 정도였다.

아쉬웠다. 조금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숙부들을 동원하여 좀 더 세세히 살펴볼 수 있을 텐데, 엄폐물은 없고 경계는 너무나 삼엄했다. 아무리 그라도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한계는 백여 장 정도였다.

아쉽지만 물러나기고 작정했다. 운청산은 공력을 일으켜 몸을 가볍게 하고 바닥에 엎드린 그대로 두 손으로 바닥을 밀었다. 한 번 미는 순간 그의 신형이 초원의 지면을 스치며 십여 장이나 뒤로 미끄러졌다. 연달아 스무 번 정도 바닥을 밀고 나니 그는 어느새 이백여 장을 물러나 적진으로부터 삼백여 장의 거리에 이르렀다.

운청산은 몸을 일으키고 다시 한 번 적진의 전모를 살폈다. 그러나 처음 그 근처에 이르렀을 때와 변동이 없었다.

운청산은 별 다른 소득 없이 돌아감을 다시 한 번 아쉬워하다가 돌아섰다. 눈앞에 검푸른 이해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운청산은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었다.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희끄무레한 것이 꼭 살덩어리 같았다.

운청산은 바닥을 기고 있는 살덩어리의 바로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흙의 신령과 같던 그 여인이 두 다리가 떨어져나간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기어 적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운청산은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뺨을 바닥에 댄 채 두 팔로 전진하던 여인이 마침내 그의 발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운청산의 정수리에서 여덟 영혼 모두가 튀어나와 여인의 주변을 감쌌다.

“많이 아프십니까?”

운청산이 물으니 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 아-알아?”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니 여인도 흐릿하게 꺼져가는 눈을 깜빡였다.

“아파. 아주 많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리신 것 같습니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군요.”

운청산은 무정함을 가장하여 담담하게 말했다. 여인은 몸을 비틀어 원래 발이 있던 곳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렇구나. 이제 어-어떻게 해야 되지?”

운청산은 다시 그녀의 하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땅 속에서 편히 쉬시렵니까?”

“나-나, 지-지금 드-들어갈 히-힘이 없어.”

여인은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고-고마워.”

여인은 힘을 잃고 다시 뺨을 바닥에 댔다. 운청산은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고통은 없을 겁니다.”

여인의 몸이 조금 튀어 올랐다가 이내 긴장을 풀고 늘어졌다. 운청산은 손에 청기를 돋워 땅을 팠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그 속에 눕혔다.

“역시 당신은 흙 속에 있어야 편해 보이는군요.”

운청산은 활짝 펴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나서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쳐 땅을 단단히 다졌다. 그리고 산에서 여인의 무덤까지 이어진 핏자국을 바라보다가 검을 꺼내어 앞으로 내뻗으며 산으로 치달렸다. 핏자국들이 흙들과 함께 검기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숲 앞에 이른 운청산은 뒤로 돌아서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여인의 무덤을 보며 중얼거렸다.

“짐승들도 당신을 훼손하지 못할 겁니다. 편히 쉬시길!”

그때 운경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잘 했구나. 청산!’

‘숙부님들을 해한 여인이라면서요? 괜찮으십니까?’

운경산의 전신이 일순간 환하게 밝아지는 듯 하더니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죽으면 그걸로 끝인가 보다. 우리에게 정은 남아있어도 원한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아.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과 다행이라는 생각이 교차할 따름이야. 온전한 정신을 지녔다면 가장 무서운 적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운청산이 미소를 짓자 운경산은 다시 한 번 전신을 빛 무리로 감쌌다가 입을 벌렸다.

‘일단은 들어가마. 필요하면 부르거라.’

운경산이 사라지자 운청산도 숲으로 올라갔다.

“어떻든가?”

운녹산이 대표하여 물었다. 운청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히 그가 본 것을 대답했다.

신수사태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승려? 혹시 흑의가사를 입었던가?”

운청산이 어찌 아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사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파불당도 한패였던가? 허 참! 어리석도다. 그들이 아무 것도 없는 본사를 쳤을 때는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어야 했건만---. 결국 본사를 친 것은 사천무림의 공분의 일으키려는 의도였던 것이구나.”

홀로 한 말이었지만 모두 들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간에 잘 되었습니다, 사태.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적어도 그들만큼은 상대해야 할 테니 관음사에 저지른 만행만큼은 징치할 수 있겠소이다. 더군다나 파불당이라면 우리가 능히 그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상대. 좋게 생각하시지요.”

운녹산의 말에 신수사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운청산에게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역시 믿을만한 사람은 자네뿐이야. 피곤한 줄 아네만 두어 시진에 한 번 정도씩 저들을 살펴주시게.”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모두에게 포권을 취해보이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믿을만한 사람?’

적정을 살피기 위해 나가달라 부탁하던 그때 듣고 두 번째 듣는 소리였다. 운청산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고개를 젓는 그 자체로 이미 자답은 얻은 것이리라.

운청산은 절로 드리워지는 씁쓸한 미소를 아주 쉽게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워버렸다. 십여 장 앞쪽에서 당우리가 기쁜 듯이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사천성 중남부의 당가타 북쪽에 자리한 학영산(鶴靈山). 그리 크지 않아서 보는데 부담이 없는 산이었고 학이 날개를 펼쳐 마을을 포근히 감싸는 듯한 산세였다.

누군가 그 산의 정상에서 당가타를 내려다본다면 풍수를 모른다 해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리라. 학영산의 몸통이 북풍을 막아주며 활짝 편 두 날개가 당가타의 동서를 부드럽게 감싸준다. 중원의 젖줄 장강이 마을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큰 강이긴 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조차도 큰 흠이 되지는 않으리라.

그곳 학영산의 외진 곳에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겨우 축시 말경이니 부지런한 사람들조차 아직은 잠에서 깰 때가 아니었건만 하나 둘씩 모여든 사람들은 근 삼백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차림을 보면 같이 어울릴 만한 부류가 아니었다. 부유한 유람객의 모습을 한 자도 있고, 파발마의 차림의 농부 혹은 어부의 모습을 한 자도 있으며, 사냥꾼과 한량 그리고 건달의 모습을 한 자들도 있었다. 완벽한 부조화가 느껴지는데도 사람들은 한 점 어색함 없이 서로 섞여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죽모를 쓴 채 파발마의를 입은 장년인을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리듯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모두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 각 정도가 흐른 후, 두 명의 장대한 사내들이 올라왔다. 파발마의 장년인은 그들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두 사내가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새로 합류한 두 사람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모두에게 말했다.

“당가의 주력이 어제 새벽에 이미 당가타를 떠났다고는 하나 당가가 괜히 당가임을 모르지는 않을 터. 죽음으로 임무를 수행하라. 가라!”

사람들은 일제히 불룩한 배를 쓰다듬고서 낮게 외쳤다.

“천군께 영광을!”

그들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삼삼오오 산을 내려갔다. 남은 이들은 사냥꾼 차림의 두 중년인들과 명령을 내린 장년인 뿐이었다.

장년인이 두 사람을 직시하며 말했다.

“오늘은 한 마리의 전서구도 당가타를 떠날 수 없다. 실수하지 말도록!”

두 사냥꾼들이 자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년인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고 말했다.

“먼저 가마.”

두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편히 가십시오.”

장년인은 아무런 말없이 돌아서서 산을 내려갔다.

“후우! 내가 당가 사람이 된지도 육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오늘처럼 불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가슴이 격하게 뛰는 것일까?”

노파는 이불을 젖히고 침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불효막심한 놈! 죽을 날을 받아놓은 이 늙은 어미의 마음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다니---.”

노파의 이름은 하수원(夏秀嫄)이었다. 당가의 가주 당유연이 유일하게 허리를 접고 어리광을 부리는 인물이었다. 나이가 구십이 되도록 꼿꼿한 허리를 유지한 채 며느리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당가타의 성모였다.

노태태 하수원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감! 빨리 와서 데려 가시오. 강한 척은 혼자 다 하시더니만 나만 혼자 남겨 놓고 이게 뭡니까? 벌써 오 년이나 지났습니다.”

끌끌거리며 미소 짓던 하수원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쇠뭉치가 철커덕거리는 소리, 현금 한 줄을 계속 탄주하는 듯한 소리, 그리고 함성소리와 비명소리.

“영감 오시려나 보구나.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하수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아아악!”

하수원은 옆에서 지른 듯 또렷한 비명소리에 놀라 눈을 치떴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순간 우당탕 소리가 나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노태태. 노태태. 피하셔야겠습니다.”

침의 차림의 젊은 여인 두 명이 녹색 가방을 어깨에 사선으로 맨 채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피하다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두 여인이 너무 느긋한 하수원의 태도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저-적도(賊盜)가 난입했습니다.”

하수원이 그때서야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적도라니? 십면매복이 발동되지 않았단 말이냐?”

“적도가 동갑괴인들입니다. 쇠뇌마저도 퉁겨내니 금용암기를 쓰기 전에는 제압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하수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용암기는 가주의 승인이 없이는 함부로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가문이 위기에 처했는데 금제라고 사용을 주저한다면 바보같은 일이리라.

“가자!”

하수원이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뒤가 아닌 앞으로 움직였다.

“노태태!”

“시끄럽다. 내가 이 집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이더냐? 앞장 서거라.”

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하수원의 양팔을 부축하고 몸을 날렸다. 그녀들도 당가의 며느리들, 한 번 몸을 퉁기자 하수원을 부축하고도 삼 장씩이나 움직였다.

별당에서 내원으로 나서자 아비규환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만 같았다. 오십여 명의 첩동갑인들이 일곱 자에 달하는 극을 휘둘러 달려드는 여인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뭐 하느냐? 금용암기를 써라!”

하수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여인들과 호원무사들이 일제히 첩동갑인들로부터 물러서서 녹색가방에 손을 넣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새로 모습을 드러낸 침의 차림의 여인들이 일제히 하수원의 좌우에 서서 가방 속에 손을 넣었다.

첩동갑인들이 달려들었다. 여인들은 냉정한 눈빛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조준하여 무형뇌전과 노룡분화통(怒龍噴火筒) 그리고 소골산혼세침(銷骨散魂細針)을 발사했다.

여인들의 손에서 번개가 튀어나가고 꺼지지 않는 불꽃이 솟구치고 새털 같은 침들이 날아갔다. 당가 사람들을 무차별 도륙하던 첩동갑인들이 처음으로 비명을 토하고 뒤로 물러섰다.

첩동갑에 불이 붙어 어찌할 줄 모르고 물을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통으로 무형뇌전을 맞아 그대로 꼬꾸라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유일하게 구멍이 뚫린 눈 부분에 소골산혼세침을 맞고 첩동갑만 남긴 채 핏물이 되어 버렸다.

사방에서 다가서며 첩동갑인들을 중앙으로 내몰던 당가인들과 당가의 여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던 첩동갑인마저 사지를 펼친 탓이었다.

하수원은 슬픔과 분노를 함께 머금은 눈으로 사방에 흩어진 시신들과 핏물을 바라보았다. 노안에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무엇했더냐? 사람이 이렇게 죽어 가는데 그깟 금제에 매여 있었단 말이더냐? 멍청한 것들!”

당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과연 명불허전! 주력 구 할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첩동갑인 오십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우다니 역시 당가는 대단하구려.”

말이 끝나는 순간 무표정한 장년인이 내원으로 통하는 문 위에 내려서며 하수원을 내려다보았다.

하수원의 좌우에 있던 여인들은 물론이고 그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장년인에게로 손을 내뻗으려 했다. 그때 하수원이 양팔을 벌려 모두를 제지했다.

“그대가 누구이건데 이 야심한 시간에 본가를 난입하고 행패를 부리는가? 그것만 말해 준다면 오늘은 고이 보내주겠네.”

장년인은 하수원을 직시하며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노태태. 대답할 수 없는 건 묻지 마시오. 내가 노태태께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줘서 고맙다는 것이오.”

장년인은 하수원에게서 눈을 떼고 미소를 지으며 대청주변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순간 하수원이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흩어져라.”

“늦었소.”

장년인이 소리치는 순간 사방에서 혼강룡이라 불리는 공들 수십 개가 날아왔다.

콰콰콰콰콰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사방에서 담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수원을 덮쳤던 여인들이 피를 흘리며 옆으로 구르는 순간 기둥 뒤에 숨었던 여인들이 힘겹게 다가와 하수원을 부축했다.

그 사이에도 암기가 나르고 비명이 흘러나오고 도광이 뻗어나갔다.

장년인이 하수원을 향해 달려갔다. 주변의 사내들도 그의 좌우를 따랐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인들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암기들은 둥그렇게 휘도는 붉은 도광에 막혀 바닥에 떨어졌다.

장년인은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는 하수원에게 냉소했다.

“노태태, 오늘은 고이 보내준다 하셨소? 과연 당가타의 성모답게 자비로우시구려. 허나 사람 잘못 보셨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만이 자비에 감사할 줄 안다오. 난 아니란 소리지.”

하수원은 도를 비켜 드는 장년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동료의 희생을 발판 삼는 너희들의 심성을 보아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려 할 터. 그렇다면 너희들도 결국 내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것도 오늘 안에.”

“임무를 다 할 수 있다면 상관없소이다.”

하수원이 어서 죽이라는 듯 차분히 눈을 감자 도기가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장년인은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샅샅이 뒤져라. 암기고와 독고를 찾아내.”

장년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곳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폭발음이 들리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연기가 앞을 가렸다.

사천무림련이 고립된 지 사흘째가 되는 날 아침, 숙영지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 정명단 삼향 일조의 막사 안에서 세 사람이 맨바닥에 앉아있었다. 바로 백무극과 우상 백무강 그리고 천기신사 백진궁이었다.

“오늘 밤이 아니면 내일 낮일 텐데, 언제일까요?”

백무극이 묻자 백무강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밤이면 좋겠습니다만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소군. 하지만 곧 금사강에서 연락이 올 것입니다.”

백무극이 찡그린 가운데 웃는 얼굴로 물었다.

“밤이면 좋겠다니요?”

백무강이 백진궁을 바라보며 웃었다. 백진궁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직접 부딪치면 우리의 손해도 작지 않을 터, 일단은 보내고 뒤를 쫓아야 하는데 낮이면 표 안 나게 놓아 주기가 곤란한 까닭입니다.”

백무극이 깜빡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영담입니다.”

백영담은 대답도 듣지 않고 들어섰다. 막사 위쪽에 머리가 닿았다. 그는 백무강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전서를 건넸다.

“응? 금사강이 아니라 본궁에서?”

백무강은 의아한 눈빛으로 백무극과 백진궁을 보고서 전서를 개봉했다.

“허! 이런 일이?”

모두가 궁금해 하자 백무강은 전서를 돌렸다. 백진궁이 소리 내서 읽었다.

“당가와 아미로 간 형제들 육백 모두 전사. 당가는 완전히 불타올랐으나 아미의 피해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침. 예견한 자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됨. 그쪽의 일이 성공하기를 기대함. 곤란하군요. 이렇게 되면 완벽한 성공이 아니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것 같습니다.”

백무극과 백무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강이 말했다.

“음도의 일은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며? 잘 될 거야.”

그때 또 다시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소군. 저흽니다.”

백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기다리게. 좁으니 우리가 나감세.”

모두가 나섰다. 소불과 혈응이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어찌 되었는가?”

소불이 대답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 깃발 하나만 꽂으면 된답니다. 심천신문주께서도 만반의 준비를 끝내셨구요.”

백무극이 백진궁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했다.

“말 그대롭니다. 산룡을 구석에 몰고 결박하여 잔뜩 화나게 만들어 둔 것 같습니다. 깃발 하나 꽂는 순간 결계가 풀리면서 노룡이 강으로 뛰어들겠지요. 그리되면---.”

늘 표정이 없는 백진궁이 입가에 가는 미소를 그렸다. 백무강과 백무극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창두봉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회색빛 구름이 모여들더니 낮이 되자 공기가 수분을 가득 머금었다.

이틀 밤을 한뎃잠을 잔데다가 최소한의 음식으로 허기를 메우고 그나마 오늘 아침은 칡뿌리조차 구하지 못해 먹지도 못했다. 거기에 비가 올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까지 거들자 사람들은 우울한 심정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강정과 문취옥마저도 만사가 귀찮은 듯 큰 바위 뒤에 붙어서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가만히 사람들을 살펴보면, 활기를 잃지 않은 이들은 단 두 사람뿐인 것 같았다. 바로 당우리와 운청산이었다.

당우리는 자신이 전장에 나온 이유를 자각하고 정명단을 두루 다니며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겠다고 법석을 떨었고, 운청산은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품속을 뒤져 옥소를 꺼내어 운청산에게 건넸다.

“지금 불어달라는 뜻이오?”

당우리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운청산은 주변을 둘러보며 난색을 표했다.

당우리가 말했다.

“아름다운 곡이 아니라 신나는 곡, 기세를 돋울 수 있는 곡을 들려주세요. 이렇게 늘어져 있어서야 싸울 수가 없잖아요?”

운청산은 당우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싶어 곡들을 떠올렸다.

‘늘어진 와중에 갑자기 빠른 곡조를 부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을 폭급하게 만들겠지? 바른 선곡이 아니리라. 우선은 편안하게, 그런 후에 힘차게.’

운청산은 선곡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옥소를 입으로 가져가 눈을 감았다.

봄날의 부드러운 아침햇살과 같은 기운을 띄고 옥소를 벗어난 소리는 바람을 따라 산정을 누볐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이들이 찌푸린 얼굴을 펴더니 운청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햇살이 조금씩 따뜻해져 만물을 비추고 습기를 거두어 갔다. 꽃잎에 이슬 사라지니 꽃들이 무거움을 벗어나 활짝 미소 지으며 향기를 뿜어냈다. 때때로 뭉게구름이 장난스럽게 햇살을 가로막아도 해는 곧 얼굴을 내밀고 다시 따뜻한 온기를 전했다.

춘일조천하(春日照天下)가 끝나자 사람들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다음 곡을 기다렸다.

운청산은 기대에 부응하듯 다시 옥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옥소에서 발해진 소리는 힘찬 말 울음소리.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음은 격정적이며 자유분방했다.

천마종웅가.

대개는 사람이 말을 택한다 하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구는 스스로가 주인을 택한다 했다. 소곡은 자유분방하게 초원을 뛰어다니던 천마가 사로잡혀 주인과 하나 되기까지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었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뿜어내는 천마가 사로잡혔다. 허공으로 튀어 올라 등에 오른 이들을 떨어뜨리고 밟아버릴 듯한 기세를 드러냈다.

곧 이어진 곡조는 눈빛 하나로 자신을 압도하는 영웅을 만나 등을 내어주는 굴종의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영웅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천지를 뛰어다니는 기쁨이 이어지고 그 주인과 함께 조화의 경지에 이른 환희가 느껴졌다.

운청산이 옥소에서 입을 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늘어졌던 육신을 움직여 기운을 불어넣었다.

“봐요. 효과가 있잖아요.”

당우리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부대주. 요새는 그대를 부르는 것이 내 일인 것 같소.”

운교인이었다. 운청산은 표정을 가다듬고 돌아섰다. 운교인이 앞장섰다.

운청산은 그의 등을 바라볼 때마다 물어보고 싶었다. 이토록 예의가 바른 사람인데 왜 유독 나만을 그리 싫어했냐고. 지금 당장 내가 누군지 알면 어떻게 대할 것이냐고.

운청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정말 끝이라고 다짐했다. 이번 싸움만 끝나면 더 이상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고 당우리와 함께 좁지만 따뜻한 세상의 범부가 되겠다고 작정했다.

운교인이 운녹산에게 알리고 물러났다. 운녹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첫 곡은 모르겠고, 두 번째 곡은 천마종웅가였지 아마? 좋더구먼. 시기적절했어.”

운청산은 목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운녹산이 본론을 말했다.

“늘 자네에게 어려운 부탁만 해서 미안하네만, 자네의 경공이 남다르니 어쩌겠는가? 저들에게 가주게.”

운청산은 놀라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운녹산은 그가 놀라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을 흐릿한 웃음으로 드러냈다가 다시 말했다.

“적진에 들어가라는 것은 아니고 소리가 들릴 정도까지만 접근하여 적의 수괴를 불러내고 이것을 전하면 되네.”

운녹산이 건넨 것은 돌돌 만 종이 한 장이었다. 그걸 전해야 한다면 결국 근접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운녹산은 이번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는 운청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가에 말해서 활을 가져가게.”

운청산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운녹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참 이상한 친구야. 다재다능한 만큼 감정도 풍부할 터인데 어찌 저리 표정이 없을까? 아까워. 참 아까워. 곤륜파가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이보시오!”

내공을 돋워 흩어지지 않게 소리를 지르니 그 목소리가 풀잎을 일직선으로 눕힐 정도로 컸다. 백의인들이 일제히 눈을 치뜨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마침내 운청산을 발견한 백의인들은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떴다. 근 이백 장 밖에서 지른 소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천무림련의 전령이오. 책임자를 불러주시오.”

따로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백무강과 백무극 그리고 백영담이 밖으로 나와 운청산을 찾았다.

백무극과 백영담이 동시에 눈을 치떴다.

“아! 저놈! 살아있었던가?”

백영담이 노기를 드리우며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백무극이 그의 팔목을 잡았다.

“아무리 막나간다 해도 전령과 사절은 죽이지 않는 법이야. 그런데 저 친군야? 환도를 죽인 곤륜검이?”

백영담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극이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역시! 환도가 곤륜검에 죽었다 했을 때 저 친구를 의심했었건만 네게 죽었다 하여 잊고 있었어. 맞아. 저 친구라면 능히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

그때 백무강이 소리쳤다.

“말하라.”

운청산은 대답 대신 종이가 묶인 화살을 쏘아 보냈다.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화살은 백무강으로부터 좌측 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꽂혔다.

“큭! 바람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가? 무공에 비해 활 다루는 솜씨는 형편없구먼.”

백무강이 미소를 짓는 순간 백의인 하나가 화살을 들고 왔다. 종이를 펼친 백무강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허어! 잘 됐군. 정말 잘 됐어.”

“뭔데 그러세요?”

백무극이 묻자 백무강은 아예 전신을 건넸다.

“아하하하! 내일 낮에 떠날 것이니 잡지 말라? 겨우 인질 이백십 명을 잡고 있다는 이유로? 크흐흐흐흑! 걸작이군. 하지만 무강 아저씨 말대로 정말 잘 됐군요.”

“그렇지요?”

백무강은 한동안 웃다가 운청산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다고 전해라. 대신 하나라도 죽는다면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전해라.”

“알았소.”

백무강은 대답하고 돌아가는 운청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영담! 저놈만은 내가 반드시 잡겠다. 약속하마.”

백영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잡겠습니다. 반드시.”

그때 백무극이 고개를 돌려 소불과 혈응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잡을 걸 잘못했지?”

혈응이 말했다.

“지금 가서 잡아올까요?”

소불이 비웃었다.

“자네가? 저 친구를? 주제를 알아야지. 자네가 매라면 저 친군 한 번의 날개 짓으로 구만리장천을 나르는 대붕이야. 일보에 이십 장 이상을 뛰는 녀석을 자네가 무슨 수로 잡겠다는 게야?”

혈응은 잠시 소불을 노려보았지만 결국은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백무극이 피식 웃고는 백무강에게 말했다.

“오늘은 거처를 옮겨야겠군요.”

백무강도 동의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운청산이 이끄는 대로 딸려가던 당우리는 갑자기 전신에 힘을 주며 저항했다.

“어딜 가려는 거예요? 나 싫어요.”

운청산이라고 당우리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을 까닭이 있을까. 그러나 그로서는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갑시다. 부탁이오.”

당우리는 수뇌진들이 있는 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요. 싫어요. 운 가가와 같이 있을 거예요.”

당우리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는 순간 운청산의 마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 눈을 외면하고 팔을 잡아끌었다.

“가지 않겠다면 마혈을 잡겠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갑자기? 납득할 수 있게 말을 해줘요.”

당우리가 주저앉아버렸다. 운청산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당우리의 원망어린 눈을 또 다시 외면했다.

운경산이 원망스러웠다. 괜한 것을 보고 괜한 것을 들어 알려주는 바람에 당우리를 거칠게 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운청산이 생각하기로는 당우리를 당유연의 보호 아래 놓아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운청산은 운경산의 말을 재차 떠올려보았다.

‘네가 결과 보고를 하러 갔을 때 네 아비가 무언가 감추는 것을 보았지? 네가 등 돌린 후에 궁금해서 살펴보았다. 마치 정명단의 오행십자진 같더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니 탈출시의 배치도였다. 청성이 전면, 좌우는 운가와 아미 그리고 중앙의 당가였다. 그리고 정명단과 노호단의 후면이었다. 별 의문을 가지 않았는데 그가 중얼거리더구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아깝지만 사대파의 희생을 줄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훈련 성과가 적지 않으니 한 동안은 막아줄 것이라고. 정확히 무슨 뜻이냐?’

운청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정명단 개개인의 무위는 사대문파에 비해 떨어진다. 경공 또한 마찬가지. 그런데 후위라면 추적을 하는 사람들에게 덜미를 잡힐 수밖에 없으리라. 결국 정명단은 싸워야 할 것이고 그 동안 다른 이들은 도주할 수 있으리라. 한 마디로 말하면 운녹산은 정명단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운경산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운청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우리는 그가 아니라 당유연의 옆에 있어야 더 안전했다.

운청산은 당우리 앞에 쪼그려 앉으며 사정조로 말했다.

“우리. 곧 탈출을 할 것이오. 싸우면서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 지금까지와는 천양지차라 할 수 있소. 더구나 난 정명단의 책임을 맡은 사람, 그대 한 사람만 돌볼 수는 없는 일이오. 지금껏 함께 해준 강 형님이나 형수님 또한 진법의 일부를 맡은 사람이니 우리가 끼어 있으면 방해가 될 수밖에 없소. 부탁이니 장인어른과 함께 있으시오. 가족들과 함께라면 난 안심할 수 있소.”

당우리는 운청산의 슬픈 눈빛을 보며 또 다시 자책했다. 전장이 생각과 이토록 다를 줄 알았다면 절대 따라오지 않았으리라. 적어도 사람을 죽일 결심이 서기 전까지는.

당우리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후에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같이 있어요. 떠날 때는 내 발로 아버지를 찾아갈게요. 조금만 더 같이 있어요.”

“정말 그리해 주겠소?”

당우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 합시다.”

운청산은 당우리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전해지도록 움켜쥐었다.

자시 초, 낮부터 날씨가 안 좋더니 짙은 먹구름이 끼었나 보다. 달빛은커녕 흐릿한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당유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으로 손을 뻗어 흔들었다.

“습기가 너무 많아. 비가 올 것 같은데. 그리되면 삼일취혼산이 제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인데---.”

운녹산이 다가와 나란히 섰다.

“덕분에 어둡소이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지요.”

그 순간 현상자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나섰다. 현상자가 말했다.

“그럼 가 볼까요?”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자가 먼저 일보를 내디뎠다. 순간 모든 수뇌진들이 움직였고, 근처에 있던 이들이 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푸스스스스! 푸스스스스! 푸스스스스!

풀잎 스치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일제히 창두봉 입구까지 내려가 모였다. 두어 발만 내디디면 숲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야할 지경이었다.

현상자가 곤술도인을 돌아보며 소곤거렸다.

“진인! 부탁하오이다.”

곤술도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청성 도사 네 사람과 함께 숲을 벗어났다. 네 도사들이 상관 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자 곤술도인은 그 뒤에 서서 등짐을 내렸다.

그의 움직임이 너무나 더뎠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을 입술 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때 곤술도인이 등짐에서 이것저것을 주섬주섬 꺼내어 늘어놓기 시작했다. 먼저 도복이 나왔고 다음에 관이 나왔으며 상아로 만든 듯한 한자 길이의 용각(龍角)이 나왔고 향과 향로와 쌀이 나왔다.

곤술도인은 옷을 벗고 새로 꺼낸 도복을 입고 관을 썼다. 그리고 용각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천천히 걸음을 떼어 칠성을 밟았다. 일곱 번을 이어 밟고 나니 곤술도인은 어느새 처음의 그 자리에 서있었다.

곤술도인은 이해호를 바라보며 용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람들이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풀잎 스치는 소리마저 피하려고 노력하건만, 아예 나발을 불 태세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저지할 수 없었다. 곤술도인의 볼이 이미 불룩해졌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 참을 지나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실눈을 떠서 곤술도인을 살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곤술도인은 분명히 용각을 불고 있었다. 그것도 일곱 번이나 달아 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곤술도인은 다시 흑강 쪽을 바라보며 일곱 번 용각을 불었다. 겨우 열네 번 소리도 나지 않는 용각을 불었을 뿐인데 그의 이마에서는 손톱만한 땀방울들이 방울방울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곤술도인은 용각을 내려놓고 한 자 길이의 향 두 자루를 들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향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흑강과 이해호를 향해 일곱 번씩 연달아 허리를 접었다.

“동방에는 이해용왕신, 서방에는 흑용왕신. 두 용왕신들께서는 이 자리에 친림하시어 불쌍한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소서.”

다시 일곱 번씩 절을 한 곤술도인은 쌀이 가득 담긴 향로에 향을 꽂고서 두 팔을 좌우로 벌린 채 눈을 감았다.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은 속이 바짝바짝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곤술도인이 행동을 멈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입술을 핥으니 그 또한 소리가 났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주변이 축축해지면서 옷이 전신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뱀과 같이 기다란 안개기둥이 좌우에서 동시에 다가와 곤술도인의 양손에 이어졌다.

곤술도인이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두 손에 닿아있던 안개가 곤술도인의 전신을 휘감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곤술도인은 긴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땀을 닦은 후에 등짐에서 괴황지를 꺼낸 후 오른손 검지를 이빨로 물어 피로써 두 장의 부적을 그렸다.

곤술도인은 두 장의 부적을 허공으로 들어올리고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해용왕신과 흑용왕신이 현신하시니 천지에 가득한 수령은 영접하라! 급급여율령!”

순간 두 장의 부적들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화르륵 타올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풀에서 솟고 나무에서 나오고 하늘에서 내려온 뿌연 안개가 온 천지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되었소. 안개가 흩어질 때까지는 반 시진의 여유밖에 없소이다. 서두릅시다.”

곤술도인은 말을 하면서 동시에 제구들을 챙겼다. 그가 등짐을 짊어지는 순간 현상자와 수뇌진들이 일제히 흩어졌고 곧이어 금강포구로 통하는 그 길로 구백 명의 사람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애초부터 짐이 될 것이 뻔한 인질들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백무강 등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흥! 내일 낮이라 하더니만 벌써 움직이시는가?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는데 성급하구먼.”

백무강의 독백을 들으며 흐릿한 조소를 머금었던 백무극이 백진궁에게 물었다.

“대단한데. 신사! 술법이겠지?”

백진궁이 가볍게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영무장안술법(靈霧障眼術法)이군요. 안개가 물방울 되어 흩어질 때까지는 반 시진 정도 걸릴 겁니다. 어찌 할까요, 어르신?”

백무강이 되물었다.

“해제가 가능한가?”

“일 각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만.”

백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백무극에게 말했다.

“너무 빨리 쫓으면 놓아주기가 곤란하겠지요?”

백무극이 빙긋 웃었다.

“일단 붙으면 대충 싸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서서히 따라붙었다가 급하게 몰아쳐 생각 없이 도주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붙는 것은 금강포구에서 단 한 번. 그리고 나머지 강에서---.”

백무강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진궁에게 말했다.

“놔 두세. 반 시진이라도 파불을 뚫고 나면 여유가 별로 없어. 어이쿠! 시작했구먼.”

모두가 청력을 돋웠다. 들렸다. 낮은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백무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너무 급하게 붙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자! 우리도 슬슬 따라갈 준비를 하세나.”

사람이 무너지니 하늘과 땅도 무너지고

봉이 휘돌고 창이 울었다. 피가 튀고 뇌수가 흩어졌다. 흑색가사의 승인들은 안개를 뚫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도사들과 비구니들에게 목숨을 구걸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나라연은 나찰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라연이 호되게 몰아쳐도 미소를 짓던 관음사의 비구니들도 나찰이 되었다. 결국 선두에서 길을 뚫기로 되어있던 청성의 도사들은 관음사 비구니들의 기세에 밀려 선두를 내어주고 말았다.

만약 신수사태의 일갈이 없었다면 사천무림련은 악착같은 관음사의 비구니들로 인하여 발걸음을 늦춰야 했을지도 모르리라.

그렇게 길이 뚫렸다. 사천무림련은 마지막으로 취화발향전을 일렬로 쏘아 길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달리고 또 달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이었다. 넘어지고 엎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백오십 리 길을 두 시진 만에 주파하게 만들었다.

운청산과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정명단의 하급무사들에게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이었으리라.

“동삼아! 달려. 멈추면 죽는다. 달려. 아이를 봐야지. 조금만 더 가면 식골령이다. 그것만 넘으면 돼! 가자!”

강정은 뒤쳐지려는 악동삼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악동삼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문취옥이 그의 등짝을 후려치고서 다시 그의 팔을 끌었다.

“개자식아! 죽으면 한 번 더 죽인다고 했지? 달려, 이 새꺄!”

“으악! 악! 악! 악!”

악동삼은 두 사람의 독려에 힘입어 악을 써가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한 광경은 비단 강정 부부와 악동삼 사이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배고프고 힘없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여기저기서 조금 더 나은 사람들이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가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평소에 툭탁대던 이들마저도 서로를 독려했다. 훈련을 통하여, 내기를 통하여 그동안 함께 구른 정이 남다른 탓이리라.

그러나 현실은 혹독했다. 식골령까지는 겨우 오십여 리. 그렇지만 산길을 올라야 했다. 아무리 완만하다 해도 지친 이들에게는 태산처럼 느껴지리라. 겨우 버티며 따라가던 이들이 발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문취옥은 힐끔 옆을 보고서 악동삼의 눈동자가 뒤집어지려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손을 뻗었다.

쫙!

악동삼의 얼굴이 도는 대신 돌아가려던 눈동자가 제 자리를 잡았다.

“정신 차려, 새끼야! 다 왔다.”

문취옥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악동삼은 눈물을 흘리며 발을 내뻗었다.

“비다! 비가 와!”

안 그래도 목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강정이 소리치니 사람들은 모두 하늘로 목을 꺾었다. 얼굴에 방울방울 맺힌 빗방울들이 제법 굵어졌다.

악동삼은 운이 좋게 입에 떨어진 비를 달게 삼키고 혓바닥을 굴려 입주변의 비를 핥았다. 그의 힘없던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았다. 바로 그 순간 그가 눈을 치떴다. 그리고 하늘로 뻗었던 두 손을 배로 가져갔다. 손이 척척하게 젖었다. 아직 비가 옷을 적실 정도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악동삼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배를 살폈다. 캄캄해서 아무 것도 안보였다. 그래서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때 귀신의 우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핀가?”

악동삼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앞을 가던 사람도 쓰러졌고 그 앞에서 걷던 이도 쓰러졌다.

“동삼아!”

강정이 목 놓아 불렀지만 악동삼은 일어서지 못했다.

운청산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알면서도 뒤돌아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칠흑 같은 어둠을 삼십 장 이상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운청산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백삼사십 장, 겨우 그 뒤쪽으로 무수한 발자국 소리들이 들렸다. 그것도 정명단 사람들과는 달리 가벼웠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언제 적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흘을 버텼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들의 시간에 맞춰 제때 식사하고 제때 쉰 사람들이었다. 거리를 좁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오히려 너무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의문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삼일취혼산을 살포해 둔 길을 어찌 뚫고 왔느냐는 것뿐이었다.

“먼저 가십시오. 조금이라도 지체시켜 보겠습니다.”

이정이 눈을 치떴다.

“아무리 자네라도 안 되는 일이야. 한 두 사람이 아니라고.”

운청산은 차분한 눈빛으로 이정을 직시하며 말했다.

“오는 길은 좁습니다. 다 상대할 필요 없지요. 죽겠다는 것이 아니니까 일단 먼저 가십시오.”

이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꼭 따라와야 하네.”

이정은 동료를 놓아두고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위했다. 식골령까지 오십 리에 금강포구까지 수십 리가 더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운청산이 죽는다면 자신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정은 몸을 돌려 세차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달려라. 다 쫓아왔다. 달려!”

이정의 독려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운청산은 눈을 부릅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것은 당신의 생각. 난 정명단의 부단주니 정명단만 생각할 것입니다.”

운청산은 몸을 퉁겨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백영담은 백무강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나아가며 귀를 기울였다. 낮은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흠! 소발로 쥐 잡은 격이네. 그냥 한 번 쏴본 건데---. 한 번 더 해 볼까?”

그가 전통에서 다시 화살 한 대를 꺼내려는 순간 백무강이 말했다.

“아서라. 공연히 시간만 지체돼. 이제는 뒷놈들부터 차근차근 잡아나가야 돼. 식골령을 넘기 전에 잡생각 못하도록 혼을 빼놓아야 된다.”

백영담은 잡았던 화살을 놓았다. 그때 앞쪽에서 돌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하게도 들려왔다.

파르르르르륵!

백무강은 걸음을 옮기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안력을 돋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리는 분명히 가까이서 들리는데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겨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 하나 때문에 사천에 이르는 병력을 멈춰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야?”

백무극이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파파파파파팡!

“크헉!”

그들의 바로 뒤쪽에서 연이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위다!”

모두가 걸음을 멈춘 채 위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검은 그림자 하나가 허공에 멈춰선 듯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사람들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짜증나는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파르르르르륵!

“왼쪽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향해 도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격타음은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파파파파파파팡!

시커먼 두 발이 허공을 난자하는 순간 수십 명의 백의인들이 피를 토하며 널브러졌다.

채챙!

근처에 있던 이들이 모두 도를 뽑았으나 그림자는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져버렸다.

용음진천!

곤륜대팔식 가운데서도 용정태극과 함께 가장 익히기 어렵다는 신법, 바로 태악도인이 어두운 동부 속에서 늘 운청산을 널브러지게 만들었던 그 신법이었다. 거기에 회련각의 난마천각과 육양수의 구룡십팔뇌격 그리고 용호풍운조의 천호만격이 이어지니 백의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널브러졌다.

백무극이 소리쳤다.

“이러한 신법은 곤륜대팔식밖에 없을 터, 바로 그놈이리라.”

정체를 알았다 해도 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과 사람이 나타나는 곳이 전혀 다르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영악스럽게도 공격이 가로막힐 수 있는 수뇌진에게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검조차 쓰지 않으니 더더욱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니 벌써 일 각이나 지체하고 있었다.

그때 백영담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오호궁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긴 후 돌아섰다.

“아아아악!”

이십여 장 밖에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백영담은 그 소리 쪽으로 시위를 틀고 또 기다렸다.

휘류류류류류!

운청산이 청룡구전을 펼쳐 불규칙하게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백영담이 즉시 시위를 놓았다. 용정태극을 펼치니 운청산의 신형이 움찔하는 순간 제자리에서 뒤집어졌다. 그의 머리가 있던 곳에 벌어진 두 다리가 나타났고 그 사이로 오호전이 바지 단을 찢으며 지나쳤다.

허공에서 휘돈 운청산은 삼십 장 밖에서 다시 화살을 뽑는 백영담을 발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모두 움직이지 마!”

백무강이 쩌렁거리는 목소리로 외치자 백의인들 모두가 바위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순간 백무강과 백무극은 물론 수뇌진 대부분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 백의인들의 머리 위로 내려섰다.

그러나 그 또한 의미 없는 일이었다. 다시 터진 비명소리는 백여 장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파드드드드드!

백무극과 백무강이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려 뒤로 날아갔지만 운청산은 또 다시 옷자락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있던 백무강과 백무극은 낭패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백무극이 말했다.

“벌써 일 각 반 이상 지체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는 놈을 잡을 도리가 없을 것 같군요. 작은 희생은 감수하고 그냥 전진하지요.”

백무강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앓는 소리로 말했다.

“그 방도밖에는 없는 것 같군요.”

두 사람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백무강이 소리쳤다.

“오로지 자신만을 지켜라. 그리고 무조건 나아간다.”

백무강은 화가 난 듯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숲길로 빠졌다가 다시 백무강 등의 백여 장 앞으로 나온 운청산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퉁겼다. 근 이각 정도를 지체시켰다지만 그가 입힌 피해는 미미했다. 이백 명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건만 백의인들은 냉정하게도 그 사람들을 놓아두고 계속 움직였다.

운청산은 쉬지 않았다. 빠졌다가 다시 건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인들은 부상자들을 놓아둔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힘이 빠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운청산은 다시 정명단의 뒤를 따랐다.

“후우! 후우! 후우!”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운청산은 목을 꺾어 하늘을 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제법 알이 굵어졌다. 몇 번 혀끝을 휘돌리자 일단은 갈증이 해소되었다.

운청산은 조금 더 빗물을 마시고 뒤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은 백이십여 장의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야가 조금씩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삼십여 장 정도밖에 안되든 것이 이제는 칠십여 장 앞까지 보였다. 시시각각으로 시야가 밝아질 것이다. 그리되면 추적 또한 빨라지리라.

운청산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몸을 퉁겼다. 계족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달리던 운청산은 갑자기 멈춰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일보에 십여 장 정도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각만에 정명단의 꼬리를 잡은 것이었다. 삼 각이 넘도록 움직인 거리가 채 사십 장도 못 된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되면 일 각도 못되어 잡힌다.”

운청산은 급히 몸을 날려 이정의 뒤에 붙었다.

“독려 하세요. 일 각이면 잡힙니다.”

이정은 반갑게 맞이할 여유도 못 갖고 소리부터 질렀다.

“식골령이 눈앞이다. 뛰어라!”

늘어진 발걸음들이 조금은 빨라졌다. 그러나 눈에 띄게 빨라지지는 않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군. 나도 배가 고파 어지러울 지경이네. 당장 적이 칼을 휘두른다면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운청산도 더 빨리 가는 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돌아서서 뒷걸음질쳤다.

“벌써 묘시 초는 된 것 같습니다. 날까지 밝아지면 큰일인데요.”

“어쨌든 가는 데까지는 가봐야지.”

이정의 무거운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운청산은 신형을 날려 정명단을 지나쳤다. 먼저 가버린 줄 알았더니 사대문파 사람들도 얼마 앞서가지 못하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끼기로는 정명단과 앞쪽의 꼬리 사이에 빈 공간은 겨우 백여 장에 불과했다.

‘지금 이 사람들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대를 위해 희생한다 해도 금강포구에 이르기 전에 맞닥뜨리게 되리라. 우리! 내가 어찌해야 하오? 외숙!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그때 멀리 앞쪽에서 기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식골령이다.”

그 목소리는 정명단 사람들에게까지 힘을 주었다. 사람들이 이를 악다물고 악착같이 걸음을 옮겼다.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빗방울마저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한때 사람을 뼈째 삼킨 대호가 있었다 하여 식골령이었다. 그 곳 초입이 보였다. 길 폭은 좁아져 삼십 장이 채 못 되고 계족이라는 이름처럼 좌우로는 오십 장 이상 높이의 뾰족한 돌산이 솟아 있었다.

금강포구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인 식골령을 눈앞에 두고도 운청산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 좁은 관문을 지나긴 했지만 바로 백여 장 뒤쪽에서 백의인들이 질퍽거리는 흙을 튕기며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운청산은 자신이 뒤에 남은 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어두웠다면 다시 한 번 교란시켜 보겠지만 시야가 백 장에 이르는 지금은 용음진천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운청산은 구십 장 앞까지 다가온 백의인들을 보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을 거꾸로 쥐어 땅에 꽂았다. 그냥 검만 찔러 넣은 것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린 터라 땅 속 십여 장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운청산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작은 원을 그리며 검을 휘돌린 후에 다시 자리를 바꾸어 몇 차례나 연이어 같은 일을 행했다.

백의인들이 오십여 장 앞에 이르렀다. 운청산은 한숨을 내쉬고 땅에서 검을 뽑았다.

“피를 보겠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피를 볼 거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난 대의가 뭔지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물론 죄악이겠지. 대가를 치를 거야.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원시천존!”

운청산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사십여 장 앞까지 이른 백의인들을 바라보다가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청기가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칠여 장에 이르는 검강이 뻗어나갔다.

그것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쉬지 않고 쇄도하던 백의인들의 선두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멈춰 섰다.

빗방울들이 운청산과 그의 검 위에서 두두둑 튕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청산은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써 눈썹에 고인 빗방울을 떨쳐냈다.

이마에 살기가 어렸다. 운청산은 서두르지 않았다. 살기가 맺히는 순간 그저 한 걸음씩 좌우로 움직였을 따름이었다. 그저 걷는 것뿐이었는데 백영담은 시위를 놓지 못했다. 그 순간 백무강이 앞으로 손을 뻗었고 다섯 명의 장년인들이 그의 뒤에서 튀어나왔다.

단 번에 십여 장씩 튕겨져 올라온 백의인들이 전면에서 흩어져 동시에 운청산을 향해 도를 내뻗었다. 운청산의 검이 바르르 떨리자 천둥치는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고 어느새 그의 전면에는 아홉 줄기의 푸른 기운들이 빗방울과 뒤섞였다.

구검조뇌벽!

사우팔절검의 초식들 가운데 다수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는 최강의 수법이었다.

수십 줄기 도기가 운청산이 펼친 검막에 부딪쳐 소멸되었다. 운청산은 오른발 뒤끝을 축으로 연달아 세 바퀴를 휘돌며 횡으로 검을 내뻗었다.

선풍도룡!

그가 쳐 놓은 검막마저 갈라버린 십여 장의 세 줄기 청강기는 단 번에 다섯 백의인들을 양단해 버렸다.

운청산은 시신들을 보지도 않고 무정한 눈빛으로 백무강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서서 그가 구멍을 뚫어놓은 곳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얼어붙어버린 것 같던 백무강과 백무극의 얼굴에 노화가 치미는 순간 운청산이 중얼거렸다.

“이 대협이 뭐라 하셨던가? 이성을 잃고 마귀가 되어 검을 휘두르지는 말라 하셨던가? 가능할 것 같지 않군.”

중얼거림이 끝나는 그 순간 운청산은 다시 백무강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른발을 들어올렸다가 세차게 바닥을 찍었다.

쿵!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수십 줄기의 흙기둥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기둥들은 제 각각의 굵기와 높이를 유지한 채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신형은 그 기둥들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우상 백무강의 직속으로 백라천궁 최강의 부대라 할 수 있는 백영무단의 고수 다섯 명이 겨우 한 번의 손놀림에 의해 분시가 되어버렸다.

백무강 등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운청산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백무극의 놀람은 극에 이르렀다.

검강을 십여 장에 이르도록 내뻗었다. 그것은 겨우 몇 개월 전에 봤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 펼칠 무공이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검환을 펼쳐도 칠팔 장을 능히 뻗어 내리라.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백무극 자신과 우상 백무강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지나야 했다. 사천무림련을 정신없이 뒤흔들어 놓아야 했다. 백무극은 굳어버린 얼굴을 펴고 대신 노화를 불어넣었다. 그때 엄청난 굉음이 들리면서 운청산의 주위로 크고 작은 흙기둥들이 솟구쳐 그의 신형을 가로막았다.

큰 기둥은 그 중심 폭만 해도 일 장은 넘을 것 같았고 높이는 더욱 놀라워서 오 장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흙으로 세운 기둥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백무극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저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뭐 하자는 거야?”

바로 그때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바로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유쾌해. 아주 통쾌해. 저런 식으로 삼재금벽진(三才禁壁陣)을 치다니---. 하하하! 여러 사람 입에 오르니 뭔가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한 걸물이구만. 기발해. 아주 좋아.”

누가 있어 자신과 백무강을 앞에 두고 그런 대소를 터뜨릴 수 있을까,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던 백무극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휘둥그렇게 치뜨고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소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감정을 아끼기로 유명한 천기신사였던 탓이었다. 어지간해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천기신사가 눈물이 고일 정도로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백무강이 백무극에 앞서 물었다.

“이보게, 신사. 저것이 무엇이건데 자네를 이렇게 웃게 만드나? 내가 보기에는 금방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흙기둥들에 불과한데---.”

천기신사는 손을 들어올려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맺힌 웃음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대답에 앞서 백영담의 어깨를 두드렸다.

“영담! 자네 오호궁이면 저 정도 흙기둥은 맞추지 않아도 부셔버릴 수 있겠지? 해 보게.”

백영담은 지체 없이 전면에 드러난 세 기둥 가운데 중앙에 자리한 흙기둥에 화살을 날렸다. 빗방울들을 연이어 터트리면서 날아간 화살은 그 기둥에 맞는 순간 철벽에 부딪친 듯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저게 뭔가?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신사?”

백무극이 돌아보자 백진궁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저것을 일러 삼재금벽진이라 합니다. 보이는 것만큼 간단한 진법이지요. 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최강의 방어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저것입니다.”

백무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로서는 처음 듣네만?”

백진궁이 다시 웃었다.

“원래 용호파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만 저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처럼 대개의 술사들은 무공이 따라주지 않으니 포진법을 안다 해도 별무소용이지요. 직접 들어가서 포진을 살펴봐야 알겠습니다만, 저 진의 기본원리는 간단합니다. 땅을 대표하는 토와 하늘의 응답을 뜻하는 비를 매개로 설치한 금벽진이지요. 파진은 안에서 하면 단칼에 끝낼 수 있다 들었습니다. 다만 먼저 저 친구를 쓰러뜨리거나 진 밖으로 밀어내야 가능합니다. 천지인 가운데 천지는 영원하니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뿐. 결국 인간의 의지가 무너지면 삼재도 무너지고 결국 저 진도 흙기둥으로 돌아갈 따름이겠지요.”

백무강이 다시 물었다.

“좌우로는 못가나?”

백진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기에는 기둥들이나 진의 뒤쪽과는 완벽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갈 길은 오직 한곳뿐입니다. 저 친구를 지나야지요.”

백무강은 한숨을 내쉬고 진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들어갈 수는 있단 소리군?”

“큰 기둥이 몇 개로 보이십니까?”

백무강이 진을 다시 살폈다.

“여섯 개구먼.”

“그렇습니다. 삼재, 역삼재하여 모두 여섯입니다. 또한 육합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그 가운데 전면 좌측의 가장 높은 기둥이 천(天)을, 우측의 가장 굵은 기둥이 지(地)를, 그리고 우측에 치우친 중앙 기둥이 인(人)을 상징하니 어디로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땅과 인간사이지요.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그 한곳. 결국 다수가 그를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무강은 오 장 정도 되는 기둥 사이로 빤히 보이는 운청산을 노려보다가 결국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허허허! 한 놈에게 막혀 사천이 꼼짝도 못하는 우스운 꼴을 당한단 말인가? 이 내가?”

생각해 보니 두 번째였다. 점창의 마지막 장문인 창현자가 있었다. 그것도 바로 이 장소였다. 그 한 사람에게 막혀 이 각이라는 긴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때와 또 달랐다. 그 당시에는 사안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일을 앞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일개 곤륜의 어린 제자.

백무강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순간 백영무단의 고수 십여 명이 다시 앞으로 튀어나갔다.

“괜찮니?”

당우리의 곁으로 다가온 당명인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활짝 웃음 지으며 힘차게 걸음을 내디뎌 건재함을 드러냈다.

“쳇! 삼사 년 전 생각을 못하는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더 고수였어.”

당명인은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암기 다루는 일만큼은 분명히 당우리가 나았다. 실제로 그녀의 지금 수준을 따진다 해도 웬만한 정명단의 천급무사에 버금가리라. 단지 그녀에게 없는 것이 있다면 모진 마음뿐이었다.

사실 당명인이 걱정하는 것은 당우리의 체력이 아니었다. 이제는 들리지 않는 정명단의 발소리 때문이었다.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서 동생의 마음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놀랍도록 활기에 차 있었다.

“내 걱정 마.”

당명인은 목소리마저 활기찬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설마 운남까지 따라왔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래서 운청산을 찾아가 반쯤 죽여 버릴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당우리로부터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는 어쩔 수 없는 동생의 가장 가까운 오빠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명인은 사천으로 돌아갈 때까지 운청산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아버지 당유연에게 함구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당우리 또한 달리는 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당우리는 내심 울고 있었다.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정명단의 발걸음 소리 때문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당우리는 오히려 밝은 얼굴을 드러냈다. 활기차게 느끼도록 피곤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당가 사람들 눈에서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운청산은 묘한 기분이 되어 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이론적으로야 어찌 변화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의 모습을 보니 그 느낌이 너무나 생소했던 것이었다.

신비하면서도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가 진을 설치한 장본인이니 그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간의 크기를 측량할 수 없었다. 바닥은 푸른 초원으로 뒤덮여 있고 멀리 산과 하천이 보이며 한정 없이 먼 하늘 위에는 작은 태양이 부드러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운청산은 아예 몸을 돌려 뒤로 한 걸음 걸었다. 주변의 풍광이 일순간에 바뀌어버렸다. 끝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 있고 눈앞에는 방아 찧는 옥토끼가 보일 듯한 만월이 떠있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바로 옆에 있던 만월이 시선을 따라 흘러 그 모양새가 변했다. 점차 작아지고 반월이 되고 망월에 가까워져 끝내는 사라졌다.

운청산은 산책을 하듯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비바람 불고 천둥 번개가 내려쳤다. 그의 걸음걸음에 따라 시시각각 풍광이 변했다. 천지자연의 모든 조화가 한 곳에 모여 운청산의 움직임 따라 변화하는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세상천지가 아무리 뒤바뀐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운청산 그만큼 언제나 혼자였다. 아득한 세상에 혼자만이 존재하는 느낌. 아무리 끌어들이려 해도 공간은 당우리나 외숙 그리고 그가 아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

운청산은 고개를 저어 그 느낌을 부인했다. 그때 그의 눈앞에 운경산이 나타났다.

운청산은 너무나 반가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운경산이 말했다.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그들이 움직인다.’

운청산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그가 만든 공간에서 오직 두 곳, 전면의 한 곳과 후면의 한 곳은 세상과 통해있는 문이었다. 마치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그곳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운청산은 투명한 장막과 같은 그 창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경관이 또다시 급변했다. 이번에는 곤륜의 정상 같은 설원 위에서 서있었다.

그때 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연이어 투명한 장막을 찢어놓으며 안으로 몸을 날렸다. 운청산은 본능적으로 검을 내뻗었다.

유성만건곤!

검첨이 바르르 떨리면서 토해내는 수십 줄기 청기가 운청산의 눈앞에서 휘날리는 눈보라를 휘감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매서운 눈빛으로 도를 내뻗으며 진 안으로 들어섰던 백의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찢어질 듯 부릅떴다. 운청산과는 달리, 그들이 막 진 안에 들어온 순간 본 것은 밝고 따뜻하나 한편으로는 쓸쓸하게 느껴지는 대평원이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운청산이 외롭게 서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눈보라를 동반한 푸른 유성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투투투투퉁!

백의인들은 유성만건곤에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뒤로 퉁겨났다. 그들은 다시 투명한 장막을 찢고 진 밖에서 나뒹굴었다.

운청산은 고개를 들어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백의인들을 외면했다.

그의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해서 백의인들 정도의 사람들만 오기를 원했다. 그들 정도라면 지인(地人) 사이의 문 앞에 시체로 산을 쌓아도 별 다른 힘을 소모하지 않으리라. 충분한 시간을 벌고 물러설 수 있으리라.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가 쉽게 죽이지 못할 사람이 오기를 원했다. 두 손에 피칠갑을 한 채로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운청산은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백의 노인이 한 걸음 내딛는 것을 보았다. 그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적어도 그가 사천무림련의 전언을 직접 들을 최상부의 사람임은 알고 있었다.

운청산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노인 정도의 기파라면 쉽게 승부가 나지 않으리라. 더불어 끝이 없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좁은 삼재금벽진 안에 쉽사리 다른 이들이 끼어들지 못하리라.

‘조금만 더 견디면 되겠지. 일 각이 넘게 견뎠으니 이 각 정도만 더 벌어준다면 능히 금강포구에 이르리라.’

운청산은 고개를 돌려 진의 후문이라 할 수 있는 투명한 장막을 힐끔 보았다.

질질 끌리는 발걸음들이 동시에 모퉁이를 돌았다. 뭔가 다른 느낌. 시야가 확 트이고 어슴푸레 흔들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강이 보인다.”

누군가가 외치는 그때서야 이정은 정신을 차렸다. 뒤로 쳐지는 사람들을 후려치고 독려하여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린 순간에야 뒤를 걱정하게 되었다.

돌아보았다. 어느새 동이 터 제법 멀리까지 보이건만 바로 등 뒤까지 쫓아온 듯 하던 추격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찌된 것인가 하여 주변을 둘러보는데 운청산이 보이지 않았다.

이정은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운 가가! 운 가가! 어딨어요?”

당우리가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는 정명단원들을 헤치며 이정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정에게 물었다. 때마침 강정 부부도 정신을 차린 듯 이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정은 세 사람에게 그의 짐작을 말해 주었다. 세 사람은 망연한 눈빛으로 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당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몸을 날렸다.

“동생!”

문취옥이 소리 질러 불렀으나 당우리는 돌아서지 않았다. 문취옥은 강정과 이정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강정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멍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당우리를 보고 있었다.

당우리가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강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많은 것을 담은 눈빛으로 문취옥을 바라보았다.

문취옥은 강정의 눈을 읽었다. 그때 강정이 말했다.

“우린 그때 죽은 거야, 그지? 덤으로 산거다, 그지?”

아주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강정은 문취옥을 향해 밝게 웃었다.

평생처음으로 듣는 하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취옥은 오히려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정은 그들이 따라가려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말릴 수가 없었다. 냉정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으련만, 죽음을 각오한 그 눈빛들을 보고서 그 말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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