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79)

은은한 불호소리가 들리는 동안 청성의 도사들은 이미 익숙해진 듯 영역 안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건법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겠지? 파진을 눈앞에 두었는데도 오히려 농락당하는 기분일세.”

운청산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유를 묻자 건법진인이 다시 말했다.

“마치 꿰뚫어 본 듯하지 않은가? 우리의 행로를 예측이나 한 듯 기관을 설치한 곳은 오직 우리에게 휴문이 되는 곳뿐이었어. 만약 우리가 마지막 생문에서 여유를 부렸다면 지금처럼 저들을 간단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걸세.”

“설마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언제 어디로 들어올 줄 알고 그리 안배를 한단 말입니까?”

운청산이 회의적인 반응을 띠자 건법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두고 보게. 내가 파진한 후에 지금의 휴문 자리를 살펴보면 알 걸세. 아마 거기에는 다른 휴문과는 달리 기관이나 함정이 없을 걸. 쓸데없는 공력일 테니까.”

건법진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비탈을 느긋하게 걸어 올라갔다.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건법진인이 뒤를 돌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이제 오실 필요 없소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청심뿐. 마무리는 빈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현상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정녕 혼자서 가능하시겠소? 이 부단주라도---.”

건법진인이 고개를 저어 현상자의 말을 끊었다.

“같이 가도 결국 혼자서 해야할 일입니다.”

건법진인은 고개를 돌려 운청산에게 빙긋 웃으며 물었다.

“파진을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운청산도 웃으며 답했다.

“음양상추이생변화(陰陽相推而生變化)라 했으니, 인공적인 음양혼원의 균형이 깨어지면 그것으로 인공적인 변화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 내 다녀옴세.”

건법진인은 두 말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히 숲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한 발 떼는 순간 귀신같이 사라졌다.

당유연이 운청산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녕 괜찮겠는가?”

운청산은 주저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은 없을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고 느끼는 것은 혼돈밖에 없을 겁니다. 평생을 수련해 오신 건법진인이시라면 능히 혼돈을 깨고 중심부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운청산의 답변에 자신감이 엿보이지 않자 모두가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그로서도 그 이상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충 그러할 것이라는 정도는 짐작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일 각을 여삼추처럼 여기는 사람의 표정을 알고 싶다면 그들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일 각과 몇 호흡의 시간이 더 지났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가운데 단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보이지 않던 건법진인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달려갔다. 건법진인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겨우 일 각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사라졌을 뿐이었건만,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했고, 입가에는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운청산은 어지러운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숙부님,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서 팔방을 살펴주십시오.’

운경산이 돌아와 모두가 똑 같은 숲임을 알렸다.

운청산은 선언하듯 말했다.

“파진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청성 도사 한 사람이 품속에서 신호전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현상자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 위쪽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운청산 일행이 네 시진 넘게 걸려 올라온 거리를 뒤이은 사람들은 일 각이 조금 넘게 걸려 올라왔다. 가장 느렸던 정명단마저도 이 각이 채 지나지 않아 올라왔다.

그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일단 파진이 되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매복조차 변변치 않았다. 다시 일 각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자 사천무림련 사람들은 어느새 숲을 벗어나 산의 정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그곳에서 한 호흡을 늦추었다.

그때서야 운청산도 수뇌진들로부터 겨우 해방되어 정명단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이! 수고했어.”

이정이 웃으며 맞이했고 강정 부부가 어깨를 두드렸다.

운청산은 건성으로 미소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강정이 이유를 짐작하고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밑에 두고 왔으니까. 아버지 만날까봐 무섭다고 자진해서 안 오겠다하더라고.”

운청산은 그때서야 안도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전방을 살폈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군. 기분이 찜찜해!”

이정이 미간을 좁혔다.

과연 그의 말처럼 산이 너무 조용했다. 산 정상에서 가끔씩 사람 머리가 솟았다가 가라앉곤 했지만 몇 사람 되지 않았고 병장기의 그림자는 아예 드러나지도 않았다.

“전 좋습니다만. 진이 깨졌다고 다 도망간 것 아니겠습니까?”

강정이 말하자 이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웃었다.

“그랬으면 나도 좋겠소만---.”

바로 그때였다. 산의 정상에서 한꺼번에 일어나는 움직임이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이 장이 넘는 수십 개의 나무 기둥을 세웠다. 무언가 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 기둥 끝에 너덜거리는 청의를 입은 썩은 시신들이 걸려있었다.

사람들은 한번에 그 시신들을 느낌으로 알아보았다. 일차 원정 때 죽은 사람들이리라. 천하의 공분을 살 일이었다. 아무리 적이라 하여도 이미 죽은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무사에 대한 모독이었다.

분노의 기세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촹!

누구의 명도 없었건만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일제히 병장기를 곧추세웠다. 폭풍같은 기세는 금세 해일이 되어 정상을 덮을 것만 같았다.

그 기세를 꺾은 이가 바로 운녹산이었다. 그는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려 단번에 십여 장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산이 울리도록 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단순한 격장지계임을 모르는가? 우리는 저 봉우리를 넘을 것이다. 분노가 아닌 의지로써 넘을 것이다. 그리고 시신을 거두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위로하리라. 그때까지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말라.”

사람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분기를 삭이며 병장기를 거두었다.

운녹산이 수뇌진에게로 다시 합류했다. 수뇌진들이 숙의를 거친 후에 그들 앞으로 군룡전의 고수들을 소집했다. 몇 마디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군룡전의 고수들이 각문파 별로 열을 지어 산을 가로질렀다.

첫 열은 아미파의 고수들이었다. 두 번째 열은 청성의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운가, 네 번째가 당가의 사람들이었다.

먼저 아미의 고승들이 합장을 한 채 승포를 펄럭이며 한 걸음 내디뎠다.

쿠쿠쿵!

산이 울었다. 태산보다 두텁다는 아미의 내공이 장년승인들의 발바닥을 통하여 산을 짓눌렀다. 잠시 후 그들이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쿠쿠쿠쿵!

또 다시 산이 울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 반복되자 그들의 민머리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여섯 번째.

쿠쿠쿠쿠쿵!

다시 천둥 같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 산이 괴로움을 토해냈다. 흙더미를 토하고 연이어 피를 토하는 백의인들을 몸 밖으로 퉁겨냈다. 그들은 칠공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도를 움켜쥔 채 아미의 고승들을 향해 튀어 올랐다.

아미의 고승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합장을 한 채 호흡을 가다듬을 따름이었다. 몸을 날린 것은 두 번째 열의 청성고수들. 단 한 번의 탄신으로 아미의 승인들을 지나 검을 내질렀다.

분시가 되는 백의인들을 지나쳐 땅바닥에 내려선 청성의 고수들은 검을 등으로 돌려보내고 아미의 고승들이 하던 일을 대신했다.

아미의 고승들이 당가의 뒤쪽으로 물러섰다.

쿠쿠쿵!

다시 산이 울렸다. 매복하고 있던 백의인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시 튀어 올랐다. 이번에 나선 것은 아미가 뒤로 물러서면서 자연히 두 번째 열을 이룬 운가의 고수들.

그들이 나서는 순간 허공은 피로 뒤덮였다. 청성은 일률적으로 검을 쓰지만 운가는 제 각각의 특성에 맞춰 검, 도, 창은 물론 권장을 쓰는 이도 있는 탓이었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운가 사람들은 냉정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 번째 열로 물러섰다가 청성의 고수들이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순간 다시 선두로 나섰다.

당가가 운가를 대신하고 다시 아미가 첫 번째 열을 이루었을 때는 이미 정상까지 겨우 백여 장을 남겨두었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각 당과 단들의 젊은 사람들은 산의 여기저기에 흩어진 피와 살점들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언제 상대에게 분노를 했는지조차도 잊고 있었다.

바로 그때 산의 정상에서 일단의 백의인들이 나타났다. 백여 명 정도였는데 다른 이들과는 달리 상체가 뚱뚱하여 마치 호신갑을 몇 겹이나 두른 같았다.

그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려왔다. 그들의 동료들이 일방적인 도륙을 당했음에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오히려 경건한 눈빛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달려 내려왔다.

“천신지령의 뜻에 따라 천군께서 출세하셨으나

천하 만민은 그 분을 능히 알지 못하도다.

이제 나 이 한 몸 바쳐 그 분의 앞길을 밝히리니

세상을 밝히실 그 분의 보보에 영광이 맺히리라.

천군께 영광을!”

그들을 맞서 암향표에 몸을 싣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청성의 도사들이 눈을 치떴다. 검을 뻗는 순간 피를 뿌리고 쓰러질 그들이 아예 들고 있던 도를 던져버리고 검을 향해 뛰어든 탓이었다.

“피하라!”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청성의 도사들은 검을 회수하는 대신 왼손으로 숭양대구수의 절초인 벽일진천수(劈日震天手)를 내뻗었다. 푸른 빛 수영이 백의인들의 가슴을 치는 순간 그들의 눈이 두려움 대신에 격정으로 불타올랐다.

청성의 도사들은 그 눈을 외면하며 벽일진천수가 그들의 가슴을 으깨어 놓는 탄력으로 몸을 휘돌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팔십여 명의 청성도사들이 등 뒤의 폭발로 인하여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순간 그들이 상대하지 못한 스무 명의 백의인들이 아미의 고승들을 덮쳤다.

아미의 고승들은 제 자리에 오히려 두 발을 벌려 기마자세를 취하고 철나한강기(鐵羅漢?氣)로 몸을 보호한 채 두 주먹을 연달아 내뻗었다. 그들의 주먹에서 복호금강권력(伏虎金剛拳力)이 쏟아져나가는 순간 백의인들의 신형이 허공으로 튕겨 올라가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살점과 피가 하나 되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철나한강기에 부딪쳐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미의 고승들은 기마자세를 풀고 두 다리를 모은 후 지그시 눈을 감고 합장했다. 그 순간 공격받지 않은 아미의 고승들도 역시 눈을 감고 합장을 취해 일제히 대범창을 토했다.

“나약한 제자가 관세음보살 전에 엎드려 비오나니, 대자대비한 손길을 내리시어 이 불쌍한 중생들이 극락왕생토록 이끌어 주오소서. 옴 바나미니 바아바제 모아야 아아모하니 사바하.”

장중한 범창 소리가 놀란 산을 다독였다. 시작은 아미의 고승들이 했지만 관세음보살백불수진언(觀世音菩薩白拂手眞言)을 외울 때는 관음사와 아미의 젊은 승인들이 모두 동참했다.

승인들이 별 다른 성과도 없이 스스로를 죽인 백의인들을 위해 진언을 외우는 동안, 청성인들은 스스로를 점검해야 했다. 아미의 고승들이 눈으로 보고 미리 대비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의 놀람은 상당히 컸다.

다행히 임기응변이 통하여 큰 희생은 없었지만 그래도 죽은 자가 둘에, 경사진 바닥을 나뒹굴어 골절상을 입은 이들이 십 수 명 그리고 등껍질이 홀랑 벗겨진 사람이 넷이나 되었다.

사천무림련 사람들의 파죽지세와도 같던 진격은 거기서 주춤했다. 모두가 당황하여 산 중턱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명을 기다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나선 이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청성의 현상자와 운녹산이었다.

두 사람은 따로 독려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갔을 따름이었다. 순간 청성과 운가의 고수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십여 장을 지난 후에는 결국 아미가 앞장섰다.

쿠쿠쿠쿵!

땅이 다시 뒤집히기 시작했다. 정상에서의 대응이 없다는 점에서 일차원정과 달랐지만, 어쨌든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하는 사대문파의 고수들 탓에 창두봉은 무주공산(無主空山)처럼 느껴졌다.

그때 선두에서 나란히 앞서가는 운녹산과 현상자의 사이에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백의인들과는 달리 고통보다는 짜증을 드러내며 두 손을 운녹산과 현상자에게 동시에 내뻗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공격을 받아야 했던 두 사람은 그 즉시 대경실색하여 좌우로 물러서면서 사람의 정체를 살폈다.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이 개자식들아!”

앙칼진 여인의 음성이었다. 토왕신마 토비연을 발견한 현상자는 눈을 치뜨고 원시천존을 뇌까렸다.

땅속에 여전히 반신을 묻은 채 상반신만 드러낸 그녀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수십 가닥의 줄들이 어깨에 엉겨 있었지만 그야말로 몇 가닥 굵은 실에 불과해서 젖가슴은 그대로 드러나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반응은 달랐다.

‘저 계집은 그때 그 계집?’

이십오 년 전의 일을 떠올린 운녹산은 그녀가 금왕신마 금극현과는 달리 상당히 귀찮은 존재였다는 것도 상기했다. 금극현이야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싸웠으니 통쾌한 일면도 있었지만, 토왕신마는 땅속을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암습을 일삼아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존재였다.

토왕신마 토비연의 정체를 파악한 운녹산은 그 즉시 도를 뽑아 바로 그녀를 향해 내리찍었다.

벌거벗은 여자가 난리를 친다?

당연히 남정네들은 눈을 치뜰 수밖에 없으리라. 여인이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면 남정네들은 침을 흘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재미난 광경을 본다며 실실 웃음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사천무림련 사람들은 누구도 흥미라는 관점에서 여인을 보지 못했다. 아미파 승려들과 청성의 도인들은 민망한 듯 여인을 외면했고 다른 이들은 그녀의 기이한 무공에 놀라 눈을 치뜨고 있었다.

여인의 무공은 참으로 특이했다. 대지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무공과 술법을 경계를 오갔다. 손짓 발짓에 따라 흙들이 기둥을 이루어 운녹산의 공격을 막고 때로는 흙을 암기처럼 사용하여 운녹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 발을 대지에 꽂아둔 채로 자유로이 움직였고 때로 허공에 치솟기도 하나 금새 화살이 땅에 박히듯 땅 속에 꽂혔다가 물처럼 스며들었다.

“정말 신기하군 그래.”

이정이 동의를 구했지만 운청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넋을 잃은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봐, 청산! 저게 도대체 무공인가, 술법인가?”

이정이 다시 물었다. 운청산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여인입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는데---.”

“당연하지. 벌거벗고 날뛰는 것도 미친 여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동료도 없이 우리 사이에 뛰어든다는 건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짓이야. 근데 만난 적이 있어?”

이정이 다시 물었지만 운청산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만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운청산이 앞으로 튀어나가는 사이에, 토비연은 자신이 강한 경력을 담아 날린 수백 개의 흙덩이들이 운녹산의 무극금정강기에 튕겨버리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운녹산은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몸을 뒤집고 그녀가 사라진 곳 주변을 향해 수십 줄기 도기를 뿜어냈다. 땅이 바둑판처럼 갈라졌다. 그러나 그녀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땅에 내려선 운녹산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공격에 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도 그녀를 잡을 자신이 없었다.

다시 눈을 치뜬 운녹산은 유독 한 사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운청산이었다.

운녹산은 의아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그때 운청산이 토비연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 자리에 도착하여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나왔던 줄을 집어 들었다.

운녹산은 운청산에게로 다가갔다. 별 일이 아니라면 이십 장 아래쪽에서 달려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뭔가?”

운청산은 줄은 운녹산에게 보였다.

“혹시 도화선 아닙니까?”

운청산의 물음에 운녹산이 눈을 치떴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횐자위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운청산은 그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검을 거꾸로 잡아 땅속에 찔러 넣었다.

“하앗!”

낮은 기합성을 터뜨린 운청산은 검을 꽂은 그대로 아래로 달려갔다. 오 장의 검강을 돋구어 뛰어가고 있으니 흙더미들이 허공으로 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좌우로 물러섰다.

그 순간 운녹산도 사 장의 정도의 거리를 벌려 운청산과 마찬가지로 땅에 도를 꽂은 채 아래로 내달렸다.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눈을 치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두 사람은 이미 사십여 장을 내려갔다.

먼저 검을 뽑아낸 운청산은 내려오는 운녹산에게 말했다.

“전 위에서부터 내려오겠습니다.”

대답을 들을 여가가 없었다. 운청산은 바로 몸을 뽑아 올라갔다. 단 한 걸음에 비탈길을 십오륙 장씩이나 치솟아 오르니 모두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소리쳐 알린다면 그 순간 혼란이 일어나고 적들도 거기에 대처할 것이 분명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판단은 소리없이 같이 행동하는 운녹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사람들이 신기한 듯 두 줄을 가운데 두고 모여들었다. 그때 운청산은 이미 정상에 이르러서 산비탈에 사선으로 섰다. 내뻗은 그의 검에서 오 장에 이르는 검강이 뻗어 나왔다.

그때 현상자가 운청산에게로 다가왔다. 운청산은 들고 있던 도화선을 현상자에게 던져주고 바로 검을 휘돌렸다. 오 장에 이르는 검강이 두 줄 사이를 파고들었다. 운청산은 일보에 세 자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검을 휘돌렸다. 순간 두 줄은 점점 사다리 모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현상자만은 이해를 한 것 같았다. 그는 운청산과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운녹산의 중앙에 서서 운청산과 똑 같은 방향으로 검을 휘돌렸다. 그때 몇몇 도인들이 영문도 모르고 같은 일을 했다.

현상자가 소리쳤다.

“모두 이 안으로 들어오라!”

홍진붕은 자꾸만 허물어지려는 육신을 바로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조그만 암흑의 공간에서 겨우 숨구멍 하나에 의지한 채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거품 같은 피가 입과 코로 동시에 나오고 있으니 숨쉬기가 어려웠다. 일 각쯤 전에 지축을 흔드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매서운 기운이 머리를 누른 탓에 중상을 입은 것이었다.

홍진붕은 절로 감기려는 눈을 치떴다. 그리고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코를 쥐고 비틀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도록 목젖을 움직여 피를 게워냈다.

‘아니야. 아직은 안돼. 천군이시여! 제발 제가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홍진붕은 백라천궁의 내육전 가운데 하나인 벽력신전 소속의 이급무사였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 셋. 어른들이 표현대로라면 산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새털같이 많은 새파란 청춘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나이에 이미 이급무사가 되었다. 일급무사라고 해 봐야 백가 성을 지닌 열두 명에 불과하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진정한 천궁의 일원이 될 수 있으리라.

‘푸흐흐! 살아서 될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되리라. 반드시!’

홍진붕은 자꾸만 손에서 흘러내려가려는 화섭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숨구멍에 귀를 기울였다. 짜증이 났다. 적들이 조금만 더 올라오면 편히 쉴 수 있을 텐데, 이상한 여인이 나타나서 싸움을 벌이는 통에 적들이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다.

‘그만 해! 그게 도와주는 게 아니야. 그만!’

홍진붕은 쉬고 싶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여인이 싸움을 멈추게 해달라고. 그리고 잠시 후 기도가 먹혀든 것을 깨달았다.

홍진붕은 적들의 발소리를 기대하며 화섭자를 두 다리 사이로 옮겼다. 그런데 기대했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와라. 내 오장육부를 다 으깨어도 좋으니 조금만 더 올라와.’

그러나 들리는 것은 신경을 건드리는 묘한 소리뿐이었다.

‘왜? 왜 안 오는 거야? 이 소리는 또 뭐야?’

홍진붕은 잠시 후 거슬리는 소리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코를 풀고 피를 게워냈다.

“모두 이 안으로 들어오라!”

창노하지만 너무나 뚜렷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홍진붕은 미소 지었던 입술을 벌렸다.

‘뭐야? 무슨 뜻이야? 알아차린 거야?’

홍진붕은 조금만 더 지나면 화섭자를 뽑아 불을 밝힐 기력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할 수 없이 화섭자의 뚜껑을 열었다. 화섭자를 힘겹게 흔드니 불꽃이 드러났다.

홍진붕은 눈을 감으며 두 다리 사이에 널려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잘 타들어 가는구나. 죽여라. 천군의 뜻을 거스리는 놈들은 다 죽여! 산아, 무너져라.’

불을 심지를 따라 흐르다가 몇 가닥으로 갈아졌다. 홍진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가 불을 붙였듯이 다른 여섯 명의 동료들도 불을 붙였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불꽃들이 무사히 열두 동이의 화약에 닿을 수 있도록.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 넓은 산비탈을 두고 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 장의 좁은 공간 위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서있었다.

우스웠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운녹산이 땀 흘려 만들고 현상자가 명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리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좌측의 땅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측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멍멍한 귀를 붙잡고 일어서려는데 다시 우측과 위쪽에서 계속해서 땅이 뒤집혔다.

땅속에 묻혀있던 돌들이 튀어 올라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일 위쪽에 서있던 운청산과 현상자가 동시에 검을 뽑아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두 줄기 검강이 뻗어나가 허공을 휘저었다. 바람이 달라붙고 검과 같이 휘돌아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정면으로 다가오던 돌들이 바람에 휘말리고 검강에 튕겨 깨지고 비켜나갔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현상자는 뒤집어 쓴 흙먼지를 툭툭 털며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제외한 산비탈은 모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터지려 해도 더 이상 공간이 없을 것 같구먼.”

운청산도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현상자가 오른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망설이는 듯 입술을 씰룩였다.

“음! 곤륜--- 아니야. 어쨌든 수고했고--- 고맙네.”

운청산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현상자의 노안에서 알 수 없는 회한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운청산이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현상자는 이내 눈빛을 감추고 고개를 돌렸다.

“대오를 정연히 하라.”

현상자가 먼저 선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도 일시에 주변으로 퍼졌다.

운청산은 흩어져서 다시 모이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하늘을 응시했다. 노을의 기미가 보였다. 반 시진도 못되어 어두워지리라.

운청산은 다시 산 정상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죽은 시신들 말고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이미 철수한 것인가?”

운청산은 고개를 젓고 산을 내려갔다. 이정과 강정 부부가 반겼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정명단원들이 하나같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운청산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그들에게 등을 보였다.

“어찌 알았나?”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타났었지요. 결국 백의인들이 인간화탄을 자처하고 그녀가 도화선들을 감고 나타나는 바람에 우리가 산겁니다.”

이정이 빙긋 웃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가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난리가 났었을 거야. 잘 했어.”

그때 당유연과 공명선사가 십 수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내려왔다. 이정이 공명선사에게 합장하고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사이에 당유연이 운청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운청산이 의아한 눈빛으로 당유연 등의 뒷모습을 보는 사이에 현상자가 선두에 서서 앞으로 이동했다. 모두가 움직였다. 거치적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산의 정상까지 편안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벽송 등 점창의 사람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산 정상 주변에 흩어져 주저앉았다.

잠시 후 당유연과 공명선사가 돌아왔다. 그리고 벽송 등도 다시 올라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소이다.”

당유연의 허탈한 말 한 마디에 운녹산과 신수사태 그리고 현상자가 동시에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장문인. 보시지요.”

현상자가 눈을 치뜨고 그에게 다가온 제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산 아래 상관이 있는 곳이었다.

“헉!”

여기저기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어있어야 정상인 벌판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포진하고 있었다.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데, 거의 빈틈이 보이지 않으니 삼사천은 된다고 보아야 옳으리라.

“당했군.”

현상자가 다시 눈을 감았다.

현상자가 망연자실하던 그때 운청산 역시도 놀라서 눈을 치떴다. 그러나 금새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나?”

이정이 묻자 운청산은 당황한 얼굴로 돌아서서 말했다.

“우리! 우리가 아래 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운청산은 이번에도 대답조차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풍파 모질어도 함께라면 웃으리라.

운청산은 몸을 내팽개치듯이 달렸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베어버리고, 부셔버리고 일직선으로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땅에 닿는 발가락들은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꿈틀거려 그로 하여금 나무들을 휘돌게 하고 바위들을 박차게 만들었다.

파드드득!

가속이 붙었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닭이 홰를 잦치는 듯 했다. 누가 보면 숲에 귀신이 있다고 말하리라. 그러나 운청산에게는 너무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산 아래에 내려가 있었다. 몸이 함께 이동하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그의 얼굴과 옷을 보면 알리라. 본능에 따라 몸은 절묘하게 충돌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가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나무의 몸통들 뿐, 잔가지는 아니었다. 옷자락이 찢겨져 나갔다. 얼굴이 찢겨져 나갔다. 상처에 맺힌 피가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방울이 되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마침내 숲의 끝에 이르렀다. 벌판이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멀리 무수히 많은 백의인들이 포진한 것도 보였고 그 앞으로 상관임을 표시하는 석문도 보였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당우리는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산조각 나버린 상자노들과 취화발향전을 담아왔던 빈 나무상자들뿐이었다.

운청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수십 번을 살펴보아도 당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모양이었다. 핏물이 다듬어지지 않은 턱수염 끝에 매달려 방울이 되어 달랑거렸다.

운청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대로 적진을 보다가 갑자기 검을 뽑아 앞으로 걸었다. 한 발 두 발 내디딜 때마다 보폭이 넓어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운 가가. 어디 가요?”

환청이 들렸다. 무시하고 한 걸음 더 걸었다. 그때 운경산이 그의 왼쪽 귀 위를 계속 건드렸다. 운추산이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 앞에서 입을 벌리며 어른거렸다. 운청산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당우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한 걸음을 떼는 그 순간 다리가 꼬여 쓰러져버렸다.

뒷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무조건 적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심신이 절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런데 당우리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게 되자 꼿꼿했던 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버린 것이었다.

당우리가 놀라서 소리쳤다.

“다쳤어요?”

그녀가 앞에 이르러서 그를 부축했다.

운청산은 겨우 일어서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된 순간 당우리는 눈을 치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무수한 긁힌 자국들, 배어 있는 핏물들 그리고 눈에 그렁한 물기, 그 어느 하나 그녀가 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운청산이 그녀의 두 어깨를 짚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것이오?”

목소리 끝이 바르르 떨렸다.

당우리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운청산의 두 뺨을 붙잡고 그의 얼굴을 자신의 이마로 당겼다.

‘미안해요. 그 눈에 웃음이 가득하게 만들어 주려 했는데, 그 가슴에 기쁨만 채워주려 했었는데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까지 짐이 될 줄 알았다면 따라오지 말 걸 그랬어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군요. 미안해요.’

이 세상에서 운청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한 사람, 그녀뿐이었다. 여덟 영혼들이 그와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은 청인자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우리는 그를 속속들이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아비와 형제로부터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옆에서 지켜주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도움은커녕 당장 부담이 되고 있었다.

속이 상한 당우리가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자 운청산은 그녀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두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으며 입 맞췄다. 그리고 팔을 뻗어 거리를 두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소. 이젠 다 괜찮소.”

당우리도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에 배인 핏물과 눈물을 닦아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백의인들이 왔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상자노를 부수고 숲으로 올라갔지요. 따라오지 않고 그냥 가더라구요. 그래서 동정을 살피느라고 저기 끝에 숨어 있었어요. 오빠들하고---.”

당우리는 운청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를 따라가니 거기에 운청산 또래의 녹의인들 다섯 명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여 개의 나무 상자를 붙들고 있었는데, 바로 활과 독풍시를 꺼낸 것과 같은 나무상자들이었다.

운청산은 수인사를 하고 나서 세 개의 나무상자를 품에 앉은 채 산을 올랐다. 숲의 끝에 이른 순간 당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 하려오? 지금이라도 장인어른께---?”

당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여기 있을 게요. 한 시진도 못되어 어두워질 테니까 그때 올라갈 게요.”

그녀를 옆에서 떼어놓는다는 사실이 불안하긴 했지만 운청산은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때 당우리가 갑자기 녹의인들 앞을 가로막고 두 손을 허리에 대었다.

“오빠들. 알지? 아버지한테 나 여기 있다고 말하면 나중에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완전히 협박이었다. 그러나 녹의인들은 오히려 귀엽다는 듯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다.

“역시 계집애는 키워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니까.”

당우리가 지지 않고 말했다.

“흥! 나중에 장가가도 그런 소리 하는가 두고 보자.”

모두가 실소하고 숲을 벗어났다.

운청산은 아쉬워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당우리가 어서 가라는 듯 손을 젓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빨리 돌아오겠소. 아! 그리고 장인어른이 내게 사위라 불렀다오.”

당우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운청산은 환하게 미소 짓고서 당가의 청년들을 뒤따랐다.

산을 찾은 대신 대지를 잃었다. 그러나 그 산마저도 그들의 것이 아닌 이상 당장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허무해진다 했던가. 수뇌진들은 한동안 허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노강호. 곧 현실을 직시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상관에만 포진한 이유는 무엇이겠소?”

현상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운녹산이 즉각 바닥에 대강의 지도를 그리고 대답했다.

“좌우로는 이해호와 흑강, 배가 없이는 어느 쪽으로도 이 인원 모두가 함께 움직일 수 없습니다. 결국 앞뒤밖에 없다는 소린데, 만년설이 있는 마룡봉을 포함해서 열여덟 개의 봉우리를 넘는다는 건 불가능할 뿐만이 아니라 넘는다 해도 운남 깊숙이 남하하게 되는 것이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사냥감을 쫓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당장 먹을 것조차 없는 지경이군요.”

운녹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 식량은 모두 상관에 남겨둔 채 산을 올랐다. 가진 것이라고는 각 개인이 지참한 건량 정도뿐이었다.

물론 산이라 무언가 먹을 것을 찾을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구백의 인원을 먹이려면 초근목피뿐만이 아니라 산의 껍질을 통째로 벗겨내야만 하리라.

“결국 저들을 지나야 이 궁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구려.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현상자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신수사태가 강건한 어조로 말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습니다만 우선은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십시다. 저 인원이 밤에 산을 올라온다면 대비가 없는 우리로서는 속수무책. 그 방비부터 해야겠지요.”

당유연이 허탈감을 감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태께서 깨우침을 주시는구려. 그렇소이다. 우선 할 일을 하고 뒷일 생각합시다. 당장 해야 할 일부터라---. 허허허!”

신수사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빈니의 제자가 했던 말이지요. 부상자 치료를 먼저 하자던 그때 말입니다.”

모두가 잠깐의 미소로 어두웠던 분위기를 바꿨다.

운녹산이 말했다.

“전면은 당가의 삼일취혼산이 있으니 방비가 필요 없지요.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적의 대규모 이동을 감시하는 것과 올라올 수 있는 길에 초병을 세우는 것이 될 겁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운녹산은 주변에 포진한 군룡전 사람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현상자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서를 띄우지요. 본가와 청성은 어려워도 아미와 당가는 급히 달려올 수 있을 겁니다.”

공명선사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최소한 오 일은 잡아야 할 것이오. 그 동안 우리가 버틸 수 있겠소?”

역시 식량이 문제였다. 오 일이라면 견디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러나 싸울 기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당유연이 눈을 치뜨고 소리쳤다.

“그래. 그것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당유연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당가 사람을 찾았다. 그러다가 산 아래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후! 당황하여 잊고 있었건만, 다행이구나.”

모두가 당유연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래쪽에서 운청산과 당가의 다섯 청년들이 나무상자들을 한 아름씩 안고 올라오고 있었다.

당유연이 활짝 펴진 얼굴로 달려 내려가 그들을 맞았다.

“무사 했더냐? 미안하구나. 당황하여 잊고 있었다.”

청년들은 솔직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당유연에게 쑥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당유연은 그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주고 운청산에게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청년들 가운데 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말했다.

“가주. 적들이 오는 통에 상자노는 어쩔 수 없이 부숴버렸습니다.”

“음. 잘 했구나. 내가 있었어도 그리 했으리라. 잘 했어. 다행이구나. 이것이면 적의 추적을 한 동안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잃지 않고 잘 챙겨왔어.”

당유연은 그들이 내려놓은 나무상자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수뇌진들도 모두 도착해 있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운녹산의 물음에 당유연은 대답에 앞서 상자 하나를 열어보였다. 그 안에는 독풍시를 날렸던 그 먹빛 활과 일반적인 화살보다 세 배는 두터워 보이는 화살 다섯 대가 들어있었다.

“이를 테면 휴대용 취화발향전이라 할 수 있소이다. 이 작은 화살 스무 대면 상자노로 쏘는 취화발향전 하나와 맞먹지요. 우리에게는 모두---. 응? 이것뿐이더냐?”

당가의 청년이 말했다.

“사십 개 모두 무사합니다. 다 가져올 수 없어서 숲에 숨겨두었습니다.”

“어서! 어서 가지고 올라오너라.”

당유연은 급히 지시하고 현상자 등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모두 취화발향전 열 대가 있는 셈입니다. 그것으로 저들을 모두 잠재우기는 역불급입니다만 적어도 길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오.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것이 있소이다.”

모두가 궁금해 하는데 당유연은 대답 대신에 숲을 바라보았다. 현상자와 공명선사 그리고 신수사태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당유연을 바라보았으나 운녹산만큼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들이 있었구려. 그렇다면---.”

운녹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모두에게 말했다.

“당 가주의 말씀대로 우리에게는 취화발향전과 적들의 인질이 있습니다.”

“그런?”

신수사태가 즉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운녹산은 신수사태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며 단호하게 말했다.

“개인의 청명이 문제가 아니라 구백 명의 생사가 걸린 문제올시다. 또 다시 송양지인의 우를 언급해야 하오리까? 그리고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트고 빠져나가자는 것이지요. 쓰임을 다했을 때는 무공을 폐하고 풀어주면 될 일입니다.”

신수사태가 공명사태를 힐끔 보고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다시 운녹산을 직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여 이해해 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다시 말했다.

“당가와 아미에 전서를 띄워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금강포구에 이르도록 하지요. 나흘째 새벽 정도면 우리와 그쪽의 시간이 얼추 맞겠지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별 다른 대안이 없을뿐더러 사흘이면 그들이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탓이었다.

계획은 곧 구체적인 시간 단위로 검토되었고 해가 떨어진 순간 두 마리 전서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현상자는 군웅들을 모아놓고 현실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책이 있음도 말했다.

현상자의 뒤를 이어 운녹산이 나섰다. 그는 정명단와 점창 사람들을 제외한 사대문파 사람들의 일부에게만 수색과 초병의 임무를 맡기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별 명이 있을 때까지 힘의 소모를 최대한 아껴 기력을 보존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명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정명단원들과 함께 동벽로로 가는 통로가 있는 숲의 끝에 이른 운청산은 숲으로 들어가 당우리를 데리고 나왔다. 두 사람은 이정 그리고 강정 부부와 함께 모여 앉았다.

운청산의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 불안할 만 하건만 모두가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가 안심하고 긴장을 풀어놓은 순간 당우리가 바짝 다가앉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운청산은 이정 등의 눈치를 살폈다. 강정 부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서로 붙어 앉았다. 이정 또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장가 빨리 가야겠구먼. 영 부자연스러워.”

당우리가 빙긋 웃으며 운청산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 듯 붙어 앉았다. 운청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려는 순간 강정이 말했다.

“그런데 청산! 우리 앞으로 어떻게 될까?”

별 달리 긴장어린 물음은 아니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화제가 필요하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편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막은 곳은 단 한 곳입니다만, 실제로는 외길을 막은 격이지요. 대책이 있다했지만 결국은 기습과 정면돌파 뿐이고 그리 되면 적지 않은 희생자들이 생기겠지요.”

운청산은 덧붙여 그 돌파 계획과 휴대용 취화발향전이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말했다.

“에이! 모르겠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근데 배가 고파 오는군. 건량이라도 씹어야 할까?”

강정이 상의를 들어올려 허리에 두르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강정이 보따리를 풀어 그 안에서 기름종이로 만든 봉지를 꺼냈다.

강정은 봉지 안에서 손바닥만한 얇은 육포를 꺼내어 모두에게 내밀었다. 당우리와 운청산 그리고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강정은 입술을 삐죽인 후에 문취옥에게 한 장을 건네고 자신도 한 장을 집었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마시오. 며칠을 견뎌야 할지 모르니 우선은 아끼고 볼 일이오.”

이정이 충고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취옥이 육포를 씹다말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언니! 왜 그래요?”

문취옥은 육포를 입에서 빼내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딱딱해. 이거 먹으려다가는 이빨 다 빠지겠다.”

강정이 직접 씹어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말고기야. 해도 너무 하는군. 돼지고기도 아니고 말고기 육포라니---.”

그때 운청산이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보세요.”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육포를 건넸다. 운청산은 파랗게 물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더니 육포를 두 손 사이에 넣고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잠시 후 손을 펴서 다시 육포를 건네니 두 사람은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운청산과 육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워버렸어? 어디.”

강정이 육포를 두 손으로 찢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 쉽게 여러 조각으로 찢어졌다. 강정은 육포 조각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기 시작했다.

“음. 음음. 먹을 만 해.”

강정은 미소를 지으며 육포를 문취옥에게 건네고 그녀의 육포를 받아 또 다시 찢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당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강정 부부는 먹는데 열중하고 이정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터라 운청산과 당우리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운청산으로서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았으나 당우리는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곳저곳 둘레둘레 돌아보다가 실증이 난 듯 운청산의 구레나룻과 덥수룩한 수염들을 쓰다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그의 얼굴에 난 상처자국들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운청산은 당우리의 행동이 점차 대담스러워지자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당우리가 원래부터 달려있는 부속물처럼 따라 일어섰다.

“응? 어디 가려고?”

강정이 육포를 우물거리며 어눌하게 물었다.

“얼마나 있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먹을 것이 부족해질 것은 분명하니 한가할 때 갈근이나 참마 같은 것 좀 찾아보렵니다.”

강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취옥은 운청산과 당우리를 번갈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운청산은 그녀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고 당우리는 둘 만 있을 수 있어 기쁜 듯 쫄랑쫄랑 따라나섰다.

그때 위쪽에서 운교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부대주. 군사께서 찾으시오.”

운청산은 팔뚝을 붙잡고 있는 당우리의 두 손을 떼어놓고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곧 올라가지요.”

운청산은 운교인이 다시 올라가는 것을 보다가 당우리를 살폈다. 입술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오므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운청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녀오겠소. 어디 가지 마시오.”

당우리는 울상이던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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