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저 사람은 왜 저래요?”
오직 앞만 바라보며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으니 처음 보면 누구라도 궁금해 하리라.
문취옥은 당우리가 옆에 있으니 표정관리가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웃었다.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야. 강 건너서야 연인이 애 가진 걸 알았거든.”
당우리가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우스운 게 아니라 간절한 거였구나. 나도 애나 가질 걸. 그랬으면 무조건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믿고 기다렸을 건데---.”
순간 강정이 놀란 눈을 치떠 문취옥을 바라보았다. 문취옥이 화내지도 웃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으로 당우리를 보다가 끝내 주먹을 들어 머리를 쥐어박았다.
“처녀가 못하는 말이 없어.”
당우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헤헤헤, 농담이에요. 농담.”
당우리는 문취옥의 눈초리를 외면하며 운청산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운청산이 멀어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정보다 두어 발 앞서가고 있었다.
“운 가가의 목이 빨갛게 변했네. 왜 저럴까요?”
문취옥이 실소하며 말했다.
“그걸 몰라? 부끄러워서 저러잖아. 결국 들을 건 다 듣고 있단 말이지.”
“킥!”
당우리가 키득대던 그 순간 긴 행렬의 후미에 자리한 정명단마저도 창산상관이라고 양각된 석문을 지났다. 산은 싸울 상대가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사천무림련 사람들은 점창산 창두봉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넓게 포진했다. 그리고 드디어 각단과 당에 지급된 지함이 개봉되고 단약들이 개인에게 지급되었다.
“이거 뭐하는데 먹는 거야?”
문취옥이 마침 잘됐다 생각하며 당우리에게 밤색 단환을 들어 보였다.
당우리는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단환을 보며 대답했다.
“응? 이건 보혼정심환(保魂淨心丹)이네. 이걸 왜 주지?”
“혼을 보호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약이라! 뭐야? 어디다 쓰는 거야?”
문취옥의 다그치는 듯한 질문은 그녀 한 사람만의 의문이 아니었다. 그녀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당우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건 말이죠, 강호에 떠도는 대부분의 미혼산(迷魂散)을 무효화시켜요. 특히 본가의 삼일취혼산(三日醉魂散)에는 즉효지요.”
“아하! 그럼 미혼산의 해약이란 소리군.”
당우리는 즉시 고개를 저어 이제 알겠다는 표정을 지은 문취옥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해약하고는 다르고 방비약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미혼산은 독이 아니라서 지고한 공력이 아니라면 해약이 따로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약효도 사라지니까요. 그러니까 걸리기 전에 복용해야만 효험이 있어요.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당우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민하다가 확실한 설명이 떠올랐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아! 색마(色魔)는 미혼산을 뿌리기 전에 이걸 먼저 먹을 거예요. 그래야 공기 중에 미혼산이 떠돌아도 자기는 안전할 수 있으니까요. 죽일 놈!”
당우리가 눈앞에 색마가 있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 녹의를 입은 당가 사람들이 열두 대의 수레에서 짐들을 풀기 시작했다. 짐들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던 밧줄들이 풀리고 방수포가 걷어졌다. 지금껏 기밀에 붙여졌던 짐들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취한 꽃은 향기를 발하고, 산은 울부짖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두 대의 수레에서 내려진 것은 다섯 자 길이의 탁자 위에 거대한 쇠뇌를 얹어둔 것 같은 상자노(床子弩)였다. 정확히 말하면 열 대의 상자노가 먼저 내려졌고, 그 다음으로 길이 일곱 자, 폭이 두 자, 높이가 역시 두 자 정도 되는 나무상자 오십여 개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이 다섯 자에 폭이 두 자 그리고 높이가 한 자에 불과한 나무상자 오십여 개가 내려졌다.
묘한 분위기였다. 군룡전 고수들의 엄중한 호위가 있었고 물건을 내리는 당가의 청년들 손끝에 극도의 신중함이 어려 있었으니, 틀림없이 귀한 물건이리라. 그래서 보는 사람들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체를 드러낸 것은 겨우 상자노. 사람들의 눈빛에서 흐릿한 실망감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가의 행사였다. 그런데 겨우 상자노라니? 군문에서야 제법 귀한 병기로 취급된다지만 강호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강호에서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표적으로 삼을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비천한 수적들이나 유용하게 쓸 물건이었다.
그러나 당가의 조심스러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실망감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때 당유연의 지시를 기다리던 당명천이 거대한 녹기를 흔들었다.
운청산이 정명단을 향해 돌아서서 보혼정심환을 들어보였다. 그는 빙긋 미소 지는 당우리를 애써 무시하고 단환을 먹을 것을 소리쳐 알렸다.
정명단 뿐만이 아니었다. 산을 앞두고 부챗살처럼 넓게 퍼진 형국으로 포진하고 있던 모든 사천무림련 사람들이 일제히 단환을 먹었다. 심지어는 당유연의 뒤에 서 있던 사천무림련의 수뇌들까지 예외 없이 단환을 삼켰다.
운청산은 정명단원들이 단환을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당우리를 보며 입술을 씰룩인 후 다시 이정의 옆에 섰다.
“이상하군. 저것이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을 텐데---.”
운청산도 동의를 하려했다. 그러나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인기척이 신경 쓰여 우선 고개부터 돌렸다. 역시 당우리였다. 그녀가 두 팔로 강정과 문취옥의 팔을 걸고 바로 등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운청산이 대오를 흐트러뜨린다며 야단을 치려는 순간 이정이 먼저 반색을 하여 그녀를 반겼다.
“마침 잘 왔소. 당 소저, 내 눈엔 상자노로 밖에 안 보이는데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오?”
당우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실망하셨지요? 맞아요. 상자노예요. 그런데 그냥 상자노는 아니지요. 본 가가 이십여 년 동안이나 연구하여 개량한 것이에요. 원래 저만한 크기의 상자노라면 백 장 정도밖에 안날아간다면서요?”
강정이 맞장구쳤다.
“고 정도지. 하지만 백 장이면 짧은 거리가 아닌데? 군에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본 가의 개량노는 삼백 장 정도 날아가지요. 그리고 그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매우 손쉽고 정확도 또한 일반 상자노와는 비교를 할 수 없답니다. 그뿐이 아니라 군문의 상자노를 발사할 때는 일곱 명 이상이 필요한 반면, 본 가의 노는 단 세 명이면 조작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노가 아니라 발사되는 장군전이에요. 취화발향전(醉花發香箭)이라 부르는데, 나중에 보시면 알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당가의 사람 당우리가 자신만만해하니 이정 등도 다시 호기심을 드리웠다.
그때 당세천의 깃발이 펄럭였다. 십여 명의 당가의 젊은이들이 가장 작은 상자들 가운데 열 개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먹빛을 띠는 열 개의 활과 한 자가 조금 넘는 깃털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기묘한 모양의 화살들이었다.
상자를 개봉한 당가 청년들은 뒤에 나선 당가의 군룡전 고수들에게 활과 화살을 건넸다. 당가의 장년 고수들은 각각 이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일렬로 늘어섰다.
깃발이 다시 펄럭였다. 십여 명의 당가의 장년인들이 일제히 활을 들었다. 시위를 당기는데 그들 정도의 고수들마저도 기력이 달리는 듯 활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퓨퓨퓨퓨퓨퓨퓽!
십여 발의 화살이 동시에 산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화살을 따라 깃털 같은 것들이 계속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화살이 날아간 거리는 이백 여 장. 일반적인 활의 사거리가 백여 장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두 배에 달한 거리를 날아간 것이고 경사진 산을 향해 날아간 것을 따지자면 훨씬 더 날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화살의 꼬리를 따라 날아간 깃털들이 드문드문 허공에서 대롱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건 무엇이오?”
운청산이 신기해하며 묻자 당우리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웃었다.
“저건 독풍시(讀風矢)이라는 거예요. 은잠사 다섯 가닥을 꼬아 만든 실을 활과 화살의 오늬 앞에 묶고 그 사이에 깃털을 달았지요. 보이죠? 저기 허공에 휘날리는 깃털들의 간격은 각각 오십 장. 산바람에는 층이 있어 아래와 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를 때가 있데요. 아! 보세요. 보세요. 깃털들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들도 있지요? 그 바람을 읽고 거기에 따라 취화발향전을 달리 사용하게 될 거예요.”
운청산과 다른 이들 모두가 활과 화살 사이에 실이 달려있다는 것을 듣고는 눈을 부릅뜬 채 깃털들을 살폈다. 과연 바람에 일렁이는 깃털들 근처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때 당가의 청년들이 상자노에 들러붙었다. 각각의 상자노들이 옮겨진 곳은 활을 붙잡은 채 서 있는 군룡전 고수들의 옆이었다.
당유연의 지시에 따라 당명천이 깃발을 흔들며 소리쳤다.
“거리 오십 장. 각각의 판단에 따라 취화발향전 일 번 쏴!”
당가의 청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바람을 살핀 선두의 청년이 상자노의 방향을 잡고 옆에 달린 막대기 같은 것을 돌리자 겨냥 높이가 달라졌다. 두 번째 청년이 상자노의 뒤쪽에서 눈금을 확인하며 도르래를 돌리자 시위가 눈금까지 당겨졌다. 그때 세 번째 청년이 큰 나무상자를 열어 사람 팔뚝 굵기의 여섯 자 대나무 화살을 꺼내들었다. 장군전은 특이한 바가 있었는데, 전우(箭羽)가 독수리나 매 혹은 거위의 깃털이 아니라 대나무를 얇게 깎은 듯한 것이었다.
투투투투투퉁!
특별한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 자 길이의 대전은 거의 동시에 발사되었다. 오십여 장을 날아간 취화발향전이 허공에서 휘날리는 첫 번째 깃털의 아래쪽에 떨어져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찰라가 지난 순간, 하연 덩어리 십여 줄기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바람을 타고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응? 저게 뭐야? 끝이야?”
문취옥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당우리를 응시했다.
당우리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깃털이 팔랑이는 모양을 보고 방향을 정해요. 바람의 세기를 고려하여 깃털의 꼬리가 치우친 곳의 반대쪽으로 화살을 날리지요. 화살의 안쪽에는 삼일취혼산이 들어있어서 화살이 꽂히는 순간 그 충격으로 용수철의 제어가 풀리고 삼일취혼산을 오뉘 쪽으로 뿜어내지요. 히힛! 우린 방귀 뀐다고 해요. 어쨌든 이제 반 각 후면 그 근처에 있던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잠들게 됩니다.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때서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봐도 허공으로 흩뿌려진 삼일취혼산의 양은 과했다. 떨어진 곳에서 방원 이삼십 장은 너끈히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당우리가 덧붙였다.
“한 모금이라도 마신 사람은 사흘간 잠에서 깨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람은 계속 흐르니 삼일취혼산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은 점점 더 커질 겁니다.”
당우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명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리는 백 장. 취화발향전 이 번 쏴!”
또 다시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급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또 다시 화살이 날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 소저. 일 번, 이 번이라고 번호를 붙이는데, 의미가 있소?”
이정이 물었고 당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면 전우가 달라요. 전우의 무게는 같지만 그 면적은 번호가 올라갈수록 넓어지지요. 삼 번의 경우 전우가 조금 더 위쪽으로 붙고 사 번의 경우는 앞쪽에 보조 전우가 달렸지요. 마치 날개처럼 비거리를 늘려주는 역할을 해요. 그리고 오 번의 경우는 화살의 굵기가 조금 얇지요. 그래서 삼일취혼산의 용량도 약간 적답니다.”
그때 삼 번이 연이어 날았고 곧이어 사 번이 뒤따랐다. 그리고 당명천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최대 사거리에 맞춰 오 번 쏴!”
잠시 후 날아간 취화발향전은 독풍시가 꽂힌 곳을 넘어 이백 이십여 장 정도 날아갔다.
마지막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보며 문취옥이 물었다.
“동생! 근데 아까 그 단환 말이야. 효력이 언제까지 가는 거야? 안심하고 숨쉬어도 되는 거야?”
당우리가 방긋 웃었다.
“당연하지요. 사흘간은 안심하셔도 되요.”
강정이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어! 이거 기분 정말 이상하군.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니 좋기는 한데, 칼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겠군.”
이정도 말했다.
“그렇소. 저들이 몇 달을 걸려 진을 치고 결계를 설치했는데 당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그리고 간단하게 그것을 무력화시켰소. 허탈하기 짝이 없을 것이오. 거기다가 구원도 하러 오지 못할 것이오. 오는 족족 잠들어 버릴 테니. 이를 테면 당가의 진이요, 결계가 덧씌워진 셈이구려.”
이정은 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으면서 덧붙였다.
“지금은 절제를 아는 당가만이 사용하나 세월이 흐르면 저것 또한 일반화 될 것이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명분도 있고, 이기(利器)를 알고도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뒷전으로 밀릴 테니까. 그렇게 되면 강호의 양상과 힘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오. 아닌가? 그리 되면 관에서 가만히 있질 않겠군. 엉? 자네 뭐하나? 흙장난하나?”
이정은 씁쓸함 대신에 의아함을 드리우고 운청산을 살폈다. 그가 땅바닥에 바둑판 모양으로 줄을 긋고 있었다.
운청산은 대답 대신에 질문했다.
“숲이 시작하는 곳에서 저 위쪽 끝나는 곳까지 몇 장이나 될 것 같습니까?”
“음, 전에 보니 육백 장 전후가 되겠던 걸.”
운청산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일문의 크기는 사십 장 아니면 이십 장인가? 많은 사람이 함께 가기에는 버겁겠구나.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곤란한 일인가? 이십 장이면 일곱 시진 정도는 걸릴 텐데, 그러면 어두워질 것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한 마디도 빼지 않고 알아들었는데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탓이었다.
이정이 대표로 물었다. 운청산이 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지금 저 숲 전체가 진이라는 것은 아시지요? 음양팔괘포천대진이라는 진입니다.”
이정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강정 부부와 당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듯 눈만 깜빡거리며 운청산의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그런데 진을 완벽하게 설치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제대로 포진했더라면 지금 우리 눈앞에는 숲이 아니라 이해호와 흑강에서 비롯된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완벽한 포진에 실패한 이상 파진은 시간문제. 제 계산으로는 일곱 시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군요. 그런데 일문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니, 서로 방해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진이 열릴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밤이 되겠지요.”
파진 때는 이미 밤이 될 거라는 운청산의 고민에는 아랑곳없이, 강정 부부는 다시 한 번 부부임을 확인시켜 주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이네.”
모두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정이 운청산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밤에 산을 공략하는 일은 누구라도 피할 일. 칼을 뽑는 일은 더딜수록 좋은 일 아닌가? 노인네 같이 무슨 고민이 그리 많은가? 닥치면 하면 될 일, 머리 아프게 미리부터 고민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게.”
운청산이 웃으려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당우리가 먼저 그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았다. 한 사람이 뛰어오고 있는데 바로 운교인이었다.
“이보게. 이 부단주. 련주께서 찾으시네.”
운청산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저를 무슨 일로?”
운교인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운청산은 일단 그를 따라 수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운청산을 인도한 후 운교인은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은 수뇌진과 그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읍을 취하자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당유연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고 공명선사와 곤술도인도 단순한 예가 아닌 포근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현상자와 운녹산 그리고 신수사태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건법진인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때 그의 귓전에 곤술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의 수호령이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천거했네. 허나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다만 우연히 만나 말을 나누다 보니 진법에 대해 조예가 있는 것 같아 도움이 될 거라고 했네.’
주목 받는 일이 불편했지만 운청산은 곤술도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러할 만 하다고 이해했다. 그 순간 운녹산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기문둔갑에도 조예가 있는가?”
“기초나 겨우 깨친 정돕니다.”
운청산이 답하자 건법진인이 이어서 물었다.
“눈앞에 포천대진이 펼쳐져 있네. 알아보았는가?”
당황한 사람은 운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곤술도인이었다. 자신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건법진인이 사람들 앞에서 시험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운청산은 곤술도인을 힐끔 본 후에 대답했다.
“이름은 들어보았으나 배움이 얕아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차라리 안개가 끼어있었다면 겨우 의심이나 해보았을 테지요.”
건법진인이 은빛 눈썹을 부드럽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감위(坎位)의 포진이 불완전하여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지. 본도 또한 한참을 보고서야 확신했네. 허면 파진법을 아는가?”
“문을 닫는 것을 곤(坤)이라 하고 문을 여는 것을 건(乾)이라 하며 한 번 닫고 한 번 여는 것을 변화(變化)라 했으니, 어떤 진이든 간에 파진을 위해서는 그 변화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필수일 것입니다. 결국 시간의 문제가 되겠지요.”
운청산은 일반론을 말한 후에 잠시 사이를 둔 후에 물었다.
“일문의 폭이 얼마나 됩니까? 이십 장입니까?”
건법진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운청산은 산을 한 번 바라본 후에 말을 이었다.
“역시 이십 장이군요. 그렇다면 나아가고 머물고 물러날 수 있는 공간이 겨우 개문(開門)과 휴문(休門) 정도이니 결국 음양혼원지처까지는 일곱 시진 이상이 소요될 것입니다.”
건법진인이 약간은 놀란 듯 그리고 대단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현재 감위(坎位)의 포진이 취약하니 휴문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수도 있네. 그렇게 되면 휴문을 통해 생문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야.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운청산은 뭔가를 깨우친 듯 손가락 마디를 이용하여 계산해나갔다.
“모험을 감수한다면 네 시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건법진인이 은빛 눈썹까지 까닥이면서 흡족함을 표시했다.
“사제가 도움이 될 거라 하기에 반신반의했는데 믿음직하구먼. 함께 가서 혹시라도 내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즉시 말해주시게.”
건법진인이 겨우 안심한 낯빛을 드리우는 곤술도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운녹산이나 당유연과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낸다는 것이 불편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우리를 눈밖에 두는 것이 불안한 탓이었다.
그때 운녹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젊은 나이에 정말 박학다식하구먼. 일면 창피하나 또한 다행이로세. 내가 두 진인의 보표로 함께 가려했으나 뒷일을 생각해서 남기로 했네. 내 대신 두 분 진인을 보살펴 주시게나.”
그때 건법진인이 품속에서 나경(羅經)과 휴대용 해시계 꺼내 방위를 맞추어 살펴보고 말했다.
“개문이 우리 쪽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 각 정도 여유가 있구먼. 처리할 일이 있으면 다녀오게나.”
운청산은 모두에게 장읍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아쉬움을 제대로 표시하지도 못한 채 운청산은 당우리로부터 절대 산으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건법진인 등에게로 돌아갔다.
진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건법진인과 곤술도인 그리고 운녹산을 제외한 사대수뇌 그 외에는 운청산과 여덟 명의 청성도인들 뿐이었으니 모두 해서 열여섯 명에 불과했다.
건법진인은 해시계를 다시 살피고 모두에게 말했다.
“복잡한 설명은 하지 않겠소이다. 다만 세 가지는 유념하셔야 하오. 첫째, 각 문의 폭과 길이는 공히 이십 장 안짝이오. 빈도는 이동을 하지 않는 한 계속 중심에 있을 것이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빈도로부터 구 장 이상 떨어져서는 아니 되오. 둘째, 우리가 가는 길에는 놀람은 있을지언정 위험은 없을 것이오. 그 놀람 역시 휴문에서나 나타날 것인즉 환각을 보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하시오. 셋째, 당 가주께서 미리 조처를 취하신 탓에 사람으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기관의 위험마저 없는 것은 아니니 미리 대비하시오.”
일행의 표정을 확인한 후 건법진인이 먼저 걸어갔다. 삼십여 장을 전진해서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는 숲 앞에 이르렀다.
건법진인과 곤술도인 뒤 그리고 당유연의 옆에 서있던 운청산이 숲을 바라보며 생각을 떠올렸다.
‘숙부님. 앞으로 십여 장 나아가 아무런 변화가 없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사람이라면 부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운청산과 연결되어 있는 그들이었다. 환각을 보더라도 그와 연결된 기운을 쫓아 돌아올 수 있는 탓에 부탁을 한 것이었다.
운경산이 두 도인의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곤술도인이 빙긋 웃으며 운청산을 힐끔 보았다. 그때 운경산이 돌아왔다.
‘그저 숲이 보일 따름이구나. 이곳이 개문이 되느냐?’
운청산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건법진인이 확신을 한 듯 숲으로 들어갔다. 공명선사와 현상자가 그의 좌우에서 주변을 살피며 따랐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면서 삼십여 보를 걸어 올라간 건법진인이 멈추어 섰다. 그 순간 청성도인 여덟 명이 건법진인을 중앙에 두고 사방과 그 사이사이에 포진하여 주변의 나무와 땅을 일일이 살폈다.
건법진인이 웃는 얼굴로 돌아서서 운청산에게 물었다.
“진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 곧 건위(乾位)가 개문이 되겠지. 자! 이제부터 어찌 해야 하겠는가?”
마치 스승이 제자를 시험하는 듯했다. 운청산은 즉시 예의바른 학생이 되어 대답했다.
“전방은 혼원(混元) 우측은 진위경문(震位驚門) 좌측은 감위휴문이니(坎位休門)이니, 길은 하나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집니다. 최대한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변화가 시작되기 전에 감위휴문으로 옮겼다가 감방이 건방으로 바뀌길 기다리는 것이 첫째요, 즉시 감위휴문으로 옮겼다가 다시 전진하여 간위생문(艮位生門)으로 접어드는 것이 둘째입니다. 네 시진을 말씀하셨으니 선택은 두 번째지요.”
건곤파의 두 도인은 기특하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운청산도 기분이 좋았다. 단지 칭찬받는 느낌 때문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건법진인과의 대화가 귀곡산인과의 공부를 연상시킨 탓이었다.
그때 당유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운청산의 어깨를 짚었다.
“이보게. 장래 사위! 세상일이란 알면 쉬운데 모르면 한정 없이 어려운 것이네. 대충은 가는 길을 알고 가게 해주게.”
공명선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운청산과 당유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위라는 말 때문이었으리라.
운청산은 기쁜 마음을 모두 드러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건법진인을 바라보는 것으로써 허락을 구했다. 건법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말을 하는 대신에 주위를 두리번거려 평평한 땅을 찾고 거기에 바둑판 모양으로 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유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단순화 해보면 낙서(洛書)에 음양혼원(陰陽混元)을 중궁(中宮)에 두고 후천팔괘(後天八卦)를 팔방에 둔 구궁팔괘(九宮八卦)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아홉 칸이 하나의 구궁팔괘진이 되어 주변의 구궁팔괘진들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들어온 구궁팔괘진은 좌선(左旋)하고 있으니 양쪽의 구궁들은 우선(右旋)하고 있겠지요. 즉 우리는 앞으로 개문과 휴문 그리고 생문만을 이용하여 전체 아홉 단위 구궁 가운데 이 다섯 번째 열 구궁팔괘진의 중궁에 이르러야 합니다.”
운청산이 그림까지 짚어 가면 설명하자 주변사람들이 대충 이치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사태가 물었다.
“허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조만간 진위경문으로 바뀌겠구먼. 진이 변화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운청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음양이 교차함에 따라 각각의 위는 하루에 두 바퀴를 돕니다. 결국 방위가 바뀔 때까지는 오 각과 삼분지 일 각이 걸리지요.”
신수사태가 편안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개문이 되자마자 들어왔으니 아직 오 각 정도는 여유가 있는 셈이구먼.”
“반드시 그렇지가 않소이다. 사태.”
건법진인이 끼어들었다. 그는 모두 잘 들으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적절한 시간 안에 이곳 생문에 이르러 다른 단위 구궁팔괘진의 개문이나 휴문 혹은 생문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만약 시기를 놓친다면 몇 시진 동안이나 단위 구궁팔괘진 안에 갇혀 생문과 휴문을 오가며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지요.”
그때 당유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면 최종 목적지인 이곳의 중궁까지의 실제 거리는 어느 정도가 됩니까?”
“대략 이백육십여 장을 지나야 되겠군요.”
“어허! 그렇다면 삼사십 장 정도는 매복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습니다그려.”
당유연이 실수했다는 듯 혀를 차자 현상자가 웃으며 나섰다.
“우리가 안전한 곳은 저들도 안전하고 우리가 위험한 곳은 저들 역시 위험할 것이오. 매복이 있다 해봐야 이십 장 안쪽이니 얼마나 되겠소이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현상자는 말을 하면서 건법진인을 바라보며 확인했다. 건법진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상자와 당유연이 동시에 안도했다.
건법진인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대충 개념은 잡으신 것들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운청산이 현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련주님. 휴문은 이곳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착시와 환각은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니 들어설 때 청성의 진인들께서는 건법 진인의 앞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순간 장년의 도사들이 불쾌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주시했다. 아무리 모른다 해도 정신력마저 어린 네게 질 것 같으냐는 하는 눈빛이었다. 그 순간을 넘겨준 사람이 바로 건법진인이었다.
“이 친구의 말이 옳소이다. 보시면 아실 터. 모두 청심(淸心)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자네가 앞장서게.”
건법진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청산이 앞서 걸었다.
‘숙부님. 어떤지 살펴주십시오.’
운경산과 운추산이 동시에 앞으로 나아갔다가 놀란 눈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늪지다. 아무리 위로 가려해도 계속해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다행이군요. 감위만이 유독 부실하다 하더니만---.’
‘다행이라니?’
‘완벽히 포진되었다면 이곳은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있을 것이고 휴문 안은 폭풍우치는 대해가 보였을 것입니다.’
운청산이 안도하며 마침내 경계를 넘었다. 겨우 한 발 내딛었을 뿐인데 눈앞에 있던 숲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들은 대로 축축하고 음습한 늪지대만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벌레가 기어 다니고 섞은 나무들이 떠다녔다. 그것이 환각임을 알면서도 너무 생생하여 환각임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운청산은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발이 보이지 않았다. 무릎까지 물에 차 있었고 점점 더 깊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게 느껴졌다.
‘숙부님 눈에는 어찌 보입니까?’
‘청산! 괜찮으냐? 네가 늪에 잠겨 머리만 남았다. 내 하체도 안 보인다.’
‘대단하군요. 역시 환각입니다. 차라리 눈을 닫고 듣기만 하세요.’
운청산 그도 눈을 감았다. 이상했다. 눈을 감았음에도 발아래 축축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헉!”
외마디 신음성이 좌우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운청산이 소리쳤다.
“모든 것이 환각이니 눈을 감은 채로 발길을 더듬어 이십 장만 전진하십시오. 기관이 있을 수도 있고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운청산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고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지금 운청산이 걷는 곳은 틀림없이 산자락 경사면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서 경사를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점점 더 답답해지고 걷기 힘들어질 뿐이었다.
발끝에 돌부리가 차이는 것 같았다. 운청산은 손을 앞으로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손에 거친 나무가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허공을 더듬고 있는데 만져지는 느낌은 나무였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허리까지 빠져있었다.
운청산은 급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느낌마저도 현실과 환각을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차분히 심호흡하여 환각이라 여기는 모든 것들을 마음속에서 쫓아냈다.
세 개의 나무를 둘러서 계속 걸었다. 겨우 십여 장 정도를 지난 듯했다. 그때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퓽!
운청산은 급히 뒷걸음질쳤다. 그의 양 어깨에 두 사람이 부딪쳤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건곤파의 두 도인들이리라.
바로 그때 사방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퓨퓨퓨퓨퓨퓨퓨퓽!
운청산은 태청구벽기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그의 목소리를 뒤따라 전신에서 피어오른 청기는 겹겹이 층을 만들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건곤파의 두 진인들마저 감싸 안았다.
누군가가 눈을 뜨고 볼 수만 있었다면 장관을 구경했으리라. 건곤파의 두 진인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전신에 호신강기를 일으켰으니 환각들이 사방으로 밀려나고 빛 무리만이 번득였으리라.
잠시 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무엇이었나?”
곤술도인이 물었다.
“야복경과(夜伏耕戈) 같았습니다.”
야복경과란 가장 단순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일종의 기관이었다. 적게는 수 개 많게는 십여 개의 쇠뇌에 줄을 연결하여 바닥에 팽팽하게 당겨놓음으로써 누군가가 그 줄을 밟거나 건드리면 일시에 쇠뇌가 발사되게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 군문에서 주로 사용되는 가장 기초적인 기관장치로, 작은 종 같은 것을 함께 달아서 야밤에 경계병을 대신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초적인 것이라 하지만 눈을 떠도 현실을 볼 수 없는 휴문 안에서는 지극히 효과적인 것이리라. 비록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몇 보 앞에서 발사되는 쇠뇌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이 건곤파의 두 도사들의 안위를 묻는 동안 현상자가 청성의 도인들에게 일일이 안위를 물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대답했다.
운청산이 소리쳤다.
“십여 장 남았습니다. 아직 함정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바닥을 쓰다듬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운청산은 건곤파의 두 진인에게 자신의 양 어깨에 한 손을 얹게 만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마침내 휴문을 벗어날 수 있었다.첫 번째 소단위 진을 벗어나는 데는 무려 한 시진 반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일단 벗어나자 미리 아귀를 맞춰놓은 듯 순조롭게 네 번째 열의 구궁팔괘소진까지 옮겨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성의 도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나 낙오했다. 첫 번째 소진조차 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괜찮다 했지만 막상 생문에 들어서니 허벅지에 쇠뇌살을 꽂은 채 피를 흘리는 이가 있었다. 걱정을 끼치는 것을 저어하여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
휴문의 기관과 함정은 갈수록 더 험난해졌다. 결국 세 번째 열의 소진을 통과할 때 청성의 도사 한 사람이 또 다시 낙오했다.
아마도 그들 두 사람은 파진이 될 때까지 평생 경험하기 힘든 일들을 계속 감당하고 있어야 하리라. 많이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만 오각과 삼분지 일각이 흐를 때마다 생문이 휴문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다시 생문으로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우스운 일도 있었다. 첫 번째 소진의 생문에 이르렀을 때 일행들은 생문의 위쪽에서 잠이 들어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발견했다. 모두 마흔 두 명이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병장기와 은형포(隱形布) 혹은 위장포(僞裝布)를 든 채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생문이 휴문으로 바뀌는 순간 다시 생문으로 이동하려고 준비하던 이들이 삼일취혼산을 마시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들도 생문과 휴문을 오가면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을 발견함으로써 운청산 일행은 상대가 대충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을 상대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건법진인은 네 번째 소진의 생문에 들어서자마자 햇살을 찾아 해시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근 세 시진이 걸렸소이다. 이곳이 다시 휴문으로 변하는 데까지는---.”
건법진인은 손가락 마디를 짚어가며 시간을 계산했다.
“이 각 정도 여유가 있소. 그리고 다시 휴문와 생문을 오가면 사열 소진의 마지막 칸에 이를 것인데, 거기서부터 포천대진의 음양혼원지처까지는 시간이 별 의미가 없소이다. 오열에 접어들자마자 바로 휴문과 생문으로 이어지니 촌각 안에 생문에 이를 것이고 거기서 파진을 시도하면 되오. 다만 당가의 취혼산이 오열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기관뿐만이 아니라 매복이 있을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할 것이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건법진인이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한숨 돌리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위쪽으로 걸어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곳이 생문의 끝인 동시에 휴문으로 변한 후에도 휴문의 끝이 되는 까닭이었다.
건법진인이 운청산을 옆에 앉혀두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기대보다 더 큰 힘이 되어 주었네. 수고했어.”
운청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답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보는 사람이 건법진인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떨어져 앉은 청성의 도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이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공명선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이 시주를 보고 있으면 수미개자(須彌介子)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구먼. 아직 연소하건만 일신에 지닌 재주가 참으로 출중하니 노납의 나이쯤 되면 세상을 담은 대기가 될 것이로세. 만족하지 말고 또 자만하지 말고 늘 정진하시게.”
운청산이 낯이 뜨거워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숙인 그때 신수사태가 당유연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 시주에게 장래 사위라는 말씀을 하시던데 사실이오니까?”
당유연이 눈빛에 흐뭇함을 담아 운청산을 보며 대답했다.
“그럼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당가타로 돌아가 혼례를 올려줄 생각입니다. 사고무친으로 곤륜에서 홀로 자랐다 하니 대가족의 정을 흠뻑 안겨줄 작정이지요.”
신수사태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운청산을 응시했다.
“아쉽소이다. 빈니에게도 과년한 제자가 있는데, 한 발 늦었습니다그려.”
신수사태는 반 농담으로 한 말이었으나 그 순간 흠뻑 웃음에 취해있던 당유연의 눈에는 씁쓸함이 드리워졌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당명인이 나라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신수사태는 농담에 대한 반응이 없자 당유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당유연은 씁쓸함 대신에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껄껄껄. 사태, 사위는 양보할 수 없소만 남은 자식은 드릴 수 있소이다. 어떻습니까? 데려 가시겠습니까?”
신수사태가 입도 가리지 않고 크게 웃었다.
“오호호. 누가 들으면 빈니의 제자가 장가가는 줄 알겠습니다. 내 나중에 연아에게 당가에 들어가 살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지요.”
그때 당유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중에 딴 말씀 하시면 아니 됩니다? 성사만 시켜주신다면 제 자식 놈이 아미산에 들어가 산다 해도 뭐라 하지 않겠소이다.”
신수사태가 다시 웃음보를 터뜨리는 순간 건법진인이 일어서서 나무들 사이로 흘러드는 햇살로 다가갔다. 시간을 확인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 한참 재미있소만 일단은 자리를 바꾸고 나서 계속하셔야겠습니다.”
모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채 열을 세지도 못한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땅거미가 지듯 묘한 기운이 슬금슬금 발아래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 기운이 발목을 기어오르는 순간 눈앞의 경관이 순식간에 뒤바뀌어버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음습한 늪지대뿐이었다.
“지금이오.”
건법진인의 목소리를 신호로 모두가 돌아서서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또 다시 경관이 바뀌어 조금 전과 다름없는 숲이 펼쳐졌다.
퓨퓨퓨퓨퓨퓽!
또 다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십여 줄기의 검광이 번득였다. 운청산은 그 즉시 건곤 두 도인의 앞으로 이동하여 청광이 번득이는 손을 내뻗었다. 커다란 격타음과 함께 수십 개의 죽창을 박은 나무판자가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당황했을 만도 하건만 누구도 상기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던 탓에 사람들은 모두 수월하게 대처해낸 것이었다.
“미안하오이다. 또 다시 빈도의 발이 사고를 냈구려.”
곤술도인이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네 사람이 창두봉 정상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무극과 우상 백무강이 나란히 서고 그 뒤로 천기신사 백진궁과 오호신궁 백영담이 서있었다.
백무극이 말했다.
“들어간 자는 아무도 못나왔다지요? 이렇게 되면 오행신궁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고 말았군요.”
“그렇습니다, 소군. 정파의 탈을 쓰고 그렇게 서슴없이 독을 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백무강은 말과는 달리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인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것의 정체가 밝혀진 탓이리라.
백무강이 다시 말했다.
“진궁. 지금쯤이면 대충 시간이 된 건가?”
백진궁은 하늘을 보고서 해의 위치를 살피고 차분히 말했다.
“그들의 능력이 예상대로라면 이 각 안에 파진될 것입니다.”
백무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그런가? 어쩐지 시취(尸臭)가 점점 강해지는구먼. 함도와 수련을 생각하니 기분이 안좋아.”
백무극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렇지요? 헌데 상관 북쪽으로는 누구를 포진시킬 생각입니까?”
“파불을 배치할까 합니다. 아무래도 제일 약세니까---.”
백무극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당연한 걸 물었습니다. 새 세상에 파계승 따위가 필요할 리 만무한데 말입니다.”
백무강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때 천기신사가 말했다.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요.”
백무극과 백무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마지막 변화를 기다렸다. 시공이 맞물려 변화하는 순간 생문으로 들어서서 오열의 휴문을 밟자마자 다시 그 옆쪽 소진의 생문으로 뛰어들게 되리라. 거리라고 해 봐야 이십일이 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변화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건법진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일행은 재빨리 생문 안에 들어선 후에 생문의 영역 안에서 왼쪽 가장자리를 향해 이십 장을 달렸다. 그리고 그 즉시 오열의 휴문에 다시 들어섰다가 곧바로 생문으로 뛰어들었다.
희한한 일이 생겼다. 변화하자마자 생문에 들어섰으니 오각이 조금 넘는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눈앞에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눈을 뚱그렇게 치뜨고 운청산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운청산 일행은 한 순간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들 역시 생문에서 휴식을 하고 있다가 그곳이 휴문으로 바뀌는 순간 다시 바뀐 생문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미처 은신도 못하고 마주친 것이었다.
채채채채챙!
무공수위가 다른 만큼 반응도 달랐다. 상대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서있는 그 순간 청성의 도사들이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현상자가 뒤따라 나아가며 소리쳤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소. 두 분 진인을 보호하시오.”
그러나 굳이 현상자까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여섯 자루의 검에서 칠십이파검의 검기가 뻗어나가는 순간 낮은 비명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피가 튀었다.
한마디로 파죽지세(破竹之勢).
여섯 명의 청성 도사들이 사십여 명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상대는 단 한 자루의 비도조차 뿌려보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도륙이나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 공명선사와 신수사태가 대표로 불호를 외우며 극락왕생을 빌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