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79)

“따라오면 짐이야, 넌.”

“제기랄! 말 참 매몰차게 하네. 아니까 안 가는 거 아니오. 어쨌든 세 사람 다 무사히 돌아오쇼.”

강정이 웃으며 종길의 머리를 툭 쳤다.

“우리가 너 같은 줄 아냐, 이 자식아? 좀 좋아졌다고 까불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조심할 테니 걱정 마.”

운청산이 덧붙여 말하자 종길은 씁쓸하게 웃다가 당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옆으로 빠져주었다. 종길을 노려보던 당우리가 그때서야 운청산 앞에 바짝 붙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 화났어요.”

운청산이 의아함을 담아 눈을 치떴다.

“나한테?”

당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빠한테요. 어쩜 그럴 수가 있죠? 아빠는 진즉에 알았을 텐데,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안 해 주죠?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 내도록 운 가가와 함께 있었을 텐데---.”

운청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딸 낳기 싫어졌소.”

이번에는 당우리가 눈을 치떴다.

“왜요? 어제 밤에만 해도 나 닮은 딸 낳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장인어른 떠나시는 것도 몰랐단 소리 아니요? 그런데도 걱정은커녕 나하고 놀 시간이 없었다고 원망만 하고 있으니, 딸 낳아 아무리 귀하게 키워도 시집갈 때가 되면 배신감만 늘 것이오. 아들을 낳아주시오.”

당우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다가 운청산의 가슴을 두드렸다.

“몰라요. 아! 근데 뭐라 그랬죠? 분명히 장인어른이라고 했었죠?”

운청산이 쑥스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달리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당우리는 다시 한번 운청산의 가슴을 두드리고 웃으며 손을 뻗었다.

“줘요.”

“뭘?”

“옥소 말이에요. 내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구요.”

운청산은 웃으며 옥소를 꺼내 건넸다.

“걱정 마시오. 반드시 돌아오겠소.”

“응!”

당우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서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운청산의 귀를 잡아당겨 소곤거렸다.

“뽀뽀해줄까요?”

운청산이 눈을 둥그렇게 치뜨며 주위를 살폈다.

“여-여기서?”

“으응.”

당우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가 속았지 하는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때 등 뒤에서 강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대주! 우리 가야 돼.”

운청산은 손을 뻗었다. 당우리가 그 손을 잡았다. 서로 흔들다가 조금씩 멀어졌다. 손가락 끝이 손목에서 떨어져 손바닥을 긁고 이어서 손마디를 건드리고 손끝을 훑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 채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총인원은 줄어들었건만, 도강에 걸린 시간은 지난번보다 배 이상 걸렸다. 바람이 지난번만 못했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원인은 두 번째로 도강한 당가의 배에 있었다.

먼저 도강한 군룡전의 고수들이 포구 주변을 삼엄하게 지키는 가운데 당가 사람들이 나무 상자들을 내리고 방수포에 쌓인 정체 모를 물건들을 내렸다. 그리고 미리 대기시켜놓은 듯, 제 시간에 당도한 수레에 그것들을 실었다. 그렇게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열두 대 분량의 짐을 내리고 실었으니 시간에 지체될 수밖에 없으리라.

당가의 청년들이 수레를 끌고 그 주위를 군룡전 소속 당가의 고수들이 호위하여 포구를 떠난 후부터는 별 달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용문비선 오호를 타고 마지막으로 도강한 정명단이 포구에서 대오를 정렬했다. 각 조별로 열을 맞추니 자연스럽게 오열종대가 이루어졌다.

운청산은 뒤에서부터 인원을 점검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이 부대주! 조심해서 다녀오게.”

강에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배 돌릴 준비를 하던 용문비선 삼호가 보였다. 장오와 공 노인을 비롯한 선부들이 입을 모아 소리치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운청산도 소리치고 손을 흔들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오가 소리쳤다.

“배를 돌려라.”

돛이 뒤에서 부는 바람을 칼날처럼 가르며 비틀리는 순간 배가 부드럽게 선회했다.

운청산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정명단의 선두로 나아갔다. 자기들끼리 무슨 말이 있었는지, 강정 부부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요?”

“응. 이제 사람들 잘 사귀네? 청인 진인께서 보셨다면 좋아라 하셨을 거야.”

강정이 운청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때 앞에서 가던 이정이 돌아보며 물었다.

“응? 숫기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사람 못 사귈 정도는 아닌데? 예전에는 낯을 많이 가렸나 보오?”

강정이 예전 생각난다는 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낯을 가려요? 그 정도가 아니었지요. 제가 청산 아니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정이 다시 말했다.

“우리 딴에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구명지은에 감사한다고 인사를 했는데, 청산 이 친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더니 가버리더군요.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너무 오만방자하구만,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쑥스럽고 낯이 뜨거워 얼른 자리를 피한 것이더라구요. 그러니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야---.”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운청산이 웃으며 끼어들자 이번에는 이정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난지 몇 개월 안됐다며? 처음에 그 정도였다면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는걸. 이젠 아길도 못하는 연애까지 하지 않는가?”

강정과 이정이 동시에 껄껄거리자 운청산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도망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운청산이 짐짓 돌아서려는 시늉을 해보이자 이정이 그의 어깨를 잡아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루한 행군이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지루한 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정과 강정이 운청산 놀리기를 그만 둔 후로 별 다른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느긋함도 엿볼 수 없었다.

“많이들 긴장하고 있는 것 같군.”

이정이 소곤거렸다. 운청산도 같은 걸 느끼고 있었던 까닭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앞쪽에서 전령이 뛰어왔다.

“금강 포구까지 이틀에 간다 하오.”

그 말만 남기고 전령은 되돌아갔다. 이정이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더 긴장하겠군.”

“그러게요. 지금도 좋지 않은데---.”

그러나 군령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정은 뒤로 돌아 뒷걸음질치면서 소리쳤다.

“금강 포구까지 이틀에 간다. 속보!”

이정과 운청산이 빨라진 앞쪽과 보조를 맞추자 정명단 사람들의 보폭도 자연스레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조용하던 행군이었는데 걸음을 재촉하니 들리는 것이라고는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때마침 강정의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동삼아. 너 아침부터 왜 이렇게 조용하니? 무슨 일 있어?”

운청산이 빙긋 미소 지었다. 악동삼이라면 그도 잘 아는 친구였다. 정명단 안에서 운청산보다 어린 네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급 무사들 가운데 몇 안 되는 정명당 소속이었다.

그는 여러 모로 종길과 닮은꼴이었다. 종길보다는 두 살 어렸지만 무공 수위도 그에 버금갔고 수다스러울 정도로 쾌활한 것도 비슷했다. 다만 용모는 크게 달라서 종길이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면 그는 소년티를 벗지 못한 동안(童顔)이었다.

운청산도 대답이 궁금해서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악동삼이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문취옥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문 여협! 뭣 좀 물어 볼 게 있는데요?”

문취옥은 별로 귀찮게 생각지도 않고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동삼이 물었다.

“저, 경도(經道)가 끊겼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순간 문취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악동삼을 노려보았다. 그가 자라목을 하고 그녀의 눈빛을 외면하는 순간 그녀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 소리 누구한테 들었어?”

악동삼이 대답하기를 주저하자 문취옥은 강정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악동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바른대로 대, 이 자식아!”

야차도 문취옥의 성깔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조용하던 정명단 사람들이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 악동삼을 주시했다. 뒤쪽에서마저 “뭔데? 뭔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동삼이 눈치를 살피다가 문취옥의 눈이 야차처럼 찢어지는 걸 보고는 급히 말했다.

“금어향에 계집애 하나 있어요.”

주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뭔가 사단이 나기는 난 것 같은데 경도라는 생소한 말과 금어향의 계집애라는 말로 대강을 유추하기는 힘든 탓이리라.

그때 문취옥이 말했다.

“잤어?”

“예.”

“언제?”

악동삼이 주저하다가 그녀의 말꼬리처럼 또 다시 치켜 올라가는 문취옥의 눈을 보고는 급히 대답했다.

“그-그게, 불일장에 왔던 그 다다음 날---.”

“그러니까 두 달 전에?”

“예.”

“몇 살짜리야?”

“열여덟.”

딱, 소리가 나고 악동삼이 앞으로 나동그라질 정도로 밀려나갔다.

“이 자식이 순진한 얼굴을 해가지고 책임지지도 못할 짓을 저질러? 죽일 놈!”

그 순간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오우! 동삼이가 사고 쳤대.”

“장하다, 악동삼!”

“뭐어? 두 달 전? 그럼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것도 여염집 처자를? 정말 능력 좋구만. 자식아! 부럽다.”

순간 문취옥이 고개를 홱 돌려 눈에서 불꽃을 토하자 낄낄대던 이들이 바로 외면하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잠시를 가지 못했다. 금새 킬킬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취옥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악동삼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서 돌아가. 너 죽으면 내가 지옥까지 쫓아가서 또 죽인다. 너 같은 놈이 아빠노릇 제대로 할는지 모르겠다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악동삼은 눈을 치떴다. 사실 그는 경도가 끊겼다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냥 순진한 여자 아이를 꼬드겨 야합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줄만 알았던 것이었다.

“예에? 아빠요?”

문취옥의 눈에서 다시 불꽃이 이는 순간 강정이 그녀를 대신하여 악동삼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 자식아! 지금껏 무슨 말 들었어? 여자아이가 사내놈에게 경도가 끊겼다고 말하는 것은 임신했으니 책임지라는 소리야, 이 못된 자식아!”

강정은 짐짓 야단치는 척하면서 문취옥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는 있었지만 불끈 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강정은 슬며시 손을 뻗어 문취옥의 어깨를 꼭 쥐어주었다. 만약 문취옥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으리라. 황폐한 마음을 안고 강호를 떠돌지는 않았으리라. 시골 아낙과 초부가 되었더라도 웃으며 살았으리라.

문취옥이 강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실소했다.

“얼굴에 괜찮다고 쓴 거 맞아? 나도 괜찮아.”

문취옥의 말에 강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눈을 치뜨자 강정은 그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괜찮다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썼소.”

강정이 눈을 찡긋거리자 문취옥은 빙그레 미소 짓다가 하늘을 보고 마치 남자처럼 허허하고 웃었다.

그때 바닥만 보고 걷던 악동삼이 어금니를 악다문 채 홀로 중얼거렸다.

“씨팔! 미친년!”

순간 펴졌던 문취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강정도 다시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때 악동삼이 다시 중얼거렸다.

“씨팔! 살아오겠다고 말이나 해줄걸. 정말 좃 같네.”

문취옥이 불꽃을 누그러뜨리고 슬며시 외면할 때, 강정은 뻗었던 주먹을 펴서 악동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가 소곤거렸다.

“불장난 아니었어? 좋아한 거야?”

악동삼이 붉어진 눈으로 강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냥 꼴렸으면 돈 주고 했지요. 하두 착하고 예뻐서 뒷생각도 안 하고 그만---.”

강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이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걷던 악동삼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외쳐 물었다.

“부대주! 천계에서 제일 높은 신이 원시천존 맞지요? 염마장(閻魔帳)을 지닌 신이 북두성군 맞지요? 구천현녀가 전신(戰神)이 맞지요? 관성제군(關聖帝君)이 무신(武神)이 맞지요?”

정작 질문을 받은 운청산은 대답할 틈이 없었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인 까닭에 계속해서 고개만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악동삼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순간 그가 중얼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원시천존, 석가대불, 옥황상제, 북두성군, 구천현녀, 관성제군께서는 이 몸을 보살피시어 칼 맞지 않게 하여 주사이다.”

석가대불까지 끼어들자 사람들이 다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동삼에게 있어서 그것은 간절한 진언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웃든 말든 보보마다 진언을 외웠다.

이정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긴장이 좀 풀린 것 같군.”

운청산도 씁쓸하게 웃으며 동의했다.할 일 없이 침상에 누워있던 종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우리가 오른손 중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침상 주변을 계속 도는 탓이었다.

“당 소저! 그만 좀 하시오. 오락가락, 오락가락. 잠시도 가만히 못 있네.”

순간 당우리가 딱 멈춰서며 종길을 노려보았다.

“종 소협! 왜 여기 있죠? 이제 그만 천혜원을 나가도 된다고 그랬잖아요? 사나흘에 한 번씩만 오라했는데 왜 아직 여기에서 굼벵이처럼 뒹굴 거리고 있냐구요?”

종길은 당우리의 무서운 눈을 외면하며 갑자기 배를 잡았다.

“윽! 갑자기 왜 이렇게 땡기냐? 아이고, 아파라.”

종길은 배를 잡고 뒹굴며 당우리를 외면했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복귀가 아니면 탈퇴.

용부들 가운데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무림련을 떠났다. 천혜원에 남은 이들은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중환자들뿐이었다. 그러니 종길의 처지는 매우 애매했다. 운청산과는 아쉬워도 헤어질 수 있다지만, 강정 부부와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무림련에 잔존해야 하는데 싸우지 못하고 중환자도 아니니 이도저도 아닌 처지였다.

만약 당우리가 배려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돈으로 금어향에 머물러야 하리라. 돈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것.

적어도 천혜원에 있으면 말을 주고받을 사람 몇은 있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종길은 꿋꿋하게 천혜원의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종길은 또 다시 침상 주변을 빙빙 돌며 안절부절못하는 당우리를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때 당우리가 말했다.

“종 소협!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종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애원했다.

“조용히 있겠소. 제발 내쫓지만 마시오.”

“무슨 소리예요?”

당우리는 자신이 조금 전에 매정하게 내뱉은 말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의아함을 드러냈다.

“나가란 소리 아니오?”

종길의 조심스런 물음에 당우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숙부님들이 나한테 꼼짝 못하는 거 봤지요? 단단히 말해 뒀어요. 종 소협이 자진해서 나갈 때까지는 아무 말 말고 놔두라구요.”

“휘유!”

종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당우리가 다시 말했다.

“근데 나 따라갈까 봐요.”

“누구를? 청산?”

종길이 말도 안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치떴다. 그러나 당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소? 거긴 전쟁터요. 당 소저, 사람한테 암기도 못 던지지 않소? 그런데 가긴 어딜 간다는 소리요? 그놈은 절대 죽을 놈이 아니오. 절벽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고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놈이오. 그냥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시오.”

종길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멀쩡히는 아니지요. 어깨에 구멍이 뚫리고도 말도 안하고 아픔을 혼자 삭인 바보예요. 취옥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거라구요. 나, 싸우러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다친 사람들한테는 나도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구요.”

“안 가는 게 좋소이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과 싸움 중에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천지차이요. 당 소저 심성으로는 눈 뜨고 보지 못할 것이오. 괜한 후회하지 말고 가지 마시오.”

당우리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종길은 그 얼굴에서 확고한 결심을 읽었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나중에 청산이 알면 막지 않았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

종길의 중얼거림을 들은 당우리는 빙긋 미소 지었다.

“걱정 말아요. 열심히 말렸다고 말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당우리는 이미 결심을 굳혔음을 확인시켜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사를 빠져나갔다. 천혜원의 기둥 둘을 돌아 병사 뒤편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옷장으로 다가갔다. 청의경장과 녹의경장을 번갈아 들어보고는 결국 청의를 택하여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렸다. 그리고 침상 밑을 더듬어 지함 하나를 꺼내어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종 소협의 걱정은 당연한 거야. 난 그이에게 기쁨이 되고 싶지,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아.”

당우리는 결심을 굳힌 듯 지함의 뚜껑을 열었다. 칸칸으로 나눠진 지함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알아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당우리는 우선 한령수를 꺼내어 품속에 넣고 녹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은 복대를 찼다. 그리고 매화수전(梅花袖箭) 여섯 개와 이화폭우침통(梨花暴雨針筒) 두 통을 꺼내 복대의 빈 자리에 끼웠다.

반이나 비어버린 지함을 바라보던 당우리의 눈에 다시 망설임이 드러났다. 그녀는 한 자가 조금 못되는 가느다란 죽통을 들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맞으면 사람이 죽을 텐데---. 그래. 운 가가에게 주자.”

암혼의 봉인을 풀지 않는 한 사용할 수 없는 무형뇌전마저 네 개나 챙긴 당우리는 그것들을 몸 구석구석에 숨기고 벌떡 일어섰다.

“응? 생각보다 많이 무겁네? 어쩌지? 아! 그렇지. 약통도 챙겨야 되잖아? 그럼 아예 바랑 같은 거 하나를 등에 지는 게 낫겠다.”

당우리는 방을 나섰다가 급히 되돌아갔다. 그리고 벗어놓은 옷의 품속 주머니에서 운청산의 옥소와 목련비 그리고 전낭을 챙긴 후에 다시 방을 빠져나왔다.

*        *         *

우상 백무강은 고색창연한 원목 책상 위에 걸쳐진 탐스러운 흑염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가볍게 목을 흔들었다.

“또 있느냐?”

책상 옆에 시립하여 있던 백영담은 전과는 다른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백무강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지럽구나. 좀 치워주련?”

백영담은 말없이 목례하고 책상 위에 나뒹구는 수십 개의 문서들을 말아 한쪽으로 치웠다.

백무강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영담! 네 마음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무강 아저씨! 접니다.”

백무강은 백영담을 힐끗 보고 급히 일어섰다.

“들어오시지요, 소군.”

두 사람은 평배로 인사하고 방 가운데 자리한 원탁에 마주앉았다. 백무극이 미소 띤 얼굴로 백영담을 바라보았다.

“영담! 와서 놀아 달라했더니 감감무소식이더구나.”

백영담이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드리우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군. 어제는 좀 바빴습니다.”

“그래. 내가 참 철이 없지.”

백무극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백영담의 힘없는 얼굴을 보고는 그냥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백무강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어떻습니까? 제법 세를 갖춰서 온다지요?”

백무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무림의 삼분지 일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소이다.”

“호오! 갑자기 그렇게나?”

“예상한 정도요, 소군. 청성과 운가가 과거의 은원을 떠올렸을 테니 그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되지요. 문제는 당가인데---.”

백무극이 이채를 떠올렸다.

“당가가 왜요?”

“배에서 열두 수레의 짐을 내렸다고 합디다. 독이나 암기라 하기에는 너무 많지요?”

백무극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지 알 수 없답니까?”

백무강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측 사람들이 볼 수는 있지만 들을 수는 없는 위치에 있는데다가, 움직이는 중에도 기밀을 엄중히 유지하고 있어서 어렵다더군요.”

백무극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때 백무강이 잊고 있었다는 듯 백영담을 돌아보며 말했다.

“담아! 칠호 문서 좀 가져오겠느냐?”

백영담이 책상으로 가서 두루마리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백무강은 백무극에게 그 두루마리를 건넸다. 문서를 차분히 읽은 백무극이 고개를 들어 백무강을 응시했다.

“랏싸의 상황이 좋지 않다? 허! 이거 문제네요. 내가 떠나올 때만해도 그런대로 버틸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이번 일은 아예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그렇지요? 전멸을 시켜버려야 뒤가 쉬워질 것이오.”

“하지만 저쪽도 만만하게 볼 전력이 아닌데, 그리 하려면  우리 측 손실이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전멸시킨다 해도 강 건너에는 사대 세력의 육할 이상이 남아있는데 우리가 도강할 여력이 없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지요.”

백무극이 미간을 찌푸리자 백무강이 말했다.

“좌상의 복안은 이렇소이다.”

한 동안 백무강의 말이 이어지고 백무극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당가의 그 수레들이 걸리시는 겁니까?”

“오직 그것에 대한 정보만 없소이다. 그러니 대책이 있을 턱이 없지요.”

백무강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그때 방문 앞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우상 어르신! 심천신문주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백무강과 백무극이 동시에 의외라는 듯 눈을 치떴다.

“무령이? 그가 왜 여기까지?”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서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백무극이 말했다.

“대전으로 인도하고 내전주들과 외문주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인기척이 멀어져갔다.

“가십시다, 소군.”

“그러시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권하며 방을 나섰다. 그 뒤로 백영담이 조용히 뒤따랐다.

여덟 명의 노인과 초로인들이 중앙 원탁의 입체지도 주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때 백무극 등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이 일제히 허리를 접었다.

백무극과 백무강은 환한 미소를 짓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디 보세. 함도와 우련 그리고 철후와 낭우는 지금껏 같이 있었고, 진궁 역시 다시 보니 반갑고, 파불도 와주었군. 그런데 무령 자네까지? 의외네 그려.”

천궁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사람 심천궁주 조무령, 정확히 말해서 천궁의 외육문 가운데 하나인 심천신문의 문주 백무령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백무강에게 건넸다.

“좌상께서 보내신 겁니다.”

백무강은 원탁 앞에 두루마리를 펼쳐 백무극과 함께 읽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백무강이 말했다.

“허면 혼자 온 게 아니로구먼.”

백무령이 다시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백무강이 이어서 말했다.

“허! 홍라교가 여러 사람 바쁘게 만드는구먼. 좌상도 상당히 불안했나 보이. 어쨌든 이리만 되면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겠지. 그럼 음도는 이미 떠난 건가?”

백무령이 말했다.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며 뵙지 못하고 간다 했습니다.”

백무강이 웃음 띤 얼굴로 백무극을 보자 그가 말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 생겼습니다.”

백무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가운 사람들이 이리 많이 모였으니 그냥 있을 수는 없지요?”

모두가 반색했다. 백무극이 사람들을 이끌고 앞장섰다. 그때 백무강이 말했다.

“진궁과 함도는 조금 있다 나와 같이 가세.”

천기신사와 백함도가 허리를 접고 기다렸다.

백무강은 자신이 입 떼기를 기다리는 두 사람을 안쓰럽게 응시했다.

“두 사람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먼.”

두 사람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백무강을 응시했다.

백무강은 먼저 백함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했다.

“우선 함도 자네와 우련에게는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해서 미안하구먼.”

백함도가 허리를 접었다.

“천군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주저하오리까?”

백무강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 말할 줄 알았네만, 그래도 미안해. 평생을 바쳐 이룬 것인데 하루 만에 다 날리라고 해야 하니 자네 낯을 바로 볼 수가 없어.”

“그 하루를 위해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백무강은 평온한 백함도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실룩였다. 그리고 다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가 천기신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궁 자네에게는 늘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라 하고서도 늘 불러대니 미안하다네. 허나 자네 없이는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 없으니 어쩌겠나?”

천기신사 백진궁이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저를 대신했어야 할 환도가 아쉽게도 먼저 가버렸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제 일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본문의 환혼당주(還魂堂主)와 철왕당주(鐵王堂主)가 이번에 큰일을 해내었습니다. 그로 인해 일이 크게 줄어들었지요. 예상보다 더 빨리 일을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 듣긴 들었어. 포백철심액(捕魄鐵心液)이라 했던가?”

“예.”

“근데 그것이 정녕 큰 도움이 되겠는가?”

“일정을 반 정도 앞당길 수 있는 쾌거라 할 수 있지요.”

백진궁이 보기 드문 미소를 짓자 백무강도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행이야. 그럼 미안해하지 않고 부려먹어도 되겠구먼. 그나저나 자네가 애써서 만든 포천진인 만큼 제대로 써먹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하니 아까워.”

“청성의 현상자가 초빙한 술사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백진궁의 갑작스런 말에 백무강은 의아함을 드러내면서도 대답했다.

“뭐라더라? 건곤파라 했던가?”

“건법과 곤술입니다. 이름은 들어보았지요. 제법 재주가 있는 자들입니다. 곤술의 능력은 음도에 버금갈 것이고 또 그 사형인 건법 역시 뛰어나서 포천진을 쉽게 알아볼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만 의존한다면 저들은 오히려 신중해질 것이고, 그리되면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또 결국에는 파해 될 가능성이 높지요. 차라리 계획대로 사용하는 것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백무강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라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정도인가?”

“건곤파는 기환선을 꿈꾸는 자들의 요람입니다. 그쪽 술사들 가운데 우화등선했다는 소문도 자주 들리지요. 그런 만큼 거기서 배출하는 술사들은 상당히 뛰어나다고 봐야 합니다. 천하에 그 정도 술사들을 배출할 수 있는 기환선문이 있다면 청성의 건곤파와 음도로 인해 지금은 몰락한 화산의 강선곡, 익히 알려진 모산파, 그리고 한때는 술자들의 지존이었으나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용호파뿐이지요.”

백무강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렇다면 문제구만. 곤술이란 자의 능력이 음도와 맞먹는다면 좌상의 계획도 틀어질 공산이 있는 것 아닌가?”

천기신사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음도가 하려는 일은 지룡을 끌어들여 수룡을 노하게 만드는 것. 미리 알고 술법을 베푼 곳을 찾지 못하는 한 결코 저지할 수 없는 일이지요. 목전에서 당하게 되면, 수룡의 노화를 누그러뜨릴 능력 없이는 막을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음도가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니 그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백무강이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휴우! 그런가? 정말 안심이 되는군.”

백무강은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입체지도에서 붉은 피와 불길들이 퍼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금강포구를 떠난 지 이틀째가 되는 날의 늦은 오후, 사천무림련 사람들은 마침내 창산이 바라보이는 상관에 이르렀다.  한 달만에 다시 도착한 창산상관은 지난번과 별 다른 변화가 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아무도 없는 듯, 그래서 그냥 올라가도 무탈할 것 같이 썰렁해 보였다.

사람들도 별 다른 감회를 느끼지 못하는 듯 창산이해를 힐끔 보고서 제 할 일들을 시작했다. 그러나 운청산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그는 멍한 눈빛으로 점창산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분명히 같으면서도 다르다. 노을이 없는 까닭일까? 창산이해가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아니, 왠지 기분 나쁘다. 저 산에 고인 피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까닭일까?’

운청산이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미간을 찌푸리던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두 줄기 빛 무리가 나타났다. 그는 아주 잠깐 동안 놀란 눈을 치떴으나 이내 그 정체를 알아내고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보다 더 밝아지고 커진 것 같습니다.’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한 자가 채 못되는 크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 자 반 이상 될 것 같았다.

운경산이 웃으며 입을 벌렸다.

‘그렇구나. 우리도 예상치 못했는데 나오니 이런 모습이구나.’

운경산은 잠시 운청산을 외면하고 점창산을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그냥 네 기분 탓이 아니다. 저 산, 틀림없이 달라졌다. 네 눈으로 보기는 힘들 테지만, 우리 눈에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점창산의 산룡(山龍)이 어렴풋이 보인다. 얼굴은 피로 물들어 눈을 뜨지 못하고 두 앞발은 족쇄에 채워져 있다. 나 정도의 영혼에게 산룡이 보일 턱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구나. 슬픔과 분노 그리고 괴로움이 역력해. 조심해야겠구나.’

운청산을 눈을 치뜨고 다시 한번 점창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족쇄가 채워졌다면 어디쯤입니까?’

이번에는 운추산이 나서서 산의 하단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운청산을 마주보며 입을 벌렸다.

‘저 중턱 아래쪽 숲이다.’

운청산은 귀곡산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다시 산을 살폈다.

‘점창산은 남북으로 곧게 뻗은 직룡(直龍). 직룡은 흉하고 회룡(回龍)은 길하다 하였다. 더군다나 산형(山形)은 칼날같이 뾰족한 화성산(火星山). 그것도 남북으로 열아홉 개의 불꽃을 피우고 있으니 가히 활활 타오르는 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 자체로만 본다면 점창파와 같은 대도파(大道派)가 나기는 힘든 곳이다. 결국 좌우로 불꽃을 부드럽게 해주는 흑강과 이해호가 없었다면 점창파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가히 자연의 조화로움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거기에 인간이 끼어들어 변화를 일으켰다. 산의 기세를 북돋우는 나무들을 잘라버리고 그 머리 위에서 쨍쨍댔으니 산룡은 짜증나서 퇴산하려 했으리라. 결국 점창파로서는 대란을 만나 격. 산을 되찾더라도 용이 떠나려 하니 예전의 영화를 찾기는 힘들겠구나.’

운청산의 생각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운경산과 운추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점창산을 바라보는 운청산의 눈앞으로 운경산이 다가와 물었다.

‘그럼 점창파는 이제 운을 다한 것이냐? 그렇다면 사천무림련이 애를 쓰는 것도 다 헛공사란 소리 아니냐?’

운청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배움이 짧아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직 용혈(龍穴)을 건드린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산을 찾고 나면 대대적인 회천공사(回天公事)를 일으켜 산룡을 달래고 하늘에 도움을 구해야겠지요.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에 따라 산에 나무를 심어 화성(火星)을 띠는 산룡의 기운을 보(補)해야 할 것이고, 당분간 이해호와 흑강의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운추산이 물었다.

‘회천공사와 나무로써 보하는 뜻은 알겠다만 이해호와 흑강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운청산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흑강(黑江)과 이해호(?海湖)를 썼다. 그리고 두 영혼을 바라보니 그들도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이 부언했다.

‘힘을 잃어가는 화룡입니다. 거기에 물을 부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검은 색도 수요, 귀(耳) 또한 수로 봅니다. 강과 바다와 호수 거기에 삼수 변이 붙은 귀까지. 그러니 이 이름 속에는 온통 물밖에 없습니다. 결국 왕성한 불길을 누그러뜨리는 게 아니라 안 그래도 약한 불을 꺼버리는 형국인 것이지요. 그러니 산룡이 불의 기운을 되찾을 때까지는 불을 보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점창파가 힘을 되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회천공사에는 많은 공력이 필요합니다.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들의 영력과 숫자도 중요하고 경비도 만만치 않겠지요. 그런데 이제 점창에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으니 어렵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산룡이 잠시 몸을 움츠리면 좋을 텐데,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족쇄를 채워 놓았다 하니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계속 고통을 당할 것인즉,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아예 산의 기운을 거두어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 말하고 보니 점창의 앞날에는 온통 고난으로 가득 차 있군요.’

운경산은 운청산의 긴 설명을 새기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 눈에 부드럽고 따뜻한 그리고 안타까움이 가득한 기운을 담아 물었다.

‘허면 저 족쇄를 풀어주면 되겠구나. 강호의 유수한 문파를 이대로 죽여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운청산도 두 눈에 안타까운 눈빛을 드리웠다.

‘귀곡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단번에 그 족쇄를 풀어줄 수 있으련만, 지금의 저로서는 어렵군요. 제 지식이란 것이 알량한 책상머리 지식인지라 족쇄를 풀어줄만한 지혜를 함께 갖추지 못했습니다. 족쇄라 하시는 것이 땅의 기운까지 묶어버린 결계라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겠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기분만 찜찜할 뿐 결계의 기운마저 보이지 않는군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산을 뒤져 찾아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저곳 또한 적지이니---.’

그때였다.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던 운청산의 두 눈이 반짝였다. 운경산과 운추산도 운청산의 어깨에 내려앉으며 그가 보는 곳을 보았다.

이십여 명의 도사들이 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이 군룡전에 소속된 청성의 도사들이었고 젊은 도사들은 두 명 밖에 없었다.

그들이 마치 중앙의 누군가를 호위하는 형국이어서, 운청산은 안력을 돋워 중앙에 자리한 사람을 확인했다. 건법과 곤술이라 불리는 두 도인들이었다.

“아! 저 두 진인들이라면 찾아낼 수도 있겠군요.”

운청산은 기쁜 나머지 생각 대신에 입을 벌려 말하고는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간절한 기운을 담아 바라보았다. 결계의 해체가 단순히 산룡에게 자유를 찾아주는 일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알아 볼 수 없는 결계로 인하여 피해가 더 늘어날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막사 안에는 일곱이나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그러나 정적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다섯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건법진인만을 바라보며 초조함과 불안함을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건법진인은 현상자 등의 눈초리에서 틀림없이 압박받고 있을 것인데도 계속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한 그의 표정에 사람들은 더욱 초조해졌다. 지금껏 웃음을 잃은 건법진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운녹산이 입술을 떼려는 순간 현상자가 먼저 물었다.

“빈도의 이 어두운 눈으로 보아도 느낌이 달라졌소. 심각합니까, 진인?”

건법진인은 현상자의 눈을 직시해 놓고도 선뜻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주저하니 사람들은 내심 안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법진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곤술도인을 응시했다.

“어허! 답답하오, 진인. 말씀을 해주시지요?”

이어진 운녹산의 채근에 마침내 건법진인도 입을 열었다.

“심각하냐고 물으셨지요? 허허! 그게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심각합니다. 당황스러워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건법진인은 운청산이 두 영혼과 나눴던 산룡에 대해 비슷한 설명을 했다. 그 여파가 점창의 반영구적인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안타까움도 말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건법진인은 안타까움을 담은 신수사태와 공명선사의 나직한 불호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덤덤한 운녹산과 현상자 그리고 당유연의 표정을 살폈다.

건법진인은 곤혹스러웠다. 점창이 어디인가? 팔백 년을 이어 내려온 전통의 명문이요, 청성과 함께 강호 구파에 드는 대문파였다. 그들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했거늘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니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점창이 사라져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까닭만은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도 정확히 인식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애초에 사천무림련을 일으킨 목적을 잊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목적은 점창 수복이 아니라 구원(舊怨)의 해소와 일차 원정에 따른 희생에 대한 복수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면목의 회복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건법진인 정도라면 능히 목적의 변질 정도는 헤아릴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분석할 시간이 없었다. 계속해서 채근하는 눈빛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당유연의 질문까지 보태어졌다.

“결계가 산룡을 잡아두고 있다는 말씀까지 하셨소이다. 그런데 심각하지 않아서 당혹스럽다 하심은 무슨 뜻이오니까? 심각하지 않다 하시니 결계를 파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는 들리지 않소이다만.”

건법진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말은 설명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빈도가 결계라 했던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법진인은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통은 진과 결계를 구별 없이 씁니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둘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계란 주술적인 힘으로 공간을 결하여 출입을 금하거나 제한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반면, 진은 자연의 것을 기문둔갑(奇門遁甲)의 이치에 따라 인위적으로 배열하여 착시를 유도하거나 환각에 빠뜨리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즉 결계의 밖에 있다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고 안에 있다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전부이니, 파해하지 못한다 해도 굶어죽지 않는 한 위험은 없다고 봐야지요. 그러나 진은 다르지요. 물론 금쇄진(禁鎖陣)과 같이 결계의 역할을 하는 진도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병술과 접목된다면 커다란 희생을 야기할 수도 있소이다.”

건법진인은 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의미에서 한숨 돌렸다. 그의 예상대로 워낙 기초적인 것이어서 그 누구도 의문을 띠는 이는 없었다.

건법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중앙의 창두봉 지도로 손을 뻗었다.

“빈도가 당혹스럽다 한 것은 서로 연관이 없는 진과 결계가 동시에 펼쳐져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이곳과 이곳에 산룡의 두 발을 묶는 결계가 펼쳐져 있고, 이곳 상관을 지나 산이 시작되는 곳부터 봉우리를 둘러싸듯 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오.”

건법진인은 다시 자리에 앉아 설명을 이어갔다.

“문제는 금룡결계(禁龍結界)를 펼쳐둔 목적이 무어냐 하는 것이오. 빈도와 사제가 보기로는 기력을 잃은 산룡을 묶어두는 것과 우리가 통행할 수 있는 통로를 줄이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없소이다. 더구나 산룡을 묶어 두는 행위는 산의 기운을 죽이는 악의를 내포한 탓에, 결계를 베푼 술사는 반드시 신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오이다. 득이 없는 것을 알고도 벌을 자청한 격이지요.”

건법진인이 잠시 말을 끊자 운녹산이 물었다.

“혹시 진과 결계가 연동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오니까?”

건법진인은 확신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소이다. 두 가지를 함께 베푸는 일은 오히려 술사에게 치밀한 계산을 요구하지요. 결계는 진을 설치하는데 있어 제약이 되면 되었지 보탬이 되지는 않소이다.”

당유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인! 뜻은 알겠소만, 제대로 와 닿지는 않소이다. 결론부터 말해주시지요. 우리는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건법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현상자가 물었다.

“문제는 시간이겠소이다?”

건법진인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모두가 제각각 중얼거렸다. 당유연과 신수사태가 세 시진이라 했고 운녹산과 현상자 그리고 공명선사는 사흘이라 말했다. 그러나 건법진인은 모두가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금룡결계와 마찬가지로 진을 펼친 의도가 첫 번째 문제이고 시간과 인력이 나머지 문제올시다. 목전의 진은 흔히들 하늘까지 묶는다 하여 포천진이라 부르는데, 정확히는 음양팔괘포천대진(陰陽八卦捕天大陣)이라 부르오.”

모두가 눈을 치떴다.

음양팔괘포천대진.

그 이름만으로 술사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는 기오막측한 진법이었다. 웬만한 술사의 능력으로는 설치가 아니라 알아보는 것조차 어렵다 해서, 진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으로 확인해보고자 하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현상자 등도 익히 이름은 들어보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그때 건법진인이 다시 말했다.

“문제는 설치하다 만 것처럼 진이 엉성하다는 것이오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치떴다.

“지금처럼 펼칠 것이라면 차라리 음양오행대진이나 혼원팔문진(混元八門陣) 혹은 금쇄진을 설치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인데, 포천진의 포진법(布陣法)을 아는 자가 왜 이렇게 엉성한 진을 설치했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제대로 되었다면 빈도 또한 파해를 장담하지는 못할 것인데, 지금이라면 반나절 안에 파해가 가능하오이다. 물론 혼자서는 할 수가 없소이다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운녹산이 물었다.

“혹시 결계로 인해 예상보다 설치시간이 지체된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라면 우리 쪽에는 최선이 되겠지요. 그러나 혼원팔문진이나 금쇄진이 아닌 포천진을 펼쳤다는 사실에는 주의하셔야 하오이다. 이는 단순히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 싸워 이기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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