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콰콰콰콰콰!
성난 강이란 이름처럼, 폭포도 아니건만 노강(怒江)의 물 흐르는 소리가 귀청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백무극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발 아래쪽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계곡은 소리로 짐작해 본 것보다 훨씬 깊었다. 노강까지의 거리는 이백여 장. 백무극의 시력으로도 강은 실뱀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노강이 아니라 노룡계(怒龍溪)이 더 어울리겠구먼."
강 옆을 따라 산을 오를수록 노강과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그때 선두에서 걷던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느긋하게 따라가던 백무극도 발을 멈춰 세웠다.
"소불! 무슨 일인가?"
소불이 되돌아와서 말했다.
"안내인이 지쳤습니다."
백무극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안내인이라고는 하지만 백무극 일행과 같은 절정무인들의 체력을 따라가지는 못하리라.
소불이 웃으며 말했다.
"소군! 하루 반나절이면 평탄한 길이 나올 것이랍니다. 그때부터는 우리끼리 움직여도 랏싸까지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백무극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돌아보았다.
"잠시 쉬어가지. 요기나 하며 한숨들 돌리시게."
백무극의 뒤를 따르던 소불 연배의 백의장년인들 삼십여 명이 일제히 허리를 접고 근처의 앉을 만한 곳으로 흩어졌다.
백무극도 절애 옆 너른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게 무슨 꼴이야? 지금 쯤 무강 아저씨하고 차나 마시고 있어야 정상인데, 느닷없이 랏싸라니---. 이게 다 소불 자네 탓이야."
백무극의 맞은 편에 앉아 수통의 두껑을 열려던 소불이 눈을 치뜨고 바라보았다.
"예? 이게 어떻게 비직 탓입니까?"
백무극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소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그 답답한 연무장에 처박혀 있는 동안 자넨 뭐 하고 있었나? 일이 벌어진 다음에 수습을 하려면 노력은 배로 들고 효과는 반으로 주는 법일세. 혈응이야 그렇다 치고 오지랖 넓은 자네는 홍라교쪽 동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하지 않았나?"
소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백무극을 마주봤다.
"어허! 억지 십니다. 저는 다만 소군의 비위일 뿐이지요. 제가 오사장에 연줄이 있습니까, 아니면 정보통이 있습니까? 제가 무슨 수로 그 변화를 감지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미리 알고 소군께 알렸다 해도, 문상 어르신의 말씀처럼 결자해지. 결국 소군께서 가셔서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어차피 가야 하는데 그게 어떻게 제 탓입니까? 너무 하십니다."
사실 두 사람은 농을 하고 있었다. 이번 오사장 행이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사장의 현 상황은 심각했다. 홍라교주의 독단이 심해짐에 따라 그 반발세력들이 표면으로 드러날 정도에 이른 것이었다. 만약 내분이 심각해지면 청해성에 나와 있는 홍라교도들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할 것이고 그 결과 화산이 중심이 되는 사천성 북부무림은 느긋해진 눈길을 사천으로 돌리게 되리라.
점창산으로 향하려던 백무극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오사장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그가 무엇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상황을 파악하여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정도는 확인해야 했고, 할 수만 있으면 홍라교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움을 주어야 했다. 그런 까닭으로 백무극은 무상 직속의 백영무단과 함께 백라천궁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천응신전의 고수 서른하나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혈응이 소불에게 눈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소불! 무엄하다. 네가 감히 소군의 말씀에 토를 다느냐?"
소불이 혈응을 올려다보며 혀를 차며 고개를 둘레둘레 내저었다.
"에휴! 자네는 상관 말고 그 얼굴이나 돌보게. 벌써 누렇게 떴어. 저번처럼 짐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생긴 건 하늘을 날아도 될 것 같은데 어찌 그리 약골인지, 쯧쯧쯔."
순간 혈응이 얼굴을 붉히며 소불과 백무극을 동시에 외면했다. 그로서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오사장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은 고원지대라 해도 그 역시 고원지대인 운남에서 어렵지 않게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취를 일으켜 별호가 무색하게 병든 닭처럼 비실거렸었다.
백무극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운남과 오사장의 경계를 넘었네. 여기까지 오는데 만 나흘 걸렸어. 점창산까지 돌아가는데는 또 얼마나 걸릴까?"
소불이 답했다.
"하루 반나절에 랏싸까지 다시 닷새는 잡아야 할 테니까 앞으로 족히 보름은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군."
백무극이 다시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스무날이라? 안 좋은데?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붙으면 곤란하잖아. 서둘러야겠군."
"소군. 이 이상은 무립니다. 저희야 그렇다 치고 저 친구가 견디지 못합니다."
소불의 눈이 늘어져있는 안내인에게로 돌아갔다. 백무극도 그를 보며 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소불 자네가 업게."
"예?"
소불이 눈이 찢어져라 치뜨고 백무극을 응시했으나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실거릴 게 분명한 혈응에게 업으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업게. 명령일세."
소불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백무극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눈을 다시 뜨고 혈응을 바라보니 그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쳇!"
소불은 혈응마저 외면하고서 안내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못 떼고 돌아서서 백무극을 향해 말했다.
"소군! 다 좋은데요, 소불 대신에 백염창으로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유달리 성을 강조하는 소불의 말에 백무극은 찡그린다는 말이 차라리 어울릴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혈응은 보기 드물게 고개를 끄덕여 소불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백무극이 말했다.
"하여튼 엉뚱하다니까. 이보게, 소불. 내가 자네들 부르는데 일일이 성까지 붙여서 불러야겠나? 백염창, 백기종 하고 말이야."
소불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곧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니 불편하시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자네가 뭐라 해도 그럴 생각일세."
소불은 실소하는 백무극을 뒤로하고 안내인에게 다가가 뭐라 말하고 등을 내밀었다.
백무극은 벌써 걸음을 떼는 소불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끊이지 않는 산길 뒤로 하얀 매리설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작 전에 돌아올 수 있겠지? 지겨워. 별 것도 아닌 것들에게 허리를 숙여야 하는 일은 그만 두고 싶어. 이제 그만 끝장내고 싶다고."
백무극은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푸른 산, 시리도록 더 푸르러
오당이 해체된 지 사흘째가 되는 날 늦은 오후.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저 또 다른 하루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일백팔십이 명의 이름 없는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큰 날이었다.
바로 정명단의 창단식이 있는 날.
창단식은 초라하다 할 만큼 조용히 진행되었다. 이정과 운청산을 포함하여 천급 무사 마흔 일곱과 지급 무사 일백십오 명 그리고 잔류한 인급 무사 스무 명이 병사의 공터에 모였을 따름이었다.
련에서 나온 사람이라고는 고작 군사 운녹산 한 사람뿐이었고 그 역시도 모든 것을 이정에게 일임하고서 축하한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용병의 머릿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박대를 받는다고 투덜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뒤이은 이정과 운청산의 등장에 장내는 곧 정숙함 되찾았다.
이정이 사람들을 두루 바라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단의 책임을 맡은 이정이오.”
그 순간 정명단원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정렬!”
정명단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대오를 맞췄다.
닭들 속에 있다 해도 학이 그 자태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평범한 이들 속에 묻혀있다 해도 뛰어난 사람은 어떻게든 알려지게 되는 법이다.
이정과 운청산이 그러했다. 그들 두 사람은 싸움이 있기 전부터 이미 그 진중함과 식견으로 주목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실전에서 주목받을 만한 활약을 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두 사람이 봤다하고 한 사람이 맞장구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내는 법이다. 하물며 실제로 빼어났던 두 사람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결국 자발적으로 정렬하라는 소리가 나오고 사람들이 그에 순순히 따른 것은 이미 그들 두 사람에 대한 련의 인사(人事)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리라.
이정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기대에 찬 눈빛들을 대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단주의 자리를 맡겠다고 대답한 처지이니 겸사의 말은 하지 않겠소. 최선을 다해 직분을 수행하겠소이다.”
박수 소리가 터지자 이정이 다시 진정시켰다.
“알다시피 나와 여기 부단주를 포함하여 여러분 모두가 용부로써 이 자리에 있소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다르오. 이 싸움이 끝나더라도 정명단은 해체되지 않을 것이오. 여러분이 원하면 싸움 이후에도 존속하게 될 사천무림련의 무사로서 남게 될 것이오.”
순간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눈을 치뜨고 서로를 마주보면서 만면에 희색을 드리웠다.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월삯도 받으면서 련의 정식무사가 된다는 뜻입니까?”
앞쪽에선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 물었다. 이정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수뇌부에서 확정지은 일이니 변동은 없을 것이오. 허나 시절이 달라질 것인즉 월삯의 조정 또한 불가피할 것이오. 확정된 건 아니오만 일반 표국의 표두 수준에 전후할 것이라고 들었소.”
사람들은 흥분했다. 표국의 표두 수준이라면 최소한 지금 인급 무사들이 받는 금액은 확보한 셈이었다. 그 정도 돈이면 용부 소리를 듣지 않고 한 곳에 뿌리박은 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이정은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사람들도 곧 단주가 더 할 말이 있음을 깨닫고 서로를 침묵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혜택은 살아남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그들 가운데 최상의 실력이라는 천급 무사 마흔 명이 죽고 다쳤다는 사실을 되새긴 것이었다.
이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에게 련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소. 다만 스스로에게 비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달라고 말하고 싶소. 나는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이 들어 무르팍에 손자들을 앉히고 오늘의 이야기를 웃으며 들려주는 그 모습을 보고 싶소이다.”
이정이 잠깐 말을 끊는 사이에 모두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보는 것으로는 모자라오.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 할 것이오. 내일부터 나와 이청산 부단주가 그 방법을 알려줄 것이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불평 말고 따르시오. 이상!”
뒤이어 운청산의 지휘로 사람들은 자신의 특기와 사용하는 무기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련에서 내준 술과 음식으로 창단식을 마무리했다.
술과 안주가 나오자 공터가 다시 떠들썩해졌다.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운청산이 이정에게 말했다. 이정은 운청산의 품에 안은 기록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다 할 수 있겠나?”
운청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해봐야지요.”
이정은 운청산의 등을 잠깐 동안 보다가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잔을 권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몇 잔은 받아 마셨지만 금새 붉게 달아올라 가는 곳마다 거절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그렇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그가 문득 얼어붙은 듯 서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병사가 막 시작되는 곳에 두 사람이 서있었다. 바로 공명선사와 당유연이었다.
이정은 점점 붉어지는 눈빛으로 한참 동안이나 공명선사를 보다가 결국 합장을 하여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공명선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당유연과 함께 뒤돌아섰다.
다시 허리를 편 이정은 공명선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매를 들어 눈에 고인 물기를 훔쳤다.
운청산의 방은 온갖 종이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방 한 가운데 지필묵을 늘어놓은 채 몇 권의 책과 두 시진 전에 받은 정명단 사람들의 기록지를 대조하고 또 다시 새로운 책자에 무엇인가를 써나가고 있었다.
운청산은 들고 있던 기록지를 좌측에 내려놓고 우측에서 새로운 기록지 한 장을 들었다.
“후우! 어디 보자. 청룡당 삼향의 지급 비표도 오환?”
그는 기록지 상단의 글을 읽고서 청룡당이라고 적힌 책자를 당겨와 뒤적이기 시작했다. 비표도 오환에 대한 기록을 찾은 운청산은 그 내용을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고개를 젓고서 다시 기록을 살핀 운청산은 기록지와 책자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틀림없구나. 이걸 어떻게 하나?”
정말로 설마 했었다. 강정과 문취옥의 대사형되는 비표도 오환이라면 두 사람의 합공에도 견딜만한 고수였다. 그런 그가 설마 지급무사로 들어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록은 틀림없이 그를 강정 부부의 대사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수하게 용부가 되기 위해 투신했다고는 볼 수 없겠지? 그렇다면 지급무사로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운청산은 그와 검을 맞댔던 기억을 떠올렸다. 틀림없이 강정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알려줘야 할까?”
그때 밖에서 기척이 났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 앞에 이정과 강정 부부가 적당하게 취기가 오른 기분 좋은 얼굴로 나타났다.
운청산은 당황하지 않고 책자로 오환의 기록지를 덮어 방 한 구석으로 치웠다. 그리고 이미 정리한 것들을 한곳에 모아 방에 빈 자리를 만들었다.
세 사람이 모두 들어왔다.
“청산! 혼자 고생 많구나. 역시 뭔가를 책임 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강정이 웃으며 말하고 앉았다. 이정과 문취옥도 앉았다. 운청산이 말했다.
“월삯이 올랐으니 값을 해야지요.”
“응? 올랐어? 얼마나?”
돈 이야기가 나오니까 문취옥이 눈을 뚱그렇게 치뜨며 물었다. 운청산이 이정을 힐끔 보고서 대답했다.
“백냥 됐습니다.”
강정 부부가 아예 말이 안나온다는 듯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그때 이정이 물었다.
“어때? 정리가 좀 됐어?”
운청산은 우측의 남은 기록지 세 장을 들어보였다.
“음, 대충 된 것 같구먼.”
운청산이 낯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주종이 도라서 일단 모아놓고 도법을 일일이 살펴봐야 편성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운청산이 기록하던 책자를 자기편으로 돌려서 살폈다.
“그렇군. 검수가 여섯에 도수가 일백 세 명? 그 외에는 기문병기를 쓰니 역시 중원을 맡기기는 어렵겠구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단기간에 성과를 보기 어려운 것이 검이다 보니, 속가에서야 쉽게 택할 수 없는 병기 아닌가. 어디 두고 보세. 응? 그나저나 이 필법은 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정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운청산의 필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 글씨, 혹시 신지문(神知文) 아닌가? 나 어릴 적에 본산 조사께서 쓰시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강정이 월삯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 물었다.
“신지문? 그게 뭡니까? 전에 글 받아간 파운수 정일창의 말로는 장초(章草)와 소초(小草)의 중간 형인 것 같다 그러더니만.”
운청산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정은 웃음을 대답 대신 받고서 강정에게 답했다.
“나도 잘 모르오. 허공에 쓰는 것만으로도 신이 알아본다고 해서 신지문이라 하시던가? 주로 도통을 원하는 도인이나 덕 높은 고승대덕들 사이에 비전되는 글씨라 들었소. 그러나 언뜻 본 적밖에 없고 또 청산은 무인이니 확신을 할 수 없구려. 어디, 기억을 한 번 더듬어 볼까?”
이정은 기분이 좋은 듯 벙긋 웃음 지으며 방을 둘러보다가 백지 한 장을 당겨왔다. 그리고 붓을 들어 종이 위에 일렬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점들을 찍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마치 한 일자 같았다.
이정은 종이를 들고 방문 앞까지 물러서서 들어보였다.
“이게 무엇 같소?”
운청산은 웃을 따름이고 강정 부부는 낯을 찌푸리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취옥이 말했다.
“일자 아닙니까?”
이정이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허! 조사께서 물으시기에 나 또한 그리 대답했었지요. 조사께서 웃으시며 ‘이놈아! 이것이 곧 너니라.’하셨소이다. 왜 그러냐고 여쭸더니, 이 점 같은 것 하나하나가 내 일생의 공(空)이라 하셨소. 공과 같은 삶이 계속되는 윤회가 끝나면 나 또한 시작처럼 끝나는 것이라 하셨지요. 아무리 중하게 여겨지는 삶이라 해도 결국 우리의 삶은 공이요 점이며 티끌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속에 또 다른 묘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바로 신지문의 기본원리. 한 점 한 획에 모두 의미가 담겨있으니 신마저 그 뜻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여 신지문이오. 내가 아는 게 이 정돈데 맞는가?”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정은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알면 알수록 신기한 친구로세. 자! 청산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구려.”
이정이 일어서니 강정 부부도 따라서 일어섰다. 그들이 방을 나서자 운청산은 강정 부부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나머지 세 장마저 정리를 끝낸 운청산은 수십 장의 도해를 그려보고 그것들을 다시 파지로 만들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장의 도해를 손에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대충 이 정도만 해도 열흘의 시간은 있어야 할 텐데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군.”
운청산은 고개를 흔든 후에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자는 책자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모으고 파지는 뭉쳐서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룡당이라 적힌 책자를 들춰 보고 방을 나섰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파지들을 태워버린 운청산은 병사를 따라 우물 쪽으로 올라갔다. 정명단원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그 역시 어색하게 답례했다.
방위에 적힌 호수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올라가다가 멈춰선 운청산을 한 사람이 알아보고 맞이했다.
“부단주가 예까지 웬일이오?”
운청산은 특이한 외모의 중년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얼굴의 반이 얇은 철판으로 감싸져 있고 나머지 반도 흘린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다.
“오 대협, 맞습니까?”
사내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일개 단원에게 너무 공손하시구려, 부단주. 알고 오셨다시피 맞소. 내가 바로 문취옥의 사형되는 오환이오.”
운청산은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며 물었다.
“얼굴까지 가리고 숨어든 뜻이 무엇이오?”
오환은 다시 차갑게 웃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멀리한 건 사실이나 얼굴은 일부러 가린 게 아니오. 그날을 기억하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만 죽고 소득이 없자 광풍사 놈들은 나에게 화풀이를 했소이다. 덕분에 얼굴 가죽 반이 날아가 버렸소. 물론 그놈들도 대가를 치르긴 했지. 후후후후후. 그렇게 된 것뿐이오.”
오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운청산은 그의 눈빛에서 마치 네 탓이야, 라는 원망을 읽었다. 그는 그 느낌을 무시하고 차갑게 물었다.
“예까지 따라온 뜻은?”
오환은 다시 경련이 이는 듯한 웃음을 짓고서 대답했다.
“뜻? 그런 것 없소. 그냥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자 따름이오. 그 실력으로는 결국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안 그렇소, 부단주?”
운청산은 오환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분란을 일으키지 마시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소.”
“호오! 협박하시는가? 하기야 부단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찍 소리 말고 들어야겠지. 나 같은 놈 열이 모여도 상대가 안 될 테니까. 아무튼 걱정 마시구려. 해체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손쓰는 일은 없을 것이오. 너무 일찍 죽으면 재미없지 않겠소? 크크크.”
운청산은 광기와 집착으로 번들거리는 오환의 눈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다시 말했다.
“분명히 경고했소.”
운청산이 돌아섰다. 그때 오환이 물었다.
“부단주. 그들에게 말할 것이오?”
운청산은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아직 모르겠소.”
“결심이 서면 내게 먼저 알려주시구려. 흐흐흐흐.”
운청산은 오환의 소름돋는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정명단이 창단된 지 엿새째 되는 날 오후.
불일장 서산 앞 공지에 정명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전에 사방당원들이 비시진을 연습했던 것처럼 한 바탕 한 모양이었다. 땀이 범벅이 되어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가 하면 아예 웃통을 벗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운청산이 서산의 약간 높은 쪽에 올라서자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내쉬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수고 하셨소. 오늘 보니 오행십자진의 기본은 대충 숙지한 것 같았소. 앞으로 이 각 후 다른 것을 한 번 해볼까 하오.”
사람들이 오만상을 구기며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운청산은 품속에서 작은 모래시계를 꺼내 엎어놓는 것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여러분이 각자 만든 대나무 무기들과 각조의 번호가 적힌 붉은 모자가 있소이다. 각자의 무기를 들고 붉은 모자를 쓰시오. 그때부터는 자신의 조원들 말고는 모두가 적이오. 해야 할 일은 상대 조의 모자와 내가 던지는 깃발을 획득하는 것뿐이오. 단, 공력은 사용할 수 없으며, 모자를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적이라면 서른여섯 개조가 난마처럼 뒤엉키게 되리라. 거기서 뺏으려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운청산이 다시 말했다.
“그날의 일을 기억할 것이오. 적은 어디서든 나타나오. 믿을 사람은 오직 같은 조원들뿐. 잘들 해 보시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사람들이 운청산이 말을 끊고 둘러보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운청산은 발 옆에서 깃발이 돌돌 말린 채 나뒹굴고 있던 대나무들을 집어 들었다. 그가 대나무를 흔들자 깃발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깃발에서 일렁거리는 글자들을 보려고 시선을 모았다. 그때 운청산이 말했다.
“여기 네 개의 깃발이 있소. 두 개의 깃발은 죽엽청 다섯 근, 두 개의 깃발은 동파육과 마파두부 그리고 회과육 한 접시요. 깃발을 획득하는 조는 적힌 것을 얻게 될 것이오.”
불만을 터뜨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운청산은 손을 휘저어 침묵시키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다른 조의 모자를 가장 많이 획득한 두 조에게도 죽엽청 다섯 근과 요리가 상으로 나가게 될 것이오.”
순간 조 분별도 없이 뒤엉켜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의 조원들을 찾았다. 운청산은 나름의 작전회의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을 내건다는 것은 원래 이정의 생각이었다. 따르기는 했지만 운청산으로서는 과연 실효가 있을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이라 해봐야 한 조 다섯 사람이 나누어 낸다면 큰 부담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어이! 부단주. 이제 제법 윗사람 틀이 잡힌 것 같구먼.”
이정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운청산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실소했다. 이정의 말 그대로였다. 사람들 앞에만 나서면 더듬거리기 일쑤였는데 엿새 만에 상당히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군령에서도 하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네요.”
운청산이 쑥스러움을 드러내자 이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직 어려우니 자넨 더 하겠지. 자네보다 어린 친구는 넷밖에 없지, 아마?”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이 이어 말했다.
“그런 건 사실 교육이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배지 않으면 쉽지 않지.”
운청산이 웃으며 되물었다.
“적어도 네댓새는 더 필요한데 안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음! 그 정도 시간은 있는 것 같아. 아직 당가가 준비가 안 된 모양이야.”
운청산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살폈다. 머리를 모아 전략을 짜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운청산이 물었다.
“이 대협, 아니 단주.”
“허허허, 이 사람아. 둘이 있을 때는 이 대협이 좋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겨우 죽엽청과 요리 몇 가지 걸린 것뿐인데 왜 표변하여 저렇게 열의를 띄는지---.”
이정이 미소 지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눈앞에 보이는 목표는 사람들에게서 의욕을 이끌어낸다네. 그리고 승부는 투쟁심을 불러일으키지. 이 사람들의 구성을 보게. 만약 개별로 같은 일을 하라 했으면 인급과 지급 무사들은 흥미를 갖지 않을 것이야. 시작하기도 전에 목표가 자기 것이 아니란 걸 인정해버리기 때문이지. 그러나 특별히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달라지지. 자네가 잘 버무려 놓은 탓에, 그 어느 조도 자신들이 다른 조에 비해 모자란다고 생각지 않네. 금방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목표와 남을 이기고 싶다는 호승심이 섞여 저런 의욕을 보이는 것이야. 두고 보게. 자네가 그만 두라 해도 저들은 또 할 거야.”
“예? 또 하다니요?”
운청산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이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승부욕은 인간의 본성일세. 내기와 도박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자넨 저들에게 도박판을 벌여 준 것이야. 두고 보게. 월등한 승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저 훈련은 알아서 계속될 걸. 아! 저들이 기다리는구먼. 시작해 보지.”
운청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위가 거의 비어있는 모래시계와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그 순간 사람들도 일어서서 한 곳으로 몰려갔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단병과 장병으로 나누어진 각자의 대나무 병기를 들고 모자를 쓰고 운청산 앞으로 모였다.
운청산은 네 개의 깃발 가운데 세 개를 삼각으로 꽂았다. 그리고 한 개를 들고 말했다.
“깃발로부터 백보씩 물러서시오. 남은 한 개의 이 깃발이 꽂히는 순간부터 이 각 동안이오. 그 시간이 끝났을 때 깃발을 들고 있는 조와 모자를 가장 많이 챙긴 조가 승자가 되겠소. 단 모자를 빼앗긴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즉시 바깥으로 물러서시오.”
“깃발을 다 가져도 됩니까, 부단주?”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운청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럼 물러들 서시오.”
조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깃발을 중심에 두고 자연스럽게 원을 그렸다. 운청산이 원 밖으로 물러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운청산이 마침내 깃발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깃발이 이미 꽂힌 세 개의 깃발 근처에 꽂혔다.
운청산이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워드는 순간 사람들이 오행십자진을 유지한 채 깃발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흠, 눈치들 보는군.”
이정이 말한 것처럼, 깃발을 향해 쇄도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먼저 갖는다 해도 이 각이라는 긴 시간을 버티기가 힘든 탓이리라.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원을 좁혀가고 있었다.
“공력을 쓰지 못하니 깃발을 얻고 달아난다는 생각도 못할 일. 우선은 모자 뺐기 싸움이 되겠지요.”
운청산의 대답에 이정은 미소를 지으며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주시했다. 서서히 거리를 좁히던 사람들이 드디어 맞부딪쳤다.
따닥! 따다다다다다다닥!
단 한 번의 죽도 부딪치는 소리가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오행십자진의 좌우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좌!”
“우!”
“우반전!”
“좌회룡!”
중원을 책임 맡은 사람들의 입에서 연이어 지시가 터져 나오자 각조들은 좌우로 이동하고 반전하여 구성원 가운데 강자가 상대의 약자를 치게 하기도 하며 아예 한 바퀴를 휘돌아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집중공략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뒹굴고 모자들이 튀어 올랐다. 모자를 주우려다가 오히려 얻어맞고 뒹구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하면, 천급 무사임에도 불구하고 대열에서 이탈함으로써 난타당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호오! 겨우 닷새 지난 것뿐인데 제법 호흡을 맞추는구먼. 나름대로 독자적인 진을 운영하는 이들도 있구먼. 저기 보게. 눈치 살피면 외각으로만 도는 조도 있어. 좀 비겁한데---.”
“그렇다고 관망만 하는 것은 아니니,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지 않으려는 전술로 보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청산이 모래시계를 힐끔 보았다. 반이 조금 넘게 흘러내렸다.
다시 전장을 바라보니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땅을 치기도 했다.
죽검과 죽창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난마처럼 뒤엉켜 가고 있었다.
운청산은 다시 모래시계를 확인하고 소리쳤다.
“반 각 남았소.”
순간 사람들이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시하던 깃발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혼자만 먼저 달리다가 두들겨 맞는 사람들이 생겼고, 비시진을 응용하여 진을 화살처럼 변형시켜고 깃발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조들도 보였다.
깃발을 챙긴 조들이 생겼다. 그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방에서 합공을 당하는 와중에 깃발들이 다른 조로 옮겨갔다. 사람들의 숫자는 반 수 이하로 줄어들었건만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는 오히려 더 격렬하게 들렸다.
“그만! 움직이지 마시오.”
운청산이 소리치고 달려갔다. 중도에 탈락한 사람들은 상처를 매만지며 울상을 한 채 입술을 깨물었고, 깃발을 획득한 조와 모자를 그득 쥔 조들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운청산을 기다렸다.
“이향 칠조, 삼향 이조, 사향 삼조와 육조. 각각 깃발 하나씩. 그리고---.”
운청산이 주위를 둘러보며 모자의 수를 확인하려는 순간 강정이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수십 개의 모자를 들어보였다.
“일향 일조와 사향 삼조 승리.”
이정이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그럼 사향 삼조는 술이 열 근에 요리까지 챙긴 것인가? 푸짐하겠군. 너무 취하지 들은 말게.”
순간 사향삼조의 조원들이 일제히 손을 뻔쩍 치켜들어 기쁨을 표했다. 운청산은 사향 삼조의 조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원 오환도 그를 빤히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변에서 젠장을 연호하던 몇몇 사람들이 소리쳤다.
“한 판 더 하자. 모자 없이 깃발만 놓고, 각조에서 한 냥씩 갹출해서 나눠먹기 하자.”
순간 사방에서 하자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정의 말대로 모두가 한다는 분위기였다.
규칙에 따르면 승자조는 최소한 아홉 냥을 얻게 된다. 그 돈이면 인급 무사의 한달 월 삯에 버금가니 술 닷 근에 요리 몇 가지는 댈 일이 아니었다.
훈련을 끝내려고 했던 운청산은 당황하여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정이 나서서 말했다.
“하는 건 막지 않아. 다만 공정해야 할 것이다. 푼돈에 눈멀어 전우를 부상 입히는 바보짓은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내일의 훈련에 지장을 주어서도 안 된다.”
알겠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정은 운청산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손을 뻗었다.
“자네는 일 보게. 이제부터는 내가 책임지겠네.”
운청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모래시계를 이정에게 건넸다.
“장 표두!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만 죽이고 있어야 하는 겐가?”
밧줄을 챙기던 나이 지긋한 선부가 물었다. 용문비선 삼호의 난간에 두 팔을 괴고 강을 바라보던 장오는 난간에 등을 기대며 노선부를 응시했다.
“글쎄요. 일단 점창산의 일이 끝나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왜요, 공숙? 삯이야 나오는 것이니 일 안 하고 놀아서 좋을 것 같은데?”
선부가 얼굴을 들고 장오에게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예끼! 뱃사람이 물 타고 살아야지 땅 짚고 다니면 되겠는가? 장 표두도 내 나이 되어 보게. 하루하루가 아쉽다네. 그냥 멍하게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그리고 이거 한다고 국주께서 돈 버는 것도 아니잖나? 우리한테 월삯은 주면서 돈은 못 버니 표국 문 닫게 생기지 않았나. 게다가 상인들이 난리를 칠 텐데---.”
장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공숙도 참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높은 분들이 괜히 높은 게 아닙니다. 다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물산 좀 지체시킨다고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사천이 어딥니까? 천하복지 아닙니까? 물산이 오가지 못한다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 힘들 건 없지요. 부잣집 마나님들이 안달 좀 나겠지만 말입니다.”
장오의 말은 사실이었다. 예로부터 사천은 복지. 사천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는 불편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용문수로표국이 주로 다루는 물품들도 생필품보다는 기호품이나 사치품이 많았다.
“그래도 난 삼협이 그립다네, 장 표두. 거기를 오갈 때만이 내가 아직 기력이 있음을 느낀다네.”
“하하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공숙. 아직 정정하시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마세요.
앞으로도 한 이십 년은 제 배에 타실 수 있을 겁니다.”
노선부는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말이라도 고맙네. 이십 년이라? 팔십 먹어 배를 탈 수 있으면 그 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이빨 빠지고 백발 늘어가는 건 둘째 치고 기력이 없어. 이삼 년이나 더 탈 수 있을까? 하! 그런데 그 젊은이는 왜 안 오는 건가? 그래도 그 친구 덕에 여기 머무는 재미가 있는데---.”
장오가 환하게 웃었다.
“청산, 그 친구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올 때가 지났는데---. 황당했지요?”
노선부가 선착장 위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황당했었지. 물질을 배우겠다고 다짜고짜 물에 뛰어드니 정말 깜짝 놀랐다네. 그것도 옷을 입은 채 뛰어들었으니---.”
장오가 킬킬거렸다.
“덕분에 저마저도 옷을 입은 채로 한참이나 쫓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빨리 배우지요? 하루하루 다르더니만 겨우 닷새 만에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습니다.”
노선부는 정리한 밧줄을 한쪽에 치워놓고 돛대에 기대어 앉으며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겁을 내지 않으니 빨리 배울 수밖에. 하기야 물에 빠져서 바닥을 걸어 나왔다는 친구니 겁이 없는 것마저도 당연한 일이군. 그나저나 빨리 와서 한 곡 불어줬으면 좋겠구먼.”
장오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하고서 멀리 선착장 위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청산, 그 친구가 귀가 가려웠나 봅니다. 저기 오네요. 근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군요.”
노선부가 기쁨을 드러내며 운청산을 찾았다. 그가 종길을 부축한 채 오고 있었다.
오른손을 배에 대고 구부정한 자세로 종길이 먼저 배에 올랐다.
“오늘은 좀 늦었군.”
운청산이 올라오자 노선부가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았다. 장오도 미소를 지었고 갑판 아래서 장년 선부 두 사람도 올라왔다.
“예, 이 친구가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해서요.”
종길이 창백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장오가 그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쳤나 보군. 지난 번 점창산에서?”
“예. 한 칼 길게 먹었지요. 아! 바람이 시원하니 좋군요.”
종길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지? 같은 바람도 배 위에서 맞는 건 느낌이 다르다네.”
그때 운청산이 검을 풀어놓고 품속에서 옥소와 전낭을 꺼낸 후에 난간으로 다가갔다. 장오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젠 내가 더 보아줄 필요 없겠던데?”
“그렇습니까? 저도 자신감이 좀 붙었습니다. 어제는 물속에 있는 게 오히려 편하더군요. 흐름이란 걸 조금은 알겠더라구요.”
운청산의 말에 장오가 고개를 저었다.
“속단은 하지 말게. 강물은 땅과 달라서 변화가 난측일세. 계절 따라 다르고 수심 따라 다르며 날씨 따라 달라지네. 오늘은 힘 못쓰는 남정네 집 가듯이 느리다가도 내일은 새장가간 홀아비 신방들 듯 급하다네. 그뿐인가? 요 앞이 새색시 내숭떨 듯 얌전해 보이지만 조기 십 장 만 더 가도 샛서방 잡은 남정네 몽둥이 휘두르는 듯 폭급하지.”
“클클클. 장 표두, 어째 대기를 전부 그쪽으로만 대는가? 집 떠난 지 오래라고 쌓인 게 많은가 보구먼.”
공숙이라 불린 노선부가 난간으로 다가와 말했다. 장오도 웃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껄껄껄. 말해놓고 보니까 그렇습니다. 어쨌든 물을 얕보지 말게나. 용왕신께서 노하신다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난간을 잡았다.
“명심하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운청산은 옷을 입은 채로 물로 뛰어들었다.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흘러가며 십여 장을 더 떠내려간 그가 방향을 틀어 다시 거슬러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록 속도는 느렸지만 자세는 꽤나 안정되어 있어서 노선부와 장오는 느긋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근데 저 녀석 왜 옷 입고 물질을 합니까?”
종길이 난간에 기대며 묻자 장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라 했더라? 그렇지. 물에 빠지면 옷을 입은 채로 빠질 테니 거기에 대비하는 것이라 했네.”
“하여간 신기한 놈이라니까.”
종길이 고개를 설레 저을 때 앞으로만 나아가던 운청산이 몸을 뒤집었다.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한 동안 떠내려가면 다시 몸을 뒤집어 올라오고 배와 나란히 서게 되면 다시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았다.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장오가 물었다.
“자네도 저 친구처럼 정명단 소속인가?”
종길은 물을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운청산을 보다가 대답했다.
“그게 좀 애매합니다. 계속 천혜원에 누워 있다보니 붕 떠있다고 해야 할까요? 어찌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놈이 잘 말해 준다고 했으니까 복귀할 수 있겠지요.”
“청산도 결국 용부에 불과한데 무슨 힘으로 자네를 복귀시킨단 말인가?”
종길이 고개를 돌려 장오를 응시했다.
“말 안하던가요? 저놈이 정명단 부단준데요.”
장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종길에게 눈을 치떴다.
“뭐라고? 정명단 부단주? 그럼 저 친구가 운룡신검이란 말인가? 아! 청산? 이름을 듣고도 사람이 워낙 순진해 보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도 못했어.”
“운룡신검? 음, 그럴 듯 하네. 운룡같은 몸놀림에 귀신같은 검을 쓰니 운룡신검이라고 붙여도 하등 이상할 게 없지.”
장오는 종길의 중얼거림을 흘리면서 입을 쩍 벌린 채 운청산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때 운청산은 삼십여 장 이상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쏜살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배 근처에 이른 순간 물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치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물에서부터 반쯤 몸을 빼낸 운청산이 전신을 휘돌리면서 물에서 완전히 몸을 빼낸 탓이었다.
탄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같이 맑은 웃음소리가 금사강을 떠도는 순간 다시 물에 빠져야 정상인 운청산이 계속해서 휘돌면서 수면 위를 밟고 서있었다.
흐르는 물살들이 그의 두발에 감겨 구렁이가 나무를 타오르듯 그의 하반신을 감쌌다. 그 물살들이 좌우로 펼쳐진 운청산의 두 팔을 타고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뿌려졌다가 다시 금사강에 합류하는 순간 그의 신형 역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떠오른 운청산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한 줄기 물을 장난스럽게 토해내고 배를 향해 헤엄쳐왔다.
“분명히 물 위에 서 있었던 거지? 허! 물에서 사십여 년을 지냈건만 저런 광경은 생전 처음 보는구먼.”
노선부가 감탄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운청산은 선수 앞쪽으로 빠져나와 다시 배 위로 올라왔다. 모두가 감탄한 눈빛을 드러낼 때 종길이 웃으며 말했다.
“어이! 운룡신검! 당 소저 봤더라면 화냈을 거야.”
운청산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종길을 바라보았다.
“운룡신검? 무슨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왜 화를 내?”
종길은 운룡신검에 대해 설명하고 덧붙였다.
“네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당 소저가 봤더라면 연인을 금사강에 빼앗겼다고 질투했을 거다.”
운청산이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순간 선부들과 장오가 앞 다투어 한 마디씩 하려했다. 운청산은 급히 옥소를 들어 바닥에 주저앉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갑판 위에 편하게 앉았다.
회군한 지 스무날이 지난 늦은 오후. 여전히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불일장의 동쪽 병사는 썰렁하게 느껴졌다.
사방당에 속했던 인급무사들이 련을 떠남에 따라 안 그래도 빈 방이 널렸었는데 열이틀 전에 정명단까지 창단되어 그나마 있던 지급무사마저 모두 서쪽 병사로 옮겨간 탓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상자로 인해 짝을 맞추지 못한 천우단 사람들은 일단 자파로 돌아갔고, 사개 파의 젊은이들 역시 죽고 다친 이가 많아 사람 수는 더더욱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이들마저도 불일장 내부의 업무로 자리를 비우니 동쪽 병사에 남는 이들은 결국 점창 본산과 속가 제자들로 구성된 마흔여덟 명의 노호단 뿐이었다.
“장문인. 우리 일에 우리가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날 수만은 없는 일이오. 각파에서 군룡전급 고수들이 삼백 가까이 충원되었고 당가가 기다리던 배 역시 조금 전에 들어왔다 들었소. 곧 재출정할 분위기인데 이번에도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면, 본산을 수복한다 해도 본파의 영령들을 뵐 낯이 없을 것 아니오? 뭔가 방법을 강구해야 하오.”
동쪽 병사의 공지에 노호단 전원이 모인 가운데 속가의 대표격인 열화검객 구진충이 벽송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했다.
벽송은 눈을 감고 침음성을 흘릴 따름이었다. 그라고 왜 시원한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수뇌부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눈을 떴다. 자괴감에 휩싸인 수십 개의 눈망울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일차 원정 당시 노호단의 피해는 미미했다. 전체 인원 오십 세 명에 지금 있는 인원이 마흔여덟이니 겨우 다섯 명의 사상자가 생겼을 뿐이었다.
많이 살아남았다고 안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실력 이전의 문제, 곧 소외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본산 수복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싸워보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한편으로 또 원통한 것이었다.
“여러분의 분함을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러나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아주시오. 어차피 자력으로는 본산 수복이 불가능하오. 그 말이 무슨 뜻이오? 결국 찾는 것은 점창산의 도관일 뿐이지 과거의 성세가 아니라는 뜻이오. 우리는 남의 손을 빌어 본산을 되찾는 대가를 치러야 하오. 점창산 자락에 성도 표국의 지국이 설지 모르오. 곤명에 천북상인협이 들어설지도 모르오. 하지만 우린 화를 내지 못할 것이오. 과거의 성세를 되찾기 전까지는---.”
벽송이 말을 끊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당장의 분함과 당장의 목표만을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아득한 심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비참하리라. 오직 점창의 속가들만이 깃발을 휘날리며 다니던 그 길에 아미와 청성과 운가 그리고 당가의 표사들이 다니게 되리라. 그것을 보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고개만 숙여야 하리라.
벽송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산을 찾게 된 후, 누가 있어 과거의 성세를 되살릴 수 있겠소? 누가 있어 본산에 도움을 줄 수 있겠소? 나와 내 사제들 그리고 여러분뿐이오. 나는 여러분께 장렬한 산화보다는 끈질긴 생명력을 요구하고 싶소이다.”
사람들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벽송이 느끼는 굴욕감이 얼마나 클지, 또 벽송이 무림련 안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짐작은 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희망했다. 싸움이 끝나도 벽송만큼은 살아남기를. 아직 어려서 실력도 모자라고 경륜도 없지만 살아남기만 하면 거목이 될 포용력을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구진충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일제히 점창의 젊은 장문 벽송에게 포권을 취하고 읍했다.
“장문인! 굴욕은 잠깐이며 점창은 영원할 것이오.”
구진충의 말에 벽송도 마음을 담아 포권을 취했다.
“그렇소이다. 우리가 하나 되어 그리 만들어야지요.”
구진충 등이 다시 목례하고 흩어졌다. 벽송은 등을 돌린 구진충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구 대협! 이번 원정에서는 어떻게든 앞장 설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소이다.”
구진충이 돌아서서 미소 지었다.
“너무 애쓰지 마시오, 장문인. 장문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질만 부린 것 같아 미안하오이다.”
구진충은 다시 한 번 웃어 보이고 멀어져 갔다.
벽송의 주변에 있던 본산제자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아는 벽송은 아무런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벽인만이 전통을 맨 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아래쪽으로 향했다.
“어딜 가느냐?”
벽인이 돌아서서 대답했다.
“천혜원에 들러 벽월의 용태를 살펴보고 활이나 좀 쏘다 오겠습니다.”
벽송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활 쏘다 보면 좀 후련해지느냐?”
벽인은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운청산은 무의식적으로 천혜원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고는 실소했다.
‘훗! 여기 오려던 게 아닌데---. 왔으니 얼굴이나 보고 갈까?’
그는 자신이 요즘 이상하게 들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공사를 불문하고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다. 당우리와의 관계는 말할 나위도 없이 좋았다. 이미 당가타 근처에서 살기로 합의까지 보았다.
공적인 것도 그랬다. 처음 책임을 맡았을 때는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그러나 일이 진척됨에 따라,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를 따라오니 전에 없던 의욕이 생겼다.
애초에 정명단원들을 통하여 그가 이루고 싶은 성취는 조별로 오행십자진을 익숙하게 운용하는 정도였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희생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목표에의 도달은 생각보다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진전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운청산은 두 조, 세 조의 연동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방어진의 의미가 강한 오행십자진을 공격진으로 변형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때 제동을 건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정이었다. 운청산이 하는 일에 반대를 한 적이 없는 그였지만 공격진으로 변형하는 일에는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그가 한 말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단 한 마디 무언(武言)이었다.
백련불여일전(百練不如一專).
백 가지를 연마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를 파는 것만 못하다는 그 말 한마디에 운청산은 자신의 성급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삼 일 동안 배운 것을 삼 년 동안 익힌다는 각오로 연무하라 꾸짖던 태악도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때 이정이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했던 말이 들떠있다는 것이었다.
운청산은 천혜원의 현판에서 이정의 미소 띤 얼굴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천혜원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때였다.
“싫다. 싫다. 싫어.”
짙은 청색을 띠는 점창의 득라를 입은 도인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천혜원을 나서고 있었다. 활과 전통을 메고 있으니 바로 벽인이었다.
땅을 보고 걷던 그가 운청산을 발견하고 일그러졌던 얼굴을 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목례해 보였다. 그리고 운청산이 답례를 하기도 전에 지나쳐 버렸다.
“동료가 많이 다쳤나 보네?”
운청산은 벽인의 처진 어깨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천혜원의 입구 앞에 이르렀다.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안을 바라보았다.
당우리가 고개만 들면 바로 운청산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시침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숙한 얼굴을 대하자 운청산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또 전혀 딴 사람 같단 말이야.’
운청산은 한 동안 당우리의 시침하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깜짝 놀라며 눈을 치떴다.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당우리를 보느라고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당우리의 차분한 모습을 보고서 천혜원을 벗어났다. 선착장과 마을로 향하는 갈래길에 이르렀다.
“이런! 오늘은 못 간다고 말해 줘야 기다리지 않을 텐데---.”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을 보며 망설이던 운청산은 얼굴을 찡그리며 마을로 향했다.
금어향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대부분이 선부, 어부 일가 혹은 불일장과 관련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어서 그다지 큰 집도 없고 번화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이백여 호가 넘다보니 있을 것은 대강 다 있었고 특히나 사천무림련이 옮겨오면서 근근이 유지되던 주루와 다루 등도 성업 중이었다.
운청산은 금향루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이층 주루로 들어갔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몇몇 식탁에는 무림련 임시 선단에 속하는 선부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주루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이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부단주! 여기요.”
고개를 들어 보니 당명인이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운청산은 뛰는 시늉을 하며 올라가서 당명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명인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소. 자! 자! 갑시다.”
당명인이 이끄는 식탁으로 가던 운청산은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몇 가지 요리를 시켜놓고 자작을 하고 있는 초로인, 당유연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사람을 대하고 이렇게 떨린 것은 정체를 숨기고 운녹산을 만났을 때뿐이었다. 그때와는 의미가 달랐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더 떨려서 쉽사리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탓에 운청산은 급히 당명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은 아버님이 뵙자 청한 것이오. 이 부단주가 어려워할까 봐 내가 대신 나섰소.”
운청산은 겨우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깊숙이 읍을 하며 말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서야 당유연이 고개를 들고 운청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려 했다. 그때 당유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네. 바쁜 사람인 거 다 알면서 이 시간에 부른 내가 잘못이지. 앉게.”
세상의 예법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한 그였지만 본능적으로 다시 한 번 읍한 후에 조심스럽게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당유연이 당명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 친구와 둘이서 이야기할까 하는데, 괜찮겠느냐?”
당명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초록빛 장갑을 낀 왼손을 당유연의 시선으로부터 조심스럽게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운청산을 향해 우호적인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식탁을 떠났다.
당유연은 당명인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끝까지 보다가 운청산의 눈을 다시 응시했다. 그는 그 눈을 피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힘겹게 버텼다.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낀 탓도 있었지만 죄스러운 마음이 더 강했다.
당유연은 아직도 운청산을 이청산으로 알고 있었다. 그를 통해 운녹산에게 말이 들어갈까 봐 당우리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당유연이 여전히 말이 없자 운청산은 문득 조금 전 그가 당명인에게 했던 언행을 떠올리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리의 말대로 좋은 분 같구나. 그냥 가라 해도 될 것을 굳이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그 눈빛, 포근했다.’
운청산이 나름대로 당유연을 판단내리는 순간 그가 빈 잔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술 좀 하는가?”
운청산은 우선 술잔부터 받고 대답했다.
“산에서 자라서 잘 못합니다.”
“아! 그렇군. 도관에서 자랐지? 그래도 잔은 받게.”
일단 술을 받기는 받았는데,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인자로부터 주법의 대강을 듣기는 했지만 어른과의 주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강정과 함께 마실 때 청인자가 술 석 잔을 거푸 비웠던 것을 떠올리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마셨던 비통주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통주 못지않은 향기와는 달리 입안에 닿는 순간 후끈 달아오르더니 넘기자 목이 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구겨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폈다.
당유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허! 괜찮지? 그나마 모태주는 있더구먼. 자! 한 잔 더.”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새어나온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당유연은 벌써부터 목까지 달아오른 운청산에게 다시 술을 따랐다.
운청산은 어쩔 수 없이 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을 더 받아 마셨다.
이마까지 붉게 달아오른 운청산은 당유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잔을 엎었다. 그것을 본 당유연이 또 다시 웃었다.
“호! 이제 보니 자네 늦었다고 벌주 마셨구먼?”
운청산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주법에 어둡습니다. 불위주곤(不爲酒困)하라 하였으니 그 예에 따를까 합니다.”
불위주곤, 술을 마시되 술로 인해 난잡해지지 않는다는 논어의 가르침이었다.
당유연은 미소를 지으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 했다.
“제가---.”
운청산이 급히 두 손을 뻗어 술병을 잡으려 했으나 당유연은 손을 저어 마다하고 자작했다.
“이게 편해.”
당유연이 잔을 내려놓고 말하는 순간 운청산은 억지로 눈을 치떴다. 이상했다. 당유연의 눈이 갑자기 세 개로 보였다가 네 개로도 보였다.
정신을 차리려하면 할수록 눈앞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통주 한 잔에도 취하는 그가 모태주를 안주도 없이 석 잔 연속 비웠으니 술이 갑자기 오르지 않을 턱이 없었다.
‘크-큰일 났군. 이러다가 큰 실수하겠는데---.’
그때 당유연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자네 꿈이 뭔가?”
운청산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따뜻한 가정을 가지는 겁니다.”
당유연이 눈을 뚱그렇게 치뜨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토했다.
“따뜻한 가정을 가지는 거라고? 사나이 꿈이 겨우?”
머릿속이 아니라 머리가 통째로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겨우 알아듣고 눈을 치뜨려고 노력하며 힘겹게 대답했다.
“세-세상을 잘 모릅니다.”
이렇게 급박하게 취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운청산은 자신의 혀가 꼬이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당유연의 얼굴이 자꾸 흐릿해져 갔다.
“세상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알아야 뭐가 돼도 되겠지. 그럼 자네 함께 가정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지만 운청산은 알아듣지 못했다. 어떻게 속이 울렁거리는 것과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 동시에 느껴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운청산은 갑자기 당유연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바닥을 뻗었다. 당유연이 눈을 뚱그렇게 치뜨는 순간 운청산이 굴러가는 듯한 발음으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장인어른. 잠깐만.”
운청산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당유연은 쉬지 않고 실소했다.
그때 운청산이 아예 눈을 감고 두 손을 옆으로 뻗었다. 전신을 급하게 휘돌던 혈류가 느려지면서 주정이 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몸을 흔들어대는 기운을 모으고 또 모아 장심으로 내보냈다. 그의 주변으로 투명한 안개가 어른거리더니 주향이 진동했다.
운청산은 두 손을 내리고 차분히 눈을 떴다. 제 낯빛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고 눈까지 맑은 기운을 되찾아 당유연을 응시했다. 그가 또렷하게 보였다.
운청산은 내심 안도하고 고개를 숙였다.
“결례했습니다. 뭐라 물으셨는지요?”
당유연은 오른쪽 뺨을 실룩이며 고개를 저었다.
“됐네. 대답은 이미 들었어.”
운청산은 당황하여 기억을 더듬었다.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 말고는 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혹시 말실수를?’
그러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다만 당유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있음을 보고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었다.
“술자리를 이렇게 일찍 파해야 되다니---. 자네, 재미없어. 술 좀 배워야겠네. 가세.”
당유연은 미소 띤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운청산이 일어서서 읍했다.
“죄송합니다.”
당유연은 미소 띤 얼굴에 묘한 눈빛을 보태어 운청산을 바라보고는 앞서 걸었다.
‘역시 난 이기적인가? 날개를 단 놈이 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만 원한다 하니 더 마음에 드는 건 무슨 까닭인가? 날 수 있음을 모르는 것인가? 어찌 됐건 아들 녀석이 그런 말을 했다면 손부터 나갔을 것 아닌가? 허허허. 이 무슨 속 좁은 여편네 심보인가?’
당유연은 씁쓸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의 질책이 쓰게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 * *
넓은 종유동굴이었다. 갈수록 높아지는 계단식의 그 동굴은 어둠침침한 가운데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오히려 더 음산하게 느껴졌다.
똑! 똑! 똑!
늘어진 종유석 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는 소리가 들리고,
후우우우아아! 후우우우아아!
바람소리는 귀신이 등 뒤에서 속삭이는 듯 하여 처음 들린 사람은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동굴의 아래쪽에서 검은 도포를 휘날리며 위로 오르는 인영이 있었다. 일보에 칠팔 장씩 솟아오르는데, 동굴의 분위기와는 달리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유려한 신법이었다.
신법에서 느껴지듯이 인영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 도사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에 간간히 백발이 드러나 보였으나, 반대로 부드럽게 솟아오른 광대뼈 아래쪽 뺨은 붉은 대추 빛으로 물들어 윤택하게 느껴졌다.
여도사는 위쪽으로 계속되는 횃불을 따라 올라가며 노닐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군데군데 검은 도포 차림의 도사들이 눈에 띄었다. 좌정을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몇몇은 벌거벗은 채 제 정신이 아닌듯한 여인들을 무릎 위에 앉혀 두고 있었다.
여도사는 미약한 교성소리와 방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짓었다.
마침내 횃불의 행렬이 끝나는 동부의 상단부에 이른 여도사는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는 강시 같은 초로 도사를 발견하자마자 입을 열려했다. 그러나 도사의 전신을 똬리 틀 듯 휘감은 잿빛 구름 같은 기운을 발견하고서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후우우우우아아아!
도사의 입에서 낮은 숨소리가 새어나오는 순간,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이 줄어들면서 도사의 왼손 장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그의 왼손에 검은 힘줄이 두드러졌다가 잠시 후에 사라졌다.
도사가 눈을 떴다. 그러나 흰자위를 볼 수 없었다. 온통 검은자위만 번들거리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
다시 한 번 낮은 숨소리가 토해지는 순간 그의 눈빛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천궁에서 음도라 불렸던 그 도사였다.
그의 눈이 여도사에게로 돌아갔다. 여도사는 방긋 웃으며 그의 앞으로 기듯이 다가와 음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음도의 눈동자가 조금 아래로 처졌다. 풀어헤친 헐렁한 도포 사이로 여도사의 풍만한 젖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여도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두 팔로 바닥을 짚어 가슴을 더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눈가에 물기를 드리우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 말했다.
“사형! 흑사가 기운이 없어 보였어요. 역시 이곳의 기운으로는 배부르지 않은가 봐요?”
음도는 조금씩 비틀리는 여도사의 농염한 몸짓에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어 뒤로 밀어버렸다.
“또 나갔더냐? 육향이 짙구나.”
여도사는 방긋 미소를 지어보이고 뒤로 물러나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멀리 갔다 왔지요. 근처에서 미동(美童)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 에휴!”
음도가 차갑게 말했다.
“백골은 말이 없다하나 쌓이면 꼬리를 밟히리라. 적당히 하여라.”
여도사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음도에게로 다시 다가앉았다.
“우리가 여기 평생 살 건가요? 사형! 그나저나 우리 언제 강선곡으로 돌아가요? 흑사도 힘들어하잖아요?”
음도는 처음으로 낯빛을 바꿔 침음성을 흘렸다. 여도사가 다시 채근했다.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거예요?”
음도는 침울하던 눈빛을 확신으로 물들였다.
“지난번에 천궁에 들렀을 때 마침내 천군을 만났다. 천군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와 파불 그 땡추는 오줌을 쌀 뻔했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야. 우리는 반드시 강선곡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시간일 뿐. 화산의 모든 잡종들을 다 죽여 버리고 강선곡 뿐만 아니라 화산 일대를 모두 손아귀에 쥘 수 있으리라.”
“에게게? 왜 화산 일대로 변했지요? 전에는 섬서를 쥐겠다 했잖아요?”
음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욕심을 용납할 인간이 아니야. 난 적게 먹더라도 오래 살고 싶어.”
여도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어머머! 그렇게 대단하던가요?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음도가 여도사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웃음 지었다.
“아서라. 그 앞에서 궁둥이 흔들다가는 한순간에 핏물로 화하리라.”
여도사가 뒤로 물러나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쳇! 그는 남자가 아닌가, 뭐?”
“흐흥! 넌 네 미모와 염정미공을 너무 과신하는구나. 그에게는 그 어떤 술법도 통하지 않아.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꿈쩍할 인간이 아냐. 게다가 천하를 쥐도록 운명지어진 인간이다. 너 정도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대단하긴 대단한 인간인 모양이네. 사형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부 빼고 처음이지요, 아마?”
음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사부 그 늙은이가 살아있다 해도 천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신이다. 멸청광자라고 들어보았느냐?”
여도사가 이채를 발하며 대답했다.
“천군의 스승이라면서요, 청성을 뒤집어 놨던.”
“그렇다. 천하에 상대할 이가 오로지 곤륜의 태을진인 뿐이었던 불운한 강자였다. 좌상이 말했다. 천군은 그 스승의 경지를 진즉에 넘어선 존재라 했다. 이제 태을도 없으니 누가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으랴.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좌상 그 늙은이가 우리 같은 술자들에게는 기회를 안 줘. 공이 있어야 상을 요구할 수 있을 텐데, 답답하구나.”
여도사는 음도의 말에 별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일어나 그의 왼쪽 석탁 위에 놓인 과일들 가운데 포도 한 송이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송이 째 밑에서부터 입으로 따먹었다.
보란 듯이 포도를 한 참 동안이나 혀로 굴리고 놀던 여도사가 마침내 씨와 껍질을 바닥에 뱉어냈다. 음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여도사가 이채를 발하며 아래쪽을 응시했다.
도포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다가 곧 젊은 도사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동주! 천궁으로부터 전서가 왔습니다.”
음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미는 순간 여도사가 묘한 눈빛으로 젊은 도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젊은 도사가 전서를 건넸다. 그때 여도사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잘 생겼구나. 왜 몰랐을까? 등하불명에 원존근비(遠尊近卑)라. 귀한 것은 먼데 있는 줄만 알았더니 가까이에 너 같은 물건이 있었어. 너 조금 있다가 나 좀 보자꾸나.”
순간 젊은 도사가 눈을 치뜨며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고 바닥에 털썩 무릎 꿇었다.
“부문주! 살려주십시오.”
여도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슬쩍 뒤로 젖혔다.
“흐흥! 누가 잡아먹겠데? 여긴 좀 춥잖아? 서로 따뜻해질 때까지만 같이 있자꾸나.”
젊은 도사는 이마에 피가 나도록 바닥을 찧었다. 그때 음도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만 가봐라. 사매! 그럴 시간 없다.”
청년 도사는 울퉁불퉁한 바닥을 기어서 내려갔다. 여도사는 아쉬운 눈빛으로 청년도사의 엉덩이를 바라보다가 음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뭔데 그렇게 흥분하세요?”
“날짜를 꼽아라. 지룡을 물 속에 빠뜨려야 한다.”
여도사가 눈을 치떴다.
“지룡을 물속에? 수룡이 노할 텐데? 풍랑이 필요한가요?”
“음!”
음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도사가 엄지손가락으로 손가락 매듭들을 짚어가며 천간지지를 확인했다.
백접이 나니 목련도 날고 싶다.
운청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깃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서산 정상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히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저러고도 또 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나?”
정명단원들이 진정으로 즐기는 뒷풀이의 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없는 운청산으로서는 고개를 가로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일은 여기까지. 그는 깃발을 바닥에 꽂아둔 채 미련 없이 돌아섰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별 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씩 다치는 사람이 생겼지만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여서 중단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 반해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마치 뒷풀이에서 이기기 위해 훈련을 하는 듯, 정명단원들은 훈련 중에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크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겉으로만 드러나는 성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뒷풀이 와중에서 돈돈해진 동료애야 말로 가히 ‘인화가 이루어졌다’ 할만한 것이었다.
운청산은 짜릿한 해방감을 느끼며 동료들에게 등을 보였다. 그리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 그의 자리로 올라갔다.
그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평온했다. 얇은 구름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황혼이 지고 있어서 마치 나들이 나온 구천현녀(九天玄女)가 분홍빛 봉황의를 드리운 것 같았다. 금사강의 용왕도 그에 호응하여 붉은 빛 감도는 금빛 비늘을 일렁거렸고 풍신도 흥에 겨운 듯 선들바람 일으켜 계절 끝 막바지 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아! 좋구나. 황혼녘 눈 덮인 곤륜의 절경도 좋지만 난 이곳이 더 좋아. 당가타도 이러할까? 물어 봐야지.”
누군가 곤륜을 일러 천만 년의 고독이 맺힌 웅혼한 기상의 표본이라 했다. 그러나 그 엄숙함 앞에서 인간은 경외심을 갖게 될지언정 소박함과 평온함을 느낄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금어향은 달랐다. 어부들은 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잡고 아낙네들은 죽신을 삼으며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청아한 목소리로 깔깔댔다. 금어향에는 자연과 사람을 경계 짓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서로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하나로 비추어질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아무런 그늘도 없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목전의 풍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희미해졌다. 운녹산마저도 의미가 없다 싶었다. 이미 지난 과거를 들추기보다는 지금 그가 있는 곳에 정착하여 평범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안아주고 무등을 태우고 함께 물질을 하며 고기를 낚고 싶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지. 굳이 연연하지 않으리라. 함께 살았다 해도 독립을 했을 나이, 따지면 무엇 하리. 이번 일이 끝나면 한곳에 정착하리라.’
그때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청산은 무엇 때문에 나는 소린지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명단원들이 한 개의 깃발을 중앙에 꽂아두고 각 향 별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깃발을 한 개로 줄였구나.”
그들의 합창이 들렸다.
“셋, 둘, 하나!”
하나를 내지른 후 네 개 향이 일제히 깃발을 향해 쇄도했다.
타다다다다다닥!
죽도와 죽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조별로 부딪친 사람들이 널브러지고 나뒹굴었다. 조원을 잃은 사람들은 즉시 다른 조의 자기 방위를 찾아 들어갔고, 변형된 대진을 만나게 된 조들은 급히 같은 향의 다른 조들과 연동하기 시작했다.
“이 대협이 없는데도 규칙을 잘 지키네.”
흡족한 광경이었다. 두 개는 물론 세 개, 네 개의 진이 합해졌건만 그 움직임은 전혀 둔화되지 않았다. 전후좌우 이동에 혼동이 없었고 반선과 회룡은 물론 분진과 산진을 자유자재로 행했으며 재합진 역시 무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약 실전에서 그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면 개별 전투를 벌이는 것에 비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으리라.
“오늘은 일향인가? 아쉽구나. 중원을 조금만 더 보강할 수 있으면 효과가 배가될 텐데. 역시 검수가 너무 드문 게 표가 나는구나.”
운청산이 아쉬움을 드러낼 때 결국 그의 예상처럼 일향 일조의 문취옥이 깃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모의전투는 그 순간 끝이 나고 일향을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분통을 달랬다.
“오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다행이긴 한데,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어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 정말 이렇게 입 다물고 있어도 되는지---.”
운청산은 황혼 빛에 얼굴이 반짝여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오환을 주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벗어놓은 옷과 병장기를 주워들고 병사로 향했다. 강정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자 문취옥이 깃발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어 답례하자 두 사람은 조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병사로 향했다.
사람들이 병사에 이르러 완전히 점들처럼 보이자 운청산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손을 뻗으니 거기에 검이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운청산은 조부 운검정의 이름 없는 검이 마음에 들었다. 전투에 임하게 되면 결국 태악도인의 사우팔절검을 쓰게 되리라. 그러나 검과 함께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패도적인 사우팔절검보다는 유려한 기품이 느껴지는 조부의 무명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예 바람의 영과 함께 논다는 뜻으로 풍령동유검(風靈同遊劍)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다.
“바람아, 잘 있었니? 함께 놀아보자꾸나.”
쩡!
세차게 내뻗어진 검신이 바르르 떨리며 바람을 꼬드기는 순간 운청산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검신 주변을 미약하게 휘돌던 바람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장난이라도 걸듯이 그의 팔을 따라 뺨을 토닥였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풍신의 입김을 따라갔다. 쫓고 쫓기던 그와 바람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선풍을 일으켰다.
바람에 휘감긴 천지의 기운이 그의 호흡을 타고 머리를 맑게 한 후 토하는 숨결을 따라 그의 본신 기운과 함께 다시 바람을 탔다. 그의 몸이 휘돌았다. 땅을 박찬 것도 아닌데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격식도 없이 허공을 휘돌다가 땅에 닿고 다시 허공을 날아올라 동산을 떠돌았다.
쩡!
바람의 숨결 따라 부드럽게 휘돌던 그의 검이 갑자기 세차게 휘둘러졌다. 그러나 바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새로운 놀이였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던 바람은 운청산의 원대로 방향을 틀었다.
쩌정! 쩡! 쩡!
한 번씩 세차게 휘둘리는 검세를 바람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바람이 나를 돌본다. 검이 찔러오면 흘려보낼 것이고 도가 떨어지면 퉁겨 내리라. 사람을 찌르지 않고도 능히 이기리라. 바람이 전해주는 기운이 끊기기까지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운청산의 신형이 툭 떨어졌다.
“아차! 함께 놀다가 내 이익을 챙기니 바람이 나를 떠났다. 아직 멀었어.”
운청산이 고개를 저어 씁쓸한 마음을 달래는 순간,
짝짝짝짝짝!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거기에 당우리가 있었다. 운청산이 기쁨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순간 당우리가 바닥에 내려두었던 대나무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휘류류류류류류류!
좁아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하는 구멍을 가운데 놓고 운현산 등은 팔방을 점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구멍이 하얀 기류를 빨아들이는 것을 그저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명단을 책임 맡고 한 동안 바삐 움직이던 운청산이 여유를 되찾은 엿새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처음 이틀은 억지로 기운을 차단할 수 있었지만 결국 나흘 전에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양신의 생성을 막는 일은 우리의 손을 떠났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양신은 생성되는 것은 기정사실. 아이와 같다 했다. 상처받기 쉽다 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은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청산이 심적인 타격을 받지 않게 돌보는 것. 재출정을 하게 되면 우선은 경산과 추산이 예전처럼 청산을 돕고 필요에 따라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선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심각한 운현산과는 달리 운추산과 몇몇은 오히려 신기한 듯한 눈빛으로 만족을 모르는 듯 한정 없이 기운을 들이마시는 구멍을 바라보았다.
한순간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던 안개 같은 기운이 뚝 끊어졌다. 그 순간 구멍 역시 어미젖을 실컷 빤 아기처럼 느리게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운현산 등이 동시에 구멍을 살폈다. 운추산이 미소 지으며 모두에게 말을 전했다.
‘포식한 표시가 나는군요. 벌써 우리만 해졌어요.’
그랬다. 나흘 전만 하더라도 손바닥 위에 올리면 두 번은 구를 정도의 구슬 크기였건만 수십 배로 커진 것이었다.
운경산이 툴툴대듯 뜻을 전했다.
‘곧 구멍 위에서 지내야 할 것 같소. 우리에겐 의미가 없다지만 발밑이 허전해지겠구려.’
모두가 씁쓸함과 신기함이 뒤섞인 미소를 공유했다.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챙겨주는 주먹밥과 소채 그리고 어탕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운청산은 당우리가 새로 건네주는 주먹밥을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당우리가 손을 뻗어 그의 입술 옆에 붙은 밥풀을 떼어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행복이란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들어온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주는 남자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당우리는 바구니에서 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후르륵 소리를 내며 어탕을 마시고 조금 남은 주먹밥을 털어 넣은 운청산은 소채를 한 젓가락 집어 함께 우물거리고서 다시 어탕을 마셨다. 그리고 두 팔을 뒤로 돌려 바닥을 짚고 배를 내밀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통을 받기를 기다리던 당우리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배를 두드렸다. 운청산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서 수통을 확인하고 받아들었다.
“근데 안 바쁘오?”
당우리는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다.
“먹을 거 다 먹고 이제야 그걸 물어요?”
운청산이 대답 없이 미소를 짓자 당우리가 다시 말했다.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퇴각한 지 스물 하루. 생사가 불분명했던 중상자가 아니라면 종길처럼 대부분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더군다나 당우리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사람을 담당한 것은 아니니 이제 한숨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순간 당우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왜?”
운청산이 놀라서 소리치듯 묻자 당우리는 눈물 맺힌 얼굴을 다시 고개를 들어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청성의 송명 진인이 오늘 정신을 차렸어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면서 제게 검을 달라했지요. 가슴에 얹어주니 안간힘을 다해서 두 손으로 검파를 쥐고서 티 없이 웃어보이고는---. 그만, 그렇게 죽었어요. 오늘로 일곱 명 째.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지켜만 봤을 뿐.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했다면---.”
운청산은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눈을 감았다. 죽음보다도 당우리의 눈에 고인 눈물이 그를 더 슬프게 만든다는 사실이 슬펐고 그래서 그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래서 무감각해진 것이리라. 운청산은 하루 빨리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싸움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운녹산과 이정과 강정 부부 그리고 당유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휴우!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싸움이 아니구나. 내가 시작한 것은 아니나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싸움이구나.’
운청산은 고개를 젓고 당우리를 응시했다. 그녀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등 뒤에 가서 두 발을 벌려 앉았다. 그리고 두 팔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가슴으로 등을 받았다.
운청산은 아기를 어르듯 전신을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 맞춘 후에 말했다.
“오늘 초저녁의 풍광은 참으로 아름다웠소.”
그는 그가 느낀 아름다움을 전하고 다시 물었다.
“당가타도 이곳처럼 아름답소?”
당우리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훔쳐내고 목을 안은 운청산의 굵은 팔을 두 손으로 쥐며 대답했다.
“응. 이곳보다 조금 더 번화하지만 아름다움은 이곳 못지않아요. 한 여름 해뜰 때면 장강이 금빛으로 물들지요. 어부들이 배 띄울 준비를 하는 동안 발가벗은 아이들이 코를 잡고 물에 뛰어들어요. 아주머니들이 뒤늦게 달려와 혹시라도 아이들이 물살에 휘말릴까 안절부절못할 때면 어부 아저씨들이 빙그레 웃으며 긴 장대를 뻗어 위험한 곳으로 못나가게 막아주지요. 나도 열한 살 때까지는 그 물에 놀았어요. 할 수 없이 따라 나온 큰 오빠가 나를 지켜보며 입술을 퉁퉁 부어올라도 모르는 척하고 실컷 놀았지요. 생각하니 그때 정말 즐거웠어요.”
운청산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베어 물고 당우리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붙이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 이번 일이 끝나면 그렇게 삽시다. 이제는 물에 뛰어들 수 없을 테니, 우리는 물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아낙네가 되구려. 난 내 아이와 함께 실컷 물장구치고 놀겠소.”
순간 당우리가 운청산의 뺨에서 뺨을 살짝 떼었다가 두드리듯이 부딪쳤다.
“못 됐어요. 자기만 놀려고.”
운청산이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보이지 않는 금사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렇게 놀아보지 못했다오. 나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와 그렇게 놀고 싶다오.”
당우리는 운청산의 어린 시절을 불현듯 떠올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뺨을 비볐다. 운청산은 그 따뜻한 느낌을 간직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
이른 새벽, 운청산은 뜻밖의 호출을 받고 이정과 함께 불일장으로 들어갔다. 여명이 겨우 기지개를 켜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일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깨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운녹산의 호출은 그 긴박감과 연관이 있었다. 불려간 자리에는 이미 벽송과 벽인이 도착해 있었다. 좋게 말하면 비교적 독립적인, 솔직히 말하면 중심세력에서 벗어난 두 개의 단인 노호단과 정명단의 책임자 네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운녹산은 재출정을 알렸다. 그것도 떠나기 바로 한 시진 전에.
이정과 운청산으로서는 별 다른 불만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병에 불과했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그저 따르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벽송과 벽인의 얼굴에는 참아내고 남은 듯한 소외감과 분노의 찌꺼기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아무리 처지를 인정하려 해도 점창산을 수복하는 일에서 그들이 소외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리라.
하지만 운녹산은 벽송과 벽인의 기분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외면하고서 이정과 운청산에게 시선을 주며 정명단의 성과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나쁘지 않더구먼. 비시진보다는 훨씬 더 유용할 것 같았어. 처음에 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내심 화가 나있었다네. 그런데 엊그제 오후에 직접 살펴보니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더군. 한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었다면 공격진으로 변모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던데, 아쉬웠어. 어쨌든 정명단의 훈련법에는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네. 당가주는 차후에 엄숙한 분위기를 지양하고 그 같은 방식으로 훈련을 시도해 보겠다는 말씀을 하셨네. 실전에서 좋은 성과를 얻길 기대하네.”
이정과 운청산은 목례해 보이는 것으로 운녹산의 치하에 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송과 벽인이 함께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묵묵히 앉아 기다렸다. 두 사람은 먼저 방을 빠져나왔다.
불일장의 중심로를 되짚어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지금껏 무림련의 통일된 복장인 청의 대신에 녹의를 입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당가 사람들이었다. 간소한 제물들을 놓인 제단이 준비되어 있었고, 향을 든 당유연과 초로인 두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 뒤로 군룡전에 속한 당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가의 젊은이들 역시 도열한 채 서 있었다.
이정과 운청산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발을 멈춰 세웠다.
당유연이 엄숙한 자세로 향을 사르고 제단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인 후에 향을 향로에 꽂아두고 돌아섰다. 그는 가문의 사람들을 둘러보고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가를 가호하시는 선신들과 조상선령들께 고하였다. 당가의 가주로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독령과 암혼의 봉인을 푼다. 이는 본 가주가 이번 싸움에 본가의 명예를 걸고 전력을 투입한다고 천명함이니, 당가인들은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한 독령과 암혼을 자유로이 사용하라.”
순간 당가인들이 일시에 무릎을 꿇고 당유연에게 절하며 각자의 이름을 앞세워 외쳤다.
“당가인 당모모가 가주의 명을 받습니다.”
당유연과 두 초로인이 절을 받은 후 제단을 향해 돌아서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모든 당가인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얇은 녹포 상의를 벗었다. 옷의 어깨 부분을 잡고 허공에 펄럭이니 옷 사이사이에 숭숭 뚫린 구멍이 보였다. 그들은 절도 있게 옷을 접어 옆에 내려놓고 그들의 무릎 앞에 놓인 울퉁불퉁한 면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들이 면포를 머리 위로 받쳐 올리며 함께 외쳤다.
“이제 당가의 후손 당모모가 선령들의 피땀을 사용하리니, 조상선령들께옵서는 이 후손이 삿된 마음을 버리고 긍지를 지키도록 보우하시며 선신들께옵서는 하늘이 이 죄업을 용서하시도록 도와주소서.”
합창하듯 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면포를 받쳐 든 채로 고개를 숙인 후에 들고 있던 면포를 조끼처럼 입었다. 그리고 그 위로 개어놓았던 녹포를 걸쳤다.
“저것이 바로 당가의 요술방망이 독령암혼갑인가?”
이정이 중얼거리자 운청산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게 뭡니까?”
“무인들이 경원하는 수백 가지 독과 암기를 다루는 당가가 오늘날 정파로 꼽히는 것은 독과 암기의 사용에 있어 신중을 기한 때문이지. 그것이 바로 독령과 암혼의 금제. 그래서 당가인이 평소에 품에 지닐 수 있는 독과 암기는 독성이 약한 독 두 가지와 극독을 묻히지 않은 암기 두 종 그리고 금제에 걸려 있으나 유사시에 사용할 비장의 암기 일 종, 해서 다섯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고 하네. 하지만 지금처럼 금제가 해제되면 각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독과 암기는 능력에 따라 수 배로 늘어나고 또 강력해지지. 독령암혼갑은 바로 그 독과 암기들을 효율적으로 지닐 수 있고 또 사용할 수 있게 고안된 옷이네. 안에 탄성이 강한 철판이 들어있어 호신갑의 역할도 한다더구먼. 녹포에 뚫린 구멍들 보았지? 쓰고자 하는 암기나 독을 바로 꺼낼 수 있도록 뚫어놓은 것이야.”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정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 이럴 시간 없네. 가세.”
두 사람은 의식을 마무리하는 당가인들을 뒤로 하고 걸었다. 이정이 걸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비참한 꼴을 많이 보게 생겼군.”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이정이 불일장의 정문을 넘어서며 운청산의 물음에 대답했다.
“내가 아는 한, 당가가 싸우기 전부터 금제를 푸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야. 아까 말했다시피 독과 암기를 떳떳한 무기로 생각하는 강호인들은 없네. 대체로 무서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경멸하지. 그런 인식 속에서 당가가 정파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 들인 공은 다른 파의 경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눈물겨운 것이었을 거야. 모두가 사악한 가문이라고 생각하던 때에는 멸문 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라도 독심을 일으켜 받은 피해를 수배로 돌려주어야 했고, 겨우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생각한 때부터는 편견과 싸워야 했겠지. 그 편견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독령과 암혼의 봉인이네. 당가는 그것을 꾸준히 지켜왔고 의와 협을 목숨처럼 여겨왔네. 천혜원도 그런 편견을 타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
이정은 웃으면서 당가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대해 덧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가에 대한 편견은 단순히 그들 가문의 정체성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공 역시 편견의 대상이었다. 독과 암기를 쓰니 무공은 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했다. 그러나 당가의 몇 가지 무공들은 강호의 일절이라 할 만한 것이라 했다.
그 첫째가 독과는 하등 상관없는 무영비독수. 굳이 이름에 독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결과적으로야 인식을 바꾸지 못했지만 무영비독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무공이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발전되어 암기술의 발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법이 되었다.
둘째는 바로 추뢰신법이었다.
독은 가까이서 암기는 멀리서.
당가인이라면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말이고 추뢰신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정의 경공신법이다. 이름처럼 점창의 탄현신법에 버금갈 정도로 빠를 뿐만이 아니라, 유운신법만큼이나 지구력이 강한 신법이기도 했다. 독령암혼갑 같은 무거운 옷을 입고 움직여야 하는 당가인에게는 신법이 구명절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극강이 아닌 한, 수법 한 가지와 신법 하나로 칠대세가 반열에 오르기는 힘든 일이지.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피 빠르다는 것이 강호에서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쾌를 요결로 삼는 그 두 가지 무공만 해도 결코 무시당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당가인들이네.”
이정이 말을 끊었다. 병사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는 겨우 잠에서 깬 사람들에게 출정시간을 알리고 다른 이들을 모두 깨우도록 명했다.
이정은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모습을 본 후에야 마루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그들이 미리부터 봉인을 푼 것은 결사의 뜻을 비치는 것. 죽음을 각오한 이들은 상대에게도 그만큼 가혹한 상대가 되겠지. 동료들 때문에 독을 남발하지는 않겠지만 극독이 묻은 암기들과 보기 드문 당가의 기병들이 난무할 걸세. 그 결과를 보는 건 참으로 끔찍할 거야.”
운청산으로서는 듣고 있기가 겁나는 소리였다. 당유연이 누구고 당가가 어딘가. 그의 장인이 될 사람이고 처가가 될 곳이었다. 그런 당가의 손에 의해 처참한 광경이 연출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난 당 어르신은 따뜻한 분이었다. 그런 양반이 그런 결정을 한다? 모르겠다. 확실히 산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운청산이 얼굴을 찌푸리고 생각하던 그때 이정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 심각할 것 없어. 당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괴롭겠지만, 독에 죽으나 칼에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야. 병장기가 다를 뿐, 그들이나 우리나 살인의 죄악을 범하는 건 똑 같아. 칼을 놓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일이지. 자! 우리도 준비하세. 우리도 밥술이나 뜨고 움직여야 할 것 아닌가?”
운청산은 그 즉시 생각을 접어 버리고 방으로 돌아갔다.전체 인원으로 따진다면 일차 원정에 비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머릿수로 따질 일이 아니었다.
군룡전만 해도 전체 인원이 삼백이 넘었다. 가장 적은 당가의 인원마저도 쉰 명에 이르니 그 숫자만으로도 각대 문파의 개별 전력(全力) 삼할 가까이를 투입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리라. 거기에 사대문파의 젊은이들 역시 보강되어 삼백에 이르렀고, 정명단도 개별적으로 움직이던 용병에서 나름대로 정예화되었다. 그리고 노호단이 있고 이제는 약세가 되어버린 관음사의 비구니들도 삼십 명이 넘었다.
전력(戰力)을 따진다면 일차 원정 때보다 세 배는 강해진 것이니, 칠대세가나 구대문파 가운데 둘의 전력에 근접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힘이 다시 선착장에 모였다. 오늘의 도강은 지난번과는 그 순서가 달랐다. 군룡전이 먼저 도강하고, 이상한 것들이 실린 배로 당가의 젊은이들이 사람 크기보다 더 큰 나무 상자들을 든 채 두 번째로 배에 올랐다.
운청산은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이정에게 허락을 구하고 강정 부부와 함께 대열의 뒤로 빠졌다. 그곳에 종길과 당우리가 각각의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서있었다.
“씨! 나도 가고 싶은데---.”
종길의 아쉬움 가득한 말에 문취옥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