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부자, 마주보는 그리고 외면하는
같은 강이건만 반대쪽 포구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후텁지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라연은 한기를 느꼈다.
<나 소저는 우리와 달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낮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했다. 꾸짖는 것 같았다. 누가 누구를 꾸짖는단 말인가.
철든 이후로 누군가에게 야단맞아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심지어는 스승 신수사태마저도 그녀의 언행에 눈살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책임감이 지나치다는 말을 들었다. 마음에 여유 한 자락 지니고 살라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부에게 달려가 조속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그 결과로 천혜원의 노련한 의원들이 급히 도강했고 당가의 사람들은 부상들을 처치했으며 그녀와 관음사 비구니들은 동분서주하며 부상자들의 수발을 들었다.
그녀는 잊을 수가 없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주저 없이 말하는 그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당명인이나 운강인처럼 눈길을 외면하고 안절부절못했다면 다시는 떠올리지 않았으리라.
나라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나라연은 몸을 돌려 관음사의 비구니들이 있는 배의 중앙부를 바라보았다. 다친 사람이 적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저 여린 이들만으로도 난 이미 힘들어. 나라연! 정신 차려.'
그때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돛이 접히기 시작했다. 나라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포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혹시 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당우리도 없고, 그도 없었다.
나라연은 안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다시 세차고 고개를 젓고 입술을 깨물었다.
운녹산은 차를 내려놓고 차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놓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운남의 지도였다.
"후!"
운녹산은 지도에서 눈을 떼고 오른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 그리고 다시 지도를 짚어가며 중얼거렸다.
"천북상가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석탄과 주석. 그리고 대리석은 본가에서 직접 손대 볼만도 하지. 그러나 그것을 다 얻으려면 난창강을 따라 운남의 남쪽 깊숙한 곳까지 길을 뚫어 놓아야 돼. 이해가 비슷할 테니 공조에는 문제가 없어. 당가가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만 홍하 근역의 애옥산까지는 같이 움직여야 할 것이고---. 하지만 오래 끌면 안 되지. 소탐대실의 형국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후! 정말 답답하군. 그곳에 이를 때까지 눌러놓아야 하는 중소문파만 해도 일곱이야. 아니지. 파불당을 포함하면 여덟이 되는가? 갈 길은 먼데 점창산에서 막혔으니---."
그때 방문 밖에 인기척이 들렸다.
"아버님, 소자들이옵니다."
"들어오너라."
운교인이 들어서고 뒤이어 운강인이 쩔뚝이며 따라 들어섰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운강인을 향한 운녹산의 얼굴을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운강인 역시 그 얼굴을 보고 말았다.
두 사람이 허리를 접었다.
"앉아라."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앉는 순간 운녹산의 눈살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운교인이 어깨를 쭉 펴고 자신을 직시하는 반면 운강인은 어깨를 늘어뜨린 탓이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운교인을 직시했다.
"본가에 전서는 띄웠느냐?"
"지시하신 대로 보냈으니 너 닷새 안에 당도할 것입니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운강인을 힐끔 보고 나서 다시 말했다.
"곤륜으로 보낼 사람은?"
"아직 못 구했습니다. 이쪽에서 그곳으로 내왕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본가에 연락하여 천북표국 사람 가운데 청해 출입을 하는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렇기도 하겠구나. 알겠다. 일단 전서를 띄우고 적당한 사람을 찾으면 나를 보고 가라 하여라. 외에 달리 할 말이 있느냐?"
운교인이 없다고 말하자 운녹산은 운강인을 힐끔 보고서 말했다.
"알겠다. 그럼 넌 가서 일 보거라. 강인이와 할 말이 있구나."
운교인이 운강인의 창백한 옆얼굴을 살피고서 일어났다. 방문이 닫히는 순간 운녹산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운강인의 이마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침묵까지 어깨를 내리 누르니 운강인은 더욱 더 작게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 운녹산이 노성을 내질렀다.
"못난 놈! 한낱 계집에게 정신이 팔려 공사 구분도 못해?"
운강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운녹산을 직시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소자가 혼이 빠져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나 소저는 한낱 계집이 아닙니다."
운녹산의 얼굴에 조롱기가 감돌았다.
"흥! 계집이 아니다? 어째서? 예뻐서? 예쁜 계집은 계집이 아니라더냐? 미친놈! 미모란 해골 위에 가죽을 잘 씌운 것에 불과하다. 겨우 그깟 것에 홀려서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해?"
운강인은 속을 뒤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절망감을 억눌렀다. 그리고 심호흡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예쁜 사람입니다. 마음도 예쁜 사람입니다. 책임감도 강한 사람입니다. 소자가 평생의 반려로 삼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끄럽다, 이놈! 내 진즉에 사람을 시켜 다 알아보았다. 나라연이라 하더구나. 신수사태의 고제라 하더구나. 서로에게 마음만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신수사태에게 며느리로 달라고 청을 넣었을 것이다. 가문이 흥망을 걸고 전력투구하려는 이 마당에 쓸데없는 짓거리에 시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나 그 아이, 네게는 얼음장 같이 구는 아가씨라 하더구나. 어디 심력을 소모할 데가 없어서---. 이놈! 더 이상 바보짓거리 하지 마라. 한 번만 더 일의 경중을 망각하고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 너라도 용서치 않으리라. 둘째라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에잉!"
운강인은 자신을 외면해버리는 운녹산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와 아비 사이에 벽이 있음을 왜 지금껏 모르고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차렸다.
그 벽! 그것은 어머니 목추경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와 형 운교인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불쌍한 목추경과 아비 운녹산 사이에 평생토록 쌓인 감정의 찌꺼기가 그 벽을 쌓고 있으리라. 그것은 너무나 두터워서 부술 수도 없고 너무나 높아서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할 벽이었다. 그래서 운강인은 아예 고개를 숙여버린 것이었다.
운강인은 겨우 힘을 내어 운녹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운녹산은 이미 탁자 앞에 놓인 지도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공사를 망각하는 실수는 없을 겁니다. 소자, 나가보겠습니다."
운녹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라보지도 않았다. 운강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접어 보이고 방을 나섰다.
힘없이 마루를 내려서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운강인은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찾았다. 바로 운교인이었다.
운교인은 운강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가 잘못했다. 알지? 맹목적인 것은 좋지 않아. 좌우를 두루 살펴서 장애물을 제거하고 덥썩 목줄을 움켜쥐었어야지. 그래야 꼼짝하지 못하는 거다, 목표도 장애물도. 중심을 잡아라. 모두가 너를 인정하게 되면 주위에서 알아서 네 원한 바를 이루어 주는 법이다. 그리고---."
운교인은 잠시 말을 끊고 운강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지금까지는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배가 아팠거든. 나 소저가 네 형수보다 예쁘니까. 하지만 오늘부터는 이 형이 적극적으로 응원해주마. 힘내!"
운강인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맹목적인 것은 좋지 않다고? 형은 중매결혼을 했으니 뭘 모르는 거야. 한 번 혼이 빠지며 헤쳐 나올 수 없어. 눈길을 받고 말 한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날 것 같은 감정, 그 얼굴만 떠올리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형이 알아? 눈앞에 두고도 입조차 떼지 못하는 그 떨림을 알아?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보라 불려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그 뜨거움을 알아? 모를 거야. 도대체 통제가 안돼. 어쩔 수 없어. 아무 것도 안보여. 한 동안이라도 못 보게 되면 혼이 녹아 버리니까."
운교인은 운강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아프냐?"
"죽고 싶을 만큼. 그리고 그 만큼 기분 좋지."
"어렵구나."
"음, 어렵지."
운교인은 어렵다면서도 기분 좋게 웃는 운강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난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형이 가슴 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그러니 힘을 내고 이왕 마음먹었으니 돼든 안 돼든 밀어 붙여. 그것도 못하고 놓치면 평생 후회를 안고 살 것 아니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 동안 거절을 당할까 두려워서 차마 입을 떼지 못했어. 하지만 이왕 체면 구긴 것, 이제부턴 터놓고 도전해 볼 생각이야. 고마워, 형. 근데 조금 피곤하거든. 가서 쉴게."
운교인은 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강인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절뚝이며 걸어갔다.
운교인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운강인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돌아섰다.
"형!"
"응?"
"잊고 있었는데, 곤륜으로 보낼 사람, 찾을 필요 없어."
운교인이 의아함을 드러내자 운강인이 이어 말했다.
"나 소저 말로는 살아있다더군. 곤륜의 젊은 친구 말이야."
운교인이 눈을 치뜨자 운강인이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나도 곧 찾아가볼 생각이야. 그 친구 아니었으면 나도 죽었을 거야. 인사는 해야지."
운강인은 힘없이 돌아서서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운교인은 운강인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운녹산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당유연은 두 손으로 이마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때 방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버님. 명인입니다."
당유연은 급히 몸을 펴고 움츠러든 어깨를 의식적으로 활짝 폈다. 그리고 어두웠던 얼굴을 움직여 표정을 지웠다.
"들어오너라."
당명인이 들어섰다. 달랐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언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당유연은 의식적으로 당명인의 텅 빈 왼쪽 소매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직 그의 창백한 얼굴만을 주시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당명인이 아비의 미소에 미소로써 화답하고 허리를 접었다.
당유연은 눈짓으로 그의 오른쪽 자리를 가리켰다. 당명인이 앉았다. 불렀으니 무어라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입을 떨어지지 않았다. 당유연은 의연하게 앉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식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당명인은 참지 못하고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괜찮습니다."
당유연은 의식적으로 미소 지으려는 당명인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명인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려 했으나 당유연은 이미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일어서려 했다. 그 순간 묵직한 손이 그의 왼쪽 어깨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 따스함에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지만 당명인은 애써 참았다.
그때 당유연이 말했다.
"미안하다. 아들아!"
당명인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미안하다.
전투가 있었다. 수백 명의 목숨이 사라졌고 그 가운데는 당가의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팔 하나 떨어진 것이 무슨 대수랴.
당명인은 아비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안하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명인은 그 의미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말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비의 떨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당명인은 아비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다 받았다.
당명인은 부끄럽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소매를 들어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그냥 내뱉으면 떨릴 게 분명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아버지. 저 당가의 자식입니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튼튼한 팔을 얻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다녀올까 합니다."
당유연이 모를까. 독은 차치하고라도 암기의 명가. 명품이라 불러도 부족할 수십 종의 암기를 만들어내는 당가이니, 의수 또한 단순히 모양만 낸 것이 아니라 신기를 얻게 되리라.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의수라 해도 원래 붙어있던 팔만 할까. 무의식적으로라도 맨살에 닿는 순간이면 차가운 한기를 느끼리라. 그 불쾌한 기분과 이질적인 느낌을 평생토록 느끼며 살아야 하리라.
당유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굳세게 쥐어보고 손을 뗀 당유연은 원래 앉아있던 의자 뒤에서 등을 돌린 채 섰다.
당명인은 당유연의 등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것이 포옹보다 더 뜨거운 외면이라는 것을 알기에 환히 웃을 수 있었다.
당명인은 의자 밀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당유연의 오른손이 슬그머니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
당명인은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당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명인은 다시 한 번 아비의 등을 바라보고 걸음을 옮겼다.
"명인아!"
돌아서 보니 당유연이 돌아서 있었다. 당명인은 그토록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따뜻하게 웃는 아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붉게 충혈 된 눈을 한 채, 법령을 따라 부드럽게 늘어져있던 코밑수염이 역 팔자로 변해 있었다.
"가서 편히 쉬어라."
당명인은 아비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당명인은 다시 한번 허리를 접고 밖으로 나갔다. 입술 끝에 억지미소를 달고 나왔지만 당명인은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한없는 비애를 주체할 수 없었다.
아비를 울게 만든 자신이 못나 보여 울었고, 한 번에 닫을 수 없는 문을 닫고서 울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가슴으로 울고 또 울었다.
"나 소저! 차라리 당신의 팔이 끊어졌으면 좋겠소. 세상 사람들이 다 외면할 때 내가 그대의 팔이 되어주고 내가 그대를 안아 줄 수 있을 테니까."
당명인은 마루를 내려서자마자 털썩 주저앉아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크크크! 당명인!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래, 인물도 모자란데 팔까지 떨어졌으니 자신감이 사라진 건 이해해. 그렇다면 깨끗이 물러서야지. 불행을 빌미로 사랑을 구걸하는 망상을 해? 흐흐흐흐흐. 미친 놈!"
두 무릎 사이로 낮은 비웃음 소리가 스며들자 그의 어깨도 공명하여 흔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두 신발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졌다.
운청산은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따라오기를 종용하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로구나. 배다른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강한 적의를 내뿜더니만, 남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서 이렇게 따뜻한 미소를 짓는다.'
운청산의 내심을 알지 못하는 사내 운교인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가세. 군사께서 기다리시네."
운청산의 얼굴에서 그늘을 발견한 강정은 묘한 표정으로 운교인과 운청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운청산이 방밖으로 나서서 강정 부부와 이정에게 미소 지었다.
운교인이 앞장서고 운청산이 뒤따랐다.
불일장 동쪽 병사를 벗어나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운청산의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 발 앞서가는 운교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인명록에 기록한대로 이청산이라 불렀다. 결국 나를 모른다는 뜻. 침착해라. 청산! 그냥 그날의 일로 장수가 병졸을 만나려는 것뿐이다. 침착해.'
화사한 정원을 지나고 몇 개의 작은 문을 지나고 아름다운 전각을 지나서 운녹산의 거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동안 운청산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오직 운교인의 등만 쫓아 왔을 따름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텅 비어 있는 탓일까? 두근대는 가슴 때문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버님!"
운교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는 순간 방문 안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면서 운녹산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운교인이 문을 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방문 앞까지 마중 나온 운녹산의 얼굴이 보였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운청산은 오히려 낯설게 보이는 운녹산에게 고개를 숙였다. 운녹산이 그의 손을 덥썩 잡으며 방안으로 당겼다.
"어서, 어서 오시게."
보통의 용병이었다면 형용할 수 없는 환대를 받았다고 설레었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에게는 오히려 잡힌 손이 차게 느껴졌다.
"자! 이리로 앉으시게."
운녹산이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의 오른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가 앉자 운청산도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앉았다.
운녹산은 운교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나가있으라 눈짓했다. 그가 나갔다.
운녹산은 조금 전의 환대와는 달리 한 동안 운청산의 얼굴을 탐색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운청산은 간만에 예전의 얼굴로 돌아가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가슴 속 떨림을 숨겼다.
운녹산은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라."
운청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목례해 보이고 말했다.
"우연이었습니다. 떨어졌다가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내려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요. 그뿐입니다."
"겸손하기는, 이 사람! 아무리 우연이라 하나 무공이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아무런 보탬도 안 될 일이었네. 자넨 나 한 사람을 살린 게 아니네. 사천무림련 안에서의 내 위치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무거운 자리. 어쩌면 무림련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몰라. 내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음세."
운청산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다시 탐색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운녹산의 시선을 차분한 눈으로 마주하고 가벼운 목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운녹산이 미소와 함께 시선을 거두며 탁자 한 구석에 있는 책자를 앞으로 옮겨와 접힌 곳을 펼쳤다. 운청산이 슬쩍 보니 그가 직접 적은 인명록이었다.
운녹산은 인명록과 운청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오른손 검지로 이청산이라는 이름을 톡톡 두들겼다. 표정을 일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운청산은 혹시라도 심장 벌렁대는 소리가 운녹산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운녹산은 계속해서 이름과 운청산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운청산은 끝내 모른 척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운녹산이었다. 그는 어렵게 입을 연다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 표정으로 물었다.
"이청산! 본명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운청산의 무표정한 얼굴을 확인한 운녹산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서 다시 물었다.
"아! 무공만으로도 자네가 곤륜의 본산속가임을 의심하지는 않네. 그냥 호기심에서 묻는 것이네. 혹시라도 아명이 다르다든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도호와 관련이 있다든지 하는 것 말일세."
운청산은 내심 심호흡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운경산의 충고를 듣고 난 후에 혹시나 하여 이런 상황에 대비해 두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걸 물으십니까? 제 본명은 경산입니다. 나이 여덟에 고아가 되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스승이신 태악 진인께 발탁되어 지금껏 곤륜에서 자랐지요. 따지고 보면 지금 곤륜의 장문인이신 운상 진인의 사제가 됩니다만, 스승께서는 나이와 배분이 어울리지 않아 외톨이가 될 것 같다시며 제게 청산이란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어차피 속가라 항렬과는 상관이 없습니다만, 이름만이라도 청자 항렬에 두어 본산제자들이 어렵게 대하지 않도록 배려하신 게지요."
순간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빤히 바라보던 운녹산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활짝 웃었다.
"아! 그런가? 헌데 사승께서 태악 진인이시라? 과거 풍파투도로 불리시던 바로 그 태악 진인?"
혹시라도 표정에 변화가 생겼을까 봐 걱정하던 운청산은 운녹산의 표정 변화에 맞추어 겨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운녹산의 질문에 자랑스럽다는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은 몇 차례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영웅이 젊은 사람들 중에 난다 하지만, 태악 진인 정도 되시는 분을 사승으로 모시지 않았다면 그 나이에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무공을 쌓을 수는 없었겠지. 허! 그러고 보니 배분으로 따지자면 이 소협이 나보다 한배 높으시구먼. 이거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모르겠소. 이 소협!"
"곤륜 안의 사람들도 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바깥사람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요."
운청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운녹산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편하게 부르겠네. 어쨌든 곧 무림련의 조직 개편이 있을 것이네. 그때가 되면 자네 같은 젊은 사람들이 우리 늙은이들을 도와주어야 하네. 잘 부탁하네."
"돈 받고 칼 쓰는 용부 주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편히 쓰시면 되겠습니다."
운녹산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 어! 그런 말 하지 마시게. 신비지문 곤륜의 젊은 용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곧 사문에 폐가 되는 일일세. 그리고 겨우 푼돈으로 불러서 쓸 수 있는 사람인가, 자네가? 대의를 쫓다보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지. 부탁하네."
운녹산이 운청산의 손을 덥썩 잡았다. 운청산은 다시 한 번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슬며시 손을 뺐다.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 하지요."
운녹산은 탁자에 올려두고 있던 두 손을 거두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운청산이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섰다.
"그럼 소생은 이미 물러가겠습니다."
운녹산이 손을 들어 운청산을 저지했다.
"아! 내가 이 내가에 방을 마련해 두었네. 오늘부터는 안에서 머무시게."
운청산은 즉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저었다.
"배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만 정이 든 일행들이 있어서 바깥이 편합니다."
"어허! 안에 있으면 여러모로 편할 텐데---. 역시 마음 편한 게 더 좋은가? 하기야 안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불편할 수도 있겠구먼. 그럼 편한 대로 하시게."
운청산은 다시 포권을 취해 보이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막 방문 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운녹산이 급히 불렀다.
"이보게. 잠깐만!"
운청산은 문고리에서 힘겹게 손을 떼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섰다.
운녹산이 그를 보면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자네 혹시 청봉, 운청봉이라고 아시는가?"
묻지 않아서 섭섭한 질문이었다. 동시에 물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운청산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의혹으로 물들이고 고개를 갸웃했다.
"청봉?"
운녹산이 예리한 눈빛으로 운청산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청인 진인께서 가끔 말씀하시지 않던가?"
"아! 그 청봉! 잘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본산에 머물지는 않고 귀곡이라는 심처에서 지낸다 하더군요. 그곳에서 신선과 같은 이인 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마음 편히 지낸다 했습니다. 그렇군요. 운가 사람이라 했지요?"
운청산이 되물은 그때 운녹산은 이미 의자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운청산은 운녹산의 안심한 듯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재빨리 말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운청산은 운녹산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가볍게 목례한 후에 방을 나섰다. 당장 주저앉고 싶었다. 죄어놓았던 가슴과 목줄기를 풀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한발 한발에 힘을 주어 걷고 또 걸었다. 또 다시 아름다운 전각들과 정원들을 지났건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불일장을 정문을 나섰다.
"후우우우우우우!"
긴 한숨을 내쉰 운청산은 천천히 돌아서서 불일장 내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서있었다.
어둠이 깊어져 감에 따라 가슴 속에 쌓아두고 풀지 못한 시름 또한 깊어져 갔다. 당유연은 한숨만 내쉬다가 결국은 불일장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를 알아 본 사람들이 분분히 인사를 했다. 당유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스쳐 지나가자 사람들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사람은 당유연이 맞건만, 걸음걸이는 그의 지위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힘이 없어 초라하게까지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나 당유연은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심사는 너무 복잡하여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사망 스물아홉에 명인이를 포함해서 중상자가 열셋.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협객이며 가장이며 가문의 책임자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난 그 어느 것에도 충실하지 못했다. 혼란스럽구나. 이번 싸움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다 혼란스럽게 변해 버렸다. 그렇게 명료했건만---.'
당유연은 고개를 설래 흔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사람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를 천수독군이라 부르며 존경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에는 불만이었지만 그것은 독과 암기로 대변되는 당가의 가주가 갖는 권위와도 같은 것, 때로는 필요할 때도 있다 자위하며 익숙해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당유연은 늘 의와 협을 마음에 담아두고자 했고, 충실한 가장이고 싶었고, 또 선조에게 누가 되지 않는 가주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지금껏 잘해 왔다고 자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선대에서 이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반을 마련해 두었기에, 편하게 지내왔던 것뿐이었다. 당가는 저절로 움직이는 마차와 같았다. 말들은 익숙한 길들을 알아서 달렸고 마부라 할 수 있는 당유연은 그저 고삐만 쥐고 있을 따름이었다.
강호인이라면 맞닥뜨릴 만하다고 생각만 해왔던, 그러나 가문이 너무나 거대해 지금껏 피할 수 있었던 그런 한 번의 싸움을 겪는 순간, 식솔들을 잃고 자신이 팔이 떨어져 나간 순간, 당유연은 자신이 얼마나 우유부단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명분이 아닌 감정에 따라 독을 쓰고 싶었다. 다른 평범한 아비들처럼 아들의 불행에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세간의 눈이 아닌 가문의 안녕을 위해 판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난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의미 모를 협과 의 두 글자에 눌리고, 권위라는 허울에 눌리고, 한 푼 가치도 없는 평판에 눌렸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체면치레에 불과한 것을,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외면했다. 달라지리라. 이제부터 내가 내릴 결정은 내 가정과 내 가문을 우선시하는 결정이 되리라. 세상 모두가 비난하더라도 상관치 않으리라.'
잠깐이나마 두 눈에 힘을 주었던 당유연은 잠시 후에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암기와 독을 쓰는 어두운 가문에서 당당한 정도의 명가로 인정받기 위해 선조들이 쏟은 공력이 얼마나 컸던가. 지금의 심정으로는 명예 따위는 개에게나 던져주고 싶었지만, 그리하면 조상들이 쌓아올린 업적을 모조리 부인하는 것이 되리라.
"하아!"
심사 복잡함이 그대로 한숨 되어 터져 나왔다. 그때 당유연의 코로 은은한 약향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앞을 주시했다. 어느새 천혜원에 이르러 있었다.
"천혜원을 세운 뜻이 무엇이던가? 이젠 모르겠다. 내 그릇이 이렇게 작았던가? 천 인의 목숨보다도 내 아들의 팔 하나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천만 인의 안녕보다는 당가의 이익이 앞서 보인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머리가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이 어찌 이리도 다른가? 후우! 그런데 내가 왜 여길?"
당가의 가주가 천혜원에 온 것이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왜 왔는지가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해 보니 당우리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상처한 지 벌써 팔 년. 당유연은 당우리에게서 언뜻언뜻 죽은 아내의 모습을 발견했다. 당우리의 미소와 행동거지는 물론 그림자에서도 아내를 떠올리 때가 있었다. 늘 조용히 지켜보다가 함께 기뻐해주고 함께 슬퍼해주며 끝내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당유연은 걸음을 재촉했다. 약향이 짙어지면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형상이 보였다.
당유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보게들! 약향이 짙구먼. 너무 졸이는 것 아닌가? 다 타겠네."
순간 탕불에 부채질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탕약은 정성인데, 어디다 정신을 쏟고 있는 게야?"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그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신음소리 흘러나와야 할 병사에서 부드럽고 편안한 옥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당유연은 그가 들어가는 순간 옥소소리가 끊어질 것을 걱정하여 입구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문기둥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옥소소리를 듣고 있다보니 어느새 아내의 품안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들려주는 낮은 금음소리가 곁들여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옥소소리가 마침내 끊어졌다. 꾸벅 하려던 당유연이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바로 운청산의 죽음이었다.
당유연은 망설였다. 그에게 달려와 울지 않았으니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람들이 돌아온 지도 벌써 이틀 째.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를 확인해보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어허! 위로받는 게 아니라 다독이고 가야하겠구나."
당유연은 얼굴을 움직여 딱딱한 기운을 모두 버리고 두 입술 끝을 치켜 올렸다.
병사로 들어가니 신음소리를 내야할 사람들 대부분이 잠들어 있었다. 오직 서너 명 만이 낮게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당가의 의원들마저도 조그만 의자에 앉아 병사의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당유연은 당우리를 쉽게 찾았다. 병사 안에 여인은 단 한 명. 병사 중앙에 위치한 침상 앞에서 한 사내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당유연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문득 당우리의 말을 떠올렸다.
'이청산 그 녀석이 옥소를 잘 분다 하지 않았던가? 살아있었나?'
그때 청년이 고개를 비틀어 미소를 짓고 왼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저 놈이---.'
당유연은 운청산의 옆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운청산을 거의 인정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해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부모 같으면 꺼려할 그의 처지가 오히려 맘에 들었고, 주변의 평판을 통해 수긍할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일이 끝나면 마주 앉혀놓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연후에 마지막 결정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깝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당우리와 다정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모든 생각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당유연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당우리와 운청산을 노려보며 소리치려 했다. 그때 운청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환자들보다 먼저 잠들면 어찌하오?"
당유연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귓구멍에서 연기가 치솟을 것만 같았다.
'뭐어? 우리?'
그때 당우리가 운청산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냈다. 운청산의 손이 내려오는 순간 당우리가 "쓰읍!" 소리를 내고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당유연은 부르르 떨리던 손에서 힘을 빼버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저, 저것이 남자 앞에서 부끄럼도 모르고---.'
당유연의 시선은 즉시 운청산의 얼굴로 옮겨갔다. 그는 운청산의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를 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가? 벌써 다 컸나?'
당유연은 고개를 젓고서 뒤돌아 걸었다. 그러나 세 발짝 뗀 후에 다시 돌아서서 당우리와 운청산을 노려보았다.
'아직은 아니야. 시집보내기 전에는. 두고 보자.'
당유연은 또 다시 실소했다. 기분이 하도 묘해서 두고 보자라는 말이 도대체 누구를 향해 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탓이었다.
당유연은 다정한 두 사람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한 후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던 전신을 활짝 편 후에 천혜원을 나섰다.
회군한지 닷새째가 되는 날 아침이었다.
운청산이 별 달리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밖은 다른 때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운청산은 두 손을 부딪쳐 따뜻해질 때까지 비빈 후에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눈과 코는 물론 입 주변과 이마 그리고 정수리까지 문지르고 두드렸다. 어깨를 풀고 팔을 풀고 손목과 손끝까지 털고 풀었다.
전신을 모두 풀어헤친 후에 밖을 나와 보니 강정과 문취옥이 마루에 앉아있고 이정이 기둥에 기대어 서있었다.
"쯧, 안됐군."
강정이 근처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하자 문취옥이 콧방귀를 뀌었다.
"안될 것도 많네. 저 사람들한테는 다행이라구. 채 두 달도 안됐지? 위로금으로 삼십 냥 준다고 했던가? 거기에 월삯까지 치면 근 오십 냥을 손에 쥐는 거야. 그 동안 한 일이 뭐야? 그 써먹지도 못한 병진 연습한다고 땀 쬐끔 흘린 것 말고는 없잖아? 덕분에 건강해졌지. 삼시 세끼 먹여 줬지. 돈 쥐었지. 생각해 봐. 저 인간들이 저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게 뭐야? 보표는 턱도 없고, 표사? 그래봐야 손에 쥐는 건 한달에 네 냥 정도? 실컷 놀다가 봉 잡은 거라고. 내 생각에는 저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쌍하게 여길 걸? 곧 죽을 목숨이라고."
문취옥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히는 순간에야 운청산은 그들이 무엇을 화제로 삼고 있는지 깨달았다.
어제 오후, 련주 명으로 방이 붙었다. 인급무사를 대상으로 련을 떠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방이었다. 강제해체가 아니라 권고였기에 큰 반발은 없었고, 거기에 후한 보상금이 언급되어 있어서 혹하는 사람이 많아 보였다.
꿈에서 깼다.
순순히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문취옥의 표현이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안 그래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이 하루도 생각해 보지 않고 권고안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엊저녁까지 인급무사들의 팔할이 련을 떠났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부상자들을 포함한 이할. 그들은 오늘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잔류하여 천지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새로 만들어질 정명단의 말단으로 들어가거나 떠나야 했다. 그들이 지금 그 동안 친분을 쌓아왔던 동료들과 함께 의논하고 있는 것이었다.
"꼭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소."
이정이 끼어들자 문취옥과 강정이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엊저녁에 밥 먹으면서 유심히 듣다 보니,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인의 비애를 이야기하고 있더이다. 나처럼 온전히 돈을 바라고 온 사람들도 있지만, 강호를 동경하여 이 길에 들어섰고 평생 수련했건만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만으로 평생 동경했던 것들로부터 거부당한다고 생각하니 슬프다 하는 이들도 제법 되더이다. 바로 저들이오."
운청산과 강정부부는 새삼스럽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허! 나는 용부라 생각했는데 저들은 아닌가 보네."
강정의 말에 문취옥이 다시 콧방귀를 꼈다.
"흥! 하급무사에게는 다툴만한 명예가 없다는 걸 모르나 보군. 남아봐야 결과는 개죽음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이정이 걸어와 운청산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저들도 자신들과 명예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잘 알 것이오. 남들은 덧없다 할지라도,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을 따르고 꿈을 좇는 것이지. 저들이 원하는 건 별 것 아닐 것이오. 성취와는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과 살아남아 여생토록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정도 아니겠소?"
"하지만 이게 꿈꿀만한 생활은 아니잖아요?"
문취옥이 반박하자 이정이 되물었다.
"그럼 문 여협은 왜 남아있는 것이오? 대상이 아니라도 원한다면 보내준다는데."
문취옥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강정을 돌아봤다. 강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문취옥은 다시 이정을 보며 더듬거렸다.
"그, 그건 그냥, 이것 말고는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지요. 예. 다른 게 할 게 없어요."
이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먹고살자고 하면 할 일은 있을 것이오. 문 여협은 이것이 운명이라 여길 뿐이오."
문취옥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강정이 웃으며 말했다.
"기분도 꿀꿀한데 오늘 저녁에는 마을로 내려가 거하게 한 잔 해 볼까?"
문취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정은 이정을 응시했다. 이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곡차를 많이는 못하지만 생각은 나는구려."
"허허허! 이 대협, 아직도 곡차라 하시는구려."
강정과 이정은 서로를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자넨 어쩔 텐가?"
강정이 운청산을 보며 물었다. 운청산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번 물어보지요."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운청산을 보았다. 강정이 물었다.
"엉? 누구한테? 당 소저? 허허허! 이것 봐라? 술 한 잔 하자는데 그걸 물어봐? 미래가 훤히 보인다, 이 친구야."
이정이 빙그레 웃고 문취옥이 깔깔대는 순간 무사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이정 대협이 어느 분이시오?"
이정이 무사를 바라보며 의아함을 드러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물었다.
"허면 이청산 소협은?"
"접니다만."
운청산 역시 의아함을 드러내는 순간 무사가 말했다.
"군사께서 두 분을 모시고 오라 하셨소. 갑시다."
이정이 눈을 치뜨며 되물었다.
"나와 청산을?"
무사가 다시 확인해 주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전혀 모르겠다는 뜻을 비치고 강정 부부를 응시했다. 당연히 두 사람도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일까?"
영문도 모르고 무사를 따라 불일장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채 반 시진도 못되어 돌아왔다. 강정 부부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다.
이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인급무사가 빠진 사방당은 새로 증원될 각파의 사람들만으로 재편되고 남은 용부들은 전원 새로이 단으로 승격된 정명단에 포함시킨다 하지 않았소? 나와 청산에게 그 정명단의 단주와 부단주를 맡으라 하는구려."
강정과 문취옥이 마주보며 눈을 치뜨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강정이 말했다.
"이거 축하해야 하겠습니다?"
이정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례하겠소."
이정이 사람들을 뒤로 하고 멀어져갔다. 강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운청산을 응시했다. 운청산도 강정처럼 쓰게 웃었다.
"명령에 따르는 일은 쉽고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은 운명이니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좌우하는 자리는 싫다하시더군요. 무겁다고. 저도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문취옥이 말했다.
"그럼 거절하지 그랬어?"
"처음에는 거절했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승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강정이 물었다.
"그럴 곡절이 있었나 보군. 들었나?"
운청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구해 달라 하셨습니다."
강정 부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강정의 호기심은 운청산에게로 돌아왔다.
"자넨 괜찮은가?"
운청산이 의아함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운 가주를 다시 만났지 않은가? 이청산!"
운청산은 쓰게 웃으며 강정의 눈을 외면했다.
"별 건 아니지만 지금은---. 언젠가는 말씀드리지요."
강정은 알겠다며 운청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