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79)

“보-복수요.”

당우리는 복사꽃 같은 뺨에 보조개를 만들었다.

“풋! 이렇게 무른 복수가 어딨어요? 이런 복수라면 좀 더 당당하게 해도 돼요.”

운청산은 화끈거림이 잦아드는 순간 천천히 당우리의 얼굴을 직시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우리는 활짝 핀 모란처럼 환하게 웃고 있건만, 너무나 밝고 환하게 웃고 있어서 일순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했다. 행복감으로 충만해도 모자랄 이 순간 왜 불안감이 엄습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 기쁜 적이 없는데, 왜?’

당우리가 그의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왜 그래요?”

운청산은 고개를 저으며 솔직히 말했다.

“모르겠소. 이렇게 기쁜 적은 없었다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서늘한지 모르겠소. 내겐 자격이 없는 것일까? 불안하오. 꿈만 같아서, 우리 당신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불안해 죽겠소.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꿈꾸어서 이럴 거요. 꿈이 현실이 된 적이 없어서 이럴 것이오. 그래서 이렇게 불안할 거요.”

순간 당우리가 따뜻한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운청산의 두 뺨을 감싸 안아 가슴으로 당겼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시를 낭송하듯 차분히 말했다.

“기뻐요. 당신이 나를 사랑으로 꿈꿨다니 정말 기뻐요. 꿈은 미래를 상상하게 하지요. 꿈이 현실이 되는 그때를---. 하지만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어요. 아마 그래서 불안할 거예요. 불확실하니까. 안 이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때로는 불확실한 미래가 더 좋을 수도 있잖아요? 노력 여하에 따라서 꿈꾸는 미래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지도 모르잖아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지금처럼 항상 이렇게 함께 있을 거예요.”

아늑했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품은 마치 경의상에게 안겨있던 그때처럼 포근했다. 그녀의 왼손이 운청산의 볼을 쓰다듬었다. 경의상이 늘 그랬던 것처럼.

운청산는 쉬지 않고 볼을 쓰다듬는 당우리의 손길에 이끌려 경의상이 그를 안은 채 심심하면 독백처럼 중얼거렸던 말들을 떠올렸다.

<청봉! 우리 가여운 청봉! 너 같은 아이가 어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꼬? 청산! 혹시라도 세상에 나가 살게 되거들랑 사람을 조심해야 하느니라. 네가 강한 아이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테지만, 몸도 마음도 여리기만 하니 너를 해코지하고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사람을 사귈 때 늘 조심하여라. 아는 척 친한 척 하더라도 마음을 모두 열어보여서는 안되느니라. 반에 반만 보여 주거라. 하지만 말이다. 네 어미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게 되거들랑 먼저 가슴을 열고 모든 것을 다 보여주어라. 아파할까 참지 말고 위한다고 숨기지마라.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 하지 않느니라. 사랑이란 이름으로 속을 감추고 애를 태우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단다. 청봉! 알아듣겠느냐? 이 말만은 네가 반드시 알아들어야 할 텐데, 어쩌누? 이렇게 말이 없어서---.>

너무 자주 들어서 외우다시피 한 말이었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할머니.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런 사람을 찾은 것 같습니다.’

운청산은 뒷머리에 뺨을 대고 비비는 당우리에게 슬며시 손을 뻗어 그녀를 떼어냈다. 그리고 반대로 그녀의 두 뺨을 잡아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우리! 내 말을 들어보오.”

당우리는 운청산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운청산은 자신의 출생에서 시작해서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순간까지를 차분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말을 마친 운청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픈 과거를 더듬은 탓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어깨를 들썩이며 옷이 흥건해질 때까지 울어주는 사람을 만난 탓이었다.

운청산은 기쁨의 눈물을 끊어내고 왼손으로 당우리의 얼굴을 쓰다듬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오. 나를 위해 울지 마오. 이해를 구한 것이지 동정을 구한 것이 아니었소. 난 강하다오. 과거를 외면하지 않을 만큼 강하다오. 이제 우리 두 사람, 기쁠 때만 웁시다. 행복에 겨울 때만 웁시다.”

운청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당우리의 두 뺨을 잡아 품속에서 그녀를 떼어냈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당겨 이마에 입술을 가져갔다.

운청산의 입맞춤은 멈추지 않았다. 당우리의 눈물 그득한 두 눈에 입술을 댔고 코끝에 입술을 붙였으며 입술에 입 맞추었다.

눈물이 입술에 닿고 콧물이 입술에 닿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욕구가 아닌 탓이었다. 그의 입맞춤은 자신을 위해 울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식이었고 아프게 한 그녀의 가슴을 위한 위로의 몸짓이었다.

운청산은 옷소매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내고 다시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이나 앉아있었다. 당우리가 그 품안에서 잠들 때까지.

종길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잠에서 깨고 말았다. 고개를 비틀어 밖을 바라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소변 수발을 들라고 당우리가 붙여준 마을 소년이 낮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종길은 천장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쳇! 곧 돌아와서 약 발라 준다고? 쳇! 쳇! 쳇이다. 아야! 배야. 왜 이렇게 찌르니?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

그때 당우리가 돌아왔다.

“랄랄라! 종 소협! 잘 잤어요?”

종길이 눈을 부릅뜨며 당우리를 노려봤다. 그러나 당우리는 천혜원의 문기둥에 기대어 서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도대체 뭐하는 거요? 곧 돌아와서 상처 봐 준다며?”

종길이 소리치고 나서 우거지상을 하자 당우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품속에 손을 넣었다.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에는 번쩍이는 목련비가 들려있었다.

“뭐? 뭐하려는 거요?”

종길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순간 당우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과장되게 비수를 날리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종 소협! 움직이지 마세요. 상처 터져요.”

“악! 안돼! 미안해! 미안해요, 당 소저!”

그러나 목련비는 이미 병실의 공기를 가르며 종길의 머리로 날아갔다. 종길은 피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죽어도 열 번을 죽었을 시간이 흐르자 종길은 눈을 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머리맡 위쪽 침상의 기둥에 차가운 한광을 내뿜는 목련 한송이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종길은 생긋 웃으며 다가오는 당우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의원이 환자를 죽이려고 해?”

당우리는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고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수를 뽑아 녹피갑에 꽂은 후 품속에 넣은 당우리가 종길을 힐끔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흥! 살기가 없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사람을 믿지도 못 하는군. 내님이 최고야. 랄랄라!”

당우리는 종길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약장으로 걸어갔다. 종길은 놀란 눈으로 당우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뭐야? 그렇군. 청산, 이놈이 계집아이 같이 다 꼰지른 거야. 그래서 지금 이 시간까지 얼굴도 내밀지 않는 거야.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당 소저는 내심 날 말려 죽이려는 거야. 으허허허! 이걸 어떻게 해?”

종길이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당우리가 마포와 약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미친 사람처럼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거예요?”

“용서하시오, 당 소저! 내가 무조건 잘못했소.”

종길은 아픔을 참고 두 손을 들어 싹싹 비볐다. 당우리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종길에게는 그 표정이 더 무서웠다.

“청산이 좀 거칠게 대했지요? 맞소. 개뿔도 모르면서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소. 불쾌했다면 정말 미안하오. 제발 용서해 주시오.”

당우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하! 운 가가에게 그렇게 멋진 입맞춤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종 소협이었어요? 상을 줘야겠네.”

종길은 당우리가 운청산을 운 가가라고 부르는 커다란 변화도 눈치 채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사-상은 필요 없소. 살려만 주시오.”

당우리는 빙긋 웃으며 종길의 배에 감긴 마포를 풀었다. 종길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뭐-뭐하시려고?”

당우리가 드디어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 소독해야지요? 그냥 곪게 놔둘까요?”

종길이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어제는 의연한 척 하더니 오늘은 되게 겁 많네? 그렇지 않니, 현아?”

종길이 하도 떠들어서 잠을 깨고만 소년이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우리는 다른 때보다 훨씬 세심하게 상처를 소독하고 금창약을 바른 후에 다시 마포를 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길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아프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아! 다 됐어요.”

종길은 그때서야 실눈을 떴다. 당우리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종길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악의가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무서워. 형수님도 그렇고, 착하게만 보이던 당 소저도 마찬가지야. 나 소저도 그럴까?’

종길이 상상만으로도 무섭다는 듯 몸을 떠는 순간 당우리가 조금 더 다가와 말했다.

“장난친 건 미안해요. 대신 내가 비밀 하나 가르쳐 줄게요.”

종길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당우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소곤거렸다.

“전 주위에 토끼가 없으면 사람에게 암기를 못 던져요.”

“토끼?”

종길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당우리가 이어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암기 다루는 자질은 내가 우리 오빠들보다 훨씬 낫데요. 자랑이 아니라 우리 오빠들도 인정한다구요. 나이 열다섯에 은침유성우를 거의 완성한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요.”

종길은 이미 당우리의 이야기에 몰입되어 조금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의?”

무기 자체를 날리는 암기술은 세 가지 정도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비황석(飛蝗石)이나 유엽비도(柳葉飛刀)와 같이 순수하게 사람의 능력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수전(袖箭)처럼 기계적인 장치로 쏘아 보내는 것이며, 세 번째는 회선표와 같이 손으로 날리되 암기 자체에 기능을 가미하는 중간적 형태이다. 날리는 암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선호하지만, 고수일수록 단순한 첫 번째 유형의 암기를 다루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은침유성우(隱針流星雨)는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당가의 무수한 암기술 가운데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기이며,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암기술이었다. 오로지 두 손놀림에 의지하여 단 한 번에 극독이 묻은 작은 침 여든한 개를 한꺼번에 날리는 수법이라서 구구탈혼비침술(九九奪魂飛針術)이라고도 불린다.

여든한 개의 침이 그 기세와 속도를 달리하여 전신 구석구석을 노리기 때문에 다 막았다고 방심하다가는 한참 후에 맞을 수도 있고, 또 극독이 발라져 있어 한 대만 맞아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당우리는 자신이 당시의 공력으로는 한계를 넘어선 육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육성이면 첫 번째 침이 닿은 순간부터 천천히 셋을 센 후에야 마지막 침이 도달하는 경지지요. 그 이상의 경지는 공력이 늘어남에 따라 어렵지 않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완성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구요.”

“그러니까 열다섯 나이에 육성을 성취한 사람은 당 소저뿐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요? 토끼는 또 뭐고?”

당우리는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육성에 이른 그날이 마침 내 생일이어서 아버지가 움직이는 것에 시험해보자고 하셨고 나도 인형을 두고 연습했던 게 아쉬워서 기꺼이 그러마 했지요. 그날 연공실에 내 성취를 보기 위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아버지와 숙부님들 그리고 오빠들도 모두 참석했지요. 근데 문제는 그 살아있는 것이 하얀 토끼였던 거예요. 처음에는 나도 잘해 보려고 했는데 내가 던지려는 순간 달아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것이 불쌍하게도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그 순간 침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지요. 아버지와 숙부님들이야 제가 던진 침에 맞을 리가 없었지만 세 오빠들은 미처 막지 못하고 많게는 일곱 개나 되는 침에 맞아버렸지요.”

종길이 실망했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난 또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지. 겨우 그런 거였소? 혹시 말이오? 그 토끼, 원래 눈이 벌건 놈 아니었소?”

“어? 어떻게 알았어요?”

당우리는 놀라서 반문해놓고 종길의 말속에 조롱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발끈하여 말했다.

“만약에 극독이 묻어있었거나 요혈에 제대로 맞았다면 큰일 났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 저는 움직이지 않는 표적에만 암기술을 연마해왔어요. 움직이지 않는 표적!”

당우리는 말끝에 종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순간 종길은 실패가 아쉬워서 부르르 떨던 목련비를 떠올리고서 두려운 눈빛으로 당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는 당우리가 피식 실소했다. 그리고 종길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못 움직여도 숨쉬는 것에는 안 던져요.”

당우리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는 종길을 뒤로 하고 약통을 든 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였다.

제비 두 마리가 날개를 적실 듯 금사강 위를 낮게 날고 있다. 수놈이 암놈을 쫓으니 암놈은 희롱하며 도망친다. 삐친 수놈이 홀로 나니 암놈이 다시 다가온다. 암놈이 날개를 스치며 지나치니 수놈은 또 지조 없이 따라간다. 수놈이 따라가다 쫏쫏 쮸르르르 애타게 불러대니, 암놈은 물 튀기며 쮸르쮸르 웃음소리로 애태운다.

놀다 지친 암놈 제비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수놈을 불러대니, 수놈 제비 암놈을 뒤세우고 강변나루 부서진 배 위에 내려선다. 수놈은 암놈의 날개 깃 고르고 암놈 또한 수놈의 날개 깃 고르니 하늘은 잘 자라고 별빛마저 감춰준다.

당우리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드리우며 눈을 떴다. 하늘이 감춰둔 별들이 당우리의 두 눈에서 반짝였다.

“운 가가. 내일은 비가 오겠죠?”

막 쌍연유희(雙燕遊戱)를 끝내고 옥소를 거둔 운청산이 미소 지으며 자신의 무릎을 베개로 쓰고 있는 당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제비들이 낮게 날았소?”

“응! 강물을 튀기며 놀았어요.”

운청산은 손을 뻗어 허공을 매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소. 공기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는데다가 별 하나 안 보이는구려.”

당우리가 벌떡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면 안 되는데.”

운청산이 눈짓으로 이유를 묻자 당우리가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도강한다고 연락 왔데요. 환자들도 많을 텐데 비 오면 상처에 안 좋을 거예요.”

운청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가 오고 안 오고는 하늘의 뜻, 그가 무어라 할 성질의 것이 아닌 탓이었다. 그는 대신 손을 뻗어 당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운청산의 손길을 즐기고 있던 당우리가 갑자기 콧등과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운 가가. 비 안 오게 해주세요.”

운청산은 놀라서 당우리를 빤히 보았다.

“우신께 비 안 오게 해달라고 설득해 보세요. 따뜻하고 포근한 곡을 들려드리면 우신께서도 감격하여 내일은 쉬실 거예요.”

운청산은 너무나 진지한 당우리의 표정을 보고는 한동안 멍하게 바라만 보다가 결국에는 실소했다.

“내 연주로 신께서 감동하실 것 같소? 결국 호풍환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될 것 같은데. 난 언제나 혼이 빠지는데. 안 될까요?”

당우리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운청산은 힘없는 당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모습을 보인다 해도 사랑스러운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변하는 기분에는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문득 진지할수록 우스운 종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우리가 자기를 말려 죽이려 한다는, 여자는 무섭다는, 우스개 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운청산은 다시 한 번 당우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일어섰다.

“어디 가요?”

당우리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운청산은 검을 풀어 옥소와 함께 당우리에게 건네고 웃으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십여 장 정도 멀어지니 당우리가 흐릿한 그림자로만 보였다.

“운 가가. 어딨어요? 왜 그래요?”

당우리의 떨리는 목소리가 동산에 울려 퍼졌다. 무서웠다. 깜깜한 밤인들 당우리를 무섭게 할 수 있으랴. 그러나 곁에 있던 운청산이 멀어졌다가 사라져버리자 웬일인지 무섭게 느껴졌다.

당우리는 운청산의 검과 옥소를 꼭 쥐고 그를 찾아 어둠 속을 휘돌았다. 바로 그때 운청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귓가에서 소곤대는 듯한 목소리였다.

“푸른 제비 두 마리가 보이오?”

당우리는 운청산이 사라진 공간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거기에 있었다. 파르스름한 두 개의 빛이 파드득거리며 허공에 떠있었다.

‘푸른 제비 두 마리.’

놀란 듯하던 당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도 그 푸른 빛 두 줄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어제 보았던 공력을 일으킨 운청산의 두 손이리라. 그러나 그가 푸른 제비라 했으니 당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연히 푸른 제비였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두 마리 푸른 제비들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 서로를 희롱하며 허공을 날고 있었다. 당우리로부터 십 장 바깥을 휘돌며 때로는 낮게 날고 때로는 허공을 치솟기도 했다.

당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푸른 제비들의 움직임을 따라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두 마리 제비는 쌍연유희에서 그녀가 보았던 그대로 맘껏 하늘을 노닐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선형으로 휘돌며 허공으로 높게 치솟아 올랐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당우리의 두 눈에 이채가 드리워지는 순간, 어둠을 뚫고 운청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 장 앞까지 다가온 운청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비 두 마리를 하늘 높이 날려 보냈으니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오.”

당우리는 검과 옥소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운청산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그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천공의 별을 따달라는 청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런데도 웃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말 몇 마디로 끝내지 않았다. 별을 따는 방법을 생각했고 또 따주었다. 내일 당장 폭우가 쏟아져도 좋았다. 당우리는 지금 안고 있는 별이 소중할 따름이었다.

‘청산! 내게 물어요. 사랑한다 외쳐줄게요. 푸른 산 메아리 되어 외쳐줄게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우리를 엉겁결에 안아든 운청산은 어깨의 찡한 통증을 참아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통증이 묵직함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또 다른 느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것을 대하면서도 많이 다른 느낌. 어릴 때는 그가 매달렸는데 이제 당우리가 매달려서 그런 것일까. 가슴을 부딪쳐 오는 그 뭉클한 감촉이 싫지는 않았지만 어색하게 느껴졌다.

*        *         *

“흠, 흠흠. 어떤가? 단정한가?”

백무극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소불과 혈응이 잔뜩 얼어가지고 전신을 훑고 있었다.

“에휴! 물은 내가 바보지.”

소불이 먼저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소군! 뭐라 하셨습니까?”

백무극이 실소하는 순간 혈응이 겨우 고개를 들고 소불에게 물었다.

“어때? 흐트러진데 없나?”

소불이 혈응의 전신을 훑어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때?”

두 사람이 하는 짓을 보며 백무극은 고개를 젓고서 먼저 돌아섰다.

“안 갈 건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동시에 대답했다.

“따르겠습니다.”

백무극이 문의 좌우에 서 있는 장한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그르릉, 소리와 함께 대리석 문이 열리자 백무극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소불과 혈응은 평소와는 달리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육여 장을 지나 대리석 단 앞에 이른 백무극은 창가에 서서 등을 돌린 채 뒷짐을 지고 있는 백발장년인에게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백발장년인이 뒷짐 진 손을 까닥거리자 백무극은 그 자리에 정좌하여 앉았다. 그때 허리를 접고 있던 소불과 혈응이 백무극의 바로 뒤에 오체투지하며 말했다.

“부르심을 받자와 비직들이 삼가 천군을 뵈옵니다.”

백발장년인이 돌아섰다. 그는 여전히 이마를 땅에 대고 있는 두 사람의 정수리를 응시하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단으로 내려섰다. 그 순간 대리석 침상 아래쪽에 누워있던 백호가 일어서 단으로 움직였다.

백발장년인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다시 누운 백호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불, 혈응. 오랜만이지?”

불리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편히 앉으라.”

백발장년인이 명하자 두 사람은 두 손을 바닥에 붙인 그대로 머리만 살짝 뗐다. 백발장년인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극이 용무 있다 하기에 이왕이면 너희들 얼굴도 한 번 볼까 하여 불렀다. 너희들이 무극이 곁을 지킨 것도 한 칠팔 년 되든가?”

두 사람이 다시 머리를 찍으며 대답했다.

“십일 년째 되옵니다.”

“호! 벌써? 늦었군. 그 동안 노고가 많았겠구나. 너희들은 오늘부터 백가 성을 사용하라.”

순간 두 사람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다시 쿵 소리가 들렸다.

“망극하옵니다. 비직들, 충심을 다하겠사옵니다.”

백발장년인은 화사한 미소를 드리우며 백무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무엇이냐?”

백무극이 말 꺼내기가 쉽지 않다는 듯 망설이다가 백발장년인을 직시했다.

“제자, 점창산에 갔으면 합니다만.”

“쯧, 진득하니 수련하라 했더니만,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구나.”

백무극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제자, 부족하오나 대업의 선봉에 서서 이 손으로 사부님께 새 세상을 바치고 싶습니다.”

백발장년인은 한동안 말없이 백무극을 주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다시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새 세상이 열린다면 그 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 이 사부는 네가 가급적이면 두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네 가벼운 천성은 아무리 바꾸어 보려 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구나. 알았다. 앞으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백무극이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백발장년인은 자세 그대로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백무극이 일어서서 다시 허리를 접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백발장년인은 돌아서지 않았다. 백무극은 조용히 돌아서서 아직도 엎드려 있는 소불과 혈응의 사이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그때 소불과 혈응이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천군께 영광을!”

두 사람이 즉시 종종걸음 쳐서 백무극의 뒤를 쫓아 문밖으로 나갔다.

“새 세상이라---. 새 세상! 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홀로 남은 탓일까? 아니면 그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너무 넓은 탓일까? 방안을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묘하게도 공허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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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괴선5

저자명 : 임준욱

출처 : 천리안

  <지은이 소개/ 임준욱>

무협작가 임준욱의 스타일은 ‘성장물'이다. 몇 안되는 듯싶지만 꾸준하고 알찬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촌검무인'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성장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결혼도 하고, ‘직업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임준욱인데 특히 ‘무림인'의 이야기이다.

1999년 <진가소전>으로 데뷔하여 대표작으로 <농풍답정록> <건곤불이기> <촌검무인> <괴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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