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79)

운청산은 두 영혼의 환한 웃음에 미소로 답했다.

‘그럼!’

두 영혼이 사라지려 했다.

‘잠깐만요, 숙부님들!’

두 영혼이 다시 돌아왔다. 운청산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생각했다.

‘어머니는?’

두 영혼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경산이 입을 벌렸다.

‘네 어머니 역시 네 몸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귀곡에서 우리가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던 그때처럼 네 척수 속에 계시지. 그것은 네 어머니의 바람이셨다. 네게 혼란을 주지 않았으면 하셨고 그래서 귀곡 어르신께 부탁드렸다. 우리와 함께 계셨더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만날 수 있을 것을---.’

아쉬웠다. 꿈속에 나타나 아비 만나기를 갈망해 놓고 앞에 나설 수 있는데도 나서지 않는 것이 야속했다. 운경산이 그 마음을 읽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염원. 지금처럼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과는 다르다. 강한 염원이 네게 전달된 것뿐이다. 늘 네게 미안했구나. 죽어서도 항상 신세만 졌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미련이 네게 세상 나서기를 강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아직도 귀곡 어르신과 함께 있었으리라. 네 운명을 변화시킨 것이 바로 우리의 미련이요 염원이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것이 제 운명이었을 테지요. 세상 속에 사는 것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 인연들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그래. 그 당가의 아가씨는 참으로 어여쁘더구나. 마음도 얼굴처럼 밝았다. 마치 신명처럼 밝고 맑았다. 네 어머니도 느꼈으리라. 그리고 기뻐했으리라.’

운청산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가 문득 생각을 떠올렸다.

‘숙부님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순간 운경산과 운추산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운추산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구나. 네 아비는 뭐랄까, 외로운 사람이었다. 무언가에 늘 쫓기는 사람 같았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과 떨어져 지냈다. 우리가 빙혼귀라 부를 만큼 차갑고 무서웠지.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어. 최근 들어 우리가 본 네 아비는 불을 품은 사람이었다. 활활 타오르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사람이었다. 해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네가 원한다면 다음번에 만났을 때 생각을 읽어보마.’

운청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직접 겪어보고 싶습니다.’

두 영혼이 동시에 웃다가 운경산이 문득 정색하여 말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지. 다만 네게 한 가지 말해주고 싶구나. 네 아버지는 쉽게 속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정녕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는 게 좋으리라. 사실 나도 살아생전에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영혼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곧 운경산이 다시 나타나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아비와 싸우던 사람과 너를 이해호에 빠뜨린 여인이 바로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이들이다. 그 능력 그 얼굴을 입지 않고 있었지만 그때는 정신이 나간 것 같아 미처 경고할 틈이 없었다. 장차 만나거든 방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운경산이 다시 사라졌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군요.’

운추산과 함께 하얀 빛의 방으로 돌아온 운경산은 방의 한 가운데 새롭게 자리한 유백색의 작은 구멍을 확인하고 침중한 낯빛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팔방의 두 위치를 차지하고 정좌하는 순간 운명산이 눈을 감으며 생각을 퍼뜨렸다.

‘미안하다. 내 이기적인 생각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노력은 했지만 너희 둘의 공백을 메울 수가 없더구나. 다시는 부탁하지 않으마.’

그때 운현산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귀곡 어르신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더냐?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라고. 청산의 기운을 훔칠 수 있는 우리의 그릇은 거의 포화상태에 달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결국 둘의 공백으로 생겼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어차피 벌어질 일이 조금 일찍 벌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일단은 최대한 버텨보되 한계에 이르면 청산이 마경에 빠지지 않도록 돌보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도록 하자.’

운경산이 운현산을 바라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앞으로도 너희들은 필요할 때 나가서 청산을 도와라. 단지 도우는 것뿐이 아니라 청산이 감정적인 충격을 받지 않도록 최소한 다독여라. 너희 둘뿐이 아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동원되더라도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나와 명산만큼은 나가지 않고 변화를 주시하는 일에만 신경 쓰겠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좋은 방향으로 가꾸어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에 합의한 것이었다.

운추산이 신기한 듯 빛의 구멍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걸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보세요. 밑으로 무한정의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결국 양신이 생성되려는 징조가 되겠지요.’

운추산이 운현산을 바라보자 그도 미소 지었다.

‘겪어보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느냐? 지켜볼 따름이지.’

모두가 미소를 지었지만 상호교환 되는 그들의 심정은 웃음보다도 무거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인 피로까지 겹친 탓에, 잠깐 존다는 것이 그만 해가 서산에 이를 때까지 자버렸다. 종길이 원망하겠다 싶어 급하게 달려갔더니, 그는 당우리가 붙여준 소년을 붙잡고 자신의 무용담을 떠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운청산을 보는 순간 종길은 안면을 바꾸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서 그를 곁에 붙잡아 두었다. 처음에는 당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국에는 믿을 수 없는 그의 연애담과 연애론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다.

운청산은 고개를 젓고 실소했다. 그토록 처연한 목소리와 불쌍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지껄여 댈 수 있는 종길의 능력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만약 운청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종길은 한정 없이 그를 붙잡아 두었으리라.

당우리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섯 끼를 내리 굶은 터라 운청산은 결국 마을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 식사를 한 운청산은 바로 그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즐겨보던 달빛에 물든 금사강의 풍광을 볼 수 없었다. 황혼녘부터 회색빛 구름이 깔리더니 결국은 하늘을 뒤덮었는지 달은커녕 별 하나 없는 깜깜한 밤이 되어버렸다.

“후유!”

마음속에서 난마처럼 뒤엉켜있던 생각들이 또 다시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운청산은 고개를 저어 생각들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기억을 먼 과거로 돌려 모든 즐거운 일들을 떠올렸다.

운청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렇게 즐거운 추억들이 많았다니---. 그렇구나. 난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 놈이었구나.”

경의상의 자애로운 눈빛만 생각하니 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따뜻해졌다. 청인자의 푸근한 미소를 떠올리니 똑 같은 미소가 입가에 드리워졌다. 귀곡 산인과 반선 노인 그리고 무뚝뚝한 태악 도인마저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호연이 질겁을 하고 달아날 정도로 혹독했던 귀곡 산인의 질책과, 멍이 들고 뼈가 부러졌던 태악 도인과의 수련 과정마저도 세월이 흐르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흘려보내다 보니 운청산의 마음은 어느새 누구보다도 가까울 수 있었으나 그리하지 못했던 노인의 얼굴에 이르렀다.

노인의 속죄와 후회 그리고 누구도 보지 못했을 눈물이 운청산의 마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만약 경의상의 묘소에서 친조부 되는 운검정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지금처럼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지는 못했으리라.

그날 운검정은 운가의 전 가주가 아닌 소탈한 노인이 되어 운청산과 많은 말들을 나누었다. 운청산이 곤륜검을 익혔을 알게 되자 기꺼운 듯 논검을 즐겼고 그가 말년에 체득한 검로를 보여주기도 했다.

운청산은 운검정의 검을 떠올리며 호기롭게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유능제강!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말이다만, 세상 누구도 쉽사리 실천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이 할아비 또한 가문의 책임을 떠맡고 있을 때는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 능히 그 진체를 알지 못했다. 청봉. 보아라! 내 공부가 나 젊었을 때 보았던 곤륜의 선학(仙學) 태허도룡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것에 이르는 징검다리는 될 수 있으리라.>

‘그날 조부님의 검은 단 한 번도 당신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단 한 줄기 검기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태악 할아버지의 무공이 우뢰라 하면 할아버지의 무공은 바람과 같았다. 천지자연의 기운이 한 자루 검에 휘둘려 바람이 되어 그 분의 전신을 휘감았다. 태악 할아버지의 검력이라면 뚫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 검으로는 도저히 넘보지 못할 경지였다. 뚫으려 해도 비켜나갈 것이고 결국 몸조차 가누지 못했으리라. 동화라 하셨던가. 감응이라 하셨던가.’

운청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세차게 검을 내뻗었다. 검첨이 아니라 검 전체에서 바람이 일었다. 운청산은 조부 운검정의 몸놀림을 떠올리며 전신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검이 돌고 몸이 돌아 주위에서 바람들을 갈라버렸다.

<감응하려는 기운을 내치려 하지마라. 네가 부르고 먼저 따르며 네가 앞지르고 또 그것이 따르면 그 즉시 포용하여라. 발(發)한 것을 거두고 수(收)한 것을 다시 내뻗어 천지자연마저 같이 발하고 수할 때까지 휘돌려라. 오호라! 이러한 느낌이다. 검아가 따로 없이 돌고 도니 바람도 돌고 천지자연도 함께 도는구나. 내가 노니 천지자연도 같이 놀려 하는구나. 즐겁구나, 청봉! 이 할아비, 이제야 검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허허허허!>

운청산의 검이 점차 그 세찬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돌아 갈라버렸던 바람들을 검신으로 휘감았다. 검과 함께 운청산의 주변을 휘돌던 바람들이 주변의 공기마저 빨아들였다.

선풍이 운청산을 휘감아 돌렸다. 저절로 허공으로 솟구치게 된 운청산은 바람의 이끌림을 따라 허공을 유영했다. 그것은 운룡대팔식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저 바람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아! 포용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러던 어느 순간 운청산이 허공에서 휘돌면서 눈을 치떴다. 검을 더 이상 놀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땅에 발이 닿기 전에 다시 한 번 세차게 검을 내뻗었다. 그러나 그 검력은 바람을 갈라서 흩어버릴 뿐이었다.

운청산은 조부 운검정마냥 허공을 떠돌며 한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 없는 그 아쉬움에 쓴웃음을 지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군. 그토록 경험해보려 했는데 안 되더니만,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바람을 느끼게 된 것일까?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천지자연이 나와 놀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무언가 심득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그러나 운청산은 이내 쓴웃음을 미소로 바꾸었다.

운청산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조금씩 따라 흘러들어오는 천지자연의 기운을 아무런 부담 없이 빨아들이던 운현산 등이 눈을 치뜨고 서로를 응시했다. 샘물처럼 스며들던 기운이 갑자기 계곡물처럼 거세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주의를 바깥으로 돌렸다. 운청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운청산이 무공을 펼치면 기는 자연히 발산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렇게 반대로 흘러들어오는 일은 전무했다. 더군다나 운현산 등이 훔치는 기는 운청산의 운공에 따라 불어나는 내공이 아니었다. 운청산이 가진 본연의 기운에 뿌리내려 양신을 생성을 도우려는 천지자연의 기운뿐이었다.

‘청산이 또 다시 아버지의 시무를 재현하려 하고 있다. 아니 다른 때와는 달리 느끼는 것 같구나. 천지의 기가 청산의 기에 감응하려 하니 정신들 바짝 차려라.’

운현산이 생각을 퍼뜨리는 순간 모두가 빛의 구멍을 주시했다.

세상으로 내보내면 티끌만도 못한 작은 빛. 그러나 운청산의 백회를 방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니 그들조차도 티끌만도 못한 크기였다. 그 구멍만한 구슬을 그들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두 바퀴는 구를 수 있을 만큼 컸다.

운청산이 휘도는 순간 구멍 역시 숨을 쉬듯 벌렁거리며 휘돌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기가 하얀 연기가 되어 계속해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빨아들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정신들 차려라.’

운현산이 생각을 흘리고 눈을 감는 순간 모두가 눈을 감아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연기 같은 기운이 흩어지고 여덟 줄기로 갈라져 운현산 등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곧 구멍은 벌렁거리는 움직임을 멈췄고 연기 같던 기운들도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눈을 뜨고 빛의 구멍을 확인했다. 운추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넓어진 것 같지요?’

‘그렇구나. 보아라. 밑에서 흐르는 기운들도 점차 속도를 늦추고 있다.’

운경산이 신기한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운현산이 모두에게 전했다.

‘안되던 것이 이 구멍이 생기는 순간 갑자기 된다는 것은 서로 연관이 있다는 뜻이리라. 혼란스럽구나. 당황하여 청산의 기를 또 빨아 들였지만 매번 이렇게 억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조금 전보다 조금만 더 거세지면 우리 능력으로는 막아낸다는 것이 어려우리라. 어찌해야 할까?’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운명산이 생각을 전했다.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우리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쳤다. 오늘 같은 거센 기를 과연 앞으로 몇 번이나 훔칠 수 있겠어? 다섯 번? 여섯 번? 고작 그 정도다.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그건 우리 손을 떠난 것 아닌가? 버티다가 못하겠으면 현산 말대로 청산이 마경에 빠지지 않게 직접 나서서 돕는 쪽으로 전환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짐작과 많이 달랐다.

운청산은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빛의 방에서 생기는 변화로 인하여 그가 갑자기 운검정의 깨달음을 일부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운현산 등의 착각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운청산의 밝고 맑은 마음.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변화가 양신의 잉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짐작이었다.

운청산이 검을 거두고 다시 앉는 순간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두 눈이 어둠 속을 꿰뚫어 기척을 내는 인영을 확인했다.

‘당우리!’

운청산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했다. 셋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둘만 있으면 왜 그렇게 가슴이 벌렁대는지 알 수 없었다.

‘아길은 당당해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심장이 두근대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어떻게 당당하란 말인가? 모르겠다.’

운청산은 엉겁결에 모르는 척하고 두 손으로 베게를 만들어 드러누워 버렸다.

그가 당우리라고 짐작한 가냘픈 인영이 일 보에 사 장씩 뛰어 올라오다가 그의 칠 장 앞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순간 그 인영의 오른손에서 반짝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운청산도 실눈을 뜨고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살기가 담기지 않은 탓에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반짝이던 것이 빛살이 되어 운청산에게로 날아왔다.

왼쪽 옆구리에서 예기가 느껴졌다. 운청산은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미약한 소리와 함께 그 빛살은 그의 겨드랑이 바로 아래쪽에 꽂혔다. 눈동자를 슬쩍 돌려보니 비수라 생각되는 두 치 가량의 손잡이가 보였다.

당우리가 삼 장 앞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왔다.

“안 잔다는 거 다 알아요. 하루 종일 잤으면서---.”

운청산은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없어 비수를 뽑아들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당우리를 보는 대신 다섯 치 가량은 예쁜 비수를 자세히 살폈다. 어둠 속에서도 광채를 잃지 않는 섬세하고 예쁜 비수였는데 손잡이에 하얀 나비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당우리가 운청산의 발아래 서서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그를 내려보았다. 운청산은 비수의 끝을 잡아 당우리에게 내밀면서 물었다.

“왜 그랬소? 장난이면 위험한데?”

눈과 눈이 마주쳤다. 운청산은 내심 “이크!” 할 수밖에 없었다. 당우리의 기색이 화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안 피했어요?”

목소리에서도 화난 기색이 느껴졌다. 운청산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믿으니까.”

당우리의 노한 기색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녀는 입가에 억지로 참다가 남은 미소를 지으며 비수를 받지 않고 바로 운청산의 오른쪽에 붙어 앉았다.

“믿으니까. 믿으니까. 믿으니까.”

당우리는 노래하듯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어깨로 운청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조금 물러나면서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기를 못 느꼈다고 대답했으면 나 많이 화냈을 거예요.”

운청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말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은 대답 대신 비수를 다시 건네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화가 났소?”

당우리는 비수를 받아들고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을 비쭉 내밀고 말했다.

“그럼 화가 안나요? 곧 다시 올 것 같더니만 종일 안 오다가 배고프겠다 싶어 도시락 싸러간 사이에 슬쩍 왔다가 또 안 오는데.”

운청산이 종길에게 잡혀있던 것이 근 한 시진이었다. 그 말은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리라. 당우리의 음식솜씨가 무척이나 서툴거나, 음식에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는 것. 어느 쪽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미안할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밥 어딨소? 지금 먹겠소.”

당우리가 흘겨보면서 대답했다.

“다 식은 밥을 지금까지 남겨 뒀겠어요?”

운청산이 어색하게 웃자 당우리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품속을 뒤져 녹피로 만든 갑과 가슴시리도록 하얀 목련이 조각된 비수 그리고 한 쌍의 하얀 장갑을 꺼냈다.

당우리는 만지작거리던 비수를 빈 녹피갑에 꽂아 운청산에게 건넸다.

“이것을 왜?”

운청산은 엉겁결에 비수를 다시 받아들고 물었다. 당우리가 또 다른 비수를 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당신은 백접비(白蝶匕), 나는 목련비(木蓮匕)! 자, 그리고 이것두 받아요.”

운청산은 서늘한 느낌이 드는 장갑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한령수(寒靈手)라고 해요. 아버지가 내 열 다섯 번째 생일 날 선물로 주셨지요. 끼고 있으면 늘 머리를 맑게 해줄뿐더러 손에 땀이 안 채여 좋아요.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 말로는 외문기공은 물론 호신강기도 뚫을 수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작아보지만 끼면 늘어나고 또 가벼워서 안 낀 것 같아요.”

운청산은 비수와 한령수를 무릎 위에 놓고 바라보다가 한령수를 들어 다시 당우리에게 건넸다.

“백접비는 항상 품안에 지니겠소. 그러나 이건 받을 수 없소.”

당우리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왜요? 이건 칼날을 잡아도 베어지지 않는 신기라구요. 호신에 유용할 텐데?”

운청산은 대답하지 않고 웃어 보이며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그의 손 전체가 파랗게 물들었다. 그는 그 손을 당우리에게 보이며 몸을 앞으로 숙여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순간 그의 손이 물처럼 땅속에 스며들어 팔목 아래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당우리가 눈을 치뜨는 순간 운청산은 손을 회수하여 당우리에게 보였다. 흙 한 점 묻어있지 않은 운청산의 손을 확인한 당우리가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운청산이 말했다.

“있으나 없으나 내겐 마찬가지라오. 더구나 부친께서 생일 선물로 주신 것. 남 주었다는 걸 아신다면 섭섭하다 하실 게요.”

운청산은 당우리의 섭섭한 눈빛과 비쭉 튀어나오는 입술을 바라보며 문득 종길의 말을 떠올렸다.

<청산! 솔직히 말해봐. 뽀뽀 네가 한 게 아니지? 당한 거지? 얼레? 진짠가 보네? 우헤헤헤. 아야! 아파라. 임마! 사나이가 그렇게 질질 끌려 다니면 안돼. 암! 안되지. 박력이 없으면 매력도 없다구. 전신이 타버릴 것 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목을 확 잡아당겨서 내 사람이라고 도장을 찍듯이 거칠게 입술을 빼앗는 거야. 아야! 배야. 그-그게 바로 사나이의 입맞춤이란 거야. 뽀뽀가 아니고. 알았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지, 흐흐흐흐. 에구구! 아파라.>

운청산은 무의식적으로 두 입술을 오므려 부딪쳤다. 그리고 당우리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목울대가 덜컥 내려앉았다가 올라가는 듯 하더니 귀청이 울릴 듯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우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운청산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당우리의 눈을 노려보고 서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목과 뒷머리를 동시에 잡아당겨 입 맞추었다.

중간까지는 종길의 말처럼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입술을 맞추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서 종길의 말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당우리가 놀라서 눈을 치떴다가 그 부드러운 감촉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당우리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오면서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잠시 후 눈을 뜬 당우리가 어쩔 줄 몰라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운청산에게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뭔가요?”

운청산은 눈을 마주쳤다 외면하기를 반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