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9)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군. 하기야 단체를 이끄는 사람들이 그 정도 생각을 못하려고.’

운청산이 알겠다고 대답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때 당우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손 중지를 뻗어 운청산의 턱에 대고 밀었다.

“아! 아아! 안돼요, 안돼.”

운청산은 처음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소. 그럼 난---.”

당우리가 말을 끊었다.

“종 소협은 내가 잘 돌볼 테니 우선은 가서 쉬어요. 피곤해 보인다구요.”

운청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종길에게 말했다.

“아길. 내가 괜히 호들갑 떨었나 보다. 괜찮다니 이제 마음 편히 쉬어라.”

종길이 정신이 들었는지 힘없이 대답했다.

“청산! 고맙다.”

청산은 대답 없이 미소 짓고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우리가 등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때 그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얼굴 한 번 보고 가면---?”

“싫어요.”

“알겠소. 아길을 잘 부탁하오.”

운청산이 문밖으로 나가자 당우리는 코를 찡긋거리며 미소를 짓고서 종길에 돌아섰다.

“어디 봅시다. 쓸데없이 다쳐서 말이야, 친구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니 내가 혼을 내줄 거예요.”

종길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당 소저 세수 안한 얼굴이 이상하더라고 말할 거요. 으흑! 아파라!”

“흥! 다 큰 사람이 엄살이 심하네. 그리고 말하기만 해 봐요. 장침을 쓸 테니까.”

당우리가 짐짓 노려보는 표정을 짓자 종길이 고통스러운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봐주시오. 그리고 당 소저!”

“응?”

당우리가 두 눈을 살짝 올리며 말하라는 표정을 짓자 종길이 눈을 감으며 고통을 참아내고 말했다.

“청산은 좋은 놈이라오. 하지만 외로운 놈이기도 하오. 잘 돌봐 주시오.”

당우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선은 당신이 먼저네요. 잠깐만요.”

당우리는 가벼운 마음을 약장으로 날아갔다.

운청산이 진영을 벗어난 그날, 하늘은 점창산의 주검들을 외면이라도 하듯 별빛 하나 밝혀주지 않았다. 그날 밤 점창의 대연무장에는 시위라도 하듯 오십여 개의 청동관들이 지면을 차지했다.

“사부님, 꼭 이래야 합니까?”

백영담은 간절한 눈빛으로 백무강에게 말했다. 백무강은 제자의 눈빛을 외면하며 그의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천기신사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청동관에 약물을 부어넣고 있었다. 그런데 백영담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자 천기신사는 오십여 개의 관들 가운데 바로 앞에 위치한 관에 약물을 부으려는 사람을 제지했다.

“사부님! 사부님 말씀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제자입니다. 제게는 하나 밖에 없는 사형이구요. 꼭 이렇게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괴물로 만드셔야 하겠습니까?”

백영담이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백무강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도구. 생사를 불문한다. 네가 복수를 하여 넋을 위로해 주었다 하니 환도도 이해하리라. 아니, 죽어서도 그분의 대업에 동참할 수 있다고 기뻐하리라.”

백영담은 눈을 감았다. 그의 두 눈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그럴까요? 과연 그리 생각할까요?”

형식은 질문이었지만 어조는 분명한 부정이었다. 백무강도 그것을 분명히 느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는 대신 지시를 기다리는 천기신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기신사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작업자는 내려두었던 청동 병을 들어 약물을 쏟아 부었다. 두 팔로 그득 안아야 하는 청동 병 세 개에 가득 든 약물들이 채워지자 백환도의 시신은 약물 속에 잠겨들었다.

천기신사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부적들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방금 전 백환도의 시신에 약물을 채웠던 그 백의인에게 건넸다.

“봉인하라!”

백의인이 부적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그들은 일제히 자신이 맡은 관으로 돌아가 청동 관의 뚜껑을 닫고 뚜껑과 관의 이음새 부분에 부적을 붙였다.

백의인들이 관만 놓아둔 채 좌우로 물러서자 천기신사는 등을 돌려 미리 마련한 제단 앞에 섰다. 그가 두 팔을 벌리자 두 명의 장년 도사가 달려와 백포를 벗기고 도포를 입혔다.

천기신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시간을 가늠했다. 반 각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자 천기신사는 갑자기 제단을 향해 두 중지를 퉁겼다. 순간 제단의 양 끝에 있던 촛불에 불꽃이 튀어 타올랐다.

천기신사는 제단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향을 받쳐 들고 촛불에 대었다. 향이 타오르자 그것을 들고 제단을 향해 연신 허리를 접어보이던 천기신사는 향을 향로에 꽂고 소리쳤다.

“홀(笏)!”

장년 도사가 다가와 북두성의 문양이 유독 큰 칠성조각 상아홀을 바쳤다. 천기신사는 상아홀을 두 손에 그러쥐고 다시 제단을 향해 허리를 접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계속 옹알거리는 주문소리가 들렸다가 어느 한 순간 사라졌다.

천기신사가 마지막으로 허리를 접고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중얼거렸다.

“알겠나이다, 알겠나이다.

성군께서 하신 말씀 알겠나이다.

미천한 신하 백진궁이

성군의 뜻을 받잡겠나이다.

성군께서는 미신에게

뜻을 받자울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천기신사는 상아홀을 두 손으로 받든 채 한참동안 허리를 접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만 허리를 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오오오! 오셨도다. 오셨도다. 하늘이 내린 수명을 거부하고 외람되이 목숨을 잃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북두성군(北斗星君)께서 강림하셨도다.”

천기신사는 부릅뜬 눈으로 돌아서서 관들을 내려다보았다.

“제 명을 살지 못한 불쌍한 혼들은 들으라. 하늘이 내린 명을 거역하였으니 그 죄가 크고도 크도다. 내 그대들이 제 명에 이르도록 구천을 떠돌게 하려 했으나 충성스런 신하 백진궁의 염원을 받아들여 천명의 장부를 고치고 그대들의 죄를 사하노라. 그대 혼들이여! 망령되이 구천을 떠돌지 말고 그만 생사의 강을 건너 내생을 기약하라.”

천기신사의 기이한 목소리가 잦아드는 순간 난데없이 선풍이 몰아치더니 촛불을 꺼버리고 관들 사이사이를 휘돌았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매를 들어 눈을 가리니 선풍은 한풍이 되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말려 올라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쉴 새 없이 땀을 흘리던 천기신사가 상아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중년도사들이 급히 달려가 그의 얼굴에 범벅된 땀방울을 닦아내자 천기신사는 겨우 한숨을 내쉬고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천기신사가 말짱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그는 관들을 노려보면서 서서히 두 손을 모아 결인을 짓기 시작했다. 천기신사의 입에서 다시 아기 칭얼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천기신사는 관들을 스쳐지나가며 부적들을 향해 계속해서 오른손 중지를 퉁겼다. 순간 그의 손끝이 지적한 부적에서는 어김없이 붉은 기운이 반짝였다가 문자들이 입체적으로 튀어 올랐다. 허공에 뜬 문자들이 뱀이 똬리를 풀 듯 풀리며 관의 이음새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오십여 개의 관들에서 모두 이변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순간 관의 이음새 부분은 전에 없던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천기신사가 한숨을 내쉬자 백무강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그럼 저들은 모두 쓸만한 도구가 되는 것인가?”

천기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보다 못한 것들로 실험한 결과, 성공 확률이 십중 삼 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보완한 것들이 적지 않으니 이들 정도의 상품(上品)이면 열중 여덟은 대업에 보탬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음, 팔할이라? 좋군. 얼마나 걸리겠나?”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이 년 정도 걸릴 테니, 사천 공략에는 사용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백무강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천기신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사천을 얻는 데 있어 신사 자네가 할 일은 없어. 그 일에만 매진하시게.”

천기신사가 허리를 접었다.

백무강은 천기신사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비틀고 말았다. 백영담이 백환도가 들어있는 관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무강은 말없이 대전으로 돌아갔다. 천기신사는 그의 등에 대고 허리를 접어 보이고 백무강을 힐끔 보았다.

“옮겨라.”

천기신사는 백의인들이 관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소매를 걷어 팔을 살폈다.

“벌써 여기까지?”

부스럼이었다. 툭툭 털면 부스스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흉측한 부스럼들이 팔꿈치 아래까지 번져있었다. 천기신사는 소매를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는 천군께서 역천(逆天)인 까닭이 아니다. 내가 천군을 받드는 방법이 역천인 까닭에 오는 신벌일 따름이다. 천군께서는 순천자(順天子)! 곧 천하를 얻으시리라. 내가 반드시 그리 만들고 말리라.”

천기신사는 두 눈에 강한 불복의 뜻을 담아 하늘을 노려보았다.

푸른 산이 묻거들랑 사랑한다 답하리라.

운청산은 우물을 독차지 하고 앉아 몸을 씻었다. 왠지 찜찜해서 손톱틈새는 물론 전신 구석구석을 손금이 사라질 정도로 비비고 또 비볐다. 씻다 보니 왼쪽 어깨의 상처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운청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태악 도인과 함께 지냈을 때는 다치는 일쯤이야 당연한 듯 여기고 살았다. 근육이 끊기고 뼈가 부러져 어긋난 것이 아닌 이상 오래갈 상처는 아니었다.

아마도 반선 노인의 태청구전금액고가 가져다 준 공능이리라. 다쳐도 다른 이들보다 몇 배나 쉽게 아물었다. 지금의 상처도 벌써 크게 호전되어 새살이 돋고 있었다.

운청산은 아릿한 통증을 잊고 당우리의 막 깨어 부스스한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자세히 좀 봐주지. 쉽게 알아봤을 텐데---.”

상처를 감싼 후 옷을 갈아입고 귀신 나올 것 같은 병사를 둘러본 운청산은 발이 이끄는 대로 그가 늘 신세를 졌던 동산에 올라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누워서 보는 풍광은 변함이 없었다. 없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뿐. 그토록 꺼려하던 것이 바로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안보이니 허전했다.

“거 참! 기분 참 묘하군. 나도 이제 세상사람 다 된 모양이네?”

청인자와 헤어진 것이야 아쉬움과 아픔으로 남아 있지만, 산 밖에서 사는 것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대체로 기분 좋은 일이 더 많았다. 평생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이 생겼고 형제 같은 사람들도 생겼다. 그리고 당우리를 만났다.

“만약 어제라는 시간만 없었다면---.”

생각해 보니 단 하루였다. 아주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그리고 편치 않은 일을 겪은 하루였다. 또 다시 웃음 짓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굵고 엷은 손금들만큼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몸을 씻은 게 아니라 손을 씻었던 것인가? 하! 이 손으로 결국 사람을 죽였구나. 그런데 이상하군. 심란하긴 한데 그렇다고 크게 죄책감은 느껴지지는 않아. 그가 웃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본래 나쁜 놈인가? 어쨌든 정말 이상하군. 지금도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별 다른 느낌이 없었어. 내 검이 직접 닿지 않은 까닭일까? 그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서야 사람을 죽였음을 알았어. 무공이 강해지면 살인에도 강해지는 건가? 나는 곤륜에서 나오면 안 되는 놈이었나?”

운청산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뒤엉킨 그때 운경산과 운추산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운경산의 입을 읽었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동료들이 살아있어서 느끼는 기쁨이 더 큰 까닭이 아닐까?’

운청산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생각은 이미 그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선택을 이어가는 것이리라. 지금의 싸움은 태풍, 너는 거기에 휘말린 낙엽일 따름이다. 신이 아닌 이상, 태풍을 잠재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그 상태에서 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 했을 선택을 했다. 고민하지 말아라. 네가 지금 곤륜에 있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죽인 자가 살고 네 동료들이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을 뿐. 네가 말한 대로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바른 선택이라 할 것이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운추산이 입을 열었다.

‘퇴각한다 하니 우리는 더 이상 필요 없을 터. 이제 들어갈 것이다. 우리를 의식하지 마라. 가끔은 바깥 동정을 살피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눈도 귀도 닫고 있단다. 네 생각을 읽지 않는다. 특히 그 당가의 아가씨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로 네 생각을 세상 동정을 살피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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