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던 운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십자진이오. 전방을 맡으시오.”
운청산은 말을 하는 동시에 운교인을 바로 종길의 옆으로 집어던졌다. 운교인은 조금 전의 교훈을 잊지 않고 왼발로 바닥을 내딛으며 본능적으로 전방을 살폈다.
사방에서 백의인들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선두에서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쇠뇌와 암기는 물론 바위와 통나무가 굴러 진로를 막았다. 그의 앞으로도 통나무가 굴러 내려왔다.
무의식 중에 통나무를 훌쩍 뛰어넘으니 그 뒤로 백의도객이 갑자기 나타났다. 흠칫 사이에 종길이 한 발 나서며 도기를 일으켜 베어버리고 소리쳤다.
“이봐! 당신 뒤까지 닦아줄 여력은 없어. 정신 차려!”
낭인 나부랭이에게까지 정신 차리라는 소릴 들을 줄은 몰랐던 운교인은 눈을 치떴다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작지 않은 외상을 입은 상태에서 사방의 적들을 헤치고 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운교인은 분노를 삭이고 대신 오행십자진의 대강을 확인한 후 그 즉시 종길과 보조를 맞추었다.
한편 운청산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을 찍으며 좌우를 살폈다. 이정까지 살펴 줄 필요는 없었다. 매복하고 있는 백의도객들의 실력은 대체로 종길을 상회하고 강정부부에 근접했다. 그러니 이정은 여유를 부려도 어렵지 않은 처지였다.
운청산이 무엇보다도 크게 신경 쓰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발밑이었다. 주변과 보조를 맞추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예기를 살피며 감지되는 순간순간마다 공력을 돋우어 상대를 내리 누르고 있었다.
그러한 경지는 천근추와는 달라서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력을 쏟아내되 바닥을 건드리지 않고 그 밑의 사람이 있는 빈 공간만을 진동시켜야 하니, 발로 행하는 격산타우(隔山打牛)라 할 수 있으리라.
운청산은 시야를 넓혀 전장을 두루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파도처럼 연속해서 솟구치는 백의도객들의 수가 적어도 이백은 넘을 것 같았다. 공격에 실패하는 자들은 그 즉시 다시 땅 속으로 파고들고 금새 다른 곳에서 솟아올랐다. 그 뜻은 그들이 정상에서 백 여 장 아래쪽까지를 미로처럼 뚫어놓았다는 것을 뜻하리라.
운청산이 감탄하는 그 순간에도 뒤에서 그리고 좌우에서 계속적으로 백의도객들이 튀어나왔다. 운청산은 문취옥의 왼쪽으로 육양수의 절초인 항룡유회를 내뻗었다.
파란 그림자가 문취옥의 몸을 휘돌아 그녀의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백의도객의 도기를 퉁겨냈다. 그 순간 문취옥이 한발 크게 내딛고서 도를 내리찍어 상대를 베어버리고 게걸음으로 진세에 복귀했다.
항룡유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장력이 허공을 휘돌아 상대의 등을 노림으로써 혼자서 상대를 합공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법이었다. 오늘 운청산은 그 수법을 오행십자진에 적절하게 응용하고 있었다.
운청산 등이 쉬지 않고 전진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세 명의 비구니들을 구해냈고 다섯 명의 백의인들을 베었다.
또 다시 피를 뿌리고 널브러지는 백의인을 확인한 후, 운청산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린 사람 세 명에 죽인 사람 여섯. 이정의 말 그대로였다. 가급적이면 살생을 피하기 위해 육장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강정 부부와 종길에 의해 베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백의도객들을 죽이지는 못했으리라. 결국 문취옥 말처럼 살인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이정의 기색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 대협! 처지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세요. 뒤에 우리 측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운청산은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그들이 올라온 것은 어느새 오십여 장! 상대의 집중공격과 매복에 걸려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던 선두로부터 불과 오 장 뒤쪽에 있었다.
운청산은 종길의 왼쪽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항룡유회의 기운이 허공을 휘돌아 종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백의인을 후려쳤다.
“아길! 멈추지 마.”
종길이 주춤거리는 백의인의 팔을 베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종길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바로 오 장 앞에서 화살이 쏟아져 내리고, 반대로 수십 줄기 은광들이 때론 직선으로 때론 휘어서 정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운청산 일행이 전부 멈춰 섰다. 주변에서 솟아오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정상 사십여 장 밑까지 이르러서야 매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운종인과 운화인은 어딨습니까?’
운청산은 생각을 떠올리며 아래를 주시했다. 바닥에는 청의인과 백의인들이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운청산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우측 머리에 느낌이 왔다. 시선을 돌려보니 운가의 금의대가 혼란에서 벗어나서 정연한 태을구성진의 대형를 유지하며 매복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운청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아! 나 소저?”
등 뒤에서 운교인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운청산도 움찔하여 눈길을 돌렸다. 동벽 쪽에 근접하여 무탈하게 선봉에 이른 나라연이 뒤로 쳐진 관음사의 비구니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아래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당우리!’
운청산은 나라연의 모습을 보는 순간 떠오른 이름을 뇌까리다가 즉시 생각을 끊어버리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 대협! 뒤를 부탁합니다.”
“크헉!”
철패를 휘돌아 날아온 당가의 회선표에 적중된 백의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사지를 뻗었다. 그들은 거의 비슷한 증상을 일으켰다. 경련을 일으키다가 칠공에서 검은 피를 토하고 널브러졌다. 그 순간 또 다른 백의인들이 나서서 죽은 이들이 놓은 철패를 들고 빈 자리를 채웠다.
눈앞에서 두 명의 백의인들이 죽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 있던 백영담이 다시 전장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저 놈은?”
청의인 하나가 단 걸음에 이십여 장의 공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으리라.
백영담을 향해 휘어져 날아오는 당가의 암기들을 전신으로 퉁겨 막아내던 칠 척의 철탑거한이 묵직하고 차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곤륜의 신법 같구먼.”
백영담이 활을 들어 청의인 운청산을 겨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건 운룡대팔식?”
백영담이 눈 옆으로 시위를 가져와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운청산이 백의도객들과 비구니 사이를 스며들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회룡산형이 펼쳐지는 순간 운청산의 신형은 아홉으로 흩어져 비구니들이 휘두르는 장창과 백의인들의 도풍 사이사이를 스며들었다. 그 순간 아홉 명의 백의인들이 구룡십팔뇌격에 격중되어 널브러졌다.
백영담이 겨누었던 활을 다시 내리며 혀를 내둘렀다.
“흐아! 어떤 놈이 진짜야?”
“아홉이 무너졌으니 모두 실체란 소리지. 견아소향(見我所向), 이른 곳에서 찰라 전의 나를 본다 하던가?”
그때 잠깐 멈춘 운청산의 입에서 계속 올라가라는 외침이 흘러나왔다. 백영담이 기회다 싶어 다시 활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의 신형은 또 다시 휘돌아 비구니들을 피하고 백의인들을 두드리며 창영에 가려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나라연 근처로 이동했다.
“제기랄! 정말 지랄 같은 신법이네.”
제대로 겨누지를 못한 백영담은 입술을 깨물고 세 차례 호흡을 끊어 뱉은 후에 다시 시위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운청산이 고군분투하던 나라연의 옆에 이르러 그 움직임을 둔화시킨 순간 백영담은 손끝을 부르르 떨며 숨을 멈췄다. 지금이라면 창영에 가린 여자와 운청산을 동시에 잡을 수도 있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운청산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두 개의 철패 사이에 비쭉 튀어나와 있는 백영담의 화살을 노려보았다. 아직 시위를 놓지도 않은 상황, 기세를 느낄 수도 없을 텐데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영담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운청산이 마치 표적이라도 되겠다는 듯 허공으로 솟구쳐 사지를 활짝 열었다. 백영담은 활대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바로 시위를 놓았다.
백영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일사이살(一射二殺)은 무산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느낌이라면 오호신전은 아귀가 되어 운청산의 심장을 확실하게 씹어 먹으리라.
백영담의 호위 역을 행하고 있던 철탑거한 철혈신전주 백철후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운청산의 신형은 나라연의 앞으로 튀어나와 허공에 정지한 것처럼 보였고 화살은 호곡성을 뒤로 남겨놓고 정확히 그의 가슴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운청산을 훑고 지나쳤다.
미소 짓던 백영담과 백철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눈을 치떴다. 분명히 꿰뚫어야 했다. 지금껏 백영담이 노린 그 어떤 사냥감보다 쉽게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꿰뚫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잠깐 흐릿하게 보였던 운청산은 부드럽게 내려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것이 도가의 금강부동신법이라는 용정태극인가?”
백철후가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용정태극? 제길! 환장하겠구만. 나보다 어린 놈인 것 같은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그때 백철후가 백영담의 머리 위로 한 아름 통나무 굵기의 구리 빛 팔을 뻗어 살짝 비틀었다. 철근 같은 근육과 핏줄들이 꿈틀하는 순간 당가의 비전 회선표가 퉁겨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순간 피부 위에서 검은 물방울이 솟았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백철후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낭우! 매복의 역할은 끝났네. 당가 놈들도 전열을 정비한 것 같고. 이제 본격적으로 한바탕 해야 할 것 같은데.”
순간 백영담의 사형 백환도가 빳빳한 수염을 쓸며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젠장!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손 안대고 코풀 수 있는데 왜 이런 희생을 치러야 합니까? 결계는 그렇다 쳐도 완성된 십면매복진조차 제대로 쓰지도 못하게 하다니---.”
백철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제들이 죽어 나가니 나 또한 원통하네만, 어쩔 것인가? 모든 것이 좌상의 심원모려. 우리는 다만 따르면 될 것이네. 자, 낭우! 이제 시작해 보세.”
우측에 서있던 혈랑신전주 백낭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늘어뜨리고 있던 낭아도를 허공으로 치켜세웠다. 그것이 마치 신호기라도 한 것처럼 산등성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던 철패수들이 좌우로 물러서서 오 장 정도의 공간을 틔워주었다.
백낭우가 고개를 쳐들고 산을 울리는 괴성을 지르는 순간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백낭우의 뒤쪽에서 강한 살기가 일어났다. 그 순간 앞뒤에서 적을 맞아 수세에 몰렸으면서도 악착같이 도를 휘돌리던 백의도객들이 갑자기 도를 거두고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상대를 잃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상을 살피는 순간 둥그런 산등성이를 빼곡 채웠던 철패들 가운데서 중앙에 위치한 수십 개의 철패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기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정상을 겨우 삼십여 장 남짓 남겨두고 있던 선두의 군룡전 고수들마저 나아가기를 멈추고 산의 기세를 살폈다. 전선 전체로 퍼져나가는 긴장감에 사람들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본대를 찾아가 대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나중에 산을 올라 합공했던 노호단과 천우단이 합세했다.
그 순간 철커덕 소리만 들리던 것은 실체가 드러났다. 동인이었다. 황금빛 갑주로 전신을 감싼 채 언월도를 든 오십여 명의 칠척동인들이 철패 사이를 지나자마자 산등성이를 따라 퍼졌다가 서서히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정의 인도로 운청산 쪽으로 이동한 강정 부부 등이 모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저것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백 명뿐이라며? 여기만 오백은 되겠다.”
종길이 괴성을 내질렀으나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대신 이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건 첩동갑인(疊銅鉀人)?”
“무엇입니까?”
운청산의 물음에 이정이 고개를 꺄웃거리며 말했다.
“첩동갑은 청동을 얇게 펴 갑주로 만든 것이네. 한 겹이면 문제될 것이 없으나 세 겹으로 겹치고 그 틈새를 수십 장의 면포를 압축하여 채운 것이네. 공명하기 때문에 격산타우의 기력도 쉽게 뚫지 못하니 호신강기를 입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다가 전면이 둥그렇게 마감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힘이라도 빗겨 맞히면 퉁기고 말 것이야. 그들이 첩동갑인을 앞세웠다는 것은 결국 당가가 선봉을 선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허나 첩동갑은 그 무게가 백육십 근에 이르는 중갑(重鉀)이라 이런 경사진 곳에서는 사용할 만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저리 편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구먼.”
비구니들과 함께 근동에 서있던 나라연이 첩동갑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정과 운청산 등을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 운청산이 생각했다.
‘알아봐 주십시오.’
운청산은 네 개의 눈과 네 개의 귀를 더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깨달았다. 그 스스로가 방비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동안, 사목사이는 멀리서 닥칠 수 있는 위협들을 미리미리 확인하여 알려주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경고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검은 화살도 그토록 여유 있게 피해낼 수 없었으리라.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줄기 하얀 빛이 산에 이르렀다가 첩동갑인의 전신을 휘돈 후에 돌아왔다. 운청산은 눈앞까지 다가 온 운경산의 입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 모두에게 말했다.
“바닥에 징을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중갑의 무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무리해서 베려하지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진형을 바꾸겠습니다. 이 대협과 제가 선두, 대형과 형수님 그리고 아길은 뒤에 섭니다.”
아무도 운청산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금세 자리를 뒤바꿨다. 그러자 나라연도 비구니들을 살피며 고수를 추려 앞으로 내세웠다. 운교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보다가 비구니들 옆으로 섰다.
그때 당유연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가주의 권위로 독령과 암혼의 봉인을 푸나니, 당가인은 가문의 비전을 사유로이 사용하라!”
순간 당가 사람들이 들고 있던 회선표들을 품속에 넣으며 하나같이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다.
“이제 나 선령들의 피땀을 사용하리니, 하늘은 이 죄업을 용서하소서.”
그들이 하나같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두 개의 긴 철통, 이십 장 안이라면 호신강기마저도 꿰뚫는다는 당가의 삼대암기 가운데 하나인 무형뇌전이었다.
“쳐라!”
당유연이 다시 소리치는 순간, 산정에서도 사자후가 터져나왔다.
“공격!”
“끼이야오!”
그 순간 열린 철패들 사이에서 괴성이 터져 나오면서, 전신을 피로 칠한 채 낭아도를 든 사람들이 맨발로 쏟아져 나왔다. 야수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낭아도객들은 모두 일백을 넘을 것 같았다.
그들의 괴성이 산을 뒤엎는 순간 신수사태가 차갑게 소리쳤다.
“갑인들은 당가에 맡기고 야인들을 쳐라.”
그 순간 낭아도객들이 단 걸음에 십여 장을 뛰어 첩동갑인들의 머리를 넘어서고 다시 도약했고 또 한 번 몸을 날렸다. 경사로를 뛰는 것이라 하나 한 번에 십여 장씩 뛴다면 평지에서도 족히 사오 장 이상을 뛸 수 있으리라. 그 정도라면 능히 지급무인들 넘어 천급무인의 수준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쳐라!”
신수사태가 당유연을 옆을 스쳐지나가며 소리치자 사천무림련 사람들도 파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첩동갑인들도 언월도를 바닥에 찍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칠척이 넘는 언월도를 지지대 삼아 뛰니 무겁게만 보이던 첩동갑인들이 단 번에 삼 장을 내리 뛰었다.
쿠쿠쿠쿠쿵!
산이 울부짖는 소리를 신호로 하여 사백 명이 넘는 양측 사람들이 동시에 부딪쳤다.
낭아도객들이 십여 장을 뛴 탄력을 이용하여 바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 꽂혔다. 운청산 등에게도 두 명의 낭아도객들이 머리를 쪼갤 듯 붉은 도기가 뿜어져 나오는 낭아도를 내리찍었다.
운청산이 잠룡출곡의 신법으로 먼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의 신형이 용유운상의 신법으로 돌변하면서 도기 사이를 파고드는 순간 그의 두 손에 감돌던 태허구전선공의 기운이 천호만격의 기력을 담아냈다.
파란 수기가 오직 두 사람에게 집중되자 싸늘한 눈빛으로 공격해오던 두 낭아도객의 눈이 부릅떠졌다.
퍼퍼퍼퍼퍼퍼퍼퍼벅!
운청산의 신형이 가라앉는 동안 파란 수기에 연달아 타격받은 두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서지 못하고 허공에서 연신 꺼떡거렸다. 그때 뒤이어 몸을 날린 이정의 미첨도가 반월을 그렸고 낭아도객들이 수급과 따로 떨어져 내렸다.
“이슬같은 그대인생 슬픔모두 사라졌다.
고달팠던 그대영혼 극락정토 이르리라.
아미타불!”
운청산은 이정이 뇌까리는 불호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때 가까이서 보니 더 엄청난 체구를 지닌 첩동갑인이 언월도로 연신 땅을 찍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엄청나구나.”
이정이 놀라는 순간 운청산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앞으로 튀어나갔다.
츠즈즛!
운청산의 발가락 끝에서 세 번 흙이 튕기는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삼 장을 이동하여 첩동갑인의 도세 안으로 들어섰다.
휑!
언월도가 그의 머리 위를 스치는 순간 미꾸라지처럼 도세를 흘린 운청산의 두 손은 그의 다리 밑으로 파고들었다.
따당!
두 정강이를 격타당한 첩동갑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운청산의 머리 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 운청산은 사량발천근의 수법으로 첩동갑인을 뒤로 날려버렸다. 첩동갑인이 뒹굴며 이정을 지나고 강정 부부를 지나 밑으로 구르다가 바위에 부딪쳐 겨우 멈춰 섰다.
운청산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들이 없자 전황을 살폈다. 당가의 무형뇌전은 말 그대로 위력적이었다. 정면에서 한 대 맞으면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정면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비켜 맞으면 요란한 접촉음만 내고 튕겨나가서 무형뇌전을 쏜 사람은 언월도의 도기에 그 즉시 분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천무림련 사람들을 스쳐지나간 낭아도객들이 다시 되돌아와 첩동갑인들의 주변을 휘돌았다. 이미 수천 번 연습을 행한 듯 첩동낭인들의 도세를 절묘하게 벗어나 오로지 사천무림련 사람들만 공격하고 있었다.
“청산! 저쪽일세.”
이정의 소리에 돌아보니 비구니들이 현저하게 약세를 보이고 있었다. 운청산은 이정과 나란히 비구니들을 향해 움직였다.
백환도는 입술을 깨물며 도를 뽑아들었다.
“내 저놈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는 즉시 백철후의 옆을 떠나 산을 몸을 퉁겼다.
“사형!”
백영담이 살펴보니 백환도는 단 두 걸음 만에 이십여 장을 움직여 운청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그 순간 그의 도에서 붉은 장막같은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혈라삼도를?”
백영담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운청산이 처음으로 검을 들고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쾅!
단번에 뻗어낸 검기가 칠 장에 이르렀을 때 붉은 장막같은 기운은 비단폭처럼 찢어졌고 백환도는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이놈! 흐아합!”
백환도는 왼발을 찍어 다시 허공으로 튀어올라 운청산의 정도리를 향해 도를 내리찍었다. 붉은 장막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연달아 일어나더니 어느새 하나가 되어 오 장의 공간을 뒤덮었다.
쿠릉!
허공으로 치솟은 운청산의 검이 휘돌면서 십자로 교차되는 순간 뇌성이 일면서 검풍이 먼저 붉은 장막을 구겨버리고 뒤이어 오 장에 이르는 검강이 붉은 장막들을 산산이 흩어버렸다. 처음으로 사우팔절검의 절초 풍뢰교연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태악 도인과의 비무 때처럼 운청산은 허공에서 한 바퀴 휘돌아 두 기운이 부딪쳐 폐허가 된 공간에 유성분천의 절초를 찔러 넣었다. 한 바퀴 휘돌아 펼쳐진 유성분천은 검끝에서 사출되어 조그만 청환이 되어 다시 도를 세우는 백환도의 가슴에 가닿았다.
핏방울이 주륵 흘렀다가 피분수가 솟구쳤다. 백환도는 입술을 악다물고 떨어져 내리는 운청산의 다리 밑으로 붉은 도막을 펼쳤다.
운청산은 그 즉시 검을 두 발밑으로 넣어 검신의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바로 그 순간 운청산의 이마가 따끔거렸다. 그리고 가슴이 관통당한 듯한 통증을 느꼈다.
운청산은 볼 것도 없이 그 기운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쾅!
급하게 일으킨 이 장의 검강과 검은 화살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땅이었다면 일 장 정도 뒤로 밀렸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은 허공에 떠 있었다.
“청사안!”
밑에서 이정 등이 소리쳤다. 내려다보니 그의 신형은 뒤로 밀려 어느새 단애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젠 떨어져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운청산은 몸을 비틀어 왼손으로 허공을 향해 격공장을 내뻗었다. 폭음과 함께 뒤로 밀리는 힘이 약화되는 순간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밧줄을 풀어 단애 끝 바위를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바위를 겨우 다섯 치 앞에 두고 밧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운청산은 애타게 소리치는 종길의 모습과 조금 전 그가 싸웠던 그 백의인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쓰러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눈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 그 순간 운청산은 즉시 밧줄을 회수하고 새가 활공하듯 사지를 벌려 아래를 살펴보았다. 까마득했다. 사람의 손이 닿은 듯, 아무리 절벽이라도 있을 법한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창두봉의 동벽을 이루는 곳. 천도(天刀)로 내리찍은 듯한 절벽이 아니었다. 그러한 지세가 당장 운청산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미 수십여 장을 낙하한 상태라서 발을 디디는 그 순간 발목이 부러지고 말리라.
운청산은 아래쪽의 벽을 향해 쉬지 않고 벽공장(劈空掌)을 터뜨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절벽에 부딪친 벽공장력은 운청산의 신형을 절벽으로부터 일정하게 반 장을 유지하게 만들고 동시에 가속이 붙는 것을 막아주었다.
운청산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아래쪽 허공에 대고 연달아 격공장(隔空掌)을 터뜨렸다. 허공에 터진 격공장은 운청산의 신형을 잠시나마 위로 밀어붙였고 그 순간 동그랗게 말려있던 그의 몸이 뒤집어지면서 두 다리가 위쪽으로 솟구쳤다가 절벽으로 뒤집어졌다.
두 발끝이 절벽에 닿으려는 순간 힘차게 허리를 제치니, 두 발끝은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훑었다가 아래로 내려가고 운청산의 몸은 어느새 절벽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운청산은 두 발과 두 손을 동시에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고 정지하려고 애쓰는 대신 동시에 두 손과 두발을 대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계속해서 십여 장을 다시 미끄러지다 보니 왼 발끝에 작은 돌출부위가 닿았다. 운청산은 그 작은 디딤돌 하나에 전신에 깃든 긴장감을 실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운청산은 다시 절벽에 가 닿는 그 순간 두 손을 찔러 넣고 동시에 두 발끝으로 벽을 찍었다.
운청산은 마침내 도마뱀처럼 벽에 달라붙어 멈춰 설 수 있었다.
“후우!”
운청산이 막 한숨을 내쉰 그때였다. 손과 발을 꽂아 넣었던 곳에서 돌가루들이 흘러내리더니만 운청산의 신형 역시 밑으로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한 순간 기운을 거두고 긴장을 늦춘 것 치고는 너무나 큰 손해였다. 다시 수십여 장을 미끄러져 내려간 운청산은 두 손을 파랗게 물들이고 계속해서 손에 닿는 돌출부위를 잡아챘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지없이 부서져 운청산의 낙하를 저저해주지 못했다.
그때 운청산의 왼쪽 머리에서 예의 그 느낌이 왔다. 운청산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오른발로 절벽을 차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절벽을 밀어 허공을 휘돌았다. 보였다. 왼쪽 십여 장 아래쪽에 작지만 튼튼하게 박혀있는 바위 하나가 삐쭉 삐어져 나와 있었다.
운청산은 그 바위에 내려서자마자 왼손을 수도로 만들어 벽에 찔러 넣었다. 순간 벽은 운청산의 왼팔을 팔꿈치까지 먹어버렸다.
“하아아아! 죽는 줄 알았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니 그때서야 강정 등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백여 장 이상을 떨어진 상태였다.
조급증이 생겨 급하게 위쪽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마땅히 발을 디딜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벽호공(壁虎功)만으로도 오를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그리 한다면 시간이---.’
운청산이 암울한 눈빛을 드러내며 위를 바라보는 순간 운경산과 운현산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멀어져서 위쪽은 물론 좌우를 두루 살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적당한 버팀돌들이 보이지 않는지 계속 헤매기만 하다가 급기야는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들이 다시 올라와 운청산의 얼굴 앞에서 부유했다.
그들의 입을 살핀 운청산은 즉시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어 공력을 돋우었다. 잠시 후 운청산은 갈등으로 물든 눈으로 그가 떨어져 내린 창두봉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현상자의 손안에서 검파가 맹렬하게 휘도는 순간 그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던 붉은 구슬이 파란 비단에 휘감겨 옆으로 비켜나갔다.
현상자는 그 즉시 몸을 휘돌려 백무강의 우측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푸른 장막이 물결처럼 흘러 백무강의 허리를 베어나가는 순간, 백무강은 좌측으로 몸을 빼며 혈라도천(血羅渡天)의 기세를 일으켰다.
콰콰콰콰쾅!
연속적으로 폭음이 이는 순간 비단 한 필을 다 풀어놓은 것 같던 두 사람의 검홍과 도홍이 부딪치며 서로의 빛을 죽여 갔다. 바위가 부서지고 돌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도 몸을 반대로 휘돌려 충격을 줄이며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바위를 찍어 박살을 내놓고서야 겨우 멈춰선 현상자는 기도를 찢어놓을 듯 확장시키며 솟구쳐 오른 피를 억지로 입안에 가두어두었다가 고개를 들기 전에 다시 삼켰다.
현상자는 바닥을 찌르고 있던 검을 위로 치켜 올리며 도포로 은근슬쩍 입 주변을 닦고 백무강의 상태를 살폈다. 백무강의 안색도 그리 밝지는 못했다. 그의 탐스러운 혹염과는 대조적으로 창백해져 있었다.
현상자를 마주본 백무강은 안색과는 달리 미소를 지었다.
“역류된 피는 뱉어버리는 게 건강에 좋아.”
“그대의 안색도 좋은 편은 아니군.”
현상자의 차분한 대응에 백무강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의인은 스물 대여섯 남짓 움직이고 있었고 청성파 도사들은 열 서넛 남아 있었다.
백무강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드리우고 도를 앞으로 뻗으며 산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는 현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임무는 그대를 막는 것만으로도 달성된다. 그러나 현상자 그대의 임무는 산에 올라 배후에서 치는 것. 어떤가? 난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는?”
현상자로서는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형평을 맞춰온 것처럼, 도저히 밀어붙일 수 없는 형국이었다. 끝까지 싸운다면 결과는 양측 모두 죽음뿐이었다. 살아남는다 해도 한두 사람 오른다고 될 일이 아니니 결국 청성의 정예를 투입하고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주검만 늘리게 되리라.
그때 백무강이 빙긋 웃으며 도에 붉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현상자도 당연히 기세를 일으켜야 하리라. 그러나 현상자는 뒤로 훌쩍 물러서며 소리쳤다.
“물러선다.”
순간 허공을 휘돌며 지친 검을 내뻗던 청성도사들이 일제히 뒤로 퉁겨 현상자의 주변으로 물러섰다. 백의인들은 반대로 백무강의 주변으로 모여 전열을 정비하고 기세를 일으키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청성도사들이 죽어 널브러진 청성도사들을 참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현상자에게 소리쳤다.
“장문인!”
사형제들을 그대로 놓고 갈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현상자는 부릅뜬 눈으로 청성도사들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물러선다. 신호전을 올려라.”
현상자가 발을 구르자 청성도사들이 입술을 터져라 깨물고서 일제히 같은 동작으로 발을 굴러 그들이 올라왔던 그 방향으로 날아갔다.
백무강은 자신을 향해 검을 뻗은 채 노려보며 뒤로 날아가는 현상자 등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도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즉시 허리를 접었다.
“우웩!”
한 사발의 붉은 피를 토하자 두 명의 백의인들이 그를 좌우에서 부축했다. 백무강은 그들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허리를 폈다.
“너희들도 편히 쉬어라.”
순간 꼿꼿하게 서있던 백의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가운데 몇몇은 아예 바닥에 엎드리고 누워버렸다.
백무강은 도갑에 도를 넣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았다. 그때 현상자 등이 내려갔을 그 방향에서 붉은 색 신호전이 솟구쳐 올랐다가 이해호로 떨어졌다.
신호전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무강이 중얼거렸다.
“위험했어. 계속 싸웠다면 모두 같이 죽었으리라. 청성! 그 정도에 이르렀던가? 그 동안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들에게도 우리만큼 뼈저린 고통의 시간이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백무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호흡을 정리한 후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일어설 때 같이 일어서지 못하고 힘겨워하던 백의인들 가운데 두 사람을 지목하여 남으라 하고 곧바로 산을 올랐다.
쾅!
아미금광장(峨眉金光掌)과 음양신마수(陰陽神魔手)가 부딪치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이 터지고 잔도의 벽에서 돌가루들이 일어 먼지가 되었다. 뒤로 주르륵 물러선 공명선사가 재차 합장하여 앞으로 나아가자 백함도와 그의 뒤에 있던 백우련 역시 어금니를 악다물고 마주 달려왔다.
“우합!”
백함도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공명선사의 오른손과 백함도의 오른손이 맞부딪쳤다.
퍽!
공명선사의 손에서 금광이 흘러나오는 순간 백우련이 백함도의 명문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하!”
백우련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공명선사의 금광에 눌려 일그러지던 백함도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왼손은 운녹산 등에게 뻗고 오른손은 백함도와 마주친 채 굳건한 마보세를 유지하고 있던 공명선사의 이마에서 비처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백함도의 손이 하얀 빛을 더해 가면 갈수록 공명선사의 금광은 줄어들면서 그의 몸 역시 운녹산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아마파의 내력공부는 태산보다 두텁다 했다. 그러나 부부임을 확인시키는 두 오행마문주의 합공에는 밀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막 운공에서 깨어난 운녹산은 금새 상황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입술이 바짝바짝 탈 수밖에 없었다. 운녹산은 급히 고개를 돌려 아미파 승려들을 보았다. 그들 역시 입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니 되오?”
운녹산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미파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의 내력은 호문지공(護門之功)인 금강수미선공(金剛須彌神功), 빈승들과는 공부가 다르오이다. 아미타불!”
운녹산은 다시 고개를 돌려 힘겨움을 드러내는 공명선사를 보고 그 너머 뒷짐을 진 채 서있는 금극현을 보았다. 순간 금극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에서 금빛 안개를 뿜어냈다. 마치 다시 해보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운녹산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장문인! 벗어날 수 있겠소? 뒤는 운모가 맡겠소이다.”
순간 공명선사의 승포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곧이어 전신에서 금광이 솟구쳐서 승포마저 가려버렸다.
“하아! 금(金). 강(剛). 반(般). 야(若)!”
공명선사는 기합을 내지르며 오른발로 바닥을 찍어 기우러진 몸을 바로 하고 연이어 왼발로 바닥을 찍었다.
쿠쿵!
산이 우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공명선사와 백함도 부부가 동시에 튕겨져서 자신들의 진영으로 나뒹굴었다. 아미파 승려 두 사람이 급히 나아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공명선사를 잡아 부축하니 그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 공명선사의 입술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는 동안 다른 승려는 품속에서 요상단을 꺼내 두 손가락 사이에 넣어 비비고 다른 손으로 받아 공명선사의 입에 넣어주었다.
운녹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공명선사를 보고 앞으로 나서니 금극현이 운공요상에 돌입한 백함도를 힐끗 보고서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오 장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선 그 순간, 금극현의 머리 위쪽에서 연이은 폭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작은 바위와 흙더미들이 연이어 떨어졌다. 금극현은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웃으며 말했다.
“위쪽도 상당히 치열한가 보군.”
운녹산은 대응하는 대신에 늘어뜨리고 있던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검지들이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금극현이 마냥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순간 운녹산의 두 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싶더니만 어느새 그의 중지 크기만한 두 개의 핏덩이가 금극현에게로 날아갔다.
금극현이 두 손을 뻗었다.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원반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두 줄기 붉은 기운이 원반에 부딪쳤다.
프스스스스!
미약한 소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순간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짓는 금극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런! 이것은 예전에도 시도했던 운가의 그 주작화홍지? 그 동안 꽤 노력한 것 같군. 그러나 아무리 화극금이라도, 병화(丙火)가 신금(申金)을 녹이지는 못하는 법! 딴 방도를 찾게나.”
운녹산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공간적 제약이 심한 동벽로에서는 금극현이야말로 금성철벽(金城鐵壁)이라 불러야 하는 존재였다. 만약 그가 적극적으로 싸우겠다고 나선다면 운녹산으로서는 견뎌내기 힘들리라.
‘결국 그 한 수를 노릴 수밖에 없어.’
운녹산은 금빛 안개를 소용돌이처럼 휘돌리며 기다리겠다는 듯 여유를 부리고 있는 금극현에게서 시선을 떼고 공명선사를 살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전신에서 감돌던 금광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중이니 금새 깨어나리라.
운녹산은 고개를 돌려 금극현을 직시했다. 운녹산이 무극정을 빼들자 금극현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뒤를 받혀줄 사람이 생기니 해 볼 마음이 들었는가? 미안하네. 다른 곳으로 옮겨줄 수 있으면 그리하겠네만---. 어쨌든 기다려 준 것으로 미안함을 상쇄하겠네.”
“그대, 예전과 달라진 것도 있구나. 말이 많아졌어.”
쉐쉐쉐쉐쉑!
무극금정강기의 기운이 무극정을 통하여 연달아 사출되자 금극현도 질세라 왼손을 휘돌려 회오리 문양의 금빛 방패로 막아내고 오른손을 장창을 만들어 운녹산의 가슴을 노렸다.
따다다다당!
운녹산이 뿜어낸 검기가 방패에 막히는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실 같은 기운들이 뿜어져 나와 금극현의 장창에 반응했다. 이 장 앞에서 막힌 장창이 강압적으로 무극금정강기를 뚫고 또 뚫는 사이에 무극정이 또 다른 검강지기를 이루어 약해진 방패를 꿰뚫었다.
하합!
운녹산의 기합성이 터지는 순간 방패를 꿰뚫은 검강지기는 금극현의 어깨에 닿았다. 그 순간 금극현이 미소를 지으며 장창에 힘을 가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서로의 어깨에 닿는 순간 운녹산은 제 자리에서 반원을 그리듯 휘돌아 금극현의 장창을 흘리고 바로 허리를 접으며 왼손을 내뻗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운녹산의 애도 청룡이 도갑을 빠져나와 그의 왼손에 쥐어지는 순간 금빛 도강이 뿜어져 나와 금극현의 가슴으로 뻗어나갔다.
금극현이 얼굴을 굳히며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순간 운녹산의 어깨를 비켜나갔던 장창이 안개가 되어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운녹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뻗어낸 도강과 금극현이 빨아들이는 금빛 안개가 같은 속도로 금극현에게로 돌아가고 있으니 막아낼 방도가 없으리라.
땅!
도강이 결국 금극현의 가슴을 찌르며 금속성을 토하는 그 순간 그의 손아귀로 돌아간 금빛 안개가 비수가 되어 운녹산에게로 날아왔다.
운녹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극금정강기를 거두고 그 기운으로 도강을 만들어낸 것인데 금극현은 방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한 것이었다. 운녹산을 더욱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당연히 뿜어져야 할 핏줄기 대신 금속성이 났다는 것이었다.
‘아차! 금갑호체마공!’
이미 이십 수 년 전에 그의 난도질을 견뎌낸 육신이었다. 대비를 했다면 쉽게 뚫기가 어렵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운녹산은 이미 내뻗은 검강과 도강을 동시에 거두고 제 자리에서 휘돌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깨 하나쯤은 날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그때였다. 세찬 기운이 운녹산를 찌를 듯 앞을 가로막았다. 금비(金匕)가 그 기운에 막히는 순간 서로 대치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눈을 부릅떴다.
금비를 막은 검강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텅 빈 허공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더구나 그 푸른 검강은 단지 금비만을 막아낸 것이 아니었다. 금비를 퉁겨내자마자 금극현에게로 방향을 바꾸었고 다가갈수록 그 위력을 더해서 작은 환으로 집적되었다.
긴장을 풀었던 금극현은 즉시 두 손을 겹쳐 방패를 만들었으나 너무 느리게 반응한 탓에 푸른 구슬은 그것마저 깨고 금극현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금극현의 왼쪽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그 순간 그의 눈길이 검환의 주인공에게 닿았다.
운청산이었다. 왼손으로 밧줄을 쥔 채 삼 장의 거리에서 또 다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금극현은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의 어깨를 꿰뚫은 검환은 적어도 사 장 밖에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저 녀석, 땅을 밟게 할 수는 없다.’
금극현의 미간에 처음으로 노기가 어리는 순간 운청산은 다시 검을 내질렀다. 금극현의 왼쪽 어깨에서 핏줄기가 튀어 올랐고 그 즉시 그의 왼손에 차라리 몽둥이라 불러야 할 작고 단단한 방패가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의 오른손은 금비를 뿜어내고 있었다.
땅!
운청산의 검강이 금극현의 방패와 먼저 부딪치는 순간 금극현은 우그러진 방패를 여전히 내뻗은 채 벽에 부딪쳤고 운청산은 방패와 부딪친 충격 탓에 다시 허공으로 물러났다.
금극현이 뿜어냈던 비수가 운청산의 미간을 뚫을 듯 날아왔다. 밧줄을 놓지 않는 이상 이마에 구멍이 뚫리고 말리라. 예상처럼 운청산은 밧줄을 놓으며 몸을 뒤집었다. 비수가 밧줄과 허공에서 반원을 그린 운청산 사이의 그 작은 틈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린 순간, 허공에서 한 바퀴를 휘돈 운청산은 두 발 사이에 밧줄을 끼운 채 거꾸로 뒤집어져 검을 내뻗고 금극현에게 다가갔다.
단번에 사장을 뻗어나간 검강이 금극현의 가슴으로 다가가는 순간 두 줄기 강력한 장력이 그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왔다. 겨우 놀란 정신을 수습한 백함도 부부가 펼친 음양신마수였다.
운청산은 할 수 없이 금극현과 밧줄을 포기하고 허공에서 몸을 휘돌렸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는 운녹산의 옆으로 내려서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거리는 삼 장. 아무리 운청산이라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삼 장을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형을 뒤집으며 팽이처럼 휘돈 운청산이 이 장을 날아간 순간, 거리가 모자란다는 것을 눈치 챈 운녹산이 급히 검을 내뻗었다. 손을 뻗으면 검첨을 쥘 수 있을 것이고 운청산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왼손 끝이 검첨에 닿았다. 바로 그 순간 뒷머리, 즉 그가 등진 금극현이 있는 방향에 운경산의 경고가 있었고 운청산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비틀었다.
“큭!”
금비가 운청산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운녹산의 검첨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깨가 아니라 가슴이 뚫렸으리라. 운청산은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리면서 올려다보았다. 운녹산의 눈과 고통으로 찡그려진 운청산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운청산의 신형은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운녹산은 눈을 감았다.
‘옷을 보면 우리 측 사람이다. 내 경지에 이른 청년. 검을 그 정도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청성 밖에 없을 터. 그러나 젊은 나이에 그 정도라면 내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니, 결국 정명당에 용이 숨어 있었던 것. 아쉽구나. 그 정도 경지라면 장차 크게 쓸 수 있었을 것인데---.’
운녹산은 혀를 내차고 눈을 뜸으로써 생각을 끊어버렸다. 거력이 될 만한 능력자를 잃었으니 아쉽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뿐만이 아니라 난공불락이라고 여겼던 금극현의 위세를 반으로 줄여놓고 죽었다. 지금이라면 금극현을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
금극현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실핏줄이 드러나 보여 조금 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무리하게 공력을 운기하여 피가 과도하게 새어 나온 것이리라.
금극현이 운녹산에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그대도 몰랐던 것 같구나. 하하하! 자기 진영에 그만한 고수를 두고도 모르고 있었으니 나를 넘는다 해도 이 싸움에서 큰 이득을 취하지는 못하리라. 오너라!”
“극현! 물렀거라.”
운녹산이 말하려는 순간 백함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금극현이 말했다.
“아직은 기력이 남았소. 내가 죽으면 운녹산 또한 온전하지는 못할 것.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것이오.”
운녹산이 청룡을 다시 도갑에 넣고 무극정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바로 그 순간, 창두봉 남동쪽에서 붉은 신호전이 솟아올라 이해호로 떨어졌다.
“운 가주! 현상 진인께서 실패하셨소.”
공명선사가 말했다.
“아직은 기회가 있소이다, 선사. 우리가 뚫고 정상을 공략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면 현상 진인의 실패가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오.”
운녹산이 기세를 북돋우며 말했다. 바로 그때 운녹산의 머리 위쪽에서 떨어졌을 것이 분명한 붉은 신호전이 또 다시 이해호로 떨어졌다.
“위쪽도 물러서나 보오. 너무 지체하면 퇴로가 막힐 수도 있소이다.”
운녹산은 창백한 금극현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무극정의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다음에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운녹산의 말에 금극현이 힘겹게 미소 지었다.
“어찌 될지는 두고 보세나. 잘 가게.”
운녹산은 아쉬움을 잘라내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함도 측이 따라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등을 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동안 운녹산은 때때로 절벽 아래쪽을 살폈다. 단순한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 속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 탓이었다.
‘누굴까? 누구기에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본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청년이 아니었다. 운녹산은 무거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경험이란 사람을 침착하게 만든다. 다친 왼쪽 어깨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운청산은 행동하기 전에 밑을 침착하게 살폈다. 다행이었다. 사람의 손이 닿은 곳은 동벽로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십여 장 정도뿐이었고 그 밑으로는 멀리서 볼 때 창산을 절경으로 만드는 보잘것없는 소나무들이 제법 무성했다.
운청산은 검을 휘돌려 거꾸로 쥐고 먼저 벽에 대었다.
가가가가강!
검첨에서 불꽃이 일면서 낙하속도가 줄어들었다. 좌우에서 소나무들이 휙휙 흘러갔다. 그리고 소나무 가지와 솔잎들이 얼굴을 계속해서 후려쳤다.
운청산은 화끈거리는 어깨의 통증을 이를 악다물어 참아내고 나무를 밟았다. 우지끈 소리가 나며 나무가 부러졌다. 그러나 그 잠시의 지체만으로도 속력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번째 나무를 밟는 순간 운청산은 소나무의 몸통 아래쪽을 밟은 채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운청산은 한숨을 내쉬며 좌우를 둘러보다가 튼튼해 보이는 오른쪽 소나무로 몸을 날렸다. 거기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이 장 정도 아래쪽에 앉을 만한 바위가 돌출되어 있었다.
그곳에 내려선 운청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옷을 찢어 구멍 뚫린 어깨를 단단히 묶은 후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루에 두 번이나 떨어지다니---.”
운청산은 멍한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운경산이 알린 것은 운녹산과 금극현이 막 다시 대치한 상황이었다. 운녹산과 맞닥뜨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운청산이었지만 동벽로에 내려서서 돌아간다면 벽호공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강정 등에게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늦은 감이 있었다.
“다들 무사할까?”
그때였다. 창두봉 남동쪽에서 붉은 신호전이 솟아오른 것을 시작으로 위쪽은 물론 여기저기서 붉은 신호전을 이해호로 떨어져 내렸다.
“붉은 신호전? 퇴각신호라 했었지. 이제 걱정해봐야 소용없나?”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결과가 나온 이상은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곧 운청산은 성격이었다.
운청산은 지그시 눈을 감고 살아온 동안 가장 많은 일을 겪었던 오늘의 일들을 하나씩 반추해 보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죽인 사람의 웃는 얼굴 그리고 아픔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아비의 눈.
운청산은 눈을 떴다. 지금 당장 살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운녹산의 눈빛 하나로 그를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운청산은 멍한 눈으로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너무나 푸르르 당장 몸을 날리고 싶은 이해호와 그 뒤로 이어지는 초원뿐이었다.
“넌 누구지? 누군데 내 자리에 앉아있는 거지?”
꿈꾸는 듯한 느리고 혼탁한 음성이었다. 아이처럼 칭얼대는 어조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벽에 돌출된 작은 바위에 몸을 싣고 있었다. 등 뒤는 절벽, 누가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만약 그런 공간이 있다 해도 운청산이 못 알아차렸다면 운경산과 운추산이라도 눈치 챘으리라. 더구나 이제 겨우 오시 말에 이른 시간, 혼령이 나돌아 다닐 시간도 아니었다.
운청산은 너무나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뒤로 넘어져 또 다시 추락할 뻔 했다. 사람이 아니었다. 보이는 것은 단지 흙으로 범벅된 여인의 얼굴뿐.
운청산은 정신을 차리고 여인의 얼굴을 차분히 살폈다. 한 때는 예쁘다 소리를 들었을 이목구비가 뚜렷한 중년여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등장이 신비한 만큼 눈빛이 혼탁하여 사람의 눈 같지 않았다.
“신령이십니까?”
운청산이 조금 뒤로 물러나 앉으며 묻자 여인은 흙 묻은 어깨까지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귀신도 아닌데. 그럼 난 뭐지? 난 산이다. 그래. 땅이면서 산이야. 그런데 왜 내 자리에 앉아 있어?”
운청산은 여인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한 후 그녀의 눈길을 받아 산 위를 쳐다보았다. 여인의 눈길도 따라왔다. 다시 고개를 숙인 운청산이 말했다.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그렇구나. 그런데 여긴 내 자리야.”
운청산은 조금 더 물러나서 바위 끝에 겨우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여인은 몽롱한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조금 더 절벽 밖으로 빠져나와 상반신을 드러냈다. 봉긋한 가슴이 드러나고 배꼽이 드러났다. 흙이 옷을 대신하고 있다 해도 여인의 나신을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담담한 눈빛으로 여인을 대했다.
여인은 차분한 운청산의 눈빛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너 왜 안가? 내 자린데 왜 네 자리처럼 앉아있어?”
운청산은 같은 말을 집요하게 해대는 여인에게 당황한 눈빛을 드러냈다.
“어깨를 다쳐서 잠시 쉬는 중입니다. 곧 가지요.”
운청산은 이성적인 대응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고 달래듯 말했다. 여인이 운청산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쳤어? 피 나겠네? 응! 나는구나. 그렇다면 가는 게 좋을 텐데? 피나는 사람이 싫거든. 피나는 사람은 나를, 내 산을 더럽혀. 냄새도 싫어. 왜 나를 괴롭히지? 왜 내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거지? 왜 그러는데?”
운청산은 빨리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해호까지는 오십여 장 정도밖에 안되니 나무 몇 그루 괴롭히면 충분히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청산이 막 가부좌 튼 두 발의 바깥 면에 힘주어 일어서려는 순간 여인이 몽롱한 눈을 운청산의 얼굴로 가져왔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 순간 여인은 천천히 두 손을 운청산의 어깨로 내뻗었다.
“여긴 내 자리야.”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 했다. 그때 여인의 얼굴이 찌푸려졌고 운청산은 위협을 느끼며 두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과 그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운청산은 또 다시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무심결에 당한 것이었고 보기와 달리 여인의 손바닥에는 상상 이상의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어깨는 부서진 것만 같은 격통이 일었고 운청산의 신형은 십여 장 이상이나 뒤로 밀렸다가 떨어져 내렸다.
운청산은 즉시 몸을 뒤집어 새가 활공하는 듯한 자세를 잡고 두 어깨를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의 두 손이 이해호의 물처럼 파랗게 물들었다.
사십여 장을 떨어진 운청산은 아래를 향해 계속해서 격공장을 내뻗어 하강속도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허공에서 터진 격공장으로 인해 공기가 파동치고 운청산의 전신에 와 닿았다. 그 순간 그는 손을 좌우로 뻗어 이해호 수면을 향해 황룡유회를 연달아 내쳤다.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항룡유회의 기력이 동시에 수면을 두드리는 순간 물기둥이 삼 장이나 치솟아 올랐고, 운청산은 즉시 두 발로 물기둥을 밟아 함께 떨어졌다.
운청산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이해호를 바라보았다.
“휴! 물질도 배워두어야겠구나.”
운방십계의 구계, 생사의 기로에서 태연자약할 것.
말은 간단하지만 세상에 그보다 어려운 일은 없으리라. 운청산은 오늘 두 번이나 그 말을 떠올렸었다. 최초로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가 처음이었고, 물에 빠졌을 때가 두 번째였다.
평생 수영을 해본 적이 없는 운청산이었기에,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만약 그가 흐르는 강물에 빠졌다면 쉽게 평정을 되찾지는 못했으리라.
몇 번을 허우적거린 운청산은 아예 수면에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흡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지면이 가깝다는 생각으로 차분히 잠수하고 또 물속을 걸었다.
물질을 할 줄 아는 이에게는 ‘겨우 십 장’였지만 운청산에게는 만 리처럼 느껴지던 거리였으나, 그는 결국 이해호를 벗어났다.
운청산은 이해호에서 시선을 떼고 상관 쪽을 바라보았다. 산 밑자락을 따라 사오백 장 움직이면 합류할 수 있으리라.
운청산은 두 팔을 벌리고 차분히 눈을 감았다. 순간 그의 머리에서부터 피어오른 김은 곧 전신에서 피어올랐고 그의 젖은 머리카락과 옷은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운청산은 대붕무영의 신법을 펼쳐 이해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반각도 못되어 상관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그의 눈앞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이동하고 있었다.
운청산은 속도를 줄이고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강정 일행을 찾기 위해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던 운청산은 눈앞에서 계속 뒤쳐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참혹한 결과였다. 다치고 지친 이들은 그들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통을 참으려는 신음성과 참지 못하는 울부짖음과 아예 죽여 달라는 비명이 합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 옷자락으로 잘린 팔을 감은 채 손으로 감싸 쥐고 힘겹게 걷는 사람, 다리를 잃고 업혀가는 사람, 인사불성이 되어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지천이었다.
운청산은 그들을 애써 외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쪽에서 검은 승포를 입은 이들이 보였다. 산에서 같이 행동하던 관음사의 비구니들이었다.
운청산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이정부터 찾았다. 체구가 큰 사람여서 쉽게 눈에 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때 운경산이 신호를 보냈다. 그 방향을 보니 이정이 보였다. 그가 보였다기보다는 그의 독문병기 미첨도가 보였다. 운청산은 사람들을 헤치고 이정에게로 다가갔다.
이정을 부르려던 운청산은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이정과 강정이 종길을 가운데 두어 들고 있었고, 그 옆에서 문취옥 쩔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강정이 쩔뚝거리는 문취옥을 내버려둔 채 종길을 들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작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는 뜻이리라.
“이 대협! 어찌된 것입니까?”
순간 종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귀신을 본 듯한 눈으로 운청산을 돌아보았다. 운청산은 그들의 반응을 외면한 채 앞으로 돌아가 종길부터 살폈다.
종길은 흐릿한 눈으로 운청산을 확인하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청산!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다.”
운청산은 대답하지 않고 종길의 몸을 살폈다. 어깨를 드러낸 채 상의로 배를 둘둘 말고 있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운청산이 강정에게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놈, 베었다고 방심했다가 재수 없이 눈먼 낭아도에 당했네. 도기가 아닌 도에 베어지는 바람에 크게 벌어졌어. 너무 아파해서 마혈을 짚어 두었네.”
강정은 종길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크게 벌렸다. 자상이 한 뼘 이상 된다는 뜻이리라.
운청산이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혈행이 순조롭지 못하면 상세가 악화됩니다. 아길! 아파도 참아라.”
종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청산은 강정에게 짚은 마혈을 물어보고 바로 풀어버렸다. 종길의 얼굴이 대번에 고통으로 물들었다.
“금창약은?”
운청산의 물음에 강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싸움에서 도에 직접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혈시킨 후에 그냥 감아만 두었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종길의 눈을 직시하고 웃었다.
“죽지는 않겠다. 먼저 가. 곧 따라 갈 테니까. 아! 대형, 이 대협. 너무 흔들리지 않게 하세요.”
운청산은 대답도 듣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누구도 온전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위엄을 차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 다섯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오직 빈 탁자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청의무사가 조심스럽게 막사 안으로 들어와 운녹산에게 두루마기를 건넸다. 운녹산은 두루마기를 펴서 대강을 훑고 탁자의 중앙에 펼쳐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 안의 숫자들에 집중되었다.
“끙!”
모두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현상자가 눈을 감았다 뜨고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전사자 일백구십오 명, 부상자 일백십구 명. 일단은 물러나서 전열을 정비하는 게 좋겠구려.”
그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던 신수사태마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이 입을 열었다.
“저들도 반 수 이상의 손실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지만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번 실패를 병가의 상사로 여기고 한 번만 더 치면 끝낼 수 있을 겁니다.”
당유연이 운녹산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허면 물러서지 말자는 뜻이오?”
모두가 운녹산을 주시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멸청광자, 오행마문---. 새로운 사실을 알았으니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련주의 말씀대로 일단은 퇴각하여 전열을 정비해야겠지요. 보셨듯이 사방당은 무용지물. 쓸데없이 희생만 늘였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용병들을 해체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전술 또한 재고가 필요합니다. 제가 안이했습니다. 숫자를 믿고 힘을 분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현상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모두의 판단. 그게 어디 운 가주 잘못이겠소? 어쨌든 저들이 멸청광자의 추종자들인 것을 안 이상 본파는 더 이상 힘을 아끼려 하지 않을 것이오.”
운녹산이 말을 받았다.
“오행마문과 연계된 이들입니다. 본가 또한 음양쌍대를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공명선사와 신수사태 또한 힘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자 당유연도 눈에 분노를 담아 거들었다.
“본가 또한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반드시 큰 힘이 될 것이오이다.”
현상자가 정리했다.
“허면 내일 아침 금강포구로 퇴각하도록 하지요. 신속하고도 무사히 퇴각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 운 가주께서는 선단들과 손발이 어긋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주시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모두가 일어섰다. 그때 공명선사가 물었다.
“운 가주! 용병들을 모두 정리할 생각이시오?”
아마도 이정을 떠올린 것이리라.
운녹산은 거두려던 두루마기를 다시 살피고 고개를 저었다.
“인급무사들을 해산시키고 지급무사와 정명단을 하나로 합쳐 그들만의 조직을 따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잠룡같은 이들이 섞여 있지 않습니까?”
잠룡! 공명선사는 즉시 운녹산의 말을 이해했다.
“정말 아까운 청년이었소이다. 신법으로 보아 곤륜의 청년 같았는데.”
운녹산이 다시 운청산의 그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당유연이 눈을 치떴다.
“곤륜의 청년? 무슨 말씀이시오?”
공명선사는 당유연이 놀라는 이유를 몰라 의아해하다가 동벽로에서 있었던 일의 대강을 알려주었다.
당유연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죽었단 말인가? 일이 끝나면 만나보려 했건만, 죽었어?”
“무슨 말씀이시오?”
공명선사가 묻자 당유연이 품속에서 책자를 꺼냈다. 얼마 전 운녹산이 보다만 정명당 용병들의 인명록이었다.
“이 인명록에 따르면 정명당에 속한 곤륜속가는 단 한 청년뿐이오. 우리 딸애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아 멀리서 살펴보고 데릴사위로 들일까 고민 중이었소이다. 그런데 죽다니---.”
당유연은 눈을 감았다. 눈물 그득한 당우리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 운녹산이 말했다.
“가져가도 되겠소이까?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개인적으로 보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운녹산이 책을 집으며 말하자 당유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 후 종길이 고통을 호소하다 못해 지쳐버린 때, 운청산이 잡동사니처럼 보이는 것들을 한아름 안고 막사로 돌아왔다.
운청산은 품에 안을 것을 내려놓으며 종길의 이마에 흐르는 닦아주던 강정에게 말했다.
“매듭을 푸세요.”
강정은 운청산이 들고 온 것들 가운데 마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소도를 꺼내 피에 젖은 종길의 상의를 아예 잘라버렸다. 옷자락을 좌우로 벌리니 한 뼘이 넘는 자상이 배를 가르고 있었고 그 틈도 흉측하다 할 만큼 벌어져 있었다.
운청산은 늘어져 있던 종길의 두 다리를 접었다. 순간 벌어져 있던 상처의 틈새가 줄어들었다.
“잡고 계세요.”
두 다리를 강정에게 넘긴 운청산은 종길의 입에 나무조각을 물려주었다.
“아플 거야.”
운청산은 마포 한 조각을 술에 적신 후 상처 주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으으으!
종길이 전신을 뒤틀자 이정이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강정이 다리를 단단히 잡았다. 운청산은 차분한 눈빛으로 상처를 깨끗이 닦아내고 급조한 것이 틀림없는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강정이 넘겨다보니 그 안에 허연 연고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그게 뭔가?”
“쥐의 뇌숩니다. 돼지기름이 있으면 좋겠으나 이것도 창상에는 효과가 있지요. 지혈에도 도움이 됩니다.”
“허면 쥐 잡으러 다닌다고 이리 늦었어?”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종길의 상처에 쥐의 뇌수를 두텁게 발랐다. 나무상자를 내려놓은 운청산은 반선 노인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종길의 맥을 짚었다.
그가 눈을 뜨자 강정이 급히 물었다.
“어떤가?”
“도에 여기(餘氣)가 있었던가 봅니다. 상처로 봐서는 직접적인 손상이 없지만 장부가 심하게 격탕되어 있는 듯 하군요. 못 구하는가?”
마지막 말을 홀로 중얼거리면서 운청산은 막사의 출입구를 돌아보았다. 그때 마침 나라연이 들어왔다.
“여깄어요, 청산 소협!”
나라연이 건네준 것은 바늘과 실이었다.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나 소저!”
운청산이 말하자 나라연은 고개를 저었다.
“겨우 술이나 마포 정돕니다. 덕분에 본사의 피해가 크게 줄었는데 이 정도밖에 해드리지 못하니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운청산은 다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서 바늘에 실을 꿰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파랗게 물들인 후 바늘을 문질렀다. 바늘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운청산은 바늘 끝을 다시 쓰다듬었다가 손을 뗀 후에 종길에게 말했다.
“혼혈을 짚을 거야. 죽는 거 아니다. 나, 그 약속 기억한다. 천혜원에 데려다 준다 했던---. 믿어!”
종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종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혼혈을 짚었다. 종길이 눈을 감았다.
나라연은 자신도 모르게 문취옥의 옆에 이르러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운청산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종길의 배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업했다 해도 흘러내리는 피는 어찌할 수 없었다.
겨우 한 숨을 내쉰 운청산은 다시 마포에 술을 적신 후 상처를 닦아내고 다시 쥐의 골수를 찍어 상처 위에 도포했다.
운청산은 두 손을 종길의 배에 얹고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한 참을 행한 후에 다시 한숨을 내쉬고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마포로 종길의 배를 꼼꼼하게 감싼 운청산이 뒤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괜찮겠는가?”
“선표후리(先表後裏). 일단은 표피를 치료하고 장부를 제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만, 속이 상한 것은 책 몇 권 읽은 제 실력으로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찌될 지는 저도 잘 모르겠으니 하루라도 빨리 경험 있는 의원의 조치가 있어야겠군요. 지금 갈까 합니다.”
강정이 놀라서 눈을 치떴다.
“어디를? 불일장 말인가?”
“약속했습니다. 다치면 반드시 천혜원에서 치료받게 해주겠다고.”
운청산은 말을 끝내는 순간 바로 종길을 혼혈을 풀고서 그를 들쳐 업으려 했다. 나라연이 급히 말렸다.
“안됩니다. 용병이라 하나 지금은 군율에 구속받고 있습니다. 허락도 없이 진영을 떠나면 처벌받게 됩니다.”
종길을 업은 운청산은 차분한 눈빛으로 나라연을 주시하고 말했다.
“처벌은 뒷일. 자신의 손해를 생각해서 타인의 피해를 방치하지 말라 배웠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막사 주변만 해도 부상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청산은 나라연을 말을 끊어버렸다.
“결과가 나쁜 쪽으로의 평등이 의미가 있을까요? 내가 신이 아닌 이상 그들 모두를 돌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나 소저도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의 승패가 어찌되었든 간에 장수는 전쟁이 끝나면 우선적으로 부상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있어 추후에 그 장수를 위해 칼을 쓰려 하겠습니까? 나 소저는 우리와 달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나라연이 어쩔 수 없이 길을 트는 순간 운청산은 바로 막사를 벗어났다. 나라연은 병영을 가로질러가는 운청산을 바라보다가 급히 신수사태에게로 몸을 날렸다.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이른 아침, 금사강의 물결은 금룡의 비늘이 일어나듯 금빛으로 반짝였다.
쾅!
난데없는 폭음이 일면서 잔잔한 금빛 물결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금사강은 분노의 힘으로 단번에 나룻배를 십여 장이나 떠밀어 버렸고 나룻배는 어느새 금사강의 포구 근동에 다다랐다.
“아길! 다 왔다. 조금만 참아.”
운청산은 품속을 뒤져 열 냥짜리 전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은 나룻배 뒤에서 노를 잡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삼십 대 초반의 사내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운청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뱃사공을 뒤로 하고 배가 포구에 닿기도 전에 종길을 엎은 채 허공으로 치솟았다.
운청산은 단번에 십 장을 움직여 포구에 닿았고 그 즉시 몸을 퉁겼다. 하얗게 질렸던 뱃사공은 한숨을 내쉬며 사지를 쭉 뻗어버렸다.
“푸아아아! 죽는 줄 알았다. 또 다시 칼 찬 놈을 내 배에 태우면 내가 호룡이 아비가 아니다.”
삼백 리 뱃길을 두 시진 만에 왔으니 그가 그렇게 말할 만도 하리라. 겨우 안색을 되찾은 뱃사공은 문득 생각난 듯 운청산이 건네준 전표를 확인했다.
“엉? 이-이게 얼마야? 여-열냥! 마누라, 너 죽었어! 호룡이가 도대체 누구 자식이야? 으흐흐흐.”
희열에 찬 뱃사공은 꼬깃꼬깃하던 전표를 쭉 펴서 뺨으로 가져가 비볐다.
천혜원에 들어서니 텅 빈 침상들밖에 없었다. 운청산은 조심스럽게 종길을 눕히고 마포를 벗겨 상처를 살폈다. 또 다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후우!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랬다. 운청산이라면 이백 리 길 정도는 한 시진이면 넉넉하리라. 그러나 종길을 엎은 채로 달리며 최소한으로 흔들림을 줄이려다 보니 무려 세 시진 반이나 걸려 금강포구에 이르렀다.
우선 그의 상세가 걱정된 운청산은 마을의 의원을 찾아 종길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마을 의원은 병장기로 인한 상처와 내상에는 경험이 없다면서 상처를 다시 씻기고 금창약을 바른 후에 침으로써 고통을 줄여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운청산은 급히 수소문하여 배를 찾고 밤을 도와 결국 삼백 리 뱃길을 내려왔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또 다시 두 손으로 종길의 배를 쓰다듬어 장부를 안돈시켰다. 그리고 천혜원 사람을 찾으려고 일어섰다.
“으아함! 왜 내가 여기서도 말단인 거야? 왜 나만 남겨두고 다 가는 거야? 더 자고 싶단 말이야.”
하품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운청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한 사람이 있었다. 자고나서 막 들어선 듯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당 소저!”
순간 당우리가 눈을 부릅뜨고는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앗!”
당우리는 급히 두 팔을 내리고 돌아서서 운청산을 외면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엉클어져 있는 머리카락들을 정리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눈곱을 떼기 위해 두 손을 눈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운청산이 당우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돼요.”
당우리는 놀라 소리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운청산의 출현과 그 박력에도 놀랐지만 운청산에게만큼은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봐주시오.”
운청산이 급히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안돼요. 조금만 있다가요.”
당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운청산을 외면했다. 운청산이 다시 말했다.
“아길이 다쳤소. 봐주시오.”
순간 당우리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운청산의 손끝을 보았다. 당우리는 금새 진지한 얼굴이 되어 종길에게로 다가갔다.
운청산이 종길의 맥을 잡는 당우리의 뒤에 서서 말했다.
“도에 상처 입었소. 우선 상처를 돌보고 뒤틀린 장부를 돌려놓았으나 도기에 상한 장부는 따로 처치하지 못했소.”
당우리는 종길의 맥을 놓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선표후리라. 의술에 조예가 있나요?”
당우리가 오른손으로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왼손으로 종길의 배를 눌러 상처를 살폈다.
“귀동냥 정도 했소이다. 어떻소?”
당우리가 일어섰다. 그리고 운청산을 외면한 채로 오른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옆으로 비틀어놓으며 말했다.
“보지 말고 듣기만 해야 돼요.”
“알았소.”
당우리는 그때서야 운청산의 옆얼굴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한두 달 정도 고생이야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당장 죽을 것 같겠지만, 적절한 조치가 있었던 탓에 상처 상태도 좋고 악화될 조짐도 안보이네요. 상처를 계속 살피며 내상만 다스리면 얼마 안가서 예전처럼 팔딱팔딱 뛸 거예요.”
당우리는 손가락을 빗처럼 만들어 쉬지 않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때 운청산이 말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먼저 왔으니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소. 아길을 잘 부탁하오.”
당우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가도 되는데---. 엊저녁에 돌아온다고 전서가 왔어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면 모두들 돌아올걸요. 그때부터는 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라구요.”
당우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운청산을 흘겨보았다.
‘그때면 얼굴 보기 힘들다구요, 바보!’
“그러나 내가 도울 일이 있을지 모르오. 부상자가 많소. 외상을 다루는 정도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오.”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엊저녁에 전서를 받고나서 우리 숙부님들이 약을 챙겨서 모두 강을 건넜다구요. 약만 있으면 당가 사람들은 모두 의원이에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외상처치 정도는 누구나 한다구요.”
운청산은 문득 나라연의 얼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