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윽!’
운청산은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간에서 일어난 고통이었다. 예전처럼 짧게 끝나는 둔통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미간을 찢고 나오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고통이 서서히 누그러졌다가 완전히 사라지자 운청산은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순간 운청산은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운청산은 눈을 비볐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착시(錯視)로 인한 거라 생각했건만 눈을 비벼도 눈앞에서 부유하는 한 뼘이 조금 넘는 두 인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청산으로서는 구별이 어려웠지만 바로 운경산과 운추산이었다.
운청산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고는 있지만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아침이었다. 운청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밝음 아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그들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보고도 믿지 못할 노릇이었다.
운청산은 다시 좌우를 둘러보았다. 운경산과 운추산이 은은한 빛에 감싸인 채로 그의 미간으로부터 시작되는 한 줄의 가는 실 같은 기운에 의지하여 두둥실 떠다니는 데도 강정 부부나 이정은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영혼들이 밝은 웃음을 머금고 운청산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운추산이 부유하여 운청산의 오른쪽 귀 옆으로 움직이자 운경산이 미간 앞에 홀로 섰다.
그가 분명히 무어라 말했다. 그러나 운청산은 예전과 다름없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운경산이 입 모양을 크게 하여 천천히 말했다.
‘생각해라. 우린 알아들을 수 있다.’
운청산은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시험해 보았다.
‘낮에 돌아다닐 수 있나요?’
운경산이 다시 입을 크게 벌려 입 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우린 네 덕에 신명화 되어 더 이상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운청산은 다시 생각을 떠올렸다.
‘무슨 일로 두 분만 나온 겁니까?’
운경산이 대답했다.
‘청산! 다른 건 알 필요 없다. 그저 우리가 너의 눈이요 귀라고 생각하면 그뿐. 너는 이제 안보는 것도 볼 것이고 안 들리는 것도 들으리라.’
말을 끝내고 운청산이 알아들은 것을 깨닫는 순간 운경산의 모습이 꺼지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삼십여 장 앞쪽에서 반딧불 빛만 한 크기로 나타났다.
너무 빠른 이동이어서 눈으로는 그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운경산을 놓칠 수 없었다. 운청산의 미간에서 나오는 한 줄기 실 같은 기운이 일직선으로 앞쪽을 향해 뻗어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운경산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운청산의 눈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네게서 멀어질 수 있는 한계가 삼십여 장 정도구나. 방원 삼십여 장 안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갈 수 있고 그곳에서부터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면 너 또한 원하는 순간 보고 들으리라.'
그때 운청산은 문득 귀가 간지러워 손을 올려 긁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다시 뒤통수에서 느껴지고 이어서 반대쪽 귀에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 운추산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운추산이 입을 벌려 말했다.
‘느끼는구나. 다행이다. 급한 순간에 일일이 지금처럼 너와 의사를 주고받을 수는 없을 터. 방금 같은 느낌이 들 때면 그 방향으로 반드시 위험이 따르리라. 익숙해지거라.’
운청산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느낌이 오히려 집중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운경산이 웃으며 입을 벌렸다.
‘네 능력은 우리가 가장 잘 안다. 경고는 네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와 네가 혼란스러울 때뿐이다. 그리고 네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여라. 네 뜻에 따르리라.’
운청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경산과 운추산은 운청산의 눈앞에서 사라져 그의 이마를 가로지르는 백건 위에 내려앉았다.
운청산은 참으로 난감하다는 생각을 하고나서 그것마저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당황했다. 그때 운경산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 말했다.
‘우린 서로를 떨칠 수 없는 존재들, 답답해하지 말아라. 이번 일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예전처럼 다시 네 머리 속으로 들어가 숨을 것이다. 배려할 필요도 없고 귀찮아할 필요도 없다. 그저 네 편리를 위해 이용하면 된다.’
운경산은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고 사라졌다.
아무리 신경 쓰지 말라 하여도 생각을 빤히 들여다보는 존재가 있음을 알고서는 마음 편할 턱이 없었다.
‘좋게 생각하자.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그마저도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운청산은 머리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천궁의 우상 백무강이 대전의 중앙에 자리한 입체형 지도로 다가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 움직여 지도가 놓여있는 원탁에 둘러섰다.
“궁지에 몰지 않겠다는 듯 흑강 쪽을 비워두는 것을 보니,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새낀지 모르는 모양이군.”
백무강이 중얼거리고서 동벽로를 짚으며 이어 말했다.
“이보게, 함도. 정말 괜찮겠나?”
오행신문주 백함도가 두말 않고 고개를 숙였다. 백무강이 다짐받듯 말했다.
“쉽게 여길 게 아니네. 세력으로 밀어붙일 곳이 아니니 힘깨나 쓰는 녀석들이 올 것이야.”
백함도와 그의 아내 백우련이 익히 알고 있다는 듯 자신에 찬 눈빛을 드러냈다. 백함도가 말했다.
“극현이 있는 이상, 그곳이 뚫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백무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또 다른 아이는 아직 못 찾았나?”
순간 백함도와 백우련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 번 숨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서---.”
백함도의 말에 백무강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냥 물어본 걸세. 어차피 그 아이의 힘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니 상관없네. 헌데 그렇게 통제가 안 되면 진정한 신마경에 이른 아이는 이제 금왕 뿐인가?”
백함도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셋이나 신마경을 이루었다고 흥분했었다. 그 경지는 분명히 가공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비서(秘書)에 언급된 것보다 더 컸다.
처지를 비관한 수왕신마는 단 한 번의 화려한 해일을 일으키고 자멸해 버렸다. 더욱 가관인 것은 토왕신마였다. 그녀는 세상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땅 속에서 안식을 구했다. 마음 내키며 도와주겠다는 말은 남겼지만 필요할 때 쓰지 못할 바에야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결국 지금 당장 백함도의 곁에 있는 이는 금왕신마 금극현뿐이었다.
‘차라리 내가 신마경에 도전할 요건을 갖추었더라면---.’
백함도와 백우련은 원래 천궁 예하의 십전 가운데 한곳인 오행신전의 소속으로 그 중에서도 화령기과 토왕기를 책임 맡던 사람들이었다.
청성에서의 일이 있고나서 두 사람은 사부들과 사형제 셋을 잃고는 어쩔 수 없이 오기를 모두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오기를 두루 수습한 덕에 무공의 안정을 되찾기는 했지만 원래의 기운을 극성으로 이끌 능력을 잃고 말았다.
그것까지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궁의 세력 확장을 위해 외육문의 하나로 독자적인 세력을 일군 것도 좋았고 제자들을 통하여 그가 꿈꾸던 신마경을 이룬 것도 축하받아 마땅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다. 오행신전이 생긴 이후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신마 셋을 얻었지만 그 부작용이 너무나 컸다. 각 개인들이 느끼는 고통은 차제하고 책임자인 백함도와 백우련이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힘이 있어야 권위도 서는 것. 오행신마서(五行神魔書)를 통해 극대화된 능력은 생각보다 더 커서 오행의 기운을 두루 수습한 두 사람의 능력으로도 감히 힘으로 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비연은 점창산까지 따라와 놓고도 나른한 눈빛으로 산세가 마음에 든다면서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금극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만 볼 따름이었다.
백함도는 금극현의 그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을 떠올리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금새 안정을 되찾고 자신에 차서 말했다.
“누구도 이곳까지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백무강은 웃으며 백함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무강이 좌중을 둘러보다가 천기신사에 이르러서 잠깐 시선을 멈춰 세웠다. 그러나 이내 쓴웃음을 짓고서 다시 시선을 옮겨 눈매와 콧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백의노인과 그 옆에 서있던 얼굴마저 우락부락한 근육을 연상시키는 노인을 주시했다.
천궁 예하 내오전 가운데 혈랑신전(血狼神殿)과 철혈신전(鐵血神殿)의 수장인 백낭우와 백철후가 고개를 숙였다.
백무강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그의 눈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마주보는 제자 백환도와 백영담에게서 멈춰 섰다.
“그래. 너희들도 움직여야지. 아무래도 정상 쪽이 머릿수가 제일 많을 테니 환도와 영담 너희 둘은 두 전주들을 보필하라.”
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대전의 문이 열리고 백의중년인이 뛰어 들어왔다.
“이해호 쪽으로 저들의 신호전이 올랐습니다.”
백무강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잊지 말게들! 정 힘들면 어쩔 수 없네만, 가능하면 조금만 더 힘쓰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주게. 가 보게.”
“천군께 영광을!”
수뇌부들이 모두 대전을 빠져나가고 남은 이들은 오직 두 사람, 백무강과 천기신사 뿐이었다.
백무강은 텅 빈 대전을 둘러보고서 천기신사에게 미소 지었다.
“그럼 나도 다녀오겠네.”
천기신사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백무강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곧 좌상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확인하게 될 것일세.”
백무강마저 대전을 빠져나가니 남은 이는 오직 천기신사 뿐이었다.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원탁 위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운청산은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군룡전과 노호단의 고수들이 계단은 물론 길이 없는 계단의 좌우로 넓게 퍼져 땅을 헤집고 전체를 경계하며 서두르지 않고 오르고 있었다. 그 뒤로 수뇌부들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사방당의 사람들이 수백 차례 연습한 대로 비시진의 진형을 유지한 채 따르고 있었다.
운청산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비시진이었다. 언뜻 봐서는 별 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았지만 연습 때와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확인했다. 후면에 두 사람이 늘어나 꼬리가 조금 더 길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인급무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발걸음이 가벼웠다. 최소한 조장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흠! 두 사람의 고수를 더 붙임으로써 선두와 측면을 언제든지 보강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운화인과 운종인 두 사람이 저 가운데 있을까?’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운청산의 이마에서 두 줄기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십여 장을 옆으로 뻗어나갔다. 본능적으로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운가의 금의대로 짐작되는 청년들이 포진하여 있었다.
‘역시 정명당에 있었나? 후! 그나저나 빠르기도 하군.’
두 줄기 빛은 운청산의 이마와 연결되어 있는 가는 실 같은 기운을 따라 금새 돌아왔다. 운경산과 운추산은 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운청산의 청건에 내려앉았다.
그때 당가의 암혼비영인들과 아미의 복호승 그리고 관음사의 비구니들이 좌우로 흩어져 사방당원들의 뒤를 따랐고 바로 그 뒤로 금의대와 청령검수들이 따랐다.
정명당 중에서도 운청산 등의 일백십팔 명의 용병들이 제일 끝으로 산을 올랐다.
가랑비가 그치고 산새 우는 소리도 사라지고 바람마저도 잦아들었다. 심지어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소곤거림마저도 사라졌다. 산행이 힘든 탓이 아니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적들을 경계하면서 한 발 한 발 올라가고 있는 터라 산보를 하듯 느린 행보였다. 그런데도 들려오는 것은 옆 사람의 긴장된 호흡소리와 귀보다는 머리 속에서 울리는 심장박동소리 뿐이었다.
천 개가 넘는 계단을 오른 것 같았다. 곤륜의 가파른 삼천육백 계단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계단 하나의 넓이가 반 장에 이르는 것으로써 알 수 있듯이, 완만한 경사라서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많이 온 셈이었다.
계단의 끝에 이르자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후와! 별 거 아니네.”
종길이 확 트인 시야를 통해 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이백여 장.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금까지 올라왔던 숲길과는 달리 시커멓게 그을린 땅과 바위들뿐이었다.
“어렵겠는 걸.”
이정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니 종길이 먼저 입을 놀렸다.
“뭐가 어렵다는 겁니까? 이백여 장. 위쪽 백여 장은 가파르니까 좀 힘들긴 하겠지만 어쨌든 냅다 뛰어 올라가면 금방이겠구만.”
강정이 종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휴! 이놈아! 너 같으면 뛰어 올라오게 놔두겠냐? 그나저나 놈들이 병정놀음을 할 것 같은데. 하기야 어쩔 수 없겠지. 수적으로 크게 불리하니---.”
종길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순간 운청산이 말했다.
“갈수록 좁아지니 많은 사람이 투입되면 오히려 혼란스럽겠습니다. 차라리 아길의 말처럼 고수들만 투입하여 속전으로 먼저 정상을 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종길이 어떻냐는 듯 강정을 노려보았다. 그때 이정이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네만 그것도 쉽지 않겠군.”
무슨 소린가 하여 이정의 시선을 쫓으니 산 정상에 활을 든 일백여 백의인들이 전신을 드러내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지금의 지점까지 선봉에 섰던 군룡전의 고수들 가운데 두 명의 당가 사람들과 사십여 명의 운가 사람들과 아미의 승려들이 일제히 우측으로 빠졌다.
“저들이 동벽로로 갈 모양이구먼.”
강정의 말에 종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에게? 겨우 저 정도로?”
이정이 답했다.
“적지 않네. 잔도의 폭은 반 장이 겨우 넘고 높이 또한 일 장 정도밖에 되지 않네. 맞닥뜨리면 결국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둘 정도. 서로 방해가 될 테니 실제로는 둘도 많지.”
그때 앞쪽에서 당유연과 신수사태가 먼저 몸을 날리고 그 뒤로 스무 명 가량의 당가 출신의 군룡전 고수들과 두 명의 초로비구니들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바로 명령 소리가 연이어졌다.
“청룡당 앞으로!”
녹피수갑을 낀 암혼비영인들을 선두로 세운 열여섯 조의 비시진이 앞으로 나아갔다. 백여 장을 지나면 오를 수 있는 산폭이 겨우 이십여 장에 불과한 탓에 사방당 가운데 일개 당 정도가 한계이리라.
“백호당 앞으로!”
또 다시 열여섯 조의 비시진이 청룡당을 뒤따랐다.
상대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선봉을 선 이들이 바로 군룡전의 고수들이었다. 최소 일보에 십여 장을 뛸 수 있는 능력자들이 다가오는 데도 상대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단 사십여 보만에 선두의 고수들은 백여 장을 전진했다. 신수사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녹피수갑을 낀 당가의 고수들이니 오십여 장만 더 전진한다면 당가의 암기가 산을 뒤덮으리라.
신수사태와 당유연이 가장 먼저 백여 장의 거리를 넘어섰다. 그 순간 산의 정상에 서있는 백의인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난데없는 굉음이 산을 울렸다.
우두두두두두둑!
쿠르르르르르르!
“대피하라.”
예상했던 화살비 대신에 사람만한 바윗돌들이 굴러 떨어졌다. 신수사태와 당유연 그리고 군룡전의 고수들이 산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몸을 숨길만한 바위들 뒤로 납작 엎드리는 순간, 청룡당과 백호당의 비시진 또한 흩어졌고 뒤를 따르려던 주작당과 현무당 사람들 역시 오히려 계단 아래쪽으로 물러서서 나무나 바윗돌 뒤로 숨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굴러 떨어지던 돌들이 바위에 부딪쳐 허공을 날았다. 그 순간 백여 개의 화살들이 몇 가닥으로 나뉘어 사람이 숨어있는 곳들로 집중되었다.
고수들은 쳐내고 사방당의 무사들은 목판 조각 같은 조악한 방패들로 몸을 보호했다. 산의 울음소리 사이사이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에도 군룡전의 당가고수들은 지나간 바위를 멀리 떼어놓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산이 너무 가팔랐다. 평지라면 일 보에 팔구 장 줄이는 것이 문제가 아닐 테지만 경사진 곳이라 채 삼 장을 나아가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다보면 어느새 이 장을 뒤로 물러서니 노력에 비해 성과는 미미했다.
당유연이 독려하여 앞장섰다. 삼십여 장만 더 나아가면 전신에 품은 암기들을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유연은 다시 한 번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심장에 바늘이 꽂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당유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추뢰신법(追雷身法)과 함께 당가가 당당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절기 무영비독수(無影非毒手)를 내뻗었다.
폭음이 터지고 왼쪽 소매가 길게 찢어지는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전을 스쳤다. 당유연은 연속적으로 몸을 퉁겨 계속해서 자리를 바꾼 후에 작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정상을 노려보았다.
팔십여 장!
아무리 내려다보고 쏜다 해도 직선으로 화살을 날리기에는 먼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분명히 호신강기마저 찢어놓을 위력으로 날라들었다. 당유연이 느끼기로는 이십 장 안이라면 호신강기마저 찢어발기는 당가의 무형뇌전(無形雷箭)보다도 더 강력했다.
당유연은 활에 화살을 재며 서 있는 사내를 눈여겨보았다. 새파랗게 젊은 사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강호처럼 느긋한 태도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는 눈만 빠끔히 내민 당유연에게 미소를 보내며 다시 활을 들어 겨누었다. 당유연은 급히 활이 조준하고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가 사람들 몇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화살비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몸을 숨겨!”
당유연이 소리를 치는 순간 사내도 시위를 놓았다. 당가 사람들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격공장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튀고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갈랐다. 그 뒤로 악마의 호곡성 같은 파공음이 들렸고 허공을 휘돌던 사람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당유연은 참담한 마음으로 활을 든 사내, 백영담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사내는 이미 화살을 재고 또 다시 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당유연은 어금니를 악다물고 소리쳤다.
“물러선다!”
순간 백영담은 웃으며 활을 내렸고 그때를 기하여 당가의 고수들이 일시에 몸을 날렸다. 올라오는 것이 네 배 느렸다면 내려가는 것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빨랐다. 일 보에 이십여 장을 퉁기니 백영담이 활을 들었어도 어찌하지 못했으리라.
계단이 끝나는 원래의 자리까지 물러선 당유연이 신수사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태! 이 방법으로는 희생이 너무 크겠소이다.”
신수사태도 두 말 않고 동의하고서 의견을 말했다.
“돌로 산을 쌓아 놓지 않은 이상 두세 번 이상은 굴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방당으로는 희생이 클 테니, 물러선다는 전제하에 정명당을 이끌고 두어 번 더 시도해 보지요.”
“우선 바윗돌들을 소모시키자는 말씀이시지요? 좋은 생각입니다.”
당유연이 동의한 후 바로 사방당과 정명당의 당주들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사방당의 겁먹고 지친 당원들이 썰물처럼 물러나 정명당의 뒤에 포진하고 송월자의 지휘 아래 각 파의 정예들 가운데서도 이십여 명씩이 다시 추려졌다. 나라연을 포함한 관음사의 비구니들 십여 명까지 합쳐지자 산을 올라가게 된 이들은 군룡전 사람들을 합하여 백십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호단과 천우단 그리고 운청산 등의 용병들은 또 다시 제외되었다.
강정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덤덤하게 말했다.
“사상자가 대충 사십여 명. 역시 무림인들이라 요란함에 비해서는 희생이 적은 것이겠지. 그러나 백주대낮에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역시 무모해.”
이정이 말했다.
“야음을 틈타는 것도 역시 무리요. 허! 산에 살았지만 산을 공략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었소.”
운청산도 말은 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땀을 흘렸건만 지금으로서는 비시진은 무용지물이다. 그 화살이 위력적인 건 사실이나, 나 혼자라면 산에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겠지.’
운청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저 없이 손쓰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당하는 것은 역시 그 자신. 운청산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가 아는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나라연이 있었고, 운강인과 운교인은 물론 운화인과 운종인도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유연과 그의 세 자식들도 있으리라. 당우리에게는 아비 되고 오라비들 되는 이들.
운청산은 그가 아는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
“피할 준비해! 돌 날아온다.”
쿠쿠쿠쿠쿠쿠쿵!
정상 쪽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놀란 토끼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청산 등도 조금 전에도 신세졌던 계단 근처의 바위 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강정이 문취옥의 어깨에 손을 얹어 바짝 당기고 바위 뒤에 기대어 앉았다. 그 맞은편에 나머지 사람들이 동그랗게 반원을 그린 채 쪼그리고 앉았다.
콰드드드드득! 쿵! 쿠쿵!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굴러 떨어지던 바위들이 퉁기고 퉁겨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군룡전의 고수들을 지나고 정명당원들을 지나 계단의 끝 근처로 내리꽂혔다.
“으아! 무서워라.”
땅이 먼저 울리고 굉음이 가까워지자 종길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큰 바위가 든든한 방패막이라 생각했던 바위를 넘어 곧바로 운청산 등의 머리 위를 덮쳤다.
머리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생기는 순간 종길은 눈을 찔끔 감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고 이정은 쪼그려 앉은 채로 강정이 앉은 방향으로 뒹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폭풍이 지나간 후였다.
이상하게도 이정과 종길 그리고 운청산을 단번에 압사시킬 기세로 떨어지던 그 바위가 허공에서 갑자기 방형을 바꾸어 일 장 뒤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몇 그루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강정과 문취옥이 눈을 부릅뜨고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운청산의 등을 바라보았고 이정이 의혹어린 눈빛으로 운청산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종길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살았네?”
그 순간 운청산이 다시 돌아앉으며 왼손으로 이마를 쓰다듬고서 오른손바닥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이런 방법이 있었군. 굳이 검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운청산이 홀로 중얼거리는 순간 이정이 의혹어린 눈길을 강정에게 돌려 물었다.
“어찌 된 것이오?”
강정이 운청산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앉더니 그냥 손을 번쩍 들어 바위를 받아 던져버리더군요.”
문취옥이 멍한 눈빛을 한 채 덧붙였다.
“손이 파랬어요.”
그때 운청산이 돌아앉았다. 이정이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운청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역시도 바위가 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미리 대비케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운경산과 운추산이었다. 그들이 미리 보고 있다가 운청산의 정수리를 두드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운청산은 쓴웃음을 지어보이고 말했다.
“침착했다면 이 대협 역시도 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전 다만 바위의 기세가 뻗는 곳으로 약간의 힘을 더 보탰던 것뿐이지요.”
이정이 눈을 치뜨며 반문했다.
“사량발천근?”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결과를 따지자면 운청산의 말처럼 이정 역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면서 잔뜩 긴장을 곤두세웠을 때나 가능한 일이리라. 거기에다가 상대가 조금 전과 같은 바위라면 그 떨어지는 기세를 돌이켜볼 때 비록 성공을 하였더라도 손목 부러지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이정의 판단이었다.
이정이 운청산을 불가사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외침이 들려왔다.
“돌 날아온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종길이 문취옥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정도 강정에게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운청산은 앉은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안전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지 강정 등 네 사람의 눈빛은 여유로워졌고 결국 맞은편에 앉아있는 운청산 한 사람에게만 쏠렸다. 운청산이 쑥스러워하는 순간 또 다시 한 차례 바위폭우가 쏟아졌다.
쿵!
“아야! 크으으으!”
오만상을 다 찌푸린 종길이 기대고 있던 바위로부터 머리를 떼며 두 손으로 뒤통수를 문질렀다. 거대한 바위가 방패막이가 되는 바위를 들이받고 왼쪽으로 흘렀다가 다시 굴러내려갔다.
바위폭우가 완전히 지나간 순간 문취옥이 짜증난 목소리로 종길을 밀어내며 말했다.
“야! 이제 그만 떨어져. 근데 저 자식들, 도대체 산에 얼마만큼의 바윗돌들을 쌓아 둔거야? 한이 없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 번 바위폭우가 쏟아졌고 운청산이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 떨어진 것 같군요. 산의 울림이 처음보다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굴리는 양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정과 강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윗돌 밖으로 몸을 빼냈다. 다시 계단의 끝으로 나가는 순간 군데군데서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당유연 등의 사람들도 내려와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운청산이 산의 전모를 살펴보니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당유연의 곁에 서있던 송월자가 뒤로 돌아보며 소리쳤다.
“정명당 앞으로!”
이정이 운청산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강정과 문취옥도 눈빛에 살기를 불어넣었고 종길 역시 세 차례나 큰 소리가 나도록 숨을 내쉬고 도파를 움켜쥐었다. 드디어 운청산 등도 출전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또 다른 곤륜검이 세상에 드러났으나
운청산 등이 막 창산상관을 지나 계단이 끝나는 곳에 이른 그 시간, 어둠의 도움을 받아 이해호를 건넜던 현상자와 사십여 청성의 고수들은 막바지 휴식기를 보내고 있었다.
청성의 고수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이슬 맞은 어깨를 푸는 동안, 현상자는 바위 위에 차분히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현상자의 심정은 그의 차분한 겉모습과는 달리 복잡했다.
멸청광자가 패퇴한 그 날 이후 현상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던가. 그의 두 어깨를 내리누르는 청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남몰래 흘린 눈물이 또 하나의 장강을 이루고도 남으리라. 참으로 혹독한 수련을 달게 감내했던 인고의 세월이었다.
‘하! 그러나 모자란다. 아직도 생생하지 않은가? 지금의 내 무공으로 멸청광자가 토해내는 열두 개의 장환을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 무공으로 청성산을 온통 휘감아 버린 태을검선의 검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현상자는 스스로에게 묻고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 스스로도 웬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사천무림 뿐만이 아니라 전 무림을 통틀어서도 그를 능가할 만한 검인은 별로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당대의 이야기였다. 겨우 오십 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자신감은 사라지고 말리라.
세상 사람들은 현상자를 청성검선이라 불렀다.
검선!
그것이 아무에게나 붙여주는 칭호는 아니리라. 그러나 지금껏 검선이라 불린 사람이 한두 사람에 국한 되는 것 또한 아니었다. 검을 주종으로 쓰는 대문파가 몰락하지 않는 한 적어도 두어 세대에 한 명 정도는 검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성검선! 예의에 불과하리라. 사람들이 왜 현상자 그가 유일하게 진정한 검선이라 인정하는 곤륜검선 태을 진인을 부를 때 수식을 다 떼고 일선이라 부르겠는가.
독보일선 태을 진인!
현상자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청운적하검의 끝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 당시의 광경을 떠올리면 암담해질 뿐이었다. 어쩌면 무공의 경지를 생각하면서 태을 진인을 떠올리는 것은 건방진 일일지도 모르리라. 현상자에게는 태을 진인에게 패퇴한 멸청광자를 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하리라.
‘후! 감당해낼 수 있을까? 아니야. 이젠 두렵지 않다. 실패하면 또 어떤가? 나는 모든 악조건을 딛고 당대에 사천제일세를 이룬 청성의 장문인이다. 더 이상의 진전을 보기는 어렵다 해도 본파엔 송월이 있다. 그 나이에 내가 이룬 경지를 뛰어넘은 그 녀석이라면---.’
“장문인! 신호가 떴습니다.”
굵직한 목소리에 현상자는 생각을 끊었다. 눈을 뜨고 이해호를 바라보니 붉은 기운을 내뿜는 신호전 한대가 이해호 상공을 가르고 있었다.
현상자는 신호전이 이해호에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 복잡하던 심사를 모두 털어버렸다. 그리고 내려놓은 두 자루의 검 가운데 우선 삼 척 반의 장검을 등에 메고 이 척이 조금 못되는 나머지 검을 왼쪽 허리에 찼다.
현상자는 차가운 기운을 드러내며 서른 명의 청성의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현상자의 사제인 현경자와 현청자까지 끼어 있었다. 실로 정예 중에 정예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이번 출정에 청성이 가장 많은 고수들을 참여시킨 것을 두고 남들은 청성이 사천제일세를 자랑하는 것쯤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현상자의 속내는 달랐다. 진정 점창을 점거한 이들이 멸청광자의 후예들이라면 이번에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기로 작정을 것이었다.
지난 밤, 현상자는 점창을 점거한 자들과 멸청광자와의 연관성에 대한 자신의 짐작과 속내를 청성의 고수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 까닭으로 청성의 고수들이 내비치는 눈빛은 현상자 못지않게 결의에 차 있었다.
현상자는 또 다시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천군들과 본파의 영령들이 가호하시기를---.”
현상자의 한 마디에 청성의 고수들이 원시천존을 뇌까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세.”
현상자는 바로 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르르르륵!
서른한 명의 절정고수들이 동시에 몸을 날리니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세찬물줄기 흐르는 소리 같았다. 그 기세처럼 청성의 고수들은 창두봉의 무성한 나무들과 거친 암석군 사이사이를 물 흐르듯 치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암향표와 함께 청성의 신법양절이라 할 수 있는 세류단천석(細流斷千石)의 신법이리라.
산이 가팔라지자 현상자 등은 속도를 줄이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까지 줄였다. 일이 예상과는 달리 돌아가고 있었다. 벌써 반 시진을 올라왔고 어느새 산의 중턱에 이르렀다. 점창의 본궁에 이르기까지는 겨우 이백여 장. 너무나 쉽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할 곳을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현상자가 방어하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막아내야 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지도 당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현상자는 순조로움 탓에 오히려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속도를 늦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반 각을 더 올라가니 가팔랐던 산이 한 숨 쉬어가듯이, 지친 산객들이 한 숨 돌리기 딱 좋은 암석지가 드러났다. 기암괴석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은 길이 이십여 장의 땅 끝에서 다시 숲과 경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막 암석지 초입에 들어선 현상자는 손을 들어 일행들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지친 것도 아니고 걸음을 멈출만한 별 다른 이유도 없었다. 현상자는 암석지 건너편의 숲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숲 속에서 굵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 달리 기습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어. 이곳이라면 마음껏 지닌 바를 펼쳐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기다렸을 뿐이지. 현상자가 맞나?”
숲에서 백의를 입은 흑염노인, 백무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장년인이 주축이 된 백의도객들 오십여 명이 나무들 사이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현상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백무강을 주시했다. 백무강이 숲을 완전히 벗어나 미소를 지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나보군.”
백무강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현상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막지 않으면 오히려 놀랐겠지. 그대가 점창산에 혈겁을 일으킨 무리들의 우두머리 되는가?”
백무강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눈썰미가 좋지는 않군. 자세히 보면 알만한 사람일 텐데---.”
현상자는 백무강을 더욱 세세히 살폈다. 그의 노안이 찌푸려졌다.
“역시 멸청광자와 연관이 있는가?”
순간 미소를 짓고 있던 백무강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눈에 정제된 노기를 드리웠다.
“광자라? 허허허허! 대충 상대해 주려 했는데 안 되겠군. 각오하라.”
백무강은 즉시 손을 내뻗었다. 순간 그의 허리에 있던 도가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붉은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채채채채채채챙!
백의도객들이 일제히 도를 뽑았고 청성의 고수들 역시 질세라 검을 뽑았다.
백무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사람, 현상자를 노려보다가 도기를 강화했다. 순간 그의 도에서 붉은 기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휘돌고 그것을 신호로 백의도객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현상자는 백의도객들이 뿜어내는 노을 같은 기파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적으로 불리하지만 결코 밀릴만한 세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현상자는 다시 백무강을 바라보며 두 팔을 좌우로 넓게 펼쳤다. 순간 쇄도하는 백의도객들을 노려보고 있던 청성의 고수들도 날개를 펼치듯 좌우로 흩어졌다.
현상자는 서릿발 같은 기운을 드러내며 서두르지 않고 다가오는 백무강을 향해 검결지를 지은 왼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왼쪽 허리춤에 걸려있던 이 척 검이 파란 기운을 머금은 채 백무강을 향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백무강의 얇은 백의장포가 찢어질 듯 파드득거렸다. 백무강은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는 이 척 검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붉은 기운이 반월을 그리는 순간 이 척 검이 퉁겨져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챙!
동시에 현상자의 등에서 청성의 장문지검인 태청검이 솟아올라 현상자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쉐쉐쉐쉐쉑!
태풍에 버들가지 흔들리 듯 태청검이 요동을 치는 순간 수십줄기 검영들이 백무강의 전신요혈들을 향해 날아갔다. 현상자는 동시에 검결지를 휘돌려 허공을 휘도는 이 척 검의 방향을 잡고 백무강의 배심으로 날렸다.
백무강은 검영이 일기 전부터 수십 마리 벌에 쏘인 듯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가공할 검파난첩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오히려 그 물결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꿈틀대는 움직임을 따라 휘도는 붉은 도기들이 칠십이파검의 절초 검파난첩의 검영들을 일일이 퉁겨내는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현상자의 육 장 앞에 이르러 있었다.
합!
또 다른 칠십이파검의 절초 천류직하가 백무강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 꽂히는 순간 붉은 안개 같은 기운을 뿜어내던 백무강의 도에서도 붉은 도강이 뻗어 나왔다. 백무강은 동시에 전신으로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배심을 오히려 이 척 검을 향해 내밀었다.
쾅!
천류직하와 붉은 도강이 부딪히는 순간 현상자는 뒤로 밀리면서도 검결지를 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 척 검은 백무강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가로 막혀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백무강은 충돌의 여파를 죽이기 위해 멀어지는 현상자를 바라보며 몸을 휘돌렸다. 순간 배심에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못하던 이 척 검이 그의 옷자락을 찢고 흘러 현상자에게로 되돌아왔다.
이 척 검이 현상자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검갑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십여 장으로 멀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콰콰콰콰콰콰콰!
백의와 청남색 도포가 뒤엉키고, 붉은 도기가 일면 푸른 검기가 줄기줄기 뻗었다. 수백 개의 붉은 월영을 만들어내는 패도적인 도기들이 지면을 지배한 채 허공을 노리고 있다면, 수적으로 열세인 청성고수들은 암향표에 몸을 싣고 허공을 넘나들면서 번개를 일으키듯 검기를 뿌려댔다. 누가 보아도 우열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상자와 백무강이 동시에 서로를 주시했다. 백무강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늘어뜨리고 있던 도를 현상자를 향해 내뻗었다.
“내가 수세에 몰릴 줄은 몰랐구먼. 이기어검에 칠십이파검이라? 우리가 그대 개인에겐 복이었던가? 청성이 그대 한 사람에게 들인 공이 작지 않다 하더니만, 과연!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해.”
그 순간 앞으로 내뻗어진 백무강의 도에서 붉은 기운이 현상자의 가슴 앞까지 뻗어 나왔다가 작은 구슬로 집약되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런가?”
현상자는 검을 부드럽게 내뻗어 백무강이 일으킨 도환의 아래쪽으로 휘둘렀다. 푸른 쪽빛 검기가 무지개처럼 늘어나 검이 이미 허공으로 치켜세워진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도홍이라! 청운적하검이겠지? 좋군. 그럼 가겠네.”
백무강은 현상자가 일으킨 도홍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도를 거두었다가 벼락처럼 내뻗었다. 순간 현상자의 검에서도 아지랑이 같은 푸른 기운이 노을처럼 퍼져나갔다. 양측의 최강 고수들이 그렇게 격돌한 것이었다.
현상자가 막 암석지에 이르러 백무강과 조우한 그 순간, 백함도와 백우련 그리고 금극현은 삼십여 명의 백의인들을 이끌고 이미 창두봉 동벽로의 중간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은 벽 오른쪽은 수백 장에 이르는 단애였고 그들이 서 있는 좁은 길의 폭은 겨우 반 장이 조금 넘었다. 거기에다가 세찬 바람까지 휘몰아쳐 잠깐 방심하여 중심을 일면 바로 단애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만 같았다.
“바람이 시원하군.”
백의에 적수공권인 금극현이 벼랑 끝에 두 발을 가지런히 얹어놓고 뒷짐을 진 채 이해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뒤에 서 있던 백함도는 차갑고 완강하게 느껴지는 금극현의 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백우련이 두 눈에 노화를 담아 낮게 소리쳤다.
“극현!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냐?”
금극현은 돌아서지 않았다.
“사모. 날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 내 몫은 할 것이니.”
순간 백우련의 두 눈에 맺혀있던 노화는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감히’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말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어조가 너무나 차갑고 오만방자던 것이었다. 백우련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었다.
“왜? 밀어버리고 싶소? 하고 싶으면 하시오. 내 몸뚱이가 워낙 단단해서 죽을지는 모르겠소만, 사실 어찌 되어도 상관없소이다. 후후후! 사모가 손을 쓰는 순간 끈덕지게 나를 얽어매는 이 더러운 인연의 사슬을 깨끗이 끊어버릴 수 있을 테니, 손해 보는 것은 아닐 테지요.”
백우련은 억지로 노화를 삭이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한풀 꺾인 어조로 말했다.
“강해지길 원한 이는 바로 너였다. 그리고 우린 너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이 불만이냐?”
“쯧! 그 안에 담긴 인과를 모두 알면서도 그걸 묻는 이유가 무엇이오? 스스로 고민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니 굳이 입에 담기 싫소이다.”
금극현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백함도는 손을 뻗어 백우련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백우련은 백함도의 손을 뿌리쳤다.
“네 입으로 대답해라.”
순간 금극현이 돌아섰다. 그는 금빛이 감도는 유현한 눈빛으로 백우련을 빤히 바라보았다.
“꼭 내 입으로 듣고 싶다면---. 사부와 사모는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는 우리에게 강해지기를 강요했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인데도 그것을 하도록 유도했소이다. 그 방법이 가지는 부작용과 거기에 따르는 고통을 알면서도 말이오. 그때 뭐라 했소? 부작용은 있지만 보완할 방법이 있다하지 않았소? 난 강한 인간이 되기를 원했지, 숨 한 번 크게 쉬어보지 못하는 육신만 단단한 괴물이 되기를 원치 않았소이다. 해법을 주시오. 그리만 해주면 예전처럼 두 분을 공손히 따르던 그 금극현이 되겠소.”
차분하게 말을 마친 금극현은 눈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순간 백함도는 눈을 감았고 백우련은 눈을 치떴다.
“우린 부작용이 그리 클지 몰랐다. 너도 비서를 보지 않았더냐? 물론 대책이 있다 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십 년이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지 속이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금극현은 얼굴 전체에 비웃음을 담고 다시 돌아섰다. 백우련이 다시 소리쳤다.
“극현! 천군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었어도 못했던 그 일을 네가 대신 한 것이다. 그러니 그분께 거력이 될 수 있음을 기뻐해야 하리라.”
“큭! 크크크큭! 천군이 도대체 누구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리니,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발상이구려.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면 두 분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오. 그 동안 두 분을 따랐던 것은 부모를 따르는 심정이었을 뿐. 그러나 자식을 알고도 괴물로 만든 이를 따를 만큼 우리가 바보는 아니오. 순서가 다르오이다. 적어도 천군이라는 양반에게 심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야 했소. 우리 스스로 기꺼이 희생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소. 두 분은 우리를 소모품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소. 알고 있으시오, 두 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난 미련 없이 두 분을 떠날 것이오. 쓸쓸히 죽을지언정.”
백함도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백우련마저도 노기를 거두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천군을 부정해? 그렇구나. 극현의 말대로 큰 잘못을 범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이니 그들도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힘을 키우는 것으로 모든 것이 잘 되리라 생각했던 것은 정녕 잘못이었다. 극현은 오행신문 사람일 뿐, 백라천궁의 사람은 아닌 것이야. 하지만 등 돌리겠다고 공언을 하는데도 어찌할 수 없이 눈치만 보아야 하다니---.’
백우련이 배신감과 절망감에 빠져드는 순간 꼼짝도 않고 서있던 금극현이 몸을 비틀었다.
“오는구려.”
백함도와 백우련이 동시에 앞을 바라보았다. 과연 사람들이 단애의 완만한 곡선을 돌아 다가오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금극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오직 한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금안을 번득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살아있으니 결국 만나게 되는가? 운녹산!”
금극현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십여 장 앞까지 다가간 운녹산은 미간을 좁히며 금극현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 두 눈을 부릅떴다.
“그대는?”
금극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는군. 맞네. 자네들 덕에 수하를 다 잃었던 그 금혼기주야.”
운녹산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의 심사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때의 운녹산이 아닌지라 금극현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행마문의 무리를 이곳에서 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때 금극현은 운녹산의 심정을 이해한 듯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어.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는데 그대를 다시 만나니 좀 낫군.”
운녹산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대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점창의 혈겁이 오행마문에 의해 자행된 것인가?”
금극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 것도 몰라. 막으라 하니 이 자리에 있을 뿐.”
운녹산은 굳었던 얼굴을 풀어버리고 여유를 가졌다. 그리고 금극현의 뒤쪽에 서 있는 백함도 부부를 확인하고 그 뒤로 늘어서 있는 백의인들의 기도를 살폈다.
다시 금극현을 응시한 운녹산이 말했다.
“자넨 발전이 없군.”
금극현이 금안에 광채를 더하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때도 아무 것도 모른다 했었지?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반을 돌았건만 지금도 그 대답, 여전하군.”
금극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주구(走狗)라 이 말이지? 그렇지, 뭐. 하지만 말일세. 주구라도 주인이 결코 팽(烹)할 수 없는 강한 주구라네. 보게. 여기 이 두 분! 바로 나의 사부와 사모 되신다네. 바로 오행신문? 아니 오행마문의 두 문주들 되시지. 그렇지만 보게. 지금 내 뒤에 서 계시지 않는가? 한 가지는 보장하지. 자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면 이 길은 틀림없이 열릴 것이네.”
운녹산은 내심 놀라서 백함도 부부를 다시 살폈다. 금극현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오행마문의 문주들임에도 불구하고 금극현이 계속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하도록 놓아두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당황한 기색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금극현을 뚫으면 뒤도 뚫린다는 말은 어김이 없으리라.
운녹산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길들여진 개에게도 때때로 야성을 느낄 때가 있지. 물러섬이 어떤가? 때로는 마음껏 짖고 뛰고 사냥하고 또 그것을 마음대로 먹어보는 것도 좋을 텐데? 자네로 인하여 본가가 받은 타격은 지극히 크다 할 수 있지만, 왠지 자네에게는 적개심이 일지 않아. 팽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면 먼저 주구 노릇을 그만 두는 것도 좋을 텐데?”
“이심전심인가?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나도 자네가 싫지는 않아.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 제법 사내다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순간 묘한 기운이 쌍방을 휘감았다. 운녹산 쪽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길을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느껴졌고, 반대로 백함도 부부에게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바로 그때 금극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자네를 위해 이 두 손을 쓰게 될지 모르겠어. 그러나 오늘은 아니야. 약속을 했거든. 막아주겠다고. 어떤가, 자네야 말로 지금 물러서는 게? 우리 서로 모두를 잃고 혼자만 살아남았던 인간들. 내 옛 인연을 생각해서 막지 않겠네.”
금극현은 유쾌하게 웃으며 뒷짐을 지고 있던 두 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두 손에서 반짝이는 금모래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금빛 안개를 이루었다.
운녹산은 안색을 굳히고 새삼스럽게 지형을 살폈다. 변함없이 폭은 반 장, 높이는 일 장 정도였다.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상대는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금극현, 오행마문의 문주들을 제쳐놓은 만큼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 그런데 운녹산에게는 너무나 많은 제약이 따랐다. 무기의 활용이라는 점을 따지다보니 동벽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른쪽과 위쪽이 암벽으로 가로막힌 상황에서 운녹산인들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솟구치지도 못한다. 도강을 일으켜 종횡으로 베지도 못한다. 결국 선택은 검인가?’
운녹산은 결정내린 즉시 오른손을 등이 아닌 허리로 가져갔다.
챙!
뽑혀 나온 것은 운녹산의 애도 청룡이 아닌 운가지보이며 운검정의 애검이었던 무극정이었다.
주시하고 있던 금극현이 미소를 지었다.
“호오! 도가 아닌 검인가? 바른 선택!”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운녹산과 공명선사의 뒤쪽에서 독사의 위협음 같은 미약한 파공음이 울리며 두 줄기 기운이 금극현을 향해 날아갔다.
금극현은 그 기운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금빛 안개 같던 기운들이 어느새 두 개의 작은 방패로 변하여 두 가닥 기운을 막아냈다.
째쟁!
운녹산이 살펴보니 금극현은 야릇한 웃음을 짓고 있고 두 개의 금빛 방패에는 새까만 점 같은 것이 찍혀 있었다.
금극현은 운녹산의 뒤쪽으로 시선을 주며 다시 두 손을 늘어뜨렸다. 순간 방패는 다시 금빛 안개가 되어 그의 손 주변을 떠돌았고 두 치가 조금 넘는 듯한 작은 화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뒤로 시커먼 물방울 같은 것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무형뇌전? 당가인가. 싫은 놈들이 끼어 있구만. 독이든 암기든 무조건 죽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 무인의 자긍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들. 그러면서도 강호에서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놈들.”
금극현은 말을 끝내는 순간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즉시 두 줄기 금광이 운녹산과 공명선사를 지나 녹피수갑을 낀 채 퉁소 모양의 한 자 가량 되는 철막대를 든 두 장년인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비명도 없이 두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금극현이 다시 손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물러서지?”
운녹산은 대답 대신에 뒤를 흘끔거려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데 드문드문 반짝이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운녹산은 망설였다.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무공이 파괴력까지 갖추었다. 그래도 사방이 트인 곳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제약이 심한 장소라 꺼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어느 한 곳이 성공할 때까지는 견뎌내야 하리라.
‘무극금정강기를 믿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운녹산은 금극현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금극현의 금안에 못지않은 금빛 광채가 솟아오르고 그것도 모자라 검신마저도 금광에 휩싸였다.
공명선사 등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자 백함도 부부 역시 금극현에게 여유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간다!”
운녹산의 입에서 먼저 폭갈이 터져 나왔고 그때 이미 무극정은 육 장에 이르는 검강지기를 뿜어내며 금극현에게로 나아가고 있었다.
“좋아!”
금극현도 호쾌하게 소리치며 왼손을 뻗어 금빛 방패를 만들고 오른손으로 육 장이 넘는 가는 창을 만들어 마주 다가왔다.
쿠쿵!
운녹산의 검강지기가 금빛방패를 우그러뜨리는 순간 금극현의 장창 역시 무극금정강기에 가 닿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퉁겨났고 거의 동시에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들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십여 장으로 벌어졌다.
“좋구나. 운녹산! 옛날 생각이 난다.”
금극현이 손을 털어 완전히 우그러진 방패를 금빛 안개로 바꾸었다가 다시 온전한 모양으로 만들면서 소리쳤다. 반면 운녹산의 안색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별 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평수였다. 불안했다. 아무리 무극금정강기가 기세를 느끼는 순간 겹겹이 방어벽을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자꾸 두드리면 깨지고 말리라. 그 전에 제압해야만 했다.
‘다행히 뚫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지치는지가 관건인데---. 묘수를 찾아야 해. 묘수를---. 그렇군. 저 자는 두 손을 모두 쓴다. 그러나 난---.’
운녹산은 눈을 번득이며 금극현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금극현도 기꺼운 표정을 지으며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그때가 바로 운청산 등이 정상 공략에 투입되고, 현상자가 백무강에게 검을 뽑던 그 순간이었다.
종길은 운청산의 말대로 그의 그늘 뒤에 숨어서 따라가고 있었다. 이십여 장 앞에는 신수사태와 당유연 그리고 당가의 고수들이 주축이 된 군룡전 사람들이, 그리고 그 뒤는 정명당 가운데서도 사대문파 정영들이, 그리고 그 뒤로 정명당의 천지급 용병들이 따라가니, 종길이야말로 대열의 가장 후미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장 안전한 위치를 차지한 종길이었지만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껍질이 인 입술에 수분을 공급해 보려 해도 침이 고이지 않으니 오히려 이빨로 보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제기랄! 차라리 칼을 휘두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종길은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그 시간이 사람을 가장 긴장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십 가지 생각이 교차하기 때문이었다.
막상 칼을 부딪치면 생각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살기 위해서, 죽이기 위해서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면 그뿐이었다. 전투를 행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긴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동하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단으로부터 삼십여 장을 오른 지금 종길은 겨우 입술에 침을 바르고 주변을 살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일일이 걷어내 주는 운청산이 앞에 있는 한, 칼을 부딪치는 그 순간까지는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한 탓이었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 종길은 주변을 두루 살펴보았다. 가끔씩 검은 화살이 날아올 때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어렵지 않게 나아가고 있었다. 검은 화살의 주표적이 되고 있는 군룡전의 고수들마저 별 다른 위협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속도를 줄인 탓이었다.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오르다가 검은 화살이 겨누어지는 그 순간만 빠르게 이동하여 엄폐물을 찾고 있었다. 아무리 위력적인 화살이라도 겨누어지는 순간 피하는 목표물을 맞히는 것은 어려우리라.
한 동안 주변을 둘러본 종길은 다시 운청산의 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그는 새삼스럽게 운청산의 무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화살을 제외한다면 종길이 앞장선다 해도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니, 다른 이들에게도 무리가 없으리라. 종길이 새삼스럽게 감탄한 부분은 운청산의 화살을 걷어내는 방법과 거기서 느껴지는 여유였다.
운청산의 오른쪽에서 움직이는 강정 부부의 경우, 화살을 걷어낼 때마다 도풍을 일으켜 기력을 소모시키고 있었다. 왼쪽에서 이동하는 이정의 경우는 날아오는 것들을 충분히 보고 근접하였을 때만 미첨도를 휘두르는 방식으로 도세만을 사용하고 있어서 훨씬 수월하게 보였다.
운청산의 경우는 이정보다 더 수월하게 느껴졌는데, 그는 화살이 코앞까지 날아올 때만 툭툭 건드려 흘려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화살이 상대적으로 한참이나 느리게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 자연스러움이 종길에게는 철벽이었다. 그는 오른손에 잔뜩 들어가 있던 긴장이 완전히 풀어버렸다. 도를 왼손에 옮겨 쥐고 오른손에 고인 땀을 닦아버린 후에 다시 도파를 쥐었다. 종길은 이제 자유롭게 도를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느긋한 기색을 회복했다.
당유연과 신수사태 등이 어느새 백여 장 앞까지 전진해 있었다. 운청산 등도 의외로 약한 상대의 저항에 의아해 하면서 선두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던 운청산이 문득 이채를 발하며 발밑에서 구르는 돌들을 살폈다. 그 어떤 땅도 바위도 돌도 특별난 것이 없었다. 모두가 불에 타서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이 주목한 것은 지천으로 널려있는 검은 흙덩이가 묻은 돌들이었다. 운청산은 급히 고개를 들어 전면에 펼쳐진 검은 땅을 구석구석 살폈다. 누가 보아도 별 달리 지적할만한 것이 없는 모양새였다. 풀 한 포기 없는 시커먼 땅들.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커멓게 그을린 바위들뿐이었다.
운청산이 급히 말했다.
“혹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흩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정이 이상타 여기고 물었다.
“왜? 별 다른 조짐이 있는가?”
운청산은 대답 대신에 허리를 구부려 작은 바윗돌 몇 개를 추려 집어 들었다. 왼손을 들어 날아오는 화살 한 대를 옆으로 흘리고 돌들을 보였다. 강정과 이정이 동시에 화살들을 쳐내고 돌을 확인했다.
“그것이 왜?”
문취옥에게 눈짓하여 앞을 방비케 한 강정이 물었다.
“흙이 덮인 채로 불에 탔습니다. 흙이 이렇게 힘주어 비벼야 떨어진다는 것은 돌들이 원래 땅 속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운청산의 대답에 이정 등이 동시에 전면의 땅들을 주시했다.
“과연! 한두 알이 아니군. 불을 지른 것은 단순히 풀뿌리를 태우자는 것이 아니라 뒤집은 땅의 흔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매복인가?”
강정이 긴장하여 말하자 이정이 덧붙였다.
“이상하다 했네. 상대를 코앞에 두고 사람이 너무 적은 것도 그렇지만 무기력하게 화살만 날려대는 것도 이상했지. 미끼란 소리군.”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끼라면 바위를 굴린 것도 미끼겠지요.”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흩어지지 말라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암석이 많은 지형군에서는 매복한다하면 결국 땅속을 파서 사방매복을 이루는 보통이겠지요. 복잡해지면 서로 연계하여 십면매복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매복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피해야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을 생각하고 움직이려한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강정이 날아오는 화살들을 향해 도풍을 일으킨 문취옥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 곤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피할 곳이 없다는 소리 아냐? 어쩌라고?”
“사방 아니 팔방에서 공격이 연이어진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때는---.”
이정이 말을 받았다.
“물러서지 않고 계속 나가는 수밖에 없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럴 때 효율적인 것이 바로 오행십자진(五行十字陣)이지요.”
“음, 배운 적이 있네. 허면 내가 천지사방을 두루 살펴야 하는 중원(中元) 토방(土方)을 맡겠네.”
“아닙니다. 중원은 접니다.”
말을 하면서 운청산은 이정의 미첨도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정은 그 눈길 한 번에 말뜻을 이해했다. 휘둘러야 하는 도의 제약을 깨달은 것이었다.
운청산이 말을 이었다.
“이 대협은 후방을 맡으시지요.”
“전방이 아닌 후방?”
이정이 의아한 어조로 즉시 되물었다.
“일단 매복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전방은 무탈합니다. 선두는 다르겠지만, 가뒀다 생각하면 공격의 시작되는 곳은 후방에서부터. 즉 선두가 전방에서 공격받는 순간 우리들은 후방에서 먼저 공격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사방에서 파도치듯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선 좌우방은 강 대형과 형수님이 맡으시고, 전방은 아길이 맡습니다. 모두 각자의 방위와 발밑만 신경 쓰세요. 반드시 사람일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함정 또한 조심하세요. 단 각자의 뒤쪽에서 나오는 기세에는 당황하지도 신경 쓰지도 마십시오. 십자진이 무너지기 전이라면 그건 언제나 접니다.”
운청산이 말을 마치는 순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각자의 위치로 자리를 바꾸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정과 강정은 큰 소리로 운청산의 말을 좌우로 전했다. 운청산과 이정의 식견을 이미 경험했던 용병들은 그들끼리 짝을 맞추어 엉성하나마 십자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때 폭우처럼 쏟아지던 화살들이 오직 한 곳, 정상의 팔십 여 장 앞까지 전진한 선두의 군룡전 고수들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리고 궁수들 앞으로 사람만한 철패를 든 백의도객들이 나서서 궁수들의 전면을 막아주었다. 궁수들은 오직 철패와 철패 사이의 서너 치 틈 사이로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려 군룡전 고수들의 발걸음을 지체시켰다.
“흠! 당가의 손속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군.”
군룡전 고수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면서 당연한 수순으로 정명당 사람들의 발걸음도 지체되었다. 당가 사람들이 아닌 이상 맞부딪치지 않으면 실력을 드러낼 수 없는 탓이었다.
전세를 살피던 운청산이 문득 아무런 말도 없이 굳은 어깨를 휘돌리고 있는 종길에게 말했다.
“아길! 무서워? 떠는 것 같다.”
“이 자식아. 내가 선봉인데 안 떨게 생겼어, 지금? 머지않았어, 임마. 너도 한 번만 겪어보면 지금 내 기분을 알게 될 거야.”
운청산은 긴장을 풀려는 듯 수차례 도를 세차게 휘둘러보는 종길에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잊지 마라. 뒤에서 나오는 기세는 나다. 앞만 살펴. 싸운다는 생각보다는 흘려보낸다는 생각으로 지체하지 말고 앞으로만 달려라.”
“알았어. 내 뒤에는 청산 네가 있다는 말이지? 부탁해.”
그 순간 선두에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던 당유연이 두 손을 교차하여 넓은 장포 속으로 넣었다. 순간 그와 함께 선두대열에 있던 당가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품속으로 녹색 손을 숨겼다가 다시 빼내고 두 손을 늘어뜨렸다.
이제 정상과의 거리는 육십여 장. 당유연은 또 다시 화살을 재는 백영담을 주시하면서 서서히 초록빛 오른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운교인은 긴장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긴장감은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몸과 몸이 뒤엉키게 될 시간이 임박한 까닭이 아니었다. 눈 돌려 십여 장. 그곳에 나라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피투성이 되는 영상이 자꾸만 떠올라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운가가 이룬 대열을 이탈하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올라가며 지켜주고 싶었다. 운교인은 당명인이 그녀의 곁에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실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교인은 십 장 앞쪽에 선 당유연의 손이 허공으로 올리려는 순간 다시 나라연을 바라보았다.
먼지 묻은 검은 장포에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검은 장창을 들고 있어도 그 모습은 결코 강하게 와 닿지 않았다. 산들바람에도 휘청거릴 것처럼 한없이 여리게만 느껴졌다. 당장 달려가서 이마에 맺힌 땀방울부터 닦아주고 싶었다.
얼마나 가슴 사무치도록 그리웠던가. 불일장에서도 동서로 갈라져 자주 보지 못했었다. 먼발치에서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이제야 겨우 두어 번 몸을 날리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가지 못하니 차라리 보지 않은 것만 못했다.
운교인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뭐해! 정신 차려!”
동료 중에 누군가가 운교인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 충격이면 누구라도 정신을 차릴 것인데 운교인은 여전히 나라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발을 더 내딛는 순간, 운교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안돼!”
운교인은 나라연의 바로 밑에서 솟구쳐 오르는 흙더미를 보고서 바로 땅을 박찼다. 바로 그 순간 방금 전 그가 내딛으려던 그 자리에서도 흙더미가 치솟더니 날카로운 도 한 자루가 솟아올랐다.
그 순간 운교인의 시간이 세상의 그것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운교인은 허공에 정지된 채로 나라연을 베려는 도객을 보고 또 방금 자신의 자리에서 솟구친 도객이 그의 등을 치고 갔던 동료의 목을 향해 도를 휘두르는 것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운교인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있는 나라연을 구하러 가야 할지, 지금 당장 도울 수 있는 동료를 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의 시간이 돌아왔다. 운교인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리던 방향으로 내려앉았다. 나라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창을 휘돌려 상대의 도기를 퉁겨버리는 순간, 동료의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운교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그의 발밑에서 또 다른 흙더미가 튀어 오르고 연이어 사방에서 도객들이 솟구쳐 올랐다.
“큭!”
불의의 기습을 왼팔로 퉁겨낸 운교인은 그 자리에서 휘돌아 상대를 베어버렸다. 그 순간 그의 오른쪽 발바닥 밑에서 예기가 솟구쳤다.
“컥!”
운교인은 극렬한 통증을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왼팔과 오른쪽 발바닥에서 동시에 피 흘리며 땅에 내려선 운교인은 왼발에 공력을 실어 세차게 바닥을 찍었다. 솟구쳐 오르려던 예기는 사라지고 땅이 내려앉았다.
땅이 꺼져 탄력을 받을 수 없자 운교인은 검으로 바닥을 찍어 앞으로 뒹굴었다. 그의 신형은 나라연에게 다가가기는커녕 관음사 비구니들의 꽁무니로 처졌다.
운교인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도기를 피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나라연을 돌아보며 자신도 모르게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운교인은 나라연에게 몸을 날리기도 전에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신음하며 자세를 허물고 말았다. 그때 그의 위쪽에서 튀어 오른 백의도객이 도를 휘돌렸다. 도가 꿈틀대는 순간 도기는 이미 그의 등에 이르러 있었다. 자세를 잡지 못한 채 등을 내보이고 있던 운교인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예리한 경풍이 스쳐지나가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오던 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운교인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옆을 스쳐가고 그 다음 사람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운교인은 그를 일으켜 세운 사람을 확인하고 눈을 치떴다.
“너는?”
그러나 상대는 그를 일별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부축한 채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걸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