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79)

그러나 이미 늦은 외침이었다. 뛰어가던 당우리는 아예 경신술까지 펼쳐 운청산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이봐요, 당신!”

씻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운청산과 당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동시에 눈을 치떴다.

당우리가 낮게 소리쳤다.

“앗! 내 한 곡!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거의 동시에 운청산의 오른손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우리의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당우리는 그 손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살을 찌푸렸다. 운청산은 그때서야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운청산은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당우리의 눈가에 미소가 감돌면서 보조개가 깊어져가자 운청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가슴 떨림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뺐다. 들키면 어찌 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했을 따름이었다.

당우리도 정신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이 왜 운청산의 앞까지 이르렀는지를 잊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우리는 운청산이 물러난 만큼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빚진 거 갚을 거죠?”

운청산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과 당우리를 주시하는 종길 등의 눈길을 의식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저게 물이야? 땀이야?”

종길의 말과 손가락질에 따라 모두가 운청산의 관자놀이를 보았다. 운청산은 종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아길 차례지?”

종길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하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고 당우리의 미소도 만면으로 번졌다.

나라연은 방구석에 쌍연창을 세워두고 털썩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머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오므리고 무릎 위에 두 팔꿈치를 대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후우!”

힘들었다. 더위와 상대하는 일이야 남들과 다를 바 없으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자매가 되는 관음사의 비구니들을 상대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본산이 습격당하는 험한 꼴을 당해놓고도 막상 창을 들어 비무를 할 때면 마음 속 독심이 사라지고 손끝도 물러졌다. 홀로 무공을 펼쳐보라 하면 자신만큼이나 능숙하다가도 상대가 있으면 움츠러드니, 나라연은 어쩔 수 없이 독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혹독하게 몰아쳤다. 바닥을 나뒹굴게 만들고 퍼렇게 멍들게 만들었다. 사자, 사매들을 한 번 후려칠 때마다 나라연의 가슴도 퍼렇게 멍이 들지만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금처럼 힘들지 않으리라.

진정으로 견디기 힘든 것은 변하지 않는 사자, 사매들의 마음가짐이었다.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작정을 하고 나섰지만, 사자, 사매들은 멍이 들고 부어올라도 그 순간이 지나면 입가에 보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라연은 오늘 끝내 불같이 화를 토하고 말았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바보 같다고, 마음이 여리고 손끝이 무르니 죽지 말아야 했을 사자, 사매들이 그토록 많이 죽었다고.

사자, 사매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아무리 막 대해도 미소를 짓던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불호를 외웠었다. 그 무거운 불호소리들이 둔기가 되어 나라연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러나 나라연은 여전히 독한 눈빛을 유지하고 그들로부터 멀어져 방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라연은 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두 손으로 훔쳐내고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직 멀었어. 더 가혹하게 대해야 돼. 내가 나찰이 되어야지 하나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나라연은 눈을 부릅떠 흘러내리는 눈물을 끊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쌍연창을 집어 창날을 숨기고 쌍단봉으로 분리해 벽에 걸린 검은 보퉁이에 챙겨 넣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나라연은 소매를 들어 다시 눈가를 훔치고 나서 억지로 웃음 지으며 돌아섰다.

“밥 먹었니?”

당우리는 아직 붉은 나라연의 두 눈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왜 울었어?”

“울기는 누가 울었다 그래? 피곤해서 하품을 심하게 했더니만---.”

당우리는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붙이고 나라연을 살피다가 왼쪽 눈을 실같이 뜨고 말했다.

“거짓말!”

“진짜야. 내가 울 일이 뭐가 있니? 그만 좀 떨어져. 덥다.”

당우리는 나라연의 웃는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러섰다.

“좋아. 일단 속아 넘어가줄게. 대신에 같이 가자.”

나라연은 마음이 환해지도록 밝게 웃음 짓는 당우리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가자니? 어딜?”

“빚 받으러.”

당우리는 나라연의 손목을 붙잡고 막무가내로 끌었다.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할 나라연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못이기는 척 하고 끌려 나갔다. 아무리 엄하게 대하려 해도 당우리의 순진무구함 앞에서는 통하지 않을뿐더러, 그녀와 함께 있으면 울적한 심사가 조금이라도 풀릴지 모른다는 기대를 한 탓이기도 했다.

“끄윽!”

종길은 어깨가 부서지는 충격을 받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도를 바닥에 놓고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주무르다가 결국은 주먹을 쥐어 바닥을 후려쳤다.

“제기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흘 전에도 십여 차례 이상 강타 당한 곳이 바로 왼쪽 어깨였다. 전신을 우스꽝스럽게 물들인 붉은 반점 열일곱 군데 가운데서도 가장 흉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종길 그가 무엇을 했던가. 심하게 격타 당했던 곳과 병기에 맞으면 치명적일 수밖에 곳 여덟 군데를 방어할 방법에 골몰했었다. 그런데도 왼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 그리고 등심은 결국 방어해내지 못하고 오늘도 수차례씩이나 격타당하고 말았다.

무공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만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운청산이 아무리 초식을 꿰뚫어 본다지만 공격 시에는 거의 공력을 수반하지 않았다. 기세도 줄고 속도도 줄어들었으리라. 그런데도 막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허점보완에 실패했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하자. 뚫리는 곳은 결국 뚫릴 수밖에 없어.”

운청산은 무정하게도 종길의 생각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젠장!”

종길은 엎드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흘 만에 다섯 곳이라---. 나쁘지 않아. 바보 소린 면할 것 같은데?”

운청산의 웃음기 어린 말이 들리는 순간 땅에 머리를 박고 있던 종길이 고개를 들었다.

“바보? 이 자식이?”

종길이 벌떡 일어났다.

“아야야야야!”

그러나 달려들지도 못하고 다시 어깨를 잡은 채 몸을 움츠렸다. 운청산은 문득 태악도인의 냉랭한 얼굴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난 하루가 멀다 하고 바보소리 듣고 살았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

태악도인의 평가의 기준은 달랐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정말?”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운청산은 종길에게서 눈을 떼고 떨어져서 앉아있는 강정 등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 아직 괜찮습니다만.”

강정이 자신의 몸을 살피고 문취옥을 바라보며 먼저 고개를 젓자 문취옥도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 저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우린 내일 할래.”

강정과 문취옥의 눈치를 살피던 이정이 미첨도를 집었다.

“그럼 내가---.”

일어서려던 이정이 문득 불일장 쪽을 바라보며 미첨도를 놓았다.

“나도 내일 해야 할 것 같군.”

모두가 이정의 시선을 쫓았다. 두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 어제 그 두 아가씨들이네?”

문취옥이 반색했다. 늘 남자들 속에서 지내다가 친근하게 구는 여자들을 보니 차가운 성정만 드러내던 그녀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강정과 이정도 묘한 눈빛으로 여인들과 운청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라연을 발견한 종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헤벌쭉 입을 벌렸다.

그러나 가장 희한한 반응을 보인 이는 역시 운청산이었다. 당우리에 대한 마음은 운청산으로서는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데도 불구하고 벌렁거리는 가슴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때, 당우리는 이미 그 귀여운 얼굴을 운청산의 코앞까지 가져왔다.

운청산은 당우리의 요청에 따라 두 곡의 소곡으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강정과 문취옥이 시원해졌다면서 잠 잘 오겠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사람들 역시 저마다의 이유를 대며 연이어 자리를 떴다. 달빛 아래 앉아있는 사람은 오직 둘, 운청산과 당우리 뿐이었다.

운청산은 아무 말도 못하고 금사강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너무나 당황해서 완전히 굳어있었다. 손가락 끝 마디까지 딱딱하게 굳어있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붉게 달아올라 있으리라.

운청산은 싫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견디기 힘든 압박감을 결국 감당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금새 외면하고 말았다. 당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압박감의 정체는 바로 당우리의 시선이었으리라.

운청산은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 곧잘 하는 일이었다. 눈으로 사람을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말로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우리만큼은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말을 하시오, 당 소저.’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콩콩대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쿵쿵거리더니 나중에는 아예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후! 차라리 아길이 갈 때 같이 내려갈 걸.’

운청산이 내심 후회하는 순간 당우리가 몸을 비틀어 운청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운청산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보았다. 운청산은 땀 냄새와 은은한 진피 향내를 동시에 맡았다.

“무- 무엇이오?”

운청산이 더듬어 묻자 당우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산 소협! 당신은 이상해요.”

당우리의 숨결이 얼굴에 와 닿았다. 숨을 들이마셔 그대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운청산은 스스로의 생각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좋은 느낌인데 의미를 알 수 없는 죄의식이 느껴진 탓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좋은 느낌이었다. 마냥 같이 있고픈 친숙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런가? 분명히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한 이 느낌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운청산은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뒤로 빼내어 당우리의 숨결로부터 멀어졌다.

“뭐-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당우리는 아예 운청산 앞으로 기어와 운청산이 멀어진 만큼 얼굴을 가져다 붙이며 그의 눈을 직시했다.

“그 눈이요. 깊고 슬퍼요. 얼굴은 웃어도 눈은 울어요.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지요? 젊은 사람의 눈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열정과 야망으로 불타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백년 묵은 도사 할아버지와 어미 잃은 사슴의 눈을 동시에 하고 있는 거지요? 아! 근데 지금은 아니다. 흔들리네. 어쨌든 이상해요.”

“모르겠소. 산에서 자라서 그런가?”

당우리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이채를 발하며 물었다.

“근데 그 눈, 왜 안 변했지요? 나 언니를 보면 남자들 눈은 다 변하던데---. 우리 오빠도 변했어요. 안 변해서 안심하긴 했는데, 왜 그렇죠?  나 언니, 정말 예쁘잖아요? 왜 나 언니가 아니라 지금 나를 보고 우리 오빠처럼 눈동자가 흔들리나요? 처음에는 소를 기막히게 잘 부는 착한 청년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근데 왜 그런 눈을 해가지고 생각나게 만들지요?”

당우리의 말과 숨결에 밀린 운청산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조금 더 물러서면 눕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은 숨을 꾹 참고 안간힘을 다해 어설프게 땅을 받히고 있던 두 팔을 조금씩 폈다. 운청산의 얼굴이 당우리의 얼굴로 다가갔다. 어떻게든 다가가면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치켜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운청산은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당우리의 이마와 운청산의 이마가 부딪쳤다. 순간 당우리가 눈을 뜨고 위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운청산을 노려보았다.

“바보!”

당우리는 샐쭉한 얼굴을 뒤로 물리고 원래 그녀가 앉아있던 곳으로 옮겨가 벌렁 누워버렸다.

“후우우우우우우우!”

운청산은 그때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누워있던 당우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운청산은 바로 앉으며 금사강을 내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어린 줄 알고 그냥 귀엽다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생각해보니 본 적도 없는데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져서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내가 왜 바보요?”

운청산이 고개를 비틀어 당우리를 내려보았다. 순간 당우리는 찡그린 얼굴로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몰라요. 바보!”

다시 바보 소리를 듣자 운청산은 입을 다물고 금사강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바스러지는 물결들이 말 그대로 금빛 모래처럼 느껴졌다. 운청산이 말없이 앉아만 있자 당우리가 또 다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꿈이 뭐예요? 뭐가 되고 싶어요? 슬픈 도사 눈빛을 하고 왜 사천무림련에 들어왔죠?”

종길에게서 들었던 질문이었다. 대답하지 못했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당우리가 물으니 반드시 답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대답하려 해도 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운청산은 대답 대신에 오히려 반문했다.

“꿈이란 것이 꼭 있어야 하오?”

당우리가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다시 무릎으로 걸어 운청산의 앞으로 뽀르르 기어왔다.

“그럼요. 꿈이 없는 삶은 재미없잖아요? 자신만의 꿈을 좇아 맹렬히 달려가는 모습은 그 꿈의 대소나 성취여부를 불문하고 아름다워요. 멋있다구요. 아! 그렇구나. 곤륜에서 살았지. 무위이화란 말인가요? 그것도 아닌데? 사천무림련에 투신했으니---.”

당우리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청산은 당우리의 의문어린 시선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당 소저의 꿈은 무엇이오?”

당우리가 웃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다 고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 엄마처럼 현모양처. 둘 다 되기 힘들다 그러든데 어쨌든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운청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당우리는 그의 눈동자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자 가슴 한쪽에서 일어나는 실망감을 맛보았다. 그 실망감은 곧 당우리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볼을 부어터지게 만들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운청산은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아니 볼을 쓰다듬고 입술을 만지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땅에서 떼었다. 그때 당우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당우리는 운청산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갑자기 머리를 디밀었다. 운청산은 무의식적으로 당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앗! 또 한 곡!”

당우리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치자 운청산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미소 지었다. 그가 만지고 싶었던 것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퉁퉁 부어오른 당우리의 볼이었지만 머리를 만진 것만으로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우리가 다시 운청산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전에 객잔 앞에서 불어줬던 그--- 맞다. 화월교유. 그거 부탁해요.”

운청산은 군소리 없이 옥소를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라리 옥소를 불어주는 것이 낫다 생각하며.

옥소소리가 달빛에 편승하여 당우리의 전신을 쓰다듬자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달빛과 금사강 그리고 당우리가 함께 있는 포근한 밤이었다.

운청산은 화월교유를 끝내고 당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실소했다. 쌔근거리는 그녀의 호흡은 차분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운청산은 그 후로 두 시진 동안이나 당우리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된 채로.

이른 새벽부터 불일장 내부로 불려갔던 벽송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해야 하겠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긍하지 못하겠지? 이해해주지 않으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벽송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그의 눈앞에서 선연한 핏줄기가 튀어 올랐고 벽송은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 그는 해야만 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벽송은 벽상검을 집어 들면서 벽운에게 명했다.

“모두에게 옆방으로 모이라 일러라.”

벽운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벽송은 착잡한 눈빛으로 벽운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벽인에게 말했다.

“들고 오너라.”

무엇을 들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벽인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궁과 시갑을 걸치고 검을 멘 후에 방구석에 놓여있는 보자기를 들었다.

방을 나서려던 벽송은 문득 벽인이 사선으로 멘 대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 있는 한 가지에만 매달리라고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인은 전에 다루지도 않았던 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벽인은 간단히 대답했다. 대사형의 복수는 반드시 궁으로 하겠다고.

그 궁사가 어떠한 사람이던가. 원수지만 후예를 방불케 하는 신궁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같은 궁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리라.

그러나 벽송은 차마 장문인의 권위를 내세워 포기시킬 수가 없었다. 대사형 벽령에 대한 벽인의 존경심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벽송은 먼저 나가기를 채근하는 벽인의 눈길을 느끼고서 대궁에서 시선을 떼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다섯 명이 자는 방에 열여섯의 점창제자들이 문을 향해 앉아있었다.

벽송은 문을 등지고 앉으며 말했다.

“벽운과 벽현은 앞으로 나오너라.”

벽운과 그보다 두어 살 더 먹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젊은 도사 벽현이 뒤쪽에서 앞으로 나와 벽송의 앞에 무릎 꿇었다.

벽송은 옆에 내려놓았던 벽상검을 무릎 위로 올리고 말했다.

“왼손을 내밀어라.”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벽송이 벽상검의 권위를 내세운 탓에 묻지 않고 명에 따랐다.

쳉!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피가 튀고 두 개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벽운과 벽현은 자신들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고통을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피를 뒤집어 쓴 벽송을 바라보았다.

놀란 사람은 두 사람 뿐이 아니었다. 벽인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장문인! 왜?”

모두가 부르짖어도 벽송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벽운과 벽현을 향해 말했다.

“지혈하라.”

고통에 물든 얼굴로 벽송을 보던 두 사람이 급히 혈맥을 짚어 지혈했다. 벽인이 급히 나서서 이미 준비하고 있던 면포로 두 손을 감싸주었다.

모두가 벽송을 주시하는 동안 벽송은 그 눈빛들을 외면하며 벽인에게 말했다.

“넘겨주어라.”

벽인이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던 보자기를 벽운의 옆에 내려놓았다. 벽운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열여덟 권의 무급들. 그 가운데 한 권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깨달은 것이 있을 때면 그때마다 깨알같이 주석을 달았던 그 무급이 그 가운데 있었다.

벽송은 다시 벽운에게 명했다.

“내 검을 다오.”

벽운은 놀란 얼굴로 벽송을 보았다.

내 검! 그랬다. 벽운 그가 지니고 있는 검의 원주인은 벽송이었다. 벽령에게 자신의 검을 주고 대신 받은 벽상검을 건네면서 받았던 그 검!

벽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싫습니다. 드릴 수 없습니다.”

벽송은 그 한 마디로 벽운이 자신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오.”

벽운은 계속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벽상검! 그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었다. 스승 창현진인이 그랬고, 대사형 벽령 또한 죽었다.

“장문인의 명이다. 검을 다오.”

벽운은 고통으로 인하여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벽송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검을 풀어 건넸다. 벽송은 검을 등에 메고 면포로 벽상검의 혈흔을 닦은 후에 검갑에 넣고 보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벽운, 너는 오늘부터 점창의 정신이다. 벽현, 너는 점창의 육신이니라. 하나의 손이 둘이 되어 온전한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여 정신과 육체를 갈고닦아라. 그리고 능히 대점창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순간에만 점창산에 올라라. 벽상검의 권위는 오직 그때에만 되살아나리라.”

벽운과 벽현은 그때서야 진실로 벽송이 자신들의 손을 자른 이유를 깨달았다. 죽으러 가는 자들에 대한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또 남겨진 자들이 진정으로 역경을 넘어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했으리라.

두 사람의 눈이 붉어졌다. 펑펑 울고 싶었다. 소리 내어 통곡하고 싶었다. 그러나 울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벽송은 두 사람의 붉어진 얼굴을 직시하며 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운방을 찾아가라. 오늘을 위해 운방주 사공척을 돌려보낸 것이니 믿고 의지하라. 점창산에 오르는 그날까지 너희들의 편리를 보아줄 것이다.”

벽운은 절로 떨어지려는 머리를 억지로 세우고 벽송을 노려보았다. 적의를 담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울지 않으려 노력한 것뿐이었다.

“사형께서 이리 만드셨으니 따라가면 짐만 될 뿐. 저희 두 사람은 시키는 대로 할 것입니다. 참고 또 참고, 수련하고 또 수련하여 되찾은 점창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벽상검은 사형이 돌아오실 때까지 맡고만 있겠습니다.”

살아 돌아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점창산을 되찾으러 가는 길인데 어찌 점창의 제자들이 몸을 사릴 수 있겠는가. 몇 남지 않았으니 명맥을 보존하라며 동정하고 배려해준다 해도 그들의 설 자리는 오직 선봉뿐이었다.

벽송은 입가에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억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자른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제들이 기꺼이 이해해 준 것만으로 기뻤다. 그런데 그 두 쌍의 눈에 꺾이지 않는 의지가 엿보이니 이제 안심하고 싸움에 임할 수 있으리라.

벽송은 뭉클한 가슴을 짓누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문을 연 벽송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는 대로 도강한다 했다. 준비하라.”

점창의 제자들이 벽송의 등에 대고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장문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인간 벽송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의미였다.

벽송! 마음씨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 그러나 그 만큼 유약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대사형 벽령에게서 벽송에게로 벽상검이 넘어가는 순간, 다른 이들로서는 내심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벽송을 좋아하지만 난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벽송은 자신을 이기고 결사의 길에 이른 지금의 시점까지 모두를 잘 이끌어 왔다. 더구나 그의 성정으로 벽운과 벽현의 손을 자른 것은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점창의 제자들은 이제 기꺼이 본산의 수복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선착장 근방이 온통 파란 물결로 넘실거렸다. 질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 청의무복 차림의 사천무림련 무사들이 배를 타기 위해 줄지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더워 죽겠네. 이런 걸 꼭 입어야 하나?”

종길이 운청산을 따라 배의 상판 위로 올라섰다.

“어이! 밀지 마! 빨리 가면 상 준데? 천천히들 하자구!”

지금 아니면 언제 하냐는 식으로 마음껏 운청산을 밀친 종길은 느긋하게 배 위로 올라가는 여유를 부렸다.

배는 이미 만원이었다. 떠밀려 화물칸으로 들어간 사람들로부터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갑판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판의 중앙에 사십칠 명의 광명사 비구니들이 정좌하여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같은 정명당에 속하면서도 잘 보지 못했던 아미 복호승들 십여 명이 천지급 무사들과 함께 서있었다. 대충 세어도 칠팔십은 되니 화물칸으로 들어간 사람들까지 합하면 일백 삼십여 명 이상이 되리라.

명백히 정원초과였다. 만약 스물 댓 명만 더 태운다면 선부들이 움직일 공간조차 없을 것 같았다.

“어이! 이거 너무 하는군. 우리 사람이야. 짐짝이 아니라구. 이러다가 배 뒤집어지면 어쩌려구 이래?”

종길이 소리치는 순간 선미에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태워!”

배에 잇대어진 상판 앞에 있던 선부가 그 말에 따라 배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막고 나서 선착장으로 상판을 밀어버렸다.

그때 체구가 작아서 허리에 찬 도가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사십 대 중반의 장년인이 선타를 잡으며 소리쳤다.

“돛을 중단으로.”

그 한 마디가 들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와 선부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오면서 돛이 올라갔다.

배가 서서히 강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선수가 돌아가는 순간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금사강과 장강을 따라 사천 남부를 떠도는 모든 배들이 동시에 동원된 것만 같았다.

종길이 타고 있는 용문비선 삼호뿐만이 아니라 용문수로표국의 용문비선 다섯 척이 모두 동원되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후와! 대단하군. 저게 전부 몇 척이야?”

종길은 고개를 가로젓고 운청산을 찾았다. 운청산은 강정 부부와 함께 배의 우측 난간에 붙어서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던 종길이 그 곁에 서있는 또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헤벌쭉 웃으며 입을 벌렸다.

기억하는 한, 평생 처음으로 배를 탄 운청산은 물결에 따라 율동하는 배의 움직임을 신기하게 여기며 강정부부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나라연이었다.

나라연과 눈이 마주친 운청산은 가볍게 목례했다. 나라연도 실낱같은 미소를 보이며 자신과 강정 사이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덕분에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습니다.”

운청산은 나라연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외면하며 선착장 쪽을 바라보았다.

종길의 불만어린 목소리가 들린 후 돛이 오르고 배가 선착장을 떠났다.

일 장 또 일 장.

점차 멀어져가는 선착장을 바라보던 운청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당우리였다. 그녀가 강변을 따라 달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운청산은 당우리가 도대체 누구를 향해 손을 흔드는지 몰라 좌우를 둘러보았다. 나라연이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좌측에 서있던 강정부부는 물론 당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정명당 사람들마저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운청산은 어색하게 가슴으로 손을 올려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호호! 그렇게 해서 보이겠어요?”

나라연이 보기 드물게 이빨이 드러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운청산의 목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오르는 순간, 당우리가 손을 흔드는 대신 피리 부는 시늉을 해보이인 후 크게 원을 그렸다.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다음번에는 더 많이 들려달라는 소리이리라.

나라연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풋! 조게 아예 대놓고---. 처음엔 저를 배웅하는 줄 알았는데, 청산 공자에게 인사하는 게 분명하군요.”

운청산은 쑥스러운 가운데서도 용기를 내어 손을 들어 크게 흔들다가 품속에서 옥소를 꺼내 당우리에게 던졌다.

옥소는 휘돌지도 않고 십여 장을 날아가 당우리가 받기 쉽게 사선으로 떨어졌다. 옥소를 손쉽게 받은 당우리는 두 손으로 매만지다가 가슴에 품는 시늉을 하고 다시 두 손을 입 앞에 모아 소리쳤다.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순간 평소에 인사 정도 하며 지내던 정명당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카! 이젠 정표까지 주는구나. 좋겠다, 청산! 부럽구나.”

종길이 다른 사람처럼 어깨를 치고서 운청산과 강정 사이로 끼어들었다. 종길은 운청산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고개를 돌려 운청산의 얼굴을 살폈다. 운청산은 아예 말을 듣지도 못한 듯 점점 멀어지는 당우리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종길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부럽다는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육체적 경험을 따진다면 운청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단 한 번도 여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상대한 여인들은 모두 돈을 주고 산 욕정의 배설구였을 따름이었다.

‘나는 왜 사랑을 꿈꾸지 않았을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항상 강정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도 사랑과 혼인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두 사람이 애초에 완성되어 있었고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제 샌님 같은 운청산에게 당우리라는 여인이 나타나자 종길도 문득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리라.

‘아닌가?’

종길은 문득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여인을 훔쳐보았다. 차갑고 고귀하게 느껴지는 여인, 나라연은 실수로라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종길은 고개를 내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나라연의 체취를 맡을 수 없었다. 바람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딱 좋은 동풍, 그러나 나라연은 종길에게 먼저 닿은 바람을 맞을 위치에 서있었다.

비릿한 물 냄새만 맡고만 종길은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그때 운청산이 물었다.

“꿈을 꾸면 반드시 이루어질까?”

“응? 으응. 반드시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황당한 꿈도 있으니까.”

그때 문득 종길의 눈이 나라연의 옆얼굴에 닿았다가 운청산에게로 옮겨졌다. 종길은 자신이 왜 하필 그때 나라연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운청산이 다시 말했다.

“내 꿈은 황당한 것일까?”

“이놈아! 꿈이 무엇인지부터 말해야 대답을 해주지.”

종길이 쓸쓸하던 눈빛을 황당함으로 채우는데도 운청산은 대답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는 점이 되어버린 당우리를 바라보았다.

‘꿈이 뭐냐고 했었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지?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으냐고 그랬지? 나 이제 꿈을 꿔보고 싶다. 그녀를 향한 이 감정이 무언지 정확히는 말 못하겠지만 어쨌든 사라지지 않는 꿈을 꿔보고 싶어.’

운청산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종길의 얼굴을 쓰다듬고 나서 강정부부를 바라보았다. 종길은 운청산의 꿈꾸는 듯한 몽롱한 눈빛과 미소를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열아홉 번째 배를 떠나보낸 선착장에는 이제 오십여 명의 사람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천무림련의 수뇌들과 군룡전의 고수들로 보이는 초로인들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박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배 한 척이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용문수로표국 국주 곽동량이 직접 선타를 잡은 용문비선 일호였다.

“허! 배가 들어오는데 연주께서는 왜 이리 늦으시는고?”

운녹산이 중얼거리자 그의 주변에 있던 초로인들이 뒤를 살폈다.

“때맞춰 오시는군요.”

운녹산이 돌아보니 현상자가 두 명의 노도사들과 함께 선착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군룡전의 고수들 가운데 도사의 행색을 한 십여 명의 초로도인들이 댓 걸음 마중 나가 일제히 예를 표했다.

현상자는 고개를 끄덕여 답례하고서 운녹산과 공명선사 그리고 신수사태 앞에 이르렀다. 운녹산 등은 현상자와 함께 온 두 도사를 보면서 의아함을 드러냈다. 기파가 그리 강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왠지 세상 사람들과는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 탓이었다.

현상자가 그 눈빛을 읽고 두 도사를 소개했다.

“이 두 분 진인께서는 청성산 와룡곡에서 수도하시는 건곤파의 쌍진인 되시오. 빈도가 노파심이 일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시는 이 두 분께 도움 주십사 하고 간청했소이다.”

두 사람 가운데 은빛의 눈썹이 특이한 웃는 얼굴의 노도인은 건법진인(乾法眞人)라 했고, 마르고 굳은 얼굴에 유독 눈빛이 흑진주처럼 반짝이며 유리처럼 투명한 왼손을 지닌 노도인은 곤술도인(坤術道人)이라 했다.

운녹산 등이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고 두 도인들도 답례했다.

운녹산이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현상자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혹시나 하여 무당의 보천진인께 도움을 청할까 했었습니다. 허나 그쪽도 사정이 있는지라 차마 말을 못 꺼냈는데, 연주께서 모든 것을 헤아리시고 이리 귀한 분들을 청하셨으니 만사가 술술 풀릴 모양입니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명선사가 용문비선 일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우리만 건너면 되는가 봅니다. 가시지요.”

현상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다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헌데 당 가주께서는?”

운녹산이 웃으며 선착장 서쪽을 가리켰다.

“영애와 작별인사라도 나누시나 보지요.”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십여 장 위쪽 강변에서 당유연이 당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상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건곤파 쌍진인에게 배에 오르기를 청했다.

당유연과 당우리의 대화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유연은 고리눈을 치뜨고 당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 네가 지금 이 아비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이냐?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그게 무슨 배워먹지 못한 행실이냐?”

당유연이 호통을 치는데도 당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뭘 어쨌게요?”

당명천이나 다른 두 아들이 당우리와 같이 반응했다면 그 자리에서 패대기를 쳐버렸으리라. 그러나 당유연은 당우리의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반문에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뜨거운 콧김을 연속해서 내뿜었다.

“모- 몰라서 묻느냐? 너, 지금 들고 있는 게 무엇이냐?”

당우리는 천진한 얼굴로 운청산의 옥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옥소잖아요?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그걸 누구한테 받았느냐?”

당우리는 그때서야 얼굴에 쑥스러움을 드러내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보셨어요?”

“후! 후! 후!”

당유연은 연속해서 가쁜 숨을 내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이 아비 눈앞에서 근본도 모르는 낭인 따위와 시시덕거리느냐? 게다가 그 옥소, 그걸 받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느냐? 정표를 받았다 하지 않겠느냐?”

당우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당유연의 억지로 화를 참는 듯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순간 당유연의 얼굴에서 화가 사라지고 대신 당우리와 같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래 그랬다. 당유연의 딸 사랑은 당가타 일대에 모두 알려질 정도로 과한 것이었다. 금지옥엽 정도라면 이해가 될 것이나, 당유연에게 금지옥엽의 뜻을 물으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라고 대답하리라.???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릴 적에는 당우리의 기분이 바로 당유연의 얼굴표정에 나타났다. 그래서 당가 사람들은 가주의 비위를 건드렸을 경우 당우리를 앞세우는 일이 많았다. 당유연도 그 얄팍한 수작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당우리 앞에서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당우리가 화가 나 있으니 화를 내던 당유연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했다.

“그 사람, 근본 없는 낭인이 아니에요. 신비지문, 곤륜의 속가제자라구요. 착한 사람이구요.”

당유연은 갑자기 서글퍼져서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여기고 키워왔던 딸이 자신에게 화난 얼굴로 생판 모르는 사내 녀석을 비호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이었다.

‘하! 딸자식 아무리 귀하게 키워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더니, 과연 고금의 진리로구나.’

서글픔이 깊어지고 배신감마저 느껴지니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흥! 곤륜속가? 곤륜속가라 이 말이지? 난 지금껏 곤륜의 속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그 어떤 곤륜속가가 있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단 말이더냐? 신비지문이라는 말은 곤륜에 국한될 따름이다. 곤륜속가? 흥! 지나가던 곤륜도사에게 한 수 구걸이나 했겠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어릴 적부터 곤륜산에서 살았다구요. 하산한 지 반 년도 안됐다구요. 비록 조실부모해서 산에서 자랐지만 외숙이 바로 청인진인이시라구요. 무공은 또 얼마나 강한데요? 세상을 몰라 순진하지요. 음률에 조예가 있음은 물론이고 의도에도 밝다구요.”

말을 쏟아내던 당우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호를 하다보니 마음대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소를 잘 분다는 것과 착하다는 것 그리고 청인진인이 외숙이라는 것뿐이었건만, 너무 흥분하여 무공과 의도에까지 소질이 있다고 부풀려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거짓말이 당유연에게 먹힌 것 같았다. 당유연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홀로 중얼거렸다.

“부모가 없다? 청인진인의 조카? 청인진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대제자에, 배분으로 따지면 나하고 동배. 조건은 좋군.”

당유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당유연의 표정을 살피던 당우리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선착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출발합니다.”

당유연이 돌아보니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용문비선에 올라가 있었다. 당유연은 당우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돌아와서 다시 이야기해 보자.”

당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다시 한숨을 내쉰 당유연은 낯빛을 바꾸어 웃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거라. 내 꾀꼬리.”

당유연은 신형을 날려 선착장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배 위로 솟구쳐 올랐다.

당우리는 뱃전에서 손을 흔드는 당가 사람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배가 멀어지자 당우리가 문득 의아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조건은 좋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실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당우리는 고개를 내젓고 문득 운청산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우리는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얼굴에 홍조를 띠며 오른손 검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맘을 먹고 그랬을까? 어휴! 샌님! 바보! 괜찮을까? 따라갔어야 했는데---.’

배 위에서 맞는 바람은 강변의 바람과는 또 달랐다. 후텁지근하던 바람이 선선해지자 종길은 무복의 상의를 풀어헤치고 선수 근처 난간 아래쪽에 기대어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운청산은 종길의 미소 띤 얼굴을 보며 싱긋 웃고서 그 옆에 앉아 종길처럼 눈을 감았다.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바람은 선선했고 배는 굵은 물결을 넘나들며 기분 좋게 흔들렸다.

‘좋은 느낌!’

운청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 하나. 바로 코앞까지 디밀어진 얼굴이었다. 그저 떠올렸을 뿐이건만 달착지근한 숨결마저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눈을 감은 채로 두 입술을 안으로 말아 서로를 부딪쳤다. 부드럽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순간 운청산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두 시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넋을 놓은 채 잠이 든 당우리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비몽사몽간에 싫지 않은 땀 냄새와 향긋한 진피 향내가 어우러져서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뜬 운청산은 너무 놀라 돌처럼 굳어버렸다. 두 시진 동안 그가 했던 그대로 당우리가 얼굴을 코앞까지 가져와 내려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

운청산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당우리가 홍조 띤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가져왔다. 들이마시고 싶었던 숨결이 먼저 닿고 곧이어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껍질 깐 홍시를 베어 문 듯 달콤하며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운청산은 그 느낌을 떠올리며 다시 위 아래의 입술을 부딪쳐보았다. 역시 밋밋한 느낌이었다. 또 다시 당우리를 떠올렸다. 그때 종길의 목소리가 당우리의 영상을 흩어버렸다.

“뭐야, 이놈! 도대체 뭔 생각을 하기에 얼굴을 붉히고 콧구멍을 두 배로 늘여가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거야?”

운청산은 아쉬움을 감추며 눈을 떴다. 종길이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청산! 바른대로 대! 너 어제 무슨 일 있었지? 혹시 뽀뽀라도 했냐?”

순간 은은한 홍조가 어려 있던 운청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으윽! 했구나, 이놈! 했어. 우와!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정말 진척이 빠르군. 겨우 세 번 만나고 뽀뽀를 하다니---. 으, 배 아파라.”

종길이 배를 잡고 얼굴을 구기자 운청산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종길의 머리를 후려쳤다.

“조용히 해!”

운청산은 자기가 때리고도 놀라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때렸다는 것을 실감하고서 운청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강정 부부와 종길의 살아가는 모습에 동화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종길이 머리를 번쩍 치켜 올리며 운청산을 노려보았다.

“이놈! 나쁜 것은 빨리도 배우는구나. 내 머리가 동네북이냐?”

운청산은 종길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손가락으로 종길의 멍들었을 것이 분명한 어깨를 쿡 찌르며 조용히 말했다.

“공력을 일성 더 올리는 수가 있다.”

종길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이놈이 이젠 협박까지. 도대체 알고나 하는 협박이냐? 네 놈 일성이면 어깨가 날아가, 이놈아.”

운청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곤거렸다.

“살인멸구!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운청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선수를 향해 걸어갔다. 종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운청산의 등을 바라보다가 결국 킥킥대기 시작했다.

“크크크, 과연 사랑의 힘은 위대한가? 한순간에 변해서 어쭙잖게 농담을 다하다니---.”

순간 운청산이 발걸음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종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담이야.”

종길이 얼굴을 굳히는 순간 운청산은 다시 돌아서서 미소 지으며 선수에 가 붙었다.

벌써 닿아 사람들을 내려놓은 배가 십여 척이나 되었고 운청산이 탄 배에서 강변까지는 대충 칠십여 장 남아있었다. 지금의 속도라면 반 각이 조금 더 지나면 닿으리라.

금사강을 건너니 바로 운남 땅 영인현(英仁縣)이었다. 그곳을 벗어나 비스듬한 경사로를 따라 이십여 리 오르니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사천의 폭염은 간데없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남으로 내려갈수록 더워진다는 상식이 깨진 이유는 사천의 분지를 벗어나 운남고원에 이른 탓이리라. 사계절 내내 혹한도 없고 혹서도 없는 운남. 아마도 밤이 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춥다고 느끼리라.

거기서부터 금사강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삼백여 리를 더 걸으면 금강 포구에 이르고, 금강포구에서 계족산 삼골령을 넘어 이백여 리 더 가면 점창산이었다.

어림짐작하여 오백이십여 리. 보통사람이라도 걷는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느긋하게 나흘이면 갈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무림련의 결정은 이레를 나누어 걷는 것이었다.

금사강을 내려다보며 사흘 반나절을 걸어 결국 금강포구에 이른 사천무림련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날이 밝자 다시 삼골령으로 향했다.

“어휴! 또 사흘을 걸어야 돼? 답답해서 미치겠네. 배도 충분하니 차라리 강을 거슬러왔으면 좋았잖아?”

종길이 전신을 비틀며 투덜거렸다. 옆에서 걷던 이정이 말했다.

“그건 안될 일이지.”

“왜요?”

종길이 의아함을 드러내며 묻자 이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에 익숙한 사람이 별로 없지. 수전에 대한 대비도 없고. 우린 별 생각 없이 그냥 도강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짧은 도강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을 걸세. 강을 거슬러 와야 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배로 오려면 이틀은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밤에는 무방비나 다름없겠지.”

“아! 그렇겠군요. 나만 해도 물질은 초보나 다름없으니 그냥 수장이네. 당연한 거군. 하지만 겨우 오백리 길을 이레에 나누어 걷는 건 너무 갑갑합니다. 이틀이면 갈 거린데---.”

종길이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 뒤에서 따라오던 강정이 엉덩이를 후려 찼다.

“너 싸우고 싶어서 안달 났냐? 싸움 나면 제일 먼저 칼 맞을 놈이 바로 너야. 주제를 알고나 지껄여라.”

종길이 얼굴을 구기며 뒤돌아보자 운청산이 말했다.

“전쟁에 임할 때는 먼저 대의명분을 확보하고 천지와 지리 그리고 인화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당장 사천무림련이 가진 것은 대의명분 뿐. 짧은 거리를 이레에 나누어 걷는 것은 나름대로 천시를 얻고 지리를 깨치려는 행위로 볼 수 있겠지. 상대는 이미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뒤늦게 전쟁터로 달려가는 형국. 병법에 따르면 절대로 피해야 할 상황인 거지. 그래서 천천히 걸으면서 기후에 익숙해지도록 배려하고 상대가 지리의 이점을 얻지 못하도록 군룡전 사람들이 선두에서 확인하는 것일 거야. 점창산에 이르러서도 싸움에 앞서 며칠을 그냥 보내게 되겠지.”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그렇지. 점창제자들이 있으니 우선 지리의 변화부터 확인해야 되겠군. 그렇다면 천시와 인화는 어찌 봐야 하는가?”

“외숙께 듣기로는 점창산 주변은 습윤하나 일정하다 했습니다. 춥고 더운 것이 별 차이 없고 비가 와도 폭우가 내리는 일은 드물다 했으니, 천시가 무림인들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요. 문제는 인화로 귀결된다고 보겠습니다. 인화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이 섞이고 통하는 기간이 필요하고 거기에 바른 장령이 있어야 하며 신상필벌이 공정하게 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경우라면, 기세가 승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나 좌절이 생기면 쉽게 깨어지지 않겠습니까? 다만 병진훈련을 통하여 서로 마음을 나눈 바 있고 또 일전에 성도표국에서 군사가 무사들의 구심점이 되었으니 우선은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운청산은 말끝에 문취옥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문취옥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문취옥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주변에서 걷던 정명당 사람들 대부분이 운청산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가 수긍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깬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종길이었다.

“몰라. 난 그런 복잡한 건 모르겠고, 어때? 우리가 이길 것 같아?”

운청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놈아! 내가 점쟁이냐? 그런 걸 다 알게.”

“쳇! 바로 그런 태도가 대가리에 먹물 든 놈들의 맹점이야. 쓰잘데기 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고서 결정적인 것에는 답이 없어요. 막히면 결국 하는 말이 진인사대천명이지? 쳇!”

느긋하게 걷는데도 쉽게 긴장을 풀어놓지 못하던 정명당 사람들이 종길의 말에 낮은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사천무림련의 무사들은 드디어 점창산 상관에서 십 리 떨어진 벌판에 이르렀다. 더 이상의 전진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군룡전의 고수들이 사오천은 족히 머물 수 있는 드넓은 벌판을 휘젓고 다니면서 바닥을 확인했고 그 뒤를 따르던 인급 무사들이 주변의 눈에 걸리는 장애물들을 치웠다.

수뇌들과 군룡전 그리고 천우단과 노호단을 위한 막사들이 세워지고 그 주위로 사방당의 막사들이 각자의 방위에 막사들을 세웠으며 다시 그 주변으로 정명당의 막사들이 세워졌다. 결국 정명당이 전체를 호위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뾰족한 점창산의 최고봉 마룡봉은 사철 걷히지 않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고 그 봉우리 우측으로 태양이 지면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산의 좌측으로는 바다라 해도 믿을 만큼 넓은 비취빛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감상에 젖어 절경을 이루는 점창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몇몇 이들은 불 피울 준비를 하고 솥을 내걸었다. 밥 짓는 냄새 피어오르는 동안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아예 풀밭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는 이들도 있었다. 도저히 곧 싸움이 일어날 곳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풍광이요 피 흘리며 싸워야 할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운청산 등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병장기를 놓지 않고 있었지만 긴장감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풀밭에 나란히 늘어져 앉아 점창산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하! 저토록 아름다운 절경에서 피를 튀기며 싸워야 하다니, 하늘이 내려다보시면 인간들을 괘씸타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강정이 중얼거리자 이정이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소이다. 저 마룡봉(馬龍峯)의 설경과 왼쪽의 이해호(?海湖)를 함께 일컬어 이해은창(?海銀蒼)이라 하여, 옛 대리국 사람들이 대리의 보물이라 칭했소이다.”

종길이 팔베개를 하여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대협. 절경이긴 한데 좀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곤륜산도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요. 저렇게 높은 봉우리가 주변의 도움도 없이 홀로 뾰족 서있을 수도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하늘의 재주가 오묘한 거 아니냐?”

강정이 웃으며 말하자 이정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곤륜이나 아미에 비할 바는 아니네만, 실제로 점창산은 그 규모가 작다할 수 없다네. 점창산은 이해호를 따라 모두 열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네. 그것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점창의 북문이라 할 수 있는 이곳 상관에서는 작게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점창산은 남북으로 백리가 넘는데, 동서로는 겨우 오 리에 불과해서 조금 기형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서쪽으로 흑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비취빛 이해호가 있어 그 기형적인 모습이 오히려 점창산을 절경으로 만드는 것이지.”

“호!”

종길이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강정이 얄밉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기어이 그의 이마를 후려쳤다. 종길은 만성이 됐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운청산이 이정에게 물었다.

“이 대협! 제 눈에는 도관 같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점창파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모두가 궁금한 것을 잘 물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곳에 진을 친 것도 점창파의 위치와 관련된 것이겠지. 보이는가 저기 끝이 새카맣게 탄 듯한 첫 봉우리. 점창의 머리라 해서 창두봉이라 불리는데 바로 저 봉우리 남쪽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네.”

이정의 답하자 종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호! 이 대협은 점창산에 대해서 아주 잘 아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이 이십 전이던가? 세 번 와봤다네. 올 때마다 감탄해마지않았지.”

이정의 말에 모두가 새삼스럽게 점창산을 바라보는데 운청산이 다시 물었다.

“허면 점창파에 이르는 길은 어떻게?”

“흠. 이곳을 상관, 남쪽을 하관이라 부르네. 좌우로는 너무 가팔라 길을 내지 못했지. 해서 산의 중턱까지 올라 이해호를 바라보며 좌측으로 돌게 만들어 놓았네. 근데 이상하구먼. 대충 저기 시커먼 부분 정도가 될 터인데, 예전에는 푸르렀는데---. 아마도 이번 싸움을 대비해 시야를 틔워 놓은 것 같구먼.”

이정의 대답에 운청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생각보다 힘든 일이 되겠구나.”

이정이 물었다.

“뭐가 말인가?”

“산세가 생각보다 많이 험하군요. 동서로 오 리밖에 안된다면 좌우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깎아지른 듯한 지형이 될 것입니다. 상대는 이미 방비를 단단히 굳히고 있을 터인데, 입구는 북쪽, 점창파는 남쪽에 자리했으니 산을 타 넘지 않는 이상 가파른 절벽을 타고 돌아야 할 것이고, 그리되면 희생이 클 수밖에 없지요. 지리를 적으로 돌리고는 이기기가 힘든 일이지 않습니까?”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분명히 창두봉 동벽은 내가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가파르다네. 그래서 길도 삼협이나 촉도처럼 절벽을 속으로 파내어 만들었네. 결국 촉도난의 구절처럼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개(萬夫莫開)의 형국이네만, 역으로 생각하면 절정무인 한 사람이 뚫어 나갈 수도 있다는 뜻. 그곳은 결국 고수들의 싸움터가 될 것이네. 뚫느냐 막히느냐는 우두머리가 어느 쪽이 센가에 달렸다는 소리지. 게다가 정면으로 보니 저리 힘들어 보이지만 창두봉 역시 남북으로는 완만하여 산을 넘는 것이 보기보다는 쉬울 걸세. 저쪽에서 이미 대비를 한 듯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점창산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러나 결국 동벽이든 서벽이든 오를 수 있는 이들이 있다 해도 군룡전 사람들 정도겠지. 그러나 방비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렵다고 소홀히 하지 않는 법. 결국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은 그만큼 허를 찌르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리라.’

운청산은 암울한 눈빛으로 점창산 서쪽에서 번져오는 노을 바다를 바라보았다. 노을은 마룡봉을 넘어 산 전체를 뒤덮고 비취빛 이해호마저 붉게 물들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아름답던 전경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마룡의 검에 찔린 하늘이 피 흘리고 검주가 피 흘리고 땅이 피로 적셔진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보기 싫었다. 하늘과 땅을 모두 적실 피는 결국 사람들에게서 나오게 될 것이리라.

문득 그의 발목을 붙잡은 영혼들, 이청수와 운현산 그리고 운명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서 그들이 지켜봐 주기를 부탁한 사람들, 운녹산과 운화인 그리고 운종인의 피 흘리는 얼굴마저 떠올랐다.

‘책임질 수 없습니다. 원망하지 마세요.’

분명히 봐달라고 했었다. 같이 있게 해달라고 했었다. 능력이 되는 한 살펴달라고 했지 지켜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운청산은 스스로 그들과의 약속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눈을 떴다. 어둠이 노을을 침범하자 붉은 피 굳어가는 것처럼 세상이 검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오늘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넘어온 그 강을 다시 건너고 싶다. 통통한 그 볼을 쓰다듬고 싶다.’

운청산은 두 손으로 베개를 만들어 그가 왔던 쪽으로 점창산을 머리 위에 두고 드러누웠다.

부정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다.

밝고 따뜻하지만 눈부시지 않은 빛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벽도 없고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어서 무한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 안에 은은한 빛을 뿜는 여덟 개의 백의인영들이 팔방을 점하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있으니 앉아있는 것일 텐데, 바닥이 없으니 허공에 떠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운현산 등의 여덟 영혼들이었다.

여덟 가운데 살아생전에 그 성격이 무척이나 급했던 운명산이 모두를 간절한 눈빛으로 보며 생각했다.

‘봉인을 깨고 나가자.’

순간 운현산을 제외한 여섯 영혼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어렸던 운추산이 운명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귀곡산인께서 하신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최소한 이번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봉인을 깰 수 없습니다. 청산이 강호를 보고 역경을 겪어보기 전에는 안 될 일이지요.’

다섯 영혼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산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운현산에게 원조를 청했다. 그러나 운현산은 눈을 지그시 감을 따름이었다.

운명산은 다시 전원을 둘러보며 애타는 마음을 전했다.

‘왜? 몰라주느냐? 내 아들이, 현산의 아들이, 우리 운가의 사람들이 혈풍 앞에 서있다. 우리가 힘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왜 가지 않겠다는 것이냐?’

운경산이 모두를 둘러보고 다시 운명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리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은 존재들이오. 함부로 경계 저편의 운명에 관여할 수는 없소이다. 더구나 청산의 능력을 생각해 보시오. 그가 빨아들이는 천지의 영력을 훔치는 일도 점차 버거워지고 있소. 이런 상태에서 봉인을 깨고 나갔다가 청산이 마경에라도 빠진다면 그것은 우리 운가 사람 몇이 죽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이 될 것이오.’

운명산은 운경산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직시하지 못하고 시선을 옮겼다. 눈을 감은 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운현산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의 눈빛은 모두 운경산의 그것과 같은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명산은 절규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신명화 되어버린 영혼들, 절망의 감정을 분출한다고 해서 뜻을 꺾을 이들이 아니리라.

운명산은 처연한 눈빛으로 운현산을 주시했다. 이들 가운데 오직 하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였기에 또 살아생전 모든 이들을 이끌던 이였기에, 운현산만은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동조해주리라 믿은 것이었다.

‘현산! 뜻을 밝혀라.’

운명산이 채근하는 순간 나머지 여섯 영혼들의 시선도 운현산에게로 모아졌다.

운현산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운명산에게 가 닿았다.

‘명산! 봉인을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간 운현산의 머릿속으로 여섯 영혼들이 동시에 떠올린 외침이 파고들었다.

‘현산 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운현산은 여전히 차분한 눈빛으로 여섯 영혼들을 직시했다.

‘봉인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냐? 도대체 누구를 봉인한 것이냐? 청산이냐? 우리냐?’

모두가 운현산이 뜻하는 바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운현산이 다시 생각을 이었다.

‘봉인은 결국 우리를 가두는 것이다. 청산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한곳에 머물게 하신 것이고 청산을 마경으로 빠지지 않도록 살피라고 봉인하신 게지. 그러나 신명화된 우리 여덟의 힘이 합쳐지면 깨어지도록 봉인되었다는 것은 방문의 걸쇠를 걸어둔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문이 부서졌다고 방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우리는 다만 귀곡산인께서 우려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운명산이 기쁨에 겨워 눈을 반짝였다. 그때 운현산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산! 우리는 육신이 없는 존재. 물리적인 힘을 쓸 수 없으리라. 무엇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냐?’

운명산이 생각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미 예전의 혼귀가 아니지 않느냐? 태양빛에 굴복할 필요가 없으니 낮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청산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그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어 그에게 알려줄 수 있으리라.’

‘하! 결국 우리 아이들이 위험할 때 그에게 도움을 청하자는 뜻인가?’

운현산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을 끊었다. 그러나 금새 눈을 뜨고 운명산을 직시했다.

‘명산! 청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느냐? 지금껏 우리가 청산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더냐?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줘 봤더냐? 편히 잠자게 해주었더냐? 지금은 어떠하냐? 우리는 청산에게 있어서 기생충이며 짐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청산은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이왕 왔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리라.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면목이 없는 짓 아니냐?’

‘우리가 청산에게 빌붙고 싶어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애초에 원인을 따진다면 녹산 형과 형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명산!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원하지 않는 것은 청산도 마찬가지. 그런데도 청산에게 모든 것을 떠맡으라 말하는 것이냐, 지금?’

운명산은 눈을 감고 생각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간절한 눈빛으로 운현산을 바라보았다.

‘현산! 억지였다. 하지만 우리가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청산을 위기에서 구할 수도 있는 일 아니냐?’

운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산!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우리가 청산을 도울 수 있다면 귀곡산인께서 하신 부탁을 십이할 달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삼촌으로서의 면목을 세울 수도 있는 일이리라.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이제 청산에게도 동료가 생기고 친구가 생겼다. 그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우리가 우리 아이들의 위험을 알린다면 그것은 한 순간의 지체가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상황에서 청산에게 쉽지 않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네가 그 입장에 처한다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

운명산을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고 생각을 끊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역지사지(易地思之)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는 미처 몰랐다. 알겠다, 현산. 네 뜻에 따르마. 허허허허. 정말 몰랐구나. 죽으면 끝이라 생각했거늘, 죽음의 강을 건너놓고도 이렇게 혈연의 정을 끊어버리는 것이 힘들 줄은 정말 몰랐어.’

모두가 안타까움을 담은 눈빛으로 운명산을 바라보았다. 그때 운추산이 눈을 반짝이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형님들! 이러면 어떨까요?’

*        *         *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이 한데 모여 있는 막사 안에서 벽송은 서슴없이 검을 뽑았다. 그러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송은 빈 공간을 향하여 검을 내뻗고 공력을 일으켰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청기가 검신을 타고 올라가 검첨 밖으로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삼 장을 뻗어나간 푸른 검기가 일순간에 일 장 반으로 줄어들었을 때,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뻗어나간 기운은 줄어들었지만 그것이 검기에서 검강으로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벽송은 순식간에 검강을 갈무리하고 검을 집어넣은 후에 수뇌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정도가 최선인 저로서는 창두봉의 동벽이나 서벽을 타넘는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겨우 움직인다 하더라도 바윗돌 몇 개 떨어지는 순간이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것입니다. 결국 제 수준이라면 동벽로를 통한 정면돌파와 창두봉의 봉우리를 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봉우리 쪽도 내려갈 때는 급경사를 이룹니다만 불가능하지는 않지요. 조금 더 무리한다면 배를 타고 이해호를 지나 창두봉의 남동쪽에 내리거나 역시 배를 이용하여 흑강을 거슬러 올라가 창두봉 남서쪽에 내려 산을 탈 수도 있겠습니다.”

벽송이 말을 마치고 수뇌부들을 둘러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이 미소를 지으며 벽송에게 말했다.

“수고했네. 나가 보시게.”

벽송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포권을 취하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후 현상자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공명선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빈승이 다녀온 경험이 있는데 방금 그 말이 틀림이 없군요. 창두봉의 서벽은 모르겠으나 동벽은 확실히 가파릅니다. 군룡전에 속한 이들이라도 화살 몇 개면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빈승의 의견 또한 벽송 그 사람과 같습니다.”

그때 운녹산이 당유연을 보며 물었다.

“당가의 능력으로는 어떻습니까? 만약 이곳이라면---.”

운녹산이 지도에서 창두봉의 남동쪽을 짚자 당유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독을 말씀하시는 게지요?”

순간 신수사태와 공명선사는 물론 현상자까지 눈살을 찌푸렸다. 당 가주 앞이라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독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거부감이 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유연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세 사람과는 다른 이유였다.

“어렵소이다. 산과 호수가 붙어있고 또 운남 특유의 습윤한 기후 특성 상 용독에 어려움이 많소이다. 용케 적기를 맞아 바람에 날려 보낸다 하여도 산바람은 평지의 바람과 달라서 변화무쌍하니 큰 효과를 보기 어렵겠지요. 일단 손을 떠난 독은 적아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이오.”

세 사람이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운녹산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세 사람이 운녹산의 눈치를 보는 순간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손자가 말하길, 장수가 청백하면 반드시 욕을 본다 했습니다. 비무가 아닌 전쟁을 치루는 것. 이길 수단이 있음에도 쓰지 않는 것은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우를 범하는 것. 비겁하다 소릴 들어도 우리 무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기꺼이 그 길을 택할 것입니다.”

당유연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세 사람도 힘겹게나마 수긍의 뜻을 표했다.

운녹산이 모두를 둘러보고서 차분히 말했다.

“천밀각에서 지금껏 모은 정보들을 분석한 결과, 점창에 있는 적들의 수는 대략 사백에서 최대 육백 정도입니다. 이는 그 동안 보냈던 사람들의 희생과 점창산 안으로 들어간 식료품들의 양을 분석한 결과지요. 고수의 비율이 어느 정도나 될지는 미지수입니다만, 벽송의 말과 성도표국에 나타났던 백의인들의 실력을 감안해 볼 때 인적인 면에서는 우리 측이 낫겠지요. 문제는 우리가 취할 방도가 저들에게 빤히 보인다는 것이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 상대라서 야간을 이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운녹산은 눈빛으로 모두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모두들 고민에 빠진 듯한 반응을 보일 따름이었다. 그 가운데 유독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이가 바로 현상자였다.

현상자는 눈을 감고 가슴에 응어리진 한숨을 조금씩, 조금씩 흘려 내보냈다.

‘숨겨서 무엇 하겠다고 숨겼단 말인가? 그때 말을 했어야 했는데---. 원시천존! 그들이기를 바라면서도 아니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심보인고? 그들이 맞으리라. 성도표국에 왔던 그 백의인들의 도법,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우리가 혈원마도(血圓魔刀)라 이름붙인 멸청광자 때의 그 도법이리라.’

현상자는 성도표국에서 도를 훼훼 돌리며 이 장에 이르는 반월의 도기를 뿜어대던 백의인들의 악착같던 모습을 떠올렸다가 눈을 떴다.

그때 신수사태가 말했다.

“상대가 수적으로 약세를 보인다 하는데 네 곳을 모두 공략할 만한 정도인가요?”

운녹산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분산되면 저쪽도 분산하여 막아야 하니 그리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만, 퇴로를 모두 끊어놓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배수의 진을 치도록 만드는 것. 그리하면 우리 쪽 희생이 클 것입니다. 이 사람 생각으로는 흑강과 접한 이곳 창두봉 남서쪽은 비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번에 끝내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희생을 줄이는 것이 먼저겠지요. 일단 끌어내려 놓으면 그 다음은 아무래도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신수사태가 선선히 수긍의 뜻을 표하는 순간 현상자가 지도에서 창두봉 남동쪽을 짚으며 말했다.

“빈도가 본파의 고수들과 함께 야음을 틈타 이곳까지 이동하겠소. 공격은 정한 시간에 동시에 하도록 하지요. 먼저 길을 트는 쪽이 막힌 쪽을 뚫어주면 될 것이오.”

사람들이 흠칫 놀라 현상자를 응시했다. 지금껏 중재역을 맡았을 뿐 별 달리 나서지 않았던 현상자가 적극성을 띤 것이 의외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현상자는 운녹산 등의 의아함에 답을 주지 않았다.

당유연이 의문을 접어두고 이어 말했다.

“허면 이 사람은 창두봉을 공략하겠소.”

“그럼 빈니도 당 가주와 함께 창두봉을 넘겠습니다.”

공명선사와 운녹산은 별 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신수사태는 창, 당유연은 암기를 주종으로 쓰니 절벽을 파낸 동벽로와는 궁합이 맞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결국 공명선사와 함께 동벽로를 맡게 된 운녹산이 지도를 봐가면서 세부적인 상황들을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상관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친지 사흘이 지났다.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전조는 한 가지도 보이지 않았다. 정탐꾼 하나 둘 정도는 보일 만도 하건만 그마저도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방당 사람들이 각자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무게와 크기를 지닌 볼품없는 방패를 만든다고 부산을 떤 것을 제외하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휴식의 나날들이었다.

나흘 째 되는 날 고원의 아침.

가랑비가 내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를 맞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끔씩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 있었나 보다. 그날의 아침식사는 무사들로 하여금 환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다른 때보다 풍성한 양의 고기와 내장들이 배급되었고 채소도 듬뿍 보태어졌다.

솥을 내건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화과를 만들었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후루루 국물을 마시니 전신이 훈훈해져 체온만으로도 가랑비에 젖어들던 옷을 말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사들이 웃으며 배를 두드리고 누우려는 순간.

둥! 둥! 둥! 둥! 둥!

“집합!”

기분 좋게 드러누우려 했던 무사들은 질끈 눈을 감고 병장기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짜증으로 물들던 얼굴들이, 차츰 사람들이 모이고 대충 대오가 정렬되는 순간, 긴장으로 얼어붙어 버렸다.

“에휴! 아침부터 화과를 주더라니---.”

종길이 투덜거리며 운청산과 강정 부부의 뒤로 붙었다.

대오가 완전히 정렬되자 각 당별로 별도의 지시들이 내려졌다.

“지급무사들은 앞으로!”

정명당의 당주 송월자가 소리쳤다.

“엥? 왜 하필 우리만?”

종길이 좌우를 둘러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순간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대열을 이탈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종길도 어쩔 수 없이 나갔다. 그들 앞에 서른 개의 밧줄들이 있었다. 하나씩 들으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종길은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투덜거리며 밧줄을 메고 돌아왔다.

“제기랄! 이 무거운 걸 메고 어떻게 산을 오르란 말이야? 죽으란 소리잖아?”

운청산이 살펴보니 펼치면 족히 십오륙 장은 될 것 같은 밧줄묶음이었다. 운청산이 손을 뻗었다.

“내가 들지.”

종길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정말?”

“내게는 별 부담이 안돼.”

종길은 얄밉게도 냉큼 밧줄을 넘겼다. 운청산이 사선으로 밧줄을 메어 보니 족히 열서너 근 이상 될 것 같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수뇌부들이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가 있는데 오직 현상자만이 보이지 않았다. 연이 통째로 움직이는데 연주가 보이지 않으니 의아해 할 수밖에 없으리라.

소곤거림이 모여 웅성임으로 바뀌었다. 그때 운녹산이 앞으로 나섰고 웅성임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사천무림련의 무사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다. 이제 우리 사천무림련이 척마멸사의 깃발을 곧추세우고 악도들을 무릎 꿇리리라. 그대들이 겪어 보았듯이 상대는 냉정하고 잔악하다. 그러나 그 수가 사백에 불과하니 우리가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간 능히 승리를 얻으리라.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엄정한 군율이 적용될 것이고 일이 끝난 후에는 공과에 따라 공정하게 상벌이 내려질 것이다.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고 나아가라. 비겁한 자 먼저 죽으리니 후손들이 그대들을 기억케 하며 역사가 그대들을 칭송케 하라. 그대들에게 대점창 영령들의 가호가 있기를 ! 나가자! 사천무림련 만세!”

무사들 사이에서 만세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수뇌부가 앞서고 이상하게도 반으로 줄어버린 군룡전의 고수들이 따랐으며 그 뒤로 천우단과 노호단이 뒤따랐다. 사방당이 그 뒤를 따르고 마지막으로 정명당이 따라갔다.

터벅터벅 걸으면서 종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뭐라 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를 공격한다든지, 어떻게 행동하라든지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싸우기 전에 답답하게 만들어 자멸하겠다는 거야, 뭐야?”

강정이 말했다.

“우리 군대로 따지면 병졸이나 마찬가지다. 시쳇말로 까라면 까면 되는 거지.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눈앞에 보이는 적을 상대한다. 그 이상은 알 필요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이정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종길을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 규모의 용병이 모이다 보면 간세가 없을 수 없는 일. 정보를 최대한 숨기려는 의도로 보면 되겠군. 그러니 상대만 보지 말고 등 뒤도 조심해야 하네.”

“어휴! 겁주지 마세요. 그 말 들으니 갑자기 오싹해지네요.”

종길이 짐짓 어깨를 떨어 보이는 순간 문취옥이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운청산이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말했다.

“청산! 상대에게 착한 사람이 될 생각하지 마. 그리고 영웅이 될 생각도 하지 마. 그냥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돼. 살을 주고 상대의 뼈를 깎는 것이 전투야. 팔만 베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은 버려야 돼.”

운청산은 대답을 강요하는 문취옥의 눈빛을 보면서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때 강정이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민할 필요 없어. 네가 팔을 베면 난 주저 없이 그 사람의 목을 칠거야. 무슨 뜻인 줄 알겠지? 항복하지 않는 자는 뒤따르는 자가 반드시 죽인다. 그것이 전쟁이야. 대항할 능력이 있다 없다는 중요한 게 아니야. 의지를 보이는 순간 죽는 거지. 목을 날릴 수 있는데 팔만 날리는 것은 어차피 죽을 자에게는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이고 네 스스로는 죄책감을 덜자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일 따름이다.”

운청산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만 찌푸렸다. 이번에는 이정이 말했다.

“굳이 사천무림련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냥 자네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해 싸우며, 자네 가슴 속에 있는 사람들 앞에 다시 서기 위해 싸우면 되네. 단,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성을 잃고 마귀가 되어 검을 휘두르지 말게나. 평생 동안 스스로를 저주하고 싶지 않으면 말일세.”

운청산은 좌우로 번갈아 고개를 돌렸다. 왼쪽에는 강정부부요 오른쪽에는 씁쓸한 표정의 이정이었다. 그랬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능히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산! 좌우만 돌보지 말고 가끔은 뒤를 위해서도 싸워 주라.”

종길이 투덜거리는 순간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겨우 십 리. 터벅터벅 걸었을 뿐인데도 행군은 오래가지 않았다. 창산상관(蒼山上關)이라고 양각된 석문 앞에서 다시 대오를 정렬했다.

운청산은 산 위로 뻗은 돌계단을 살폈다. 곤륜의 그것과는 달리 깔끔하게 다듬어진 다섯 자 가량의 평평한 돌 세 개가 연이어 붙어서 하나의 계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눈대중하여 보니 삼사백 계단 정도 될 것 같았다.

이십여 명 가량의 사내들이 그 계단들을 밟고서 날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도사의 행색을 한 이들 두 사람이 선두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좌측으로는 군룡전 소속의 운가 사람들이, 우측으로는 역시 군룡전 소속의 아미파 장년승들이, 끝에는 점창의 젊은 도사 둘이 따르며 두 도사를 호위하듯 내려왔다.

승인들과 운가의 사람들과 점창 도사 두 사람들이 군룡전으로 합류하는 순간 두 도사가 운녹산 등에게로 다가갔다.

운녹산이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두 도사 가운데 건법진인이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일단 산의 기세에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은 읽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산 전체에 결계를 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되겠지요. 사제 또한 별 다른 요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니 지금 당장은 빈도들이 무용지물이군요.”

운녹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진인. 두 분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천리안을 얻은 것과 진배없지요. 아무튼 다행이군요.”

건법진인이 다시 말했다.

“빈도가 살핀 것은 다만 산의 반쪽뿐이니 일단 정상에 오르면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상 근처에만 인영이 어른거리는 것과 계단이 끝나는 지점까지의 나무들을 모두 불태워 시야를 터놓은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오이다. 매복을 감추려는 방책일 수도 있고 시전이나 바위 혹은 통나무를 이용한 전통적인 방법을 쓰기 위함일 수도 있으니 그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일단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운녹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의를 표한 후에 수뇌부들과 이야기 하고 각당의 당주들을 불러 모았다.

수뇌부들과 당주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기다리는 무사들은 무료할 만도 하건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는 종길까지 긴장한 채 들리지도 않는 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운청산도 운녹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추억을 떠올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일천이 넘는 무사들을 이끄는 지금의 모습과 자신을 늘 피하기만 하던 과거의 모습을 어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랴.

그저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하던 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점차 노려보는 듯한 눈으로 변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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