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79)

                       삼권 끝. 

도서명 : 괴선4

저자명 : 임준욱

출처 : 천리안

  <지은이 소개/ 임준욱>

무협작가 임준욱의 스타일은 ‘성장물'이다. 몇 안되는 듯싶지만 꾸준하고 알찬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촌검무인'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성장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결혼도 하고, ‘직업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임준욱인데 특히 ‘무림인'의 이야기이다.

1999년 <진가소전>으로 데뷔하여 대표작으로 <농풍답정록> <건곤불이기> <촌검무인> <괴선> 등이 있다.

진창 속에서도 연꽃은 피어난다.

1장 폭풍 앞에 서서도 그것을 모르고

종길은 오늘도 깨어지려는 머리를 쥐고 겨우 눈을 떴다. 할 일이 없다 보니 사흘 째 연속이었고 오늘의 숙취가 가장 심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보니 아무 것도 입지 않고 긴장감마저 다 풀어헤친 채 늘어져있었다.

종길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벌거벗은 삼십대 초반의 여인이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잔뜩 찡그린 그의 얼굴이 다 쓴 휴지의 운명처럼 구겨졌다.

‘어이, 씨! 이렇게 늙은 여자였나? 에휴! 뭐 어때? 데리고 살 건가?’

종길은 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뻗어 여인의 젖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종길은 여인의 어깨를 밀어 흔들었다.

“이봐! 일어나 봐!”

그때서야 여인이 눈을 떴다. 여인은 오만상을 구기며 종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휴! 해도 너무 하는군. 아무리 취했다지만 화장독에 찌든 얼굴하며 저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까지 몰라 봤단 말이야?’

“왜요? 사람 귀찮게.”

여인이 짜증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목말라. 물 좀 줘봐.”

여인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찡그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름한 탁자로 다가가 사발에 차 한 잔을 그득 따라서 가지고 돌아왔다.

종길이 벌컥 들이키자 여인은 다시 누우려다가 물었다.

“가실 거예요?”

종길은 사발을 침상에 내려놓고 머리를 세차게 흔든 후에 발딱 일어섰다.

“가야지. 여길 살까? 내 옷 어딨어?”

여인은 탁자 너머의 작은 옷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술 세 병에 안주 그리고 긴 밤 잤으니 한 냥은 주셔야 해요.”

“젠장! 더럽게 비싸네. 알았어.”

종길은 옷장에서 옷을 찾아 금새 다 입었다. 하기야 옷이라고 해봐야 고차에 청면 바지 그리고 죽의가 전부였으니 시간이 걸릴 일도 없었다.

“어? 내 전낭 어딨어?”

종길이 여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여인은 흐릿하던 눈에 표독스러운 기운을 돋우면서 속곳을 입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이유가 뭐예요?”

“이봐, 아줌마! 이 짓 하루 이틀 하는 거야? 전낭 없는 손님을 받을 턱이 없잖아?”

“뭐야! 이런 개 같은 놈이 지 할 짓은 다하고 이제 와서 돈을 못 내겠다?”

여인이 속곳차림으로 두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쌍심지를 켰다. 종길이 지지 않고 여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줌마.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종길은 억지로 화를 삭인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손을 내뻗었다.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몸 팔아 장사한다고 도둑년 취급을 해? 오냐! 너 이놈 어디 혼쭐 한 번 나봐라. 네놈이 지금 어디에 들어와 있는 줄 모르는 모양인데, 그래 죽도록 맞고도 안 토해내나 보자.”

안 그래도 슬금슬금 문 쪽으로 다가가던 여인은 속곳차림으로 문을 벌컥 열어 제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종길은 과장되게 소리치며 뛰어나가는 여인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종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엊저녁 일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술이 과했다 해도 기억나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전전날처럼 분명히 물었었고 전낭을 매만졌었다. 여인의 말도 떠올랐다. 당신같이 듬직하고 잘생긴 사람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냐고.

“이런 제기랄! 더럽게 걸렸구나. 선불 안 받을 때 알아 봤어야 하는데---.”

종길은 방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그의 사척 곡도는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었다. 종길은 도를 등에 메고서 고개를 저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한 게 맞는가 보군. 도대체 사람을 몰라봐.”

종길은 천천히 방문 앞에 이르렀다. 살펴보니 허름하지만 꽤나 큰 홍루였다. 종길이 밤을 지냈던 그 같은 방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런 젠장!”

마당에는 벌써 십여 명의 장한들이 박도를 늘어뜨려 든 채 오직 종길만 노려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악독한 눈빛을 한 여인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비쩍 마르고 작은 체형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청년이었다. 청년은 왼손으로 왼쪽 콧방울을 누르며 힝 소리를 냈다. 누런 코딱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봐! 형씨. 어?”

종길은 청년이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문턱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며 도를 뽑아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종길의 도를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잠깐 긴장했던 장한들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리고 이내 킬킬 대는 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어? 어어어? 이게 뭐야?”

종길의 칼에 겨누어졌던 청년의 죽의가 반 동강이 나고 올이 다 풀어지면서 떼 국물이 흐르는 피부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졌다.

청년은 부릅뜬 눈으로 종길의 도와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첨과 가슴까지의 거리는 못 잡아도 일 장. 몇 번 본 적이 없는 도기라는 것이리라.

청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종길이 청년과 주변의 다른 장정들을 매서운 눈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죽을래?”

청년을 비롯한 장정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물러섰다. 종길은 칼끝을 돌려 얼어붙은 여인을 겨누었다.

“전낭 가지고 와. 이년아!”

여인은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길을 빙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종길의 칼이 이미 등으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다가와 두 손으로 받혀든 낡은 가죽 전낭을 내밀었다.

종길이 전낭을 낚아채고 주먹으로 여인을 후려치는 시늉을 하자 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종길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전낭을 열었다.

“여섯 냥에 동전? 이것 밖에 없었어?”

여인이 자세를 풀지 않고 소리쳤다.

“대협! 그대로예요. 동전 한 문 안 건드렸어요.”

종길은 전낭에서 한 냥을 꺼내 여인의 발아래 던져버리고 여인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낮게 소리쳤다.

“너무 비싸, 이년아!”

여인은 찔끔하면서도  종길의 눈치를 살피며 발가락을 꼼질거려 끝내 돈을 밟았다.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여인을 외면한 종길은 따갑게 내려쬐는 햇볕에 실눈을 뜨며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제기랄! 사시 중반은 됐겠네? 죽었다. 오늘이 그날인데---.”

종길은 갑자기 얼어붙어버렸다.

“오늘? 성도표국, 오시? 으아! 진짜로 죽었다.”

종길은 차가운 얼굴로 도파를 쥐는 문취옥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종길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뛰기 시작했다. 문 앞에 뭉쳐 서있는 장정들이 황급히 좌우로 갈라섰다.

종길이 사라지자 도기에 살갗이 긁힌 청년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따가워.”

아무리 봐도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그냥 붉은 선 한 줄이 간 것뿐이었다. 그러나 칼에 베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멍든 건가?”

장정들이 다가와 신기하다는 듯 청년의 가슴을 살폈다. 청년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아파라. 칼 맞는다고 부적 한 장 품으라더니---. 말 들을 걸 잘못했다.”

청년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겨우 일어서서 한숨을 내쉬는 여인에게 소리쳤다.

“야! 한 번만 더 칼 든 손님 전낭 후려 봐. 그때는 내가 너 먼저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

여인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감싸 쥔 왼 주먹을 청년에게 내뻗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래간만에 객잔의 분위기가 차분해졌음을 느낀 운청산은 운공삼매에 빠져들었다. 부드럽게 일어난 진기는 곧 세차면서도 끊임없는 기운이 되어 전신을 휘돌았다. 거칠었던 것도 순간이었고 진기는 이내 안정된 부드러움을 되찾아 전신세맥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차고 넘치는 기운들이 전신모공을 뚫고 나와 운청산의 주변을 휘감았다. 일순간에 비취빛이 감도는 원구를 형성한 기운들은 운청산의 전신을 빠르고 때로 느리게 휘돌면서 그 빛을 더해갔다. 흐릿하던 그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방안에는 푸른빛 원구만이 조용히 자전했다.

일각 정도가 흐른 후, 한순간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빛을 발하던 원구가 그 형체를 잃고 푸른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그 안개들은 운청산의 들숨과 날숨에 따라 일렁이다가 일순간의 전신모공을 빨려 들어가 버렸다.

운청산은 그간 쌓였던 피로와 노폐물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상쾌함을 맛보고서 천천히 눈을 떴다. 작은 은하수를 그려내던 운청산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 눈동자에 아쉬움이 어렸다.

“역시 한계인가?”

여전히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천지에서 빨아들인 기운은 반드시 백회에 모여서 양신을 이루어야 정상이건만, 외부에서 얻은 기운은 그저 진기속에 스며들어 아무 탈 없이 백회를 스쳐지나갈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이제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운을 훔쳐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물고 있는 한 양신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딱히 원통한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운청산은 운공을 거둔 후로도 주변을 떠나지 않는 기운들을 완전히 몸속으로 갈무리하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거리를 바라보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도 무언가 달랐다.

운청산은 차분히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달랐다. 십 중 삼을 차지하던 무인들이 한꺼번에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운청산은 무언가 미진한 마음이 들어 다시 사람들을 살폈다.

역시 이상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모두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외로웠다. 산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건만, 청인자가 떠난 지 하루 만에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똑! 똑! 똑!

운청산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안에 있음을 밝혔다. 강정이 문을 열고 말했다.

“운 소협! 바보 녀석이 이제야 돌아왔소. 가십시다.”

운청산은 강정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지난 며칠 간 신세졌던 방을 둘러보고 침상에 있던 작은 바랑을 등에 졌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이 손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순간 운청산은 그것을 등에 메고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본 후에 문을 닫았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표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성도표국의 정문을 지났다. 현상자, 운녹산, 당유연 세 사람과 그들의 수행인으로 따라온 운교인 등의 젊은이들이었다.

운녹산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천제일표국다운 규모올시다.”

당유연도 맞장구쳤다.

“그렇군요. 본가가 직접 운영하는 평성표국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크오이다.”

현상자가 있다고 겸양하는 말이 아니었다. 표국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컸다. 마차 다섯 대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정문에서 본전까지의 거리만도 백여 장이 훨씬 넘었다. 좌우의 거리는 더더욱 커서 이백여 장이 넘으니, 삼사천 명 정도는 수월하게 수용하고도 남으리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측에는 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인공호수까지 조성되어 넓은 공지의 삭막함을 상쇄해 주는데, 그 폭이 삼십여 장이 넘으니 뱃놀이를 해도 문제가 없으리라.

흐뭇한 미소를 짓던 현상자가 본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 대협이 오시는구려.”

세 사람이 텅 빈 공지를 지나쳐 정문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힘 안 들이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보보마다 육칠 장씩 단축해 오고 있었다. 허공에 떠있는 동안에도 신형이 무척 안정되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청성인들이 이동 시에 즐겨 펼치는 비학신법(飛鶴身法)이리라.

세 사람은 겨우 열서너 보만에 현상자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칠십 대의 노인과 두 명의 장년인들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성도표국의 주인 사천표왕 방태령과 두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는 순간 현상자 일행도 즉시 포권을 취했다.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에 방태령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본전으로 손을 뻗었다.

“가시지요.”

현상자 등이 손을 뻗어 겸양의 뜻을 보인 후에 결국 네 사람이 동시에 앞서 걸었다.

방태령이 말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즉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 시진 전에 벌써 오천은 되겠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지금은 더 많겠지요?”

운녹산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수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이 정도는 예상했지요. 그랬기에 방 국주께 어려운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어허! 어려운 부탁이라니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천 무림이 하나가 되어 무림의 정기를 지키겠다는데, 이 방 모가 이 정도도 못한 데서야 어찌 떳떳하게 청성인이라 밝히고 다니겠습니까? 어렵다 하시면 이 방모가 외려 섭섭하지요.”

방태령이 짐짓 섭섭한 체 하자 운녹산은 빙긋 미소를 지었고 그를 대신하여 현상자가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발 벗고 나서주시니 빈도가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었소이다. 감사하오.”

방태령이 다시 포권을 취해 겸양의 뜻을 표하고 일행을 둘러보았다.

“헌데 공명선사와 신수사태께서는?”

운녹산이 대답했다.

“사천무림련의 임시총단을 금사강 북변의 불일장(佛日莊)으로 정했습니다.”

방태령이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불일장이 아미계라 두 분께서 먼저 가신 게로군요. 작지 않은 공사가 되겠습니다.”

본전의 대청에는 이미 사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앙에 긴 대탁이 놓여있고 밖을 볼 수 있는 안쪽에만 여섯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서너 개의 원탁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탁자마다 가벼운 다과와 찻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태령의 청에 따라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 앞쪽에는 당연히 방태령과 운상자 그리고 당유연과 운녹산이 앉고, 뒤로는 운교인 등의 젊은 사람들이 연무장을 등지는 자리를 비우고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 등이 가라앉자 곧 시비들이 뒤로부터 들어와 사람들의 앞의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일일이 차를 권하던 방태령이 문득 정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희 수석표두가 나서는군요.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봅니다.”

방태령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아야! 그만 좀 때려요.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종길이 머리를 감싸 쥐며 강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강정은 다시 손을 들었다. 종길은 급히 물러서서 뒤따라오는 운청산의 등 뒤로 숨었다.

강정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종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오가는 물동량이 사천제일이라 할 수 있는 성도표국이었다. 그래서 성도성 안에 자리하지 못하고 남문 앞에 위치해 있었다. 그 성도표국의 정문 앞 벌판만 해도 족히 수 만 평은 되리라. 강정과 문취옥이 종길을 쉬지 않고 구박을 하는 가운데 운청산 일행은 겨우 오시에 맞춰 도착했지만, 그 넓은 벌판은 이미 발 디디 틈조차 없이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야? 족히 오륙천은 될 것 같지 않소, 운 소협? 죽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운청산의 두 어깨를 잡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종길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강정과 문취옥은 또 다시 종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종길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운청산의 머리 뒤로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그때 성도표국의 솟을대문 위로 청의를 입은 장년인 한 사람이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가 공력을 돋워 소리쳤다.

“주목하시오.”

사방의 웅성거림이 일시에 멈추었다. 청의장년인이 호목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포권을 취해 읍해 보이면서 다시 소리쳤다.

“본인은 성도표국의 수석표두 사덕명(司德明)이오. 동도들이 본인을 아껴 호목철장(虎目鐵掌)이라고도 부르지요.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소. 사천무림련이 도성 안에 위치하여 그 장소가 협소하다보니, 오늘의 행사를 본표국이 대행하게 되었소이다. 동도 여러분들께서는 모쪼록 본 표국이 무사히 행사를 끝낼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라오.”

사덕명은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으로써 다시 일어나려는 소란을 종식시켰다.

“오늘 사천무림련이 뽑기로 한 사람 수는 모두 해서 일천 명 안팎이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오셨소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시험을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간단히 하겠소. 삼십 장을 십 보 안에 뛸 수 있는 사람들은 일단 남으시오. 손끝, 칼끝, 병장기끝으로부터 일 장 밖에 있는 물체를 자르거나 베거나 깨뜨릴 수 있는 사람들은 남으시오. 그 기준에 모자란다면 정원이 남는다 해도 뽑지 않을 테니 모두 돌아가시오.”

사덕명은 다시 한 번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조건을 크게 외치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며칠 전부터 기다렸다는 소리부터 만 리 길을 달려왔다는 소리는 물론이고 원색적이 욕설들까지 난무했다.

사덕명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돌아가시오. 상대는 구대문파인 점창을 멸망시킨 세력. 기본이 안 되는 사람은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오. 사천무림련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사람을 원하오.”

그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낙담한 얼굴로 힘없이 돌아가는 사람들,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 심지어는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던 운청산의 주변 역시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셋 가운데 둘이 빠져나가 전체의 인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종길이 운청산의 뒤에서 당당히 걸어 나왔다. 종길은 두 팔을 벌려 좌우를 휘돌면서 말했다.

“하! 이것 보라구요. 금방 이렇게 어중이떠중이들 다 떠나잖아요. 어? 저기 봐! 우리 객잔에 묵었던 사람들이네. 으와!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니까 돈 제법 들었을 텐데, 본전도 못 뽑고 돌아가는구만.”

그때 문취옥이 손을 뻗어 종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쫙, 소리와 함께 종길의 민머리에 붉은 손자국이 났다.

“아야!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군. 형수고 뭐고 다 필요없어. 한 판 붙자.”

종길이 훌쩍 물러서서 도파에 손을 뻗으며 문취옥을 노려보았다. 순간 문취옥의 눈에서 한광이 번득였다.

챙!

발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 주변의 사람들이 일시에 물러섰다. 동시에 문취옥의 도에서 싸늘한 도기가 흘러나와 종길에게로 뻗어나갔다.

“으갸갸갸갸!”

종길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물러서면서 방향을 비틀어 운청산의 뒤로 숨었다. 종길은 한숨을 내쉬고서 운청산의 얼굴 옆에 한쪽 눈만 내밀고 말했다.

“잘못했어요. 형수!”

문취옥은 종길을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도를 회수하고 강정의 곁으로 움직였다.

“휘유! 더위 먹었나? 내가 잠시 돌았었나 봐.”

종길이 다시 옆으로 나오자 운청산이 강정 부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강 대협은 공대하고 문 여협은 하대하지요?”

종길이 벙긋 웃으며 말했다.

“흐! 운 소협도 참을성이 대단하오. 진즉에 물어 봤어야 할 것을 지금껏 참았단 말이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형수가 사저 되거든. 나이도 두 살이나 많지요. 어릴 때는 누나, 철들어서는 사저라 부르며 커 와서 그게 편한가 보더라구요.”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이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흔하지 않은 경운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그때 문취옥이 고개를 돌리며 낮게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맛!”

종길은 금세 자라목이 되어 운청산의 뒤로 숨었다. 문취옥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종길은 슬며시 나오면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곤거렸다.

“운 소협! 근데 나이가 어찌 되시오?”

“스물넷입니다.”

“으응? 정말?”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을 눈을 치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군. 적어도 서른은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하고 동갑이야? 도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종길은 말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운청산도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종 소협도 그럼 스물넷?”

“앗! 그건 무슨 뜻? 설마 그 이상으로 봤다는---.”

“서른둘 정도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운청산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이 기분 나쁘다는 눈빛을 드러내며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서른둘이라는 엄청난 나이를 떠올렸다는 말이오? 난 무공을 이야기 한 건데, 운 소협은 얼굴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운청산이 빙긋 웃었다. 종길이 쓴웃음을 지었다가 갑자기 반색을 하며 말했다.

“운 소협! 목숨 빚은 목숨 빚이고, 우리 동갑끼리 트고 지냅시다. 어린 것들이 하오, 합니다, 하는 것도 보기 싫지 않소?”

운청산이 다시 웃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은 입을 함지박처럼 벌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운청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

“음하하하하! 최강의 배경을 두었으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이젠 형수도 두렵지 않다.”

종길이 문취옥의 등을 보는 순간 그녀의 손은 이미 도파로 움직이고 있었다. 종길이 움찔하던 그때, 성도표국의 정문 앞으로 거리를 좁혀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종길은 문취옥의 손이 도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때 사덕명이 소리쳤다.

“자! 다들 앉으시오. 삼분지 이가 빠져나갔다 하나 아직 사람이 많소. 시간이 걸릴 테니 느긋하게 진행해 봅시다.”

사덕명이 솟을대문에서 부드럽게 떨어져 내려 성도표국 정문 앞에 버티고 섰다. 사람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의 뒤쪽에 주저앉은 운청산은 사덕명의 주변을 살폈다. 강렬한 기파를 드러내는 장년인들 여덟 명이 사덕명의 바로 뒤에 서있고 표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장년인들 뒤쪽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덕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여덟 명의 장년인들이 좌우로 갈라서면서 문 안쪽을 보여주었다. 사덕명이 돌아서며 말했다.

“동도 여러분! 보다시피 이 문을 넘어서면, 삼십여 장의 거리를 표시해 놓은 줄 열 가닥이 있소이다. 이제부터 열 분씩 차례로 들어가 자신이 기준에 합당한 인물임을 증명하셔야 하오. 그럼, 본 표국의 표사들이 지명하는 분들부터 차례로---.”

사덕명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손을 들어 질문의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사덕명은 가까운 사람을 지적하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시오?”

죽의에 장창을 지닌 중년인이 일어서서 포권을 취해보이고 말했다.

“개현(開縣) 신창문(神槍門)의 이후겸(李后謙)이오.”

“반갑소. 하실 말씀은?”

“본문은 보법에 치중하여 경공신법에는 취약하오. 솔직히 삼십 장을 십 보 안에 뛸 자신이 없소이다. 그러나 내 창은 일 장 다섯 자를 격하고도 능히 바위에 구멍을 뚫을 수 있소. 그런데 경공에 약하다고 탈락시킨다면 나로서는 억울하다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이후겸이 말을 마치자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력도 중요하지만 초식도 못지않다는 말부터 시험의 기준 자체가 엉터리라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사덕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일리가 있소이다. 좋소.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가능한 동도들은 일단 좌측으로 빠지시오. 반드시 기회를 드리겠소.”

사덕명이 좌측으로 손을 뻗는 순간 육칠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들이 빠져 나가고 사람들이 구멍을 메우자 한 청년이 일어서서 말했다.

“싸움에 이기면 장땡이지 그까짓 기준이 다 뭐요? 젠장! 지금껏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놈인데 겨우 말단무사 뽑는데 이런 대우를 받네? 한 번 싸워나 보고 포기하게 해주쇼.”

청년은 침을 뱉으려다가 앞에 사람들 머리가 있는 통에 꿀꺽 삼키고 사덕명을 바라보았다.

사덕명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소. 이 청년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 역시 우측으로 물러나 기다리시오.”

또 다시 이백여 명이 좌측으로 빠졌다. 사덕명이 마침내 앞에 포진하고 있던 표사들에게 지시했다. 표사들이 앞쪽부터 열 명씩 문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운청산이 조금씩 줄어드는 대열에 맞춰 앞으로 움직이는 동안, 사덕명의 지시에 따라 성도표국의 표두와 표사들 이십여 명이 좌우로 움직여 좌우로 빠진 사람들을 이끌고 대열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호! 저쪽이 더 재밌겠는데?”

종길이 아예 돌아앉으며 말했다. 운청산도 고개를 돌렸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육백여 명의 사람들 앞으로 다가가 마주서 있었다. 이백여 명의 사람들 가운데 이십여 명이 앞으로 나와 육백여 명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씩 지적하여 비무를 시작했다.

스무 명의 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각이 난무하고 창검이 휘돌았다. 비명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뼈 부러지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결과는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냥 돌아갔으면 몸만이라도 성했을 텐데,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부상을 입는 쪽은 대부분이 이백여 명에 속해있던 사람들이었다. 예외가 있다 하더라도 스물 혹은 서른에 하나씩 나오니, 무공의 고하(高下)와 공력의 고하가 적지 않은 상관관계가 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운청산은 싸움하는 이들에게는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은 역시 비무에 눈길을 두고 있었다. 몇몇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비무를 관찰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확인한 탓이리라.

그때 강정이 운청산과 종길을 불렀다. 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걸리겠거니 생각했는데, 채 일각도 못 되어 다 들어가고 벌써 차례가 된 것이었다.

운청산과 강정 등 네 사람은 같은 열에서 뛰었다. 탄력이 붙으면 일 보에 이십여 장도 문제가 아닌 운청산이었으니 산보나 마찬가지였다.

강정 등 세 사람과 함께 몇 보 더 걸으니 설명을 듣지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줄 선이 그어져 있고 일 장 앞으로 열여섯 개의 대나무들이 세워져 있는데, 두 개의 대나무 사이에 한 장씩 기와가 걸려 있었다. 진행표두의 설명을 들어보니 손이나 발, 혹은 병장기 끝이 줄을 넘지 않는 상태에서 기와를 깨뜨리면 되는 일이었다.

권력으로 기와에 구멍을 뚫고 한쪽으로 물러서서 살펴보니, 몇몇 사람들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정문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쯧쯧쯔, 안 들킬 줄 알았나 보네? 근데 이게 뭐하자는 거야? 상대가 가만히 서있어 준데? 이딴 것 시험이라고---.”

종길이 투덜거렸다. 그때 운청산 일행의 뒤를 따른 사람들마저도 모두 시험을 끝낸 듯 더 이상 기왓장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덕명이 표국의 마당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자연히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돌고 시선은 오직 사덕명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수고하셨소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소.”

또 다시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사덕명의 다음 말에 금새 침묵이 돌아왔다.

“능력이 다르면 대우도 달라야 하는 법. 오늘 모집하는 사천무림련의 무인은 천지인의 세 단계로 나뉘게 될 것이오.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우선 인급으로 분류되오. 이 가운데서 삼십 장을 칠 보에 뛰고 일 장 다섯 치를 격하여 기와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을 지급, 삼십 장을 오 보에 뛰고 이 장을 격하여 기와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을 천급으로 분류하겠소. 물론 완전히 결정하는 것은 아니요. 아래 급수의 사람들 가운데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위 급수 사람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겠소. 그런 후에야 급수를 완전히 결정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오. 일단 결정이 되면 그때는 천급과 지급 사람을 우선적으로 고용하고 인급 가운데서 또 다시 시험을 치른 후에 천지급과 합하여 일천 명을 뽑을 생각이오. 자! 대충 설명이 된 것 같으니 지급에 도전할 사람들은 좌측으로 나오고 천급에 도전할 사람은 우측으로 나오시오.”

그때 사람들 속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대우가 다르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말해 주시오.”

사덕명이 깜빡 잊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급의 월삯은 은 열 냥, 지급은 스무 냥, 천급은 서른 냥이오. 부상으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각급의 사람들은 여섯 달 치 삯을 위로금으로 받소. 죽었을 때 또한 여러분이 지정하는 사람에게 같은 금액의 보상금을 보내게 되오. 만약 사천무림련이 해산될 때까지 살아있다면, 그때는 일 년 치 월삯을 일시불로 받게 되오. 그리고 무림련 소속으로 있는 동안 제공되는 모든 편의도 차등을 둘 것이오. 인급의 숙사는 다섯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고, 지급은 두 명, 천급에게는 독방을 제공되고, 그 외 소속과 임무는 물론 옷과 식사까지도 조금씩 다를 것이오.”

인급만 해도 은 열 냥이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인급의 능력으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웬만한 표국의 표두 정도나 되어야 그 정도 대우를 받으리라. 그러나 당장 목숨을 걸어야 하는 처지들이니, 많다고도 할 수 없는 돈이리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는 투덜거림과 함께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살아남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지급한다 하니 의문이라는 소리도 나왔다.

결국 누군가가 소리쳐 이유를 물었다.

사덕명은 간단히 대답했다.

“죽은 사람은 전력이 되지 않소.”

“아!”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성과 표정들이 하나같이 기묘했다. 단순히 무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투입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한 것이었다.

그 표정들을 살피던 사덕명이 차갑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것들 같구려. 그렇소. 그러니 겁이 난다면 지금 물러서는 게 좋을 것이오.”

사덕명이 냉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나갈 테면 나가라는 표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지급과 천급에 도전할 사람들은 좌우로 갈라서시오.”

그때서야 사람들이 일어섰다. 좌측으로 움직인 사람들이 모두 삼백여 명에 이른 반면 우측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일백여 명도 채 안되었다.

운청산과 강정 부부는 물론 우측으로 움직였다. 문제는 종길이었다. 이 장의 도기를 뿜는 것은 어찌하면 가능할 것 같았지만, 일 보에 육 장을 연속해서 뛰는 것은 그에게 무리였다. 종길이 망설이다가 운청산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씨! 떨어지면 쪽팔릴 텐데---.”

종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운청산과 강정 부부에게로 돌아왔다. 운청산과 강정 부부는 손쉽게 통과했지만 종길은 예상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다섯 자 정도가 모자랐다.

운청산이 종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종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민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한 발에 한 자씩만 더 뛰었어도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되면 찢어져야 되나?”

강정이 진행 표두에게 다가가 물었다.

“동생인데 거처만이라도 어찌 안 되겠소?”

표두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내 권한이 아니올시다. 확정된 후에 같은 향당에 배속시켜 달라고 부탁해보시오.”

강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왔다.

“인석아! 일단 지급에 가서 시험이나 봐.”

“알았수. 청산! 나중에 보자.”

운청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길이 사라지자 강정이 놀란 눈으로 운청산을 보았다.

“저 놈이 왜 운 소협에게 말을 놓는 거요?”

운청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스물넷 동갑이더군요. 그래서 친구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으응?”

강정은 물론이고 표정 없기로 소문난 문취옥마저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운 소협도 스물 넷?”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 두 분께서도 편히 말씀하시지요.”

강정과 문취옥은 운청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허! 그 나이에---. 역시 곤륜인가?”

그때였다.

“모이시오.”

간단한 시험에 인원도 얼마 안 되는 까닭에 천급의 시험장은 이미 당락이 결정되어 있었다. 도전한 인원 아흔여덟에 합격 인원이 여든 일곱이었다.

여든일곱 사람이 대충 모이자 사덕명이 다가왔다. 사덕명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며 간혹 가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또 눈가에 웃음을 드리우기도 했다. 몇몇과는 안면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리라. 간단한 시험이었지만 그 정도의 공력을 지닌 인물이 무명소졸이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그런 면에서 여든 일곱 명 가운데 운청산의 경우는 특이하다 할 것이었다.

사덕명이 눈가의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호의가 담겨 있었다.

“아직 천급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오만 탈락될 염려는 없는 분들이니, 이제 간단하게 신상파악을 하는 과정만 남았소이다. 보시다시피 저쪽 인공호수 위에 정자가 있소. 그곳에 여덟 사람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그 분들은 모두 여기 성도표국과 운가의 천북표국, 아미계에 속하는 광명표국과 당가의 평성표국에서 오신 발 넓은 표두들이니, 혹시 안면이 있는 분이 있으면 그 분에게 가서 신원확인서를 작성해 주시고, 없으면 아무나 한 사람에게 부탁하시오. 몇몇 분에게는 따로 부탁드리는 일이 있을 것이오. 따라 주시기 바라오.”

사덕명이 정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현상자가 좌우의 운녹산과 당유연을 번갈아 바라보고서 말했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어찌 해야 되겠소?”

당유연이 먼저 대답했다.

“우리 사파에서 거둔 돈이 팔십만 냥에, 청성과 아미의 속가에서 십시일반으로 보태준 돈이 이십만 냥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서너 달 끈다 해도 천오백 명 정도는 받아들일 여유가 있지요.”

운녹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공성전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공격해야 하니 사람은 많을수록 좋겠지요. 당 대협의 말씀대로 자금에 여유가 있다면 초과하여 뽑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상대를 놔두고, 싸움부터 붙여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현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들 생각하신다 하니 반대는 않겠소만, 일단 수준을 보고 너무 처지지 않는 사람들만 초과하여 뽑도록 합시다. 쓸데없는 사상자를 많이 내는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오.”

당유연과 운녹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유연이 말했다.

“일이 끝나 후를 생각지 못했습니다. 옳으신 말씀! 그리 하도록 하지요.”

당유연이 현상자를 너머 운녹산에게 동의를 구했다. 운녹산이 미소로써 답했다. 그때 성도표국의 표사 한 사람이 다가와 방태령에게 말했다.

“국주! 천급에서 모두 여든일곱 명이 뽑혔습니다.”

방태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현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숨은 인재들이 제법 많은가 봅니다. 천급이라면 못해도 저희 표국 표두 수준이랄 수 있는데, 여든일곱이라니 성과가 나쁘다고는 볼 수 없겠군요?”

방태령의 말에 현상자 등 세 사람이 동시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인공호수의 정자에서 소란이 일었다.

방태령이 즉시 표사에게 말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여든 일곱 가운데 반 수 정도는 아는 표두가 있는 듯 스스럼없이 다가가 인사하고 신상명세를 적었다. 간단한 듯 보였다. 출신지와 출신문파 그리고 이름과 나이, 마지막으로 사망 시에 보상금을 수령할 사람을 적는 것으로 끝났다.

가장 뒤쪽에 선 운청산은 아예 관심을 끊고 본전을 흘끔 바라보았다가 호수로 눈을 돌렸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탁자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점창의 복수를 하러 가는데 점창 속가는 안 된다니,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요?”

정자와 운개교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 모두가 그 한 사람에게 쏠렸다. 운청산도 사내를 바라보았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중후한 목소리를 내는 중키의 황의 사내였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장년사내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들으셨소? 점창속가들 다수가 사문을 향해 칼끝을 돌려세웠소. 그런 마당에 점창의 속가를 어찌 믿고 받아들인단 말씀이오? 억울한 줄은 아오. 하지만 어쩔 수 없소이다.”

사내가 고개를 젓자, 황의사내는 사정조로 말했다.

“이보시오, 정 표두! 나 하나가 아니오. 우리 운방(運幇) 사람들 스물여덟이 목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본산 수복에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왔소이다. 돈도 필요 없고, 편한 잠자리도 필요 없소. 오직 선봉에만 설 테니, 함께 갈 수 있게만 해주시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게 해달라는 말이오.”

광명표국에서 십삼 년 동안이나 표두를 해오고 있는 파운수(破雲手) 정일창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저었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라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구려. 죄송하오.”

황의사내는 애가 끓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생각을 해보시오! 내가 불측한 마음을 먹고 왔다면 점창속가라고 밝히겠소?”

그때 본전에서 운녹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차게 소리쳤다.

“동도들 가운데 점창과 관련이 있는 분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주시오. 그대들의 거취문제는 점창본산의 제자들과 상의하여 처리하겠소.”

순간 황의사내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안도의 한숨인지 탄식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리를 떠나 지정된 장소로 걸어가는 황의사내의 뒷모습은 너무나 측은하게 보였다.

“다음 분!”

정일창 표두가 소리치자 황의사내 뒤쪽에 서있던 육척 장신의 마의사내가 다가갔다. 사내는 구멍이 숭숭 뚫린 거친 마의에 긴 머리를 끈 하나로 대충 묶은 것만으로도 특이하게 보였는데, 병장기도 특이해서 길이 칠 척에 무게가 사십 근은 나갈 것 같은 미첨대도(眉尖大刀)를 들고 있었다.

사무적인 어조로 종이에 적어야 할 것들을 일러주던 정일창이 문득 사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항마도(降魔刀) 보덕(普德)?”

그때 사내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속세인 이정(李正)일 뿐이오. 오랜만이구려, 정 대협.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시오. 부끄럽게도 돈이 필요해서 왔소이다.”

정일창은 이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일창 그가 아는 이정은 이런 모습으로 용병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뽑는 자리에 나타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항마도 보덕! 한때 아미정종의 복호무승들 가운데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정의 무승이었다. 만약 한 여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복호무승들을 가르치는 수좌승이 되어있을 것이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승인으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환속하였다는 소리는 들었었소. 알겠소이다. 사문 사람들에게는 함구하겠소.”

정일창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정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은 붓을 들어 그가 적어야 할 것들을 차분히 써내려갔다.

이정이 붓을 내려놓는 순간 정일창이 물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소?”

이정은 한동안 망설이는 듯 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포권을 취해보이고 정일창의 앞을 떠났다. 정일창이 이정의 등에 대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라도 돕겠소. 필요한 것이 있거든 나중에라도 찾아주시오. 반드시!”

이정은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이정의 사자와 같이 위엄 있는 얼굴과 두 눈에 물든 우수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며 그를 스쳐 보냈다.

“다음 분!”

강정 부부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이 책자의 빈칸을 채운 순간 정일창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대들이 바로 감숙칠도의 그 유명한 보살도와 야차도시구려?”

그때였다. 정일창의 옆에 앉아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강정과 문취옥의 얼굴을 살폈다.

“아! 맞소이다. 전에 서녕부로 표행을 나갔다가 뵌 적이 있지요. 나 모르시겠소? 천북표국의 진삼두요.”

강정이 진삼두라 자칭한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표두와 보표. 보호하는 대상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동종의 직업이라 할 수 있으리라. 오가다 만난 것만으로도 금새 서로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소이다. 이 년이 조금 넘었지요, 진 표두?”

진삼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동생 분들은 어쩌고?”

“재수가 없다보니 흑풍사를 떼거리로 만나 셋을 잃고 하나는 은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저기 지급에 있소이다.”

“저런!”

진삼두가 혀를 차는 순간 정일창이 물었다.

“허면 진 표두가 이 두 분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것이오?”

“기꺼이!”

진삼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강정에게 나중에 한 잔 하자는 말을 건네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정일창은 신원보증란에 동그라미를 치고 강정의 기록을 살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 대협! 사망보상금을 곤륜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있소이까?”

강정이 뒤에 서있던 운청산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달리 전할 사람도 없고, 또 곤륜 도장과 여기 곤륜의 속가 되는 젊은이에게 목숨 빚을 진 일이 있소이다.”

“음! 알겠소. 허면 두 분께서 저 소협의 신원을 보증할 수 있소이까?”

강정과 문취옥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함께 다니면서 어떻게 하든 목숨 빚을 갚아볼 요량이라오.”

강정이 미소를 짓자 정일창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취옥의 기록 다음 장을 넘겨 우선 신원보증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소협 차례요.”

정일창이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운청산에게로 건넸다. 운청산은 붓을 받자마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갔다.

“허! 용사비등(龍蛇飛騰)이란 말이 아깝지 않아. 절정의 검무를 보는 듯 하구나. 어찌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 속이 이리도 후련해질 수 있단 말인가?”

정일창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참이나 운청산의 필체를 감상했다.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던 강정은 미약한 의심을 담고서 운청산의 얼굴을 살폈다. 운청산이 이름 난에 이청산이라 적은 까닭이었다.

<강 대협! 사정이 있습니다. 모른 체 해 주십시오.>

강정은 운청산의 전음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됐습니다. 신원보증이 있으니 세 분은 따로 초상화를 그려야 할 필요가 없겠군요. 잠시 쉬시면서 기다리시오.”

세 사람이 동시에 포권을 취해보였다. 정일창도 앉은 채로 포권을 취하며 웃었다.

“아! 이 소협! 이 정모가 무식함을 덮으려다가 좋은 글씨를 보면 참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소이다. 나중에 시간이 나거들랑 글 한 폭 써주시구려. 멋들어지게 표구하여 가보로 보관하겠소이다.”

운청산은 상기된 표정으로 망설임을 보이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약속하셨소. 내 나중에 문방사우를 준비하여 반드시 찾아갈 것이오.”

운청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서 정일창으로부터 멀어졌다.

세 사람은 정자를 빠져나와 운개교 난간에 기대어 섰다. 천급과는 달리 지급과 인급을 다루는 곳은 여전히 분주했다. 지급은 이제야 신상명세를 적기 시작한 것 같았고, 진즉에 신상명세 파악에 들어간 인급은 사람이 너무 많아 아직 시작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문에서 또 다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가지 조건을 한꺼번에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따로 심사를 거친 사람들이리라.

강정은 사람들 둘러보기를 멈추고, 운청산에게 물었다.

“운 소협! 아까는---.”

운청산이 강정의 말을 끊고 답변했다.

“제가 외숙부와 떨어져 이곳에 남은 이유는 어떤 사람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그럴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라도 그 사람이 저를 먼저 알아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머니의 성을 쓴 것뿐이지요. 그러니 앞으로 운 소협이라 부르지 마시고, 아길을 부르듯이 그냥 청산이라 불러주십시오.”

강정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씨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 이씨를 따랐다? 그렇다면 결국 운가와 관련된 것인가? 혹시 이 친구가 천북 운가 사람? 그럴 수도 있겠군.’

“크아아악!”

강정은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 그가 벤 사람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리, 그의 입에서도 결코 토해내고 싶지 않은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강정 등은 동시에 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을 주었다. 정문 쪽이었다. 이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일시에 정문을 넘어섰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막아서는 표사들을 베고 바로 인급 무사들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 장이 넘는 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무인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무인의 기상을 드러내지 못했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당황한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진정한 이유를 찾자면 결국 백의인들의 손속을 탓해야 하리라.

백의인들은 무자비했다. 산개하여 들이닥친 백의인들은 죽이라는 말조차 아끼고 도를 휘둘렀다. 대충 열을 지어 앉아있던 사람들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도기들을 막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한 줄의 도기에 서너 개씩의 수급들이 튀어 올랐다. 사람들은 수십여 명이 죽은 후에야 분분히 몸을 날렸다. 그러나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오를 이룬 상태였다. 앞쪽 사람들은 궁금하니 앞으로 오려하고 뒤쪽 사람들은 겁을 먹고 물러서려 하니, 밀물과 썰물이 부딪치는 형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몸을 날렸다 해봐야 뒷사람이 앞사람의 머리를 타넘은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며 한 사람이라도 더 뒤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 위로 훼훼 휘도는 백인들의 도기들이 계속해서 원을 그렸다.

비명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핏줄기가 쉬지 않고 솟구쳤다. 그때서야 몇몇 사람들이 병장기를 대항해 보려 했지만 지급에도 도전해보지 못하는 인급 사람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그런데도 백의인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시신을 밟고 뛰어넘어 쉬지 않고 도를 휘돌렸다.

운청산이 눈을 부릅뜨고 발끝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결국 몸을 날리지 못했다. 대신에 망설이는 눈빛으로 대청을 살폈다.

‘저들이 더 빠를 것 같군.’

십여 명의 사람들이 대청에서 일제히 튀어나오고 있었다.   운청산은 자신도 모르게 발끝에 실었던 힘을 빼고 멍한 눈빛으로 백의인들을 바라보았다.

힘을 쓰느라 이를 악물었을 뿐, 백의인들의 눈빛은 너무나 차고 담담해서 냉혹하게 느껴졌다. 핏줄기가 튀어 그들의 옷과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오직 전진할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차가운 의지가 느껴지는 백의인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전율했다. 운청산도 이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보았다. 그 자신 역시 피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도전과 응전이었고, 사람들을 살리려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일방적인 학살일 뿐이었다.

‘지금껏 보아왔던 가장 비참한 광경보다 백 배 더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까, 외숙? 지금 보고 있습니다. 전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달려가 막아야 한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내 처지를 생각하니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 했을 때, 운청산은 내심 청인자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려 내장이 흘러내리고 목이 덜렁거리는 광경을 어릴 적부터 계속해서 보아왔던 운청산이었다. 그보다 더 처참한 광경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는 광경이 아니라 그 광경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엿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 마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차갑고 비정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운녹산 등 네 사람이 몇 발짝 지나지 않아 압도적인 속력으로 뒷사람들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신법을 펼치면서도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 속도로 점차 가속을 붙여 어느새 한 걸음에 십오륙 장씩을 건너뛰어 인급 지원자들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백의인들에게로 날아간 네 사람은 본능적으로 흩어져 백의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운녹산의 도가 뽑혀 나오자마자 하얀 도기를 내뿜었다. 안개 같던 도기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백의인의 도기에 닿는 순간 고드름 같은 단단한 결정을 지어 백의인의 도기를 가르고 도를 부수고 팔과 어깨를 날려버렸다.

“죽이지 말고 물러서시오.”

운녹산은 대갈을 터뜨리며 뒷걸음질치는 백의인의 어깨를 밟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또 다른 백의인은 운녹산의 기세를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운녹산은 어쩔 수 없이 백의인의 목을 날렸다. 운녹산은 허물어지는 백의인을 밟고 또 다른 백의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운녹산이 목표한 백의인들은 하나같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 같았다.

운녹산이 다섯 번째 백의인에게로 몸을 날렸다. 순간 다섯 번째 백의인이 자의로 훌쩍 물러서며 운녹산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것은 대항의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팔을 끊어달라는 요청일 따름이었다.

도를 든 백의인의 오른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또 다시 몸을 날리려던 운녹산은 백의인들 대부분이 당유연과 현상진인 등에게 제압당하거나 죽었음을 확인하고 허공에서 몸을 휘돌려 팔이 떨어져 나간 백의인의 일 장 앞에 내려섰다.

삼십 대 중반 가량의 백의인은 잘린 팔을 늘어뜨린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백의인은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운녹산을 응시했다.

운녹산이 막 입을 움찔거리는 순간, 무표정하던 백의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운녹산이 미간을 찌푸리자 백의인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왼손을 품속으로 가져가 비수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그 비수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며 하얗게 웃음 지었다.

“하하하하하! 알겠느냐? 너희들이 상대하려는 이들이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죽고자 하는 놈들은 얼마든지 오너라. 다 죽여주마. 아하하하하하!”

백의인은 운녹산에게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보내고 나서 서슴없이 자신의 목을 그었다. 피분수가 솟구쳐 운녹산의 전신으로 날아왔다. 운녹산은 도를 가볍게 흔들어 하얀 안개 같은 기운으로 전면을 가렸다. 그 기운이 흩어지려는 순간 운녹산은 부드럽게 물러나 핏줄기가 뻗치는 영역을 벗어났다.

운녹산이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조금 전 백의인이 한 말들이 다른 목소리들을 통하여 두 차례 더 들려왔다. 운녹산은 고개를 저으며 백의인의 뒤쪽에 널려있는 시신들을 훑어봤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족히 이백은 넘을 것 같았다.

운녹산은 사람들의 기색을 살폈다. 너무나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 그것도 무인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운녹산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공포를 확인했다.

‘이거 큰일이군. 그만 두겠다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운녹산은 어금니를 악다물어 걱정과 분기를 억누르고 현상진인과 당유연을 살폈다. 그들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우오오오오아아아아아!”

운녹산이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자후를 터뜨렸다. 순간 그의 전신모공에서 실낱같은 금빛 기운이 뿜어져 나와 전신을 뒤덮고 그것도 모자라 찬란한 금광이 되어 운녹산의 신형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먼지들이 일어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청석들이 들썩였다.

넋을 잃은 채 시신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운녹산을 주시했다. 순간 운녹산의 전신을 감쌌던 무극금정강기가 순식간에 그의 전신으로 스며들어버렸다.

사람들이 운녹산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때, 다시 드러난 운녹산의 얼굴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시신들 사이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의 뺨 위로 또르르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한참이나 시신들 사이를 거닐어도 사람들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운녹산은 시신들 한 가운데 이르러서 우뚝 멈춰 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운녹산의 눈물 젖은 얼굴을 주시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운녹산의 시선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운녹산의 두 눈이 아주 천천히 자신의 목을 그어버린 백의인에게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운녹산이 낮지만 뒷사람에게까지 확연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도 여러분! 저들이 바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운녹산은 지금 전율을 금치 못합니다. 이 사람은 저들이 두렵습니다. 대항할 준비도 하지 못한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할 수 있는 심성이 무섭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신념이 두렵습니다. 이 사람은 결코 이들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운녹산이 말을 끊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제야 알게 된 운녹산의 정체를 놓고 고개를 끄덕였고, 또 몇몇 사람들은 안 그래도 겁먹은 사람들에게 사기를 꺾는 말을 하는 운녹산의 의도를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운녹산이 시체들 사이에 천천히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시신의 부릅뜬 눈을 조심스럽게 감겨주고는 그의 가슴에서 쿨렁이며 흘러나오는 피를 두 손 가득 묻혔다. 술렁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눈을 치뜨며 운녹산을 주시했다.

운녹산이 다시 일어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누굽니까? 저는 알지 못합니다. 중원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니 아마 여러분들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돈이 필요했든 직업이 필요했든 간에 이 사람들은 바로 사천무림련의 깃발 아래 모이고자 온 사람들입니다. 아니지요. 이들은 이미 사천무림련의 자랑스러운 무인들입니다. 이 운녹산, 비록 지금까지 신념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질 용기가 없었다 하나, 이제 이 두 손에 사천무림련 무사들의 피를 묻힌 이상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반드시 저들을 사천무림련의 깃발 아래 무릎 꿇릴 것입니다.”

운녹산의 어조가 점차 격정적으로 변했다가 피가 묻은 오른손으로 백의인을 가리키는 순간 멈췄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운녹산의 붉은 손을 보고 있었다. 붉게 물든 그의 두 눈을 보고 있었다. 운녹산이 다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동도 여러분! 심사숙고 해주십시오. 저런 이들과 싸우고자 한다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 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운녹산의 미약한 힘으로는 여러분 모두를 지켜드릴 수가 없습니다. 두려운 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나십시오. 살고자 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의 본능,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고자 하시는 분들은 각오를 단단히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청성과 아미와 당가와 이 운녹산의 운가가 힘겹게 쳐들 정의의 깃발을 단단히 받혀주실 분들만 남아주시기 바랍니다.”

운녹산은 군중 하나하나의 얼굴을 모두 마주한다는 느낌으로 시선을 옮겨 가면서 말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언가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현상자와 당유연을 응시했다.

순간 현상자가 소리쳤다.

“청월은 어디 있느냐?”

청성의 장문제자인 청월자가 한 번의 도약으로 칠 장을 움직여 현상자의 앞에 도달해 머리 숙였다. 현상자가 말했다.

“무림련으로 달려가라. 청령검수(靑靈劍手)들을 모아 사천무림련의 무사들을 호위케 하라.”

청월자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는 순간, 당유연이 소리쳤다.

“명천은 어디 있느냐?”

당명천이 급히 달려왔다.

“무림련으로 달려가라. 암혼비영인(暗魂飛影人)들로 하여금 사천무림련의 무인들을 호위케 하라.”

당명천이 청월자를 따라 몸을 날리는 순간, 운녹산이 소리쳤다.

“교인은 명을 받으라.”

운교인이 달려와 운녹산의 붉은 손 아래로 허리를 접었다.

“금검대원들을 소집하여 사천무림련의 정영들을 호위하라.”

운교인마저도 송월자와 당명천의 뒤를 따르자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운녹산이 누구인가. 현상자와 당유연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청성의 송월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현상자와 당유연의 신분을 짐작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바로 사천무림의 사대거두 가운데 세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안위를 챙겨주고 있었다.

무인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 했던가. 어느새 군중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공포는 사라지고 자신도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호기가 이는 듯했다. 곧 몇몇 이들이 소리쳤다.

“싸우자. 사천무림련의 깃발을 점창산으로!”

“사천무림련 만세!”

“사천무림련 만세!”

몇 마디 터진 후로 곧 ‘사천무림련 만세’라는 외침이 파도가 되어 성도표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운녹산은 저마다의 병기를 쳐들고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겨우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당유연과 현상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운녹산을 향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일 많은 자넨데 이것저것 하라 해서 미안하구먼.”

백염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자 천기신사가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천기문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답답했었는데 이제 갑갑증이 좀 풀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허면 하던 일은 진척이 좀 있는가?”

“손에 쥔 건 없습니다만 구할 정도 이룬 것 같습니다. 적합한 재료들만 찾으면---. 해서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문도들을 이끌고 점창산으로 다시 갈까 합니다만.”

“음! 구할이라. 딱히 시킬만한 일은 없어. 고생했으니 쉬게 해주고 싶었을 따름이지. 가야 된다면 가야겠지. 허나 얻을 것만 얻고 싸움에는 따로 개입하지 말게.”

천기신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백의여인이 백염노인 앞에 이르러 서류상자를 내려놓고 다시 방을 나갔다. 백염노인은 서류상자 위쪽에 따로 올려져 있는 ‘사천지급’이라고 적힌 봉서를 들었다.

내용을 다 읽은 백염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허! 서두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나이가 들어도 천성을 바꾸지는 못하는가 봐.”

천기신사가 이채를 발하며 응시하자 백염노인은 방금 읽은 종이를 돌려 밀었다. 천기신사가 종이의 내용을 살피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께서 하신 일이라고 단정하시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빨리 끝내고 싶으신 게지요. 결과도 그리 날 것 같습니다만.”

“그리 생각하는가?”

“스물 하나를 이백팔십과 바꾸었습니다. 신념에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돈에 이끌린 자들이니 겁을 먹지 않겠습니까? 충분한 인원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모자라는 수만큼 사대세력의 정예를 채워 넣을 수밖에 없을 테니, 적어도 한 번의 싸움 정도는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염노인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은 최선의 결과. 내 생각은 달라. 오합지졸들이 와야 이모저모 계산해 가며 적당히 상대할 수 있을 텐데, 그걸 보고도 오는 놈들이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번 일로 운가의 가주가 두드러져 보이니 싸움도 하기 전에 영웅 하나 만들어 놓은 셈이 된 게지. 앞으로 어찌하는가가 관건이 되겠지만 일단은 용병들이 따라야 할 구심점이 생긴 게야. 게다가 우상이나 자네의 예상을 뒤집고 영웅이 나왔으니 그 자야 말로 효웅일세.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게다가 이 일로 그들은 오히려 신중해질 걸세. 안 그래도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아 답답해 죽겠는데 몸을 더 사린다면, 곤란해지는 이는 직접 부딪쳐야 하는 우상이 될 거야.”

천기신사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염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가거든 내 대신 야단 좀 쳐주게나.”

“제가 감히!”

“아니야. 흑강 그 친구는 욕 좀 먹어야 돼.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이거다 싶으면 저질러버리니 뒷감당하기가 힘들어.”

천기신사는 대답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백염노인은 천기신사로부터 눈을 떼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세상 일이 뜻대로만 된다면야 반백 년을 동분서주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러나 크게 틀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암! 없어야지.”

*          *           *

운청산은 두 손을 깍지 끼어 베개를 만들고 벌렁 드러누웠다. 비탈진 풀밭 위라서 누워있어도 아래쪽 경관을 모두 볼 수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넓은 만큼 여유롭게 흐르는 금사강에서는 어부들이 느린 곡조의 어부가를 부르며 고기를 잡고, 강변에서는 아이들이 물놀이 하며,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한데모여 대나무로 물건들을 만들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빙긋 미소를 짓던 운청산이 눈을 더 아래쪽으로 내리깔았다. 발밑으로 불일장이 보였다. 마을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산비탈에 지어진 불일장은 아미속가이며 사천 서남부 일대에서 속세불(俗世佛)이라 불리는 금도협(金刀俠) 황장령(黃長嶺)의 집이었다.

운남과의 교역으로 수대에 걸쳐 부를 일으킨 불일장답게 성도표국에 버금갈 만큼 크고 넓을 뿐만이 아니라 장원 구석구석에 운치있는 호수들과 정자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약 장원의 담 좌우에 급조한 듯한 수십 칸의 목조건물들이 없었다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하리라.

댕! 댕! 댕! 댕! 댕!

갑자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청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신축한 목조건물들을 살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서쪽 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병진훈련을 또 하는가 보군.”

아흐레 전, 성도표국의 일을 겪고 그 이틀 후에 불일장에 도착했다. 인원을 점검해 보니 천급무사 여든 일곱 전원, 지급무사 이백칠십오 명 가운데 이백이십세 명, 인급무사 구백이십여 명 가운데 육백칠십사 명만이 남아있었다. 모자라는 인원은 결국 겁을 먹고 오는 중에 포기한 것이리라.

당일에 방을 배정하고 바로 조직편성에 들어갔다.

연주(聯主)는 현상자가 맡고, 수석호법은 공명선사가, 좌우호법은 당유연과 신수사태가, 그리고 군사는 운녹산이 맡는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사대세력 그 어느 한곳도 확실한 비교우위를 자랑하지 못하니, 이는 명목상, 혹은 속가가 아닌 출가한 이들이 앞장선다는 정치적 의미가 담긴 직위에 불과하리라. 결국 군령이 현상자의 이름으로 나올 뿐, 모든 결정은 다섯 사람의 회합에서 나온다고 보아야 옳으리라.

수뇌부 아래쪽의 조직은 사천무림련의 세에 비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편성되었다.

사대 세력의 장로급 무인들로 구성된 군룡전(群龍殿)이라 하고, 무당과 화산 등 사천 밖의 문파들이 예의상 보낸 무인들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천우단(天佑團)을, 점창의 제자들과 그 속가제자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노호단(怒虎團)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룡전의 예하로 사대세력의 정영들과 천지인무사들을 나누어 오당을 두었다.

운녹산의 제안으로 오당은 우선 사방신의 이름을 빌어 사대세력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운가가 현무당을, 아미가 주작당을, 당가가 청룡당을, 청성이 백호당을 책임 맡았다.

이 사당은 사개 향으로 조직되었고 각 향에는 다시 사개 조를 두었는데, 각파의 정영 한 사람이 조장을 맡고 그 밑으로 지급무사 세 명과 인급무사 열 명을 하나로 묶었다.

지급무사 가운데서도 무공이 남다른 이들을 사당에서 제외시켜 천급무사와 합류시키고 거기에 관음사의 정예 사십팔 명과 사대파에서 차출된 일백여 명을 하나로 묶어 정명당(正命黨)을 만들었으니, 그래서 오당이었다.

전체를 살펴보면 호전적인 색채가 짙은 조직이었다. 정보를 다루는 조직이야 원래 있어도 없다고 하는 것이지만, 물자보급 문제는 그렇지 않은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각파의 표국들에게 부담시켜 전체조직 안에 편성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결국 단기간에 결과를 보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조직 내부의 성격과 짜임새로 살펴보면 사당이 할 일은 길을 뚫는 것으로 정해진 것 같았고, 군룡전과 노호단 그리고 정명당이야 말로 상대의 주력과 맞붙게 할 계획인 듯 보였다.

병진훈련은 그와 관련된 것이리라.

산을 올라야 했다. 근 천 장 이상을 올라야 했다. 그래서 사당에 편입된 사람들은 둘째 날부터 열외 없이 병진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비시진(飛矢陣).

좁은 산길을 오르기 위해서는 공간을 많이 잡아먹는 병진은 무용지물. 결국 사행진(蛇行陣)을 변형하여 조장과 세 명의 지급무사가 화살촉이 되어 길을 뚫고 인급무사 십 명이 두 줄로 늘어섬으로써 화살대가 되어 좌우를 방어하는 단순한 병진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선택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리라. 사대파에는 세상이 두려워하는 진법들이 적지 않았으나, 같이 자라고 같은 무공을 익혀서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가르쳐 봤자 혼란만 가져오리라.

그러나 운청산이 보기에는 분명히 개선할 여지가 있었다. 평지에서 펼치는 사행진이라면 머리가 꼬리가 되고 꼬리가 다시 머리가 되는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하지만 비시진은 아니었다. 우선 화살촉이 너무 약했다. 정면으로 강한 적을 맞이하여 그곳이 깨어진다면 그 조는 완전히 괴멸될 수밖에 없었다.

고수의 수가 모자라 화살촉이 되는 부분을 강화할 수 없다면 적어도 조끼리 연동할 수 있는 조직훈련이 필요한데 운청산의 눈으로는 그런 노력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살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 밖에 없는 훈련들. 점창에 이르는 길이 곤륜의 길고 좁은 계단과 같다면, 그 양쪽으로 매복이라도 있다면, 앞이 약한 비시진은 깨어질 것이고 옆이 무른 비시진은 반드시 깨어지리라.

그러나 운청산은 따로 조언할 생각이 없었다. 병진훈련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엿새였다.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상황에다가 다른 이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 중간에 개선될 여지가 남아 있었고, 점창의 산세를 모르니 정확한 지적도 불가능했으며, 또 괜히 나서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은 한동안 비사진을 이룬 채 서쪽 산비탈을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특별히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운녹산의 얼굴이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혼란스러웠다. 사랑했다던 사람으로부터 얻은 아이를 평생토록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슴없이 손바닥에 피를 묻히던 사람, 뜨거운 웅변이 아니라 가슴 절절해지는 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사람이 바로 운녹산이었다.

문취옥은 코웃음과 함께 운녹산의 행동을 비웃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얄팍한 수작이라고. 운청산은 내심 문취옥이 틀렸기를 바랐다. 그녀 냉소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판단을 내리려면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내심으로는 문취옥의 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아니기를 강하게 바라면서도---.

‘단정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아직은---.’

운청산은 문취옥의 말에 기우는 내심을 흐트러뜨리고 눈을 떴다. 문취옥의 차가운 얼굴과 운녹산의 눈물 흐르는 얼굴이 동시에 사라졌다.

“후우!”

산비탈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도 습관이 된 듯 했다. 정명당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과업을 주지 않은 탓에 운청산은 벌써 열흘 째 같은 자리에서 온갖 생각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운녹산에 대한 생각, 도대체 현무당에 속한 운화인과 운종인을 무슨 수로 보살펴주는가에 고민, 떠나보낸 청인자에 대한 생각 등등 많은 것을 떠올렸지만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운청산은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청산! 또 여기 있었어?”

운청산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길이었다. 어찌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전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종길은 운청산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후와! 너무 더워! 고차도 죽의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운청산이 피식 웃으며 서산머리에 닿으려는 해를 힐끔 보고서 말했다.

“저 사람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벌써 두 시진 째 저러고 있는데?”

종길은 운청산의 눈짓에 따라 서쪽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헤헤헤! 정말 운이 좋았지. 저기 끼었더라면 칼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탈진해서 죽었을 거다.”

지급무사 이백서른세 명 가운데 오직 서른 한 명만이 정명당으로 편입되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말할 만 하리라.

운청산은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고 노을빛으로 반짝이는 금사강의 물결을 응시했다.

종길은 왼손으로 민머리를 쓰다듬어 땀을 훑어내고서 다시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땀 한 방울 안 흘리네? 너무 하잖아?”

그러나 운청산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종길이 운청산의 옆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히고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청산! 도대체 이유가 뭘까? 나도 여섯 살에 무공에 입문해서 여덟 살부터 도를 잡았다고. 다른 건 몰라도 무공 욕심은 있어서 나름대로 노력도 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진전이 없는 거야? 근본적으로 무공의 바탕이 다른 걸까? 아니면 내 재질이 미천한 걸까?”

“모르겠는데? 둘 다일까?”

운청산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종길은 고개를 비틀어 노려보았다.

“그런 말 듣자는 게 아니잖아? 격려를 해줘야지.”

운청산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왜’ 라는 질문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빛으로 종길을 바라보았다.

“쳇!”

종길이 외면하자 운청산은 빙긋 웃으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공은 누구한테 배웠는데?”

“아버지. 감숙에서는 알아주는 보표였지. 열다섯 살 때까지였나? ‘잘 하는구나. 다음번엔 같이 가도 되겠다.’ 그렇게 말하고 가더니만 돌아오지 않았어.”

종길의 목소리가 안개 저편에서 속삭이는 듯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리움!

운청산은 문득 종길이 부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리움을 느낀다는 것, 그로서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운청산은 씁쓸히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보표를?”

“음! 엄마가 죽었던 그 해, 그러니까 열여덟이 된 그때부터였지.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죽었으며 뼈라도 챙겨 엄마 곁에 묻어줄까 해서 나도 보표가 되었지. 오 년을 수소문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슬픔은 이미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듯 종길의 음성은 담담했다. 운청산은 흐릿한 미소가 어린 종길의 옆얼굴을 엿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결국 열다섯부터는 혼자 연무한거네?”

“음! 그렇지, 뭐. 그래도 열심히 했다구. 그때 이미 아버지처럼 보표가 되겠다고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열심히 했는데 왜? 정말 재질이 없는 걸까?”

“흠! 예전에 사부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지. 바둑을 무척 좋아하지만 실력은 하수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소원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마을의 중수를 이겨보는 것이었어. 그래서 작심을 하고 온갖 기보를 들고 산 속에 들어가 십 년 동안이나 용맹정진 했단다. 이제 고수가 되었을 거야 하고 하산하여 중수에게 승부를 청했겠지.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불계패. 하수는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물어봤지. 그 사이에 실력이 늘었냐고. 중수의 대답은 하수를 절망 속으로 빠뜨렸다. 평소 이기는 사람에게는 이기고 지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진다고 대답했으니까.”

종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크! 결국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소리?”

“비슷한 말이지. 사부님이 대문파의 이점을 말하시면서 덧붙이신 말이 있지. ‘빈약한 기초로 홀로 한 십 년의 수련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헛될 수밖에 없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계승하여 이루어 놓은 체계를 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제대로 된 스승이 있다면 오 년이면 마칠 수 있는 것이 기본이라지만, 홀로 한다면 수백 년, 아무리 천재라 해도 수십 년의 투자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청출어람은 흔해도 나 홀로 천재가 나기는 힘든 것이다. 천재라 해도 한 세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기초를 쌓아줄 기반이 있어야 한다. 대문파가 유리한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그리 말씀하셨지.”

종길은 한숨을 내쉬고서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운청산이 과연 느끼고 있는지 모르지만 종길은 운청산의 입가에서 분명한 그리움의 흔적, 미소를 보고 있었다. 종길은 운청산과 마찬가지로 푸르기만 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그런 것인가? 여기까지가 내 한계? 그런데 청산! 너는 사람 기분 참담해지는 말을 쉽게도 하는구나.”

운청산은 그가 느끼지 못하는 미소를 짙게 만들며 말했다.

“내 말에 내 의견은 없어. 난 아무 것도 몰라. 이제 겨우 세상이라는 것을, 강호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야.”

종길은 운청산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그가 겪어본 운청산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견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종길 그가 운청산이라면 당연히 가졌을 법한 자신감이나 오만함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종길이 보기에는 운청산은 바르게 자라 함부로 대하기가 부담스러운 아이 같았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취옥과 같았고, 행동이 조심스럽고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강정과 같았다. 그러나 그가 강정 부부와 다른 것은 무엇을 알고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면서 느끼는 그대로를 말한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종길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쨌든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왜?”

종길은 눈을 꿈뻑이며 빤히 바라보는 운청산의 눈길을 피해 머리를 긁적였다. 한참을 우물쭈물 하던 종길이 운청산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런 말투는 사람의 꿈을 짓밟는 거야. 무엇을 잘 해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 넌 할 수 있어.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꿈을 이룰 거야.’하고 격려를 해줘야해. 그렇게 단정적으로 안 된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무슨 낙으로 살겠어?”

운청산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답했다.

“남의 말이 중요한가? 납득이 될 때까지 해보면 되잖아? 왜 남의 말에 따라서 살아야 하지? 그리고 꿈을 이야기한 적이 없잖아? 또 안 된다고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종길은 갑자기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세상모르는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종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차분히 말했다.

“꿈이 반드시 무엇이 되겠다, 무엇을 이루겠다, 하는 것만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나아지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 자체가 꿈이랄 수 있는 거지. 꿈은 자란다. 조금씩 나아지다 보면 결국 무언가가 되고 싶고 무언가가 하고 싶어져. 엇! 어쩌다 말이 이렇게 된 거야? 어렵군. 에이 씨! 모르겠다. 어쨌든 말이야,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칭찬과 격려가 힘이 돼. 그리고 지금보다 나아지는 것이 내 꿈이야. 이 짓을 때려치우기도 싫지만 칼 맞고 싶지도 않거든. 그리고 조금 더 살아서 어떻게 늙어가는 지 경험해 보는 것도 꿈이라면 꿈일 수 있지. 뭐, 지금은 그래. 청산! 넌 꿈이 뭐냐?”

종길이 생각하기로는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을 심각하게 생각하던 운청산이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으응? 정말? 너 정도 되는 인간이 꿈꿔본 적이 없어? 천하제일인이 된다든지, 아니면 태을검선 그 양반처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든지, 아니면 아주 하찮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혼인하고 토끼 같은 자식새끼들 낳아 기른다는 꿈조차 갖고 있지 않단 말이야?”

운청산은 다시 생각해보고도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종길이 신기하다는 듯 운청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도대체 무슨 수로 그 경지에 이르렀지? 네가 아무리 곤륜의 제자라지만 그 정도 되려면 정말 뼈를 깎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나도 세상이 알아주는 고수들을 제법 봐왔어. 하지만 네 나이에 너 정도 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 세상이 이리 불공평한 거야?”

운청산은 종길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면서도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생각해 보니 꿈이 없었던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 꿈은 이미 깨어져버린 것, 또 말한다고 쉽사리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때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댕! 댕!

종길이 불일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밥 먹으란 소리군. 너무 일러. 아침까지 기다리려면 배고픈데---.”

운청산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무척 배고플 거야. 가자.”

운청산이 먼저 걸었다.

“아길! 근데 저기 어제부터 새로 짓는 건 뭐야? 방이 남는다는 것 같던데---.”

운청산이 불일장 좌측 정명당 아래쪽에 신축하는 건물을 보면서 물었다.

“아! 그거. 천혜원 분원을 짓는다더군.”

“천혜원? 뭐야?”

종길이 놀라는 한편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혜원도 몰라? 천혜원은 당가가 운영하는 의약원이야. 당가가 주도하고 아미가 도와 부상자를 수용하겠다나 봐.”

“좋은 일이네. 근데 왜 그렇게 시큰둥해?”

“쳇! 점창에서 다친 사람을 치료하려면 적어도 그 근처에 의원을 지어야지 육백 리 떨어진 곳에 지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오는 동안 다 죽겠다.”

운청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다치면 죽기 전에 반드시 저기까지 옮겨줄게.”

종길은 간만에 듣는 운청산의 농담에 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러지 말고 아예 칼 맞지 않게 해주라.”

운청산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종길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뭐야? 그럼 좀 전에 한 말이 농담이 아니란 말이야?”

“진담인데.”

운청산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며 종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청산이 말했다.

“좋아. 오늘 밤에 네 무공 보여줘. 곤륜의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은 너도 알다시피 허락을 얻기 전에는 안 되는 일이고, 다만 네 도법을 보면서 허점과 개선점 정도는 찾아줄 수 있을 거야. 그거라면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운청산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내심 놀랐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작지만 변화였다. 처음으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존재 혹은 능력을 생각한 것이었다. 세상에 적응해가는 변화였고 종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일으킨 변화였다.

운청산이 묘한 기분이 되어 미소를 지은 그때, 종길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정말? 정말 봐 줄 거야?”

운청산이 고개를 돌려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종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금 좀 떨어져주면. 끈적여서 싫거든.”

종길은 운청산의 어깨에 얹었던 팔을 내리고 훌쩍 물러서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유, 이 자식! 정말 매정하게 말하지. 근데 그래도 좋다. 흐흐흐흐.”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종길은 힘겹게 문을 열고 기어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한 자도 못되는 마루턱에 앉아 정신을 차렸다. 불일장의 서쪽 담에 기대어 지은 방이라 볼 수는 없었지만 하늘은 이미 여명이 터오고 있으리라.

종길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우로는 똑 같은 구조의 수백 개의 방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방 앞쪽 마루에는 종길과 같이 늘어져 잠깨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 좁은 마당에는 이미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손발을 휘두르고 내차면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으아함! 으악! 아파라.”

종길은 기지개를 다 펴지도 못하고 몸을 움츠리며 얼굴을 구겼다. 그때 옆방의 문이 열렸다. 종길이 돌아보니 어깨에 수건 한 장을 걸치고 허리에는 세 자 가량의 도를 찬 문취옥이 나서고 있었다.

문취옥이 마루턱에 서서 기지개를 활짝 펼쳤다.

“아유! 개운해. 날아갈 것 같네.”

종길이 얼굴을 구긴 채로 문취옥에게 말했다.

“형수님! 적당히 좀 합시다. 대충 지은 거라 벽이 얇다구요. 일부러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문취옥이 종길의 웅크린 전신을 훑어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우린 부부야. 거슬리거든 네 방 가서 자.”

문취옥이 마당으로 내려서자 뒤따라 강정이 나왔다.

“그래, 이 자식아! 네 방 놔두고 왜 청산 방에서 자냐?”

그때 종길의 뒤로 운청산이 나왔다. 운청산이 강정에게 인사하고 문취옥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엊저녁에는 많이 아프신 것 같던데?”

순간 종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던 문취옥이 운청산을 째려보면서 도파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것을 보고는 도파에서 슬며시 손을 내려놓고 대신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관음사 비구니들이 단체로 머물고 있는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취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운청산의 곁을 스치며 중얼거렸다.

“몰라도 너무 몰라.”

“우헤헤헤헤헤!”

종길이 종종걸음 치는 문취옥을 손가락질 하며 배를 잡고 웃고 강정도 쓴웃음을 짓는데도, 운청산은 영문을 몰라 강정과 종길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운청산이 종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그때 강정이 운청산의 옆에 와 앉았다. 종길이 운청산에게 웃어 보이고 강정에게 말했다.

“처음 보는데요. 천하의 독종이 부끄러움을 다 타다니, 놀랠 노자네요.”

강정이 종길을 노려보며 주먹을 비틀어 쥐었다.

“독종이라니? 죽을래?”

종길은 꿀리지 않고 말했다.

“독종이지 않구요? 조금만 수틀려도 칼 뽑지,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죽이라 그러지, 솔직히 말해서 정말 성격 더럽다구요. 자! 형수님도 없는데 솔직히 말해 봐요. 힘들지 않아요?”

순간 강정은 주먹을 내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러냐? 난 잘 모르겠는데. 그냥 내 여자야. 내 여잔데 선악이 어딨어?”

그때 운청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혼인하면 좋은가요?”

강정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운청산의 진지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경우는 좋아. 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야 더 바랄 것이 없지. 그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라면 지금처럼 세상을 떠돌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그래도 오도문(五刀門)하면 감숙에서는 알아주는 문파니까.”

운청산도 오도문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거친 감숙의 북방에서도 그 실전적인 도법으로 독보하는 도문이라 했다. 문취옥은 바로 그 오도문의 무남독녀였고 강정은 세 제자들 가운데 막내 제자라 했다.

만약 강정이 아니었다면 문취옥은 오도문의 대제자인 비표도(飛豹刀) 오환(吳煥)의 부인이 되었으리라. 그 안의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강정과 문취옥은 결과적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대로한 오도문주 문인악(文仁岳)은 결국 문취옥과 의절하고 강정을 파문하는 것으로써 결말을 지어버렸다 했다.

강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을 직시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운청산의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

“그건 왜 묻나? 혹시 혼인을 생각할 만한 처자라도 만난 겐가?”

순간 운청산은 느닷없이 떠오르는 얼굴에 당황하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

강정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지 않는가? 생각 있으면 해버려.”

그때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

나뭇가지 위에 앉은 참새들처럼 나란히 앉아있던 운청산 등이 목소리를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수건을 든 파의마발의 장년인이 서 있었다. 바로 항마도 이정이었다.

운청산 등 세 사람이 분분히 일어나서 인사했다. 지난 며칠 동안 강정의 옆방을 쓰고 있는지라 안면을 튼 지 오래였다. 게다가 성도표국에서 느꼈던 그 쓸쓸함은 갈무리한 지 오래고 드문드문 미소까지 보이는 지라 어색함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정이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그런데 강 대협! 어제는 너무 하더구려. 안 사람 생각나서 서러웠소.”

별 다른 표정도 없고 무뚝뚝한 어조로 한 말이라 오히려 우습게 들렸다. 강정은 쑥스럽게 웃음 지으며 다시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이 대협! 앞으로는 시간을 가리지요.”

이정이 한 걸음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시간만 가린다? 만만치 않구먼. 그런데 자네! 몸은 괜찮나?”

이정의 눈길이 종길의 얼굴에 꽂히자 종길은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전신을 웅크렸다.

“으아! 아파라. 밤새도록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엊저녁에 우연히 봤다네. 이 친구, 사정이 없더구먼.”

이정의 시선이 이번에는 운청산에게 꽂혔다. 운청산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이에 종길이 말했다.

“그렇지요? 이 녀석은 마귀예요. 순진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내심으론 뼈 마디마디 다 분질러 놓기로 작정한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뼈 속까지 각인되면 나중에는 결국 그 값을 하겠지. 그럼.”

이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강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운청산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운청산이 그냥 웃기만 하자 강정은 종길을 바라보았다. 종길은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을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마음대로 공격해 봐. 십성 공력을 일분도 유지하지 못한단 말이야?”

강정은 더 더욱 모르겠다는 얼굴로 종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종길이 강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형! 남한테 이런 소리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치욕이다. 죽고 싶지.”

강정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이 슬픈 얼굴로 운청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놈이 어제 나한테 그랬어요.”

강정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청산이? 에이, 아니지. 말했다 해도 어조가 달랐을 거고 또 분발하라고 한 소릴 거야.”

순간 운청산이 강정을 직시하며 말했다.

“진심이었습니다.”

“보세요. 이 녀석은 마귀예요. 그게 글쎄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종길은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듯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녀석 말대로 패력도십삼세(覇力刀十三勢)를 펼쳐보였지요. 가만히 보고 있더니만 일 장 정도 되는 대나무를 꺾어와 무조건 덤비라는 거예요. 덤볐어요. 모자란다는 건 알지만 너무 무시한다 싶어서 대나무를 동강동강 잘라버리려고 했는데---.”

“했는데?”

종길이 말을 끊자 강정이 궁금하다는 듯 채근했다. 종길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운청산을 힐끔 보더니만 말을 이었다.

“대나무와 부딪쳐 보지도 못하고 수백 번이나 찔려버렸지요. 보세요.”

종길이 아예 강정 앞으로 다가와 상반신을 들이댔다. 사천으로 들어온 이후 소매 없는 죽의 한 장으로 버틴 종길이라 피부가 시커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상반신 곳곳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강정은 종길을 돌려세우기까지 하며 붉은 반점들을 일일이 세어보고 말했다.

“어허! 열일곱 군데나? 정말 많이도 찔렸구나. 죽고 싶었겠다.”

강정이 종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길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신이 난 것 같기도 한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이 녀석 정말 잔인한 놈이라구요. 찔러도 꼭 찌른 데만 다시 찔렀다구요. 아파서 나뒹구는 나를 보면서 이 놈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강정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하자 종길이 다시 운청산을 원망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넌 오늘 백 번 넘게 죽었다. 사흘 후에 다시 하자. 그러고 가버리는 거예요.”

종길이 한숨을 내쉬자 강정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눈을 치떴다.

“청산! 너 보기보다 몰인정한 녀석이구나?”

운청산은 담담한 눈빛으로 강정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배웠습니다. 찌른 데 또 찌른 것은 패력도십삼세의 허점이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찔리는 곳이 줄어드는 만큼 허점도 줄어들겠지요.”

순간 종길이 놀라 운청산에게 물었다.

“그럼 내일 모레 할 때도 찌른 곳 또 찌른다는 소리야?”

운청산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허점 줄이기를 원하는 한은 계속.”

종길이 울상이 되어 되물었다.

“방법도 안 가르쳐주고?”

“패력도십삼세는 네 도법이다. 가르쳐주면 네 것이 아니야. 스스로 보완해야 돼.”

종길은 절망의 신음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때 강정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정은 패력도십삼세를 잘 알고 있었다. 종길의 아비 종무헌(宗武憲)은 한때 패혼마도(覇魂魔刀)라 불리면서 감숙제일보표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실전으로 갈고 닦인 그의 패력도십삼세는 대상들의 구원이요 마적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만약 종길의 공력이 강정 자신과 비등하다면 쉽게 승부를 내지 못하리라.

강정은 새삼스럽게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청산! 부탁이 있는데---.”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정은 열정이 담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길에게 해주는 것, 내게도 해 주게.”

종길이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놀란 눈으로 강정을 바라보았다.

“대형까지 왜?”

강정이 절실한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칼을 잡았지만 칼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는 동안은.”

운청산이 강정의 간절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저녁부터 하지요.”

강정이 운청산의 두 손을 덥썩 잡았다.

“청산! 고마워.”

종길이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강정에게 혀를 차보였다.

“쯧쯧쯧, 내일 아침에도 고맙다고 할 수 있을지---.”

화려하진 않았지만 어느 하나 예사롭게 대하지 못할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골동품들이 적재적소를 자리한 방이었다. 그 방 한 가운데 위치한 탁자를 홀로 차지하고 있는 운녹산은 탁자 위에 수십 장의 종이들을 늘어놓은 채, 그리 두껍지 않은 책자 하나를 들추어 보고 있었다.

“흐흠! 항마도에 이어 보살도 강정이라? 역시 도가 강세인가? 그런데 보살도라? 성격이 좋은가 보군. 보표단 감숙칠도의 첫째. 호! 진삼두가 신원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의심할 필요 없겠지.”

운녹산은 책장을 넘겼다.

“야차도 문취옥? 보살과 야차? 부부라? 허허허! 재밌군. 그럼 여기도 진삼두가? 그렇군.”

운녹산은 더 볼 필요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기려 했다.

“교인입니다.”

방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운녹산은 책자에서 손을 뗐다.

“들어오너라.”

운교인이 서류 한 뭉텅이를 가슴에 품고 들어와 운녹산에게 절하고 탁자 위에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신원 확인 차 떠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고 타지에 의뢰했던 신원확인절차도 모두 끝냈습니다.”

“그래? 확인해 보았더냐?”

운교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확인이야 해보았지만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운녹산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물었다.

“어째서?”

“초상화 한 장 들고 확인한다는 것은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확인일 뿐이지 그 사람의 내심을 알아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점창의 일이 없었다면 점창제자들 가운데 배신자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다. 더구나 결과가 너무 이상합니다. 단 한 사람 의심할 만한 이들을 찾지 못했으니 소자는 오히려 불안합니다만.”

운녹산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간에 이탈한 사람은 없더냐?”

“불일장에 당도한 이후로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되었다. 분명히 간자가 있을 것이로되 별달리 할 일은 없을 터. 싸울 때 돌아서면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나 많은 사람을 얻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분위기는 어떠하냐?”

운교인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돈 받고 놀 수 있어서 좋다는 분위기였습니다만 서서히 초초해지는 모양입니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는군요. 덥다고 늘어져만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무하기 시작했고, 서로 칼을 맞대는 자들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연주님과 호법들께 내가 반 시진 후에 기정전(起正殿)에서 뵙잖다고 전해 올려라.”

운교인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었다.

“그럼 이 서류들은 어찌 할까요?”

“그것들까지 일일이 볼 여가가 없다. 이제 됐으니 천밀각(天密閣)에 넘겨주어라.”

운교인은 그가 조금 전에 가지고 들어왔던 서류들을 다시 품었다. 그때 운녹산이 조금 전에 보고 있던 책자를 힐끔 보더니 그것을 덮어 운교인이 든 서류더미 위에 놓았다.

공명선사는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무사들을 지나서 기정전이라고 임시 명명한 불일장 내처의 마루 위로 올랐다. 길고 좁은 마루를 따라 건물을 돌다가 마침내 건물의 입구 앞에 이르렀다.

“장문대사!”

공명선사가 돌아서서 보니 예순 줄에 든 선한 인상의 초로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일장의 장주 금도협 황장령이었다.

공명선사는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드리우며 초로인을 기다렸다. 두 사람이 서로 합장하여 인사했다.

“소식이 왔습니다. 장문대사.”

황장령의 말에 공명선사가 반색을 했다.

“아! 그렇습니까?”

“주위에 물어보니 모두 사냥꾼으로 알고 있다 하더이다. 부인이 많이 아파 아이들의 생계까지 힘들어져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온 듯---.”

황장령이 공명선사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끊었다. 공명선사는 평정을 잃지 않고 되물었다.

“아이들이 장성을 했다 하더이까?”

“예,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모두 열다섯은 넘긴 듯 보였답니다. 돈을 전해주면서 아들에게 물어보니 보표가 된 몸값으로 알고 있다 하더군요.”

공명선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써 십구 년 전의 일이었다. 아미의 촉망받는 복호승 보덕이 피로 물든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절규를 터뜨린 그 날, 공명선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불호만 외웠었다.

‘사부님, 어찌 하오리까? 이 손을 어찌 해야 하오리까? 마귀의 심성으로 불살생계를 깨뜨렸습니다. 이 제자! 이제 어찌 해야 하옵니까?’

절망에 찬 보덕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생생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때 보덕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불한당들로부터 가족을 참살 당하고 모욕을 당하려는 젊은 여인을 구해 놓고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로서는 공명선사도 어찌 할 수 없었다. 아홉 명의 불한당들, 그들은 마귀의 발톱이 할퀴고 간 듯 전신이 분해되어 흩어져있었다. 그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덕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분노에 취해 이성을 잃었으리라. 도를 휘두른 보덕의 심정은 마귀 그 자체였으리라.

그때 공명선사는 차라리 붉은 두 손을 끊어달라고 절규하는 젊은 승인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한숨만 내쉬고 사흘을 보내다가 결국 파문을 결정하고 혼자가 된 여인과 묶어 주었다. 반 년 후, 사냥꾼이 되어 산에서 살겠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 그가 공명선사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스승의 앞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돈을 위해 애써 피해간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아미타불!”

낮게 불호를 외운 공명선사는 눈을 뜨고 황장령을 직시했다.

“황 시주! 그를 보표로 고용한 것으로 하시고 뒤를 좀 봐주시겠습니까?”

황장령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리 하라 조치해 두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부인과 아이들을 성도로 옮기기로 하고 제대로 된 의원을 수소문 중에 있지요.”

“고맙습니다, 황 시주!”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들어가시지요.”

황장령이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 앞에 서있던 두 무사들이 방문을 당겨 열었다. 공명선사도 손을 뻗어 황장령에게 함께 가기를 청했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섰다. 방에는 이미 현상자를 비롯한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이 기묘한 산세를 기록한 지도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모두 모여 있었다.

불일장에 도착한 이후로 하루도 덥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지난 나흘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더워 마치 찜통에 들어앉은 것만 같았다. 하얀 구름 몇 점 띄워 작열하는 햇볕만이라도 잠시 가려주면 좋을 텐데, 하늘은 매정하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쳐서 막상 당하면 지겨워할 장마가 다시 오길 빌었고, 풀들도 지쳐서 노랗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밤이 되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금사강이 코앞인데도 밤바람은 무더웠다. 더위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강 가까운 곳으로 가려고 모기들을 대적하며 강변에 대자리를 깔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면 더 없이 운치 있을 만월마저도 보는 순간 태양을 연상시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더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새로운 피서법을 개발한 것 같았다. 아예 불일장의 뒷동산에 올라가 달밤에 연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바로 운청산과 종길 그리고 강정 부부였는데, 오늘은 또 다른 한 사람마저 합류했다. 항마도 이정이었다.

엊저녁에는 강정과 문취옥이 운청산의 죽도에 대항하더니 오늘의 상대는 이정이었다. 운청산과 이정이 이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있고 오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강정 부부와 종길이 앉아있었다.

더울 텐데도 전신을 웅크리고 앉아있는 문취옥은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입술이 퉁퉁 불어있었고, 종길과 강정 역시 잔뜩 웅크린 채 운청산과 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길이 운청산과 이정에게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오늘도 고마워요?”

강정도 두 사람에게 시선을 둔 채로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너 같으면 고맙겠냐?”

“하루 지나니까 더 아프지요? 몇 군데예요?”

“둘이서 밤새도록 끙끙 알았다. 나 아홉 군데, 안사람은 열  군데. 그래도 난 참을만해. 하지만 어떻게 여자를 상대하면서 그렇게 사정없이 가슴을 찌르고 허벅지를 찌르나? 정말 무정한 녀석이야. 죽기로 싸우는데 급소라고 안 찌를 거냐고 반문하니 뭐라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너무해.”

강정의 투덜거림이 끝나는 순간 이정이 칠 척의 미첨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운청산도 검을 빼들었다.

강정이 놀라 눈을 치뜨며 운청산의 검을 주시했다.

“응? 왜 이 대협한테는 진검이지?”

종길이 중얼거리자 강정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와는 급수가 달라. 언뜻 듣기로 복호승 가운데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무재였다 하더구나. 환속하지 않았다면 수좌승은 물론이고 복호신장이 되었을 정도로 강했던 사람이라더라.”

“아하! 이렇게 되면 곤륜과 아미의 대결인가?”

강정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이정이 먼저 말했다.

“오성으로 맞춰 보세.”

운청산은 대답 대신 목례했다. 이정도 가볍게 목례하고 형식적으로 들고 있던 미첨도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순간 미첨도의 도인에서 은은한 금광이 드러났다. 운청산도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중단으로 가져갔다. 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쉑!

이정이 오른발을 내딛으면서 도를 내리 그었다. 운청산 역시 거의 동시에 검을 내뻗었다.

팡!

청기와 금광이 순식간 얽히고 낮은 폭음과 함께 일순간 바람이 뒤엉켰다가 사라졌다.

종길 등 세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움직임을 멈춘 이정과 운청산을 살폈다. 운청산은 검을 중단에 든 그대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고, 이정은 이 보를 물러서서 도첨을 뒤로 돌린 채 원래 자신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운청산을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쉰 후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자네 혹시 늙은 하수오나 설삼이라도 잡아먹었나?”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비슷합니다.”

“역시 그렇군. 자넨 사성, 난 오성일세.”

“알겠습니다.”

종길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종길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강정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는 겁니까? 저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강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설마 했더니, 저 정도였던가? 아미의 내공은 태산보다 두텁다 했거늘, 이 대협이 내공에서 밀리다니---. 종길! 두 사람은 방금 내력의 차를 살폈다. 승부를 위한 비무가 아니라 수련을 위한 것이니 일단 수준을 맞춘 것이지.”

이정과 운청산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눈을 보며 상대의 호흡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이정이 먼저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발목을 비틀어 조금씩 이동하여 운청산의 정면에서 비켜서려 했다. 운청산의 뒤꿈치가 꿈틀거렸다. 운청산의 검이 어느새 이정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후------하! 후------하! 후------하!

이정의 들숨과 날숨을 느끼는 순간 예리하던 운청산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반면에 이정의 눈빛이 조급해졌다.

‘헛! 호흡을 잡을 수가 없어. 어려운 비무가 되겠군.’

후---하-하-하-하! 후---하---탓!

금광단홍(金光斷虹)!

이정이 도를 내리찍었다. 흐릿하게 도인 감돌고 있던 금광이 일순간에 반월이 되어 달빛을 가르고 운청산의 전신을 베어왔다. 그러나 이정의 호흡이 미세하게 변했음을 이미 감지한 운청산의 발끝이 꿈틀거렸다.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금빛 반월을 스쳐 보내며 이정의 좌측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쉑!

검신을 감돌던 청기가 빛살처럼 빠르게 이정의 가슴을 찔러갔다.

유성분천!

사우팔절검의 초식들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빠른 초식이었다. 이정은 금광단홍을 전개한 그 힘을 이용하여 부드럽게 방향을 전환하고 도를 휘돌렸다.

팡!

청기와 금월이 부딪힌 순간 이정의 신형은 어느새 이장을 물러서고 있었다. 도의 무게를 힘으로 저지하지 않고 따라간 이정은 그 원심력을 이용해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운청산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차! 운룡대팔식인가?’

순간 이정의 두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뿌연 먼지가 일어나는 순간 이정의 신형이 사방으로 흩어져 진신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금강십팔족(金剛十八足)!

소림에 금강부동신보가 있다면 아미에는 금강십팔족이 있다 했다. 금강부동신보가 무변(無變)으로 불패(不敗)를 보장한다면 금강십팔족은 만변(萬變)으로 공수의 변환이 자유롭다 했다.

이정이 신형이 뿌연 안개처럼 흩어지는 순간 이정의 머리를 벼락같이 떨어지던 운청산의 검기가 변화했다. 한 줄기 검기가 유성만건곤으로 변화하면서 흩어지고, 흩어지고 또 흩어졌다.

수십가닥의 검기들이 이정의 흐려진 신형들을 일일이 공략했다.

탓!

이정은 미첨도를 땅에 찍은 탄력으로 허공을 향해 도를 휘돌렸다. 수십 줄기 금광들이 이정의 머리 위를 떠돌았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당!

금광과 청기가 쉬지 않고 부딪쳤다.

종길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우와! 저게 가능한 일입니까, 대형? 허공에서 어떻게 저렇게 오래 떠있을 수가 있어요? 우왓!”

이정의 불광도천(佛光滔天)에 튕겨진 운청산은 허공에서 휘돌아 방향을 바꾸어 이정의 등 뒤로 떨어졌다가 바로 땅을 찍어 뱀처럼 낮게 이정의 하체를 파고들었다.

“과연 신기의 운룡대팔식! 이 대협의 입장에서는 사방에서 합공을 당하는 느낌이리라.”

강정의 감탄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신형은 단 한 번 멈춤이 없었다. 오히려 그 속도가 빨라져 강정 등 세 사람의 눈에는 파란 검기와 금빛 도광만 보일 따름이었다. 특히나 운청산의 신형은 변화난측하여 이정의 주변에 수십줄기 작은 선풍들이 휘도는 것만 같았다.

“대형! 이 대협이 일방적으로 몰리는군요.”

“과연 그렇다. 그러나 너무 당연한 전개 같구나. 청산의 검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도가의 검법이라고 하기에는 그 기운이 너무 패도적이다. 반면 아미의 금광도법은 불가의 도법답게 애초부터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싸움은 어차피 이런 식으로밖에 전개될 수 없는 일이지.”

흐합!

계속해서 뒤로 밀리기만 하던 이정이 오른발을 비틀어 지면을 굳건하게 짚고 나서 힘으로 운청산의 기세를 억눌렀다. 그리고 쉬지 않고 십자로 도를 휘둘러 수십 줄기 금광들을 연달아 토해냈다.

그러나 풍파투도 태악도인으로부터 사정없는 단련을 받은 운청산이었다. 이미 짧게 끊어지는 이정의 호흡을 간파한 후여서 운청산의 신형은 이정의 변화에 어렵지 않게 순응했다. 당연한 듯이 멈추어선 운청산은 회룡산형을 전개하여 수십줄기 금광들을 스쳐 보내고 검을 연거푸 휘둘렀다.

쿠릉!

풍뢰교연이 펼쳐지는 순간 흩어지는 운청산의 신형을 따라오던 금광이 빛을 잃었다. 그때 운청산이 땅을 찍어 대붕무영을 신법을 펼침과 동시에 유성분천으로 이정의 미간을 노렸다.

쉥!

이정은 정수리가 쪼개지는 듯한 압박감을 받으며 쉬지 않고 물러섰다. 연속적으로 도기를 뻗어내어 유성분천의 기세를 억눌러보려 했으나 파란 검첨은 어느 한 순간도 이정의 미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

이정이 도를 내뻗으며 악을 썼다. 순간 운청산은 거짓말처럼 신형을 제어하여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화르르르륵!

이정이 겨우 멈춰서는 순간 그의 발뒤축에 벗겨진 풀들이 놀라 불꽃을 일으켰다. 이정은 급히 불꽃을 밟아 끄고서 시커멓게 그을린 신발을 바라보았다.

“후유! 못 당하겠구먼. 봐줘서 고맙네.”

이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운청산은 포권을 취해 보이고 검을 검갑에 넣었다.

이정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검법이 그 모양인가? 도가의 검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해.”

“분광뇌풍검법의 변화된 형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강정 등 세 사람이 다가왔다.

“이 대협! 어떠셨습니까?”

강정의 물음에 이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죽는 줄 알았소.”

“에헤? 멀쩡하신데요?”

종길이 말하자 이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몸이야 멀쩡하지. 하지만 말일세. 자네는 맞아도 아픔이 있을 뿐 죽지는 않는다는 마음으로 대했겠지만, 난 매 순간순간마다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네. 그런데도 그것은 이 친구의 진정이 아니라 검법 자체의 기세일 따름이었네. 만약 진짜로 싸웠다면 오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게야. 이 친구, 괴물이야.”

종길 등이 새삼스럽게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이정은 그답지 않게 들뜬 모습이었는데 운청산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운청산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네 쌍의 눈빛을 외면하면서 종길의 옆에 꽂혀있는 대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대나무가 손 안으로 빨려드는 순간 운청산은 이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전 아직 괜찮습니다만 누구 해보실 분?”

운청산을 빤히 바라보던 세 쌍의 눈길이 사라졌다.

“너무 덥군.”

강정이 두 손으로 가슴팍 옷자락을 흔들며 멀어졌다. 문취옥도 슬그머니 따라가고 종길도 슬금슬금 물러섰다.

이정이 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리고 불일장으로 향했다.

“앗! 우리야! 옷 입어야지? 누가 보면 어쩌려구.”

나라연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틀 전에 불일장에 당도한 당우리가 천혜원 분원이 지어질 때까지 함께 지내는 것이야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속곳차림으로 창가에 몸을 내밀고 묵언수행중인 비구니들에게 말을 거는 등의 경솔한 행위를 할 때는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더워, 언니! 찬물로 목욕이나 했으면---.”

당우리는 울상을 지으며 창가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라연을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나라연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참아야지 어쩌겠니? 세수 하는 것으로 대충 만족하렴.”

나라연은 탁자에서 일어나 수건을 집어 들었다. 당우리는 고개를 숙여 몸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을 찡그린 후에 수건을 목에 걸치고 나라연의 뒤를 따랐다.

산사의 아침이 인시 중반이면 시작되니, 인시 후반에 접어든 때에 자고 있을 비구니는 없으리라. 나라연과 당우리가 우물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많은 비구니들이 반대로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나라연과 비구니들은 합장과 미소로써 서로 인사했다. 뒤따르던 당우리도 나라연을 훔쳐보며 계속해서 합장했다.

나라연은 어색한 당우리의 합장인사가 귀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겨우 두 살 차이. 그러나 나라연은 순진무구한 당우리의 언행을 볼 때마다 한참 어린 동생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아이야.’

우물을 파다가 실패하고 덮은 자국을 따라 우물에 당도해보니 사람이라고는 나라연과 당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하기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 관음사 사람들이야 모두 해서 마흔 여덟밖에 안되고 또 비구니들이라 부지런했다.

당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을 반짝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 사람도 없는데 우리 반신욕이라도 할까?”

나라연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우리를 보다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 곧 사람들이 올라올 거야. 벌써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네.”

이십여 장 아래쪽에 또 다른 우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단 두 개. 불일장 서편에는 관음사 비구니들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남정네인 오백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단 두 개의 우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관음사 비구니들은 남보다 먼저 씻고 자신들에게 배정된 우물을 비워주어야만 했다. 만약 조금만 더 지체하게 된다면 웃통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는 남정네들을 보아야만 하리라.

나라연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재빨리 물을 길어 올렸다. 당우리의 대야에 먼저 물을 퍼준 나라연은 자신의 물도 길어 씻기 시작했다. 손이 닿는 곳을 구석구석 씻은 후에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데 중년 여인이 올라와 가볍게 인사하고 물을 길어 올렸다. 문취옥이었다.

대야에 물을 잔뜩 퍼 담은 문취옥은 나라연과는 달리 젖가슴 위쪽을 거의 드러내며 옷 속으로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아래쪽에서 여자가 올라온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던 나라연과 당우리가 멍하게 대담한 세수를 하는 문취옥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왼쪽 어깨와 젖가슴 사이에 든 거무죽죽한 멍을 주시했다.

“아! 시원해.”

문취옥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동안 당우리가 물었다.

“언니! 그거 멍이죠? 누가 때렸어요?”

문취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우리의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여덟이나 되어 보이는 소녀에게 언니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문취옥은 그녀에게서는 보기 드문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 저 파란 옷 입은 젊은 녀석한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지.”

순간 당우리는 물론 나라연까지 노기를 드리우며 문취옥이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운청산과 강정 그리고 상반신을 몽땅 드러낸 종길이 씻고 있었다.

“저런 못된 놈!”

순간 당우리가 두 팔을 동동 걷어붙이고 운청산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나라연은 불쾌함보다는 장난기가 어린 문취옥의 어조를 느끼고는 우선 눈치부터 살폈다. 과연 문취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런? 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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