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79)

어제만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청인자는 

보기 드물게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운청산 역시 근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무표정한 얼굴로 청인자를 마주보며 말했다. 

“남겠습니다.”

청인자는 운청산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담은 눈을 보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차라리 홀로 세상을 떠돌아보겠다고 거짓말을 

했더라면 조금만 불안한 마음으로 놓아주었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에게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청인자는 다시 눈을 뜨고 운청산을 보았다. 운청산의 얼굴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남아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양반을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할 테냐?”

“진심을 확인하지 못하는 말 따위를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그냥 가까이서 살펴보려 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나를 그리 대한 

사람이 과연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려 합니다.”

청인자는 운청산의 무표정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가까이서 살핀다? 무슨 수로? 네 자신을 밝히지 않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양반이다. 용부나 되면 또 

모를까?”

“그것이 되어 볼까 합니다.”

청인자는 눈을 치뜨고 변화 없는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넌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운청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모른다. 넌 아무 것도 몰라. 이 세상에서 칼을 든 채 편을 가르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네 말은 네가 

그 세상에 뛰어들겠다는 소리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살아도 피의 업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네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운청산은 처음으로 청인자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러나 곧 얼굴을 들고 말했다. 

“호생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청인자는 오로지 운청산의 눈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대문파 점창을 멸한 이들. 흑풍사를 상대할 때처럼 호생지덕을 생각할 여가도 없을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청산! 미루어라. 꼭 이번이 아니어도 되지 않겠느냐?”

운청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청인자는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했다. 

청인자의 탄식을 듣는 순간, 운청산은 문득 어젯밤 꿈에 대해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리하면 청인자도 조금 더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온전한 자신의 의지가 아니란 것 또한 알리는 것이기에 끝내 침묵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외숙.”

청인자는 운청산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아! 하기야 천륜이란 것이 부인한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랴?’

청인자는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연 후에 운청산을 돌아보았다. 

“따라오너라.”

운청산은 미간은 찌푸리며 방 한구석에 세워져있는 등짐을 바라보았다. 그때 청인자가 다시 말했다. 

“그냥 오너라.”

청인자는 운청산을 데리고 멀리 가지 않았다. 바로 옆방, 강정과 문취옥이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네 사람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청인자가 운청산의 뜻을 밝혔다. 

“그래서 강 대협이 우리 청산을 돌보아주었으면 하오.”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강정이 운청산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문취옥을 응시했다. 문취옥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강정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운청산과 청인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명지은을 갚을 길이 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보기에 운 소협은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은인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귀계(鬼界)로 끌어들일 수는 없지요. 운 소협! 다시 

생각해 보시오.”

청인자는 달리 말하지 않고 운청산을 보았다. 청인자는 강정의 말과 표정이 운청산의 결심을 바꾸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운청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도인과 승인들이 주동이 되어서 하는 일입니다. 제가 못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는 명분이라도 있소이다. 그 명분이라는 것이 과연 대의(大義)와 통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믿음을 행하는 것이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소이다. 돈에 팔리는 것이고, 칼에 붙은 망령들의 원에 

따르는 것에 불과하오. 우리에게 그들의 명분이란 것은, 좋은 일로 살인을 한다는, 억지로 믿고 싶은 위안이 될 뿐이오. 운 

소협! 일단 시작하면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소이다. 재고하시오.”

운청산 역시 고개를 저었다. 

“제 마음의 주인은 접니다. 전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돈에 휘둘리지도 않고 검의 망령이라는 것에도 시달리지 않을 

겁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때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문취옥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흥! 검의 망령에 시달리지 않는다? 운 소협! 사람을 죽여본 적 있나요?”

“죽여 본 적은 없지만 팔을 잘라본 적은 있습니다.”

운청산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문취옥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 팔은 잘라봤다? 그럼 수백 명이 뒤엉켜 칼질을 해대는 전장에서 팔만 골라 벨 생각인가요? 그러지 못할 때는 

어쩌렵니까? 우린 이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에요. 내가 죽을 지경에 이르고 아정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상대의 무위가 운 

소협에 버금갈 때는 어쩔 거예요? 그를 막으려하다가 등 뒤의 칼날을 피하지 못할 때는 어쩔 거냐구요?”

운청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문취옥이 차가운 미소를 지우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한 순간이에요. 쇠심줄보다 질긴 게 목숨이라지만, 전장에서는 아무렇게나 휘두른 칼에도 목이 

날아갑니다. 호생지덕? 측은지심?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료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핏방울이 옷자락 끝에 묻는 

순간, 어느새 야차가 되어 칼을 휘두르게 되지요. 그런 곳에서 마음을 지킨다? 지킬 수 없습니다. 칼끝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선 하나가 생사를 가르지요. 선 하나에 생명 하나. 하나가 둘이 되고 곧 버릇이 되어 거리낌 없이 열을 만듭니다. 

습관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에요. 결국 마음이라 해봤자 남는 것은 오직 증오심. 그 증오심은 눈 깜빡할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 땅거미처럼 당신의 발목을 잡고 다리를 움켜쥐고 이내 가슴을 찌릅니다. 스스로 망령이 되지요. 그것은 

당신을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갑니다. 그때서야 당신도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처럼. 포기하세요.” 

살벌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로 끝낸 문취옥은 안 그래도 얼음 같은 얼굴에 하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운청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문취옥은 미소를 지우고 강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운청산이 말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경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운청산은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청인자를 힐금 바라보고는 방을 나섰다. 

문취옥이 강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겁을 먹지 않는군.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도 있는데, 끝내 할 모양이야.”

그때 강정이 청인자에게 물었다. 

“꽤나 절실한 것 같습니다, 진인! 사연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청인자는 고개를 저었다. 

“청산이 밝히기를 싫어하니, 말하기가 좀 그렇구려. 강 대협. 보셨듯이 저 녀석이 끝내 할 모양이오. 만류할 수가 없으니 

폐가 되더라도 강 대협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소.”

강정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들이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만류하고픈 것이지요.”

“아니오. 무공만 높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이라오. 달포 정도 세상 경험을 시키긴 했으나, 가리고 안보여준 

것도 많소이다.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되면 어찌 변할지는 나도 모르겠소.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녀석의 생사가 아니라 

심마에 빠지지 않도록 살펴달라는 것이오.”

청인자가 포권을 취해보이자 강정은 급히 화답했다. 

“아직 이틀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 동안 마음을 돌려세워 보시지요. 그래도 정히 하겠다면, 그때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리고 강정과 문취옥에게 거듭 인사했다.

운청산은 어색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청인자의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히 청인자는 특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했고, 드문드문 우스개 소리도 했으며 뻔뻔하게 옥소 불기를 강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밤이 되었다. 객잔으로 돌아온 청인자는 자린고비의 탈을 잠시 벗어버리고 평생 처음 과용을 했다. 소고기를 

그득 넣은 마파두부에 운청산이 유일하게 그 맛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요리인 회과육도 시키고 사천의 특산 비통주(碑筒酒)까지 

시켰다.

운청산은 술과 요리를 앞에 두고 어안이 벙벙하여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청인자는 빙긋 웃으며 운청산의 술잔에 비통주를 

따랐다. 

“이제 속인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니 술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 비통주는 그 향과 맛이 산뜻하여 술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만이다. 그러나 맛있다고 들이키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놓고 마는 술이기도 하다. 마셔보아라.”

청인자는 술잔을 잡는 운청산을 보며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흠! 좋군.”

청인자는 웃으며 고개를 젓다가 회과육 한 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청인자는 회과육을 오물거리며 운청산에게 눈짓했다. 

운청산도 술잔을 비웠다. 

과연 청인자의 말처럼 다른 술과는 달리 목에 걸리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 맛이 마치 여러 가지 과실주와 같아서 

가슴까지 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떠냐? 마실 만 하지?”

운청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한 잔 더 해라.”

청인자는 운청산과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청인자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술잔을 비우고 엎어 놓는 것으로써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계속 마셔야 할 경우나 마실 생각이 있거든 

바닥을 비우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상대의 잔 역시 살펴서 다시 채워주는 배려도 해야 한다.”

청인자가 먼저 술잔의 삼분지 이를 비웠다. 운청산은 술잔을 살핀 후에 어색하게 술을 따랐다. 청인자가 미소 지으며 

운청산에게도 술을 권했다. 

청인자가 세 번째 잔을 내려놓았다. 운청산이 살펴보니, 바닥에는 여전히 술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운청산이 놀란 눈으로 

청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더 드시렵니까?”

청인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술을 채우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계율을 어기는 것은 석 잔까지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청인자는 말없이 술잔을 반쯤 비우고 다시 회과육 한 점을 씹었다.

“술만이 아니라 고기도 먹는구나. 뭐 어떠냐? 중요한 것은 마음 아니겠느냐? 탐욕과 쾌락에 빠져 도사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청인자는 술잔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다시 회과육 한 점을 집으며 말했다. 

“이 맛이 참으로 오묘하구나. 그러나 내일 아침이면 나는 이 맛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마음이다.”

운청산은 그때서야 청인자가 단순히 이별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운청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궜다. 

“청산! 네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가장 비참한 광경보다 백배는 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아는 그 어느 

인간보다 백배 더 추악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곳에 너를 홀로 내버려두기가 쉽지 않아, 너와 함께 있어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 하면 나로 인해 네 정체가 드러날 것이고 또 네가 마음의 부담을 지게 될 것 같아 그만 두기로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네 곁에 있으니,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네 마음속에 있는 내게 물어라. 분명히 답을 줄 

것이다. 알겠느냐?”

운청산은 청인자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물기가 툭 떨어져 운청산의 술잔에 파문을 일으켰다. 

청인자는 운청산이 눈물 흘리는 것을 모르는 척 하고 마파두부를 한 숟가락 퍼먹었다. 

“맛있구나. 먹자.”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마파두부를 먹었다. 

청인자는 운청산이 마파두부를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운방십계를 알지?”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인자가 다시 말했다. 

“구계를 말해 보련?”

운청산이 붉어진 눈으로 청인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태연자약할 것.”

“그래. 외숙으로서 네게 당부하고픈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한 가지를 항상 가슴 속에 품고 다니라는 것이다. 너 정도 무공을 

지닌 사람은 흔치 않으니 네 한 몸 지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늘 마음을 평상처럼 유지하면 생사의 기로에서도 능히 생로를 찾으리라.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마음이다. 지금의 마음을 귀하게 지켜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인자는 환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아침이 되어 청인자와 운청산은 방에서 아침식사를 마쳤다. 간단히 세수를 마친 청인자는 등짐 안의 내용물을 탁자 위에 모두 

풀어놓았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널린 가운데서 청인자는 운청산의 검과 고차 세 장을 한쪽으로 제친 후에 다시 등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짐을 꾸린 청인자는 운청산의 고차 한 장을 들어 보이며 혀를 찼다. 

“쯧쯧쯧, 구멍이 숭숭 뚫렸구나. 바람은 잘 통하겠다만 누가 보면 흉보겠구나.”

고차를 내려놓은 청인자는 운청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참! 이 검에 이름이 있던가?”

“검이 검이지, 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쯧!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만, 너 정도 검사에게 검이란 분신이다 다름없는 법.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중요한 순간에 심통을 부릴지도 몰라. 어디 보자. 그냥 청혼이라 부르면 좋겠구나. 네 이름 청자에 혼 

혼자를 써서 청혼. 괜찮지?”

운청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는 청혼을 내려놓고 고차와 검을 한꺼번에 바라보았다. 

“쯧!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남겨둘 것은 이것들뿐인가?”

청인자가 고개를 젓다가 품속에 손을 넣어 전낭을 꺼냈다. 

“이 돈으로 여벌의 옷도 사고 고차도 새로 구하여라.”

운청산은 청인자가 내미는 열 냥짜리 전표 다섯 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돈 있습니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

운청산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맙게도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주라며 열 냥을 주고 가더군요.”

“호! 열 냥씩이나? 손 큰 사람이구나. 그러나 그것으론 모자라. 객지에서 혼자 지내는 사람이 품에 돈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법이다.”

운청산을 돈을 내미는 청인자의 손을 부드럽게 말아 밀었다. 

“사람 뽑는 게 내일부터랍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도 준다는데, 그 돈이 왜 필요합니까? 열 냥이면 큰 돈입니다. 청의도 

사고 고차도 살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청인자는 운청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섯 장의 전표 가운데 두 장을 뽑아 운청산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이래야 내 맘이 가벼워진다.”

운청산은 마지못해 전표를 품에 넣었다. 그때 청인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등짐을 지며 말했다. 

“갈 사람은 빨리 가버려야지?”

운청산이 놀라서 눈을 치떴다.

“벌써 가시게요?”

“돈도 안 되고 사단도 날 것 같으니, 일찍 움직여 남은 편지들 전해주고 돌아가련다.”

운청산의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자 청인자는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네 집이 어디냐?”

운청산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곤륜입니다.”

청인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있겠다.”

청인자는 마지막으로 운청산의 등을 두드리며 방을 나섰다. 운청산은 급히 검을 매고 객잔 문 앞까지 쫓아갔다. 청인자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운청산은 한동안 멍한 눈으로 청인자가 사라져버린 무후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후대로는 부산스럽다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청산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홀로 

서있는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서늘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가슴을 내려다보고는 힘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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