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짓 힘차 보이니 떠나보내는 게 옳으련만
종길의 눈두덩이 부르르 떨렸다. 종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실눈을 떴다.
“크으으, 머리야. 누가 남의 머리를 이렇게 쥐어짜는 거야?”
종길은 다시 눈을 감고 머리를 연신 흔든 후에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로 넘어갈 정도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크아아아아함!”
“아이구야, 섞는 냄새! 명색이 무인이란 친구가 속이 다 섞도록 술을 퍼마셔?”
종길은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청인자가 잔뜩 얼굴을 구긴 채 종길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종길은 그때서야 어제의 일을 드문드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강정은 청인자와 운청산을 보자마자 크게 반겼다. 얼굴에 한풍을 달고 사는 문취옥마저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객들의 사양은 아랑곳 하지 않고 술판이 벌어졌다.
청인자가 석 잔으로 예의를 표하자 운청산은 할 수 없이 한 잔을 억지로 마셨으나 곧 꿔다 논 보릿자루가 되어버렸다. 그
후로 열한 병의 술병들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고 또 몇 병 더 들어온 것 같기는 한데, 종길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종길은 자신이 앉아있는 침상을 두리번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 내가 왜 침상에?”
종길은 미안해하는 눈치를 보이면서 방을 둘러보며 운청산을 찾았다.
“헉!”
종길은 갑자기 숨을 죽였다. 운청산이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종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청산의 전신에서 묘한 기류 같은 것이 감도는 듯 한데 정확하게 무엇이라 규정짓기는 힘들었다.
가끔 파란 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려면 보이지 않았다.
종길은 놀란 눈으로 청인자를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운공하는 거지요?”
청인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얼굴 앞으로 손을 휘저었다.
“휘유! 지독하구나. 우선 입 양치부터 하게.”
종길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문득 청인자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이 큰 것을 깨닫고 또 다시 눈을 치떴다.
“그렇게 크게 말씀하셔도 됩니까? 운 소협, 운공 하잖습니까?”
청인자는 아예 탁자로 물러나 의자에 앉으며 운청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안 들린다더군. 그냥 쉬는 거야.”
“예에?”
“너무 소란스럽더구먼. 사람들이 잠도 안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나, 울지를 않나, 웬 추태들이 그리 심한지---.”
종길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면서 물었다.
“제가 주사를 부렸나 보지요?”
“자네뿐인가? 이 객잔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네 같더구먼. 청산은 어수선한 것을 싫어해서 새벽녘까지 자지 못했네.
내가 깨니 겨우 저렇게라도 쉬는 걸세.”
종길은 신기하다는 듯 운청산을 살폈다.
“입마경에 빠지는 일은 없겠지요?”
“괜찮다니까. 전에도 몇 번 저랬어. 운공할 때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
종길이 입을 쩍 벌리고 고개를 저었다.
“휘유! 만지면 퉁겨날 것 같은데---. 대단하네. 어이구야. 목숨 값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데, 저 지경이면 평생 빚을
안고 살아야겠네.”
청인자가 종길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보게. 지금 나를 살려주면 목숨 빚은 갚은 걸로 하겠네. 제발 입 양치부터 좀 하게. 내 속이 뒤집어지려고 하네.”
종길이 겸연쩍게 웃으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늦은 아침인지라 아무리 유명한 가빈객잔(佳賓客棧)이라도 겨우 두 자리만 차고 나머지 자리는 비어있었다. 마음 놓고 중앙
탁자를 차지한 청인자와 강정 일행은 음식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차를 따라주었던 점소이가 음식을 내려놓았다. 운청산과 청인자는 원탁 위에 놓이는 음식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감자와
완두콩을 섞은 잡곡밥 외에는 모든 음식이 붉은 기운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운청산과 청인자를 배려한답시고 주문한 소고기를 뺀 마파두부야 당연한 것이고, 사천포채는 물론이고 술국을 대신해서 시킨
단단면(担担麵)마저도 고추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운청산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후르륵 소리에 놀라 맞은편의 사람들을 보았다. 강정과 종길은 물론 문취옥마저도 땀을 뻘뻘 흘리며
국수를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청인자가 미소를 지으면 밥을 한 젓가락 떴다.
“올 때마다 놀란다만 사천사람들은 정말 매운 것을 좋아해. 하기야 호남사람들이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니,
사천사람들은 웃으며 맵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고 대답했다더구나. 자! 우리도 사천사람이 되어 볼까나.”
운청산은 빙긋 웃으며 소고기를 뺀 마파두부를 듬뿍 떠서 밥 위에 얹었다.
“전 원래 사천사람이에요.”
“아! 그렇지. 깜빡 했구나. 하기야 따지고 들면 나도 사천 사람이지. 들자.”
운청산이 마파두부를 곁들여 밥을 반 공기 정도를 비우고 찻잔을 드는 순간, 왁자한 소리가 들리며 십 수 명의 사내들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운청산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대략 이십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의를 입고 사 척에
가까운 대검을 지녔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낯이 설지 않았다.
“어우! 어젠 너무 마셨나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도 선하게 느껴지는 한 청년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다른 청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화인, 자네가 왜 그렇게 마셨을까?”
화인이라 불린 청년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에?”
순간 다른 청년은 계단을 퉁탕거리며 뛰어내려온 후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마누라! 보고 싶어. 나 밤이 무서워.”
순간 함께 있던 청년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화인이라 불린 청년이 짐짓 화난 얼굴로 낮게 소리쳤다.
“종인! 너 죽고 싶어?”
“에헤! 죽여 봐. 죽여 봐.”
화인이란 청년이 퉁탕거리며 계단을 뛰어내려와 종인이란 청년을 잡으려 했다. 종인이란 청년이 원탁을 사이에 놓고 이리저리
움직여 화인이란 청년의 손길을 피해냈다.
객잔이 떠들썩해지자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청인자 역시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이보게들! 식사하는 곳이네. 너무 소란스럽구먼.”
순간 청년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흐르고 객잔의 분위기가 묘하게 느껴졌다. 그때 객잔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범인 두 청년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청인자 앞으로 다가와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진인! 자리를 생각지 않고 철없이 까불었습니다. 용서하시지요.”
청인자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색을 보니 운가의 금의대원들인가 보구먼. 잘못을 알고 정중히 사과를 하니 보기 좋구먼. 역시 운가가 그냥 운가는 아닌
모양일세. 속도 편치 않을 텐데 식사들 하시게나.”
두 청년이 빙긋 미소 지으며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고 읍했다. 그리고 다른 청년들과 합세하여 일제히 자리를 잡았다.
청인자는 문득 운청산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를 보았다. 청인자가 눈을 치떴다. 운청산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산! 왜 그러느냐?”
운청산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요. 이젠 괜찮습니다.”
청인자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운청산을 계속 살폈다. 운청산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서 예의 두 청년들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어제도 잠깐 보았던 그 사람들이 아닌가? 저들을 볼 때마다 왜 머리가 이리 지끈거린단 말인가? 운가의
금의대라? 내가 아는 이들인가?’
운청산은 기억을 되돌려 두 청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운교인처럼 어렸을 때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운화인, 운종인이라 했다. 누굴까?’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운교인과 운강인 말고는 어릴 때의 얼굴을 떠올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친척들이라 하나 누구와도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서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니 기억이 날 턱이 없었다.
운화인! 운현산의 아들로 한 참 동안 포옹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 운청산은 본인이 아니라 운현산이었던 까닭에 운화인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청인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선음다관의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청인자가 장사를 하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으리라. 청인자의 말처럼 제 각각의 입장과 고민들에
빠져 다른 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를 분석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머리가 무척이나 복잡했다.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건만 직접 눈으로 보고나니 기분이
묘했다. 그렇다고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혼란스러웠을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돌아가면 그뿐이라며 애써 운화인 등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운청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상하게도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열여덟 살의 귀여운 얼굴을 가진 스물두 살의
여인을 찾고 있었다.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 떠나면 그것으로 끝인데, 정말 이상하군. 이거 참! 이상한 느낌이야. 왜 자꾸 그 얼굴이 떠오르나?’
그때 청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궁사는 비싼데?”
운청산은 의아한 눈빛으로 청인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수궁사를 놓아주는 일에는 따로 정해진 가격이 없었다. 청인자가 의뢰인의 행색과 상을 살펴, 화의를 입은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처자를 끌고 오면 은 열 냥이라는 거금을 받기도 하고 어미가 딸을 데리고 오면 오백 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처럼 하기 싫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달갑지 않은 어조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운청산은 청인자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두 사람을 살폈다. 육척 장신의 체구에 너무나 순하게 생겨서 조금 모자란다는
느낌을 줄 것 같은 청년과 예쁘장하지만 왠지 나이답지 않게 삶에 찌든 듯 피곤한 얼굴을 한 스무 살 정도의 여인이었다.
청년이 물었다.
“얼마나 드려야 합니까?”
청인자가 여인의 얼굴을 힐끔 살핀 후에 대답했다.
“세 냥일세. 자네 행색을 보니 그리 여유 있어 보이지는 않는구먼. 게다가 수궁사는 어릴 때 부모가 해주는 것. 굳이 큰
돈 들여 곧 없어질 것을 새길 필요가 있겠는가? 권하고 싶지 않네.”
“그-그래도---.”
청년은 대답을 얼버무리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큰 결심을 한 듯 품속에서 낡은 가죽전대를 꺼내어 탈탈 털었다.
두 냥하고 이백삼십 문이었다.
“이것뿐입니다요. 해주십시오.”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여인의 얼굴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청인자는 돈에는 일별도 하지 않고 여인의 암담한 표정을
살핀 후에 청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안 그래도 흑빛이 되었던 여인의 얼굴이 이번에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운청산은 가슴이 쿵쾅거려서 여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또한 상법의 대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껏
청인자의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것도 있었다. 운청산이 보는 여인의 상은 화류지상이기가 쉬웠다.
그것도 좋아서 뛰어든 상이 아니었다. 눈 꼬리가 쳐져 일견 귀엽고 착한 느낌이 들고, 입술이 두텁고 볼에 살집이 풍부하니
다정다감한 성격이리라. 그러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진 것으로 보아 극히 빈곤한 삶을 살았고, 인중이 짧은 것이 남에게 잘
속을 상이었다. 비록 화류계에 몸담았었다 하더라도 손해 보는 상이지 그것을 즐길 상은 아니었다.
“어라? 기름이 떨어졌네.”
운청산은 또 한번 의아한 눈빛으로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어제도 확인했으니 기름이 떨어질 까닭이 없었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니---. 자! 이 돈으로 기름 좀 사다주게. 아무 거나 괜찮아.”
청인자는 청년이 준 돈에서 삼십 문을 집어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청인자가 여인에게 말했다.
“성도 사람이 아니지? 쯧쯧쯔. 어찌 그리 박복하누. 흘러흘러 예까지 와서 이제 마음이 좀 편해지나 했더니만 눈앞이 깜깜해
지셨는가?”
“예?”
여인이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청인자를 응시했다. 청인자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몹쓸 아비에 몹쓸 오라비를 두었구먼. 걱정 말게. 내가 다 알아서 하겠네. 저 친구를 속이는 것 같아 찜찜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척 보니 저 친구에게는 자네가 바로 복덩이야. 자넨 앞으로 삼 년만 고생하게. 아픈 일 고생한 일 떠올리며 저
친구를 왕 떠받들 듯 하여 삼 년만 지내면, 그때부터는 고생 끝이고 행복 시작일세. 저 친구의 상을 보니 미련곰탱이에
밴댕이 속일세. 그러나 성심으로 받드는 아낙을 배신할 친구는 아니로구먼. 자식 둘만 안겨주면, 세상 비난 다 받아도 제
집안 하나만큼은 짱짱하게 만들어 놓을 친구일세. 욕심 부리지 말고 남편이 하늘이거니 하고 살게나. 그러면 옛 상처 다 잊고
웃으며 늙어갈 수 있을 걸세.”
여인이 말도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청인자는 청년이 준 돈 가운데 두 냥을 집어 여인의 손에 집어 주었다. 여인이
훌쩍이는 가운데서도 화들짝 놀라며 청인자를 응시했다.
청인자는 남은 이백 문을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수궁사면 더 받을 것이나 이를 테면 화혼사(和婚砂)가 될 것이니 이걸로 충분하네. 똑 같은 모양새로 새겨질 것이지만
수궁사가 아니니, 나중에 독한 술을 구해 닦아내어야 하네. 그때를 잘 넘겨야 돼. 알겠는가?”
여인이 우는 중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인으로부터 눈을 뗐다.
청년이 유채유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청인자는 능숙하게 연기하여 여인의 팔뚝에 붉은 홍점을 새겨 넣었다. 청년은 크게
만족한 듯 입을 함지박처럼 벌리고 웃으며 여인의 손을 잡았다.
청인자는 청년에게 평생 반려를 정말 잘 구했다며 여러 가지 덕담을 들려주었다. 청년이 마침내 여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일어섰다. 여인은 걸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고개를 돌려 감사의 목례를 해댔다.
“에휴! 오늘은 어째서 저런 이들만 걸리누? 성도를 그만 떠야 되겠어. 시절이 하수상하니 돈이 안 되는구나.”
운청산은 청인자의 푸념을 듣고서 빙그레 웃으며 청인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쪼그리고 앉은 운청산은 어깨로 청인자의 옆구리를
밀며 말했다.
“만날 돈, 돈 하시면서 손안에 들어온 돈마저 포기하는 건 또 무슨 이윱니까? 사실은 돈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게
아니에요?”
청인자는 운청산의 빙긋빙긋 웃는 얼굴을 보며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놈아! 이 외숙의 손짓 혀끝에 곤륜의 생존이 걸려있다. 관심이 없다니? 아까는 다만 가련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 부주 좀
한 것뿐인 게야. 그 여인이라면 두 냥을 좀 더 절실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
청인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웃기만 하는 운청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늘이 없구나. 하! 청수야. 이 오라비가 할 수 있는 건 대부분 다 한 것 같구나. 이
젠 떼어놓는 일만 남았는데---.’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운청산이 묻자 청인자는 생각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허! 근데 왜 이렇게 파리만 꼬이는 게야?”
청인자는 눈을 돌려 거리를 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아도 청인자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청인자가 말했다.
“청산! 피리를 불 시간이---. 응? 저 양반은?”
청인자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홍화가로 통하는 건너편 골목을 주시했다.
운청산도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몇몇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화사한 청견단삼을 입은 초로인과 녹견단삼을
입은 초로인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고, 그 뒤로 경장차림의 다섯 청년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제 점심나절이니 청홍루
나들이를 한 것은 아닐 테고, 필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이리라.
운청산은 운강인과 당명방을 한 눈에 알아보고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의 정체를 대충 짐작해 내었다. 운청산은 선두에서
걷고 있는 청견단삼의 초로인을 주시했다.
운청산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청인자가 운청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산! 가보지 않을 테냐?”
운청산은 대답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네 아버지다. 인사 정도는 나누는 게---.”
“십육 년입니다. 그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소식을 전한 적이 있습니까? 소식을 물은 적은 있습니까? 아버지에게 저는 이미
잊혀진 존재입니다. 애초부터 없었던 존재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랬다. 그런 느낌이었다. 청인자는 운청산에게 강권을 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운녹산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경의상이 죽은 이후로는 천북을 지나쳐도 굳이 운가에 들려 소식을 전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청인자는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알아서 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운청산이 입술을 꿈틀거려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청인자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허! 파리만 날리느니 점심이나 먹어 볼까나?”
운청산은 그때서야 억지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가 좌판을 걷기 시작했다.
운청산은 청인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체 하는 사람, 그러나 그 가슴 속에는 따뜻한 인정을 품고 있는 사람. 운청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어느새 청인자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었다.
꿈꿔본 적이 없는 사람을 꿈을 가질 수도 없다.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꿈을 차단당해왔던 운청산은 현실에서도 특별한 꿈을
가진 적이 없었다. 있다면 단 한 가지, 이청수와 직접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무산된 이후로 운청산은 별다른 꿈을 가져보지 못했다. 동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 가지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생 처음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어서, 운청산에게는 작지 않은 의미로
다가왔다. 바로 청인자와 같은 삶을 사는 것. 청인자는 운청산의 삶을 이끄는 길라잡이였다.
현실에서 꿈을 가지니 깊은 수면 속에서도 꿈을 꾸나보다. 운청산은 평생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늘 똑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잠을 방해하는 꿈 아닌 꿈이 아니라 꿋꿋하게 수면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별 다르지 않았다. 간만에 만나는 이청수, 그리고 운현산과 운명산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꿈속에 또 하나의 운청산 자신이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운청산은 꿈에서 깨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전과는 달리 꿈속에서 운청산 본인은 구경꾼이었다. 마치 거리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듯 꿈을 보고 있었다. 대신 또 다른 운청산이 이청수 등과 직접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청수는 애원했다. 성도를 떠나지 말라고, 그리고 운녹산을 만나달라고. 운현산과 운명산도 애원했다. 운화인과 운종인을
가까이서 보게 해달라고, 그리고 보살펴달라고. 또 하나의 운청산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하라고.
언제까지 괴롭힐 것이냐고.
운현산과 운명산이 슬픈 눈으로 또 다른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금씩 흐릿해졌다가 끝내 사라졌다. 이청수가 억지미소를
지으며 꿈속의 운청산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포옹했다.
꿈속의 운청산은 한참이나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조금씩 조금씩 손을 움직여 이청수의 포옹에 어색하게 화답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이청수의 등에 닿아있던 운청산의 두 손은 허무하게도 아무런 형체도 없는 공기를 안고 있었다.
또 다른 운청산은 이청수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보고만 있던 운청산도 이청수를 찾았다. 그러나 이청수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운청산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 있다가 곧 자취를 감췄다. 운청산에게 보이는 것은 암흑 뿐.
운청산은 차분하게 눈을 떴다. 창문 밖도 암흑이었다. 운청산은 조용히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들을 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운청산은 창턱에 두 팔꿈치를 대고서 두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갑자기 송곳으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그것은 이제 통증이 아니었다. 그를 향한 애원이었고 울음이었다.
운청산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창밖으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창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빠져나온
침상이 보였고 탁자가 보였으며 조금 더 시선을 옮기니 누군가가 고른 숨을 뱉어내며 자고 있는 또 다른 침상이 보였다.
종길은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으니 잠들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청인자이리라. 운청산은 굳이 확인할 생각도 않고 멍한 눈으로
청인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