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79)

“남자와 여자는 달라요. 앞으로 여인을 볼 때는 훔쳐보도록 하세요. 무례하지 않게.”

나라연이 차갑게 말하자, 민머리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강인을 약 올리던 언동을 버리고 정식으로 

포권을 취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소저.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리 된 것이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소. 앞으로 조심해서 훔쳐보겠소.”

나라연이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고 걸어갔다. 그 뒤로 방실거리는 당우리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당명방이 따랐고 운강인이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민머리 사내가 웃음 지으며 운강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운 소협! 마음의 소리에 솔직하라구. 당신 잘 생겼어. 하나도 안 꿀린다구. 용기를 내도록! 크크크크!”

순간 운강인이 눈을 부릅뜨고 민머리 사내를 노려보았다. 민머리 사내는 이크, 하는 표정을 과장되게 보이며 보란 듯이 

운강인을 외면했다. 

민머리 사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운강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머리 사내는 붉게 물든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와! 그 아가씨 손 무지 맵네. 아이구, 아파라.”

민머리 사내가 입을 마구 휘돌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앞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또 뭐야?”

고개를 번쩍 치켜든 민머리 사내가 막아선 사내를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운 소협? 성도에 와있었소?”

운청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뺨 한대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엥? 무슨 말이오? 난 잘못한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

운청산은 이제는 점이 되어버린 운강인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검을 뽑았던 그 사람, 운가의 둘째 공잡니다. 여인이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다 해도 크게 다쳤을 겁니다.”

“에헤? 천북 운가 말이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길을 혀를 내두르며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우와! 생긴 것 같지 않게 하도 치졸하기에 좀 놀려먹으려 했을 뿐인데,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셈이었구나. 아, 아니지? 

말리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거야.”

종길의 말에 운청산이 이채를 드리웠다. 종길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벙긋 웃음 지었다. 

“운 소협이 살려주셨을 것 아니오? 어? 그러고 보니 둘 다 운씨네? 혹시 친척이시오?”

운청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근데 왜 혼자?”

종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형님과 형수님은 객잔에 계시오. 난 성도가 처음이라 구경이나 할까 하고 나와 봤지요. 찾는 게 있거든. 흐흐흐. 

그건 그렇고 그렇게 묻는 운소협은 왜 혼자시오?”

운청산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청인자가 다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종길이 만면에 웃음을 드리우며 청인자에게로 

달려갔다. 

“청인진인! 접니다요. 종길입니다요.”

청인자가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뭐야? 감숙 촌무지렁이가 여긴 웬일인가?”

“히히히, 셋이서 보표단 노릇하기는 힘에 겨울 것 같기도 하고, 또 형수가 더 이상 감숙에서 살기 싫다고 해서요. 마침 

사천무림련에서 사람을 뽑는다 하는 풍문이 돌아 잘 됐다 싶어 왔지요.”

청인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쯔, 피해 살아도 언제 죽음을 맞을지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아예 죽을 자리를 찾아서 다니는구먼.”

종길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칼잡이가 칼 맞고 가는 거야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태상노군께서 그랬다지요? 죽음은 휴식이라구요. 뒈져봐야 

쉬는 것뿐이라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청인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

“쯧쯧쯔, 말을 새겨들어야지. 삶에 충실하지 못했다면 휴식인들 편안하겠는가? 사는 동안 사람답게 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이 친구야.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아예 인생 포기하고 막 살겠다는 거야.”

“포기라니요? 사는 동안 굵고 화끈하게 살자는 거지요. 그런데 잠자리는 구하셨습니까?”

종길은 말이 길어지는 게 싫었던지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청인자가 고개가 흔들며 말했다.

“오늘 왔네. 오자마자 저기 판부터 깔았지.”

종길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아! 잘됐다. 성도에 머무시는 동안은 저희와 함께 계시면 되겠네요. 지금 성도에서는 방 못 구하거든요. 저희도 방을 못 

구해 할 수 없이 비싼 방을 얻었습니다. 혼자 쓰기에는 사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잘 됐네요. 어휴! 하루 빨리 사람 

뽑고 어중이떠중이들은 떠나보내야 되는데, 아직 사흘이나 남았네요.”

청인자가 빙긋 웃으며 종길의 말을 끊었다. 

“자넨 어중이 아닌가? 떠중인가?”

“에이! 이거 또 왜 이러세요? 진인과 운 소협한 테야 별 볼 일 없는 놈이겠지만 그래도 감숙칠도하면 제법 알아준다구요.”

종길이 청인자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자 청인자는 과장되게 몸을 꼬며 물러섰다. 

“알았네, 알았어. 근데 자네 방 큰가?”

“세 사람 정도는 너끈히 잘 수 있지요. 침상이 둘 밖에 없지만 뭐 여름이니 바닥에서 자도 별 문제없지요.”  

청인자가 운청산에게 눈웃음지으며 말했다.

“그럼 신세 좀 질까? 돈 굳었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얼마 만에 자보는 개인 방입니까? 간만에 쾌적하게 지내겠네요.” 

웃음 꽃 피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종길이 덩달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점창검파의 중지 대화보궁(大華寶宮).

궁의 본전이 되는 대라전(大羅殿) 안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중앙에는 새로 들여온 듯한 지름 일 

장이 넘는 대리석 원탁이 놓여 있고, 그 위로는 원탁 그득 점창산과 그 근동의 지형을 점토로 빚어놓은 입체도가 놓여있었다. 

그 주위로 백의를 입은 네 사람이 있고, 그 주변으로도 백의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천궁의 우상이라는 흑염노인이 긴 지팡이로 형형색색의 깃발이 꽂힌 점창산의 주변을 두루 건드렸다. 

“그러니까 이 본진을 발동시키지 않고도 금산십면매복진(禁山十面埋伏陣)을 따로 발동할 수 있다는 말이렷다?”

흑염노인의 오른쪽에 서 있는 마상응안(馬相鷹眼)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리 설계하였습니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중년인이 철사 같이 빳빳해 보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부님. 따로 사용할 수 있다 하나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흑염노인이 중년인을 보며 말하려는 순간 중년인의 옆에 있던 청년이 중년인의 옆구리를 찍으며 말했다. 

“사형! 좋잖아요? 천기신사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만드셨습니다. 한꺼번에 발동하면 우린 뭐합니까? 사부님, 전 무조건 

찬성입니다.”

흑염노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쯔, 철없기는---.”

점창일수 벽령자가 오호신궁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던 바로 그 청년, 백영담은 흑염노인의 눈치를 뒤통수를 긁적였다. 흑염노인이 

중년인을 보면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어. 점창산에서의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이 될 수도 있고 많으면 세 번 네 번을 

끌어야 할지도 몰라.”

중년인은 엄지손가락으로 입 주변의 빳빳한 수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흑염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사천무림련의 그---.”

흑염노인은 중년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인 후에 옆의 노인에게 말했다. 

“이보게, 신사! 자넨 영현이 매복진의 운용을 제대로 행할 수 있도록 지도한 후에 본궁으로 돌아가게.”

마상응안의 노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흑염노인을 바라보았다.

흑염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여긴 내가 있을 거야. 좌상이 자네가 필요한가 봐.”

“알겠습니다.”

노인이 가볍게 목례하는 순간, 삼십대 후반의 백의 중년인이 원탁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흑염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중년인에게로 다가갔다. 

“갈 테냐?”

중년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예, 준비가 되었습니다.”

흑염노인이 중년인의 두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사람은?”

중년인이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대답했다. 

“서로 가겠다 하여 만류하느라 혼났습니다. 스물만 추렸습니다.”

흑염노인은 보기 드문 환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중년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쩔 수 없구나. 이 일은 외부 사람에게 맡길 수 없음이니 수고하여라.”  

중년인 역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절도있게 목례해 보였다. 

“천군께 영광을!”

흑염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인은 다시 한 번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가겠습니다.”

“잘 가거라.”

중년인은 왔던 것처럼 조용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흑염노인은 중년인이 이미 사라졌는데도 한참이나 문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개 짓 힘차 보이니 떠나보내는 게 옳으련만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