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코를 훌쩍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 손을 넣어 낡은 천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청년은 불룩한 주머니를
청인자에게 건네며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도사님. 먼 길을 오느라 수고하셨는데 제가 여유가 없어서 이것밖에 못 드리겠습니다. 다음번에 오실 때는 제가
반드시---.”
“되었네. 이미 배부르구먼. 그나저나 자네 혈색이 안 좋아.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건 알지만 건강에 각별히 신경 쓰게. 기루
좋다는 게 뭔가? 손님들 먹다 남은 거라도 훔쳐 먹어. 그래야 산다. 자네가 살아야 자네 모친도 살고. 알지?”
청인자는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주머니를 받았다. 생각대로 구리 동전이라면 한 냥이나 될 정도의 무게였다.
청년은 청인자의 손놀림에서 오래간만에 따뜻함을 느끼며 붉게 물든 눈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 문 안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 촌닭! 너 거기서 뭐해? 잘라 버린다.”
청년이 당황하여 문안으로 발을 넣었다가 청인자에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운청산이 안을 들여다보니,
청년이 날카롭게 생긴 장년인에게 연신 허리를 접고 있었다.
운청산은 눈을 하얗게 치뜨고 청인자에게 힐난조로 물었다.
“그거 왜 받으셨어요? 안 그래도 몸이 부실해 보이던데 몸보신이라도 하라 하지 않으시구요?”
청인자가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녀석이 되돌려 준다고 이 돈을 쓸 것 같으냐? 차라리---.”
청인자는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저었다. 운청산이 뒤를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눈빛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는 운청산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돈 안 되는 신객 일은 끝냈으니, 이제 돈을 벌어볼까?”
“그럴까요?”
운청산도 고개까지 까닥이며 활짝 웃었다.
청인자는 홍화가 좌우를 둘러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글렀다. 두어 시진 더 지나야 사람 좀 다니겠구나. 일단 무후대로로 가 보자.”
무후대로에 들어서니 과연 청인자의 예상대로 병장기를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무인인 듯한
기운을 풍겼다.
“허! 살기(殺氣)가 말이 아니네. 이래가지고야 사람들이 맘 편히 다니겠나?”
청인자가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살폈다.
“옳지. 저기 좋네. 목 조오타. 천존께서 보우하사, 허허허!”
운청산이 바라보니 과연 청인자의 말 그대로였다. 선음다관(仙音茶館)이라는 번듯한 다관의 문 옆이었는데, 그 옆으로도
다관들이 줄지어 있고 또 홍화가 반대쪽 거리로 통하는 골목이 있어 사람들의 출입이 적지 않았다.
운청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외숙, 또 자릿세 내라는 곳인데요. 저쪽에는 노점 장사가 한창인데 저 좋은 자리만 비어 있잖아요?”
청인자가 운청산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신세 좀 지자. 전에 보니 잘 처리하던데, 무슨 걱정이냐?”
“에이, 거기는 동네가 작았잖아요. 흑풍사 놈들처럼 시커멓게 몰려오면 어쩌라구요? 검이라도 휘두를까요?”
“그건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청인자는 운청산을 남겨놓고 먼저 걸어가 버렸다. 운청산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고 청인자의 뒤를 따랐다. 운청산은 문 옆
귀퉁이 자리에 이르자마자 대나무 등짐을 벗었다.
등짐 안에서 온갖 것이 다 나왔다. 빤지 오래된 것 같은 넓은 마포, 서책들, 병들, 지필묵과 괴황지 뭉치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접는 나무의자까지 나왔다.
운청산은 마포를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서책들을 늘어놓고 기타의 것들을 차례로 진열했다. 운청산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판을
한 번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등짐에서 때 묻은 면포조각을 꺼냈다.
“도사님, 거기서 무얼 하시려구요?”
나무의자에 앉아있던 청인자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흰색 앞치마를 두른 청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청인자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아, 미안하네. 먼저 허락을 구했어야 했는데---. 하여튼 신세 좀 지세. 내 나중에 한가해지면 자네 사주 관상 다 보아
줌세.”
다관 점소이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만, 거기는---.”
청인자가 무슨 뜻인 줄 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음음음. 알아. 장사 한 두 번 하는 것 아니니,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네.”
다관 점소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봉변을 당하셔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희 다관 앞에서 소동이 일어나면 주인 나리가 난리치실 테니,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청인자가 손을 뻗어 괜찮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문제 생기면 내가 막무가내로 들어앉았다 하게. 문제 생길 일도 없지만 말이야.”
점소이가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운청산이 면포를 펼쳤다. 가로로 한 자에 세로로 네 자 정도 되는 면포였는데, 거기에 관상, 궁합, 사주, 부적,
수궁사, 접골이라고 써있었다. 운청산은 대나무 등짐을 지탱하는 네 귀퉁이의 바깥쪽 대나무 두 개를 뽑아 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면포를 붙였다.
그때 거리를 바라보고 있던 점소이가 “이크!”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청인자가 말했다.
“청산! 오는가 보다.”
운청산이 슬쩍 살펴보니 사거리 반대쪽 골목에서 비쩍 마른 작은 키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얼굴의 청년 하나가 거치적대는
사람을 밀어버리고 팔자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청년이 청인자의 일장 앞에 이르러 왼쪽 콧방울에 왼쪽엄지를 대고 “힝!” 소리를 냈다. 손톱만한 누런 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년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보슈, 도사 양반! 무슨 장사 하시우?”
청인자가 웃으며 말했다.
“사주, 관상, 궁합은 물론 부적도 써주고 접골도 한다네. 왜? 관상 봐줄까?”
청년이 두 주먹을 움켜쥐어 뽀드득 소리를 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어이! 어이! 이 말코가 정말 세상 물---.”
“사부님! 여기에 꽂을까요?”
운청산이 청년의 말을 끊었다. 청인자가 운청산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무려면 어떠냐? 잘 보이기만 하면 되지.”
“어이! 이-이것 봐!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청년이 오만상을 구기며 끼어들었다. 그때 운청산이 대나무 깃발을 바닥에 휙 던졌다. 별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일곱
자가 넘던 대나무가 땅에 꽂혀 다섯 자로 줄어들었다.
청인자가 청년을 보며 물었다.
“뭐라 그랬던가?”
순간 청년은 슬그머니 오른발을 비벼 땅의 강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오. 장사 잘 하시라고---.”
“그냥 가려고? 관상 좀 보고 가지. 자네 인생이 평탄하지 못할 것 같아. 길에서 칼 맞지 않으려면 부적이라도 한 장 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아! 저녁에 다시 오지요, 뭐. 지금은 바빠서---.”
청년이 뒷걸음질치다가 급히 몸을 돌려 달려갔다.
운청산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 또 얼마나 데리고 오려나? 정말 싫은데.”
그때 청인자가 말했다.
“청산!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한 곡조 불어라. 사람은 많은데 관심들이 없구나. 음! 추야가, 그거 효과 좋더라.
그걸로 해라.”
운청산은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청인자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하여튼 외보살내야차(外菩薩內夜叉)라니까. 내가 사람들 앞에서 옥소 부는 일 싫어하는 것 잘 알면서---.’
청인자가 왼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청산! 뭐 하냐? 여든 일곱 곤륜제자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저런 말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잘도---, 후!’
운청산은 고개를 설래 흔들고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취령이라고 이름붙인, 반선이 사다준 취옥으로 만든 옥소를 매만지던
운청산이 결국 옥소를 입을 가져갔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리던 운청산이 마침내 소리를 흘려냈다. 곡은 역시 청인자의 청한 대로 대낮의 무더위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추야가. 언젠가 귀곡산인이 운청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말했던 그 곡을 소곡(簫曲)으로 바꾼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별 반응 없이 지나쳤다. 그러다가 문득 운청산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끌어 운청산 앞으로 이르렀다. 대개가 피곤한 얼굴들이었다.
청인자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지금 운청산이 부르는 곡이라면 귀곡산인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곡조가 전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꿈을 잃고 낙향한 젊은 악사의 괴로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사람을 모르던 운청산이 신객
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제는 능히 그 외롭고 힘든 심정을 동감할 수 있게 된 탓이었다.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이 청인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받히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내 비록 음율에 대해서는 잘 모르오만 저 악사의 현금소리는 제법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구려.”
운교인이 나라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을 받은 사람은 당명방이었다.
“풍롱호심(風弄湖心)이라는 곡이지요. 이 당모가 몇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이 근동에서는 제일로 치는 악사라 하더이다.
그래서 굳이 이곳으로 오자 했던 것이오.”
순간 운교인이 ‘내가 너한테 물어 봤냐?’하는 눈빛을 은근히 드러냈다. 그러나 당명방의 눈길은 이미 나라연에게로 향해
있었다.
나라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명방의 눈빛은 기쁨으로 물들었고 반대로 운교인의 얼굴은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때
당명방의 곁에 앉아 있던 당우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라연에게 말했다.
“언니! 그 창문 좀 열어줘 볼래요.”
창가에 앉아있던 나라연이 당명방과 운교인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얇은 창호지로
된 창문을 열었다.
“응?”
나라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가을 밤 서늘한 바람 같은 옥소소리가 확연하게 들려왔다.
한쪽에서는 현금소리, 다른 한쪽에서는 옥소소리가 들리는데 곡이 다르니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음이 엉키는 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밝고 가벼운 칠현금소리가 처연한 옥소소리를 압도하는 듯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옥소소리가 칠현금소리를 죽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칠현금 소리를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나라연이 이채를 띄며 칠현금을 뜯는 악사를 바라보았다. 악사는 이미 칠현금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관에서 현금을 뜯는 악사이니 추야가가 뜻하는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으리라. 악사는 끝내 참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나라연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는데,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턱을 받히고 있던 당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라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관 문 옆에서 청의를 입은 청년이 옥소를 불고 있는데 그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다관의 문 앞에 앉아서 소매로 눈을 훔치는 점소이 옆으로 당우리가 나타나 쪼그리고 앉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에 건곤불이기를 보면서 히쭉거리다가 진가소전도 봤습니다. 소름이 쫙 돌더군요. 유치짬뽕! 늙었나 봅니다.^^;;;
*전체 무공의 세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있습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요.^^;;; 수왕천마가 광기를 토해내는
순간 이미 죽음을 생각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뭍에 오른 수왕천마가 별 힘을 못
쓴 이유와 연관지어 보시면 되겠지요.
*여자를 안지 않는 것과 안지 못하는 것은 많이 다르겠지요. 남자가 남자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단순한
오줌싸개만은 아닌 것이지요. 이유가 더 필요할까요?
*괴선을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제는 설명 줄이깁니다. 어렵네요. 산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연재의 이유가
피드백이니 그렇게 느끼는 부분은 분명히 말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책으로 나갈 때는 조금이라도 더 수정해서 낼 수
있으니까요. 단 연재의 어느 부분부터 읽었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제 판단이 달라질 테니까요.
*이미 좆이라는 원색적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쓰진 않지요. 오탑니다.^^
*혼강룡은 실존했던 무깁니다. 다만 그 평가는 별 의미가 없다는 쪽이지요. 바람 빠진 부기를 써보신 적이 있지요. 그걸
타고 물에 들어가면 수영도 아니고 잠수도 아닌 상태가 됩니다. 점화를 시키고 손을 떼면 수면으로 올라가서 터지지요. 그
사이에 사람은 깊이 잠수 하구요. 좀 세세히 묘사하는 쪽으로 수정하겠습니다.
명은 그들을 성도로 이끌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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