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스물도 안남은 것 같은데. 이제 대충 끝난 것 같군. 제대로 키운 한 사람의 전사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지 여실히 보여주는 일전이었어. 그만 가볼까?”
백무극이 싱긋 웃으며 호변을 바라보았다. 호변 주위에 무인들이 드문드문 움직이고 있었다. 모습은 수로연맹 사람들처럼
어수룩했으나 그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그들이 아마도 심천궁 사람들이리라.
그때 혈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소군! 저기 보지죠. 몇이 도주할 모양입니다. 우리 쪽으로 오는데요.”
백무극이 다시 전장을 주시하니 목환승을 비롯한 초로인 세 사람이 전장을 벗어나 강가로 나오고 있었다. 목환승이 부상을
당했는지 두 사람이 좌우에서 목환승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좌우에서 부축하고 있는 초로인들의 부상이 더
심각해 보였다.
“그렇긴 한데 수왕천마도 뒤따르는 것 같군.”
금새 백여 장을 지나친 세 사람이 백무극의 배로부터 삼십여 장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뒤로 물에 떠밀리는 듯한
흑면사내가 광기로 물든 눈빛을 빛내며 목환승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백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급히 소리쳤다.
“배를 돌려. 수왕천마가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는군. 가 보아야겠어.”
사공들이 분분히 일어서 노를 물에 넣으려는 순간 혈응이 배 뒤로 다가가 두 손을 물로 뻗었다.
물보라 일고 배는 빠른 속도로 강변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팡!
뭍으로 사십여 장이나 더 들어간 곳이라 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면사내는 두 손에 사람 얼굴만 한 물 두
덩이로 물막을 막들어 내며 쉬지 않고 날아오는 도기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목강승과 목용승은 입술을 깨물며 도를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가쁜 숨이 힘겹게 새어나왔다.
“카하하하하! 칠대세가라더니 겨우 그 정도인가?”
비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물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흑면사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수전이 시작된 후로 벌써 두 시진이 흘렀다. 그 동안 제대로 숨 한 번 돌려보지 못한 두 초로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목환승은 여전히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목환승은 눈을 뜨고
있었다. 배에서 출혈이 보이긴 하나 흑면사내를 막아선 목강승과 목용승에 비하면 크게 양호해 보였는데도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다.
“형님! 가셔야 합니다.”
목강승이 절규하듯 외쳤다. 그러나 목환승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만 내저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수십 줄기 물방울들이 초로인에게로 날아갔다. 목용승이 급히 물방울들을 막아서며 도를 휘돌렸다. 파란 도기들이 둥근
윈을 그리는 순간 물방울들이 부서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목용승은 두 발짝 물러서며 울컥 피를 토해냈다.
흑면사내는 두 손으로 물 덩이를 뭉쳐 펼치며 연달아 두 손을 내뻗었다. 목용승은 이빨이 부서져라 악다물고 다섯 번이나
연달아 도를 내쳤다. 반월 같은 도기가 물 덩이를 막아나갔다.
파파파파팡!
물방울이 터지며 흩어지고 목용승이 다시 피를 내뿜는 순간 흑면사내가 거리를 좁히며 억지로 도를 쳐올리는 목용승의 가슴을
짓이겼다. 초로인은 입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홀로 남은 목강승이 분루를 흘리며 힘겹게 도를 치켜 올렸다.
“물귀신 같은 놈! 물이 떨어졌으니 이제 어쩔 테냐?”
“크크크크크, 물이 떨어지긴 왜 떨어져? 여기 있잖아.”
흑면사내가 조소를 흘리며 방금 쓰러진 목용승을 향해 핏물 가득한 손을 뻗었다. 순간 가슴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던 피가
가느다란 핏줄기가 되어 흑면사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합!”
목강승은 널브러진 목용승을 넘어 흑면사내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피를 밟으며 쇄도했다. 도가 내리쳐지고 흑면사내의 손바닥에
닿았던 피들이 다시 앞으로 뻗어 나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핏줄기가 초로인의 가슴을 꿰뚫고 파란 도기가 흑면사내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어 겨드랑이 밑으로 흘러나온 것도 동시였다.
“안돼!”
흑면사내의 뒤에서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바로 백무극 일행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초로인은 즉사했고 흑면사내 역시 피가 너무 많이 흘러 가망이 없어 보였다.
백무극이 여전히 웃고 있는 흑면사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천궁에서 나왔다. 왜 그랬나? 이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왜 그랬어?”
흑면사내는 드러누운 채로 푸들푸들 웃으며 말했다.
“끄흐흐흐! 애초에 완전해질 수 없는 무공으로 완전함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 계수신공, 아니 계수마공은 내게 극강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고통도 주었다. 한때는 모든 고통을 이기고 계수마공을 완성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바로 일년
전의 일이야. 그런데 말이야. 큭! 흐흐흐, 방광이 부풀어 올라 가만히 서있어도 오줌이 줄줄 세더라구. 마공을 운용하지
않으면 오줌싸개가 되는 거야. 우습지 않나? 한때는 유달리 강한 신장 덕에, 하룻밤에 여자 셋을 안지 않으면 욕망을
해소하지 못하던 내가 오줌싸개라니. 처음에는 일성이 필요하더니 일 년이 지나니 삼성이 필요해. 잠을 잘 수가 없지. 항상
운공을 하고 있어야 하니까. 오직 큰물에 있을 때만이 자유를 얻는다. 흐흐흐, 그냥 흘려도 되니까. 하지만 그리 살면
인간이 아니질 않는가? 곧 사성이 필요할 것이고 오성, 칠성 그리고 십성을 운용하면서도 오줌을 흘리는 날이 오겠지. 살고
싶겠나? 크크크. 나는 오늘 무림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나 한 사람이 강호칠대세가의 하나를 궤멸시킨 셈이지. 결국 빚도
갚은 셈인가? 됐어. 그걸로 내 삶은 충분해. 이제 비켜주겠나?”
백무극이 할 말을 잃고 일어서서 흑면사내와 아직도 멍하게 앉아있는 목환승의 사이를 비워주었다.
“크흐흐흐, 살아갈 희망을 잃은 것인가? 결자해지라! 내가 그리 만들었으니 내가 데려가 주지.”
순간 흑면사내의 떨어져나간 어깨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와 왼손바닥으로 이동했다. 핏방울은 둥근 공이 되어 손바닥 앞에서
휘돌았다.
흑면사내가 손을 내뻗자 혈구가 목환승에게로 날아갔다. 흑면사내의 목이 꺾였다. 혈구는 다시 핏방울이 되어 목환승의
발아래에서 흩어졌다.
“혈응!”
백무극이 부르자 혈응이 즉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못 다한 일을 예의를 다하여 마무리하게.”
백무극은 결과를 보지도 않고 발길을 돌렸다.
명은 그들을 성도로 이끌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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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그들을 성도로 이끌었다.
운녹산이 힘 없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운 가주! 안됐소이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일이 생길 수 있었는지---.”
당유연이 말하자 운녹산은 포권을 취하며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수적이라고 상대를 얕보고 수전에 대한 대비가 너무 적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전통을 지닌
수로연맹, 무공의 고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텐데---.”
운녹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운녹산이 지친 듯 털썩 주저앉자 현상진인과 공명선사 그리고 신수사태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현상진인이 한동안 좌중을 지배하던 침묵을 깼다.
“허면 운가는 그 일을 어찌 대처하려 하시오? 운 가주의 처가이니 뭔가 조치가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오만?”
운녹산이 고개를 저었다.
“본가뿐만이 아니라 무당에서도 사람을 보내려 했으나, 그쪽에서 거절의 뜻을 밝혀왔습니다. 어르신들이 여전히 정정하시고
차대의 아이들이 있으니, 우선은 가문을 정비하고 복수는 차후로 미룬다는---. 후! 당장은 무당의 보천진인께서 목가의
재건에 나서겠다 하시니, 저희는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허! 헌데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군요. 관음사가 습격을 당했고 점창에 이어 목가까지 무너졌는데 거기에 홍라교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평화롭던 무림에
평지풍파가 이는 것 같습니다.”
공명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태백성 주위로 뭇 군성이 모이고 있으니, 이는 곧 전화의 조짐이라.”
신수사태가 말을 받았다.
“혜법 큰스님 말씀이니 어긋날 리 없겠지요. 문제는 태백성이 어느 쪽에 붙느냐는 것인데---.”
예로부터 태백성은 백성들에게는 불길한 전성(戰星)이며 승자에게는 길성(吉星)으로 알려져 있다. 태백성이 붙는 측이 곧
전쟁의 승리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현상진인이 다시 말했다.
“무당은 목가의 일로 사람 보내기가 힘들어졌고, 화산과 종남에서 보내온 이들을 모두 합해 봐야 이십여 명밖에 안되니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소. 생색만 낸 것인데, 그들의 사정이 편한 것만은 아닐 테니 뭐라 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허면 점창의
일은 결국 별 탈이 없는 우리 사천 무림이 단독으로 해야 되겠구려.”
한동안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상대가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목가의 일과는 달리, 점창의 일에는 상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인데, 기대했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위험부담을 크게 느끼지는 것이리라.
“한동안 정보 수집에 주력하면서 관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당유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신수사태가 차가운 눈초리로 당유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보수집이라! 지난 열흘 간 점창 쪽의 일로 새로운 사실을 안 게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관망이라는 당시주
말씀은 악도가 있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자는 말과 같습니다.”
당유연이 신수사태를 직시하며 대답했다.
“불가피합니다, 사태.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허어! 정도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지던 강호의 도의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됐습니까? 점창이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도
해야 할 일이거늘, 공식적인 요청을 받고도 몸을 사린다니요? 구파와 칠가가 단순히 힘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 명예에 걸맞은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요.”
신수사태의 말에 당유연이 노기를 드러내며 탁자를 지그시 눌렀다.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만사불여튼튼. 잠시 미루자는 것입니다.”
그때 운녹산이 나섰다.
“어허! 이러다가 우리끼리 싸우겠소이다. 두 분 모두 고정하시지요. 사태의 말씀이 정도를 따른다면, 당 가주의 말씀은
현실을 따릅니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자! 두 분의 말씀을 하나로 합해 보지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나
심대한 피해가 우려된다, 이 말입니다. 맞습니까?”
운녹산이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 다음 말을 재촉했다. 운녹산이 차분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반드시 구파와 칠가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림에 사람이 우리들뿐입니까? 제가
제안을 하나 하지요. 공개적으로 사람을 모읍시다.”
현상진인이 의혹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공개적으로 사람을 모은다? 누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선단 말이오?”
운녹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로서는 위험부담을 줄이는 일이니 전비(戰費)는 우리가 나누어 모아야 하겠지요. 이를 테면 고용하는 것입니다.”
순간 신수사태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운녹산을 노려보았다.
“결국 돈으로 사람을 사서 칼받이를 만들자는 말입니까?”
운녹산이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물론 우리도 참여해야지요. 사람이 모이게 되면 사천무림련을 장강 변으로 옮겨 우리의 의지를 천명하고, 우리 측 사람들이
선봉에 섭니다. 다만 위험부담을 최소화 하자는 것입니다.”
당유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수사태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돈으로써 우리 측 인명피해를 줄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오. 이 당모도 당가가 정도를 외면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소이다.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겠지요. 하지만 가급적이면 피를 덜 보는 쪽으로 하고 싶소이다. 사태께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말씀하실지 몰라도, 사태와는 달리 우리는 속세인. 죽음에 초연할 수 없소이다. 이 당모는 본가 사람 한
사람이라도 피를 덜 흘릴 수 있다면 기꺼이 할 것이오.”
신수사태는 지그시 눈을 감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측도 함께 참여한다면 이의 없습니다. 단 본사는 금전적으로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하니 빈니가 선봉에 서도록
하지요.”
그때 공명선사가 말했다.
“아미타불! 관음사의 재정은 빈승이 잘 아오이다. 결정이 되면 우리가 부담하겠소. 다만 빈승은 사람을 뽑는 와중에 간세가
끼어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구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럴 가능성이 많지요. 그러나 고용하는 무인들에게는 정보에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될 것이고, 일을 진행함에 있어
신속함을 잃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물론 그 전에 가능한 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확인해야겠지요. 그 때문에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운녹산이 말을 마치면서 신수사태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신수사태는 운녹산의 마지막 말이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시간 동안 상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신수사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어색하게 굳어있던 당유연의 얼굴을 풀어주었다.
현상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뜻이 모아진 것이오? 허면 사람은 얼마나 모으는 게 좋겠소?”
현상진인의 질문으로 사람들은 다시 한동안 의견을 교환했다.
* * *
백의중년인이 부복하며 대리석 의자에 앉아있는 백염노인에게 봉서를 건넸다. 평소와 다른 경로로 전달된 그 봉서에는 사천
특급(四川特急)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염노인이 봉서를 뜯고 내용을 살폈다. 노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허! 누군가가 제법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는구먼. 그러나 이렇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백의노인은 편지를 접으며 부복한 백의 중년인에게 말했다.
“파불당에 전서를 보내 당주를 들라하게. 그리고 우상께 내가 뵙자 한다고 전하고.”
백의중년인이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반각도 못되어 호골장군의 풍모를 지닌 흑염노인이 들어섰다.
“오자마자 왜 또 부르는가? 쉬지도 못하게 하네그려.”
백염노인이 웃으며 탁자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흑염노인이 앉았다. 백염노인은 봉서를 건넸다. 흑염노인이 아무 말 않고
편지의 내용부터 확인했다.
“몸을 더 사리는군. 이것 보게. 내가 우려했던 그대로 아닌가? 목가를 눌러도 너무 눌렀어.”
흑염노인이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백염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일이 한 두어 달 더 밀릴 것 같군.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아. 결과는 더 좋아질 수도 있어. 오자마자 또 가란
말을 해야 하니 미안하네만 이번에 가거든 아예 상주해 주게. 확실히 해줘야 해.”
“가는 거야 문제 될 것 없네만, 어떻게 하라고?”
백염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기지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점창을 내어주어서도 안돼. 막상막하라는 느낌을 주어서 조금만 더 용을 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어야 해.”
흑염노인이 백염노인의 미소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호!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조금씩 늪 속으로 끌어들인다? 허면 얼마나 죽고 죽여야 하나?”
“수적으로 크게 줄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한도에서 돋보이는 놈들만 죽이면 되지 않을까?”
흑염노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장수감만 날려버려라? 알았네. 그럼 공사는 쓸데없이 한 셈인가?”
“아니야. 저들의 공세를 봐가면서 부분적으로 운용해 보아도 좋을 것 같은데.”
“음, 그건 내가 재량껏 하지. 그럼 가 보겠네.”
흑염노인이 일어섰다. 그러자 백염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어 만류했다.
“이보게. 아직 시간 많아. 파불을 불렀으니, 가는 길에 길동무 삼으면 되겠구먼.”
흑염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놈은 이상하게 싫은 느낌인데---.”
백염노인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동시에 웃음 짓자 흑염노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와! 정말 대나무가 많군요.”
성도 외곽에 막 들어선 운청산이 가로수처럼 길 좌우에 심어진 대나무들과 또 집집마다 가득한 대나무들을 신기한 듯 살펴보며
말했다.
청인자는 환하게 느껴지는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운과 함께 서녕부에 들어갔다가 신객으로서의 볼일과 돈벌이를 행하고 나서 섬서를 지나 다시 사천으로 들어설 때까지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그 사이에 운청산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청인자를 기쁘게 한 것은 말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수다스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나, 적어도 자신과 함께라면 말을 꺼내고 답하는 것이 예전에 비해 한층 자연스러워졌고,
또 농을 하는 빈도도 높아졌다. 물론 운청산이 하는 농은 때로 심오하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는 없었지만, 그게 어딘가.
또 다른 변화는 얼굴이었다. 청인자의 반복적인 요구에 따라 늘 애써 웃음 짓는 운청산이었지만, 미소 뒤에 보이는 그늘만큼은
청인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섬서에서 사천으로 넘어오는 단 닷새의 시간 동안, 운청산의 얼굴은 맑게 갠
하늘과 같이 투명해졌다.
청인자는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단지 검각현에 이르렀을 때 사흘 만 혼자 있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고, 청인자는
기꺼이 허락했었다. 그 사흘이 운청산의 얼굴을 변하게 만든 것이었다.
청인자는 운청산이 그 사흘 동안 경의상의 묘에서 지내지 않았을까 하고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경의상이 운청산의 그늘을 모두
거두어 가지 않았을까 상상하고 있었다. 궁금했지만 청인자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는 것을 상기하여 굳이 묻지 않았다. 밝게
웃는 운청산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또 다른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옷차림이었다. 청인자가 서녕부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운청산의 추레한 도포를 벗기고
청의면복을 입힌 것이었다. 거기에 머리도 단정히 정리할 겸 청건까지 곁들여 씌어 놓았다.
운청산은 어색해 했지만 청인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옷이 날개라고, 늘 나이보다 서너 살 더 되어 보이게 만들던
주름살을 가리고 말쑥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어느 청년 못지않게 훤칠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길 좌우를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는 운청산의 밝은 옆얼굴을 보며 청인자가 빙긋 미소 지었다.
“성도에는 유명한 것이 두 가지 있다. 바로 다관과 대나무다. 대나무 종류만도 백 사십여 종이나 된다 하더구나. 성도
뿐만이 아니라, 사천하면 대나무지. 사천 사람들이 곧잘 하는 말이 있다. 대나무 키우는 것이 자식 키우는 것보다 낫다,
라는 말이지. 정말 그렇겠느냐만, 사천 사람들은 유독 대나무를 사랑한다. 대나무 요람에서 자라고, 대나무 침상에서 잠자며,
시집갈 때도 대나무 꽃가마를 타며, 죽어서 대나무 상여를 탄다. 또 대나무로 울타리 치고, 대나무로 지붕 덮고, 대나무로
옷까지 만들어 입으니, 그야말로 나서 죽을 때까지 대나무 신세를 지는 것이다. 그러니 대나무를 사랑할 수밖에.”
운청산이 놀랍다는 듯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을 살폈다. 사실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없는 곳이 없었고, 지붕도 모두 대나무
기와로 되어 있었다. 광주리도 대나무요, 평상과 의자마저도 대나무였다.
“옷까지 대나무로 만들어요?”
“음, 가늘게 짼 대오리를 엮어 만들지. 더운 사천에서는 이 죽의 하나로 봄, 여름, 가을을 모두 난다 하더구나. 체면을
차려야 하는 사람들은 아주 가는 대오리로 만든 죽의를 입고 겉옷을 입는다. 그럼 옷이 달라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어
좋다더라. 오십 문이면 제대로 만든 걸 살 수 있으니, 한 벌씩 사 입자꾸나. 너무 덮지 않느냐?”
청인자는 도포 옷자락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운청산이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별로 모르겠는데요? 여독이 쌓여서 기가 허해지신 것 아닙니까?”
“한서불침(寒暑不侵)이라 이 말이지? 아이구야, 너 잘났다, 이놈아.”
대나무 길이 다른 몇 가닥 길과 합쳐지면서 드문드문 하던 집들도 점차 많아졌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 역시 많아졌다.
성도에 이르렀다 하니 운청산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나, 청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허! 들리는 말들이 수상하더니 과연 칼 찬 사람들이 많구나. 사천무림련에서 무림인을 고용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운청산이 사람들을 살피면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가요? 칼 찬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놈아! 아직 도성 밖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면 많은 것이지. 아마도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무림인들이 버글버글 할
것이다.”
운청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요.”
청인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상관이 없어? 강호인들은 성격이 급해. 빠르고 쉽게 해결할 수단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이지. 괜히 시비라도 붙으면
귀찮아져. 그리고 세상이 시끄러워지면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안 쏠리잖아? 장사가 안 된다고.”
운청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장사 걱정 하셨군요? 걱정 마세요. 사람들이 안 모이면 강호인들을 상대로 피병부(避兵符)를 만들어 팔면 되잖아요?”
청인자가 미소 지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놈이 이제 장사꾼이 다됐구나. 허나 다른 건 몰라도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안 된다. 게다가 성도는 주재자 격인
청성의 영역, 잘못하다가는 벗어날 수 없는 큰 시비에 휘말린다.”
“그럼 뭐, 해보다가 안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지요.”
청인자가 웃으며 물었다.
“놈! 너 장사꾼 될래? 이 일에 너무 재미를 붙이면 안돼.”
“압니다. 살기 위해 장사하되 더 잘 살기 위해 장사하지는 마라, 이 말씀이지요?”
청인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운청산과 청인자는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삼십여 기의
인마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운청산과 청인자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운청산은 이채를 발하며 지나가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왠지 낯익다고 느껴지는 얼굴들인 탓이었다. 운청산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운청산은 오른손을 들어 백회를
쓰다듬었다. 왠지 찡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청인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이 만들어 놓은 먼지를 소매바람을 일으켜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멍한 운청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청산! 왜 그러느냐?”
운청산이 흠칫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멍해진 느낌에 잠깐---.”
운청산이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짓자 청인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각 후 두 사람은 마침내 성도에 도착했다.
집다로라 불리는 무후대로에서 좌측 샛길로 빠져 나가면 무후대로보다는 좁지만 그에 못지않은 거리가 나온다. 원래 이름은
보문로(寶雯路)지만, 사람들은 그 거리를 홍화가(紅華街)라고 부른다. 그 거리에 유독 객잔과 주점 그리고 청홍루가 많은
탓이다.
아직 대낮이라 홍화가가 왜 홍화가인가를 보여줄 만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청산은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이 바로 홍화가의 유명한 청루 가운데 한 곳인 백화루(百花樓) 정문 앞이기 때문이었다.
낯빛이 노랗고 눈에 붉은 기운이 감돌아 피곤한 기색이 여실한 회의 청년이 문 안쪽의 눈치를 살피며 청인자에게 편지를
건넸다.
“도사님. 아는 기녀에게 부탁했습니다요. 제발 이대로만 전해주십시오.”
청인자가 청년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읽어봐도 되겠나?”
회의 청년이 다시 한 번 문 안쪽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사님께서 전해 주실 것 아닙니까?”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 운청산이 청인자의 어깨 너머로 훑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지금 그의 피곤한
기색과 불안한 언동과는 달리, 기루에 있어서 잘 먹고 지내며 능력을 인정받아 곧 더 좋은 자리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운청산은 없는 이빨이 더 많던 청년 어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편지를 외면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청인자의 말처럼 신객이란 단순히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불편한
마음, 서러운 마음, 귀찮은 마음까지 오만가지 마음을 받아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순화시키고 때로는 과장하여 전해야 했다.
오늘 같은 날이면 그저 안쓰러워 뭉클해질 따름이지만 사흘 전에는 내쫓김을 당한 적도 있었다. 차라리 사연을 모르면 편할
것인데, 운청산은 청인자가 왜 신객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청인자가 청년에게 말했다.
“걱정 말게. 이대로만 전해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