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가의 배가 장강수로연맹의 이백 장 앞까지 다가선 그 시간, 동정호 서안에서 겨우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 별 다른 특징이
없는 소선 한 척이 외로이 떠있었다.
일백여 장 앞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펼쳐져 있으니 외롭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적절하지 못한 시기에
한가롭게 떠있다는 말이 옳으리라.
노수로 보이는 아홉 명의 장정들의 배의 앞과 뒤에 모여앉아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배의 중앙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동정호의 잔잔한 물결처럼 맑고 고운 비파소리가 잔물결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배와 같이 가로로 길고 세로로 좁은 주안상 주변에는 평화롭고 아늑한 비파소리를 만들어내는 중년여인과 술병을 든 어여쁜
기녀가 있었고, 주안상의 중심에는 백무극이 미소 짓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소불과 혈응이 탁자의 좁은 양면에 마주앉아 중앙의
백무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무극이 술잔을 들어 기녀에게 내밀자 기녀가 차분히 술을 따랐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백무극이 문득 소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소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허락하신다면야---.”
백무극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안 되겠어. 좀 있다 할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참는 게 낫겠군.”
소불이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백무극은 실망하는 소불을 보며 미소 짓고서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기녀에게 내밀면서 비파를 타는 중년여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시게. 분위기가 너무 처져. 대낮에 월영무(月影舞)는 좀 그렇지 않은가?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다른 곡을
부탁하네.”
중년여인이 고개를 숙이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에서 밖으로 내 타는 것을 비라 하고 밖에서 안으로 들여 타는 것을 파라고 하여 비파다. 중년여인의 손은 낮은 곳에서부터
오현을 두루 내 타다가 점점 올라가며 내 타고 들여 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장중하던 곡조가 뒤로 갈수록 급박하고
비장해졌다.
“옳지. 패왕사갑(覇王隸甲)이라! 좋구나. 적절해, 아주 적절해.”
백무극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호기롭게 술잔을 비운 후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찍이 천하를 질타했건만
이제 사방에서 적을 만나 나갈 길이 없구나.
분루 흘리며 시 한 수 읊으니
미인은 자진하며 슬픈 미소를 남긴다.
오호 통재라!
천하의 패왕 항우가 굵은 눈물을 흘리는구나.
그러나 하늘은 이미 그를 저버렸으니
패왕인들 어찌하랴.
호랑이 같은 강동 자제 팔백이 죽음을 불사하니
좌절한 왕은 기어이 탈출에 성공하도다.
그러나 우희도 없고 수하들도 없으니
패왕은 참지 못하고 홀로 적진에 뛰어든다.
적 천이면 어떠하고 적 만이면 어떠하랴.
찌르고 베고 휘두르니
누가 있어 패왕의 앞을 가로막으리.
또 다시 적진을 돌파하여 오강에 다다르니
강 넘어 그 땅이 뜻 세운 강동이라.
얼굴에 또 얼굴이 겹쳐지니,
죽고 없는 강동 자제 팔백에 그 부모들이라.
패왕은 차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마침내 갑주를 벗어버린다.
영웅은 죽음마저도 스스로 결정하니,
저버린 하늘 역시 영웅의 기개만은 꺾지 못하리.”
흥에 겨워 운율도 맞지 않는 자작시를 단숨에 읊어버린 백무극은 술잔을 비우고 거칠게 내려놓았다.
“좋구나. 누구냐? 과연 누가 패왕의 족적을 따를 것인가? 목가인가, 아니면 수로연맹인가?”
소불이 지금껏 듣지 못했던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은 둘 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뭡니까? 설마 시라고 읊으신 건 아니시지요?”
순간 혈응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소불! 무엄하다.”
그러나 백무극은 화를 내기는커녕 소불을 보며 빙긋 웃다가 기녀에게 술병을 받아 던졌다. 소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소군.”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도록.”
“물론이지요.”
소불이 전장으로 고개를 돌리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소불은 술을 마시지 못했다. 목가의 선단이 마침내 수로연맹의
백삼십여 장 앞까지 도달하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작했습니다. 소군!”
백무극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 하백이 나타나 풍랑을 일으키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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