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물러선 벽송은 등에 진 검을 풀어 두 손에 움켜쥐고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지 않겠다 했건만
눈물은 벽송 그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벽송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십여 보쯤 걷다보니 좌측의 방에서 호방한 웃음소리와 청아한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벽송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방을 바라보았다. 서러웠다. 스승을 모시고 왔다면 그 또한 웃음소리에 한 목소리를
보탰으리라.
벽송은 검을 쓰다듬으며 낮은 웃음을 토했다.
“으허허허, 사부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늘 들고 다니시던 사부님의 이 검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 한 자루 철검에 대점창의 권위가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 무거워 감히 휘둘러보지 못할 위엄이 담겨 있었습니다. 노구로
어떻게 지니고 다니셨습니까? 이 젊은 제자에게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집니다. 사형! 너무하셨소. 새가슴이라 그리 놀리시더니
그런 나에게 벽상을 넘기시다니요? 야속하십니다. 정말 야속하십니다.”
벽송은 또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웃음도 지우고 사천무림련의 뒤쪽 별당으로 들어섰다.
벽송은 그곳을 점창의 사천지원(四川支院)이라 불렀다. 점창의 제자들이 열아홉이나 와있으니 사천지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몰락했다는 현실을 잊고 호기를 부리려 했던 것인데, 오늘따라 별당은 너무나 어둡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벽송은 다시 한 번 얼굴 표정을 단속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순간 열여덟 쌍의 눈들이 한결같이 벽송을
주시했다.
“장문 사형! 어찌 되었습니까? 언젠 떠난답니까?”
벽운이 튕기듯 일어나 물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고사하고 결과마저 통보받지 못했으니 벽송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벽송은 자신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열여덟 쌍의 눈을 외면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형?”
턱이 유달리 뾰족한 벽인이 벽송을 어깨를 잡고 흔들며 채근했다. 벽인자, 열아홉 점창제자들 가운데 일곱 번째가 되며
벽송에게는 두 번째 사제가 되는 이여서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벽송을 대답하지 않고 대신 눈을 감았다.
의연하려고 했건만 꾹 감긴 눈꺼풀이 물기를 짜내었다.
벽운 등이 다투어 일어나 벽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사형! 왜?”
순간 벽송은 눈물을 거두지 않은 얼굴 그대로 열여덟 사제들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열여덟 제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제자들이 장문인을 대합니다.”
“그렇다. 이 검은 벽상. 대점창의 장문지보니라. 이 보잘것없는 사형은 장문지보를 지니고도 그 권위를 내세우지도 못했다.
저들이 이 사형을 한낱 어린아이로 치부해도 감히 벽상검을 들어 내가 점창의 장문인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사부님이
현신하셨다면 저들이 과연 이 검의 권위를 깎아내릴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벽상검은 지금 아무런 뛰어난 점이 없이 이 사형의
손에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제 대점창은 없다. 남은 것은 나와 너희들뿐인 소문파 점창이 있을 뿐이다.”
벽송이 말을 끊고 열여덟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제들이 분노와 그리움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벽송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명심하여라. 우리는 이제 몰락한 문파의 제자들에 불과하다. 아니라 외쳐도 남들은 그리 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외양일 따름이다. 우리 머리 속에는 팔백 년 대점창의 비전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모든 것을 다 익힐
필요 없다. 자신에게 맞는 것 한 가지만을 선택하여 연마하여라. 뼈를 깎고 혼을 갈아 오직 한 가지만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하고 그것을 넘어서라. 낮과 밤을 분별 말고 장소가 어디든 상관치 말아라. 우리에게 남은 자존심은 없다. 남들이 어찌
보든 상관이 없다. 오직 한 가지에 전념하라.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제자들을 들이고 혼신을 다하여 가르쳐라. 알겠느냐?”
열여덟 제자들은 눈물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며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벽송이 다시 말했다.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 치의 주저함도 용납되지 않는다. 굴욕의 세월은 우리에게만 국한시키자. 제자들에게는
우리가 한때 누렸던 대점창의 웅혼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낼 것입니다. 크흐흐흑.”
제자들은 무릎을 꿇은 채로 엎드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벽송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웃는 것, 우는 것 그 어느 것도 지금의 우리가 취할 것이 아니다. 울음도 웃음도 오늘 이 시간 부로 끝내자. 점창산에서
어깨를 활짝 편 제자들을 앞두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웃음만을 되찾게 되리라. 맹세하라. 이 벽상검에 대고 대점창의
영광을 되찾는 그날까지 혼신을 다할 것을 맹세하라.”
벽송은 검을 삐걱대는 나무 바닥에 쿡 찍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순간 열여덟 제자들이 일제히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경건한 자세로 꿇어앉아 벽상검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 * *
하얀 방, 수십 개의 작은 창문들이 뚫려 있는 원통형의 하얀 방이었다. 수십 명의 백의인들이 대리석 탁자 앞에 앉아
왼손으로 자꾸 동그랗게 말리려는 작은 종이를 펴가며 오른손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작은 창문 앞으로 하얀 비둘기가 내려앉았다. 백의인 한 명이 다가가 불안한 듯 날개를 파드득거리는
비둘기를 달랜 후에 비둘기의 발목에 붙은 대롱에서 동그랗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백의인은 탁자 앞에 앉아있는 다른 백의인에게 종이를 건넨 후, 비둘기를 안아들고 방밖으로 나갔다. 종이를 받은 백의인이
말린 종이를 펴서 엄지와 검지로 귀퉁이를 누른 채, 내용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알 수 없으리라. 이상한 도형과 숫자와 뜻이 통하지 않는 글자들의 나열일 따름이었다. 백의인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먹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종이를 반으로 접은 백의인은 그것을 들고 중앙의 반원형 대탁으로 가서 종이가 쌓여 있는 선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 몇 마리 비둘기들이 새로 내려앉았고 다른 백의인들이 정확히 같은 수순을 밟아 처리했다.
반원형의 대탁 중앙에 앉아있던 무표정한 백의 여인이 탁자 위에 놓인 커다란 모래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진은 흘러야 겨우
모래가 다 떨어질 것 같은 그 모래시계 상부에는 겨우 한줌 정도의 모래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열을 세기 전에 다
흘러내려 모래시계는 더 이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백의여인이 일어섰다. 그녀는 모래시계를 다시 엎어놓고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목함에 담아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
백의여인이 돌아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불러 세운 백의인을 바라보았다. 백의인은 다른 서류들과는 달리 붉은 글씨로
일급이라고 써놓은 봉서를 여인의 목함 위에 내려놓았다.
여인은 백의인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방을 빠져나갔다.
다른 이들에게 좌상이라 불리는 백염노인은 여인이 내려놓은 목함 위에 일급이라는 글씨가 쓰인 봉서를 보고는 두 눈에 이채를
드리웠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자 백염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봉서를 집었다. 여인이 소리 없이 물러나갔다. 백염노인은 봉서를
뜯어 내용을 살폈다.
“이보게, 천엽! 이거 영 소식이 없구먼.”
백염노인은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들었다가 새로이 방에 들어선 이가 우상이라 불리는 흑염노인임을 확인하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백염노인은 왼손을 뻗어 맞은편 자리를 가리킨 후에 못다 읽은 내용을 살폈다. 흑염노인은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백염노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백염노인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들고 있던 종이를 흑염노인에게 건넸다.
“흑강! 소식이 영 없는 건 아니구먼. 자네가 기다리는 소식은 아닐세만---.”
흑염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종이를 다시 백염노인에게 건네며 투덜거렸다.
“그놈들, 몸을 너무 사리는구먼.”
백염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자네 탓이야.”
흑염노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백염노인을 응시했다.
“응? 무슨 소리야?”
“자네가 일을 너무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어. 창현 그 작자를 살려 보냈어야 하는 건데---. 점창의 입지가 너무 좁아.
애들뿐이니 무얼 할 수 있겠나?”
흑염노인이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어쩔 수 없었다지 않은가?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 애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도 고생했어. 대충 하려다가 내가 먼저 갈 뻔했다 하지 않았는가.”
백염노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 정색할 필요 없어. 이거 농담도 못하겠군.”
흑염노인이 백염노인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염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목곽을 열었다. 그리고 위쪽에 있는 종이들부터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고 있던 흑염노인이 물었다.
“이보게. 저쪽에서 저렇게 몸을 사리는데, 목가까지 없애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 아닌가? 겁먹고 꼼짝도 않으면
어쩌나?”
백염노인이 종이를 접어 옆으로 옮겨놓고 고개를 들었다. 백염노인은 흑염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정색하여 말했다.
“안달하지 말게. 천군께서 뭐라 하셨는가? 실패보다는 기다리는 게 낫다하지 않으셨는가? 자네는 칼 쥐어주고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겠는가? 수천이 죽어도 자기 손톱에 작은 가시 박힌 것보다 덜 아파하는 게 사람이야. 인간의 기억이란 보잘 것
없지. 시간의 강은 망각을 도우기 위해 흐른다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호북무림의 발목을 잡는 게 먼저일세. 싸움은 그 뒤의
문제. 안전을 먼저 취하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올 걸세. 그것도 올해 안에.”
“끙! 답답해서 한 소리야.”
“오히려 난 심천궁만으로는 왠지 불안해. 할 때 확실히 끝내버리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는 백염노인을 보며 흑염노인이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그럼 내가 갈까?”
백염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자넨 안돼. 이미 알려졌으니 거기에 나타나면 이상하지. 그래서 시험 삼아 오행천마를 보낼까 하네.”
“전부 다?”
“아니. 물에서 싸울 테니 수왕천마가 좋겠지. 물에서 대충 끝나면 그 뒤처리를 심천궁에게 맡길까 하네. 그럼 피해도 줄고
확실하게 끝낼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필요할 때 오행신궁을 붙여 줄 테니 나머지 둘은 자네가 쓰도록 하게.”
흑염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수왕천마라---. 과연 어느 정돈지 눈으로 보고 싶구먼. 개입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올까?”
백염노인이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가한가?”
“어? 뭐, 한가하다면 한가하지.”
“결과는 내가 나중에 알려줄 테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점창산 공사에나 신경 쓰게.”
흑염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얼굴을 찌푸렸다.
“음, 너무 심하게 부려먹는군. 천기신사가 있는데 내가 왜 필요해?”
“쯧! 공사야 천기신사가 하겠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건 자네 아닌가? 이번 일에서 천기신사는 빼줘야 돼.”
흑염노인이 손을 털어 보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 말 나온 김에 가겠네.”
흑염노인이 문으로 다가가자 백염노인은 빙긋 미소 짓고서 다시 목곽으로 손을 뻗었다.
* * *
금두홍은 고아였다. 그것도 부모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였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오직 한 가지, 마치
나면서부터 그랬던 것처럼 온통 쇠붙이만 가득한 방안에서 살았다는 것뿐이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금두홍은 마침내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그래도 하루의 반나절 정도는
방에서 벗어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아라는 것은 같지만 살아야 하는 환경은 판이한 다섯 명의 어린이들, 금두홍은 그들 가운데 세 번째 아이였다.
금두홍은 평생 처음 가지는 형제들 속에서 기쁘고 또 괴로웠다. 네 번째가 되는 토씨 여자아이를 보면 마냥 행복하기만 했고
두 번째라는 화씨 아이를 보면 괜히 짜증이 일었다.
다른 아이들 또한 비슷하면서 다른 감정을 느끼는 듯 했다. 아이들은 결국 서로 다퉜다. 그리고 거리가 조정되었다. 토씨
아이가 중앙에 앉고 나머지 아이들이 사방에 반 장 간격을 두고 앉았다.
금두홍은 자신이 좋아하는 토씨 아이가 항상 화씨 아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싫었고, 별로 관심이 없는 수씨 아이가 유난히
친한 척 하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간격을 둔 이후로 싸움이 없어졌다는 것과 그런 대로 숨쉬기가 편해졌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금두홍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금두홍은 그해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때처럼 행복한 해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
연초가 되었을 때, 자신이 싫어하던 화씨 소년이 죽었다. 그리고 연말이 되어 이상하게 자신을 싫어하던 목씨 소년도 죽었다.
그해 이후로 금두홍은 오직 자신을 좋아하는 수씨 사형과 자신이 좋아하는 토씨 사매만을 말동무하며 평온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금두홍은 철문에 열쇠를 꽂고 가쁘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당겨 겨우 코만 들어갈 정도의 틈을 벌렸다. 그 사이에
오른쪽 눈을 갖다 붙인 금두홍은 철문 안의 정경을 두루 살폈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차가운 냉기를 느끼며 금두홍은 금새 희미한 가운데서도 날카로운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방안의 정경이 모두 드러나 보였다. 겨우 불빛 한개. 그러나 어둡다고 느끼지 못할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방안은 모두 금빛과 은빛으로 도배되어 있고 천정에는 날카로운 병장기들이 풍경(風磬)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유등 하나의 빛이 수백 개나 되는 듯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법한 기이한 방이었지만 적어도 금두홍에게는 생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 보는 방처럼 살기 넘치는 곳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의 방을 거처로 삼은 지가 이십여 년이 다되어 가는 까닭이었다.
금두홍이 두려워하는 것은 기이한 방이 아니었다. 그가 사부라 부르는, 그러나 직접 무엇을 얻어 배운 적이 없는 방의 주인을
두려워했다. 만약 사조가 불러오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면 금두홍은 방에 열쇠를 꽂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쉬리리리리링!
금두홍이 두려움에 가슴 조이며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칼 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풀밭에서 뱀 기는 소리 같기도 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간 금두홍은 천장에 매달려 빙글빙글 도는 대도 아래쪽에서 드디어 사부를 찾았다. 대도는 사부의 정수리 반 치
위에서 계속해서 휘돌고 있었다.
금두홍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 두홍입니다. 사조께서---.”
“괜찮으니 들어오너라.”
차가우면서 강압적이 목소리였다.
금두홍은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목씨와 화씨 소년이 왜 죽었던가. 그들의 미친 사부들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허락이 있을 때까지 사부를 찾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부들의 무공을 동경하여 명을 어겼다가 목씨 소년은
목내이가 되어 죽어버렸고, 화씨 소년은 재가 되어 버렸다.
욕망과 호기심은 그들 자신만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사조는 두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 확신하고, 각각의 밀폐된 방에
기름불과 물을 채워 넣었다. 금두홍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 뿐인 사부마저도 그가 증오하거나 그를 증오했을 것이 분명한
사형제들을 잃어버렸다. 금두홍은 그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만나도 좋다는 승낙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금두홍은 승낙이 떨어지지 않았어도 듣고 나서는 결코 거부하지 못할 사부의 목소리에 굴종했다.
금두홍은 모래 같이 서걱거리는 금사들을 밟으며 때로는 얼굴을 가리고 때로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수십 개의 병장기를 걷어내면서
사부 앞으로 다가갔다.
어릴 적에는 자주 봤다는데 기억이 없고, 기억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단 세 번밖에 보지 못한 사부의 얼굴은 생소했다. 차라리
청색에 가깝게 느껴지는 파리한 피부와, 반대로 너무나 강렬해서 금안이라 불러도 과장되지 않을 눈빛이 매력적이었다.
“두홍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금두홍이 극도의 경계심을 억지로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사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한 입술을
꿈틀거려 웃는 듯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금두홍은 사부가 청해놓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엉겁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대공성취를 경하드립니다.”
“대공이라?”
사부는 입술을 씰룩이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금두홍도 별 생각 없이 사부의 시선을 따랐다. 사부는 허공에 대고
손바닥을 내뻗었다. 순간 장심에서 금빛 가루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아!”
금두홍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 가루들이 어느새 하나로 뭉쳐 완벽한 방패를 이루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놀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따다다다다다당!
방패는 순식간에 형상을 바꾸어 도가 되어 삼장이나 뻗어나갔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연신 울리면서 허공에 매달린 병장기들이
부서져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금두홍이 황홀한 눈빛으로 금빛 도를 바라보는 순간, 도가 사리지고 금빛 안개가 감돌다가 그 마저도 다시 사부의 장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렇게 되고 싶으냐?”
금두홍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두홍이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부는 희미하게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금두홍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몇 살이더라?”
“스물입니다.”
사부가 안광을 누그러뜨리며 또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그 나이에 이르러야 마땅한 진전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금두홍은 짚이는 바가 있어 화씨와 목씨 소년의 죽음 그리고 그 사부들의 죽음을 이야기 했다.
“그런가? 결국 견뎌내지 못했는가?”
사부가 싫어했고 사부를 증오했음이 틀림없는 두 사람의 죽음을 듣고도, 사부는 별 감흥 없이 홀로 중얼거리고서 또 물었다.
“네 사조가 나를 부르더냐?”
금두홍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니 사부는 정수리 위에서 맴도는 대도를 머리 떠받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금두홍을 지나쳐 문으로
다가갔다.
반쯤 열린 문을 빤히 바라보던 사부는 문득 금두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넌 지금 언제 부서져버릴 지도 모르는 금마(金魔)의 극(極)을 보고 있다. 과정이 아니라---. 기회가 온다 해도 나처럼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사부는 금두홍을 남겨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금두홍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말을 할 때의 사부의 눈은 그가 평생 처음
대하는 따뜻한 눈이었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