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79)

고요함은 피바람의 앞에 오는 이름이니

사천성의 성도(省都), 성도(成都).

운녹산은 두 아들과 청성의 고제 송학을 대동하고 무후대로(武侯大路)에 접어들었다. “성도하면 다관(茶館)”이라는 말처럼 

좌우에 다관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하며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교인! 성도는 처음이지?”

운녹산의 질문에 운교인이 안 그래도 준미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기회가 없었습니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으리라. 너는 무공 욕심이 너무 과해. 너 정도 수준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데는 노력 이외의 것이 

필요하다.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두루 봐가면서 경험을 쌓도록 해라.”

운교인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운녹산이 웃으며 말했다. 

“강인, 교인! 이곳이 바로 무후대로니라. 그런데 그 이름말고도 별칭이 있구나. 과연 무엇이겠느냐?”

운강인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운교인을 바라보았다. 운교인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채를 발했다. 

“집다로(集茶路) 정도 되지 않을까요?”

“허허허! 녀석! 눈치가 빠르구나. 그래, 다관로 혹은 집다로하고 부른다. 이 거리에 있는 다관만 해도 이백여 개가 넘는다 

하니 성도 전체의 다관이 몇이나 될까? 과연 다관하면 성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

잡다한 말들이 오가는 중에 네 사람이 탄 말들이 어느 장원의 이십여 장 앞에 이르렀다. 집이 크기는 한데 별 다른 치장을 

하지 않아 황량하게 느껴졌다. 

운교인이 대문 위쪽에 붙어있는 편액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버님! 정녕 이곳이 사천무림련(四川武林聯)입니까?”

운녹산이 잠깐 말을 멈추고 현판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

그때 운강인이 운교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나도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 너처럼 놀랐다. 허나 그동안 사천무림에 이렇다할 공안(公案)이 없지 않았느냐? 무림련의이 

굳이 필요할 까닭이 없었지. 이곳도 사실은 청성파의 사택이다. 관리 또한 청성파에서 맡고 있지. 듣기로는 원래 표국이 있던 

자리라던데, 맞지요?”

송학도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원래 성도표국(成都鏢局)이 있던 자립니다. 사십 년 전, 성도표국이 번창하여 성도 외곽으로 표국을 옮기고 

이곳을 폐파에 기증하였지요. 오십여 년 전에 폐파에서 일어났던 그 멸청광자(滅靑狂者)의 일 이후로 사천무림련의 필요성을 

느낀 빈도의 사조께서 사천 무림 전체의 회합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시고 지금껏 사천무림련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습니다. 허허허, 빈도가 보기에도 너무 누추한 것 같긴 하군요.”

“멸청광자? 아! 청성산(靑城山)이 자신들 것이니 도관을 비우고 떠나라했던?”

운교인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송학을 살폈다. 그때 운녹산이 말했다. 

“늦었구나. 타파의 장문, 가주들께서는 이미 당도하셨으리라. 지체할 시간이 없구나.”

운녹산이 말을 채근하자 운교인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말의 옆구리를 찍었다. 무후대로를 지날 때만 해도 느긋하기 그지없던 

운녹산이 채근하는 것이니,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운녹산이 정문 바로 앞에 이르자 두 명의 젊은 무사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일행을 살폈다. 그들은 송학을 발견하자마자 운녹산을 

향해 포권을 취하여 읍했다. 

“운 가주님을 뵙습니다.”

운녹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해보이고는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에서 내리는 순간 젊은 하인 두 사람이 

달려와 고삐를 넘겨받았다.    

운녹산은 미소를 지어 답례하고는 운강인 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따라올 필요 없다. 타파의 영재들도 몇 와있을 테니 인사 나누고, 성도에 왔으니 함께 다관이라도 들리렴.”

운녹산의 말에 운강인 형제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이 송학을 보며 말했다.

“송학 도장, 수고하셨소.”

송학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접었다. 운녹산은 미소로 답하고 마중 나온 중년 도사를 따라 장원 중앙의 건물로 걸어갔다.

검을 등에 진 여섯 명의 중년 도사들이 중앙건물의 문 앞에  포진하여 있었다. 

운녹산은 그들과 건물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는가?’

점점 짙어지던 미소가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라졌다.

운교인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아 선 채로 얼어붙었다. 만약 운강인이 어깨를 두드려 정신을 차리게 해주지 않았다면 

다수의 무림신진들 속에서 창피를 당할 뻔했다. 

방안에는 도사와 승인이 섞인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모두가 차대에 사천무림의 거두로 성장할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건만, 운교인은 오직 한 여인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타파의 영재들과는 도대체 어떻게 수인사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과 눈길은 오로지 나라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인에게 쏠려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남들이 알아차릴까봐 두려울 정도로 두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운교인은 여인의 서늘한 눈빛이 와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눈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여인의 눈길이 사라졌다. 눈길이 멀어져 간다는 것을 깨달은 운교인은 급히 눈을 돌렸다. 그러나 늦었다. 

‘젠장! 하필 그 순간에---. 이런 겁쟁이 같으니라고---.’

통탄할 노릇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운교인은 입술을 깨물어 안타까움을 삭인 후에 처음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송학을 포함한 득라 차림의 청성 제자가 셋, 젊은 승인들이 셋, 당가의 젊은이들이 넷, 두 명의 여승과 나라연 그리고 

운강인과 자신이 전부였다. 

열다섯, 많지 않은 수였다. 그러나 이삼십 년 후에는 그 열다섯이 사천 무림을 움직이리라. 운강인과 송학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면.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의 이름은 견문 좁은 운교인에게도 익숙했다. 

송학의 대사형이면서 청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송월자(松月子). 이제 나이 서른다섯에 불과한데도 그 무공만큼은 

청성의 장로들에 못지않다 했다. 

운교인은 단아한 기품이 절로 일어나는 송월자의 원만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나라연을 살폈다. 그러나 억지로 시선을 돌려 또 

한 사람을 주시했다. 바로 당가의 소가주 당명천이었다. 운교인은 본능적으로 당명천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녹피장갑을 

끼지 않았다. 

녹수탈천혼(綠手奪千魂)이라 했던가. 당가사람의 손에 녹피장갑에 껴져 있다면 무조건 십리 밖으로 도주하고 보라는 말이 있다. 

‘큭!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운교인은 자신의 멍청함에 실소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당명천의 두 손을 보았다.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이 바로 삼백예순 개의 암기를 일시에 뿌려대는 암령명천지(暗靈鳴天地)를 펼치는 손이라 생각하니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당명천의 시선이 운교인과 마주쳤다. 당명천은 날카로운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승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운교인은 다시 나라연을 훔쳐보았다가 어렵게 고개를 돌려 당명천의 옆에 앉은 중년승인을 살폈다. 

복호신장이라 불리는 대원대사. 그가 장차 아미의 적통을 물려받을 지는 미지수지만 그 무공만큼은 이미 경지에 달해 있다고 

했다. 특히 순후한 금정공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금강항마도법의 경지는 아미정종의 복호승들 가운데 최강이라 했다. 아마도 

순수한 무공으로 비교하자면 청성의 송월자와 함께 단연 돋보일 사람이리라.

운교인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친교를 맺고 싶어하는 후지기수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교인의 마음과 눈길은 오직 한 사람 나라연에게로만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다시 나라연을 훔쳐본 운교인은 더 이상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나라연의 시선을 그리워하며 억지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방안에는 여승과 나라연 외에도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청순하고 귀여운 얼굴의 당가의 여식. 당우리라 했던 것 

같은데 너무 앳되게 보여 여인이라기보다는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운교인의 눈이 또 다시 나라연의 주변을 살폈다. 젊은 영재들이 나라연과 당우리를 사이에 두고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직 두 사람, 자신과 당가의 삼자(三子)라는 당명인(唐明忍)만이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운교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명인의 사내다운 얼굴을 노려보았다. 당명인이 담소에 끼어들지 않는 이유가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나라연을 훔쳐보던 당명인의 눈길이 문득 운교인에게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잘 지내봅시다.”

당명인이 포권을 취하며 먼저 말했다. 말의 뜻과 가슴에 와 닿는 뜻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운교인도 포권을 취해보였다. 

“그럽시다.”

운교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천천히 나라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당명인의 눈길도 나라연을 향해 움직였다. 

‘기껏 독과 암기 따위나 만지면서 감히!’

가슴 속에 독설을 품었던 운교인은 나라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당명인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렸다. 그만큼 나라연은 아름다웠다. 

어릴 적에 그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인이라 생각했던 그의 어미보다도 아름다웠다. 고고함이 지나쳐 차갑게 느껴지는 어미와는 

달리, 고고함 속에서도 귀함이 느껴지는 얼굴에 한 줄 미소가 감돌 때면 운교인의 영혼은 녹아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운교인은 절망했다. 운녹산과 목추경의 핏줄을 이은 그였으니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지닌 것은 당연했다. 

검각현의 처자들이 그를 놓고 싸움을 하고 밤새 한숨짓는다는 소문마저 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지나간 

나라연의 시선은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안에는 모두 여섯 사람이 있었다. 사천 사대 거두 가운데 최고령자이며, 당금 사천의 제일세라 할 수 있는 청성의 장문인인 

현상진인이 회의의 주재자 자격으로 상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미파의 장문인 공명선사와 관음사의 장문인 신수사태가 왼쪽에 

나란히 앉았고, 건너편에 운녹산과 당유연이 함께 앉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삼십 대 초반의 중년 도사였다. 바로 점창의 벽송이었다. 

벽송은 현상진인의 맞은편에 서서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춰내야 했다. 사천의 거두들은 억제해도 드러나는 

벽송의 울분에 찬 증언을 무표정하게 듣기만 했다. 벽송은 마침내 기억이 나는 것들을 모조리 토해내고 슬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현상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이백여 명의 백의인들이 점창을 친 세력의 배후인 것 같더란 말이구먼. 그런데 누군지는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다?”

벽송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상진인이 다시 물었다. 

“백의인, 백의인들이라? 점창을 치는 이유를 말한 사람이 정녕 하나도 없었던 말인가?”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사천의 거두들은 누구나 그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멸청광자!

정확히 오십삼 년 전, 청성은 그 당시 장문인이었던 옥허진인(玉虛眞人)의 고희(古稀)를 맞아 대대적인 고희연을 준비했다. 

구대문파, 칠대세가의 수장들이 모두 초청하고 청성의 속가제자들 역시 불러 모았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삼백여 명의 백의인들이 청성을 방문했다. 그들의 수뇌로 짐작되는 백의노인은 일단 

옥허진인의 고희를 축하해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청성을 비우라 통고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장난을 쳐도 거창하게 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의노인은 단 한 번 쌍수를 뻗어 이십여 장 거리의 

옥현전(玉玄殿) 들보를 부숴버리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청성은 본래 자신들의 것이니 비우지 않으면 멸하여서라도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두 손으로 동시에 장환을 만들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건만 이십여 장 밖까지 뻗어낸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리라. 

누구도 더 이상 그의 말을 허투로 듣지 않았다. 

그러나 구대문파의 하나인 대청성이었다. 그것도 육백여 제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본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더군다나 

강호의 귀빈들이 모두 초청된 자리, 청성이 참을 턱이 없었다. 

일대격전이 벌어졌다. 속가들마저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그러나 수적인 우세는 큰 의미가 없었다. 백의인들 하나하나가 모두 

절정에 달해 있었다. 마침내 귀빈들마저 합세했고, 그때서야 백의인들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백의노인이 독보적인 능력을 보였다. 미친 호랑이처럼 날뛰는 노인 앞에서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젊은 

혈기를 못 이기고 먼저 몸을 날린 현상진인은 일수를 버티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그 뒤로 나선 옥허진인 역시 백의노인의 

장환에 밀리다가 제대로 반격해보지도 못한 채 피를 뿌렸다. 급기야는 옥허진인의 사제들인 청성삼로가 한 몸이 되어 백의노인을 

상대했다. 그러나 백의노인의 쌍수에서 여섯 개의 장환이 튀어나오는 순간 청성삼로마저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다. 청성이 흘린 

피는 강물이 되었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그러나 백의노인 역시 자신감이 지나쳐 날을 잘못 잡았다. 초청되어 온 귀빈들은 하나같이 일파의 영수급들. 백의인들이 온전할 

수는 없었다. 서로 기력이 다해 소강상태가 되는 순간까지 쓰러진 백의인의 수는 삼분지 이가 넘었다. 

그때 뜻하지 않게 등장한 이가 바로 곤륜의 태을진인이었다. 초청을 받았으나 태악진인 때문에 적기에 연락받지 못하여 늦게 

도착한 태을진인은 단번에 백의노인을 알아보고 검을 뽑았다. 

백의노인의 쌍수와 태을진인의 검이 맞붙었다. 쌍수가 난무하고 검이 부드럽게 바람을 갈랐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미친 

호랑이와 곤륜의 용은 일각을 싸웠다. 

그리고 승부가 났다. 겨우 여섯 개만으로 청성을 찢어발긴 장환이었건만, 열두 개가 허공을 난무해도 부드럽게 휘도는 태을의 

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단 한 차례 충돌도 없었다. 태허도룡검이라 했던가. 그것은 경이(驚異)였다. 어검술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검강처럼 굳세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끊어지지 않고 천지사방을 휘감은 검풍은 장환을 공처럼 가지고 놀다가 소멸시켜 버리고 

마지막 장환마저 백의노인의 가슴에 돌려주었다.

남은 백의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서 백의노인의 늘어진 육신을 안고 청성을 벗어났다. 장강을 넘어 달아난 

자들은 겨우 열여섯 명뿐이었다.

옥허진인의 고희연은 눈물바다가 되고 피바다가 되었다. 정리해 보니 속가제자 아흔세 명에 본산제자 이백오십칠 명이 죽었고 

부상자는 셀 수조차 없었다. 

그날은 대청성의 치욕의 날이었다. 본산이 피바다가 된 것도 치욕인데 남의 손을 빌려 겨우 명맥을 유지했으니 청성이라는 

이름이 흙바닥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날이리라. 

귀빈들은 오로지 한 가지 광경만을 떠올리며 떠나갔고 청성에게는 은인이라 할 수 있는 태을진인 역시 몰래 도망치려던 풍파투도 

태악도인의 귀를 비틀어 잡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날이후 청성의 문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절치부심, 잃었던 세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청성은 아직도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했다. 뭇 별들을 누르고 독보일선(獨步一仙)의 자리를 차지한 태을을 능가하는 

검선을 길러내기 전까지는 결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리라.   

현상진인의 짧은 질문에는 바로 그러한 과거의 상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을 잘 모르는 벽송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현상진인이 다시 물었다. 

“허면 백의인의 수뇌 되는 인물이 병장기를 들었던가 아니면 육장을 무기로 썼던가?”

“호골장군과 같은 풍모를 지녔고 반월도를 썼습니다. 도강은 기초처럼 사용하고 심지어는 한 치도 안 되는 도환으로 집적시켜 

오 장이 넘는 거리까지 뿜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힘 하나 안 드는 듯 보였으니 본신공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순간 거두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운녹산도 눈을 감았다. 

‘이거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구나. 비록 무극금정강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지금 내 능력으로 도환을 만든다 하여도 

한 치 이하로는 줄일 수 없다. 뻗어내는 것 역시 칠 장이 한계. 섣불리 나섰다가는 낭패를 당하겠어. 시간이 필요해.’

운녹산이 눈을 뜨는 순간 현상진인도 침중함에서 벗어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네. 벽송, 그대는 그만 나가도 좋네.”

순간 벽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곧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현상진인은 운녹산 등 네 사람을 일일이 쳐다보고 말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구려. 어찌 들 생각하시오? 아! 그 전에---.”

현상진인은 품속에서 이미 뜯어진 봉서 하나를 꺼내어 신수사태 앞으로 밀었다. 

“오늘 아침, 운남으로 출행한 성도표국의 표두로부터 온 것이오. 먼저 읽어 보시지요.”

신수사태가 염주로 칭칭 감긴 오른손을 올려 인사하고 편지를 꺼냈다. 신수사태의 눈이 놀람으로 부릅떠지고 이어 뜨거워졌다가 

다시 차갑게 변했다. 

신수사태는 불호만 외우고 아무런 말도 없이 편지를 공명선사에게 건넸다. 공명선사도 불호를 외우고 나서 편지를 돌려 운녹산과 

당유연의 사이로 밀어놓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편지를 읽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현상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소. 공교롭게도 파불당이 보천에 정식으로 현판을 내걸었소. 보천이라 하면 점창과는 겨우 백 리 거리. 일단 출정을 

하게 되면 같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오. 그러나 백의인의 수뇌 되는 인물이 그 정도라면 쉽게 출정을 결정하기는 

신수사태는 노화를 삭이려는 듯 손에 쥔 염주를 쉬지 않고 굴렸다. 신수사태로서는 당장이라도 운남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 못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공명선사 역시 의견을 내어놓지 못하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불호만 뇌까렸다. 

현상진인의 눈길이 당유연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당유연으로서도 그럴 듯한 의견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현상진인이 다시 

운녹산을 응시했다. 그 순간 운녹산이 입을 뗐다. 

“벌써 이십오 년이 다된 일입니다만, 이 운모가 별 일도 아니라 생각한 일로 귀주로 출정했다가 동생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홀로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순간 현상진인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용문수로표국의 전대국주 곽자렴이 바로 청성의 속가제자인 

탓이었다. 

“이번에 점창을 친 백의인들과 멸청광자와의 관련 문제는 잘 모르겠으나, 그 과정은 이 운모가 당했던 그 때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이번 일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봅니다만---. 어쨌든 신중해야 

합니다. 그 정도 사람들이 있는 곳을 치려면 적어도 오륙백의 정예는 있어야 할 것인데, 우리 사파, 아니 오파에서 나누어 

차출한다 해도 그 피해가 너무 크지요. 게다가 숨죽이고 살아야 할 파불당이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행동한다는 것은 왠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유연이 고개를 비틀어 운녹산에게 물었다. 

“허면 점창산 하나를 되찾는 일을 강호의 공안으로까지 상정하여 무림맹이라도 만들자는 말씀이신가요?”

운녹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당유연의 어조 속에는 운남이 너무 작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수사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운녹산이 생각을 정리하여 말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하게 처리하여 피해를 줄이고 동시에 확실하게 뿌리를 뽑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이왕 시작하는 것, 

귀주까지 훑어서 그곳 일대에 모인 사파들이 아예 준동하지 못하도록 눌러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운녹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신수사태는 그의 말속에서 묘한 의미를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현상진인과 공명선사의 

반응을 살폈다.  

두 사람의 반응은 신수사태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출가인인 탓에 지금껏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공명선사와 현상진인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무슨 뜻입니까?”

공명선사와 현상진인은 신수사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반응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신수사태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한 파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들이었기에 속가의 권익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리라. 

신수사태가 눈을 감는 순간 현상진인이 운녹산을 보며 물었다. 

“허면 전 무림에 통문을 돌리자는 말씀이신가요?”

운녹산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안휘 서쪽으로는 이쪽에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정도로 큰 힘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천의 

인근에만 연락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충 호북의 무당과 목가, 그리고 산서의 종남과 화산 정도면 힘을 나누기는 적절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긴 한데 소문이 돌면 타파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당유연이 의문을 제기하자 운녹산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소문 듣고 찾아오는 것이야 어찌 말리겠습니까? 별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당유연도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일은 닥치는 대로 대처하기로 하지요.”

현상진인과 공명선사도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때 신수사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림은 부르지 않으시렵니까? 파불당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니 나설 텐데요?”

현상진인이 답했다.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소림은 앞으로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사태.”

신수사태가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말했다. 

“허면 곤륜은 어떻습니까? 무당을 생각하면 곤륜 역시 인근 문파라 할 수 있는데?”

현상진인과 운녹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풀렸다. 운녹산이 대답했다. 

“곤륜은 강호의 일에 참견할 여력이 없습니다, 사태. 태을검선께서는 우화등선하셨다는 말이 돌고, 전대 장문인이신 운룡진인 

역시 제자들과 함께 실종되었다지요? 정통을 이어받은 이들은 없고 그나마 남은 문인이라고는 백여 명이 안 된다 하니, 

뼈대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문파에게 어찌 희생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신수사태는 편치 않은 얼굴로 운녹산을 마주 응시했다. 운녹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현상진인이 마무리했다. 

“그럼 일단은 근동의 무림방파에 통문을 돌리기로 하고 열흘 후에 다시 회동하는 것으로 하지요.”

현상진인의 말을 끝으로 회합은 싱겁게 종결되고 말았다. 

모두에게 먼저 나서기를 청한 운녹산마저 방문을 넘었다. 운녹산은 흩어지는 각파의 영수를 보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곤륜이라? 곤륜!”

운녹산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접어버렸다.  

요함은 피바람 앞에 오는 이름이니 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