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대로 돌꽃이 만발해있는 화석협을 지나니 그토록 거칠던 길이 초원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뿌연 먼지바람들이 일어나는
삭막한 초원이었지만, 좌우의 시야를 가로막는 거대한 산들과 등 뒤의 산을 생각하면 가슴이 탁 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인자와 운청산은 끝도 없는 초원의 한 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한숨 돌렸다. 소금 호수라 먹을 수는
없지만 푸른 물을 보는 것만으로 피로가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청인자가 들고 다녔을 긴 대나무 등짐을 내려놓으며 운청산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외숙! 왜 또 이 길입니까? 이리로 가면 또 다시 사유하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청인자는 물을 들이켜 입 안을 깔깔하게 만드는 모래먼지를 뱉어냈다. 그리고 우측으로 손을 뻗어 동쪽으로 끝도 없이 뻗어있는
산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구나. 마다에서 서녕부까지 직진하려면 곤륜에 버금가는 거대한 산맥을 넘어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사유하에서 동진하여 청해호 남쪽을 거쳐 서녕부로 들어가는 것이 빠르다.”
운청산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길 모른다는 말을 길게도 하십니다.”
청인자는 입안에 머금은 물을 삼키고 빙그레 웃었다.
여행은 사람을 밝고 여유롭게 만드는 묘약이다. 거친 여정을 견디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더불어 여정의 중간 중간에 돌아오는 휴식의 시간은 사람이 얼마나 작은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존재인지 여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거기에 이방인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휴식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은 배가 되리라.
청인자가 느끼기로는 운청산이 지금 여행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밝아진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곡마래와 마다를 거쳐 화석협을 빠져나오는 엿새간의 여정만으로 운청산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허허, 이놈이 이제 농담까지 하려 하는구나. 정말 데리고 오길 잘했군. 한 두어 달 돌아다니다 보면 몰라보게 밝아질 것
같구나. 청수야! 네 아들놈은 아무래도 너의 천성을 빼닮은 모양이다.’
청인자는 푸근함과 행복감을 얼굴을 드러내며 운청산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운청산이 고개를 저어 의사표시를 하자 청인자는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수통을 갈무리했다.
“이놈! 평생을 길에서 보낸 이 외숙이 산길이라고 두려워하겠느냐? 모두가 너를 생각하는 것이야.”
운청산은 대답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청인자가 마주 웃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렸다.
“자! 다시 가볼까? 노숙하지 않으려면 도란현까지는 가야 하니 서둘러야겠구나.”
운청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이미 서쪽으로 기우러지고 있었다. 운청산이 다시 등짐을 지며 물었다.
“그럼 달릴까요?”
청인자가 웃는 가운데서도 찡그리며 말했다.
“외숙이 늙었음을 한탄하지 않을 정도로 느긋하게.”
두 사람이 비붕불명의 신법을 펼쳐 염호를 향해 이동했다.
빛 노을 따라 뭇별들이 움직이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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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란 것이 옳고 그름으로 명확하게 분별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각자가 처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좋고 나쁨으로 분별되는
것도 있으리라.
최근 서장(西藏)과 청해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 역시 입장에 따라 호불호(好不好)가 다른 일이었다. 교권(敎權)이
정권(政權)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서장에서, 홍라교가 교권을 쥐었다는 것은 이미 소문이 아닌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와 연관되어 홍라교의 세력이 일부 청해성 동쪽 깊숙이 진출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 소문을 뒤받침 하듯 최근 청해호의 남쪽 산이라 하여 청남산(靑南山)이라 불리는 산의 기슭에 일단의 붉은 가사 승려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근동의 장족들에 의하면 홍라교의 지교가 청남산 동쪽 기슭에 세워질 것이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일로 불안해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청해성의 거주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족들이었다. 동쪽의 한족들과는 종종 갈등을 빚고
북쪽의 몽고족들로부터는 거의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해왔는데, 이제 든든한 배경이 생겼으니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홍라교의 동진은 청해호 동쪽과 감숙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섬서 땅의 한족들에게는 불안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강성해진 서장이 중원진출을 시도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한족 이외에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바로 청해성 북쪽에 자리한 몽고족이 그들이었다. 목축으로 살아가는 유목민의
본성을 지닌 몽고족이이었지만, 모자라는 것을 약탈로서 채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장은 이미 강성해진 반면 몽고족은 쇠퇴일로를 걷는 현실이니, 그 동안 청해성에 거주하는 장족들로부터 많은 이득을
취해온 몽고족으로서는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곧 시작될 보복을 피해 거주지를 옮겨야 할 정도의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특이하게도 서장의 동진을 기회로 생각하는 한족이 있었으니, 바로 상인들이었다.
청해성은 유달리 산이 많아 넓은 땅덩어리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흑풍사로 대표되는
몽고족들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동안 청해성은 물론이고 신강(新彊)과 서장을 오가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몽고족이 북쪽으로 물러갈 기미가 보이니, 가면 돈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가지 못하던 상인들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물자가 늘 부족한 서장이었다. 상인들의 왕래는 서장으로부터도 환대받을 만한 일이었다. 돈도 벌고 환대까지 받는다는데
누가 가지 않으려 할까.
마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비롯한 서녕부의 상인들은 우선 시험적으로 청해성 서쪽 장족들과 교역을 터보기로 뜻을 모았다.
낙타 대여섯 마리로 오가던 다섯의 개별 상단들이 하나로 뭉쳐, 낙타 오십여 마리의 대상으로 탈바꿈했고 사람들도 스물 세
명이나 따라붙었다. 그 가운데 낙타 열 마리와 세 명의 청년들이 마운의 상단에 속했다.
간만에 조직된 대규모 상단이 부푼 꿈을 안고 서녕부를 떠난 것이 나흘 전이었다.
그러나 꿈은 꿈에 불과한 것인가. 사유하 근동에 이른 상단은 북쪽에서 연신 들려오는 뿔 나팔 소리에 잔뜩 부풀었던 꿈을
접었다.
“너무 성급했어. 소문은 소문일 뿐이거늘.”
마운은 암울한 눈빛으로 사유하 북쪽을 바라보았다. 인마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이백여 기에 가까운 인마들이
백여 장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최강의 성세를 자랑할 때가 오백여 명이었다 하나 최근 들어 이탈자가 많아 이미 해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니
마운의 눈에 보이는 이들은 쇠퇴한 흑풍사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상인들의 우두머리들이 마운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뱁새 눈을 한 오십 대 장년인이 말했다.
“흩어져서 몽고로 물러갔다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이보게, 마형! 어쩌지? 낙타를 놓고 물러서야 하나? 안돼. 이걸
잃으면 길바닥에 나앉아야 해. 마 형. 어떻게 해야 하나?”
또 다른 상인이 말했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 자식들마저 죽이려나? 물러서세.”
뱁새눈의 장년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장차 확장일로를 걷게 될 가업을 물려준답시고 두 아들을 동반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와중에 마운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흑풍사로 짐작되는 마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일제히 활을 꺼내들었다. 마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낙심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물러서도 소용없을 것 같구먼. 벌써 활을 들었네 그려. 이제 마지막이란 소리지. 바닥까지 긁어 먹고 북쪽으로
물러서겠다는 뜻인 것 같아.”
나머지 상인들이 흑풍사를 보는 것으로 마운의 말을 확인하고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흑풍사 또한 저항하지 않는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인정이 있는 탓이 아니라 다음의 수입원이 되는
탓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상인들에게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하고 있었다.
뱁새눈의 사내가 어금니를 악물어보이고 말했다.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저들이 과연 힘이 될까?”
뱁새눈의 사내는 상단의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일곱 사람의 등을 바라보았다.
마운도 그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불안하여 감숙칠도(甘肅七刀)를 고용한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구나. 저들이 과연 우리 목숨을 부지시켜 줄 수
있을는지---.’
마운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좁은 지형에 말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리라. 그가 듣기로 감숙칠도의 무위는 보표단 가운데
선두를 다툰다 했다. 특히 첫째와 둘째의 무위는 변방을 떠돌며 남의 보표나 할 사람들이 아니라 들었다. 그러나 광활한
초원에서 마주친 기마대였다. 일곱으로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으리라. 마운은 스스로를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소리쳤다.
“천아, 정아! 낙타로 방어진을 치고 무릎 꿇려라. 그리고 화살이 먼저 날아올 것이니 막을 만한 것들을 준비하여 스스로를
보호해라.”
그 순간 다른 상인들도 억지로 공포감을 몰아내고 소리쳤다.
불안에 떨던 청년들이 급히 움직였다. 그들은 오십여 마리의 낙타들로 원진을 만들고 일일이 무릎 꿇린 후에 병장기를 꺼내어
몸을 낮췄다. 그리고 낙타의 등짐에서 상자를 내려 뚜껑을 벗겨냈다.
“씨팔! 돈 몇 푼에 된통 걸렸네.”
감숙성의 상인들에게는 제법 유명한 보표단 감숙칠도의 여섯째 독두도(禿頭刀) 종길(宗吉)이 자신의 민머리를 후려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뒤로 고개를 돌려 상인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힐끔 살피고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대형, 형수님! 상인들이 주제도 모르고 싸울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어쩔 거요?”
부부이자 감숙칠도의 첫째와 둘째가 되는 보살도(菩薩刀) 강정(姜正)과 야차도(夜叉刀) 문취옥(文翠玉)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모진 사각 턱이 후덕하고 사내답게 보이는 강정이 전방을 예의 주시하며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 우리에겐 신용이 생명이다. 여기서 도주했다가는 얼굴을 못 들고 산골에 처박혀 살아야 될 텐데, 너
그렇게 살 수 있어?”
종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머리통을 찰싹 소리 나게 두드렸다.
“이런 젠장! 방울 달고 그렇게는 못살지요. 어쨌든 엿 됐네. 저번 상처도 다 안 아물었는데.”
그때 마운이 강정의 옆으로 다가섰다.
“저들의 기세를 보니 물건을 내어준다 해도 살려줄 것 같지 않구려. 끝물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오. 미안하오. 강 단주!”
강정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마 대협이 미안해 할 일이 아니지요. 재수가 없어 된통 걸린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우리 일입니다. 다만 저놈들에게
대항한다는 뜻을 보이지 말고 몸만 잘 간수하라고 이르십시오. 원거리에서 화살만 날려댄다면 우리 힘으로는 버텨낼 수
없습니다. 저들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약간의 승산이라도 있겠지요.”
강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마운의 시선이 흑풍사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이 천천히 전진하면서 일제히 화살을 재고 있었다.
마운이 급히 돌아가 강정의 말을 전하는 순간, 강정을 비롯한 감숙칠도도 일제히 방어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낙타의
그늘에 숨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일어서서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강정이 소리쳤다.
“낙타가 도주하려 하면 다리를 잘라서라도 묶어 두시오.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 싸울 수는 있으되 지켜드릴 수가 없소이다.
너희들도 명심해라. 전력을 드러내지 마라. 약한 모습을 보여 저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우리에겐 일할의 승산도 없다.”
“여기서 죽기 싫으니까 걱정 말라구요.”
성격 급한 종길을 필두로 알겠다는 말들이 오갔다.
상인들의 공포심도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항상 위험이 상존하는 곳을 오가는 상인들이었다. 나름대로 강단이 있고 용력 또한
자랑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공포심을 힘으로 전환하여 낙타의 고삐를 힘껏 잡아챘다.
그때 흑풍사 쪽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르르르르륵!”
강정이 소리쳤다.
“온다.”
이백여 개의 화살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리니 검은 장대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표적이 되어 서있던 감숙칠도가 긴장된
눈빛으로 화살 비를 주시하다가 일순간 동시에 도를 휘둘렀다.
실낱같은 도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순간 수십 대의 화살들이 부러져나갔다.
그러나 이백여 개의 화살들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는 일.
퓨퓨퓨퓨퓨퓨퓩!
도기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날아온 화살들이 원진의 주변 곳곳에 박혀들었다.
상자뚜껑에 박히는 소리, 사람의 비명소리, 그리고 낙타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푸후후후후!
사람들이 낙타의 몸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탓에 원진의 후면에는 따로 낙타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놀란 낙타들이
일제히 일어나 도주하려 했다.
감숙칠도가 몸을 날려 도를 휘둘렀다. 이십여 마리의 낙타들이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애절한 비명을 남긴 채 넘어졌다.
“온다.”
이십여 장의 거리를 좁힌 흑풍사의 무리들이 다시 화살을 날렸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아직 감숙칠도 중에는
부상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상인들 속에서도 부상자가 있을 뿐 죽은 자는 없었다. 하지만 오십여 마리의 낙타들 가운데
살아남은 낙타는 열 마리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종길과 아척 그리고 막내는 다음 번 화살이 떨어지면 죽은 체 해라.”
강정이 낮게 외치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다.”
흑풍사의 무리들이 오십여 장 앞까지 다가와 다시 화살을 날렸다. 화살비가 떨어지고 예정대로 감숙칠도 가운데 세 사람이
쓰러졌다가 낙타 쪽으로 기었다.
“끄윽!”
상인들 사이에서 죽음을 알리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아!”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르르르르륵!”
목젖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즉시 이백여 명의 흑풍사 무리들이 원진을 향해 질주해왔다.
뿌연 먼지가 일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화살들이 낮은 궤도로 날아왔다.
퓨퓨퓨퓨퓨퓨퓩!
궤도가 낮은 탓에 화살들의 대부분은 서있는 강정 등을 향해 날아왔다. 강정 등은 쉬지 않고 도를 휘둘러 연이어지는 화살들을
막아냈다. 그 순간 강정과 문취옥이 겨드랑이에 화살을 끼운 채 쓰러졌다.
“십여 장 앞까지 오면 튀어나가 맞선다.”
강정이 낮게 외치는 순간 질주해오던 흑풍사의 무리들이 활을 거두고 몽골도를 뽑아들었다.
“가자!”
강정이 외치는 순간 감숙칠도가 일제히 원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일보에 사오 장을 튀어 나가니 단 두 발만에 흑풍사의
무리들과 맞닥뜨렸다.
쉐에에에엑!
지금까지 화살을 막아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삼 장이 넘는 도기들이 흑풍사의 무리들을 향해 날아갔다.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고 말울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그 순간 지금껏 낙타의 배에 붙어 숨어있던 상인들도
일어섰다.
감숙칠도의 도세가 미치지 못한 곳에 있던 흑풍사의 무리들이 일제히 원진을 뛰어넘었다.
마운과 그의 두 아들들은 머리를 찍어 누를 것 같은 말발굽을 노려보다가 앞으로 몸을 날리며 머리 위로 검을 휘둘렀다.
혈우가 쏟아지고 말들이 애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굴렀다.
피로 목욕한 마운은 몸을 휘돌려 말에서 굴러 떨어진 흑풍사의 무리들에게 쇄도했다.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한 두 사람이 비명을
토하고 쓰러졌다. 그때 또 다른 한 사람이 마운의 등으로 달려들었으나 마운의 두 아들이 가세하여 베어버렸다.
흑풍사의 무리들이 원진의 뒤로 삼십여 장을 달려갔다가 말머리를 돌려 진세를 가다듬었다. 남은 무리들은 대략 백육십여 명.
한 번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사십여 명이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강정 등은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흑풍사의 무리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위를 지닌 다섯 명의 사내들이
강정 등을 세차게 압박하고 있었다.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장년인이 선풍처럼 도를 휘돌리다가 강정을 향해 내뻗었다.
쉐엑!
사 장에 이르는 붉은 도기가 강정의 허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강정은 감히 상대하지 못하고 급히 물러서며 소리쳤다.
“대사형! 그만 하시오.”
장년인이 도를 곧추세우고 차갑게 웃었다.
“그만 하라? 대사형? 크하하하! 네가 아직도 나를 대사형이라 부르느냐? 사문을 망치고 스승을 기만한 놈이 감히 나를
대사형이라고 불러?”
강정을 아픔이 드러나는 눈빛으로 장년인을 바라보다가 급히 주변을 살폈다. 칠도 가운데 셋이 이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장년인과 함께 왔을 것이 틀림없는 네 사내들 가운데서 둘도 마찬가지였다. 종길과 막내라 불린 두 청년들이 한 사내를
상대하고 문취옥이 다른 사내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강정이 장년인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그들 뒤에는 일백오십이 넘는 흑풍사의 무리들이 있었다. 누구도
살아날 수 없으리라.
장년인이 한 사내를 세차게 밀어붙이는 문취옥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흥! 성격 모진 건 여전하구나. 사정이 없어. 크흐흐흐. 야차도로 불린다던가?”
장년인은 왼손을 들어 얼굴에 난 칼자국을 쓰다듬었다.
“이럴 것까진 없지 않소? 내 비록 사형의 맘을 상하게 했어도 그것은 사형과 나의 문제, 죄 없는 상인들까지 끌어들일 일은
아니었소.”
“흥! 보살도라 불린다더니, 착한 척 하는 건 여전하구나. 난 용서 못한다. 너 하나로 인해 내 체면은 물론 사문의
체면까지 땅에 떨어졌다. 사부께서 용서하신다 해도 나는 안돼.”
장년인이 다시 강정에게로 쇄도했다. 도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강정의 전신을 노렸다. 방어는 눈곱만치도 염두에 두지 않는
세찬 공격이었다.
강정은 힘겹게 도기를 막아내며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아정! 죽여 버려. 우리에겐 사문이 없어.”
끝내 사내를 죽여 버린 문취옥이 장년인의 옆구리를 노리며 도를 뻗었다. 장년인이 급히 도를 휘돌려 문취옥의 도기 퉁겨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매! 사부님이 정해주신 배필인데 또 다시 칼질을 하다니 해도 너무하는군.”
문취옥이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강정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흥! 파문 당하는 순간 당신과 우리의 연은 끊어진 것. 손에 사정을 둘 이유가 없지.”
“흐하하하! 그런가? 그런데 어쩌지? 난 아직도 사매의 야들야들한 살맛을 잊지 못하겠는데?”
장년인이 이빨을 드러내며 문취옥의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듯 천천히 도를 휘돌려보였다. 문취옥이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쇄도하려
했다. 그때 강정이 문취옥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
“흥분하도록 도발하는 것이오. 정신을 가다듬으시오.”
그때였다.
“아르르르르륵!”
장년인이 강정의 등 너머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다시 오는군! 우리도 끝장을 내볼까?”
장년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