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노을 따라 뭇 별들이 움직이고
나라연이 신수사태의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부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수사태는 차 뚜껑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겨우 오십여 악도들로 본사를 침입하다니요? 비구니에 여자들이라 얕잡아 보았다고 해도 백운사와 광명사가 지척입니다.
더군다나 본사에 무엇이 있다고요? 그저 비구니들의 도량일 따름입니다. 강호의 이권과도 동떨어져 있건만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친단 말입니까?”
신수사태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뚜껑을 닿으며 대답했다.
“모르겠구나. 다만 혜법 노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백성(太白星) 좌우로 뭇 군성들이 모여 대치하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하셨다. 고래로 태백성은 전성(戰星). 곧 강호에 혈풍이 몰아칠 조짐으로 볼 수 있겠지. 본사에 닥친 피바람이 그
전조(前兆)가 될지도 모르니 두려운 일이야.”
나라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부님! 파불당 악도들의 눈을 주의 깊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수사태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나라연의 얼굴을 직시했다.
“왜? 특별한 점이라도 있더냐?”
“그날은 그저 악도들의 눈이 원래 그렇다 치부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평범한 눈이 아니었습니다. 광기가 번들대는
그 눈은 제자가 상대한 두 사람 모두에게서 같은 빛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신이 아주 나간 건 아닌 듯 했습니다만, 온전한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신수사태가 나라연의 말을 받아 홀로 중얼거렸다.
“그랬더냐? 겨를이 없어 거기까지는 살펴보지 못했구나.”
그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장문인!”
“들어오너라.”
나라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삼십 대 초반의 비구니가 들어섰다. 전대 장문 신정사태의 대제자 혜명(慧明)이었다.
신수사태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혜명을 응시했다. 사매 신정사태가 편히 열반에 들었다면 장문인이 되었어야 할 혜명이었다.
그러나 시국이 난국이다 보니 신수사태가 자청하여 장문인직을 떠맡은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 같으면 신수사태가 난국을 이용하여 사심을 채운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원래 맡았어야 할
장문인직을 신정사태가 적임이라 하여 떠넘긴 사람이 신수사태이니 관음사 안에서는 누구도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기 위해 신수사태는 전임 장문인의 대제자 혜명을 차기 장문인으로 지명하고 자신의 수발을
들도록 조치했다. 그런 까닭으로 수발은 나라연이 들어도 혜명 또한 장문인실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신수사태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혜명이 봉서 한 장을 내밀었다.
“광명사 장문인께서 보내셨습니다.”
신수사태는 고개를 끄덕이자 혜명은 보는 앞에서 봉서를 뜯어 편지만 신수사태에게 건넸다.
신수사태가 편지를 읽다가 눈을 치떴다. 그러나 곧 안정을 찾아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혜명! 길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 내일 성도로 가야겠구나.”
혜명이 허리를 접어보이고 조심스레 물었다.
“본사의 일 때문입니까?”
신수사태가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
“본사의 일도 일이지만, 점창이 무너졌다. 진정 강호에 혈풍이 몰아칠 모양이야.”
혜명이 낮게 불호를 외우며 다시 허리를 접었다.
“준비하겠습니다.”
혜명이 방을 나가자 신수사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혈풍이라. 얼마나 많은 생목숨들이 덧없이 사라져야 할까?”
* * *
방안에는 모두 네 사람이 있었다. 초로인 세 사람과 서른 초반에 접어든 젊은 사내였다.
그들이 바로 당가의 중추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세 초로인들 가운데 바스락거릴 것 같은 흑견단삼을 입은 중앙의 호목
초로인이 당가의 삼십육 대 가주인 천수독군(千手毒君) 당유연(唐柔延)이었고, 좌우의 초로인들은 당가의 차포라 할 수 있는
독룡전주(毒龍殿主) 당유경(唐柔勁)과 암호전주(暗虎殿主) 당유평(唐柔平)이었으며, 잘 생겼지만 눈매가 너무 매서워 말 걸
엄두가 나지 않게 생긴 젊은 사내가 바로 당가의 소가주 당명천(唐鳴天)이었다.
당유경이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중지에 낀 가락지를 돌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구대문파의 하나가 절단 났으니, 결국 혈풍을 피할 수는 없겠지요?”
당유연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피하지. 피해 당사자가 정식으로 요청했다지 않는가? 걱정이야. 작은 문파도 아니고 점창을 무너뜨린 모종의 세력이니
쉽게 해결할 수도 없거나와, 운남이야. 귀주와 운남에는 천하의 사파가 삼분지 일 이상 모여 있어. 싸움이 크게 번진다면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
당명천이 의아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사파라 하나 갈라진 힘입니다. 더구나 천하의 사파를 다 합한다 하여도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절반 힘도 못되는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당유연이 호목을 부릅뜨며 당명천을 바라보았다. 당명천이 날카롭던 눈빛을 감추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명천! 소가주가 되어가지고 어찌 그리 생각이 짧더냐? 인명을 숫자로 생각하면 아니 된다. 더군다나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찾아가야 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공세를 취하는 자는 수세를 취하는 자의 세 배가 필요하다 했다. 우리가 강호인이라
병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익숙하지 못한 곳에서는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이 불문가지. 잘못하면 가문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당명천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유연이 못마땅한 기색을 거두자 이번에는 당유평이 물었다.
“허면 이번 회합은 다만 출정시기를 정하는 목적이 되겠습니다?”
당유연이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네. 관음사의 일도 있고 또 강호의 공안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움직일 것인지, 우리 사천 무림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니 일단은 참석하고 볼 일이야. 어쨌든 자네 두 사람은 오늘부터라도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
하네. 시기가 문제일 뿐, 출정은 이미 정해진 일이야. 운남이라? 쉽게 끝낼 수만 있다면 본가에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닌데---.”
당유연의 뜻 모를 중얼거림에 두 초로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당명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 전 질책
들은 것이 있는지라 쉽게 묻지 못했다.
당유연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당명천에게 말했다.
“오늘 바로 떠나자꾸나. 당장 싸우자는 것은 아니니 네 동생들만 채비하라 일러라.”
“리아도 데리고 가시렵니까?”
당명천의 표정이 묘했다. 눈매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기색을 흘리면서도 일면 우려를 품은 얼굴이었다.
당유연은 호목에 결코 드리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웃음기를 보이며 물었다.
“혹시 아느냐?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을지. 왜? 무서우냐?”
당면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토끼 생각이 나서---.”
순간 세 초로인이 대소를 터뜨렸다. 당유연이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내가 그랬다고 암기는 놓고 가라, 일러라.”
당명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오십여 년 전, 당가에는 당가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를 가주로 맞았다. 그가 바로 독중편작(毒中扁鵲)
당청원(唐淸元)이었다. 당시에는 독군자(毒君子)라 불렸던 당청원은 가주가 되자마자 가문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독이 살상무기로서의 독으로만 존재한다면 당가가 천하에 존재할 의미가 없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독이 진정한 독이다.
의독일체(醫毒一體). 나 당청원은 남은 삶을 오직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독을 위하여 살리라.”
당청원은 그가 천명했던 그대로의 삶을 살았다. 말년에 이르러 당청원은 그가 깨달은 의독에 관한 지식들을 집대성하여
의독경(醫毒經) 상하편(上下篇)을 저술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민초들을 위해 천혜원(天惠院)을 열었다.
강호인들에게 있어 천혜원이란 그저 또 하나의 의원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당가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독으로써 사람을 치료한다.
독을 다룬다는 이유로 천하 무림인들에게 경원시 당하고 심지어는 사파인으로 취급받기까지 하던 당가 사람들에게, 천혜원은
자신들의 심리적 위축감을 없애준 구원이었다.
천혜원.
존재만으로도 당가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곳, 의독에 관심이 없더라도 당가 사람이면 누구나 오 년을 봉사하여야 하는 곳,
희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환자가 마지막으로 기대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천혜원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외병동(外病棟)과 내병동(內病棟)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병동은 일반적인 외상이나 의독이 필요치 않는 가벼운 병증을 다루는 곳으로, 주로 의독에 관심이 있으나 연륜이 얕은 젊은
당가 사람들과 다만 오 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당가 사람들이 환자를 다루는 곳이다.
반대로 내병동은 규모는 작으나 당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곳으로, 평생을 의독에
바치기로 한 당가 사람들이 책임을 맡고 있다.
외병동에서 삼 년 째 일하고 있는 당우리(唐佑鸝)는 요즘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당우리는 단순한 의무보다는 내병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천혜원에 들었다. 그러나 담 하나 사이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당우리의 마음을 자꾸 어지럽혔다.
내병동과 외병동의 비명소리는 확연하게 달랐다. 외병동에서는 죽는다는 소리가 귀청을 찢어 놓을 듯 하지만 죽어나가는 사람은
없고, 내병동에서는 살려달라는 가냘픈 소리가 애달프게 가슴을 후벼 파지만 걸어서 나오는 사람이 삼할도 못되었다. 당우리는
자신이 그런 내병동의 환경을 과연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이었다. 내외병동 할 것 없이 비교적 조용했다.
“옳지. 잘 참았다. 대장부로구나.”
당우리는 아이의 팔에 부목을 대어 마감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이가 왼쪽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고 당우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당우리는 열여덟 정도나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일어섰다. 그녀는 아이의 어미 될 것이 분명한 촌부가 연신
고개를 숙이자 환한 얼굴로 주의할 점들을 이야기 하고 자리를 떴다.
당우리는 자신이 늘 대기하는 탁자로 돌아가다가 그 앞에 털북숭이 장년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또 뎄어요?”
장년인이 당우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찡그린 얼굴을 펴며 억지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제 버릇 개 주겠습니까요?”
장년인이 재가 묻은 듯 시커먼 다리를 내어보였다. 허벅지에 주먹만한 화상을 입었는데, 얼마나 심하게 데었는지 껍질이 홀라당
벗겨져 있었다.
“아휴! 작업장에서 또 술 마셨죠?”
장년인은 무척이나 아플 것이 틀림없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당우리는 오목조목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장년인을 노려보았다.
“누워요.”
당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조그만 대야에 물을 붓고 술 냄새가 강하게 나는 약물을 타 희석시켰다. 그리고
깨끗한 마포로 약물을 찍어 상처를 조심스레 소독한 후 그 위에 제화독고(除火毒膏)를 두텁게 바르고 다시 식농산(食膿散)을
뿌렸다.
장년인이 일어나 앉았다. 장년인은 당우리가 조그만 보조의자를 들이대자 말 꺼내기도 전에 발을 얹었다. 당우리가 마포로
장년인의 화상을 감싸며 말했다.
“장씨 아저씨! 이제 그만 좀 오세요.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당우리는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마포 감기를 마무리했다. 장년인이 작은 의자 위에서 바닥으로 발을 내리며 웃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우리 아가씨가 이놈 얼굴 더 이상 보기 싫은가 보네?”
당우리가 미간 찡그린 얼굴에 미소를 더하며 말했다.
“보기 싫어도 매일 보는데, 천혜원까지 와서 볼 건 없잖아요? 아주머니 투덜거리는 소리도 더 이상 듣기 싫다구요.
뭐라더라? 뜨거운 고목이라던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장년인은 화상 자국 그득한 얼굴에 짐짓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노무 여편네가 또 입 초사를 떨어 순진한 우리 아가씨를 놀렸네 그려. 아가씨! 그 노무 여편네가 한 말은 한 마디도
쓸데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다쟁이 마누라 같으니라고, 오늘 죽었어.”
당우리가 일어섰다. 그녀는 탁자로 가서 약방문을 쓰고 옆 약장의 서랍을 열어 작은 목곽 하나를 꺼냈다.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가 그러면 아주머니가 나를 뭐로 보겠어요? 자요. 이건 약방문, 이건 식농산니까
---.”
장년인이 목곽을 건네받으면서 당우리의 말도 받았다.
“잊지 말고 뿌리고 면포는 안 된다. 꼭 마포로 통기되도록 싸주어야 한다. 안다굽쇼.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구먼요.”
장년인이 웃자 당우리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장년인이 품속에서 하얀 면포로 싼 무엇인가를 꺼내어 당우리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흐! 만날 신세만 져서 하나 만들었구먼요. 예쁜 장신구라도 만들어드렸으면 좋으련만, 평생 만든 것이 이런 것밖에 없으니
어쩝니까? 그냥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쇼.”
당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면포더미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아저씨가 남인가요? 아저씨도 우리 당가 사람인데---.”
“아이고! 그래도 꼭 드리고 싶었다구요. 우리 여편네도 이거 전해 드린다니까 조금 면목이 선다더라구요.”
당우리가 활짝 웃으며 면포더미를 받았다. 장씨는 가지 않고 기다렸다. 당우리는 그 마음을 읽고 그 자리에서 면포더미를
풀었다.
“어머나, 예뻐라.”
당우리의 눈에 황홀한 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감탄할 만한 물건이었다. 겨우 다섯 치 정도 될 비수 두 자루였는데, 검신은
하도 얇아서 속이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고 두 치나 될 손잡이에는 각각 하얀 목련 한 송이와 흰 나비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나란히 놓으면 나비가 꽃을 탐하는 듯한 형상이 되니 한 쌍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정말 예뻐요.”
장년인은 그때서야 얼굴에 역력하던 긴장감을 풀고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곧 투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흐흐흐, 원래는 녹피로 가죽 갑까지 만들어 오려했습니다만, 생각보다 빨리 데는 바람에 그만 시간이 없었습니다요. 다음번에
델 때는 반드시 전해 드릴 겁니다요.”
“다쳐서 올 생각 마시고 그냥 전해 주세요. 하나도 안 반갑다구요.”
장년인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음을 흘리면서 당우리로부터 멀어졌다. 당우리는 절뚝거리며 사라지는 장년인을 바라보다가 다시
비수로 눈을 돌렸다.
“예쁘긴 한데 쓸 데가 있으려나?”
그때 젊은 여인 하나가 달려왔다.
“아가씨. 소가주께서 부르십니다.”
당우리가 이채를 띠며 물었다.
“왜 부르시는데?”
“이유는 모르겠구요. 둘째, 셋째 공자님들도 모두 부르셨는데요.”
당우리는 두 손을 목뒤로 돌려 마포 앞치마를 풀었다.
* * *
“가문은 안정되고 나는 늙었으며 소가주의 자질 또한 검증된 바, 나 운검정은 가주의 중책을 녹산에게 넘긴다. 이제 나
운검정은 남은 생을 바쳐 가문의 무공을 연구 보완하여 나 살았던 기록을 남기려 하노라.”
운검정이 운가의 본가 방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주의 위를 운녹산에게 넘긴 것도 벌써 십 년째 되는 날이었다.
운녹산은 수행원도 없이 운가를 벗어나 검각현을 거닐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알아보고 머리를 조아렸다. 운녹산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정말 평온했다. 가주가 되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많은 일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은 “그렇게 하라.” 말하고 붓이나 끼적거리면 되는 일이었다. 가문의 모든 일이 그가 없어도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정된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그저
친분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운녹산으로서는 가주로서 무언가 가시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운녹산의 고민은 결국
검각산의 토양을 뒤집고 타산(他山)으로부터 옥토를 끌어와 대대적으로 녹림사업을 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결과는 운녹산의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가문 내외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검각산의 요풍(妖風) 이후로 천북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든 훌륭한 사업이라고 칭찬했다.
검각산은 운가의 마당이나 마찬가지인 곳, 그곳을 자신의 이름과 같이 녹산으로 바꾸어 놓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기인한 사업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고, 운녹산은 천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운녹산은 검각산 녹림사업의 성공에 힘입어 다른 일을 추진해보려 했다. 그의 꿈을 지배하는 한 사람, 그녀의 복수를 행하는
일이었다. 아예 묘족의 녹림을 모조리 뽑아 검각산으로 옮길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그는 보천자에게 조심스레 문의했다. 그러나 보천자의 대답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팽후를 생각하는 정도로 수령신을 생각하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명분이 검각산의 녹림사업이라면 너무 빈약하지 않냐는 충고도
들었다.
운녹산은 아쉬웠지만 포기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운녹산의 마음속에 쌓이는 불만은 점차 커져만 갔다.
가문의 모든 일은 너무나 안정되게 돌아가는 것은 운녹산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안정을 찾는 일, 그것은 운녹산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이었다. 세상이 유동적이어야지 그가 꿈꾸는 사천제일세 역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직접 나서서 세력을 넓혀 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남으로 당가, 동으로는 청성과 아미, 서로는 무당과 아내의 친가가 되는
목가, 그리고 북으로는 상취월의 친가인 상가는 물론이고 종남과 화산이 포진해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고 계기가 필요했다.
“아이고! 가주님을 뵙습니다.”
운녹산은 구겨진 얼굴을 바로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발 앞까지 뛰어와 허리를 접는 노파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노파는 허리를 접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쭈글쭈글한 손으로 운녹산의 손을 덥썩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쇤네의 손자 놈이 운가의 그늘에 일자리를 얻어 이제 저희 집 식구들이 배곯지 않게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허허,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게 어디 제 덕인가요? 손자가 성실한 모양이지요.”
노파는 운녹산의 손에 얼굴을 대고 눈물을 흘렸다.
“아닙니다. 가주님. 가주님께서는 저희 검각현의 보배십니다. 제 아들 놈은 검각산의 요물들에게 죽임을 당했지요. 가주님께서
복수해 주지 않으셨다면 이 늙은 것은 평생 검각산만 노려보다 죽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복수 해주시고 이제 살 궁리까지
마련해 주시니 운가는 이 늙은 것에게 하늘보다 높습니다. 감사합니다.”
운녹산은 왼손으로 노파의 등을 두드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다행입니다. 이제 손자의 효도 마음껏 받으시며 마음 편히 사십시오.”
운녹산은 은근히 오른손에 힘을 주어 노파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운가로 향했다. 운녹산은 오른손을
뻣뻣하게 내린 채 어색한 모습으로 운가의 왼쪽 담 끝에 이르렀다.
운녹산은 손수건을 꺼내어 오른손을 문질렀다. 그리고 노파의 등을 두드린 왼손바닥도 여러 번 닦아냈다. 그리고 손수건을
은근슬쩍 바닥에 흘려버리고 운가의 문 앞에 이르렀다.
“가주. 청성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수문 위사가 운녹산을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전했다.
“청성에서? 누구라던가?”
“도명(道命)이 송학(松鶴)이라 했습니다.”
운녹산이 이채를 띄며 중얼거렸다.
“송자 항렬이라면 일대제자지? 무슨 일일까?”
운녹산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영빈각으로 걸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소가주 운강인과 마주앉아 있던 코가 유달리 긴 중년
도사가 급히 일어나 포권을 취하고 읍했다.
“청성의 송학이 운가주를 뵙습니다.”
운녹산이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이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운강인이 말했다.
“송학도장께서는 청성 장문인의 고제(高弟) 되십니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송학에게 물었다.
“헌데 무슨 일로 이 험한 천북까지?”
“폐파의 장문인께서 이것을---.”
송학이 말끝을 흐리며 품속에서 봉서 한 장을 꺼내어 운녹산에게 건넸다. 운녹산이 받아보니 겉봉에 <운가주(雲家主)
친전(親傳)>이라고 써 있었다.
운녹산이 이채를 띄며 반문했다.
“현상진인께서 친히 서찰을 보내셨다?”
운녹산이 봉서를 뜯었다. 차분하던 운녹산의 두 눈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차츰 신광을 드러냈다. 마침내 편지를 다 읽은
운녹산이 송학에게 물었다.
“허면 점창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성도 무림맹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운강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 성도로 갈 것이다. 교인이와 함께 채비 하여라.”
운강인이 허리를 접었다. 운녹산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송학에게 말했다.
“이미 날이 저물어가니 오늘 하루 본가에서 유하고 내일 나와 함께 떠납시다. 편히 쉬구려.”
송학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접었다. 운녹산은 웃음으로 답례하고 운강인에게 따라 나오라고 눈짓했다.
영빈각을 빠져나온 운녹산이 운강인에게 말했다.
“해밀각주(解密閣主)에게 운남에 자리한 강호문파에 대해 대소불문 하고 샅샅이 조사하라 하고, 운남과 연관지을 수 있는
본가의 사업을 다각도로 검토하라 일러라. 시간은 충분하니 만전을 기하라 하고.”
운강인이 허리를 접었다. 운녹산이 다시 말했다.
“아! 혹시 모르니까 귀주 쪽도 검토해보라 하고.”
“알겠습니다.”
운강인이 사라지자 운녹산은 황혼이 짙어지는 검각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숨통이 좀 트이려나.”
운녹산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면서 청성장문의 봉서를 불끈 움켜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