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현에서 백 오십여 리 떨어진 사유하. 폭 십여 장에 반길 수위가 채 못 되는 탓에 강이라 부르기에는 빈약해 보이나,
인근을 오가는 유목민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귀한 물줄기였다.
그 사유하의 남쪽 강변에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짐을 바리바리 실은 세 마리의 낙타가 포만감에 물든 눈으로 쉬고 있었고,
장족의 고유 복색인 헐렁한 장포(藏袍)에 알록달록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린 십여 명의 사내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있었다.
옷뿐만이 아니라 얼굴에까지 하얀 먼지들이 살얼음처럼 덮여 있는 장족 사람들의 행색은 조금 이상한 바 있었다. 헐렁한 장포를
이상하게 갑갑하게 여기고 손으로는 장포 속 여기저기를 쉬지 않고 긁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긁을 때는 더더욱 이상했다. 점심나절이 다 되어가는 사시 말경이니 늦봄의 사유하 근동은 장포 안에 입는
친삼(襯杉)만으로도 충분히 견뎌낼 정도로 시원했다. 그런데 그들은 장포 안에 또 다시 톡톡한 흑의를 입고 있었다.
바로 청인자 일행이었다. 사람의 수는 정확히 아홉.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두 사람이 적었다.
청인자가 모자를 살짝 치켜 올려 머리를 긁적이고 나서 박수를 쳤다. 늘어져 있던 젊은 제자들이 일제히 청인자에게 주목했다.
청인자는 진지한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너희들, 지금부터 이 사숙이 하는 말 잘 들어라. 내가 살펴보니 너희들 눈 속에 설렘이 엿보인다. 피곤할 텐데 그리
반짝이는 눈을 보여주니 좋기는 하다만---.”
청인자는 잠시 말을 끊고 젊은 제자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젊은 제자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오직 청인자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원래 아비가 아무리 격의 없이 대한다 해도 어릴 때부터 함께 산 삼촌만큼 마음 편히 대할 존재는 아니리라.
젊은 제자들에게 있어 청인자는 마음씨 좋고 재미있는 친숙부 같은 존재여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 드물게 정색을 하니 젊은 제자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인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행해져서 아니 될 일이다. 너희들이 비록 십 수 년 동안 검을 닦아 오기는 했으나,
그것을 자랑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행해서는 아니 된다. 무공을 펼치는 일은 가벼우나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은 실로
중하다. 무엇이 선(先)이 되고 무엇이 후(後)가 되어야 할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일. 대답해 보아라. 옥록(玉籙)의
의미가 무엇이더냐?”
청인자의 물음에 젊은 제자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말했다.
“민을 구제하고 악을 고쳐 선에 따르게 하며 과실을 없애고 복을 비는 것입니다.”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그렇다.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운방십계(雲房十戒)의 칠계는 무엇이더냐?”
제자들이 또 다시 외쳤다.
“자신의 손해를 마음에 두지 말고 타인의 피해를 방치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렇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행해야 할 것이니라.”
모두가 눈빛을 초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가 다시 말했다.
“흑풍사의 무리들이 오십이 넘는다 하나 발 빠른 마적들에 불과할 따름이라, 너희들이 내가 이른 대로 행하기만 하면 무리
없이 감당해낼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그것이 금새 마가 되어 도인은커녕 검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이른 바를 잊고 두려워하거나 당황해 하지도 말아라. 오늘의 일이 비무와는 달라서 피를 보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나,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이다. 너희들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가슴 속에
호생지덕(好生之德) 이 네 글자를 품는 일이다. 알겠느냐?”
모두가 소리 높여 대답했다. 청인자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다. 청현사숙이 돌아올 때까지 쉬어두어라.”
젊은 제자들은 청인자의 미소를 본 뒤로 곧 엄숙함을 떨쳐버리고 편한 자세로 드러누웠다.
청인자는 홀로 떨어져있는 운청산의 옆에 앉았다. 청인자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운청산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 근육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이고, 간만에 정색을 했더니 얼굴이 뻣뻣해지는구나.”
운청산이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딴 사람 같았어요.”
“크크, 그러냐? 힘들었다. 내가 지금 속이 말이 아니거든. 팔십 냥! 계획도 없던 팔십 냥을 지출했다. 그것을 다시 채울
생각을 하니 끔찍하구나. 빌린 거라 낙타 한 마리라도 죽어버리면 손해는 더 커질 텐데---.”
물과 건량뿐만이 아니라 장족의 옷과 낙타까지 사야 해서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그 돈을 지불할 때 한 점
망설임도 없던 청인자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운청산이 이채를 띄며 물었다.
“왜 돈까지 써가면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까?”
청인자는 당황했다. 그리고 큰일이구나 싶었다. 청인자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금경전에서 꽤나 많은 책들을 가져갔었지? 성현의 말씀으로는 이해가 안 되느냐?”
운청산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말이다 싶었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고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청인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외면 받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상대하면서 살아야 했던 운청산이었다. 더구나 그런 그에게 학문적 기초를 닦아준 사람이 바로 사람
귀찮아하는 귀곡산인이었다.
어릴 적의 학문은 현실의 경험이 투영되어야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아무리 훌륭한 성현의
말이라도 그럴듯한 말잔치에 불과할 뿐이리라.
청인자는 평범하게 자랐다면 상식일 수밖에 없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오만가지 방법을 짜내어야 했다.
청인자는 운청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너 어제 초면인 마형을 업고 산에 올랐다면서? 왜 그랬느냐?”
운청산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부탁했고, 또 왠지 안쓰러워서---.”
“그것이다. 맹자 왈,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났을 때 도와주고픈
마음이 이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이다.”
운청산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별달리 수고스러울 것도 없이 잠깐이면 할 일이었습니다.”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일지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던 마형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게 쉬운 일을 어렵게 여기는 자를 도와주고, 내게 어려운 일을 쉽게 여기는 사람이 또 도와준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며 정을 쌓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기본이다.”
운청산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그 많은 성현들이 거듭 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 한다는 반증 아닙니까?”
평소 말 짧게 하기로 유명한 운청산이 오늘따라 유독 물고 늘어졌다. 청인자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유쾌했다.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람답게 살지는 않지. 아니지. 사람마다 사람답다는 기준이 모두 나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게
옳겠군.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각각의 가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힘을 숭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람답다는 의미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하늘이 세상에 성현을 나게
하고 또 그들에게 한결같은 말을 하게 하는 것은 곧 그 말들이 인간계의 보편성이 되었으면 한다는 천명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난 사람답다는 의미를 그렇게 생각한다. 으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지옥은 풍도의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리라.”
청인자가 과장되게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운청산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외숙부가 그토록 아쉬워하는 돈이 드는 일이었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었으며, 또 피를 봐야한다 하셨습니다.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청인자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좀 전에 말한 것까지가 이 숙부가 생각하는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는 도리라면, 오늘의 일은 무를 익힌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는 도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기를 들게 되면 언젠가는 자신이든 남이든 간에 누군가가 피를 보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무기를 든 자에게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필요하다. 개인이든 군대든 상관없이 대의명분이 없다면 곧
도적이며 살귀일 따름이다. 어떠한 인과가 있든 간에 사람이 일단 무를 익혔다면 천명은 그에게 대의명분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일러 세속에서는 협의지심이라 하고, 우리들은 적덕지심이라 말한다. 검선을 지향하는 우리와 같은 도파
사람들에게 있어 적덕을 행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한 일이다. 곤륜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이 숙부에게 돈이
중하기는 하다만, 그것을 써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덕을 쌓을 수 있다면 빌어먹는다고 아까워하랴.”
운청산은 미진하지만 대충 의미는 알겠다는 눈빛을 드리웠다.
“그러나 곤륜의 계율은 살생을 금하고 있습니다.”
청인자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분명히 그러하다. 그것은 곤륜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도파에서 취하는 계율이다. 그래서 내가 아까 사질들에게
호생지덕을 잊지 말라 일렀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으며, 그로인한 살생의 과(過) 또한 계율에 따라 사람을
구한 공(功)으로써 상쇄된다. 그러나 상쇄가 되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를 죽여 열을 살릴 수 있다면 너는 어느 길을
따르겠느냐?”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보이자, 청인자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청산!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라. 살아가는 맛이란 느껴서 아는 것이지 들어서 알 수 있는 아니다.
지금은 우선, 매사를 행함에 앞서 그 뜻이 하늘과 너 자신과 너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떳떳한 일인가, 정도만
생각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청인자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사숙! 청현 사숙께서 돌아오십니다.”
청인자와 운청산이 동시에 전방을 주시했다. 청현과 그의 제자 송명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청인자가 중얼거렸다.
“뛰어오는 것을 보니 오는가 보구나. 그래, 온단 말이지?”
청인자의 사질들이 모두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청인자가 말했다.
“내가 누차 일렀던 말을 잊지 마라. 한 사람의 인내가 모자라면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신호를 할 때까지 참고
또 참아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짧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청인자는 다시 청현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양반들이 정말 안 왔나? 이거 조금 불안한데---.”
*독안괴선전은 초기 구상 때의 가제입니다. 제목은 괴선이 맞습니다. 책을 쓰기 전에 각 권마다 간단한 시놉과 아이디어들을
써놓는 버릇이 있어, 독안괴선전이란 가제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한주에 두 번 연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장을 연재합니다. 매번 반 장씩이니까 이틀에 한 번씩 네 번 올라갈 겁니다.
써놓은 분량이 모자라지 않는다면 말이죠. -.-;;;
운이 일렁이는 것은 혈룡이 눈뜬 까닭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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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늦었지요. 새벽에는 접속이 안되더군요.
적운이 일렁이는 것은 혈룡이 눈뜬 까닭이다.
네 기의 인마, 정확히 말해서 세 사람과 네 마리 말들이 초원을 지나 사유하에 이르렀다. 백의 장포를 입은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가 선두 중앙에 위치해 있고, 좌측으로는 부처님처럼 후덕한 인상의 사십 대 중반 장년인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우측에는 날카롭게 생긴 적의의 매부리코 장년인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백의사내가 상쾌한 목소리로 묻자, 좌측의 장년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유하란 곳입니다. 소군. 도란현까지는 이백여 리 남짓이고 강을 따라 백여 리 북상하면 흑풍사란 마적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모우산이 나오지요.”
“흑풍사?”
백의사내가 중얼거리자 후덕하게 생긴 장년인이 즉각 대답했다.
“몽고족들로 이루어진 단체로 스스로는 붉은 매의 후예라라고 부르지요. 그 동안은 이 근동에서 악명을 떨쳤습니다만, 홍라교가
서장을 일통한 이상, 앞으로는 숨죽이며 살아야 할 조무래기들일 뿐이지요.”
장년인은 눈가에 미소를 지으며 청년의 등 뒤로 반대쪽 매부리코 사내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순간 매부리코 사내가 날카로운
눈을 치뜨며 장년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장년인은 눈을 찡긋하면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응?”
그때 백의사내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후덕하게 생긴 장년인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호! 흑풍사 놈들이 사냥감을 만났나 봅니다. 허! 간덩이가 부었군. 이제 장인들을 건드리면 안 될 텐데?”
과연 그랬다. 오십여 기의 인마들이 원을 그리며 말을 달리고 있었고 그 원 안에는 도검을 꺼내어 원진을 치고 세 마리
낙타를 보호하는 열 한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백의청년이 웃으며 물었다.
“어찌 아는가?”
“복색을 보시지요. 비록 양피는 아니나 몽고포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채화요대(彩花腰帶)를 두르고 거기에
목완(木碗)과 몽고도(蒙古刀)를 걸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 요대 안에 부싯돌 주머니가 있을 겁니다.”
“흥! 보지도 않고 안단 말인가?”
매부리코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후덕한 얼굴의 장년인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몽고족의 특징이지. 목완과 몽고도 그리고 부싯돌은 몽고족 사내들이 평생 지닌다 하여 삼불리신(三不離身)이라고
불리거든.”
“흥! 아는 것 많아 좋겠군.”
또 다시 매부리코 사내가 시비를 걸었다. 그때 백의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혈응! 난 재미있게 듣고 있네만.”
순간 매부리코 사내가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헛! 소군, 죄송합니다.”
백의사내는 여전히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젓고서 말에서 내렸다. 두 장년인들도 즉각 말에서 내렸다.
백의사내가 말했다.
“지금 도강하면 귀찮겠군. 말들 목이나 축이게 하며 좀 쉬었다 갈까?”
순간 혈응이라 불린 매부리코 장년인이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치울까요?”
단신으로 오십여 명의 마적들을 상대하겠다는 광오한 말이었으나, 백의사내는 능력여부에는 한 점 의문도 표하지 않고 간단히
물었다.
“왜?”
혈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히 소군의 발걸음을 지체시키니---.”
“됐어. 안 그래도 물 본 김에 세수나 할 생각이었어.”
혈응이 다시 허리를 조아리며 한 발 물러섰다. 그때 후덕한 인상의 장년인이 다가와 말했다.
“소군. 장족들을 돕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돕는다? 그건 또 왜?”
“이 사유하 끝에서 시작되는 시달목분지를 경계로 북쪽에는 몽고족이 남쪽에는 장족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장족들은 저
흑풍사 놈들에게 자주 피해를 보았지요. 어차피 홍라교주를 찾아가는 길이니 예물 한 가지 더 얹는 셈 치고---.”
백의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불. 저기 보게. 저 장족들도 나름대로 무기를 들었지 않은가? 손에 병장기를 든 이상 그들도 강호인,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사는 거야. 존중해 주자구.”
백의 사내가 싱그럽게 웃는 것을 보며 소불이라 불린 장년인은 허리를 접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때 흑풍사와 장족들 간의 갈등은 하등 관계가 없다는 듯, 바로 강 건너에서 독안의 칠척 거한이 이제 열 대여섯이나 되었을
예쁘장한 소녀를 안장 앞에 앉혀 두고 물가로 다가왔다.
백의사내는 흠칫 놀라는 칠척장신의 사내에게 물 묻은 손을 흔들며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칠척 장한, 독안혈랑은 당황했다. 아무리 강 건너 호랑이는 고양이만 못하다지만, 사유하는 말을 타고 건너가는 것이 일도
아닌 좁고 얕은 강이었다. 그런데도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놀라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독안혈랑은 등에 흐르는 땀방울 느끼며 조심스럽게 백의사내 일행을 살폈다.
그는 적어도 바보는 아니었다. 코앞의 오십여 마적들 앞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자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확신했다. 자신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이 호랑이가 될 수도 있으리라.
독안혈랑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에게 물을 먹였다. 바로 그때였다. 병장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독안혈랑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족 상인들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일제히 무기를 버렸다. 그러자 그들을 휘돌던 부하들도 천천히 멈춰 섰다. 독안혈랑은
흐릿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나 강 건너 호랑이들을 살폈다.
바로 그 순간,
“휘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독안혈랑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돌오돌 떠는 것 같던 장족 상인들이 갑자기 장포에서 파란 청기가 도는 검을 꺼내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독안혈랑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역시도 도에 기세를 실어 무형의 기운을 뿜어낼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하들은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는 열 하나가 모두 검기를 뻗어냈다. 그 가운데 가장 약한 기세를 지닌 자라도 독안혈랑 혼자서는
감당해 내지 못하리라.
“드조그탁스!”
독안혈랑은 황급히 말에 오르며 소리쳤다.
청인자 역시 마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러 무기를 버리는 순간,
흑풍사 마적들이 아예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로 멈춰 설 줄은 몰랐다. 곤륜파의 두려워하는 연기가 너무 사실적이었든지,
아니면 흑풍사가 장족을 만날 때면 늘 같은 수순을 밟은 탓이리라.
청인자는 안장 앞쪽에 지친 기색의 여인을 앉혀두거나 기절한 여인을 걸쳐두고 있는 열다섯 마적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순식간에
무기를 든 손을 무력화시키고 여인들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하리라.
청인자는 입술을 오므려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바로 그 순간 열 하나의 곤륜제자들이 일제히 장족의 장포를 펼쳐 벗으며 검을
꺼내어 오로지 여인이 타고 있는 마적들에게만 튀어 올랐다.
일순간에 열한 줄의 청기가 사방으로 뻗히며 열 하나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럽게 튀어 오른 곤륜제자들을 맞은
마적들은 영문도 모른 채 피가 치솟는 어깨를 감싸 쥐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는 순간 또 다시 네 줄기 청기가 번득였다.
“드조그탁스!”
독안혈랑의 도주하라는 외침을 듣는 순간 아직 말에 타고 있던 마적들은 말에서 떨어진 동료들에게 손을 뻗으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몇몇 마적들이 달리면서 품에서 뿔 고동을 꺼내 힘차게 불었다.
청인자는 당황했다. 열다섯 여인들을 모두 구하기는 했지만 독안혈랑이 안고 있는 소녀는 아직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큰일이구나. 일화의 딸이 분명하던데, 너무 서툴렀어. 원군을 청한 것인가?’
청인자가 좌우로 휘돌며 소리쳤다.
“사질들은 여인들의 안전부터 확보하라. 청산!”
사질들이 여인들을 안심시키는 것을 확인한 청인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벌써 오십여 장을 달아나고 있는 흑풍사의 무리들을
확인하고 급히 몸을 날렸다. 그 옆으로 바로 운청산이 따라붙었다.
“청산! 저 아이를 반드시 구해야 된다. 내가 아는 아이다.”
청인자는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운청산의 신형이 갑자기 빨라져 청인자를 멀찍이
떼어놓았다.
운청산의 신형이 일 보에 근 이십이여 장을 뻗어나가자 청인자가 놀라 주춤했다. 경공신법만큼은 두 사형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건만 운청산만큼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청현자가 주춤했던 청인자의 뒤에 따라붙었다.
“소사숙이 틀림없이 조카 맞습니까?”
청현자도 두 눈을 부릅뜨며 운청산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청인자는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퉁기듯 허공으로
몸을 뽑아냈고 청현자도 곧장 뒤따랐다.
“호오! 위장이던가? 소불! 곤륜파겠지?”
“그렇습니다, 소주. 경공제일 곤륜이라 하지 않습니까? 일 보에 십오여 장을 단축하는 저 경공은 곤륜의 대붕무영으로
짐작되는군요. 헛! 저 친구는 뭐야?”
소불은 갑작스럽게 튀어나가는 운청산의 신형을 바라보며 눈을 치떴다. 백의사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드러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바로 몸을 날렸다.
“소주, 어디 가십니까?”
“구경하러.”
백의사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순간 혈응이 바로 몸을 뽑아 올리며 말했다.
“넌 말이나 챙겨.”
소불은 한 방 맞았다는 듯 멍하게 서있었다.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유하 남쪽에서는 운청산이 독안혈랑을 쫓고 그 뒤를 청인자와 청현자가 따르는데, 사유하
북쪽에서는 신비한 백의사내와 수행인 혈응이 운청산을 바라보며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백의사내의 눈에 미약한 감탄이 서렸다. 운청산의 신형이 점차 더 빨라져 일보에 무려 이십이 장을 압축하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다시 한 번 튀어 오르자 꽁무니에 쳐져있던 마적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운청산은 연이어 마적들을 걷어차며 단 한 번 땅을 짚지 않고 선풍처럼 허공을 휘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비명소리 요란하게
들리면서 마적들이 연이어 땅으로 구르고, 주인을 잃은 말들은 서서히 멈춰 섰다.
“후우! 운룡대팔식이겠지? 대단하군. 어느새 두목인 듯한 놈 하나 남았지 않은가. 저놈도 곧 잡히겠군. 정말 경공 하나는
엄청나네. 따라 붙으려니 가슴이 다 벌렁거려.”
백의사내가 혀를 내두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앞서가던 독안혈랑이 근접하여 들리는 비명소리를 경계 삼아 절묘하게 말을 멈춰
세우며 방향을 바꾸었다.
한 번만 더 뛰면 독안혈랑마저 잡을 것 같던 운청산도 어쩔 수 없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예리한 비수가 창백한 소녀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저 놈!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쯧쯧쯔. 그러니까 마적 짓이나 하고 살겠지.”
백의사내도 멈춰 섰다. 혈응이 옆에 내려서는 순간 반대편에서도 청인자와 청현자가 운청산의 좌우에 내려섰다.
독안혈랑이 그들 말로 뭐라고 소리쳤다. 알아들을 수야 없었지만 소녀의 목에 가는 핏방울이 맺히니 그 뜻을 어찌 모르랴.
운청산 등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순간 독안혈랑이 악을 쓰며 손을 내뻗었다. 물러서라는 뜻 같았다.
운청산 등은 할 수 없이 이 장을 물러나 독안혈랑과의 거리를 사여 장으로 벌렸다.
그때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독안혈랑의 등 뒤에서 뿌연 먼지가 솟구쳐 올랐다. 독안혈랑의 얼굴에 갑자기 화기가
감돌았고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유하 근동에서 저런 대규모의 말발굽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또 누가 있을까. 보지 않아도 흑풍사리라. 방심하다
당했지만 마상궁술에 능숙하고 기마전에 뛰어난 흑풍사라면 더 이상의 수모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백의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일이 점점 재밌어지는데---. 조금 전의 뿔 고동 소리가 이 뜻이었나? 자, 곤륜의 청년이여! 이제 어쩔 텐가?”
그의 말처럼 곤륜파에게는 점차 불리한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뿌연 먼지는 백여 장 밖에서 어느새 인마로 변해 있었고 그
수효도 대충 백여 기는 되어 보였다.
세 명이서 어떻게든 당적해 보거나, 소녀를 포기하고 물러서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응?”
백의사내는 이채를 띄며 고개를 비틀었다. 운청산의 뒤쪽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초로의 도인 두
명과 젊은 도사 다섯이 이십여 장 밖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호오! 이렇게 되면 비세는 모면했는가?”
그때였다. 백의사내가 유독 주시하던 운청산이 검을 꺼냈다. 순간 독안혈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독안혈랑은 그 커다란 몸을
움츠려 작은 소녀의 뒤로 최대한 숨었다. 그리고 비수에 힘을 주려했다. 그런데 운청산이 뽑은 검을 어깨에 걸머지자 다시
안심하며 비수에서 힘을 뺐다.
독안혈랑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운청산의 검에서 일순간 청기가 일렁였다. 그러한 광경은 독안혈랑을 제외한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여 제지하지는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거리는 사 장. 일 보에 이십이 장을 뛰는 운청산이니 검기가 닿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위협적인 움직임 한 번으로 소녀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검격에서부터 청기가 또르르 말리는 듯 검첨으로 흘러가더니 어느새 검첨에만 조그만 구슬 같은 청기가 어렸다. 그리고 그
구슬은 곧 검첨을 벗어나 운청산의 등 뒤로 계속해서 나아가 삼 장 넉 자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허공에 떠있는 영롱한
파란 구슬, 그것은 운청산의 검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의 눈빛에는 경악이 어렸다.
“검환?”
혈응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백의사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운청산이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듯 검을 천천히 앞으로 내뻗었다. 너무나 느려서 누가 보아도 그러한 행동이 위력을 가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독안혈랑조차도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았다. 독안혈랑으로서는 별 다른 일도 없건만 운청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파란 구슬은 독안혈랑의 시선을 벗어나 허공에서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검첨이 완전히 독안혈랑의 어깨에
겨누어지는 순간 파란 구슬은 독안혈랑의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가 물처럼 스며들었다. 갑자기 피분수가 치솟고 나서
독안혈랑의 비수든 팔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독안혈랑은 자신의 팔이 무릎에 떨어지는 순간에야 알아차리고 비명을 토했다. 그 순간 운청산이 앞으로 튀어나가 눈 깜빡할
사이에 말에서 떨어지려던 소녀를 안고서 독안혈랑을 내차는 탄력으로 제자리에 돌아왔다.
운청산이 지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청인자에게 넘기는 순간, 백의사내의 굳었던 두 눈도 풀렸다.
“호오! 대단하다. 청년이여! 그러나 난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제 어찌할 텐가?”
백의사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칠십여 장 앞까지 근접한 흑풍사의 무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일순간 백여 발의 화살들이
날아와 하늘이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운청산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그의 뒤쪽에서 초로의 두 도인이 따라붙었다. 세 자루의 검에서 세 줄기 청기가 사 장에
이르도록 뻗었다. 청기가 허공을 휘도는 순간 하늘에 푸른 원반들을 만들어졌다.
화살들이 검막에 부딪쳤다. 그러나 단 한 개의 화살도 검막을 통과하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운청산과 청학 그리고 청우자는 거의 동시에 바닥에 내려섰다.
청학과 청우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이야 쉽게 막아내겠지만 한 없이 쏘아댄다면 기력이 견뎌내지 못할 것을 아는
탓이었다.
청학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순간 운청산이 앞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두 사람은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막아낸다는 생각만 했지 적극적으로 뛰어들 생각을
못했음이 창피했던 것이었다.
“우린 늙었어. 저 생각을 못하다니---.”
청학자가 한탄하는 사이에 청우자가 운청산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같이 묶지 마세요. 전 아직 입니다.”
“저, 저런!”
청학자도 몸을 날렸다. 그때 마적들의 사십여 장 앞까지 접근한 운청산을 향해 비 오듯 화살이 떨어졌다. 운청산의 앞으로
다시 청막이 쳐지고 화살들은 무기력하게 부서져나갔다.
그들이 급히 화살을 재는 순간 운청산이 한 발 더 나아가 검으로 땅바닥을 향해 비스듬하게 반원을 그렸고 그 순간 파란
검기가 바닥을 긁었다.
후두두두두둑!
뿌연 먼지가 솟아오르고 바닥의 흙들과 돌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말울음 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순간, 흑풍사의 마적들 사이에서 말들이 광란하고 사람들이 낙마했다. 적어도 사십여
명은 말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운청산이 제자리에 서서 검을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순간 검신에서 휘돌던 청기가 쭉 뻗어 나와 허공을 찔렀다. 그때
청학자와 청우자가 운청산의 좌우에 붙어 같은 동작을 취해 보였다.
혼비백산해 있던 마적들 가운데 중앙에 위치해 있던 초로인이 운청산 등을 한참이나 째려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마적들은 일제히 기수를 돌린 후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갔다.
운청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검을 거두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 순간 운청산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강 건너에 있던
백의사내를 발견한 것이었다.
사내는 운청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소리 없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운청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사내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목례해 보였다.
청학자와 청우자가 운청산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소사숙을 뵈오.”
운청산도 포권을 취하며 읍했다. 두 사람이 얼굴에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돌아섰다. 세 사람은 나란히 몸을 날려
백의사내로부터 멀어졌다.
백의사내가 사라지는 세 사람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부님의 말씀과는 달리, 곤륜에 아직 사람이 남아 있었어.”
혈응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백의사내가 웃으며 혈응을 바라보았다.
“자신 있는가?”
“저 혼자는 어렵습니다만, 소불과 함께 나서고 소주께서 거들어 주신다면---.”
백의사내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왠지 자신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됐어. 놔두세. 사부님께서 더 이상 곤륜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하시더군. 죽은
자와의 약속을 누가 알랴만, 사부님의 언약을 무위로 돌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혈응은 크게 당황하여 허리를 접었다.
“헛!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백의사내가 혈응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 괜찮아. 나도 할 수 있을 때 뿌리를 뽑아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저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쌓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오늘은 아닐세. 악연이라면 저쪽에서 먼저 검을 뽑아들겠지. 그때는 굳이 약속에 연연할 필요가 없을
테지. 게다가 우리 셋으로는 십 할 승산을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하여튼 오늘 좋은 구경했군. 자 우리도 가 볼까?”
혈응이 몸을 비틀어 백의사내의 앞길을 텄다.
운이 일렁이는 것은 혈룡이 눈뜬 까닭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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