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청산은 그가 거처로 쓰고 있는 버려진 전각의 좁은 마루에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긴 마포를 꺼내어
펼치고 그 위로 망태기 안에 든 약초들을 조심스레 꺼내 펼쳤다. 몽둥이 같은 산약(山藥)도 있고 겨우 한 뼘이나 될 듯한
산삼 세 뿌리도 있었으며 특히 황기(黃芪)가 많았다.
운청산은 백 년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산삼들을 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두고 올 걸 잘못했나?”
운청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몇 년 더 둔다고 해서 약효가 부쩍 느는 것도 아닌 이상, 보일 때 캐는 것이 낫다고
자위했다.
“근데 이것들이 돈이 되는지 모르겠군.”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운청산은 돈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돈이란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혼자 살기를 원해도 벽곡단이 없는 이상 밥은 어울려 먹어야 했다. 처음에야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박찬에 퍼석퍼석한
밥이었지만 벽곡단과는 비할 수 없는 맛을 느끼며 즐기기까지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인자가 출산을 한다며 같이 갈 것을 권했고, 운청산은 출산의 이유를 물었다. 청인자는 솔직담백하게 대답해
주었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검을 사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든다는 사실과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운청산은 그의 의지대로 청인자를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청인자와 더불어 많은 말을 나누었다. 주로 운청산이 질문하고 청인자가
대답한 그 대화의 주제는 오직 한 가지 돈에 관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하루 종일 검과 책을 장난감 삼아 놀던 운청산의 일과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일 년의 반, 그러니까 태령봉에
눈이 걷히는 동안은 늘 약초를 찾아 산을 헤매고 다녔다. 반선에게 배운 것도 있고 청인자가 약초도 돈이 된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지금껏 캐고 다듬어 청인자에게 건네준 약초만으로도 능히 곤륜의 삼분지 일 살림을
책임졌다는 것을.
“모르는 걸 생각해 보면 무엇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외숙이 알아서 하시겠지.”
운청산은 약초에서 눈을 떼고 들보에 검갑은 걸어둔 채 검을 쥐고 좁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운청산은 마당 한 가운데 서서
오른쪽에 잔뜩 세워져 있는 통나무를 응시했다.
특이한 모양새였다. 일정하게 한 자 반 정도 되는 통나무들이었는데, 보통은 쌓아두는 것을 일일이 세워서 늘어놓았다.
운청산은 호흡을 가다듬고 뚫어져라 통나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오른발을 굴렀다. 순간 그 많은 통나무들 가운데 유독 앞쪽에
있는 통나무 하나만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운청산은 통나무가 가슴 높이로 튀어 오르자 왼손을 뻗어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통나무가 직각으로 꺾여 운청산의 전면 일
장 앞으로 딸려왔다.
운청산은 검을 수평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검은 어처구니없게도 통나무에 닿지도 않았다. 그리고 통나무 역시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그저 아래로 처질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통나무 아래로 검을 찔렀다가 빼냈다. 순간 통나무는 미약하게 회전하며 다시 가슴어림까지
솟아올랐다.
다시 몸을 빼낸 운청산이 또 다시 검을 휘두르고 앞으로 이동하여 검을 찔렀다 빼기를 한 번 더 반복했다. 마지막 세 번째
베기를 끝낸 운청산은 더 이상 통나무 아래로 검을 찔러 넣지 않고 대신에 왼손을 뻗어 손바닥을 휘감으면서 오므렸다가 다시
왼쪽의 빈 공간을 향해 내뻗었다.
운청산의 손놀림에 따라 통나무는 빈 마당으로 날아가 꽂히듯 떨어졌다. 순간 통나무가 여섯 조각으로 쪼개어지면서 여섯
방향으로 흩어졌다.
운청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안 되는군. 땅에 닿기 전에 다시 당겨보면 어떨까?”
무공을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리라. 진각을 이용해 원하는 물체에만 영향을 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대접인신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더구나 검기가 일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통나무를 여섯 조각 낸
것은 검의 기세만으로 이룬 일이리라.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실력으로 장작을 팬다는 것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부러워하고
아쉬워했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에게 있어서는 장작을 패면서 펼치는 무공 정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태악도인의 도움으로 운청산은 이미
구전태허신공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칠전과 구전이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나랴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랐다.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칠전의 네 배 정도에 달한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두 번, 세 번 연이어 힘을 써도 진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이
끊임없이 보충되었다.
그리고 꾸준히 수련했던 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운청산은 같은 성질임에도 이질감이 느껴지던 태악도인의 공력을
온전히 그의 것으로 만들었고, 태청구전금액고의 남은 약력마저 완전히 소화시켜 버렸다.
결국 운청산의 공력은 겨우 사 년 전에 구전을 이룬 사람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니 공력을 자유자재로 수발한다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는가.
만약 태악도인이 운청산의 수준을 살폈다면 오히려 크게 아쉬워했으리라. 진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태악도인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천지자연의 기운까지 훔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양신이 생성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단계이거늘 수련을 거듭해도 공력만 조금씩 늘어날 뿐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운청산은 초연했다. 할 일이 없어 수련에 전념 하였으니 적어도 태악도인의 부탁은 들어주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귀곡산인의 말이 떠올라 더 이상의 진전을 기대하지 않는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록 장작 패는 일에 불과하지만 배운 바를 유용하게 써먹는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리라.
더구나 그 장작들이 장차 곤륜제자들의 가슴까지 따뜻하게 덥혀 줄 것이니 무공의 남용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실례가 되리라.
운청산은 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마지막 순간에 공력의 수발을 전환했다. 그러나 힘이 끊어지는 순간 통나무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운청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에 이채를 드리웠다.
“그렇군. 아예 찍어 누르면 되겠어.”
운청산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통나무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비스듬하게 땅에 꽂혔다. 고개를 끄덕인 운청산은
정밀한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
퍼퍼퍼퍼퍼퍽!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통나무가 땅에 꽂히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교차했다. 백여 개의 통나무를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이동시킨 운청산은 돌아서서 검을 던졌다. 검은 정확하게 검갑 안으로 꽂혀 들어갔다.
운청산은 통나무들을 확인했다. 처음 두 개의 통나무들만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나머지 통나무들은 촘촘하게 땅에 박혀 있었다.
운청산은 마루 아래서 둘둘 말린 칡 나무 밧줄을 꺼내 들어 장작들을 단으로 짓기 시작했다.
는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 해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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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자는 대붕무영까지 펼쳐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름만 금경전(錦經殿)인 전각을 지나 곤륜파의 낡은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좁은 산길을 따라 좌우에 늘어선 네 개의 낡은 신당들을 지나쳤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십여 장을 이동하니 운청산이 기거하는 집 한 채가 보였다. 낡은 신당을 보수한 듯
나무판자들이 벽과 지붕에 군데군데 덧붙여져 있었다.
청인자는 급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청인자는 눈빛에 아픔을 담아 마당에서 장작을 단으로 짓고 있는
운청산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것이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청인자는 운청산이 웬만해서는 한서(寒暑)를 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태청구전금액고의 효력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곤륜의 겨울이 아무리 길고 혹독하다 해도 미리부턴 장작을 준비할 이유가 없었다.
청인자는 오늘은 반드시 운청산을 데리고 가겠다고 작정했다. 비록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젊은 운청산이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일은 더욱 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애써 웃어 보이지만 그늘이 짙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시 못볼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그늘지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안 되겠어. 내 곁을 떠나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해야 돼. 혹시 알아? 저것이
그리움에 가슴 설레게 될 사람을 만나게 될지.’
청인자는 눈에서 아픔을 지워버리고 억지로 입술 끝을 치켜 올렸다.
“청산아!”
청인자는 운청산의 이름을 부르면서 억지가 아닌, 뭔가 의미를 내포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특혜 때문이었다.
가급적이면 피하려 하지만, 그의 사형들은 운청산을 대면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소사숙, 무엇하셨소?”하고 말했다. 오직
청인자만이 소사숙 대신에 이름을 불렀다. 두 사형들의 입술이 퉁퉁 불었으나, 천륜이 인륜에 앞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운청산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을 짓고 나서 돌아섰다.
“에휴! 무정한 놈아. 사람을 봤으면 반가운 체라도 해야지.”
운청산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침에도 뵈었는데요, 뭘.”
“그때는 그때고, 이 녀석아. 넌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어?”
운청산이 미소를 확연하게 드러내자, 청인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좀 웃고 살아라.”
얼마 지나지 않으면 식사시간이 되는 까닭에 찾아오지 않아도 곧 만나게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찾아왔으니 까닭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운청산은 이채를 발하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청인자는 그때서야 자신이 바쁜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청인자는 급히 용건을 말했다.
운청산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전 곤륜산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사나흘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게다. 그리고 오늘은 반드시 같이 가야한다.”
운청산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강경한 청인자의 어조에 놀랐다.
“왜 꼭 제가---.”
청인자가 정색을 하고 운청산의 말을 끊었다.
“알다시피 무공으로 따지자면 이 외숙부는 사제 청현만 못하다. 잘못하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운청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천하에 절로 피가 당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청인자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마저도 죽음의
강 너머로 보낸다는 생각을 하면 오싹한 한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운청산은 다시 눈을 뜬 즉시 몸을 돌려 검을 둘러멨다. 청인자가 억지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맙다.”
운청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청인자가 앞서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청인자는 급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었다.
태상궁 앞 연무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현자와 그의 제자 둘을 포함한 아홉 명의 젊은 도사들이 긴장된
표정을 드러내며 서있었고, 운상자마저도 마운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청인자가 다가오자 운상자가 반색을 하며 다가섰다. 청인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운상자가 먼저 말했다.
“오! 소사제가 같이 가려는가? 이제야 한시름 놓겠어.”
청인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운상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운상자는 청인자를 일별도 하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청인자는
운청산이 운상자를 향해 깊숙이 목례하는 것을 보며 마운의 곁으로 갔다.
“소사제?”
“음, 이 청인의 조카이면서 태악 사숙조의 독제자(獨弟子) 된다오.”
마운이 입을 쩍 벌렸다.
“어이쿠! 사숙 되시는 양반에게 업혀 올라왔구먼.”
청인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눈빛으로 마운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운청산이 다가왔다.
“소사숙조를 뵙습니다.”
청년 도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청산은 어색하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 그들을 외면했다.
청인자가 급히 나서서 운청산과 청년도사들 사이의 어색함을 지워버렸다.
“한시가 급하다. 오늘 종일 달려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놈들이 서둘러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유하(沙柳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시달목분지(柴達木盆地)의 모우산(牦牛山)까지 따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서두르자.”
청인자가 돌아서서 운상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들 돌아오너라.”
운상자는 그 한 마디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가 돌아서서 먼저 몸을 날렸다. 그 뒤로 청현자와 젊은 도인들이 따르고 마운도 힘껏 뒤따랐다. 혼자 남은 운청산은
다시 한 번 운상자에게 목례해 보이고 마운의 뒤를 따랐다.
운청산마저 산문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 운상자의 뒤로 두 초로인이 나타났다.
운상자가 두 사람의 등에 걸린 검을 흘끔 보면서 말했다.
“안 간다며?”
청학자가 말했다.
“영 마음이 안 놓여서---. 다녀오겠습니다.”
운상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불안하긴 아흔 다된 내가 더 불안하다, 이놈들아! 가서 둘 중에 하나만 살아와. 그때는 서로 미루지 않겠지.”
청우자가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제가 한낱 도적들 손에 죽는다면 사부님께서 창피해지십니다. 장문인 같은 거야 돌아가시면 그때는 누군가가 맡지 않겠습니까?
오래 사십시오, 사부님. 그럼.”
청우자가 허리를 펴자마자 몸을 날렸다. 청학자가 뒤를 따르며 말했다.
“사부님. 안됩니다, 너무 빨리 등선하시면.”
운상자는 혀를 차며 두 사람이 산문을 넘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쯧쯧쯔, 예순 자식, 아비 앞에서 재롱떠는 것도 정도가 있지. 허! 그래도 첫째라고 좀 낫구나. 등선이라?”
흐릿한 그늘이 져있던 운상자의 얼굴에 보기 좋은 주름살들이 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의 성정을 닮아가는 두
제자들의 재롱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그 둘이 갔다면 앞서 간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할 필요가 없기
곤륜제자들이 처음으로 산을 벗어나 낮은 지대로 들어가면 반드시 크게 놀라는 것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갑자기 부쩍 는 것만
같은 경공능력 때문이었다.
대곤륜의 첩첩히 이어진 봉우리들은 삼분지 이 이상이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늦은 봄부터 연이어지는
이른 가을까지는 눈으로부터 해방되는 태령봉이지만 그마저도 여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 체력만 있다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원지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조금만 올라가도 어지럽고 메스꺼워질 뿐만이 아니라 심하면 코피를 흘리고 졸음이 생기며 정신이 혼미해 진다. 이를
일러 산취(山醉)라고 부른다.
산취는 무공이나 체력의 고하에 상관없이 나타난다. 천북고원에 위치한 운가 사람들이나 좀 편할까, 무당이나 소림같이 낮은
산에 위치하거나 대개가 평지에 위치한 여타 세가의 사람들마저도 곤륜에 오르려면 적어도 이틀 정도는 고원지대에서 적응하고
다시 곤륜에 올라야 산취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곳에서 생활하는 곤륜제자들은 당연히 산취를 모르다. 그런 곳에서 마음껏 뛰어다닌 곤륜제자들은 낮은 지대로 가면
두 호흡이 필요할 거리를 한 호흡으로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웬만해서는 지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운룡대팔식 같은 절기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구전태허신공과 같은 면면부절한 내공심법까지 힘을 보태니, 감히 타파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허공에서 유영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곤륜의 젊은 제자들 역시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비록 운룡대팔식이 아니라 대붕무영을 펼치고 있기는 하지만 한 번
몸을 날리면 못해도 칠팔여 장 이상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젊은 제자들은 피를 보러 간다는 사실마저도 잊고 신이 나서
몸을 날렸다.
파르르륵! 파르르륵!
도포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순간이동을 하는 듯 칠팔 장씩 움직이니 가히 장관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쫓아가는 마운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가 점차 뒤쳐지기 시작했다.
운청산과 함께 대열의 가장 뒤쪽에서 움직이던 청인자가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지자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멈춰라.”
젊은 제자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청인자를 돌아보았다. 청인자는 아예 몸을 돌려 마운을 기다렸다. 마운이 도착했다.
“잠시 쉴까요?”
청인자가 마운에게 묻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청인 도장! 아무래도 안 되겠소. 생각해 보니 내가 짐이 되는 구려. 도적들과 일전을 치룰 때도 짐이 될 것은 뻔한 일.
난 차라리 곡마래로 돌아가서 기다리겠소. 우리 아이들도 아마 내가 돌아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청인자는 따로 마운을 위로하지 않았다.
“그러는 게 낫겠구려. 먼저 가서 기다리시오. 곧 좋은 소식과 함께 돌아가겠소.”
마운이 포권을 취해보였다.
“그럼, 부탁하오.”
청인자가 빙긋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물론이요. 내가 누구요? 좋은 소식 전하는 곤륜신객 청인 아니오?”
마운도 씁쓸함을 벗어던지고 웃었다.
“믿겠소.”
마운은 운청산과 청현자는 물론 젊은 제자들에게까지 두루 포권을 취해보이고 말머리를 돌렸다. 황량한 벌판을 따라 멀어지는
마운의 뒷모습은 그의 웃음과는 달리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청인자가 마운에게서 눈을 떼고 돌아섰을 때, 청현자가 다가와 물었다.
“사형!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지금까지는 따로 말씀을 안 하셔서 앞만 보고 왔습니다만---.”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이 주위를 살폈다. 왼쪽으로는 곤륜산맥의 동쪽 줄기들이 쉼 없이 뻗어있고, 오른쪽으로는 황량한
초원이었다.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오십여 리만 더 가면 격이목(格爾木)에 이른다. 거기서 물과 건량을 구해서 바로 시달목하(柴達木河)를 따라
도란현(都蘭縣)을 향해 동진해야 하지. 오백 리 길은 족히 될 것이니 처음부터 너무 힘 빼지 않는 게 좋아. 이제부터는
내가 앞장서서 속도를 조절하겠다.”
청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눈 주변의 청점을 씰룩이며 물었다.
“사숙. 서두르지 않고도 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청인자가 장난스럽게 눈을 치뜨고 말했다.
“오! 청안검객(靑眼劍客)께서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 보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시나 보군.”
푸른 반점의 제자가 얼굴을 붉히자 청인자가 빙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놈들이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도란현 근처의 사유하를 지나야 한다. 곡마래에서 그곳까지는 염호가 많아 돌아가야
할 길이 많다. 말을 타고 달린다 해도 이틀거리지. 허나 그것도 쉬지 않고 달렸을 때의 이야기. 우리가 비록 하루 늦게
출발했다 해도 밤을 도와 달린다면 반드시 앞길을 막을 수 있을 게다. 그러니 체력 안배들 잘 하고.”
젊은 제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청인자가 다시 한 번 웃어 보이고 먼저 몸을 날렸다. 그의 왼쪽으로 운청산이 따르고
청현자가 오른 쪽에 가 붙었다.
청인자가 선두에 섬으로서 보폭이 이 장 정도 줄어들자 젊은 제자들에게 여유가 생겼다. 그들은 일제히 앞서 가는 운청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배분은 말도 안 되게 사숙조지만, 나이는 그들보다 어리거나 비슷한지라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력을 가늠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모두가 다음을 기약하는 듯 눈길을 돌렸다. 오직 한 사람 청안검객이라
불렸던 송학(松鶴)만이 여전히 운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운청산의 몸놀림에서 남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운청산의 두 손 때문이었다.
검을 등에 메면 달릴 때 덜렁거려 등에 지속적인 자극이 생긴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메고 다니더라도 달릴 때는 손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앞서 달리고 있는 청인자와 청현자도 역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운청산만이 뒷짐을 쥔
채 검갑의 하단부를 쥐고 여유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송학은 잠시 뒤쳐지면서 검을 등에 멨다. 그리고 운청산처럼 뒷짐을 쥔 채 달려보았다. 그러나 몸놀림이 느려지고 어색해져서
결국 걸음걸이마저 흩어져 몇 발짝 가지 못한 채 다시 검을 손에 옮겨 들고 말았다.
송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운청산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저었다.
‘속단하기에는 이르지. 저렇게 습관들였다면 당연한 일이잖아.’
송학은 운청산이 평소에 검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