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79)

    

마운은 곤륜의 초입 돌계단 앞에 이르자마자 말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옷소매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까마득한 돌계단들을 올려다보았다. 

“삼천육백 개라 했었지? 에휴! 여기를 도대체 어떻게 올라가누?”

세상 누구도 마운을 무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마운 그가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운은 한때 곤륜의 장문 운상진인에게 

사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보상이었다. 한때 천하를 떠돌았던 운상자가 서녕부를 유랑할 때 마운의 아비가 비렁뱅이 같은 운상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것에 대한 답례였다.

당시의 마운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침에 부응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인연은 일 년 

뿐이었다. 나이가 문제였다. 이미 약관이 넘은 나이. 아무리 노력해도 굳은 뼈와 단련되지 않은 힘줄은 마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운은 자질을 보이고 운상자의 기명제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했다. 그는 오직 그가 배운 것만을 평생 갈고 닦아 

건강을 유지하고, 나아가서 그의 가업을 잇는데 보탬이 되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곤륜이 그의 사문이며 운상자가 그의 스승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곤륜의 이름에 누가 될까 

저어하여 곤륜속가라 자칭하지는 않았지만, 마운이야말로 곤륜에 약간이나마 경제적 보탬이 되는 세 명의 곤륜속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겉은 평범한 상인이면서 마음은 항상 무인인 마운은 쉰을 바라보는 지친 얼굴에 결의를 드리우고 아예 상의를 벗어 들었다.

“스승을 뵙는 일,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거늘, 이 다리가 부서진들 어찌 주저하리오?”

마운은 한 걸음에 여섯 계단씩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운의 나이는 그의 마음을 배반했다. 건강은 자랑해도 무공을 

자랑할 수 없는 그로서는 채 반도 오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빙빙 돌고 헛구역질이 나려 했다. 눈앞이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마운은 여전히 까마득하기만 한 남은 계단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크게 호흡하며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쓰다듬어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때였다. 계단의 좌측 숲에서 망태기를 사선으로 멘 청년이 기척도 없이 튀어나왔다. 청년은 마운을 발견하고서 무표정한 

얼굴로 목례해 보였다.  

마운은 쌩쌩한 젊음을 드러내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약관이나 지났을까. 너무 깊어 슬프게 느껴지는 눈빛과 이마의 굵은 

주름이 인상적이었다. 

마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청년의 얼굴을 벗어나 전신을 살폈다. 낡은 도포를 입었으되 속발을 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정식으로 도적에 오른 청년은 아닌 듯싶었다.

마운도 겨우 한숨 돌리고 청년에게 목례로 화답했다.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운을 지나쳐 계단 위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순간 마운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청년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이보게, 젊은이.” 

청년이 돌아섰다. 마운은 급히 말했다. 

“좀 도와주게나. 내 예전에는 문제없이 올랐는데, 이제는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구먼.”

마운은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청년은 마운의 표정이나 말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마운에게 

손을 내밀었을 따름이었다. 

마운은 체면불구하고 청년의 손을 잡았다. 청년은 마운의 손을 잡는 즉시 힘을 가하여 잡아당겼다. 

마운은 깜짝 놀랐다. 그저 부축이나 받아가려니 했었다. 그러나 마운의 작지 않은 몸은 이미 청년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이-이보게.”

마운은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청년의 신형이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드럽게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운은 한기를 느꼈다. 벗어 등에 진 포삼을 입고 싶었다. 그러나 청년의 신형은 한 번 땅을 짚기 전에 십수 개의 계단을 

오르고 있어 감히 멈춰 달라 말할 수 없었다.

마운은 과연 청년이 펼치고 있는 신법이 그가 알고 있는 비붕불명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비붕불명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가 본 적은 없지만 운룡대팔식은 이동에 중점을 둔 신법이 아니라 했다. 이토록 부드럽게 

움직일 수는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비붕불명치고는 지나치게 빠른 이동이었다. 그렇다고 대붕무영일 리도 없었다. 대붕무영이라면 그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애무하듯 흘러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마운이 아주 작은 의문에 대한 답을 궁리하는 동안 주변의 경관은 휙휙 바뀌었고 어느 순간인가 눈앞에서 더 이상의 

계단을 볼 수 없었다. 

청년의 신형이 멈춘 지도 모르게 멈춰 있었다. 마운은 전신을 옥죄던 한기가 누그러졌음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칠이 

벗겨진 낡은 산문 뒤로 한 때는 고색창연하다는 말이 어울렸을지도 모를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청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마운을 내려놓았다. 마운은 미처 내려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때 청년이 돌아서서 마운에게 건성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청년은 멍한 눈빛의 마운을 남겨둔 채로 돌아섰다. 마운이 정신을 차리고 청년에게 답례를 하려 했을 때 청년은 이미 태상궁의 

좌측 벽을 따라 사라져 버린 뒤였다.

“허! 바람 같은 젊은이로구먼.”

그때 마운의 전면 우측 전각에서 도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도사는 마운을 발견한 순간 눈에 이채를 띄었다가 곧 웃음기를 

드리우며 다가섰다.

“아니, 이게 누구요? 마형이 웬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왔소이까?”

마운도 도사를 알아보았다. 그보다 세 살이 어리나 굳이 항렬을 따지자면 사형이 되는 사람, 청인자였다. 마운은 청년의 일을 

잊고 금새 반색을 하며 포권을 취했다.

“오호라! 하는 일 없는 청인 도장 아니신가? 오랜만이오.”

청인자는 마운의 포권 쥔 두 손을 반갑게 감싸 쥐었다. 

“하는 일이 없다? 하기야 맞는 말이지. 나 아니면 누가 있어 마형을 마중 하겠소? 안 그래도 곧 하산하여 마형에게 손을 

벌리러 가려던 차에, 이렇게 직접 오셨습니다 그려.”

청인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순간 마운은 자신이 왜 곤륜까지 찾아왔는지를 떠올리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청인도장! 큰일 났소이다.”

청인자가 눈을 둥그렇게 치떴다. 

마운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곡마래에서 오는 길이오. 은담비 털을 구하러 갔었는데 마을이 완전히 거덜이 났더이다. 흑풍사(黑風社) 놈들이 휩쓸고 

간 모양이오. 십여 명의 청년들을 죽인 것은 물론이고 어린 처녀들과 젊은 아낙들마저 데리고 사라졌다 하오.”

흑풍사라 함은 청해성 북부에 기반을 둔 마적단이었다. 몽고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흑풍사는 주로 청해성 동부의 성시 

외곽을 노리며, 세력이 강성해질 때마다 성시를 넘어 감숙성(甘肅省) 서녕부(西寧府)까지 약탈을 일삼는 흉포한 무리들이었다.

“흑풍사가 틀림없소? 그들이 이곳 남부까지 내려온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인데---.”

청인자의 물음에 마운은 한 점 의문도 없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들은 바가 있소이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홍라교(紅喇敎)가 여러 교파들을 힘으로 누르고 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오. 그 

동안은 서로 물어뜯느라 백성들을 돌볼 여가가 없었으나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장족들을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흑풍사가 감히 장족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마다와 곡마래로 남하한 것이 아닌가 싶소. 그래도 설마 하여 나 또한 묻고 살피기를 

거듭했소이다. 틀림이 없었소. 검은 깃발하며 북쪽으로 난 말발굽 자국, 곡도에 난자당한 시신들, 거기다가 쉰이 넘는 

도적들이 대부분 몽골포를 입었다 하니 그들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겠소? 더구나 두목인 듯한 자가 독안의 칠척 거한이라 했소. 

그 자야 말로 독안혈랑(獨眼血狼)이라 불리는 흑풍사 사주의 둘째 아들 차카무르일 테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소?”

청인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언제 벌어진 일이오?”

“엊저녁의 일이었소. 새벽녘에 떠난 것 같소이다. 반 시진 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나도 청인 도장을 다시 못 볼 뻔 했소.”

청인자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필이면 곡마래인가? 어쨌든 여덟 시진 정도 차이니 잘하면 잡을 수 있겠구나.”

홀로 중얼거린 청인자가 고개를 들고 마운에게 말했다. 

“갑시다. 사부님께 고하고 바로 뒤쫓아 가야겠소. 내가 추격대를 모으는 동안 사부님께 상세히 고하도록 하시오.”

청인자와 마운은 종종걸음으로 태상궁으로 향했다. 

청인자는 싫다는 사제 청현은 물론이고 사형인 청학과 청우의 일곱 제자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불러 모았다. 거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학과 청우, 본인들은 달랐다. 

별 달리 할 일이 없어 마주앉아 차를 홀짝이던 두 사람이었다. 간만에 출타할 일이 생긴 터라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검을 

챙겨 들었다. 

청학자가 문득 생각난 듯 드문드문 회색빛이 감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음, 조카를 대동할 생각이냐?”

청인자는 문득 운청산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일단 말이나 꺼내보렵니다.”

청학자는 검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돌아앉았다. 청우자도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말부터 꺼내보고 안 간다면 다시 오게.”

청인자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태악도인에게 직접 사사한 

운청산 역시 자신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근 오십 년을 일로매진한 두 사람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리라. 운청산을 데려 가려면 

두 사람을 놔두고 가야한다 생각하니 전력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청인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인인 청인자가 생각하기로도 운청산이 사는 세상은 너무나 좁고 재미없었다. 청인자는 일단 운청산에게로 먼저 가보기로 

작정했다. 

청인자는 마음을 굳혔으면서도 방을 그냥 나서지 않았다. 

“사질들이 다쳐도 책임 못 집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순간 청우자가 움찔 하고서 슬며시 손가락 끝을 꼼질거려 검파의 구석을 짚었다. 그때 청학자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럴 운명이겠지.”

청우자가 슬며시 손을 탁자 밑으로 거두는 것을 보면서 청인자는 방을 나섰다. 

“쳇! 젊을 때는 호방한 척 들 하더니만, 이제 완전히 고리타분한 늙다리들의 본색들을 드러내시는구먼.”

방안에서 청학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들려. 이놈아! 너는 젊은 줄 아냐?”

청인자가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나 늙었어요. 그래서 난 일의 경중을 압니다. 껄끄럽다고 촌각을 다투는 일에 몸을 빼다니---.”

청학자가 소리쳤다. 

“너는 네 조카니까 그렇지. 그리고 너도 일의 경중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도대체 누가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난 자발적으로 가겠다는 사람에게만 부탁해요. 쳇! 배분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사실은 대수였다. 차라리 태악도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좋았으리라. 그랬다면 청인자가 자신과의 관계를 강조하여, 대충 막내 

사제나 자신의 제자로 들였으리라. 하지만 태악도인은 모습을 보였고, 운청산이 제자임을 밝혔다. 

운상자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자리를 떠넘기려 해도 받아주지 않는 첫째 제자 청학이 이미 환갑에 이른 

때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열아홉 살 소사숙이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고민을 거듭하던 운상자는 문득 운청산에게 도인이 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운청산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운상자는 그때서야 겨우 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을 속가제자로 받아들였다. 

배분으로야 소사숙일 수밖에 없지만 속가제자라면 엄격한 도가의 항렬에서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으니, 고민을 반으로 줄인 

격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이 곤륜제자들로부터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속가제자라 하나 엄연히 

태악도인의 제자였다. 운상자를 제외하고는 그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은 없었으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문을 나선 청인자는 자신도 경중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청인자는 믿는 바가 있었다.

운청산이 귀곡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것도 벌써 사 년이 지났다. 그 사 년 동안 운청산은 단 한 번도 곤륜의 삼천육백 

계단을 다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산에서 살았고 혼자 살았다. 

그가 처음부터 그리할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경의상을 찾아갈 

것이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인자의 단 한 마디가 그를 산에 묶어 놓았다. 

“네 할머니는 팔 년 전에 돌아가셨다.”

슬픔이 하늘에 닿은 그날, 운청산은 끝내 울지 않았다. 한 동안 하늘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너무나 환해서 오히려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을 따름이었다. 그날 운청산은 곤륜산에서 평생을 살리라 작정했다. 

그날부터 그는 곧 곤륜의 경내를 떠나 작은 신당에서 홀로 살기 시작했다. 청인자가 동현당에서 자신과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운청산은 거절했다. 그라고 청인자와 함께 사는 것이 싫을 까닭이 없었지만, 곤륜파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것이 여간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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