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님. 밤 새워 술 마시면 전 죽습니다. 주량 소주 반병. -.-;;;
이영인님. 무림향 작가들 모두가 전업작가들이니 곧 책으로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thedasreich님.(영어와 독어의 합성 같은데 무슨 뜻이죠?)
노통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주름을 만든 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는 표현이고, 한 줄
이상이면 너무 늙어 보일까 봐 한 줄로 했을 따름이지요.
하운님. 틈새는 맞춤법에 맞는 표현 같구요, 금새는 맞춤법 상으로는 틀렸지만 치면 그렇게 되서 그냥 씁니다. 뜻 모르게
끌린다고나 할까요?^^;;; 그렇군요. 축간이라니...-.-
신출귀몰님.
여음청양(女陰淸陽) 해야 음양이 어울리고, 남양탁음(南陽濁陰)해야 역시 음양이 어울립니다. 이걸 쓰면서 생각한 것인데,
여음한데 탁음이면 남자 같을 것이고, 남양한데 청음이면 여자 같지 않을까 하네요. 음음이 과하여 양으로 돌고, 양양이
지나쳐 음으로 돈다는...(잘 모르고 하는 궤변입니다.-.-;;;) 그리고 꼭 누구를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
냉온정수기로 물을 먹을 때, 반드시 뜨거운 물을 먼저 따르고 그 위로 찬물을 부어 먹습니다. 뜨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오니 음양이 교차할 수 있습니다. 반대라면 물 미지근해지는 건 같아도 그 기운이 섞이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제 말이 아니라 말 잘하는 한의사 금오 김홍경 선생 말입니다. 음양탕이라 불렀지요, 아마.(수승화강과 같은
이치겠지요.)
쓸데없는 잡설이었습니다.^^;;;;
bsh6228님. 적절한 지적입니다. 무시무시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능력을 알 수 없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썼습니다만,
아무래도 어색했지요. 괴물투수라는 표현 쓰지 않습니까? 조금 더 나은 표현을 찾아보지요. 누구 적절하다 싶은 표현 있으면
말씀해 주시구요.
동사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안됩니다. 서장에 해당되는 부분은 책으로 나올 원고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책과 연재본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오스님, 불어로 밤님. 간만에 흔적 남기셨네요. 하시는 사업 잘들 되시죠? ^^
운청산은 무공만 적당히 강한 백지 인간으로 출곡해야 합니다. 사람을 배우고 살아가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 운청산에게 주어진
개인적 과제라고 해야 할까요? 오늘 연재 분과 삼 권 초반부를 읽은 후라면 대충은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도대체 청산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허허허! 없구나. 부질없는 욕심이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다. 세상에 하등
도움이 아니 되는 것들, 그것들이 사라진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청산을 붙잡고 있었던가? 끝까지 가르치지 않으면 그야말로
잡기에 불과한 것. 차라리 반선에게 맡겼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되었을 것인데---.’
귀곡산인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밤이 지나고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다.
운청산은 ‘오늘은’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귀부 안으로 들어섰다. 운청산은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귀곡산인에게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귀곡산인이 눈을 떴다. 그리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맞은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운청산은 귀곡산인의 눈길이 닿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귀곡산인이 말없이 한참이나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곡산인은 낮은 한숨을 먼저 흘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가 귀곡에 들어온 지 몇 해나 되었지?”
“올해로 십일 년째입니다.”
“하! 벌써? 그래, 그렇구나. 그 동안 힘들었을 텐데 불평 없이 잘 따라 주었다. 나 또한 너를 가르치면서 그 동안
미진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정리하게 되어 의미가 컸던 세월이구나.”
운청산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치 이별을 하는 듯한 이야기도 의문스러웠지만 귀곡산인이 이토록 감상적인 면모를 보인
것도 처음인 탓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또한 기대감에 가득 찼다. 드디어 그가 오로지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귀곡산인이 다시 말했다.
“내가 분명히 약속했었다. 네 어미와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준다고.”
운청산의 두 눈이 기쁨과 갈망으로 반짝였다. 그때 귀곡산인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평생 약속이란 것을 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한 후에는 지키지 못한 적이 없었건만, 말년에 이르러 식언(食言)을
하게 될 줄이야.”
기쁨이 차올랐던 운청산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처음 듣는 운청산의 떨리는 목소리에 귀곡진인은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 판단했구나. 곡의 영기와 금액고의 효능에 힘입었으니 가르치다 보면 선근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여겼거늘, 연이
닿지 않는다. 미안하구나.”
운청산은 귀곡산인의 감은 눈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귀곡 할아버님! 게을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더 노력하겠습니다. 하라시는 것은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귀곡산인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 노력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일 뿐.”
운청산이 도리질치며 부르짖었다.
“아닙니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넌 태악이 평생 곡을 벗어나지 않았던 이유를 듣지 못했느냐? 그의 자질이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니라. 다만 선연이
닿지 않았을 뿐. 네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구나. 안됐다만 반선이 돌아오거든 나가거라.”
귀곡산인은 운청산의 물기 오른 눈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운청산은 무심함을 가장한 귀곡산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운청산은 욕심이 없는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욕심낼 만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의
어린 시절은 오로지 혼령들과의 사투로 점철되어 있어서 다른 무엇에 관심을 돌릴 만한 여가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그가 평생토록 욕심을 부렸던 것이 있다면 단 두 가지뿐이었다. 태양을 가지고 싶다는 것과 어미와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태양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그가 가진 욕구가 있다면 단 한 가지뿐이었고, 지금껏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런데 그것마저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운청산은 눈을 뜨고 귀곡산인의 무심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너무하십니다. 진정 너무하십니다.”
운청산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귀곡산인은 운청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눈을 떴다.
“허! 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았건만 이제 와서 아이를 상대로---. 호연! 넌 어찌 생각하느냐? 잘못 생각한 것일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호연에게 질문을 다 했을까. 귀곡산인은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 놓고 수련을 금제한 것은 호연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운청산은 호연과 같은 미물이 아니건만, 또 다시 같은
처분을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귀곡산인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운청산을 가르친 것은 그가 산인지상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 미지의 결과가
나오게 될 가능성이 일할이라도 있는 이상 포기하는 것이 옳았다.
비록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세상을 떠나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삶의 방식을 택한 자신의 판단기준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청산은 괜찮으리라. 내게 배운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태악으로부터 받은 것은 청산을 굳세게 만들어 주리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지 않느냐, 호연?”
호연은 또 다른 귀곡산인의 뜻 모를 질문에 십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동부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결국에는 통통거리며 운청산의 뒤를 좇았다.
귀곡산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악이 내 뜻을 이해해 주면 좋겠는데---.”
운청산은 두 시진 동안이나 멍한 얼굴로 온천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연이 옆에 와서 배와 다리 사이에 머리를 디밀고
비벼대도 쓰다듬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태악도인과의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처음으로 동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멍청하게 온천 연못에 비친 얼굴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태악도인이 결국 참지 못하고 동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청산!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하느냐?”
운청산은 태악도인을 흘끔 바라보고 고개를 젓다가 다시 연못으로 얼굴을 숙였다. 태악도인이 단번에 신형을 날려 운청산의 곁에
내려섰다.
“이놈! 무슨 뜻이냐?”
운청산은 고개를 숙인 채로 낮게 말했다.
“의미가 없습니다.”
“무어라? 의미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외쳤던 태악도인은 문득 생각이 난 듯 귀부를 흘끔 바라보고서 다시 말했다.
“귀곡 형님이 무슨 말씀하시더냐?”
운청산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들은 것을 말했다. 태악도인은 노화 가득한 눈빛으로 귀부를 노려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심통 맞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했단 말인가? 하나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허!
이런 일이---.’
잠시 생각에 잠겼던 태악도인이 말했다.
“귀곡형님과의 연은 끊어졌다 하여도 나와의 연은 그대로다. 부주파(符呪派)나 검파(劍派)가 가는 길은 달라도 뜻하는 바는
결국 같은 것. 귀곡 형님과 함께 뜻을 이룰 수 없다면 내가 이루어 주리라. 나는 비록 실패했으나 그 길을 알려줄 수 있고
결국 너는 검선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실망하지 말고 가자.”
나름대로 부드럽게 이야기 했다. 그러나 운청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했던 것은 선인의 길이 아니라 오직 어머니와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악 할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귀곡
할아버님이 필요하다 하시어 했던 것. 이제 목적을 잃었습니다.”
“이-이놈! 겨우 그런 마음가짐으로 수련에 임했단 말이더냐? 그러고도 네 놈이---.”
버럭 화를 내던 태악도인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노화를 삭였다. 입장이 달랐을 뿐, 두 사람의 시작은 모두 귀곡산인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떠올린 것이었다.
“허나 네가 수련에 임하는 자세는 억지 배움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그것을 부인하려느냐?”
“부인하지 않습니다. 괴롭고도 즐거웠습니다. 맞고 넘어지고 깨질 때는 아프고 힘들고 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뛰고 날고
바위를 부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당치도 않습니다만 언젠가는 반드시 태악 할아버님을 이겨
보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나---.”
운청산은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태악도인은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뜻이리라.
태악도인은 더 수그려진 운청산의 뒷머리를 내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 느낀
탓이었다. 태악도인은 다시 귀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내젓고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이 바뀌거든 찾아오너라.”
태악도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는 동부 안으로 사라졌고, 운청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흘이 지났다. 그러나 운청산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 귀부 밖으로 나오는 귀곡산인도 그를 부르지는 않았고
태악도인은 아예 동부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운청산은 가끔 반선 노인의 집에 들어가 잠을 잤을 뿐, 옥소조차 불지 않고 연못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예뻐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호연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 운청산이 한 일의 전부였다.
그리고 닷새째가 되는 날, 태악도인이 마침내 동부 밖으로 나섰다.
태악도인은 운청산을 향해 오다가 귀부를 노려보며 비웃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내 비록 형님이 청산에게 거짓을 말했음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모든 것이 형님 뜻대로 된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태악도인이 연못에 이르렀다. 운청산은 기척을 느끼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들어오너라.”
예의 무심한 눈빛과 어조였다. 운청산은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서는 태악도인을 따랐다. 동부 안에 들어선 태악도인은
운청산이 늘 운공하던 그 자리에 먼저 앉고 운청산에게 앉기를 명했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면 나 또한 더 이상 강권하지 않겠다. 하나 너는 내게 있어 단 하나 뿐인 제자라 할 것이다.
그런 너를 불안한 심정으로 어찌 세상에 내보내겠느냐? 오늘 하루다. 오늘 하루만 예전의 그 마음가짐으로 수련에 임해다오.
그리하면 네 뜻대로 하도록 놓아주마. 어떠냐?”
운청산은 놀란 눈으로 태악도인을 응시했다. 칠년 동안 겪었던 태악도인이었다. 그러나 오늘 같이 온화한 어조로 말한 적은
없었다. 거기다 조건은 또 어떤가. 안그래도 귀곡산인은 원망스러웠지만 태악도인에게는 죄스러웠던 운청산이었다.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운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악도인이 말했다.
“구전태허선공을 천천히 운기하여 마음을 가라앉혀라. 오늘의 수련의 한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으니 다른 생각은 모두 잊고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을 이루어라. 되었다 싶으면 말하고.”
태악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운청산으로부터 멀어졌다. 운청산은 태악도인의 말대로 구전태허선공을 끌어올렸다. 늘 행하던 것을
오일 동안이나 하지 않았으니 태악도인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이 겹쳐 쉽게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다.
한 시진이 흘렀다. 태악도인은 단 한 마디 호통도 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수십가지 사념 속에서 문득 처음 귀곡에 들어왔던 때가 떠올랐다. 운청산은 자신을 보았다. 청인자의 가슴에 머리를 찍으며
다섯 발짝만 뛰어도 숨을 헐떡거리던 그때의 그 병약한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난 달라졌다. 분명히 달라졌다. 할머니가 뭐라 하셨던가? 세상을 활보하라 하셨다. 그것만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하셨다. 이제 난 그리 할 수 있으리라. 이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운청산은 일시에 모든 사념들을 날려버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일단 전신에 흩어져 있던 기를 끌어 모으자 운청산의 단전에는
예전과 다름없는 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운청산은 쉬지 않는 듯 부드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평소보다 짧게 마시고 평소보다 빨리 내뱉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의
길이를 조금씩 늘려 잡았다.
들끓던 기운들이 빠르고 세차고 안정적으로 전신 구석구석을 통과하고 단전으로 돌아왔다. 한 호흡에 다섯 번 오가던 기운이
운청산이 호흡을 늘임으로서 일곱 번으로 늘었다. 운청산은 애써 늘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던 맥들이 힘차게 박동하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호흡조차 잊었다가 차분히 숨을 내쉬고 눈을 떴다.
운공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악도인은 차가운 한성이 반짝이는 듯한 운청산의 눈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줄탁동시(茁啄同時)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병아리 스스로가 안에서 알을 긋는 것을 줄이라고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쫒는 것을 탁이라 하여
줄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출세(出世)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선가의 수도인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과 선사의
인도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새기면 될 것입니다.”
“잘 알고 있구나. 이제 네가 다시 호흡에 몰입하게 되면, 외부에서 변화가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라.
깨달음이라 칭하면 넘치겠으나 이를 줄탁동시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힘을 받아 평소대로 운공하다가 이끌림이 있거든
편안하게 따라가면 된다. 시작하여라.”
운청산은 다시 조용히 눈을 감고 운공에 몰입했다. 이미 안정을 찾은 터라 쉽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명문으로부터 태악도인의 기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드럽다가 점차 세차졌다.
이미 주의를 받은 터라 운청산은 당황하지 않고 태악도인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한 호흡에 일곱 번 오가던 기운들이 여덟으로
늘고 다시 아홉으로 늘었다. 익숙한 힘이 아니어서 몸이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악도인의 기운 또한 구전태허신공의
그것, 점차 융화되어 어느새 안정적으로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운청산은 늘어난 기운에 적응하기 위해 쉬지 않고 호흡에 몰입했다. 그때 명문으로 들어오던 기운이 사라지고 대신 부드러운
기운이 기의 흐름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운청산은 의식을 집중하여 그 이끌림에 순응했다. 세찬 기운은 운청산의 기로를 벗어나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을 시작으로
전신십이경락(全身十二經絡)을 두드리고 깨고 뚫어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팔맥(八脈)에까지 부딪혀갔다.
힘이 모자라면 원래의 기로 돌아가서 다시 기운을 차리고 또 부딪히고, 모자라면 또 돌아갔다가 다시 부딪혔다. 그리고 결국
팔맥마저 관통했다.
일순간 머리 속에 폭발이 있었다. 머리 속을 막고 있던 거대한 무엇이 터져나가면서 하얀 세상을 보았다. 잠간의 어지러움이
끝나고 정신이 돌아왔다.
운청산은 날 것만 같았다. 전신을 시원하고 상쾌해지면서 몸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끄는 기운이
사라졌다.
운청산은 서서히 호흡을 내뱉고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운청산은 주변이 그렇게 밝게 보일 줄 몰라 놀랐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유한 눈을 본 사람은 더욱 크게 놀랐으리라.
태악도인이 운청산의 앞으로 돌아와 마주앉았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이제 넌 오혈(五穴)을 통하여 천지자연의 기운을 취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가
흐를 것이고 뜻이 있으면 기운이 뻗히리라. 연신환허의 초입에 이른 것이고 곧 삼화취정(三花取精)의 경지에 닿으리라. 거기에
꾸준함을 더한다면 비약이 있으리라. 허나 뜻하지 않는 곳에 마가 끼는 법. 마가 추하게 다가온다 생각지 마라.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다가서리라. 그것을 넘어서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 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넘어섰다 생각했으나 결국 얻지 못했다. 대를 이어 네가 이루어 주길 바란다. 가보아라.”
이미 수없이 들었던 경지였다. 그러나 실제로 얻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던 경지이기도 했다. 운청산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찍었다. 대가없이 주기만 하는 태악도인에게 운청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절을 마친 운청산은 조용히 일어서서 동부 밖으로 향했다. 그때 태악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르친 것을 버리지 마라. 가지고 있다가 마음이 원하거든 끝을 보아다오. 그리고 내게 보여 다오.”
운청산은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부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태악도인은 피곤한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리고 나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운청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못가에 누워 시간을 죽였다. 그러나 호연은 변화를 느낀 듯 다른
때보다 더 운청산에게 달라붙었다.
“크흐흐! 청산아! 내가 왔다.”
운청산은 벌떡 일어서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과연 거기에 바랑을 맨 반선과 등짐을 바리바리 짊어진 청인자가
환한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이년 만에 다시 보는 친인들이었다. 운청산은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채 반도 못가서 속도를
떨어뜨렸다.
‘반선이 돌아오면 나가거라.’
귀곡의 주인이 한 말이었다. 만나자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서글프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던 반선과 청인자는 운청산의 속력이 떨어지고 웃음마저 반가움 이외의 의미가 느껴지자 의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운청산이 두 사람 앞에 이르러 허리를 접었다.
“두 분, 여로 편안하셨습니까?”
반선노인이 의아함을 떨쳐버리고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문득 운청산의 위아래를 연달아 훑어보면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응? 그 동안 큰 진전을 보았구나. 날카롭던 기파가 부드럽게 누그러졌어.”
반선의 말에 청인자는 마냥 좋기만 한지 싱글벙글 웃었다. 반선은 청인자의 등짐에서 고색이 완연한 검을 뽑아들어 운청산에게
내밀었다. 검은색 물소 가죽으로 된 검갑과 푸른 기운의 녹이 은은한 멋을 드러내는 검병 그리고 손때 묻은 얇은 가죽으로 된
검파가 돋보이는 삼척 반이 조금 넘는 장검이었다.
“옛다. 선물이다. 특별히 신검이라 할 것은 없으나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 같구나. 대장간에 들러 잘 벼려 왔으니
이것으로 태악의 수염이라도 잘라버려라.”
청인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쳇! 발견은 내가 했는데 생색은---.”
“시끄럽다, 이놈! 네 놈이 이걸 살 능력이 있었더냐?”
반선이 청인자에게 눈을 부라렸다가 다시 운청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운청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받고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반선 할아버지.”
순간 반선이 다시 의아한 눈빛으로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더냐? 엉?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네가 왜 여기 나와 있느냐?”
그때였다. 미풍이 불고 귀곡산인이 어느새 운청산의 옆에 나타났다.
“그래, 소득은 좀 있었는가?”
반선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약재 때문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게야. 헌데 돌아다니다 보니 그것도 재미가 쏠쏠하구먼. 버릇 들어 버렸어.”
고개를 끄덕이던 귀곡산인이 힐끔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귀곡산인은 운청산의 눈을 바라본 순간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즉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미간을 찌푸리면서 태악도인의 동부를 응시했다.
‘태악이 끝내---.’
귀곡산인은 다시 반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차분히 듣기로 하세. 청산! 따라오너라.”
귀곡산인이 귀부로 돌아섰다. 엿새 만에 운청산과 마주앉은 귀곡산인은 자신을 외면하는 운청산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을 어겼으니 유구무언(有口無言)이어야 옳다만---.”
운청산이 처음으로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릴 적의 저를 기억합니다. 다섯 발짝 만 뛰어도 숨을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혼귀들에게 휩싸여 편히 잔 적이
없는 접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어머니와 이야기 할 수 없다하셨을 때 원망도 했습니다만, 며칠 생각해 보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어찌 할아버지를 원망하겠습니까.”
귀곡산인이 눈가에 잔주름이 지면서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나. 나 역시 며칠을 고심했었다. 생각해 보니 약속의 반은 지킬 수 있을 것 같구나.”
운청산이 눈을 치떴다. 귀곡산인이 말했다.
“네 어미와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찌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간단한 것일 수도 있으나 사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얻어야 행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하겠느냐? 너와 나의 인연이 다한 것을. 하나 재고해 보니 내가 중간에 있으면 적어도
이야기를 할 수는 있으니 아예 약속을 어길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오늘 하루뿐이구나. 이해해 주겠느냐?”
운청산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곡산인이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눕기를 명하고 호연을 쫓아냈다. 그리고 공간을
봉인하고 눈을 붉게 물들였다.
“잠시 자게 될 것이다. 깨면 그때는 네 어미를 보게 될 것이다. 자거라.”
귀곡산인은 운청산의 수혈을 짚었다. 귀곡산인의 손바닥이 붉어지고 그의 입에서 굵고 낮으며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운청산의
정수리를 쓰다듬던 귀곡산인의 붉은 손이 머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얀 환영이 쑥 딸려 올라왔다.
“지낼만 한가?”
물론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며 운청산의 정수리를 밟고 서있는 이청수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청산과 함께 있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청산을 편히 돌보아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르신!”
귀곡산인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귀찮게만 여기는 늙은이지만, 청산은 다르이.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정인가 보네.”
귀곡산인은 이어서 운청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진전이 과하네. 이제 본격적으로 가르친다면 귀신과 통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 속에서도 귀신의 존재를 느끼고 귀신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네. 헌데도 난 그 아이가 장차 어찌 클지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네. 자네의 오라비가 되는 청인이라면 한
눈에 보인다네. 약간의 풍상을 격기야 하겠지만 천수를 누리고 편안히 죽을 운명일세. 그러나 청산의 앞길은
변화난측(變化難測)일세. 오직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렁거릴 뿐이야. 청산이 어찌 될까 두려워. 그래서 자네와 직접 말할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을 어기려 하네.”
이청수는 환히 웃었다.
“소녀가 어찌 어르신의 심려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만, 소녀의 소견 역시 어르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일부 겪은 바
있기에 잘 압니다. 귀신을 보고 통하고 부린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청산이 제 뜻대로 살기를 바랍니다만 이번
일은 어르신 뜻대로 하소서. 청산이 사람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뜻을 알아주어서 고맙네. 자넨 어쩔 텐가? 그대로 청산과 함께 지내려나? 아니면 귀천하시려나?”
“제가 청산과 함께 있어도 청산에게 탈이 없을까요?”
“그건 괜찮네. 자네 역시 신명으로 화한지 오래라 적어도 이백에서 사백 년 정도는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다네. 다만 내생을
늦추는 것은 그리 권할 만한 일이 아니지.”
이청수는 날 것 같은 몸놀림으로 귀곡산인에게 절하고 다시 말했다.
“청산의 삶이 평온해지는 대로 기회를 잡아 귀천토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 청산에게 방해되지 않는 곳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귀곡산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곧 청산을 깨울 것이고 자네 오라비도 부를 것이네. 그때 다시 보기로 하지.”
귀곡산인이 다시 주문을 외우자 이청수가 운청산의 정수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귀곡산인이 또 다시 주문을 외우고 정수리를
훑었다가 들어올렸다. 그러자 운청산의 정수리에서 희뿌연 기운이 뭉클 솟아오르더니 곧 여덟 개의 희뿌연 인영들로 변하여 펼친
병풍처럼 늘어섰다.
바로 운청산의 숙부들, 곧 운현산 등의 여덟 혼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운청산이 익히 알고 있던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비록 이청수와 같은 서광은 드리우지 않았지만 피를 흘리고 내장을 드러내는 등의 음침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이들 좋아졌구먼.”
운현산 등이 귀곡산인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웃으며 포권지례를 했다.
“모두가 노신선 덕분입니다. 이제야 우리가 산 사람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신명으로 느껴져. 그 동안 청산의 척수에 숨어사느라 갑갑하지 않았던가?”
운현산이 대표로 말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우리는 모두 여덟입니다. 본성을 찾아가니 가히 견디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귀곡산인이 여덟 혼령을 일일이 살피고서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은 이도 있는 것 같구먼.”
귀곡산인의 눈이 운명산에게 머무르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천성이 갑갑한 것을 싫어해서---.”
고개를 끄덕인 귀곡산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청산이 천수를 다하기 전에는 자네들을 풀어줄 방도가 없어. 알고들 있지.”
여덟이 한결같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부탁이 있네.”
여덟이 일시에 포권을 취했다.
“하명하소서.”
귀곡산인은 이청수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또한 무공 방면의 진전도 이야기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자네들을 청산의 백회로 옮겨주겠네. 거기라면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순간 운현산 등이 심각한 얼굴로 귀곡산인을 보았다. 귀곡산인이 표정을 잃고 말했다.
“아하! 자네들도 무림인이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하나 자네들로 인해 청산에게 문제가 생길 것은 없어. 기로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네들 존재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게야.”
운현산 등이 얼굴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곡산인이 말했다.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그곳에 머물면서 청산이 장차 빨아 당길 하늘의 기운을 막아달라는 것이네.”
운현산이 말했다.
“그 말씀은 양신을 키우지 못하게 기운을 훔치라는---?”
“대충 그렇지. 키우지 못하게 막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진전을 더디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네. 청산은 아직 어리네. 백지와
같지. 경험하는 것에 따라 장차 어찌 변할지 몰라. 자네들이 보기에 이제는 안심이다 싶을 때까지만 그리 해주면 되네.”
운현산이 말했다.
“꼭 그리해야만 합니까? 데리고 있으면서 득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귀곡산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이 신선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어서 그리 말하는 것이네. 신선지경에 이르렀다고 반드시 선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일세. 천선(天仙)이라면 인간이 부처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나, 지선의 경우는 천성을 그대로 지니네. 자네들도 익히
알다시피, 이철괴는 신선이 되고서도 장난이 심하여 태상노군께 자주 꾸중을 들었고, 여동빈 역시 신선이 되고서도 끝내 호색한
기질을 벗지 못했네. 또한 그들끼리도 자주 다퉜으니 그로 인해 인세에 미친 폐해는 못된 인간이 벌이는 악행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이 사실이야. 지선이 되고도 그 모양인데 중도에 마경(魔境)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큰일이지.
그 정도만 되더라도 노부는 감히 청산을 제어하지 못해. 그래서 두려운 것이지.”
운현산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노신선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청산에게는 진전을 늦추는 일일 따름이지만 자네들은 청산 어미처럼 완전히 신명을 되찾을 걸세. 그리되면 청산의 몸속에서
지내는 것도 더 편안해지겠지.”
운청산이 눈을 뜨고 보니 그의 주위에는 모두 세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곡산인과 청인자 그리고 이청수였다.
청인자는 이미 귀곡산인의 중계로 이청수와 대화를 나눈 듯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는데 입가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이청수가 실 풀린 연처럼 운청산의 정수리에서 풀려나온 한 줄기 기운에 의지하여 허공을 부유해서 운청산의 얼굴 앞으로 멈춰
섰다.
운청산은 전보다 또렷하고 밝은 이청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반대로 이청수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자
그녀의 환신(幻身)에서 흘러나온 은은한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 무엇을 묻고 싶으냐?”
귀곡산인이 물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입을 떼지 못했다. 이청수로부터 눈도 떼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이
수십만 개 쌓여 있었건만, 막상 눈앞에서 실제와 같은 그 포근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귀곡산인은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청인자로부터 이미 경험했던 일이었다. 청인자도 이청수의 평안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기쁨의 눈물만 흘릴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직 한 마디씩, 사는 동안 행복했냐는 물음과 그랬다는 대답만 오갔을
따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운청산이 눈물을 닦고 억지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내 안에 계시면서 불편하지 않으신가, 여쭤주십시오.”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낮고 탁한 음성을 흘렸다. 이청수의 눈길이 잠시 귀곡산인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운청산에게로
돌아왔다.
“지극히 평온하다고 말하는구나.”
운청산은 그때서야 편안하게 웃었고 다시 한참이나 이청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버지와는 행복했었냐고 여쭤주십시오.”
귀곡산인이 다시 중얼거리고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어미에게는 최고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는구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네게는 왜 그렇게 무심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는구나.”
“대신 할머니가 사랑해주셨으니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씀 해 주시지요.”
귀곡산인이 그대로 전하고 다시 말했다.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니 기회가 되면 반드시 찾아가보라 하는구나.”
운청산은 고개를 젓고 싶었다. 그러나 슬퍼할까 두려워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이청수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청수가 다시 허공을 부유해 운청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운청산의 얼굴을 안았다. 감촉이
느껴질 리 없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이청수가 볼 수 있는 곳으로 물러섰다. 운청산이 말했다.
“내게 하실 말씀이 있는지 여쭤주십시오.”
귀곡산인이 전했다.
“혹시 세상에 나가거든 반드시 토가족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전하라 했다. 특히 상초소이 가족과 느안카이 가족에게 성의를
다하라 했다. 그리고 자기처럼 홀로 세상을 떠나 살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달라고 하는구나.”
운청산은 이번만큼은 달리 귀곡산인을 통하지 않았다. 이청수에게 직접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이청수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곤륜장문 운상진인은 대낮에 날벼락을 맞았다. 안그래도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장문인실의 문짝이 벌컥 열리면서 낯선 도인
하나가 들어섰다.
나이도 별 차이 안나게 생겼는데, 곤륜에서 그것도 지존의 방에서 도인은 대뜸 반말을 토했다.
“오랜만이구나.”
운상진인은 멍한 눈으로 도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라는 말처럼 낯설지 만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운상! 네 녀석이 장문인이 되다니, 곤륜도 끝장났구나.”
도인이 방안으로 한발 넘어서면서 말했다. 운상진인은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몰락했다하더라도 일파의 지존이었다. 그런 사람의
도호를 함부로 부르고 곤륜의 장래마저 단정 짓는 것은 실례의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운상진인은 벌떡 일어나 노화를 터뜨리려 했다. 바로 그때 도인이 먼저 말했다.
“나, 태악이다.”
운상진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태악도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악? 태악! 악!”
운상진인은 절로 터져 나온 비명을 손을 들어 막아내고서 다시 한번 태악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급히 허리를
접었다.
“소질이 사숙을 뵙습니다. 원시천존!”
“거기서 도호는 왜 나오지?”
“그, 그냥! 그런데 지금껏 어디서 지내셨습니까?”
운상진인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근처에 있었다.”
태악도인은 간단히 대답하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들어들 오너라.”
두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청인자와 운청산이었다. 운상진인은 청인자에게 “왜 네가 사숙과 함께 있느냐”는 질문을 눈으로
던지고 대답도 듣지 않고서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그때 태악도인이 말했다.
“저 아이, 내가 가르쳤다. 잘 부탁한다. 그럼, 난 간다.”
태악도인은 운상진인의 “저, 저, 저”하는 소리를 등으로 듣고 사라져 버렸다. 운상진인은 멍한 눈으로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고 나서 운상진인은 운청산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운상진인은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의 귀에는 아직도 태악도인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내가 가르쳤다? 그럼 저 아이가 사제뻘 된단 말인가?’
운상진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어느새 앞에 앉아있는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청인자가 운청산에게 말했다.
“청산! 너도 여기 앉아라.”
운상진인은 눈을 뚱그렇게 뜨고 청인자와 운청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야? 내게 사제뻘 되는 녀석에게 청인이 저리 대한다?’
운상진인은 생각을 멈추고 물었다.
“청인! 그 아이를 아느냐?”
청인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예전에 말씀 드렸던 제 조칸데요.”
운상진인은 골치가 아파 눈을 감았다.
삼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