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79)

   

 반선노인이 곡에 있는 동안은 그래도 편했다. 반선노인은 이해하기 힘든 인체와 의약에 대해서 가르치면서도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부담을 주지 않았기에, 운청산에게 있어서는 그와의 시간이 휴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반선노인은 겨우 반년을 머물고 

 나서 청인자와 함께 다시 떠나버렸다.

 운청산의 하루하루는 점점 힘겨워졌다. 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많다고 할 수 없는 세 시진의 

 수면에서 깨어나면 바로 귀곡산인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한 시진 정도가 지나면 태악도인이 그를 끌고 가고, 늦은 오후가 되면 다시 귀곡산인에게 맡겨졌다. 귀곡산인과 함께 있는 

 동안은 정신이 시달리고, 태악도인과 함께 있는 동안은 육체가 고달팠다. 

 거기에 더해진 식욕의 절제 또한 고통이었다. 운청산이 비록 식탐이 강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운가에 있는 동안 경의상 

 덕택에 진미를 일상식으로 먹었다. 그러나 귀곡에 들어온 이후로 그가 먹는 것은 오직 벽곡단 뿐이었다. 

 귀곡산인 등 세 사람이야 식탐을 죄악시하는 도가의 법도에 익숙한 도인이며 어른들이니 문제가 안된다 하더라도 운청산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청인자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과 과자들을 가져올 때가 있었지만, 귀곡산인의 제지로 

 먹지 못했었다. 

 벽곡단 속에는 허기를 메울 정도의 쌀과 찹쌀은 물론 영양을 고려한 약재들이 고루 들었으니 굳이 세상의 것을 먹어 입맛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운청산은 때때로 경의상이 먹여주던 음식들이 떠올라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청산은 귀곡산인 등의 지시에 잘 따르고 있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이청수와의 대화를 위해서였다. 

 운청산은 오직 그날을 하루라도 빨리 맞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태악도인의 동부 안에서 기이한 박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태악도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고 운청산은 

 태악도인의 사방을 종횡하며 손을 뻗었다. 

 연달아 내뻗고 긁고 후려치는 것이 제법 빨라서 일시지간이지만 잔상이 남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태악도인, 두 손만 

 움직여 막고 밀어내고 내쳐 일수의 접근도 불허하고 있었다. 

 운청산이 횡으로 휘돌아 태악도인의 뒷덜미를 후려치는 순간 태악도인은 목뒤로 왼손을 뻗어 운청산의 손을 튕겨냈다. 그 순간 

 운청산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태악도인의 머리를 뛰어넘으면서 두 발로 태악도인의 얼굴을 찍었다. 

 태악도인이 입술을 씰룩이며 오른손바닥으로 두발을 모두 잡아 앞으로 내던졌다. 운청산은 두 손부터 바닥에 대고 한바퀴 

 굴렀다가 다시 일어났다. 

 운청산의 가쁜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태악도인의 두 눈은 차가웠다. 

 “용은 잠자고 범은 늙었구나. 발톱도 없는 것이 뛰지도 못해. 왜? 네 녀석의 용호풍운조로 내가 다칠까봐 사정을 

 운청산의 가슴 기복이 줄어들면서 가쁜 숨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때 태악도인이 다시 말했다. 

 “안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밖으로 발할 수 없는 법. 뜻이 없고 기세가 없다. 그저 배운 대로 손발만 내치는구나. 

 생각하여라. 뜻이 이르고 기세가 따르며 손발이 닿는다. 뜻과 기세와 신체가 모두 하나 되고 다시 그것이 무궁한 변화를 이룰 

 때야 비로소 진정한 법을 얻은 것. 다시.”

 운청산이 쇄도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일장을 건너뛰어 여섯 번이나 연이어 손바닥을 내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태악도인의 오른손도 움직였다. 

 부드럽게 흔들린 태악도인의 손바닥이 상반신을 후려치는 운청산의 손바닥들을 다섯 차례 막아내고 여섯 번째마저 막아내려는 

 순간, 운청산의 손모양이 갈고리처럼 변해 태악도인의 손바닥을 지나 팔목을 움켜쥐었다. 

 운청산은 태악도인의 팔을 잡아당기는 힘으로 몸을 접어 두 발로 태악도인의 가슴을 후려 찼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태악도인의 왼손바닥이 가로막고 있었다. 

 운청산의 신형이 튕겨나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훈련받은 대로 전신을 공처럼 말아 최대한 부드럽게 구르려 했으나 그 

 반탄력이 너무 강해서 팔과 등과 머리를 감싼 손에서 강한 통증이 일었다. 

 ‘어허! 당황하여 너무 힘을 주었어. 겨우 이 년 만에 허초를 이용하고 육양수(六陽手)와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에 

 회련각(回蓮脚)을 연환할 생각을 해? 허허! 초식에 대한 이해력은 탁월하구나. 좋아. 아주 좋아.’

 태악도인은 운청산의 숨결을 확인했다. 구르는 소리로 크게 다치지 않았음을 알고는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마저 뿌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운청산이 두 발로 바람을 일으키며 태악도인의 얼굴과 두 어깨를 공격해왔다. 태악도인은 오른손을 원을 그리듯 

 휘돌려 세 번의 발길질을 막아내고 네 번째는 아예 발끝을 잡아 다시 앞으로 내던졌다. 

 순간 운청산의 상체가 천근추를 시전한 듯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운청산은 두 손으로 바닥을 후려치고 앞으로 구르는 대신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마치 허공에서 정지한 학이나 된 것처럼, 두 팔을 좌우로 넓게 벌리고 태악도인의 머리 위에 떠있던 

 운청산의 신형이 소리 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태악도인이 오른손을 들어 정수리를 막았다. 그 순간 태악도인의 머리를 찍어 누르려던 운청산의 두 발이 갑자기 오므려지면서 

 그의 신형이 뒤집어져 태악도인의 등 뒤쪽으로 흘러내렸다. 

 운청산이 왼손으로 태악도인의 배심을 후려쳤다. 순간 태악도인의 오른손바닥이 배심을 가렸고 그때 운청산의 오른손이 태악도인의 

 왼쪽 옆구리를 찍었다. 

 태악도인은 왼쪽 팔꿈치를 뒤로 내밀어 운청산의 오른손을 급히 막아냈고, 운청산은 막 땅을 찍으려는 자신의 머리를 왼손으로 

 급히 감싸 보호하면서 두 발로 태악도인의 뒷머리를 후려 찼다. 

 태악도인은 허리를 앞으로 숙여 운청산의 두 발끝을 피해내고 오뚝이처럼 허리를 펴 두 다리를 밀어냈다. 

 “윽!”

 운청산이 나뒹굴면서 낮은 비명을 토했다. 구르는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바닥에 댔던 왼손 

 중지가 머리와 땅바닥 사이에 짓눌려 부러져버린 것이었다. 

 태악도인이 처음으로 일어나 눈을 뜨고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미련한 놈! 무공의 근본목적은 나를 보호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함께 

 죽자고 덤비는 것이냐?”

 운청산이 아픔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태악도인이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어찌 됐건 간에 네 발이 내 등에 닿았으니 내일부터는 서서 상대해 주마. 치료는 귀곡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라. 나는 그런 

 것 잘 못한다. 가보아라.”

 운청산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몸에 손발을 댈 때까지는 앉아서 눈을 감은 채로 두 팔만 

 사용한다 했었다. 발을 등에 댄 결과가 나왔으니 내일부터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서있는 태악도인을 상대해야 했다. 무언가를 

 성취한 것 같기는 한데 야단만 맞고 더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운청산이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펴고 허리를 접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태악도인은 운청산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었다. 

 태악도인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어렸다. 

 “허! 기분 묘하군. 저놈은 틀림없이 나를 닮았어. 평소에는 온순한 강아지 같은 녀석이 비무에 임해서는 독기를 풀풀 풍기지 

 않는가? 제법 재밌는 녀석이야.”  

 반선노인이 들었다면 연신 콧방귀를 뀌어댈 소리를 하면서도 태악도인은 입가에서 은밀한 미소를 쉽게 지우지 못했다.  

 석탁을 가운데 두고 운청산과 마주앉은 귀곡산인이 화선지에 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운청산의 옆에는 호연이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잠들어 있다. 호연이 몸을 동그랗게 만 탓도 있겠지만 열여섯 살 운청산에 대니 크지 않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귀곡산인이 붓을 내려놓았다. 운청산이 화선지를 응시했다. 커다란 사각형을 아홉 개의 작은 사각형으로 나누어 놓은 형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귀곡산인이 말했다. 

 “팔문신(八門神)의 정위(定位)를 설명해 보아라.”

 운청산은 잠시 눈을 감아 방위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빈칸들을 채워나갔다. 운청산이 붓을 놓고 귀곡산인을 

 응시했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후천팔괘도(後天八卦圖)의 정위에 따라 동서남북 진태이감(震兌离坎)의 각 방위에 목, 금, 화, 

 수신을 두고 곤방(坤方)과 간방(艮方)에 토신을, 건방에 금신을, 손방(巽方)에 목신을 두어야 팔문신정방이라 할 것이다. 

 허면 정위에서 팔문의 위치는 어디냐?”

 운청산이 그림을 짚어가며 말했다. 

 “간방이 생문(生門)이요, 태방과 손방이 각각 경문(驚門)과 두문(杜門)이며, 이감건방이 경(景), 휴(休), 

 개문(開門)이고 진방과 곤방이 각각 상문(傷門)과 사문(死門)이 됩니다. 이는 양둔순행(陽遁順行)의 이치에 따른 것. 

 음둔역행(陰遁逆行)의 법에 따르면---.”

 “되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으니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다만 네 말은 시간의 흐름을 무시할 경우에만 그러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으면 될 것이고, 곧 시류에 따른 변화 역시 배우게 될 것이니라.”

 명심하겠다는 대답을 한 후, 운청산이 문득 궁금증이 생긴 듯 물었다. 

 “허면 귀곡의 결계 역시 팔문신정방도의 변화에 따른 것입니까?”

 순간 귀곡산인의 얼굴이 웃는 듯 찡그린 듯 기이하게 변했다. 

 “청산! 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것이니라. 내가 처음에 뭐라 하더냐? 지포팔괘(地布八卦) 천포구성(天布九星)의 이치는 

 근본 중에 근본이라 하였다. 천문을 읽고 지리를 통해야 겨우 기문학(奇門學)의 끝자락을 잡았다 할 것인데, 벌써부터 뛰려 

 하느냐? 네 눈으로 귀무절곡팔괘구성진(鬼霧絶谷八卦九星陣)의 근간을 파악하려면 십 년은 더 배워야 하리라.”

 운청산이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었습니다.”

 귀곡산인이 흐릿하게 웃었다. 

 “괜찮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이 어찌 학문을 제대로 익히겠느냐? 오늘은 이만 끝내자꾸나. 가서 쉬어라.”

 운청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석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끝났다는 것을 안 듯 호연이 깨어나 네 발을 길께 뻗고 

 기지개를 켰다.

 운청산이 화선지를 말아 쥐고 일어서서 귀곡산인에게 허리를 접었다. 

 귀곡산인이 운청산의 얼굴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운청산이 돌아섰다. 그때 귀곡산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청산!”

 두 발짝을 움직였던 청산이 되돌아섰다. 귀곡산인은 운청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다. 그만 가 보아라.”

 운청산이 다시 허리를 접어보이고 동부를 나섰다. 호연이 귀곡산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석탁 옆으로 다가와 옥소를 입에 물고 

 운청산의 뒤를 따랐다. 

 귀곡산인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무언가 달라졌지 않은가? 이유가 뭘까? 영혼들의 갈망이 덧씌워지는 것인가? 무엇인가?”

 귀곡산인은 답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푸른 산에 먹장구름 드리워지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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