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79)

 귀곡의 구조는 특이했다.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지라 긴 타원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중앙에 연못이 위치하고 그 양끝에 

 반선노인의 거처와 귀곡산인의 귀부가 마주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운청산은 처음 입곡했을 당시 두 사람만이 사는 곳이라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선노인의 거처에서 좌측에 위치한 태악도인의 석실 입구는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었던 탓에, 그곳에 또 다른 

 사람의 거처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태악도인이 폐관을 접은 지금이야 한 사람이 넉넉히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 석실은 입구만 귀곡 

 안에 위치해 있고 나머지는 귀곡의 결계 밖에 위치한 막힌 동부였다.

 세 달 전, 태악도인의 석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운청산은 기이한 동굴의 모양에 적지 않게 놀랐었다. 입구는 한 사람이 

 들어설 만큼 좁은데, 들어갈수록 넓어져 다른 두 사람의 거처에 비해 수백 배는 넓었다. 높이는 이십여 장에 이르고 넓이는 

 귀곡의 전체 넓이에 넘어설 정도로 넓은 종유동이었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아 바닥과 천장은 불규칙했고 거기에 삐죽삐죽 솟고 늘어진 종유석은 위험하게 보였으며 귀곡의 온화한 

 기운과는 달리 한기가 느껴졌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바깥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태악도인의 뒤를 좇아온 운청산은 갑작스런 기온의 변화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제는 곧 익숙해질 것을 알기에 야무진 

 표정으로 석부의 중앙으로 향했다. 

 석부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것도 그나마 운청산을 위해 태악도인이 동부 군데군데 횃불을 만들어 달았기에 그 정도였지, 

 태악도인만이 거할 때는 암흑과도 같았으리라.

 태악도인은 무정하게도 먼저 석부의 중앙에 가서 앉아있었다. 운청산은 천장과 다름없이 삐죽삐죽 울퉁불퉁한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 태악도인에게로 이르렀다. 

 오직 그가 앉아있는 곳과 그 주변만이 인공이 가미된 듯 잘 다듬은 대리석처럼 평평한 바닥이었다. 

 태악도인이 운청산에게 말했다. 

 “시작해라.”

 운청산은 태악도인과 반 장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등을 보이고 앉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태악도인은 

 금새 호흡에 몰입하는 운청산의 등을 바라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오른손바닥을 운청산의 등으로 가져갔다. 

 태악도인이 특별히 운청산의 운공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식을 집중하여 기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운청산의 기의 흐름은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했다. 쉬지 않고 태악도인의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르치기 

 시작한 지 겨우 세 달이 지났으니 누구라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금액고의 공능을 일부 얻었고, 반선노인이 그 기운을 

 침으로서 전신에 고루 퍼뜨렸으며, 귀곡산인이 음양선법으로 단련시켰음을 들었는지라, 태악도인은 그 놀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반 시진 정도 운공을 지켜보던 태악도인은 슬그머니 일어서서 석부 밖으로 몸을 날렸다. 특별히 경신법의 형식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의 신형은 소리도 없이 이십여 장을 움직여 어느새 석실의 문 앞에 이르렀다.

 태악도인은 문 안쪽 귀퉁이에서 이척이 조금 넘는 나무 막대기 다섯 개를 집어 석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석실 앞쪽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몽둥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나무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나무 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껍질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자 흰 가루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른 팔뚝 굵기만 하던 나무 몽둥이가 점차 가늘어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목검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태악도인은 몽둥이를 눈앞으로 들어 검파의 굵기를 확인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다시 검파를 매만졌다. 또 다시 

 가루들이 떨어졌고 네 치 길이의 검파는 조금 전보다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태악도인은 목검을 가볍게 휘둘러보고 나서 옆으로 내려놓고 다른 몽둥이를 들었다. 다시 나무를 다듬으려던 태악도인이 손을 

 내리고 전면을 응시했다. 

 “얼쩡거리지만 말고 할 말 있으면 하시오.”

 과연 그의 전면에는 두 사람이 서있었다. 바로 반선노인과 청인자였다. 청인자는 태악도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허리를 

 접어 시선을 외면했다. 

 반선노인이 청인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했다. 

 “이놈이 사람을 차별해? 배고픈 호랑이 앞의 여우 새끼구나.”

 청인자가 허리를 숙인 채로 고개만 비틀어 말했다. 

 “사숙조님하고 영감님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그래도 이놈이?”

 반선노인이 손을 들고 눈을 부라렸다. 청인자는 허리를 숙인 채로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태악도인이 반선노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오?”

 반선노인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큼큼거리다가 물었다. 

 “난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저 놈이 청산의 진전이 궁금한가 보구나.”

 순간 태악도인의 차가운 눈빛이 청인자에게로 돌아갔다. 청인자는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반선노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닙니다, 사숙조님. 제자가 감히! 제자는 다만 청산이 모자라 사숙조님을 귀찮게 하지나 않을까 하여---.”

 태악도인이 청인자의 말을 끊었다. 

 “청산은 괜찮다. 너와 다른 사람이 귀찮을 뿐.”

 태악도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무 몽둥이를 다듬었다. 

 반선노인이 태악도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징그러운 놈! 성격 지랄 맞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구나.”

 들었을 텐데도 태악도인은 몽둥이만 다듬었다. 반선노인이 두어 발짝 더 다가서며 물었다. 

 “벌써 검을 가르치려고? 조금 이르지 않나? 보통은 권장을 가르치고 난 후에---.”

 태악도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반선노인의 말을 끊었다. 

 “난 보통이 아닌 사람이오.”

 태악도인은 주변의 나무 몽둥이들을 모두 챙겨 석실 문으로 몸을 돌렸다. 

 “저, 저---.”

 반선노인이 태악도인의 등에 손가락질 하는 순간 그가 돌아서며 청인자에게 말했다. 

 “청인이라 했더냐?”

 “예. 하명이 있으시옵니까?”

 청인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태악도인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이 다 떨어졌다. 곧 진검 한 자루 필요할 것 같구나. 이 정도면 좋으리라.”

 태악도인은 다듬어 놓은 목검 가운데 한 자루를 청인에게 던져주고 석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반선노인이 못마땅한 기색 그득한 얼굴로 시커먼 석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청인자가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사숙조께서는 원래 성정이 저렇게 찼습니까?”

 반선노인이 여전히 석실 문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태을에게 끌려왔을 때는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찬바람이 쌩쌩 불었지. 그 뿐인 줄 아느냐? 버르장머리 없고 

 질기기도 고래 심줄 같았었지.”

 “언제부터 여기 사셨는데요?”

 “그게 언제더라? 내가 반선이 아닌 약왕(藥王)이라 자칭할 때니 사십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당시에 저놈이 무림에서 무어라 

 불렸는지 아느냐? 풍파투도(風波鬪道)였느니라. 이놈저놈 검만 들었다하면 다짜고짜 붙자했으니 사람들이 설설 기었지. 결국 

 태을이 그를 잡기 위해 청성까지 가야 했다. 그때 일이 공교롭게 되어서 태을은 청성에서 한번 검을 뽑고 검선이라 불렸으니, 

 후에 사람들은 곤륜에는 일선일광(一仙一狂)이 있다는 말을 했었지. 지금 와서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일선의 이름이 너무 

 커서 일광을 가려버린 탓이다. 어쨌든 태을은 귀곡에게 사정하여 놈을 이곳으로 데리고 들어와, 이십 년 금족령(禁足令)을 

 내렸지.”

 청인자가 반선노인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석실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풍파투도에 일선일광이라? 허면 그 뒤로 사숙조께서는 아무런 풍파도 안 일으키고 저곳에서만 사신단 말입니까? 어? 

 근데 이십 년 금족령이면 이미 풀린 것 아닙니까?”

 반선노인이 석실 문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런 풍파 없이? 저놈 때문에 나랑 귀곡은 귀찮아서 죽을 뻔 했다. ‘풍모가 그럴 듯 하시니 한 수 하시겠죠? 한 번 

 붙어 봅시다.’대뜸 그렇게 말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무공에 연연하지 않는다. 검을 이길 자신도 없다.’대답하며 

 거절하자 하루에 몇 차례나 문안인사 하듯 귀찮게 했다. 얼마나 귀찮았던지, 귀곡이 버럭 화를 내며 쫓아내 버리겠다고 

 소리쳤지. 만약 그때 태을이 오지 않았다면 진짜로 쫓겨 나갔을 것이야.”

 “아하! 근데 사조께서 어떻게 처리하셨는데요?”

 “흠! 태을은 당시에 저 녀석이‘한번 붙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태을은 단순히 사형이 아니라 

 실질적인 스승이면서 곤륜의 당대장문인이기도 했던 탓이었다. 그 태을이 저 녀석에게 노호성을 터뜨리며 오히려 ‘한판 붙자’ 

 했었지. 사형도 아니고 장문인도 아닌 검인(劍人)으로서 말이야. 붙었다. 그때 그 태을의 신위를 생각하면---.”

 반선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그래서요?”

 청인자가 처음으로 반선노인에게 고개를 돌리고 호기심으로 목이 타는 듯 재촉했다. 반선노인이 눈을 뜨고 청인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눈을 뚱그렇게 뜬 채 청인자를 보다가 갑자기 손바닥을 휘둘렀다. 

 “아야! 왜 때려요?”

 “버르장머리 없기는 태악과 똑 같은 놈이 감히 누구를 살살 꼬드겨 세상에 다시없을 이야기를 날로 먹으려고 해?”

 반선노인이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휙 돌아서서 자신의 거처로 걸어갔다. 청인자는 석실 문을 보면서 아쉬운 눈빛을 

 드리웠다가 이내 반선노인을 따라갔다. 

 “여-영감님! 잠깐만요! 그렇게 재밌는 얘기를 절정에서 뚝 잘라먹다니요. 후한 끝은 있어도 박한 끝은 없는 법이라는데, 

 해도 너무 하십니다.”

 청인자가 사정했지만 반선노인은 보지도 않고 손부터 휘둘렀다. 그러나 청인자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훌쩍 물러섰다. 

 반선노인이 멈춰 서서 청인자를 응시했다.

 “한 마디만 더 해주마. 그날의 일로 저 녀석은 금족령 따위는 마음에도 없고 오직 검만을 생각하고 살았다. 됐느냐?”

 “조금만 더 자세히요. 태을 사조의 신위라 하심은?”

 반선노인은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마디 더 하자면, 태을이야 말로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잔인한 사람이었다. 육신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금제해 

 버렸으니---.”

 말끝을 흐린 반선노인은 몸을 날려 어느새 집안으로 들어서서 청인자가 따라 들기도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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