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79)

동부였다. 그러나 캄캄하고 음습한 느낌이 드는 동부는 아니었다. 인공을 가미한 듯 벽들은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고, 침상은 

사람이 잤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화강암을 깎아 다듬은 돌탁자 역시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데, 오른쪽 구석에는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에는 한쪽은 글씨가 쓰여 있고 다른 한쪽은 백지인 채로 펼쳐진 책자가 있었다.  

침상과 탁자가 있는 동부 안쪽에서 십여 보 걸어오면 동부의 중앙쯤이 되는데, 거기에는 바닥에서 한자 가량 솟아있는 반반한 

원석이 있었다. 그 위로 흑의를 입고 흑발과 흑염을 길게 기른 홍안의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가히 

선풍도골이라 부를만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동부에는 그 노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원석 아래쪽에 노인을 향해 앉아있는 하얀 여우였다. 차라리 

은빛이라 불러야 할 빛나는 털을 가진 여우는 노인을 향해 앉아있으면서 역시 노인과 같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탐스러운 꼬리가 둘이었다.

흑의노인이 길고 가늘게 숨을 토했다. 순간 귀여운 여우의 주둥이가 슬며시 위로 올라가면서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마치 

황홀경에 빠져 미소 짓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흑의노인이 손을 뻗어 중지를 퉁겼다. 

“끼잉!” 

여우가 한자 정도 뒤로 밀려나갔다. 여우가 눈을 뜨고 흑의노인을 바라보는데 그 눈이 너무나 처량하고 사랑스러워서, 

흑의노인이 만약 그 눈을 봤다면 미안해하며 안아주었으리라. 그러나 흑의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불쌍해서 거두어주었더니 감히 미물인 주제에 나의 기운을 훔쳐 호선을 이루려 하다니,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잊지 

마라. 꼬리가 하나 더 늘어나는 일이 생긴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암흑 속에 가둬버리리라.”

“키힝!”

여우가 고개를 박고 낑낑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흑의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서러움과 항변이 

들어있으니 흑의노인이 곧 느끼고 다시 말했다. 

“쫓아내지 않고 왜 가두냐고 묻느냐, 지금? 편협하다고 항변하느냐, 지금? 그래. 네게는 억울한 일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네가 호선을 이루어도 미물의 본능을 벗어나지 못한다. 네게는 옳다고 느껴지는 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이니, 너를 거둔 내가 어찌 그 책임을 회피할까? 호연! 여기서라면 지금의 삶도 충분하지 않느냐? 굳이 호선에 연연하지 

마라. 네가 이룬 수행이라면 내세에는 반드시 인간으로 환생할 터, 급하게 마음먹을 것 없다.”

흑의노인의 어조는 조금 전의 그 싸늘함 대신에 달래는 듯 부드러웠다. 호연이라는 여우는 슬프지만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호연이 갑자기 동부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 영특한 눈을 치떴다. 

흑의노인이 거의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뭔가 달라졌다. 눈빛이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눈빛 하나로 노인의 

인상이 표변했다. 선풍도골은 자취를 감추고 귀안(鬼眼)에 호골(虎骨)의 풍모가 드러났다.

“이 죽지도 않는 늙은이가 사람을 데리고 왔구나.”

안그래도 편한 마음으로 마주보지 못할 그 눈에 싸늘한 한광이 맺혔다. 그 순간 노인의 신형은 어느새 동부 밖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뒤를 호연이 따랐다.

위쪽에 양각으로 귀부라고 조각된 동부의 입구에 흑의노인이 나타나는 순간 반선노인이 오십여 장 앞 온천수 연못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촌각도 되지 않아서 반선노인이 멋쩍게 웃으며 흑의노인 앞에 이르렀다. 

“반선! 네 녀석이 감히 또 사람 끌고 들어와?”

“벌써 알았나? 아! 당연히 알았겠지. 근데 사람이 아니야. 그게 말이지---. 사람들---.”

반선노인이 말끝을 흐리자 흑의노인이 그 붉은 눈에 살기와 같은 광채를 드리우며 반선노인을 노려봤다. 

“심심하다 해서 태을을 용납했다. 그리고 검치까지 허락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했었다. 또 한 번만 데리고 오면 너는 

물론이고 말없는 검치까지 쫓아내버리겠다고. 나가거라! 다시는 돌아오지 마.”

반선노인은 그래도 웃음을 지우지 않고 흑의노인의 옷자락을 툭툭 털며 말했다. 

“어허! 귀곡 이사람, 반응이 너무 과하구먼. 데리고 온 놈은 멍청이야. 밖으로 던져버리면 코앞에서도 들어오지 못해. 

파해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흑의노인, 귀곡산인은 노기를 거두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진의 운용을 바꾸면 반선 자네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해.”

“암! 암! 그렇고 말고. 나야 그쪽으로 문외한인데 뭘 알겠나? 하지만 말일세. 오늘 데리고 온 사람은, 아니지, 아이는 

특별해.”

아이라는 말에 귀곡산인의 노기가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다. 눈의 광채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흥! 왜? 제자 들여놓고 그만 등선하려고? 그거라면 용서해주지. 이십 년이면 되나? 자네 꼴을 안봐도 되니 그 정도야 

감수해야지.”

반선노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무-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내가 왜 등선을 해? 선인 팽조(彭祖)께서 왜 지상에서 팔백 년을 머무셨는데? 천상에 

올라가 보아야 대신선들 수발이나 들어야 하니 가지 않으신 것 아닌가. 난 반선이 좋아. 자네라고 별 다르나? 세상 편하지 

않은가? 내가 그 아이를 데려온 이유는 하도 특별해서 자네한테 보여주고 싶어서네. 재미있을 거야. 몸속에 인귀가 아홉이나 

느껴지거든.”

순간 귀곡산인의 눈빛이 슬그머니 풀려 어느새 눈 속에 붉은 광채는 사라지고 검은 동자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선풍도골의 풍모를 

드러냈다. 

“정말인가?”

“아,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심심하면 그냥 나갔다 오면 될 것을 가지고 자네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왜 끌고 들어와? 

자자! 가보자고.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다 나네.”

반선이 웃으며 앞섰다. 그 뒤를 귀곡산인이 따르고 호연도 총총히 뒤를 좇았다.

청인자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사실이었지만, 귀곡산인의 거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반면, 반선의 집은 복잡했다. 

약선(藥仙)을 꿈꾸는 사람의 집답게 문을 열자마자 그윽한 약향이 가득했는데, 심사가 꼬인 청인자는 그마저도 불만스러웠다. 

“쳇! 냄새도 좋구만. 약 냄새가 이렇게 청량해도 되는 거야?”

청인자는 왼손으로 입구 앞에 늘어져 있는 천문동(天門冬)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한쪽으로는 썰어놓은 약재를 

담아놓은 약통들이 벽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 있었고 반대쪽과 천장에는 말리는 중인 약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흠! 흠!”

청인자는 왼손으로 운청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을 두리번거렸다.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청인자는 집 대문의 반대쪽을 

향해 방을 가로질렀다. 

또 다시 문이 하나 보였다. 방이거니 싶어 문을 열었다. 딱히 방이라 하기보다는 차라리 토굴이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계단 세 개를 밟고 내려서서 황토를 밟았다. 

바깥과는 달리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문을 제외한 삼방을 모두 황토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 안쪽에는 황토 침상이 

있으며, 문에서 좌측에는 마포로 둘둘 말린 무언가가 줄줄이 놓여있는 길이 일장 가량의 좁고 긴 나무 탁자가 벽에 붙어 

있었다. 반대쪽에는 유독 기름통이 큰 유등과 문방사우가 놓여 있는 좌탁 하나와 수백 권의 책들이 꽂혀있는 서가가 있었다. 

청인자는 서가를 바라보았다. 책 제목들이 온갖 의서들뿐이라 금새 흥미를 잃고 반대편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마포더미 하나를 들어 코로 가져갔다. 

“쳇! 삼이군. 쓰다 남은 것이라더니, 겸양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만 진짜였잖아.”

그것을 내려놓은 청인자는 다시 다른 마포더미를 들었다. 

“쳇! 하수오(何首烏)인가?”

그것마저 내려놓은 청인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수십 개의 마포더미들을 흘끔 보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쳇! 평소에 나를 어떻게 본거야? 이 까짓 약초 뿌리 몇 개 때문에 사람을 도둑놈으로 몰아? 쳇!”

몇 차례 혀를 찬 청인자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쳇! 피곤해 죽겠는데, 여기도 앉을 곳이 마땅찮네. 두더진가? 땅 파고 살게.”

청인자는 결국 황토침상으로 다가갔다. 벌렁 드러눕고 싶지만 반선의 침상을 함부로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침상 

모퉁이에 등을 대고 두 발을 쭉 뻗어버렸다. 

강한 약향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그 향기의 진원지는 바로 베개였다. 약을 채워 베개를 만든다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건 혼자 다 하시는구만.”

청인자는 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고 다시 원래 자리로 휙 던졌다. 조금 힘이 과했다. 원래 자리보다 조금 더 던져져 침상 

모퉁이에 있던 조그만 목곽이 베개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딸그락, 소리를 들은 청인자는 깜짝 놀라 침상을 넘었다. 반대쪽에서 목곽을 발견한 청인자는 급히 주워 내용물을 확인했다. 

다행이었다. 가로 세로 한 치 반 정도 되는 평범한 목곽 안에는 청아한 향기를 내뿜는 투명한 무엇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체도 아니어서 목곽이 흔들릴 때마다 일렁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쏟아지지도 않았다.

“이게 뭐야? 꿀 같은데, 냄새 좋네. 맛있는 것도 혼자만 먹는구만.”

한숨을 내쉰 청인자는 목곽을 닫으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운청산이 반나절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곽과 운청산을 번갈아 응시했다. 

청인자는 중대결심을 한 듯 중얼거렸다. 

“비싼 약은 장탁 위에 따로 모아 놓은 것 같고---. 침상에 나뒹굴고 있었으니 비싼 건 아닐 거야. 설마 아이 좀 

나눠먹였다고 날 죽이기야 하겠어? 에이, 꿀이 비싸봤자---. 아니지. 혹시 먹는 게 아닌 건 아니겠지?”

청인자는 청량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곧 결심을 한 듯 약지를 목곽 안으로 넣었다. 청인자는 손가락 

끝에 내용물을 살짝 묻혀 먼저 입으로 가져갔다.

“호오! 맛 좋고, 냄새 좋고---. 무슨 꿀이 이러냐? 청산! 배 고프지?”

청인자는 입술을 오므려 침을 묻히는 운청산의 반응을 허기로 받아들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목곽안으로 대담하게 약지를 찔러 

넣었다.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것을 찌르니 손가락에서조차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을 오분지 일가량 뜬 청인자는 즉시 

운청산의 입으로 가져갔다.

운청산이 향기에 취해 쉽게 입을 벌렸다. 그것이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눈처럼 녹아 운청산의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운청산은 청인자의 약지를 빨고 입술을 핥았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를 들은 청인자는 환히 웃으며 운청산의 얼굴을 살폈다. 

“맛있나 보네. 어디 이번에는---.”

청인자는 조금 전에 뜬 것보다 약간 더 많이 떠서 운청산의 입에 넣었다. 입맛을 다시는 운청산을 보자 내용물이 표 나게 

줄어들었다는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청인자는 후다닥 뚜껑을 닫고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은 채 운청산의 얼굴을 토닥거렸다.

“이놈아, 어딨어?”

반선노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황토방의 문이 열렸다. 청인자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반선노인과 귀곡산인 그리고 호연이 들어섰다. 

“보게 저 아이일---. 가만 있어봐! 이게 무슨 냄새야?”

반선노인은 단 한번 코를 벌름거리고는 갑지기 노기가 충천한 얼굴로 침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청인자는 단번에 자신이 대죄를 

지었다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벽 쪽으로 물러섰다.

반선노인은 목곽을 열어 반 정도가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무너질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금새 분기탱천한 얼굴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청인자를 노려보았다. 

“이-이-이 호랑말코가 감히 내 태청구전금액고(太淸九轉金液膏)를---. 배은망덕한 놈! 죽여 버리겠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번쩍 치켜든 오른손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용솟음쳤다. 그리고 어느새 엄지손톱 크기만 한 작은 

구체를 이루며 손바닥 앞에서 휘돌았다. 

도망갈 구석을 없었다. 문은 귀곡산인이 막고 서있고 황토방은 좁았다. 청인자는 본능적으로 뒤돌아서서 눈을 찔끔 감으며 

무릎을 꿇고 운청산을 바닥에 눕힌 후 두 손으로 견고하게 바닥을 짚었다. 

그때 반선노인의 손에서 붉은 구체가 일순간 빛을 더했다. 

“반선!”

귀곡산인이 짤막하게 외치고 바로 오른 중지를 내뻗으며 위아래로 흔들었다. 순간 손끝에서 가느다란 붉은 실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반선노인과 청인자 사이에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이상한 모양을 이루었다. 마치 허공에 부적을 그려 넣은 것만 

같았다. 

팡!

부적과 반선노인의 구체가 부딪쳐 폭음이 터지고 황토방 전체가 들썩거리며 흙먼지가 일었다.

“자네!”

반선노인이 귀곡산인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흑의노인은 눈썹 한 올 까닥하지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피를 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은가?”

순간 반선노인이 허탈한 눈빛으로 흑의노인을 바라보더니 침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귀곡,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금액고는 내 평생의 정화일세. 그것만 있으면 언제든 등선을 이룰 수 있건만, 저 놈이, 

저 놈이 다 망쳐버렸어.”

귀곡산인은 연민조차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갚았다 생각하게.”

반선노인이 힘없이 물었다. 

“무슨 소린가?”

“자네 혼자의 힘으로 만든 게 아니질 않는가? 태을이 아니었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 자네는 이미 반을 먹어 무병장수의 

반선지경에 들었네. 연단에 도움을 준 태을의 후손에게 나머지 반을 주었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터. 게다가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제는 자네 혼자 제조가 가능하지 않은가? 어차피 등선할 생각도 없는 사람은 무얼 그리 아쉬워하나?”

그렇게 쉽게 말할 것이 아니었다.

태청구전금액고.

갈홍이 포박자에서 말하기를, 안기선생(安期先生), 용미공(龍眉公), 수양공(修羊公), 음장생(陰長生) 등의 신선들은 모두 

다 금액을 절반만 복용하고 오랫동안 지선(地仙)으로 지내다가 나중에 금액의 남은 반을 먹고 승천하였다 했다.

포박자는 그 금액을 일러 태청구전신단이라 칭하고 구전의 법을 서술했다. 그러나 포박자는 그 재료와 제조과정 등에 대해서는 

대충만 전하고 그 비전 제조법을 따로 인연에 맡겨 전했으나, 그것이 누구에게 전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태청구전신단이 바로 태청구전금액고의 다른 이름이니 가히 천하에 둘도 없는 선약의 정화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선노인이 흑의노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자네, 남의 일이라고 쉽게도 말하는구먼. 하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자네 좋겠구먼. 그리 귀찮아하더니만, 약재를 

다시 모으려면 천하를 주유해야 할 터, 결국 내 얼굴을 한 동안 안볼 수 있게 되었네 그려.”

그때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듣고 있던 청인자가 운청산을 가슴에 다시 안고 돌아서서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꿀인 줄 알고 아이 배나 채워주려 했는데, 그것이 노사의 평생 정화였다니 죽어도 죄를 다 갚지 

못합니다.”

청인자가 땅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순간 반선노인이 청인자를 내려보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헛, 허허허허허허! 꿀인 줄 알았다고? 태청구전금액고가 꿀이라---. 허허허허!”

귀곡산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풋! 이 사람, 반선! 그러기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고(膏)로 만들지 말고 환(丸)으로 빚으라 했거늘,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실없이 농을 하더니만---.”

반선노인이 힘없는 눈에 이채를 드리우며 귀곡산인을 응시했다. 

“그 얼굴 웃는 건가? 어째 고소하다는 표정 같구먼.”

“설마?”

귀곡산인이 짐짓 정색을 하며 말하자 반선이 다시 물었다.

“근데 사람 싫어하는 자네가 무슨 까닭으로 저 따위 호랑말코까지 살펴 주었는가?”

“난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귀찮아 할 따름이지. 그리고 저 친구를 살려준 게 아니라 다만 곡내에 혈향 풍기는 것이 

싫었을 뿐이야.”

귀곡산인이 가볍게 대꾸하고 아직도 엎드려 있는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반선도 청인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 버르장머리 없고 뻔뻔한 놈아! 이왕 훔쳐 먹일 생각이었으면 다 먹이지 반은 왜 남겼냐?”

허탈한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노화는 풀린 듯한 어조였다. 청인자가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그것이 시간이 없어서---.”

반선노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자 청인자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반선노인이 귀곡산인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자네, 저 따위 놈을 본 적이 있는가? 죽을죄를 지었으면 내 기분 생각해서 좋은 변명거리라도 찾아볼 생각지 않고, 뭐라? 

시간이 없어서? 내 참!”

“적어도 솔직하구먼.”

귀곡산인이 말을 끝내자마자 은여우에게 손을 뻗었다. 

“끼잉!”

은여우가 비명을 토하며 고개를 숙였다. 귀곡산인이 차갑게 말했다. 

“호연!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라 했다. 네가 남은 것을 먹어 보아야 꼬리 둘을 늘릴 따름이다. 네가 진정한 호선에 

이르지 않는 이상,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해.”

은여우는 몸을 말고 꼬리를 앞으로 돌려 얼굴을 가렸다. 

반선이 은여우를 힐끔 보고서 청인자에게 말했다. 

“일어나, 인석아!”

청인자가 고개만 들어 반선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반선노인이 짐짓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흥! 그렇다고 용서해준다는 말이 아니야. 넌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라. 내가 다시 신단을 빚을 때까지 내 꽁무니만 

따라다녀야 해. 그때까지 넌 곤륜제자도 뭐도 아니야. 알았어?”

청인자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저, 얼마나 걸릴까요?”

“너 따위가 연단에 도움 될 턱이 없으니, 재료 모으는 기간 십 년이면 돼.”

청인자가 울상이 되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반선노인이 다시 말했다. 

“흥! 이놈아, 그것도 한번 해 본 경험 믿고 짧게 잡은 것이야.”

청인자가 절망감에 빠질 때, 귀곡산인이 끼어들어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안됐구먼. 이왕 약을 썼으면 제대로 약발을 받을 수 있게 썼어야 하는데, 대과(大果)는 잃고 소실(小實)만 

얻었어.”

귀곡산인이 운청산에게 다가갔다. 그때 반선노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받았다. 

“내가 더 억울한 것이 바로 그 점이네. 복약(服藥)을 위해서는 목욕재계(沐浴齋戒)하여 신께 먼저 고하고 행기(行氣)와 

절곡(絶穀)을 필수로 해야 하거늘, 어느 하나 실행한 것이 없어. 천하의 지보(至寶)를 먹고도 제 공능을 얻지 못했으니 그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귀곡산인이 청인자로 하여금 운청산을 바로 안아들게 하고 그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너무 안타까워 말게. 범인이 무병하고 장수할 수 있는 기틀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가? 이 아이를 보니 지금껏 견뎌온 것만도 

장할 정도로 허약한데, 오기가 고루 상합할 기반을 닦았으니 그 정도로도 충분하네. 어디 보자. 무서워하지 말거라.”

귀곡산인의 눈이 붉게 물들며 기풍이 다시 차갑게 변했다. 청인자의 꿇은 무릎에 앉아있던 운청산이 청인자에게 딱 달라붙더니 

작게 움츠러들었다. 하기야 청인자마저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인데 운청산이야 오죽하랴. 그러나 귀곡산인은 무서운 

눈으로 운청산 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귀곡산인이 원래의 눈빛을 되찾고 일어섰다. 그가 반선노인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 말대로 재밌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신단의 효능을 이 아이 몸속의 귀신들이 먼저 보았다는 것이야.”

반선노인이 깜짝 놀라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뭐? 그런 일이 가능한가?”

“본 적은 없지만 이론적으로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 선단이란 것이 어차피 정기신을 일신시켜 천지신령(天地神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혼이란 것이 정신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면 당연히 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나? 

더구나 본곡은 곤륜의 삼대영지 가운데 한곳일세. 잡귀라도 이곳에 오래 머물면 반신명으로 화할 수 있는데 거기에 선단까지 

보탬을 주니 변할 수밖에. 자네가 귀신이라 했으나, 내 보기에 이들은 이미 반신명에 이르렀네. 특히나 아홉 가운데 여인의 

혼은 이미 신명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어. 어때? 이 아이가 이리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나?”

귀곡산인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청인자를 응시했다. 청인자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의를 살짝 걷어 가슴을 

보여주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마로 들이받은 자국입니다.”

귀곡산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아이는 특별하군.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력이 어찌 되지?”

청인자는 귀혼이 깃든 이유부터 운가에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자신과의 관계까지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그것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귀곡산인 정도면 능히 운청산으로부터 귀혼들을 떼어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청인자의 설명이 끝나자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낮에는 양광이, 밤에는 덕 높은 부인의 모성이 이 아이의 정신력을 지탱시켜 주었군. 좋아. 아주 좋아.”

귀곡산인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청인자는 도대체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없었지만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청인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귀곡산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허면 이 아이로부터 혼들을 떼어낼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귀곡산인은 기대를 저버렸다. 

“여인은 당장이라도 귀천시킬 수 있겠더군. 허나 나머지 혼들은 어려워.”

그의 대답은 보천자의 그것과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청인자는 실망감에 휩싸여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귀곡산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하나는 수령신을 만나 담판을 짓는 법인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이기도 하지. 찾을 수야 있겠지만 신령이 이 정도까지 일을 벌였다면 그 진노가 하늘에 닿은 

것이니, 만나주지도 않을 것이고 설득하는 건 더 어려워. 두 번째는 신령을 강제로 불러내어 강압하는 건데, 이건 신령의 

경지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니 가능성을 따질 수조차 없는 방법이지. 마지막 방법은 편법이야. 혼령들을 순화시켜 신명으로 

변화시키고 이 아이의 골수 속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지. 이 편법을 쓰면 범인과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게야.”

귀곡산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청인자는 즉시 운청산을 옆으로 내려놓고 이마를 땅에 찍었다. 

“부탁드립니다. 이 아이가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얼마나 세게 이마를 찍었던지 흙바닥이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귀곡산인은 청인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운청산을 응시했다.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뗀 귀곡산인은 의견을 묻는 듯 반선을 바라보았다.

반선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곡산인도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했다. 

“무료함을 달랠 겸 해볼 수는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청인자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며 계속해서 이마를 찍었다. 귀곡산인이 청인자의 몸을 무형의 기운으로 떠받히며 말했다. 

“자네가 여기 사는 건 싫어. 아이만 놓고 가.”

청인자는 운청산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곡산인은 잊었다는 듯 다시 말했다. 

“필요한 게 몇 가지 있군. 소(簫)와 금(琴) 그리고 이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서책과 화선지, 필묵 등을 준비해. 

아! 그리고 대필이 필요해. 편액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어야 해.”

청인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반선 노인을 응시했다. 

“이놈아! 왜 날 봐?”

청인자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돈 주십시오.”

반선노인이 기함한 표정을 지으며 청인자를 보다가 다시 귀곡산인을 보았다. 귀곡산인의 입가에 미약하나마 미소가 감돌았다. 

반선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청인자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 죽일 놈 살려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네. 이놈아! 내가 왜 네 놈 조카 교육비를 대야 돼?”

“종이 무슨 돈이 있습니까? 당연히 주인이 대야지요. 몸 굴려 갚겠습니다. 주세요.”

“나도 돈 없어, 임마!”

반선노인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청인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아주 천천히 시선을 옮겨 긴 탁자 위의 마포더미들을 

훑어보았다. 반선노인과 귀곡산인은 무의식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갔고 은여우까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인자가 다시 반선노인을 응시했다. 반선노인은 끙, 소리를 내더니만 고개를 설레 저었다. 반선노인이 힘없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어휴, 두야. 맘대로 해라. 네 놈 필요한 만큼 가져가.”

청인자는 반선노인에게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 운청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마주했다. 

“청산아! 너도 들었지? 이 할아버지들이 네가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하셨다. 네 어머니와 얘기할 수 있게 

해주신다 하셨다.”

순간 귀곡산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선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청수와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반선노인은 그것 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귀곡산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래 흔들었다.

“이 도사 백부가 너와 함께 있을 수는 없다만 네 할머니처럼 마음만은 항상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가끔씩은 너를 보러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이 도사 백부를 잊으면 안된다. 알겠지?”

운청산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운청산은 두 팔을 뻗으며 청인자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청인자는 눈물을 참으려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의 등을 두드리고 쓰다듬었다. 

“그놈 버리고 왔네.”

반선노인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귀곡산인은 대답이 없었다. 운청산을 침상에 눕혀놓고 살필 따름이었다. 반선노인이 다가가 

운청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곡산인에게 물었다.

“근데 자네 무슨 속셈인가? 오늘따라 말도 많고, 며칠이면 될 일인 것 같은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니?”

귀곡산인이 그때서야 운청산에게 눈을 떼고 반선노인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 이 아이 머리 한번 보게. 자네 관점으로.”

반선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운청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구석구석 매만지던 반선노인이 눈을 치뜨며 귀곡산인을 

응시했다. 

“이건---.”

반선노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선노인도 의미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다시 말했다. 

“자네가 관심을 가질 만 하기는 한데, 이렇게 인당이 열려있다는 것이 자네 쪽에서는 별 다른가?”

귀곡산인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몰라. 한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으니까. 아마도 귀혼들과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며 스스로를 지키려 하다보니 이렇게 

된 모양이야. 그래서 관심이 생기는 걸세. 이론적으로야 조금 빠르지 않을까?”

“조금이라? 그럴까? 어쨌든 조화가 필요하겠군.”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귀에게 집세 내라 하게.”

“그렇군. 그 녀석이 있었어. 알겠네. 폐관을 푸는 대로 내가 말하지. 그러면 너무 늦나?”

귀곡산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환경도 달라졌고, 금액고도 복용했으니 위험지경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걸세. 아! 자네는 우선 그 아이 목청 좀 

틔워주게. 이왕 자네 약을 먹었으니 늦은 대로 약발 좀 받게 해주고.”

반선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안그래도 그리할 참이었지. 아무리 절차를 무시했다 해도 그걸 먹고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못한다면 내 체면이 말이 

“그럼, 그 아이는 자네가 맡으면 되겠군.”

순간 반선노인이 멍한 얼굴로 귀곡산인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빨리 배우는군.”

귀곡산인이 흐릿한 미소를 짓다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내가 노파심에서 묻는 것인데, 어떤가? 자네 보기에도 틀림없이 산인이지?”

반선노인은 금새 말을 알아듣고 운청산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음, 틀림없어. 한 번 들이면 평생을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군. 근데 아이의 상을 내게 물어, 자네가? 정말 

노파심이로구만.”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이 없는데도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됐네. 이젠 안심이야.”

귀곡산인이 실낱같은 미소를 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 남은 주말 편안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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