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녹산은 중문을 삐죽 열고 그늘 속에서 은향당 앞쪽 공터를 바라보았다. 운청산은 늘 그렇듯이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운녹산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운청산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 여자들이란---. 이 일을 어쩐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곳이 없다. 아미나 청성은 당연히 안되고, 무당도
안되지. 화산이나 종남은 나쁘지 않으나 춥다고 아니 된다 하시고---. 아이가 지내기에는 사철 온난한 점창이 나쁘지
않은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어쩐다?’
운녹산은 불안한 낯빛을 드러내며 다시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한 여인이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운청산의 앞을
얼쩡거렸다. 순간 운청산이 여인으로 인해 생긴 그늘을 벗어나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여인이 실망한 채 물러서자 또 다른
여인이 이번에는 짜증난 아이의 손을 잡고 운청산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운청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어 발자국
옆으로 움직였다.
봉운정의 일이 있고 나서, 천북고원의 짧은 장마가 지난 후부터 생긴 풍경이었다. 경의상이 대경하고 운녹산이 재차 협박을
하다시피 엄포를 놓았건만 결국은 새어나가고 말았다.
봉운정 이외의 여섯 가족들이 그간 백안시(白眼視) 해왔던 태도를 바꾸어 날마다 운청산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그러나 그날
이후 운청산에게서 또 다른 혼백이 드러난 적은 없었다. 가족들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렸으나 도대체 혼백이 드러나는 일이
어떤 상황 하에서 일어나는지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또 다시 놀란 경의상이 혹시라도 누가 운청산을 데리고 갈까 하여 혼자 있을 때에도 사람을 붙여 철저히 감시했고,
때때로 직접 나와 여인들에게 흩어지라고 불호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니 운청산이 은향당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갈 도리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운녹산은 일과처럼 때때로 운청산의 동태를 살폈다.
때마침 경의상이 은향당의 중문을 나서고 있었다. 얼굴에 노기가 여실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급히 고개를 조아린 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경의상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라고 그들의 상실감과 아픔을 모를까. 하지만 죽은 자를 추억하기 위해
살아있는 아이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의상은 운청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서 조용히 은향당 안으로 사라졌다.
운녹산도 한숨을 내쉬고 물러서려 했다. 곧 아이의 발걸음이 자신 쪽으로 옮겨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눈이 멀리
운가의 대문을 스쳤고 다시 문으로 돌아갔다.
“도사?”
운녹산은 이상할 정도로 흥분되어 손으로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시비가 차를 내오자 운녹산을 청한 청인자는 눈을 감고 심호흡으로 격탕되는 심신을 가라앉혔다.
“밤과 아침이 변함없이 항상 있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듯, 삶과 죽음은 하늘의 명이라. 무릇 하늘이 형체를 만들어 살아서는
고생하게 하고, 늙어서는 편안하게 하며, 죽어서는 쉬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에 따라 삶을 잘 영위하는 것이 곧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까닭이리라.”
장자의 대종사(大宗師) 편을 더듬어 생사관(生死觀)을 읊조리고 나니, 청인자의 얼굴에서 운녹산에 대한 분기가 스러졌다.
다시 눈을 뜬 청인자는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녀석이 죽은 것은 하늘의 명일 따름. 누구를 원망하랴. 웃으며 갔다 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갔다 했다.
그것으로 된 것이야.”
청인자는 역시 장자(莊子)가 될 수 없었다. 중얼거림과는 달리, 그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인이 되었는데
피붙이를 잃었다는 것은 무슨 대수냐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가 기억하는 여동생 이청수의 삶은 너무나 기구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편하지 못했으니, 인생이 너무나 불쌍했던 것이었다.
청인자가 기억하는 이청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다.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잠들어 있는
시간마저도 편치 못했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헛소리를 했으며, 깨어나서는 허약하고 몽롱한 표정으로 처음 듣는 말들을
주절거렸다.
아비가 빈한한 가산을 털어 백방을 뛰어다니며 약을 구하고 침을 맞혀도 효력을 보지 못하고 날로 허약해져만 갔다. 홀로 딸의
병 수발하는 것도 힘에 겨워 청인자는 그의 나이 아홉 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이청수가 다섯 살 되던 그 해에 아비의
죽마고우였던 운상자에게 맡겨졌다.
청인자가 이청수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역마살 끼었다고 늘 투덜대던 스승 운상자가 이삼 년에 한 차례씩 아비를
찾아왔기에 가능했다.
청인자는 늘 우스개 소리를 모았다. 침상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 그러나 천성만큼은 햇살만큼이나 밝았던 아이, 이청수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한번 만날 때마다 우스개 소리를 풀어놓으면 이청수는 허옇게 보풀이 인
입술을 벌려 까르르 웃으며 침상을 뒹굴었다.
어느 날 이방인들이 통역자를 앞세워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온 가운데 이방인들은 이청수 만나기를 간청했고
아비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이청수를 대면한 이방인들은 오체투지의 예로서 그녀를 대하고 무릎으로 기어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비에게
이청수를 데리고, 아니 모시고 가겠다고 말했다.
아비가 말도 통하지 않는 미개인들을 어찌 믿고 병약한 딸을 맡길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때 이방인들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은 것 같던 노파가 통역인을 통하여 이청수의 병세를 낱낱이 짚었고, 함께 가면 대수령신의 가호를 받아 씻은 듯이
나리라 했으며, 오직 신(神) 아래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되리라 말했다.
아비는 믿을 수 없어 주저했다. 그러나 그때 이청수가 가야한다고 말했다. 딸의 눈을 한참 동안 응시한 아버지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이청수는 이상한 이인교(二人轎)에 실려 그날로 마을을 떠났다. 출가한 이후로 겨우 두 번 집을 찾았던 청인자는 그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 다음 해, 아비는 무언가를 느낀 듯이 남은 가산들을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운상자에게 편지를 부쳤다. 청인자의 나이
열다섯이던 해였고, 아비가 세상을 등지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을 한 스승 운상자의 손을 잡고 가쁘게 고향에 도착한 청인자에게 겨우 숨만 붙은 아비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네가 의젓하니 다행이라고, 청수가 보고 싶다고. 그리고 아비는 편치 않던 삶을 접어버렸다.
그 후로 청인자가 이청수를 다시 본 것은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스승 운상자가 어쩔 수 없이 곤륜의 장문인 직을 맡게 되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운상자와 함께 세상을 주유하다가 고향에 들렀다. 내친 김에 스승을 졸라 이청수를 보러갔었다. 물어물어 찾아가고도
먼발치에서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잘 지냈었는데---.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청인자의 회상도 날아가 버렸다. 청인자는 급히 소매를 들어 눈물자국을 지웠다. 그러나
사람은 이미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청인자는 급히 일어나 운녹산에게 포권을 취했다.
“곤륜의 청인입니다.”
운녹산은 의아해할 사이도 없이 포권으로 화답했다.
“찾으셨던 그 운녹산이오. 청인이라 하심은 곤륜 어느 분의---?”
“곤륜 장문이신 운상자께서 스승 되십니다.”
“아! 그렇소이까? 죄송하오. 곤륜의 일은 풍문으로 듣기가 쉽지 않아서---.”
운녹산이 사죄하자 청인자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이 자리를 권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것이 결례인 줄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끊은 사람은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아야 할 운녹산이 아니라 청인자였다.
“보다시피 도적에 이름을 올린 몸입니다. 세상의 인연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아직 선연을 얻지 못한 불민한 존재라
피가 당기는 것은 어쩔 수 없더이다.”
청인자가 말을 끊고 운녹산을 응시했다. 운녹산은 난데없는 소리다 싶어 눈을 둥그렇게 치떴다. 청인자가 말을 이었다.
“결례했습니다. 빈도는 이청수라는 아이의 못난 오라비 됩니다.”
순간 운녹산이 청인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조금 전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운녹산은 붉어진 눈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죄는---.”
청인자는 손을 들어 급히 운녹산의 말을 끊었다.
“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빈도는 이미 용문수로표국의 곽 노국주를 뵙고 그간의 사정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은 불쌍하나 하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는 것. 다만 빈도가 이곳까지 온 것은 청수가 남긴 아이가 있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운가의 그늘 아래 잘 자라고 있다면 그저 먼발치에서 한번 보고만 갔으련만, 저주라는 소리도 들었고, 이곳에
와서 얻어들은 바로는 소가주가 아닌 대부인께서 키우신다 해서 직접 연유를 듣고 한번 보려할 따름입니다.”
운녹산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이청수와의 인연과 다시 만나지 못했던 사연, 그리고 보천자의 저주에 대한
해석을 대체로 차분하고 때로는 격정적으로 이어나갔다.
청인자는 운녹산의 표정과 말과 어조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어느 한 구석 이치에 맞지 않는 곳을
찾지 못했고 운녹산이 이청수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내는 그렇게 살가운 성격이 못됩니다. 어머니께서 아이가 불행해질 거라고 말리셨지요. 오직 당신의 품에서만 안정을 찾는
아이이니 당신께서 키우신다 고집 부리셨습니다. 다행히 지금껏 별 탈이 없었습니다만, 요즘 들어 어머니의 기력이 예전과 같지
않으십니다.”
청인자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천진인이시라면 빈도도 들은 바가 있지요. 그 분이 말씀하셨다면 틀림이 없는 사실. 허면 보낼 곳이라도 정해 두셨는지?”
운녹산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 곳을 생각해서 말씀 올렸습니다만, 추워서 안된다, 위험해서 안된다, 복잡해서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고만 하시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청봉은 보천진인의 말씀대로 선연을 만나기 전에는 사람들과 섞여 살기가
어렵습니다. 허나 선연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것이니---.”
운녹산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청인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또 한 사람의 명호를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뜬 청인자가 말했다.
“대부인께서 이도저도 안된다 하시는 것은 결국 믿고 맡길 데가 없다 보신 게지요. 허락하신다면 빈도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뵙게 하여 주시지요.”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처형!”
운녹산이 감격하여 청인자의 손을 잡았다. 청인자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예까지 걸음 한 것도 그리 하라는 하늘의 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시천존!”
늦은 오후 땅거미가 질 무렵, 청인자는 운녹산을 따라 은향당으로 향했다. 방안에는 경의상이 운청산을 무릎에 앉혀두고 탁자에
앉아있었다.
청인자가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경의상이 다짜고짜 물었다.
“도장께서 우리 청봉의 외백부 된다 하셨소?”
경의상의 어조와 눈초리는 싸늘했다. 그녀는 운녹산과 청인자를 번갈아 보면서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부러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의상은 청인자의 즉각적인 대답을 듣지 못했다.
청인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운청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데 정신이 빠져 미처 질문을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운녹산이 뒤늦게
눈치 채고 운청산을 향해 헤벌쭉 웃고 있는 청인자의 손을 툭 건드렸다.
“헛! 결례했습니다, 대부인! 뭐라 여쭈셨는지요?”
순간 한풍이 몰아칠 것 같던 경의상의 얼굴이 슬며시 풀어졌다. 그녀는 얼굴의 모든 근육이 다 풀어졌을 것 같던 청인자 웃음
앞에서, 혹시나 계속 반대하는 자신을 운녹산이 속이고 있다는 의심을 풀어버렸다.
싸늘한 기운이 사라지자 경의상의 얼굴은 어느새 병색이 완연한 노부인으로 바뀌어버렸다. 경의상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되었소. 도장께서는 곤륜장문 운상진인의 고제자 되신다고?”
“그렇습니다. 청수가 묘족의 호족선낭으로 가기 오년 전에 선친의 죽마고우셨던 스승님을 따라 곤륜에 입문했습니다.”
말을 끝내는 순간 청인자는 눈이 살짝 움직여 운청산에게 닿았다가 다시 경의상에게로 돌아갔다. 그 잠깐의 순간에도 청인자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경의상은 결국 운청산을 보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대번에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의상은 두 손을 들어 운청산의 두 귀를 살며시 막으며 물었다.
“곤륜은 일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는다 들었소. 이 병약한 아이가 살아가기에는 환경이 너무 혹독한 것 아니오?”
“예. 본파는 대곤륜의 초입에 자리해 있습니다. 대부인 말씀대로 사시사철 얼음 속에 있는 것은 아니나, 아이가 견디기에는
추운 날이 너무 많지요. 그러나 하늘에 가까워 그 만큼 선기가 강합니다. 또 빈도가 워낙 한가한 사람인 까닭에 그 아이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로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본파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선기가 강한 만큼 대곤륜 구석구석에 이인이 많습니다. 제가 운 대협께 이 아이가 처한 상황을 듣는 순간
바로 떠오른 분들이 두 분 계셔서 한번 보이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순간 경의상이 힘없던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오! 정녕 보일만한 고인이 있으시오?”
그 즉각적인 반응을 본 청인자는 운청산이 처한 상황이 이청수만큼이나 불행하지만 적어도 경의상으로부터는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청인자는 가슴 뭉클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무당의 보천진인께서 손을 쓰지 못하셨으니 빈도가 어찌 장담을 하오리까? 허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경의상은 물기가 반짝이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오. 내 기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니 과연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소. 나 죽고 나면 누가 있어 이 아이에게
신경을 써줄 수 있을까 걱정이었소. 하나 이젠 되었소. 외백부가 손수 맡아 주신다는데 어찌 마음 편치 않으리오?”
“어머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봉을 끼고 사시다보니 무리가 간 것뿐입니다. 청봉이 곤륜에 도착하여 선연을 얻을
즈음이면 어머니도 기력을 되찾으실 것입니다.”
경의상은 운녹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운청산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청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의상을 마주볼 따름이었다. 그때 청인자는 경의상을 바라보고 있는 운녹산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객청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마다 진실이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듯 하더니, 방에 오니 운청산과는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운녹산이 문득 고개를 비틀었다. 청인자의 눈과 마주치자 운녹산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청인자도 반사적으로
미소를 짓고 나서 운청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경의상은 왼팔로 운청산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이 어린 것을 어떻게 만리타향으로 보내누. 사람은 믿음직해 보이나, 나 아니면 누구 품에서도 마음 편히 쉬질
못하는 녀석인데, 이제 어쩌누?”
경의상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순간 눈을 말똥말똥 뜨고 경의상을 바라보고 있던 운청산이 손을 뻗어 물기를 훔쳤다.
“하-알-머-니, 나-가?”
금방 닦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알고 있었느냐? 내 새끼! 너 없이 이 할미는 어이 살꼬?”
“시-더, 시-더.”
운청산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운청산이 울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대체로 수 년 전의
일이고 최근에 눈물을 보인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경우였다. 그랬기에 경의상의 슬픔은 더욱 더 커졌다.
“가야 하느니라. 정정한 네 할아버지는 네게 관심이 없고, 네 아비마저 너를 꺼려하는 기색이 엿보이며, 관심이 두는 자
역시 진정으로 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약하게 하여 귀신들을 만나고자 함이니, 이 할미 죽으면 이 집이야 말로
네게는 허당이니라. 허나 그 사람은 네 외백부니라.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이 할미를 따르듯 네가 믿고 따라야 하는
사람이니라. 아느냐? 이제는 네 스스로 견뎌야 한다. 네가 본다는 그 귀신들, 그들은 네 어미 되고 숙부들 되니라.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아라. 네 갈 곳은 좋은 곳이니라. 그곳에 가서 부디 선연을 만나 네 어미와 숙부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어라.
그리고 너도 세상을 활보하여라. 그것만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 알겠니, 청봉?”
꿈을 꾸었다. 운청산은 어떻게든 눈을 감아보려 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시커먼 무엇인가가 다가와 두 눈을 잡아 벌렸다.
눈앞에서 흉측한 모습들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소리로 운청산을 협박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서로에게 병장기를 휘둘러 피를 뿌렸고 운청산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할머니가 달려와 안아주기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한 떼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유일하게 운청산이 반기는 여인, 할머니가 엄마라 했던 그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가 슬프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운청산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여인이 과도하게 입 모양을 드러내며 아주 짧은 말을 오랜
시간 동안 말했기 때문이었다.
“따-라-가-거-라. 내-아-기.”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두 명의 귀신들에 의해 여인이 떠밀려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사라졌다.
또 다시 머리를 어지럽히는 소리들이 쉬지 않고 들렸다. 운청산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여인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난리를 치던 귀신들이 돌연 힘을 빼고는 슬며시 누워버렸다.
곤륜의 품은 광대하여 귀신도 능히 품나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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