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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재 분량 가운데서 운녹산의 독백과 회상은 왠지 갑작스럽고 무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추후 책이
출간될 즈음에 기연재 분량 전체를 수정하여 밸런스를 맞출 생각입니다. 오늘의 내용은 연재에만 한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제 이야기는 무협을 불법으로 퍼 가시는 정도의 양식을 가지신 분들에게 있어 지루할 테니까 별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퍼 가시는 분이 있으면 섭섭합니다. 안되는 것 아시죠? ^^;;;
사자(死者)의 눈물은 더 뜨겁다.
운청산은 오늘따라 유달리 혼란스러웠다. 이상한 날이었다. 사람들이 분주했다. 불러본 적도 없지만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지도
모르는 여인들이 평소와 다르게 자주 오갔다. 남자들은 숙연했고 아이들은 저희끼리 모여서 재잘거렸다.
그들 모두가 운청산을 귀찮게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운청산은 그저 햇볕바라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움직임이라 해봐야 한
시진에 몇 자 정도일 뿐이니 누구도 방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귀찮다고 했다.
운청산의 앞을 지나는 여인들은 거치적거린다며 옮겨가라 했고, 사내들은 말하지 않아도 눈살을 찌푸려 위협했으며, 늘 무언가에
바쁘던 아이들마저 한꺼번에 공을 들고 나와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그러나 운청산은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다. 참는다기보다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옳으리라.
하지만 한 가지만은 운청산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바로 먹구름이었다.
운청산이 사랑하는 햇볕은 여전히 짱짱했다. 그러나 검각산 위쪽으로 시커먼 먹구름이 해를 잡아먹을 듯 짙게 끼어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번 해를 먹으면 하루가 지나도 토해낼 것 같지 않았다.
운청산은 또 다시 햇볕을 외면하고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검각산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날아와 운청산의 이마를
후려쳤다.
“으!”
쪼그리고 앉아있던 운청산은 낮은 신음을 토해내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운청산은 이마를 매만지며 정체불명의 물체를
확인했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고 엮어 만든 공이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공이란 것이 해만큼 관심이 가는 물건도 아니었기에, 운청산은 금새 잊고 다시 해를 바라보았다.
“야! 바보야. 공 좀 던져봐.”
운청산의 왼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나 운청산은 그저 앉은 자세를 유지할 따름이었다.
“야, 조로아(早老兒)! 공 좀 달라니까.”
운청산은 여전히 앉아있었다.
“저 자식이!”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운청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청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고 옆으로 몇
걸음 움직여야만 했다. 다가온 아이들이 운청산의 앞에 서서 햇볕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운청산보다 서너 살 더 먹었을 것 같은 아이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운청산을 노려보았다.
“너, 귀신같은 자식아! 죽을래?”
운강인이었다. 운강인은 그래도 운청산이 자신을 보지도 않자 바로 발을 들어 운청산의 얼굴을 후려차려 했다. 그때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뒤에서 운강인을 잡았다.
“놔. 놔봐. 이런 바보 같은 놈은 맞아야 제정신을 차린다구. 놓으란 말이야.”
운강인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뒤에 있는 소년은 운강인을 놓지 않았다.
“강인아! 안돼. 저 자식 건드리면 난리난단 말이야. 기억 안나? 노태태 화나면 우리도 엄마한테 죽어. 엄마가 절대
건드리지 말라 그랬단 말이야.”
주위에 모여 있던 아이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운강인도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씩씩거리며 힘을 뺐다. 뒤에
있던 소년이 말했다.
“기억나지?”
정확히 이년 전 오늘의 일이었다. 그날의 집안 분위기도 오늘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금의대원들이 몰살한지 육년 째가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본가, 방가를 다해서 스물이 넘는 집에서 조용히 제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아낙네들은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제사
준비를 했고, 남자들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짐이 되는 아이들은 집밖으로 내몰렸다.
그날도 운청산은 햇볕바라기에 여념이 없었고 아이들은 근처에서 놀았다. 목추경의 영향으로 안그래도 운청산을 미워하는 운강인과
귀신들린 아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결국 운청산을 건드렸다. 운청산은 맞고 차이고 굴러 사흘 동안 신음을
토하며 경의상의 품속에서 지내야 했다.
마침내 경의상이 대노했다. 자애롭고 공평무사한 노태태, 경의상은 운검정의 둘째부인 상취월을 제외하고 운가의 모든 아낙네들을
한자리에 모아 불호령을 내렸다.
화낼 줄 모른다는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더 무섭다 했다. 경의상의 노기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아낙네들은 간이 오그라들어
오금을 펴지 못했다.
목추경이 용기를 내어 다 같은 손잔데 왜 운청산만 그렇게 싸고 도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경의상의 노기를
돋우었을 따름이었다.
목추경은 시집와서 처음으로, 아니 평생 처음으로 따귀를 맞았다. 어미의 자질에 대해 무지막지한 추궁 받았고 아내의 덕에
대한 길고긴 강의를 들었다.
목추경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맞는 동안 아낙네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반 시진 동안이나 부들부들 떨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날 운가의 남자들은 모두 밥을 굶거나 밤늦은 저녁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경의상은 오늘 안에 회초리 소리 나지 않으면 각오하라 소리 질렀고, 재발할 때는 자신이
어찌 행동할지 자신도 모른다고 협박했다.
그 일로 자애롭고 불편부당한 노부인 경의상은 늙어서 편협하게 변한 할망구라고 확정지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운청산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경의상의 남은 삶은 마치 운청산을 위한 것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정말 회초리 소리가 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로 아이들이 운청산을 건드리는 일은 없어졌다. 그들은 다만
운청산을 조로아나 귀신같은 놈 혹은 바보라고 부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었다.
그날을 떠올린 운강인은 그때 어미가 분통이 터져서 돌아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운청산 따위는 아예 상관도 하지 말라는
애원을 들었다.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다.
운강인은 목추경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에 번진 불꽃을 사그라뜨렸다. 그리고 쳇 소리를 내뱉으며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야! 때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냐?”
아이들이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운강인이 미소를 더욱 짓게 만들고 말했다.
“저 자식이 햇볕 쬐는 거 무지 좋아하잖아?”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려버리자. 앞에서 따라가며 가려보자구. 혹시 알아. 재밌는 일이 생길지?”
아이들도 동시에 미소 지었다.
운강인과 아이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빙글거리며 운청산의 앞에 섰다. 다시 그늘이 생기자 운청산은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따라가며 햇살을 가렸다.
운청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러나 병약한 운청산이 그들을 따돌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운청산은 결국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로 헉헉거렸다. 운청산은 처음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리고 모두
각인시키겠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순간 아이들 가운데 몇이 눈을 치뜨며 주춤거렸다.
그때 운청산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으으으으으으으으!”
아이들로서는 처음으로 듣는 운청산의 목소리였다. 발작이 난 것 같은 신음이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다시 햇볕 아래 놓이게 된 운청산이 겨우 일어나 앉았다. 이마는 땅에 찍은 자국이 역력하고 손가락 사이에는 수십
올의 머리카락들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을 털고 다시 쪼그려 앉았다. 그런 그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해가 위태로웠다.
검각산의 시커먼 먹구름이 해를 삼키려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직 반 시진은 더 햇볕을 즐길 수 있으련만, 운청산은 급히 일어나 뒷걸음질치며 은향당으로 돌아갔다.
“없다. 대부인이 없어. 내가 갈 거야.”
“안돼. 오늘은 내 차례야. 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우리가 무슨 형제야? 저리 꺼져!”
“지랄하지마, 이 새끼야. 우리가 갈 거다.”
“나야, 임마. 이 새끼들 다 찢어버린다? 오늘은 나야.”
“으아아아!”
“이얍!”
“그만! 제발 그만들 하세요! 우리 청산이 견디지 못해요. 그만 좀 하란 말이에욧! 으흐흐흐흑! 제발, 그만!”
“저리 가! 형수고 뭐고 없어! 난 원래부터 빙혼귀 그 새끼 싫어했어! 너도 죽을래?”
뒷걸음질로 은향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들어선 운청산은 굳게 닫힌 방문을 확인하고서 안절부절못했다. 운청산은 먹구름에 반쯤
먹힌 해와 닫힌 문 바라보기를 번갈아 하면서 얼굴을 점점 일그러뜨렸다. 시퍼렇게 피멍이 든 이마의 주름살은 깊게 패이고
입술을 열릴 듯 말 듯 계속 움찔거렸다.
겨우 신발을 벗은 운청산은 힘겹게 문을 열었다. 경의상이 없었다.
“으으으, 하-알-머, 으으으아!”
운청산은 맨발로 바닥에 내려서서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오직 끄트머리만 남은 태양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차츰 그늘이
커지고 태양이 사라지고 주변이 완전히 그늘로 변했다.
마당을 오락가락하던 운청산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벽에다 머리를
찍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으아아아아아아! 시더, 시더, 시더어어어어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운청산이 분명히 말했다. 어린아이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칠고 탁한 소리였고 혀 짧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싫어”라고 달아 외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벽을 찍어대던 움직임마저도 사라졌다.
운청산은 웅크린 채 머리를 벽에 대고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있었다.
반 각쯤 지났을까. 운청산이 스르륵 일어섰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전면만 바라보며 방밖으로 걸어 나갔다. 신발도 신지 않고
유령처럼 두둥실 흘러갔다. 은향당을 벗어났고 그가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천의각 앞마당도 지나갔다.
가끔씩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건드리지 말라는 노태태의 지엄한 명이 있었던 터라 고개만 갸웃거릴 뿐
제지 하지 않았다.
운청산은 운가에서 살아온 지난 육년간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거리낌 없이 흘러갔다. 마치 잘 아는 길을 가듯 중문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꺾어 지났고 아이에게는 미로와 같을 담들과 화원들을 아는 길처럼 걸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걷던 운청산이 한 중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운청산의 눈에 기쁘고 슬픈 감정이
교차하며 드러났다.
운청산은 중문을 지나고 꽃밭을 따라서 아름다운 누각 앞에 이르렀다. 금정당이라 쓰인 누각의 현판을 바라보는 운청산의 눈에서
수십 가지 감회가 회오리쳤다.
운청산은 누각과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적막하다 할 만큼 조용했다.
운청산은 누각 위로 올라갔다. 마루를 걸을 때마다 희뿌연 발자국들이 찍혔다.
운청산이 분명히 알아듣고 뜻까지 새길 줄 안다는 것을 깨달은 경의상은 이미 다시 한번 천자문을 읽었고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이어서 소학까지 읽었다. 그러나 때로는 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하여 서고를
찾았는데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서고에서 열선전(列仙傳)을 꺼내어 밖으로 나오는 순간 경의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아직 반 시진은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검각산의 먹구름이 이미 해를 삼킨 후였다.
경의상은 정신없이 은향당을 향해 뛰었다. 중문을 들어서서 마당을 지난 후 은향당 앞에 운청산의 신발이 흩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경의상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들었다. 다행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의상은 그래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방으로 들어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쿠! 내 새끼! 장하구---.”
경의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경의상은 아무도 없는 방안임에 틀림없는데도 방 구석구석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뒤진 후에
다시 방밖으로 나섰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이놈들! 아무도 없어?”
경의상이 정신없이 소리치자 은향당의 여기저기에서 시비, 하인들이 튀어나와 감히 경의상을 올려다볼 생각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청봉을 찾아라. 은향당은 물론이고 집안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 빨리 찾아와! 어서!”
시비 하인들은 이년 전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처음 듣는 경의상의 노성이었기에,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옷자락 소리가 날
정도로 서둘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경의상은 어지러운 듯 마루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청봉아! 어디 갔느냐? 어디 있어, 이놈아?”
후다닥거리는 소리, 들썩이는 소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운가의 이곳저곳에서 들리고 보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소득
없이는 경의상 앞에 나설 생각이 없는 듯, 반각이 넘어도 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이 없었다.
다시 반각이 흘렀을 때, 중문에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청봉이 없어지다니요?”
운녹산이었다. 경의상은 운녹산을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이놈! 어서 가거라. 가서 찾아와. 청봉을 찾아오란 말이다.”
그때 은향당 밖으로 나갔던 중년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님. 청봉 도련님이 서향 당각(堂閣)들 쪽으로 가시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답니다요.”
경의상은 하얗게 질린 입술을 잘근 씹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운녹산이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경의상이 중년하인에게 말했다.
“자네는 앞서 가서 그 아이를 찾게. 내 곧 따라가겠네.”
중년하인이 허리를 접어보이고 허겁지겁 은향당을 빠져나갔다.
경의상이 운녹산의 부축을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청봉아!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갔더란 말이냐? 기다려라. 이 할미가 간다.”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의 맞은편에는 두 개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 있는 제단이 있고 그 앞에는 몇 가지 제물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타는 향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강신(降神)을 청하는 분향(焚香)이 이루어지기 전인 듯 했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봉운정이 마지막 제물음식을 진설하는 중이었고, 제단의 왼쪽 벽에 붙어있는 소탁의 두
의자에는 상취월과 운현산의 아들 운화인(雲華仁)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방안에는 세 사람이나 있었건만 분위기는 너무나 슬프고 조용하여 숙연하게 느껴졌다. 봉운정은 제단 주변을
오락가락하면서 다 차려진 제물들을 쓰다듬고 다녔고, 상취월은 슬픔을 억제하려는 듯 일부러 냉막한 표정이었으며, 운화인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어미야! 시아버지는 오늘도 오시지 않으리라. 먼저 간 자식들의 제사는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후! 그러니 이제
분향하여도 되지 않겠느냐?”
냉막한 얼굴과는 달리 상취월의 음성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운화인이 자신의 할 일을 안다는 듯
일어섰고, 봉운정도 차분한 손놀림으로 위패를 열고 돌아섰다.
봉의정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슬픔 가득한 눈빛을 드러낸 얼굴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니 오히려 더 슬퍼보였다. 그
눈들이 막 열린 문을 스쳤다가 다시 문으로 돌아가 동그랗게 커졌다. 상취월과 운화인은 봉운정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던
터라, 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선도 즉시 문을 향했다.
문을 한 발 넘어서서 운청산이 서있었다.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상취월과 봉운정 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봉운정 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청산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상취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전과는 달리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저 아이가 도대체 누구냐?”
운현산과 운경산이 한꺼번에 죽어버린 이후로 지금까지 자신의 거처와 금정당(金精堂)만 오갔던 상취월은 운청산을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다.
얼굴은 알고 있는 봉운정이 대답했다.
“저 아이가 바로 노태태께서 키우는 시아주버니의 막내입니다.”
상취월이 두 눈에서 한광을 뿜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뭐라? 그럼 저 아이가 녹산의 그 귀신들렸다는 아이란 말이냐?”
원래부터 따뜻한 성품이 아닌 그녀였다. 겉으로는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경의상에게 묘한 경쟁의식을 지닌 그녀였다. 운녹산을
지독시리 싫어한 그녀였다. 두 아들을 잃고 나서는 아예 운녹산을 증오하는 그녀였다.
그런 상취월이 두 아들이 죽었던 그 즈음에 잉태된 운청산을 좋게 생각할 리 만무했다. 그런데 두 아들의 혼을 위로하려는
마당에 운청산이 지저분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녀가 너그럽게 봐주리라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연 것! 분향도 하기 전에 잡귀부터 끌어들이다니---.”
상취월과 운청산의 거리는 삼장 가량 되었다. 그러나 양가의 딸로 운검정과 결합하여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경의상과는
달리, 조화풍운창(造化風雲槍)으로 명성을 날리는 섬서 상가(桑家)의 딸인 상취월에게는 먼 거리가 아니었다.
왼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후려친 상취월이 단숨에 운천상에게로 미끄러져 갔다. 상취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안됩니다, 어머니!”
운청산이 경의상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아이인가를 잘 아는 봉운정이 놀라서 외쳤으나 상취월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녀의 손바닥과 운청산의 가슴이 한 자에 이르렀다.
물론 상취월이라고 운청산을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되게 밀어서 문밖으로 퉁겨내 버릴 작정이었다.
손바닥이 막 가슴에 닿을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그 어떤 동요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갖 감회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상취월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보고 있었다.
상취월은 정체 모를 아찔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후려치려던 손바닥을 오므려 운청산의 옷섶을 휘어잡고 감아 돌렸다.
그리고 허공을 휘도는 운청산의 신형을 발로 건드려 가급적이면 충격 없이 떨어지도록 배려했다.
애초에 방밖으로 밀어내겠다는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운청산은 방 중앙에 떨어졌다. 운청산이 얼마나 약한 아이인지 잘 아는
봉운정은 급히 달려가 운청산을 안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운청산은 낮은 신음성조차 흘리지 않고 소리 없이 일어섰다.
봉운정은 다가가다 멈추어 서서 혼란스런 눈으로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청산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봉운정은 자신도 모르게 운청산과 제단 사이를 비워주며 운청산을 보고 다시 운청산이 보는 곳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운청산은 그 어떤 제물 음식도 아닌 운현산의 위패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봉운정은 다시 운청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봉운정은 그 시린 눈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아픔과 뭉클함이 느꼈다. 너무 아파 전신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는 것만 같았다.
그때 운청산이 다시 걸음을 옮겨 제단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운청산은 많은 제물음식들을 스치듯 바라보고서 바로 손을 뻗어
제물을 하나 집었다. 말린 감이었다.
운청산이 아직 제례도 치루지 못한 제물을 건드렸음에도,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상취월마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
일언반구도 없었다.
운청산은 감을 먹었다. 동그랗게 오므라든 감을 꼭지도 따지 않은 채 조금씩 주변을 돌려가며 허겁지겁 먹었다.
봉운정은 멍한 눈빛으로 운청산의 말린 감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봉운정은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게 뭐예요? 사내답지 못하게 깨작깨작. 그렇다고 말린 감이 모자라요? 옆에 잔뜩 쌓아두었으면서---. 보기 싫어요.
어서 한 입에 퐁 못 넣어욧!>
<싫~어. 한입으로 끝내는 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는 말린 감도 한입에 넣기에는 큰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리게 된 봉운정은 아련한 눈빛으로 운청산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마지막 꼭지 근처까지 다 먹은 운청산이 씨를 뱉어 조심스럽게 제단 위에 놓았다.
봉운정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씨로 또 감나무 한 그루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지?>
봉운정의 눈에 차곡차곡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운청산이 돌아섰다. 그리고 봉운정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다른 눈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눈을 보고 또 다른 눈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봉운정은 무딘 여자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 순간 운청산이 아직까지 들고 있던 감 꼬지를 봉운정에게 휙 던져버렸다. 꼭지가 봉운정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저, 저것이---.”
그때까지 넋 놓고 보고만 있던 상취월이 노기 띤 목소리로 외치며 다가오려 했다.
“어머니! 그이에요. 그이만이 저렇게 감을 먹고, 저렇게 씨를 아끼며, 저렇게 꼭지를 제게 던지지요.”
봉운정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상취월을 제지하고 운청산을 응시했다. 운청산이 입가를 부드럽게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봉운정이 모아두었던 눈물을 주르륵 흘려보냈다.
상취월은 망연한 눈빛으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천도재를 지냈건만, 내 자식이 어떻게 저 안에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상취월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털퍼덕 엉덩방아를 찍었다. 운화인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상취월에게로 달려가 부축하는
시늉을 했다.
봉운정도 소리 내어 울음을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서 안아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작은
몸에 안겨야 하는지, 뭐라 불러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상취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때 운청산이 봉운정에게 반짝 눈물을 보이고 상취월쪽으로
다가갔다.
상취월과 운화인이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운청산은 걸어가면서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화아이인, 내에 아-드-을.”
유부에서 흘러나온 듯 거칠고 낮고 탁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운화인은 온갖 감정이 충돌하는 듯한 운청산의 눈빛을 바라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상취월에게서 떨어졌다.
“아니다, 아니야. 내 아들이 아니야.”
상취월이 연신 같은 소리만 뱉어냈다. 그러나 이미 넋이 나간 듯, 운화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운화인은 주춤주춤 하면서
운청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보다 세 치나 작은 운청산을 꼭 안고서 그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운화인에게는 운청산의 속에 아비 운현산이 있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 눈을 보고서 감히 포옹을 거부할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반드시 안아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운청산이 눈을 지그시 감고 운화인의 가슴을 느꼈다. 그리고 약간의 힘을 주어 운화인을 밀어내고 두 손으로 운화인의 양 볼을
붙잡았다. 운화인이 웃었다. 운청산은 울면서 웃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운청산이 운화인을 쓰다듬던 두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취월에게로 다가갔다. 상취월은
운청산이 다가온다는 것도 모르고 바닥을 보며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곧 운청산의 시커먼 맨발을 발견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운청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상취월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운청산이 전신을 부르르르 떨다가 다시 눈을 떴다.
운청산의 눈빛이 변했다. 그윽하던 그 눈빛에 개구쟁이 같은 장난기가 어렸다. 상취월은 멍하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때
운청산이 오른손을 뻗어 주저앉아 있는 상취월의 귀 옆머리를 붙잡아 꼬기 시작했다.
“어-엄-마!”
상취월이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이제는 믿는 것이었다. 그렇게 옆머리를 꼬며 어리광부리는 아이를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어른스러워 나이가 들자 자신도 조심스러웠던 운현산과는 달리 약관이 넘어서도 어리광을 부려 자신의 굳은
마음을 곧잘 풀어주었던 아이.
상취월은 덥썩 운청산을 끌어안았다.
“경산아! 으흐흐흐흑! 내 새끼. 이 작은 몸 안에 우리 현산이 경산이가 들어있구나. 어이 할까? 편히 귀천(歸天)하지
못하고 이렇게 귀신이 되었으니 이 일을 어이해야 한단 말이더냐? 으흐흐흐흑!”
상취월은 운청산을 보듬어 안고 얼굴을 마구 비볐다. 너무나 가녀린 운청산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그래도 상취월은 눈치
채지 못하고 보듬고 쓰다듬고 비벼댔다.
그때 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청봉아!”
순간 말짱하던 운청산이 고개를 뒤로 꺾고 축 늘어졌다.
“경산아! 경산아! 안된다. 안돼! 흐흐흐흑!”
경의상이 달려가 운청산의 목을 받쳐 들면서 말했다.
“이리 주시게.”
순간 상취월이 운청산의 가슴 위로 엎어지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형님! 그럴 수는 없어요. 안됩니다.”
경의상이 낮게 외쳤다.
“자네가 이 아이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는 겐가? 이리 주시게.”
상취월이 고개를 살짝 들어 경의상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상관없다니요? 상관이 있습니다. 이 안에 우리 현산이 있고 경산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못
드립니다. 이 손 놓으세요.”
상취월은 무서운 눈빛으로 경의상을 노려보며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그러나 경의상은 상취월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넋을 잃은 듯 멍한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경산, 현산? 그 아이들이 우리 청봉 안에?”
상취월은 계속 운청산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경의상은 망연자실해 있을 때, 한쪽에서는 운녹산이 숨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하얗게 질려있었다.
‘알았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운녹산은 힘겹게 낯빛을 추스르고 봉운정에게로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처음에는 감정이 격해 말을 잇지 못하던 봉운정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운청산이 말을 했다는 대목에서 운녹산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봉운정의 심정으로는 그것을 유의 깊게 살필
여력이 없었다. 운녹산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비후봉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내가 언제 현산을 무시했던가? 아니다. 그때 난 잘못한 것이 없다. 후위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현산의 뜻을 존중하여 그 지저분한 늙은이에게 허리까지 접어가면서 부탁을 했다. 현산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해주기를 원했지만 그것이야 현산의 선택이
아니던가? 난 잘못한 것이 없다. 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나 운녹산은 알고 있었다. 곽자렴을 먼저 돌려보낸 것, 그것은 적어도 탁탑참요검만큼은 안전하게 돌려보내야 최소한의
질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운녹산은 그날 분명히 보았다. 원치 않으면서 운현산을 동생이라 부르고 사과했던 것, 그것을 운현산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으면서까지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조롱했다는 것, 속내를 다 알면서도 속아준다고 비웃음을 날렸던 것, 분명히
느꼈었다.
운녹산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치떴다. 그리고 운청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으로는 잘못이 없다 자위할 수 있어도 운청산을
보면 항상 죄책감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이청수가 튀어나올 것 같고 운현산이 비웃을 것만 같았다. 운경산 등이 달려 나와 왜 너만 살아있냐고, 너도
죽으라고 다리를 붙잡고 늘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 경의상이 천장을 보고 넋두리하듯 읊조렸다.
“그랬었어. 청봉 어미 말고도 여덟이 더 있다고 했었지. 그 여덟이었어. 뒤늦게 데려왔다 생각했었던 그 여덟 넋들이 우리
청봉을 따라온 것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경의상은 슬픔 그득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운청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운청산이 깨어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경의상을
발견했다.
“하-알-머-니!”
경의상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두 손으로 운청산의 머리를 감싸며 얼굴을 갖다 붙였다.
“오냐, 내 새끼. 네가 방금 할머니라 불렀느냐? 분명히 할머니라 불렀어?”
경의상의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졌다. 상취월은 운청산에게서 더 이상 운경산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하여
운청산으로부터 떨어졌다. 경의상이 운청산의 허약한 육신을 안아들었다. 운청산은 안도한 듯 입가를 씰룩이고 나서 눈을
운녹산이 경의상에게로 다가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안겠습니다.”
경의상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내 손을 떠나며 깨서 울게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너무 힘드십니다.”
“아니야. 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 같구나. 힘들지 않다. 너는 모른다. 이 아이가 얼마나
영특한지, 얼마나 따뜻한 아인지 너는 아무 것도 몰라.”
경의상은 힘없이 웃으며 운청산의 볼을 쓰다듬었다.
운녹산은 심각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응시했다.
‘저도 압니다. 그 아이, 참으로 영특하더이다. 단 한번 펼쳤건만 청룡팔영의 움직임을 알아채더이다. 하지만 전 그 아이를
안 봤으면 합니다. 그 아이의 입을 통해서 청수의 원망을 듣고 현산의 조롱을 들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운녹산이 경의상에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더 이상은 어머니도 그 아이를 감당하실 수 없습니다. 보천진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좋은 곳을 찾아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안돼요!”
“안된다, 이놈!”
쥐어짜는 듯한 반대의 목소리는 경의상이 아닌 봉운정과 상취월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운녹산이 놀란 듯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경의상이 차분히 말했다.
“오늘 내가 너무 놀라 그렇지, 아직은 끄덕 없다. 이 아이가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만이라도 내가 키울 것이다.”
운녹산이 화색이 도는 두 사람에게 눈을 떼고 다시 경의상에게 단호히 말했다.
“안됩니다. 보내겠습니다. 그것이 이 아이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그것이 이 아이 안에 있을지 모를 청수와 현산 등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운녹산이 다시 운봉정과 상취월을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괜히 이 아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십시오. 이 아이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 안에 있는 영혼은 쉽게 구제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현산과 경산의 넋이 구천에서 떠돌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오늘 일은 함구하여 주시고 앞으로도 쓸데없는 행동은
삼가 하여 주십시오.”
운녹산은 원망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취월과 봉운정을 외면하고서, 경의상에게 운청산을 빼앗다시피 들어 다시 경의상의
등에 업혀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경의상을 업어 은향당으로 향했다.
자의 눈물은 더 뜨겁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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