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79)

경의상은 탁자에 앉으며 운청산을 안아 무릎에 앉힌 후 천자문을 앞으로 당겼다. 경의상이 책을 뒤적이며 말했다. 

“어디 보자.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운청산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오른손을 뻗어 펼쳐져 있던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경의상이 웃으며 운청산을 

내려다보았다. 

“어이쿠! 우리 청봉!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렇지! 공곡전성(空谷傳聲), 여기서부터 읽을 차례지?”

운청산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경의상은 운청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냥 가만히 있자니 무료하기도 해서 시작한 천자문(千字文)이었다. 그러나 늘 경의상 혼자 읽고 혼자 말했다. 애초에 공부가 

될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은커녕 작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아서 과연 알아듣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까막눈은 

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며칠 전부터 심심파적 삼아 일과처럼 행할 따름이었다. 

경의상은 운청산에게서 눈을 거두고 몸을 앞뒤로 가볍게 흔들며 읽기 시작했다. 

“빌 공, 골 곡, 전할 전, 소리 성. 공곡전성. 소리는 골짜기와 텅 빈 하늘을 통해 전해진다. 무슨 뜻인고 하니---. 

듣고 보는 이 아무도 없지만 좋은 일을 하면 그 이름은 소리와 같이 멀리 전해진다는 뜻으로 새기면 될 게다. 알겠느냐?”

경의상이 다시 운청산을 내려다보았다. 운청산은 무표정하게 마주볼 따름이었다. 경의상은 싱긋 웃고서 다시 한번 공곡전성의 

낱자 해석과 뜻풀이를 했다. 

“자 이번 것은 빌 허, 집 당, 익힐 습, 들을 청. 허당습청(虛堂習聽). 배우고 익힐 것이 없으면 빈집과 같다. 무슨 

뜻인고 하니---. 집이란 단순히 먹고 자는 곳이 아니라 아이가 좋은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가정을 일구려면 부모가 아이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니라.”

평소 같으면 “알겠느냐?”하면서 고개를 숙여 운청산을 봤어야 했다. 그러나 경의상은 갑자기 노기 띤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뱉어냈다. 

“몹쓸 놈! 아이가 배우고 익힐 나이가 되었건만 코빼기조차 볼 수 없으니 네놈이 과연 아비라 불릴 자격이 있는 놈이더냐?”

무표정하던 운청산이 눈을 치뜨며 경의상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경의상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급히 얼굴을 바꾸어 활짝 

웃었다. 

“미안하구나, 청봉! 허당습청이라 해 놓고 면전에서 아비를 욕했구나. 이 할미가 잘못했다. 용서해 주겠지?”

운청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을 바라보았다. 경의상은 낮은 한숨을 토하고 운청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하면 뭐하누? 청봉에게는 이 집이 허당일 뿐인 걸.”

운청산은 중천에 뜬 태양의 위치를 보고 소리를 내는 배를 살펴 은향당(隱香堂)으로 돌아갔다. 해를 보며 조심스럽게 옆걸음질 

하던 운청산은 활짝 열린 은향당의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경의상의 방문이 열려있었고 막 시비가 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운청산을 찜찜한 눈초리로 힐끔 쳐다 본 시비는 급히 방에서 

멀어져갔다. 

운청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그 자리에 경의상이 활짝 웃으며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은 속도를 빨리 하여 

방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태양이 바라보이는 방문 앞쪽에 늘 그렇듯이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과도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눈에는 별 다른 감정이 엿보이지 않았다. 운청산은 경의상을 보며 매운 포채(泡寀)와 매운 회과육(回鍋肉) 

그리고 쌀밥을 가리켰다. 

경의상의 눈에 살짝 아픔이 어렸다. 하고 많은 음식 가운데 왜 하필이면 보통 아이들은 싫어하는 매운 포채와 회과육이겠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픈 것이었다. 

‘본능이 시키는 것이야. 모자라는 양기를 몸이 요구하는 것이야. 불쌍한 것!’

경의상은 그것들이라도 가급적이면 많이 먹이려고 정성들여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많이 먹지 않았다. 겨우 서너 

젓가락씩 먹은 후에는 경의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경의상은 안타까웠다. 식탐이 없는 아이에게 점심까지 정찬처럼 차려 먹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유달리 발육이 느린 

운청산이 너무 안쓰러워서였다. 품안에서 벗어나기 전에 어떻게든 튼실하게 키워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석아! 조금만 더 먹어라. 이 할미 생각해서 한 젓가락씩만 더 먹어.”

운청산은 잠시 경의상을 바라보더니 입을 벌렸다. 경의상이 활짝 웃으며 음식들을 한 젓가락씩 더 떠 넣었다. 

꼭꼭 씹어 삼키고 오물거림을 멈춘 운청산은 경의상을 바라보고 일어서려는 시늉을 했다. 바로 그때 경의상이 얇은 꼬챙이에 

끼운 산사고(山楂糕)가 담긴 접시를 운청산 앞으로 내밀었다. 

먹는 것으로는 양이 부족하다 생각한 것이었고, 너무 매운 것만 먹기에 바다에서 나는 재료인 한천으로 만든 차가운 산사고를 

먹이려 했던 것이었다. 

바다를 면하지 않은 사천에서는 보기 드문 음식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산사고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경의상을 응시했다.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의상이었지만, 그래도 먹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운청산은 결국 산사고를 들어 반을 베어 먹고 꼬챙이를 손에 든 채로 일어섰다. 그때서야 경의상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놀다 오너라.”

노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햇볕을 쬐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경의상은 늘 그렇게 말했다. 

운청산은 태양의 위치를 살피고 다시 방을 빠져나왔다. 운청산은 신발을 신자마자 나머지 산사고를 입안에 구겨 넣었다. 

산사고를 억지로 오물거리며 걷던 운청산이 갑자기 마당에 쪼그려 앉았다.

등을 바라보고 있던 경의상은 전에 없던 일이라 눈에 이채를 드리우며 살폈다. 운청산이 산사고를 꽂아두었던 그 꼬챙이로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는 것 같았다. 

경의상은 자신도 모르게 방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때 운청산이 일어서서 경의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가를 움찔거렸다. 

경의상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보기 힘든 운청산의 귀한 감정표현이요 환한 웃음임을. 그래서 그녀는 입가에 굵은 주름을 

잡으며 환히 웃어주었다.

운청산은 약간은 위태롭게 보이는 뜀박질로 은향당의 문으로 향했다. 경의상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운청산이 쪼그리고 앉아있던 

곳으로 갔다. 

“이런!”

경의상은 세상에 다시없을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동시에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거기에는 그림이 아니라 글자가 써있었다. 비록 

썼다기보다는 그렸다는 것이 맞을 삐뚤삐뚤한 글씨였지만 분명히 그녀가, 운청산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상관치 않고, 가르쳤던 

천자문의 구절이었다.

경의상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운등치우(雲騰致雨), 구름이 모이면 비가 내리기 마련이다. 녀석! 등(騰)자가 이게 뭔고? 한 획이 모자라지 않느냐? 

으흐흐흑!”

그녀가 그것을 무엇이라 새겨주었던가.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설사되어 먹은 것이 다 쏟아지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많이 모이면 반드시 다툼이 생긴다고 새겨주었다. 

경의상은 그 구절이 바로 자신이 더 먹이려 한 것에 항의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뻐서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보다 더 기쁜 것은 하루에 몇 구절씩 스치듯 읽고 지나갔을 따름인데,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쁨은 쓰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건만 오를 등 한 글자 빼고는 틀리지 않고 그려냈다는 것이었다. 

“누가 저 아이더러 바보라고 불렀더냐? 누가 저 아이더러 멍청이라 불렀더냐? 어디 네 연놈들 자식들을 모조리 끌고 와 

보거라. 저 아이 하나만 한가. 암! 준재(俊才)인 아비와 자모(慈母)인 어미 사이에서 난 아이다. 어찌 바보일 수 

있으랴? 네 연놈들은 모두 틀렸다, 이것들아!”

경의상의 눈이 오늘처럼 많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울면서 웃었고 계속해서 옷소매로 훔쳐졌다. 겨우 눈물을 멈춘 경의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미소를 지으며 문밖 공터 한가운데서 등을 보이고 있는 운청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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