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79)

사랑을 아는 아이는 가슴으로 말한다.  

        

곤륜장문의 셋째 제자 청인자는 시원한 호걸풍의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전면의 낡은 누각을 바라보았다. 

현판에는 분명히 태상궁(太上宮)이라 쓰여 있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그것을 궁이라 칭하지는 않으리라. 전체 규모를 보아도 

작은 방 스무 개가 나오지 않을 듯 작았고, 외양도 빗물이 세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할 만큼 낡아서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는 좋은 말은 어울리지가 않았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객들은 곤륜파의 궁과 누각들을 보고 곤륜의 청빈함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곤륜의 

쓰린 마음을 모르는 탓이었다. 태상궁의 고색누추함은 청빈함이 아니라 문파에 사람이 부족한 탓이었고 또 돈이 없는 탓일 

따름이었다. 

그나마도 태상궁은 주궁(主宮)이라 나은 축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상궁마저도 산에서 나무를 잘라와 땜질을 한 후에는 

칠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에휴!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구나. 구대문파 가운데서도 신비지문(神秘之門)이 일컬어지는 우리 곤륜의 주궁이 사실은 돈이 

없어 이 모양인 것을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으리라.”

청인자는 고개를 저으며 태상궁으로 들어갔다. 청인자는 몇 개의 기둥을 돌아 대전 좌측에 위치한 방 앞에 이르렀다. 그 

방문이 그나마 나머지 방문들보다 온전한 것을 보니 그곳이 바로 곤륜장문 운상자(雲上子)가 거처하는 곳이리라. 

“큼! 사부님, 청인입니다.”

안에서 즉각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청인자가 방안에 들어섰다. 탁자에 앉아있던 초로의 도인이 검신의 반이 녹슨 것 같이 검붉은 검 한 자루를 급히 탁자 아래로 

내렸다. 

언뜻 보았지만 고풍스런 검파에 새겨진 용문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청인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초로의 도인을 응시했다. 초로의 도인이 얼른 얼굴의 그늘을 지우고 환하게 웃으며 청인자를 맞았다. 

청인자는 스승의 미소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저 얼굴에 그늘이라니, 내가 잘못 봤을 거야.’ 

곤륜의 제자들이 장문인 운상자의 얼굴에 대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장문인으로서, 위엄이 떨어지는 얼굴형이다.” 하지만 

청인자는 그 말이 크게 예의를 벗어났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위엄은 고사하고 웃음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사실 운상자의 얼굴에 대한 일화는 많았다. 그 가운데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운상자의 스승인 곤륜검선 태을진인의 

말이었다. 

운상자는 자신에게 운상이란 도호를 내렸을 때 그 뜻을 물었다. 그때 태을진인은 한참 주저하다가 “근두운(觔斗雲)이 

생각나서---.”라고 말을 흐렸다 했다.

그렇게 이마에 가로주름 가득한데 운상자는 그도 모자란 듯 미간에 내천자가 그리고 있었다. 청인자는 일부러 운상자를 외면하며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운상자가 맞은 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흘 만에 만나놓고 본론부터 꺼내라는 소리냐? 사제지정이 어찌 그러할 수 있으랴? 우선 앉거라.”

청인자는 스승의 앞자리에 거리낌 없이 앉았다. 운상자는 청인자의 사양 한 번 하지 않는 예의 없음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내천자를 풀어헤치며 친근하게 물었다. 

“그래, 수련은 진전이 있느냐?”

순간 청인자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마치 지금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수련이라 하셨습니까?”

운상자는 왼손을 주먹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큼! 큼큼!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그냥 흘려들어라.”

청인자가 운상자의 어색한 얼굴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사부님! 뜸 들이지 말고 하실 말씀 있으면 바로 하세요. 이번엔 또 뭡니까?”

운상자는 잠시 청인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곡마래(曲麻萊) 한인들의 청원이 들어왔다. 그래서---.”

운상자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청인자가 운상자를 노려보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외면한 탓이었다. 

“청인아!”

운상자의 애타는 목소리에 청인자는 고개를 절래 흔들고서 다시 눈을 떴다. 

“또 신객(信客) 짓을 하라구요?”

운상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응! 이번에는 곡마래 뿐만이 아니라 마다(瑪多)에도 제법 일감이 있나 보더라. 어쩌면 사천에도 갈 수 있을 게야. 가서 

풍물 구경이나 실컷 하고 오너라.”

청인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운상자가 달래 듯 말했다. 

“이놈아! 우리가 아니면 천리타향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어찌 생사를 알 것이며 소식을 전하겠느냐? 불쌍타 생각하고 싫은 

내색 하지 마라.”

청인자가 눈을 뜨며 딱 부러지게 물었다.

“쌀 떨어져 갑니까?”

운상자가 청인자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 좀 걸릴 겁니다.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다녀와서 수 삼 년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 동안 굶어 죽지 마세요.”

운상자가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 걱정 말고 다녀오너라.”

청인자가 대답 없이 돌아서서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막 문을 연 후에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왜 만날 접니까? 사형들이야 그렇다 쳐도 사제에게는 체통이 안섭니다.”

운상자가 말했다. 

“그것은 네게 검에 대한 자질이 없음이요, 장사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탓인 걸 어찌 할까? 다른 놈들 보내봤자 네 반의반도 

못 벌어 올 것이 분명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잖느냐?”

청인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그때 방안에서 운상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인아! 이 사부는 옛날처럼 네 녀석과 함께 유랑하던 그때가 그립다. 다시 근두운에 너를 매달고 천하를 떠돌고 싶어.”

청인자는 아련한 눈빛으로 방문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저도 날아다닙니다. 사부님 옷자락에 매달릴 일 없지요.”

청인자는 닫힌 방문을 외면하며 쓸쓸하게 태상궁을 벗어났다. 청인자는 태상궁의 영역을 벗어나 동현당(東玄堂)으로 들어섰다. 

한때는 동현당의 서른여섯 개 방들마다 곤륜의 제자들이 들어찼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자신과 사형제 셋을 포함한 열한 명의 제자들만 기거하고 있었고, 더구나 지금 이 시간에는 텅 비어서 

적막감마저 느껴졌다.

청인자는 애써 씁쓸함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동쪽 창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목조침상이 방의 삼분지 일을 

채우며 놓여있고, 반대쪽에는 좌탁과 서책 몇 권이, 그리고 문 반대쪽에는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대나무를 잘라 받침을 만든 

사단 서가가 벽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정작 서가에 들어차 있어야 할 책들은 대여섯 권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청인자는 좌탁 옆 방 구석에 구겨져 있는 바랑을 열고 서가로 다가갔다. 위아래를 연신 훑던 청인자가 서가로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문방사우 하고, 괴황지가--- 아, 그 마저도 다 떨어졌군. 주사유는 남았나? 후! 그래도 이건 남아있구나. 어디 보자. 

상서(相書) 한 권에. 에휴, 먼지! 주역진해(周易眞解)에다가---. 그렇지! 돈 되려면 이거 이상 없지. 주사 먹여 키운 

도마뱀 가루.”

바랑에 온갖 잡다한 것들을 채운 청인자는 마지막으로 입고 있는 득라보다 조금은 덜 빛바랜 도복과 도관을 챙겨 넣었다.

“자아! 준비는 대충 된 것 같으니까 곤륜을 먹여 살리러 가볼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청인자는 뭔가 아쉬운 듯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침상 머리맡에 걸린 낡은 철검에 머물렀다. 

잠시 갈등하는 빛이 돌았으나 청인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가져가 봐야 뭐하나, 시비 밖에 더 붙겠어? 내가 누구냐? 경공만은 곤륜제일이라는 청인자니라. 가자.”

청인자는 세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청인자는 멀리 태상궁이 보이는 곳에 서서 한참 동안을 바라보았다. 

운상자의 노안이 떠올랐다. 갑갑한 생활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검에 집착하는 바가 큰 사형들 청학(淸鶴)과 

청우(淸羽)를 제쳐두고, 청인자 그와 늘 함께 세상을 떠돌아 다녔었다. 

만약 팔년 전, 사백 운룡자와 일곱 제자들이 통천동으로 조사배례를 갔다가 실종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운상자는 

지금 청인자와 함께 당장 바랑을 메고 떠났으리라.

청인자는 아련한 옛일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태상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청인자는 싱긋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순간 청인자는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웬 파발마의의 

노인이 바로 등 뒤에 서있었던 것이었다. 

“이놈아! 어디 가냐?”

“아휴! 그렇게 귀신같이 다가오지 말라니까요.”

청인자가 노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허 참! 그놈! 지가 무딘 건 생각도 않고 늙은이 경기 일게 소리를 질러? 어디 가냐구, 이놈아?”

청인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연덕스럽기만 한 노인을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휴! 웬일이십니까? 그냥 귀곡에 박혀 있지 않으시구요?”

“박혀 있어? 그놈, 말본새하고는---. 네 사부 말동무나 해주려고 왔다. 왜?”

“왜요? 다른 두 영감님들은 잡니까?”

노인이 눈알을 부라리는 시늉을 하며 손을 치켜 올렸다.

“이노무 자식이---. 내가 심심해서 온 게 아니고 네 놈 사부가 걱정 돼서 왔다니까.”

“쳇! 사부님은 영감님 오시면 골치 아파 한다구요. 친구도 아니잖아요? 숙부나 마찬가진데 오시면 마음 편하시겠어요?”

“그래서, 이놈아! 그래서 네 놈은 할아비나 마찬가지인 나를 이렇게 박대하느냐? 네 놈 사부 괴롭힌다고? 신객 짓 하러가는 

거면 어서 가버려라.”

노인은 짐짓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쓰고 태상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인자는 싱긋 웃으며 노인의 등에 대고 절했다. 

“놈! 안보니까 절하는구나. 하기야 그게 엎드려 절 받는 것보단 낫다.”

노인이 돌아서서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청인자가 다시 미소를 짓자 노인은 품속에서 노란 마포 꾸러미 하나를 꺼내 

청인자에게 던졌다. 

청인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심결에 받아든 꾸러미를 내려보다가 노인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놈! 네 얼굴 보니까, 이번엔 내려가도 별 소득 없을 게야. 골치 아픈 일만 생길 거고. 쓰다 남은 건데 그거 잘 팔면 

쌀값은 될 거다.”

노인은 더 이상 일 없다는 듯 청인자의 반응도 살피지 않고 돌아섰다. 청인자는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장난은 잘 쳐도 

빈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청인자는 내용물을 살피기도 전에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노인이 계속 걸으면서 말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곤륜파야, 인석아!”

청인자는 환하게 웃으며 노인의 등을 바라보다가, 노인이 태상궁 안으로 사라지자 그때서야 마포를 풀었다. 

“에구! 이게 웬 떡이야? 산삼이잖아? 적어도 오백 년은 묵었겠는데---. 그런데 쓰다 남은 것? 좋아. 한시름 덜었다. 

그-러-면, 그 녀석 얼굴이나 한번 보러갈까?”

청인자는 마포를 다시 여며 품속에 조심스럽게 간직하고 나서 태상궁 반대편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반선(半仙) 영감이 내가 신객 짓하러 간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에이! 모르겠다. 괜히 

귀곡(鬼谷)에 사시겠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청인자는 쉽게도 의문을 지워버리고 산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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