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각산 자체가 황량하지만 운영산의 눈앞에 있는 봉우리는 더욱 황폐하게 느껴졌다. 가끔씩 검은 안개가 낀다하여 흑무봉이라
불리는 봉우리였다. 검각산 중에서도 깊은 곳이고, 가끔씩 산을 가리는 검은 안개가 재수 없다 하여 사람들이 아예 가지를
않는 곳이기도 했다.
운영산은 뒤통수를 긁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흑무봉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운영산은 운가의 오행무대 가운데 검각산의 일에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화예대의 부대주였다. 만약 강호에 섞였다면 무공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당당히 한 이름 내어 걸고 행세를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 운영산이 오늘은 정말 죽을 맛을 보고 있었다. 존장의 풍모를 배운다는 의미에서 노소가 한조를 이루는 것까지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하필 그가 수행해야 할 인물이 가문의 수장인 운검정이니 조심스럽기가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 격으로 주작화운창에 익숙한 그가 오늘 사용해야 하는 병기는 그리 익숙하지 못한 검이었기에, 혹시라도
미숙함을 질책 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유불급, 긴장이 지나치면 그 또한 실수를 유발하는
법이다.
운영산은 그가 처음 회귀들을 마주했을 때 저질렀던 실수를 상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회귀들을 만났을 때 그는 미숙한 백호참마검을 펼쳤었다. 참요검에 참마검법이면 적절하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철검을 든 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
평소 펼쳐낼 수 있었던 검기의 거리를 떠올리며 참마검법을 펼쳤건만, 참요검에서 쏘아져 나오는 검기는 중도에서 뚝 끊기고
말았다. 그때 만약 운검정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창피하게도 쥐에게 중상을 입는 수모를 당했으리라.
운검정은, 보천자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했던 말들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운영산을 호되게 꾸짖었다. 일을 하다보면 잘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는 일이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그리고 요사한
기운은 음성이 강하니 차라리 주작기를 사용하라고 다시 충고했다.
운영산은 그때서야 비로소 오늘의 일에 왜 유독 화예대가 많이 투입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참요검의 검첨에서 쏘아져 나오는
주작기는 평소 그가 화운창을 들었을 때나 가능한 선홍빛을 띄었다. 거기다가 그가 결코 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검기의
회선까지 이루어내었다.
아쉽게도 그것은 운영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참요검의 영능이었다. 운영산이 주작기를 주입하여 베고 찌르기만 하면 회귀들이
회피하는 경우에도 검기는 요기를 쫓아가 끝내는 불태워버렸다.
흑무봉에 닿기 전의 일을 회상하던 운영산은 참요검의 영능이 한시적이며 요사마의 기운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반 철검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놓고도, 문득 한 자루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에이, 어디다 쓰게? 검이 내 전문이 아닌 바에야 의미가 없잖아. 한 우물을 파자고. 그래, 난 창이 좋아.’
운영산은 부질없는 생각을 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찌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영산은 그
즉시 참요검을 고쳐 잡고 돌아섰다.
과연 전면에서 다섯 마리의 회귀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운영산은 회귀들의 숫자가 의외로 적음을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때 운기정이 말했다.
“영산. 그만!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쥐들은 다른 이에게 맡겨두어라.”
처음에는 운검정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어째서 가만히 놓아두라는 것인가. 그런데 다시 보니 회귀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회귀들과는 기세가 달랐다. 털도 누워있었고 이빨과 손톱도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는 두려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흠! 다른 사람들에게 쫓겨 온 놈들인가? 이제야 두렵다 이 말이지? 오늘 교훈을 좀 얻었나 보네.
흡족한 미소를 짓던 운영산은 갑자기 등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운검정의 시선을 따라 몸을 비틀었다.
십여 장 앞쪽에 말라비틀어진 고사목들이 앙상한 몸체를 부끄럽게 드러내고 있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가지에 잎사귀 없으니 월광이 낱낱이 스며드는 것이 당연한데, 월광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듯 고사목
군락지에는 칙칙한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전신을 핥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주기적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운영산과 고사림 사이에서 눈치만 살피던 회귀들이 고사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멀리 돌아 사라졌다.
운영산은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있음을 확신하고 숨을 죽여 기척을 찾았다. 눈으로는 안된다 싶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의식으로 하여금 전신을 핥고 다시 고사목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차갑고 습한 기운을 따라가게 내버려 두었다.
고사림 깊은 곳까지 들어간 운영산의 의식은 역시 그 기운을 따라 운영산에게로 되돌아왔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한 운영산이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어 눈을 번쩍 치떴다.
“호흡?”
운영산은 느낌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운검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운검정은 숲을 직시하면서도 운영산의 의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 주었다.
운영산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보려 했다. 그때 숲 속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운영산은 귀를 기울였다.
“응애, 응애, 응애!”
작게 시작한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운영산의 애가 닳도록 확연하게 들려왔다. 운영산은 들어가 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 순간,
“요망한 것!”
운검정이 낯빛을 굳히고 차갑게 외친 후에 참요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만월의 정기를 머금고 차가운 한광을 내뿜던 참요검의
검신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어느새 불길에 휩싸였다.
운검정이 검을 내치자 검신을 감싸고 있던 화광이 고사목을 향해 날아갔다. 고사목들이 부러지고 불타올랐다. 운검정은 쉬지
않았다. 아예 초토화를 시켜버리겠다는 듯 사정없이 검을 내쳤다.
“응애, 응애, 응애, 응애!”
울음소리가 자지러졌다. 운영산이 깜짝 놀라 운검정에게 말했다.
“가주, 아이가---.”
그러나 운영산은 운검정의 기세에 질려 하고자 하는 말을 입 안에서만 웅얼거렸다. 그 사이에 산기슭을 타고 삼십여 장이나
형성된 고사림의 전면 반이 불타올랐다.
운검정은 여전히 차가운 낯빛으로 불타오르는 고사림을 바라보며 검을 거두었다.
“영산! 이런 요마굴에서 아이가 살아 있을 것 같으냐?”
운영산은 그때서야 크게 깨달은 듯 눈을 치뜨고 고사림을 바라보았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나 애절하여 깜빡 속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때 운검정이 차갑게 외쳤다.
“그래도 정체를 아니 드러낸다?”
운검정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참요검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운영산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동경을 다오.”
운영산이 지체 없이 직경이 한 자 가량 되는 원반형의 동경을 건넸다. 운검정은 동경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쉐에에에엥!
맹렬하게 휘돌며 허공을 가른 동경이 운검정과 고사림 사이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운검정의 손끝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이동했다.
동경에 부딪친 월광은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고사림 뒤쪽까지 두루 비췄다. 월광이 고사림의 후면 왼쪽을 비추는 순간,
자지러지던 아이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운영산은 눈을 부릅떴다. 고사림 속에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동경이 검으로 바뀌었을 때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때 운검정이 동경을 허공에 멈춰 세우고 오직 한 곳, 울음소리가 끊어졌던 그 장소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하아아아!”
고사목 안에서 절정에 이르지 못한 여인의 안타까운 신음성처럼 유혹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얼음처럼 차갑고 시커먼
안개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직 불타지 않은 고사림 후면의 나무들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후우우우우!”
바람소리 들려오자 검은 안개가 운검정이 만들어낸 불을 압도하며 고사림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푸쉬쉭, 소리가 들려오며
불이 꺼지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연기에 닿은 땅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호흡을 멈춰라!”
운검정이 소리치자 운영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호흡을 차단했다.
바로 그때 검은 안개 속에서 검붉은 창 하나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운영산에게 날아왔다. 그러나 운영산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록 운검정을 수행하고 있기에 진중한 척 하고 있었지만 타고난 성정이 화기가 강한 그였다. 오히려 득달같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참요검을 휘둘렀다.
이장을 넘게 뻗은 붉은 기운과 붉은 창이 맞부딪쳤다. 운영산은 그때서야 당황했다. 충돌감이 느껴져야 할 텐데 참요검의
기운은 창을 지나 앞으로 뻗어나갔다. 창이 살아있는 듯 두 갈래로 갈라져 운영산의 양 허리를 동시에 노리고 날아왔다.
운영산은 급히 발뒤축으로 땅을 찍어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두 창첨은 이미 운영산의 허리를 꿰뚫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운영산은 뒤늦게 땅을 박차며 암울한 눈빛으로 붉은 창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금광이 번득이더니 운영산의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날카롭던 창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고사림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쉬이이이이이익!”
운영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앞을 바라보니 그의 앞에 운검정의 등판이 고사림을 가리고 있었다. 운영산은 옆으로 한 발
이동하여 고사림을 응시했다.
검은 안개가 고사림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고 거기에는 피를 뿜어대는 혓바닥을 입안으로 말아 들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괴이하고 끔찍한 모습이었다. 요기가 만연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웃었을지도 모르리라. 몸통은 없고 오직 목과 그 위로 사람
둘을 붙여 놓은 듯한 크기의 얼굴이 하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라는 것이 정말로 괴이했다. 언뜻 보면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쥐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얼굴형에 코는 단지 두 구멍만 있어 벌름거리고 입은 얼굴 전체를
가로지른다 할 만큼 쭉 찢어져 있었다. 거기다가 피부는 누더기를 기워 누빈 듯 거칠었고, 찢어진 두 눈 속의 눈동자는
고양이의 눈처럼 위아래를 가로질러 꽉 채운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저것이 무엇이오니까?”
평소라면 어렵기만 한 가주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리라. 차라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옆구리를 찔러 소곤거리거나 꾹
참았다가 끝내 아는 사람을 찾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운영산은 운검정이 가주라는 사실조차 잊고 물었다.
운검정은 그것을 응시하면서도 차분히 대답해주었다.
“보천진인께서 사귀라 칭한 것이리라. 내 보기에는 설 묵은 인면사(人面蛇)처럼 보이는구나.”
“인면사?”
운영산은 홀로 중얼거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방금 전 그의 허리를 노렸던 두 개의 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창이 아니었다. 일
장 앞에 서 있는 운검정의 발 뒤에서부터 갈라져서 운영산의 발끝에 나뒹구는 고깃덩어리였다.
운영산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그럼 이것은 혓바닥? 그러면 몸통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무서운 요기를 뿌리던 인면사의 얼굴이 꿈틀대면서 동시에 뒤쪽 고사림도 통째로 흔들렸다.
“꾸에에에에엑!”
갑자기 인면사의 얼굴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순간 얼굴 뒤쪽에 있던 고사목들도 허공으로 치솟았다. 동시에 지축이
흔들리면서 뿌연 먼지가 일었다.
쉐에에에에엑!
먼지가 회오리쳤다. 허공으로 뿌리 채 튀어 올랐던 고사목들이 운검정을 향해 날아왔다.
운영산은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 운검정이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치켜 올리며 왼손을 뒤로 뻗었다.
“물렀거라.”
운영산은 움찔하여 뒷걸음질치면서 운검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헉!”
운영산은 운검정이 참요검을 바닥에 던져버리는 것을 보고 헛바람을 토했다. 요물과 대치한 상황에서 탁탑천왕의 영력을 빌은
참요검을 버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했건만, 운검정은 운영산의 생각을 비웃듯이 손을 허공으로 뻗어
운가지보(雲家之寶)이자 그의 애검 무극정(無極精)을 빨아들였다.
운검정이 단 한 번 천지를 가르듯 검을 내리찍었다. 순간 뻗어나간 금광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운검정의 전면에 금빛 장막을
만들어냈다.
콰콰콰콰쾅!
검막에 부딪친 고사목들이 가루가 되어 운검정의 앞을 휘돌다가 사라졌다.
“휘류류류류류류!”
그때 운검정의 좌측면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운검정도 지체 없이 몸을 비틀어 검을 휘둘렀다.
쾅!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먼지가 요동치며 피어올랐다. 운영산은 또 다시 뒤로 밀려가며 눈앞의 먼지를 헤쳐 전면을
바라보았다.
운영산은 경악했다. 운검정의 뒷머리 위쪽으로 인면사가 보였다. 몸통 없이 달랑 얼굴만 있어서 일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꼬리가 칠 장이 넘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그 굉음도 인면사의 꼬리와 운검정의 검기가 부딪친 것이었다.
멀리서 보면 용이라 해도 믿으리라.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운영산이 뒤에서 기척을 느끼고 참요검을 휘돌리며 돌아섰다.
“날세.”
보천진인이었다. 보천진인은 운영산을 힐끔 보고 나서 바로 인면사를 응시했다.
“허! 땅이 들썩이기에 놀라서 왔더니 저런 요물을 보는구나. 독기를 뿜던가?”
운영산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독기는 물론이옵고 혓바닥을 십 장이 넘도록 뽑아내더이다.”
보천자가 바닥을 뒹구는 혓바닥을 보고서 말했다.
“그래? 저 놈은 족히 육칠백 년은 묵었겠구나. 헌데 가주께서 참요검을 버리셨다? 본신진력으로만 상대하시겠다는 것인가?
인간의 육혈(肉血)과 정(精)으로 몇 백 년을 걸쳐 얻은 요력과 사백 년 운가의 역사가 만들어낸 무공이라---.”
운영산은 안타까웠다. 눈앞에서는 폭음과 먼지가 일어나고 뱀은 용인 척 꿈틀거리고 운검정은 이리저리 휘도는데 보천자는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친 것 아닌가?
운영산의 기색을 읽은 듯 보천자가 다시 말했다.
“기다려 보게. 저 놈이 비록 독기를 뿜고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낼 정도로 요력이 거세지만 호풍환우(呼風喚雨)할 지경에
이르지는 못했네. 자네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나 가주시라면 어렵지 않---.”
“앗!”
운영산의 비명이 보천자의 말을 끊었다.
인면사가 사람 몸통만큼 굵은 꼬리로 운검정을 완전히 휘감은 것 같았다. 그러한 광경은 보천자마저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보천자가 급히 땅을 박차려 했다. 그때 운검정의 전신에서 찬란한 금광이 뻗어 나왔다.
“꾸에에에엑!”
막 운검정의 전신을 쥐어짜려던 인면사의 꼬리가 퉁기듯 반대방향으로 펼쳐졌고 인면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면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아! 저것이 바로 무극금정강기(無極金精罡氣)?”
운영산이 황홀한 듯 풀어진 눈으로 운검정을 주시했다.
“무극금정강기? 그것이 무엇인가?”
운영산이 정신을 차리고 흥분된 음성으로 대답했다.
“본가의 내공심법인 금련오엽진결 완성하고 오기조원지경에 들어설 경우에 펼쳐낼 수 있는 강기입니다. 제 눈으로 그 실체를 본
것은 처음이군요. 아! 나는 언제 저 경지에 달할 수 있을까?”
운영산은 인면사를 십장이나 밀어내어버리는 금광을 바라보며 다시 몽롱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끄아아아아아!”
사람 입술에 보풀이 일 듯, 인면사의 몸통에서 비늘들이 너널거렸다. 인면사가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다. 운검정과 십장을
격하여 마주한 채 칠장에 이르는 몸통을 꼿꼿이 세웠다가 나는 듯 내리꽂혔다. 그리고 동시에 마치 독공의 고수가 독강을
펼치듯 일직선으로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나 운검정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인면사를 향해 검을 세웠다. 금광이 또 다시 운검정의 전신을 뒤덮고 그의 검마저
휘황한 빛으로 뒤덮었다.
“탓!”
운검정의 신형이 곧바로 독기를 향해 돌진했다. 검에서 벗어나 오장을 뻗어나간 금광이 독기와 부딪쳤다. 금광은 독기를 짓이겨
사방으로 흩어버리고도 쉬지 않고 인면사의 얼굴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 와중에 금광의 길이도 점차 줄어들어 인면사의 얼굴에
이르렀을 때는 이장을 겨우 넘어서고 있었다.
인면사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인면사가 회피하려는 듯 꼿꼿하게 내리꽂히던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금광이 인면사의
얼굴에 꽂히고 따라서 운검정의 금빛 신형이 인면사의 얼굴에 파고들었다.
마치 인면사가 운검정을 삼켜버린 듯 희미한 금광만 남고 운검정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비틀렸던 인면사의 몸통이
일직선으로 뻗었고 촌각 뒤에는 인면사의 몸통에서 그리고 꼬리에서 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인면사의 꼬리를 터뜨려버리고 다시 나타난 운검정은 무극정을 검갑에 넣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천자 등을 향해
다가왔다.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감 이외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보천자가 운검정을 향해 웃으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혈독정(蛇血毒精)이 있는지 찾아보아라.”
두 제자들이 인면사의 머리 쪽으로 날아갔다. 그 사이에 운검정이 피로한 얼굴에 웃음기를 띄우며 말했다.
“진인께서 먼저 끝내셨구려.”
보천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제 쪽은 이제야 겨우 요물 흉내를 내는 암여우 한 마리였는지라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때 두 제자들이 녹피로 만든 장갑으로 검고 윤이 나는 직경 한 치 가량의 구슬을 들고 돌아왔다. 운검정의 눈에 이채가
감돌자 보천자가 설명했다.
“사혈독정입니다. 저런 놈의 몸속에서 나왔으니 이것 하나 우물에 풀면 검각현에 살아남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당가가 아니면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물건이니 태워버리시지요.”
운검정이 머리를 끄덕이며 구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혈독정을 맨손에 놓으면 중독된다는 것을 알기에 들고 있던 제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보천자를 응시했다.
바로 그때 운검정의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가 장심에서 불꽃이 일었다.
“놓으시게.”
제자가 그때서야 불꽃 위로 사혈독정을 놓았다. 사혈독정은 불꽃 위에서 춤을 추며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검은 연기를
뿜어대다가 점점 작아져 끝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강력한 삼매진화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운용해 놓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자, 보천자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천하 칠대 세가의 하나인 운가의 가주라 할지라고 공력이 그리도 지고할 줄은 상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보천자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운검정은 귀를 기울이며 산 전체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심하던 괴성과 기합성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유독 대장군봉 쪽에서만 들려오고 있었다.
“가장 강한 요기가 느껴지던 곳이 세 곳, 그 가운데 두 군데가 해결되었습니다. 소가주 쪽만 해결된다면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는데---.”
보천자가 말하고 나서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운검정의 눈도 도 보천자의 시선을 따랐다. 보천자가 말했다.
“마무리 하는 기분으로 가 볼까요?”
“그러시지요.”
말은 보천자가 먼저 꺼냈으되 몸을 날린 것은 운검정이 먼저였다.
검각산 칠십이봉 가운데 세 번째로 높고 다섯 번째로 험하다는 청림봉(靑林峰)은 검각산에 돌입하여 서쪽으로 여섯 개의
봉우리를 돌아야 이를 수 있다.
이 봉우리는, 돌과 바위와 박토가 대중을 이루는 다른 봉우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산 중턱에 푸른 나무숲이 자리하고 있어서
청림봉이라고 불렸다.
운기정과 함께 청림 앞에 이른 운녹산은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원래 이곳에 그와 운기정이 온 것은 가장 강한 요기가 느껴지는 세 곳 가운데 한 곳인 탓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청림봉의 초입에 들어선 이후로는, 오는 동안 적지 않게 만났던 회귀마저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너무나 편하게 청림에
이르렀다.
청림을 주시하면 할수록 운녹산의 의아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수청목(水靑木)으로만 이루어진 청림은 마치 검각산 칠십이봉을
나무로 표현한 것만 같았다. 가운데 유독 크고 무성한 수청목이 하늘을 찌를 듯 뻗어있고 그 전후좌우로 조금씩 작은
수청목들이 즐비했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원래 가지가 많지만 굵기 또한 그리 굵지 않은 것이 수청목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지금 운녹산의 눈앞에
있는 수청목들은 괴목(怪木)이라 할 만큼 굵고 무성했다.
원래 푸른빛에 회색을 띠는 넓은 잎들은 파르스름한 청기를 강하게 띄고 윤기가 넘쳐 도대체 이 황량한 산에서 무엇을 취하고
그리 튼실히 자랐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만약 보천자가 이곳에 있는 요괴가 수목귀라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운녹산과 운기정은 날이 샐 때까지 찾기만 하고 산을
내려가야 했을지도 모르리라.
운기정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요수(妖樹)라더니, 과연!”
운녹산의 의혹어린 눈이 운기정의 옆얼굴에 닿았다. 수목귀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운녹산은 과연 명목망귀부가 효험이 있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숲이 너무나 푸르고 짙어 아무 것도 옅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운기정이 과연이라 말하자
무엇을 보고 하는 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끝내 묻지 못했다. 지난 이년간 운녹산은 운기정과 제대로 감정이 담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운검정과 마찬가지로 질책보다 혹독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탓이었다.
운녹산은 할 수 없이 눈길을 거두고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멍하게 푸른 나무숲만 보고 있자니, 운녹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무를 떠나서 아득히 먼 곳을 떠올렸다. 한 여인과 함께 푸른 숲을 질주하던 그 상쾌함을 생각했다.
그때만은 다른 무엇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오직 한 여인만이 그에는 모든 존재였다. 그것은 운녹산의 성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임에도 그때처럼 마음이 평안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 청수야, 그립구나. 너 뿐만이 아니라 그 숲 그리고 오랑하마저도 그립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네가 아직
거기에 있다면 청봉을 데리고 나 돌아갈 텐데.’
이청수가 운청산과 함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운녹산은 눈에 갈등을 드러내며 생각을 잘라버렸다.
한편 운기정은 어색한 동행자의 옆얼굴에서 쓸쓸함을 느끼며 갈등했다. 운녹산이 운검정에게 당하는 질책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했지만, 감정의 문을 닫아버린 이후라서 쉽게 말문이 터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시 한번 오늘 운검정이 운녹산을 차갑게 대했던 광경을 떠올린 운기정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 가급적이면 건조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에 늘 푸른 숲이 있다하여 청림봉이라 부른다. 이 황량한 산에 저 숲만 저리도 제철 모르고 항상 푸른
것은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수청목은 낙엽 지는 나무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르자면 늘 푸를 수는 없다는
것이야. 요사한 것들이 때로 아름다움으로 치장하여 사람을 현혹시킨다 했으니 저것이 요물의 숲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
운녹산은 절로 탄성을 터뜨리며 새삼스럽게 수청목림과 주변의 황량한 환경을 비교해 보았다.
“과연 그렇습니다. 천지자연의 이치와 달리 돌아간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요물이라 하겠습니다.”
크게 깨우쳤다는 감정을 담아 말해도 운기정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품속에서 동경을 꺼내어 만월의 빛을
받아 숲으로 내뻗었다.
푸스스스스스스!
갑작스럽게 바람 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들이 몸서리치면서 울어댔다.
운녹산은 오늘 자신이 나무꾼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청림봉이란 이름의 원인이 되는 청림을 모조리 없애버려야 했다.
‘참요검이 금기를 달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러나 금극목이라!’
운녹산은 참요검에 금기를 주입했다. 참요검이 흐릿한 백기를 사장에 가깝도록 토해냈다.
그것을 본 운기정이 이채를 드리웠다. 그는 운녹산이 목성이 강한 성정을 지녔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지금 운녹산이 운용하는
기운은 그의 성정을 극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기를 취하여 사장에 가까운 기운을 뿜어낸다는 것은 운녹산의
무공수위가 그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다는 뜻이었다.
‘흠, 녀석의 자질로 보아 결국에는 오행기를 모두 합일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가장 성취하기 힘든 것이 금기일 텐데
진경이 상당히 빠르구나. 더군다나 참요검이 화기에 적극 반응하고 냉성이 강한 금기에는 적절하지 못함을 이미 경험했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장이라! 그래. 들은 바가 있어. 금갑마인(金甲魔人)을 만났다 했지. 정저지와(井底之蛙)임을 깨달았다
했지. 그래서 지난 이년 간 수련에 박차를 가했음이야.’
운기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운녹산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아래!”
동시에 운녹산이 뒤쪽으로 비스듬히 치솟아 올랐다. 그 순간 운녹산이 조금 전까지 밟고 있던 땅 아래서 수십 개의 창들이
튀어 올라와 운녹산의 전신을 노리고 쫓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무뿌리였다.
한편 딴 생각 중에 운녹산의 외침을 들은 운기정 역시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운녹산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운기정은 오히려 청림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천성과는 반대로 방향을 꺾어야 하는 나무뿌리들은 미처 운기정을 쫓지 못했고 그 사이에 운기정은 전신에 금기를 일으켰다.
참요검이 오장에 이르는 백기를 뿜어내자 건들거리던 수청수들이 일순간 뒤로 몸을 눕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내 수백 개의
나뭇가지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얼마나 많은 나뭇가지들이 한꺼번에 쏘아져 나오는지, 그 광경이 마치 수백 개의 화살들이
일제히 한 곳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몸까지 뿌연 백기에 휩싸인 운기정은 그 기세를 보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참요검을 잇달아 두 번 십자로 휘둘렀다.
검기에 휘말린 나뭇가지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잘려져 나간 자리로부터
시뻘건 선혈이 쏟아져 내렸다.
“요사한!”
운기정은 전신으로 노기를 뿜어내며 나무의 밑동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 나무들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운기정의 백기를
피하고 그 즉시 그의 머리를 향해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운기정은 당황했다. 가지가 창이 되고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는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뿌리가 있으니 나무 전체가 날아
움직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운기정은 아차하며 급히 바닥을 찍어 옆으로 굴렀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뻗어 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수백 개의 나뭇가지들이
그 하나를 두고 떨어져 내리니 몸을 퉁겨 일어날 수도 없고 검을 휘둘러 볼 수도 없었다. 오로지 금기를 절정까지 일으켜
몸을 보호하고 구를 뿐이었다.
쿵! 쿠쿵! 쿠쿠쿠쿠쿵!
운기정이 뒹구는 자리마다 거인의 발처럼 나무들이 찍어 누르고 가지들이 화살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운기정은 뒹굴면서 바로
검을 휘돌려 던져버렸다.
휘류류류류류!
참요검이 운기정의 위쪽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그가 구르는 방향으로 이동하며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다. 잘려나간 나뭇가지와
거기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검의 회전력에 퉁겨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때 반대쪽에서 휘어져 날아오던 나뭇가지가 운기정의 등판을
향해 떨어졌다.
“합!”
기합소리와 함께 운기정의 육신 한 자 뒤에서 서늘한 백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운기정은 그 순간을 이용해 몸을 일으키고 검을
잡았다. 그때 운녹산이 그의 허리춤을 잡아 뒤로 이동하여 나뭇가지들이 닿지 않는 이십여 장 밖까지 벗어났다.
겨우 위험에서 벗어난 운기정은 복잡한 시선으로, 숲을 응시하고 있는 운녹산을 바라보았다. 그때 운녹산이 눈을 크게 치뜨며
말했다.
“잘못 봤습니다. 숲이 아니라 나무였습니다.”
운기정은 무슨 소린가 하여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숲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수청수의 가지들이었다. 사람이 팔꿈치로 땅을 짚은 것처럼 수청수가 가지들을 나무로 위장시킨 것이었다.
지금 그들의 눈에는 오직 한 그루의 나무, 마치 펼쳐진 우산과 같이 가지들을 번쩍 치켜든 수청수가 거대한 몸통을 좌우로
흔들며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운기정은 난감한 표정으로 수청수를 바라보았다. 요수를 제거하려면 근원이 되는 나무를 잘라버려야 할 텐데, 나뭇가지들이 너무
많았다. 일일이 다 쳐내는 방법 밖에는 생각나는 방법이 없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근원에 접근하기도 전에 지쳐버리고 말리라.
그때 청림의 전후좌우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씩 나타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운가 사람들이 자신의 맡은 바 구역을
정리하고 하나둘씩 모이고 있는 것이었다.
난감해하고 있던 운기정이 반색을 표했다. 사람이 좀 더 모이면 일일이 쳐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그때 운녹산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와 운기정이 쳐낸 가지와 나무들만
해도 몇 수레 분은 될 터인데, 그 정도로도 수청수에게는 장강의 강물 한 동이 퍼낸 것만큼의 타격밖에 주지 못하리라.
운녹산은 절망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데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늘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더욱이 운기정과
함께였다. 최대한의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 금의대의 몰살이 불가항력이었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운녹산의
기대는 압도적인 요수의 덩치 앞에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절망 끝에 찾아오는 것은 공허함, 그리고 좋았던 날의 추억. 운녹산은 멍한 눈으로 수청수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청수를
떠올렸다. 이청수의 환희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 눈에 눈물 고이고, 절망 어리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운녹산에게는
이제 좋았던 날의 옛 추억마저도 후회로 밖에 남지 않았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청수만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을---. 청봉의 얼굴이라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을---.'
운녹산의 멍한 눈에서 절망이 사라지고 돌연 불길이 솟구쳤다.
‘저주라 했지? 대수령신? 그 놈도 요괴일 뿐이다. 청수에게 저주를 건 것이 저런 요악한 수목귀겠지? 태워버리리라. 뿌리
채 뽑아버리고 쪼개버리고 낱낱이 태워버리리라.’
순간 운녹산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올랐다. 그의 전신 모공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그의 옷을 태워
날려버리고 그의 눈썹과 머리카락마저 태워버렸다.
운기정은 넋을 잃었다. 운녹산의 능력이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십여 년 전에 지금 운녹산이 보여주는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누구도 옷과 모발과 눈썹까지 태워가면서 주작기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론적으로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 효과적인 경로를 무시하고 공력을 일으키는 일은 금기와도 같았다.
그때 운녹산이 갑자기 나무를 향해 쇄도했다. 말릴 새도 없었다. 단 번에 십장을 날았고, 나뭇가지들이 운녹산을 향해
떨어졌다.
운녹산이 가차 없이 참요검을 휘둘렀다. 불덩이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단번에 운녹산을 찌르고 그 피를 빨아들일 것 같던
나뭇가지들이 불덩이에 휩싸여 급격히 타들어갔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운녹산을 향해 날아오던 나무들이 조급히 방향을
바꾸었다. 나무의 본성대로 감히 전신이 불덩이인 운녹산을 덮치지 못하고 움츠러든 것이었다.
“멈춰라, 녹산!”
운기정이 소리쳤지만 운녹산은 멈추지 않았다. 흔들려 떨어진 나뭇잎들을 순간적으로 태워버리고 다시 한번 도약하여 바로 불길이
이는 참요검을 나무의 밑동을 향해 휘둘렀다.
열 사람이 손을 맞잡아도 한 바퀴를 돌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나무가 팔방으로 피를 뿜으며 전신을 흔들고 괴성을 질렀다.
운녹산의 왼손바닥이 사정없이 나무를 후려쳤다. 순간 거대한 나무가 운녹산을 향해 넘어졌다. 운녹산은 성큼 두 발을 움직여
나무를 피해내고 분수처럼 피를 뿜어대는 나무의 밑둥을 주시했다.
그때 그 밑동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시뻘건 선혈로 전신을 피칠한 그것은 얼굴은 원숭이요 몸통은 개와 같은 이상한
동물이었다.
운녹산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네놈이렷다?”
그 동물은 두려운 눈빛으로 운녹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날아온 운기정의 검날
아래 목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수신기에 적힌 바로 그 팽후(彭候)라는 놈이구나. 허! 수목귀의 정체가 이따위 것이었다니---.”
운기정이 허탈한 눈빛으로 수목귀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운녹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운녹산도 운기정 만큼이나 허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대머리에 눈썹도 없고 발가벗기까지 한 이상한 모습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피를 뿜어대는 나무의 밑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기정이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괜찮으냐?”
그때서야 운녹산이 정신을 차리고 운기정을 바라보았다.
“예? 괜찮습니다, 숙부님!”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을---. 지금의 네 모습을 본다면 네 안사람과 아이들이 무섭다고 가까이
가지도 않겠구나.”
운녹산은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운녹산은 자신의 나신을 훑어보며 쓰게 웃었다.
“눈썹과 머리야 다시 나지 않겠습니까?”
운기정이 기가 찬 얼굴로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잘 모르겠구나. 어쨌든 끝이 난 것 같으니, 돌아가자꾸나.”
운기정이 다시 한번 운녹산의 어깨를 두드리고 상의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먼저 몸을 돌려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걸었다.
운녹산은 문득 온기가 느껴지는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고서 그 손을 다시 매끈한 머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성과에 비하면 희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이제는 명실 공히 소가주인가?’
운기정의 상의로 대충 하체를 가린 운녹산은 그때서야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미 스물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운검정과
보천자 일행이 가장 앞쪽에 서 있었다.
검각현은 축제분위기에 빠졌다.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몰려나와 오로지 운가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운가를 이르기를
천하제일협가(天下第一俠家)라 불렀다.
그러나 정작 운가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목에 걸린 가시를 뱉어낸 것처럼 시원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들에게 화제가 된
것은 검각산의 요물들이 아니라 대머리가 되어 돌아온 운녹산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운녹산은 운검정에게
있어 여전히 죄인인 탓이었다.
운검정의 집무실 탁자에 있던 검각산의 모형은 어느새 치워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대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석 잔의
차가 있을 따름이었다.
“드시지요.”
운검정이 웃음 띤 얼굴로 보천자에게 차를 권했다. 보천자도 웃으며 차를 들었다. 보천자가 향을 음미하고 차로 입술을 축이고
마침내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차 뚜껑을 덮어 탁자에 내려놓자 운검정이 다시 말했다.
“수 년에 걸친 검각산의 일이 이제야 끝났구려. 이 모든 것이 모두 진인 덕분입니다. 감사드리오.”
보천자가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든 것이 가주의 공덕입니다. 빈도의 수행이 미천하여 오랜 시간을 끌었습니다.”
“무슨 겸사의 말씀을! 이 운모는 진인의 도력에 진심으로 감복했소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빈도의 수행은 참으로 미천합니다. 겨우 술법의 끝자락을 잡기는 했으나 지고한 경지에 이른 분들에
비하면 드러내기가 창피할 따름이지요. 빈도가 직접 대한 선인들만 해도 세 분이나 되는데, 그 분들께서 도우라 칭하시는
분들이 천하 각처의 영산에 두루 계시다 하니 빈도가 어찌 술법을 자랑하오리까?”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운기정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두 분 모두 그만하시지요. 모두의 노력으로 좋은 결실을 보았습니다. 이제 한숨 돌릴 때지요. 후! 귀주의 일만 해결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텐데---. 아! 이런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인!”
보천자는 대답 없이 미소로써 답하고 다시 차를 마셨다. 운검정도 찻잔을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한 동안 이어졌다.
보천자는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곤하군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운기정과 운검정이 동시에 일어서서 포권을 취했다. 운검정이 말했다.
“아! 그렇습니다. 저와 달리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무리하셨는데,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편히 쉬시고 내일
뵙지요.”
보천자가 웃으며 포권을 취해 보이고 방을 나섰다. 운기정과 운검정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운기정이 잠시 주저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형님! 이제 녹산을 그만 용서하시지요.”
운검정은 아무런 대답 없이 운기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운기정이 다시 말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홀대해서는 안됩니다. 형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지금의 상태를 계속 지속하다가는 장차
그 아이가 가문을 맡았을 때 아무도 그를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검정은 고뇌에 찬 얼굴로 운기정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용서가 안돼. 용서가. 자네 말대로 오행마궁 그놈들만 찾아 아이들의 원혼을 달래 주었어도 이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인데, 그 놈을 볼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니---.”
“알지요.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형님은 두 아이를 잃었지만 이 동생은 독자를 잃었습니다. 아픔은 형님 못지않지요. 허나
형님! 형님께서도 오늘 보시지 않았습니까? 겨우 미천한 요물들을 퇴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전신을 불태우며
죽을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과연 사사로이 동생들이 되는 금의대가 몰살당하는데 혼자 살아남겠다고 수를 쓸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리는 못하지요.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에 누구보다 괴로울 사람은 그 아이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를 계속 홀대한다면 그것은 죽으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용서하십시오. 그만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형님의 아들입니다. 가문의 미래지요. 오늘 본 그 아이의 자질, 결코 형님
못지않습니다.”
운기정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운검정은 대답 없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운기정은 운검정을 잠시 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방에 홀로 남겨진 운검정은 그때서야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가슴 속의 응혈을 모두 토해낸 것 같은 시원한
한숨이었다.
“잘했구나, 녹산. 안 그래도 더 이상은 네 눈을 볼 수가 없었는데, 결국 네 손으로 족쇄를 풀었어. 다행이다.”
랑을 아는 아이는 가슴으로 말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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