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천리안
<지은이 소개/ 임준욱>
무협작가 임준욱의 스타일은 ‘성장물'이다. 몇 안되는 듯싶지만 꾸준하고 알찬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촌검무인'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성장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결혼도 하고, ‘직업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임준욱인데 특히 ‘무림인'의 이야기이다.
1999년 <진가소전>으로 데뷔하여 대표작으로 <농풍답정록> <건곤불이기> <촌검무인> <괴선> 등이 있다.
서른다섯. 이제는 가주가 되어도 큰 무리가 없을 나이였건만 운녹산은 그때 이전의 철부지로 취급받고 있었다. 아니었다.
철부지라면 차라리 나리라. 없는 사람인양 취급받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
붉은 노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운녹산은 부지불식간에 노을 바로 아래 끊임없는 푸른 숲들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서있는 자신과 한 사람을 떠올렸다. 거기라면 아직은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 찾아 봤어야 해. 묘족을 다 죽여서라도 찾았어야 했는데, 나무들을 뿌리 채 뽑아서라도 돌려받았어야 했는데---.”
오늘 같이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이면 운녹산은 늘 이청수를 떠올렸다.
모호한 존재, 혼란스러운 존재, 사람에 대한 운녹산의 사고방식을 뒤흔드는 존재였다.
원래 운녹산의 세상은 명료하기 그지없었다. 선택된 소수가 다수를 지배는 곳. 그것은 운녹산의 머리 속에서 나온 세상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무수히 보아왔던 경험의 소산이었다.
아무리 예의범절이라는 것으로 치장한다 해도 힘없는 자들은 선택된 자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칠대세가의 한 축을 이루는
운가의 가주가 예의를 차리는 것은 미덕이었고, 찾아온 사람들이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것은 비굴함일 따름이었다. 운가의
가주가 지나가다 내뱉는 한 마디는 세상을 바꾸고, 힘없는 자의 절규는 공허할 따름이었다.
선택된 자가 아닌 이들은 결국 발아래 모여 발판이 될 것이고 선택된 자들끼리는 끼리끼리 모여 서로의 배경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운녹산이 의협이니 정의 같은 것은 대해 교육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느끼기로는 자릿세에 불과했다.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있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요, 선택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기 확인이며, 힘없는 자는 도량으로
생각하나 결국에는 강자임을 세상에 알리는 과시욕이었다.
운녹산은 그런 세상에서 선택된 자에 속했다. 지금은 잠시 주춤해 있지만 언젠가는 세상에 몇 안되는 정점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발판이 아니면 배경, 그런 명료한 세상 속에서 이청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도대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도 돌아간다는 글을 남겼었고, 결국 의지와는 다르게 돌아가기도 했었다.
운녹산은 이청수를 만나지 못한 결과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의 내릴 수 없는, 차라리 평생 정의 내리고
싶지 않은 그 모호함 때문에, 오늘 같은 날이면 언제나 이청수의 환히 웃는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청수의 미소를 생각하며 목향각 앞 운교에 발을 딛는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청수의 얼굴이 사라졌다.
“아빠!”
두 아이가 목향각 앞에서 운녹산을 향해 달려왔다. 운녹산은 아홉 살이 된 큰 아들 운교인(雲矯仁)의 머리를 감싸 안고 다섯
살 된 운강인(雲彊仁)을 가슴까지 번쩍 들어올렸다.
운녹산은 두 아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운녹산에게는 또 다른 모호한 존재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여드레 만에 돌아온 집은 편안하게 느껴지기는커녕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목추경과는 알 수 없는 벽을 느끼고 있었기에 가정의
포근함은 대부분 포기하고 살고 있는 운녹산이었지만, 오늘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운녹산은 피곤에 찌든 눈으로 목추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었소?”
목추경은 운녹산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여드레 만에 돌아와 놓고 어머니께 문안인사조차 올리지 않았던가요?”
운녹산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이청수를 생각하다가 경의상에게 들리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바로 목추경이었다.
“곤해서 깜빡했소이다. 간단히 씻고 다녀오겠소.”
목추경은 하얗게 변한 눈으로 운녹산을 바라보며 낮게 코웃음 쳤다. 운녹산은 놀란 눈으로 목추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목추경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문제 없이 사는 것, 아니 별 문제 없이 사는 듯 보이는 것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녀의 존재가 필요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운녹산은 그래서 대체로 그녀에게 너그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표시나지 않을 정도에서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러나 오늘 같이 유쾌하지 못한 날까지 불경(不敬)을 참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녹산은 목추경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당신에게 살가움을 기대하지는 않았소만, 코웃음이라니? 그것이 아녀자가 여드레 만에 돌아온 남편에게 할
짓이오?”
목추경의 입술이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요. 더러운---.”
“무어라?”
운녹산의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목추경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당신이 내게 화를 내요? 하! 어디 어머님께 가서도 화를 낼 수 있는지 봅시다. 더러운---.”
운녹산은 내뻗으려던 오른손을 피가 나도록 주먹 쥐어 억지로 멈춰세웠다. 그리고 의아한 눈빛으로 목추경을 살폈다.
목추경의 성정에서 따뜻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나 의례적인 법도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를 꺾지 않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무엇이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소?”
목추경은 한풀 꺾인 기세로 말하는 운녹산에게 여전히 차갑게 굴었다.
“내 입에 담기도 싫으니 가서 어머님께 여쭤보세요. 아니, 직접 보게 되겠네요.”
목추경은 다시 한번 운녹산을 노려보고는 팔짱을 낀 채 돌아서버렸다.
운녹산은 목추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그가 막 운교를 넘어서는 그때, 맞은편에서 보천자가 나타났다.
운녹산이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벌써 오십니까?”
보천자는 눈에 안쓰러움을 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끝냈네. 내일 낮에 내가 먼저 검각산 결계를 확인해 보고나면 모레부터는 세가의 모든 사람이 바빠질 게야. 그런데
어디 가나?”
“불효막심한 놈이라 어머님께 문안인사 올리기를 잊었습니다.”
보천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아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운녹산이 쓰게 웃어보이자 보천자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야 이해할 수 있네만 속 좁은 아녀자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한 일이더구먼. 자네에게도 허물이 있으니 조금 못되게
굴더라도 자네가 이해하고 다독이며 살아주게. 형님이 늦게 본 딸이라 금지옥엽(金枝玉葉) 어려움을 모르게 키웠더니 자신에겐
너그럽고 남에게는 모진 구석이 있지. 하지만 천성이---.”
운녹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천자의 말을 끊었다.
“이유를 아십니까?”
보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가주께 들었네. 경아가 언급도 하지 않았나 보구먼. 가보게. 대부인께 가면 즉시 알 일이네.”
보천자도 말하기를 꺼려하자 운녹산은 즉시 허리를 접어보이고 내가로 달려갔다.
“으응? 현산 형! 빙혼귀 얼굴이 원래 저랬던가? 눈에서 독기 많이 빠졌네.”
“심신이 모두 피곤에 찌든 것 같아. 마음고생이 심한가 보지.”
“쳇! 진즉에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 싫어하지 않았지. 죽고 나니 무슨 소용이야. 씨! 또 아프네. 청수, 아니 형수
또 울어? 이제 그만 좀 짜시오. 제기랄! 여자 귀신이랑 같이 있으니 피곤하구만.”
“흐흐흑! 운 가가! 왜 그렇게 슬퍼 보이나요?”
“제기랄! 형수는 정인이라도 봤지. 우린 뭐요? 그만 울라구. 젠장! 청산이 울잖아. 그만 울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운녹산도 무릎을 꿇은 채 판자를 끌어안고 땅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경의상은 우는 아이를 안은 채 운녹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왼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을 필요 없다. 울고 싶으면 마음 놓고 울어라.”
“끄으윽! 으흐흐흐흐흐흑!”
서른다섯의 장부 운녹산은 결국 참고 참았던 울음보따리를 풀어버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일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존재가 ‘사람’이 아닌 어머니였기에 참지 않고 눈물을 쏟아낸 것이었다.
경의상은 운녹산의 머리를 쓰다듬던 왼손을 들어 물막이 차오른 눈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행이로구나. 이토록 서럽게 울어줄 정도로 그 아이를 사랑했었어. 그래. 그것으로 되었다. 한을 품고 떠났다 해도 너의
울음소리로 그 한을 풀리라.”
“아닙니다. 내가 그 아이를 죽였습니다. 체면에 얽매여 죽게 내버려두고 왔습니다. 데리고 왔어야 했을 것을---. 세상을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야 했을 것을---. 크흑! 내가 죽였습니다.”
경의상은 운녹산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아래로 돌려 그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흥건한 물기가 느껴졌다. 경의상은 그녀가
곽자렴을 통해 전해 들었던 이청수의 고통어린 마지막을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경의상은 운녹산의 뒷머리에서 시선을 떼서 운청산에게로 옮겼다.
‘미안하구나, 아가. 이해해 주겠지? 그마저 알린다면 녹산은 폐인이 될지도 몰라.’
판자에 새긴 글처럼 정말로 이청수가 운청산의 곁에 있는 듯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녹산의
울음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겨우 진정한 운녹산이 경의상으로부터 운청산을 건네받았다. 운녹산은 물기어린 운청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운청산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안하구나. 어미도 없이 세상을 보게 해서 정녕 미안하구나.”
경의상이 의자 위로 옮겨 앉으라 하자 운녹산이 운청산을 안은 채로 따랐다.
경의상이 운녹산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청봉을 안은 네 모습을 보니 장차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 태세구나.”
운녹산이 경의상을 보며 말했다.
“드나들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이는 내가 키우기로 했다.”
운녹산이 놀래서 눈을 치떴다.
“예?”
“정도다 싶어 며늘아기에게 뜻을 물었다. 그러나 그 아이 표정을 보니 배다른 아이, 바르게 키워 줄 것 같지 않더구나.
더구나 이 아이는 이상하게도 내 품에서만 울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키우기로 작정했으니 그리 알아라.”
운녹산은 문득 목추경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없는 걸 보니 수긍한 것 같구나. 청수란 아이를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키울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주 드나들지 않는 게 좋겠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신제가(修身齊家) 후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했다. 청봉으로 인해 네 안사람과 불화가 생긴다면 장차 네가 어찌 편한
마음으로 가문을 이끌겠느냐? 이 불쌍한 아이를 생각하는 것은 마음으로만 하고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운녹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문이 무엇입니까? 이미 아버님의 뜻을 저버린 접니다. 더 이상 가주의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뜻이 아니라 제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 이 아이에게 따뜻한 부정이라도 느끼게 해주렵니다.”
“이놈! 너 살리자고 제 몸 희생한 현산을 잊었더냐? 앞서 간 네 동생들을 모두 잊고 살 수 있겠느냐? 가주의 자리는
권한이 아니라 의무니라. 네 녀석 혼자의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운녹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섭습니다. 제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생사를 달리해야 하는 그 자리가 너무 무겁습니다. 소자,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 그 자리는 무섭고도 무거운 자리니라.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자만이 그 자리를 바르게 지킬 마음가짐을 이룬 자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것을 모르는 다른 누구에게 그 자리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 어미는 예전에 네가 가주가 되라고
강권하지 않았다. 하나 이제는 다르다. 네가 해야 한다.”
운녹산은 고개를 숙였다. 운청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갔다. 그리고 한참이나 이마를 비볐다. 운청산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태극도포까지 차려입은 보천자가 방으로 들어와 경의상과 인사를 나누었다. 보천자는 경의상의 품에 안겨있는 운청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음! 가주께서 귀기가 느껴진다 하더니---.”
보천자가 말끝을 흐리자 경의상과 운녹산이 초조한 눈빛을 드러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천자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수결을 짚었다가 손가락으로 감은 두 눈을 쓰다듬더니 다시 운청산을 향해 활짝
펴며 중얼거렸다.
“천존(天尊)께 비오나니 천정(天頂)을 열어 머리를 맑게 하시고 눈을 깨끗하게 하시어 온갖 요마사귀를 보게 하소서.”
명목망귀술(明目望鬼術)의 주문을 외운 보천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에서 태양광을 방불케 하는 찬란한 금광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운청산이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경의상도 즉시 눈을 감았다. 비스듬히
앉아있던 운녹산만이 실눈을 뜸으로서 겨우 빛을 감당해 내었다.
잠시 후, 눈두덩을 자극하는 밝은 기운이 사라지자 경의상이 눈을 뜨고 운녹산이 얼굴을 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보천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천자는 엄숙한 표정을 거두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뜸을 드린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제대로 느끼신 겁니다.”
경의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주를 입었다는 말을 전해는 들었지만 믿지 않았었다. 눈길과
손길이 떨어질 때 우는 것 말고는 외관상으로 별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보천자가 누구인가. 무당의 재전장로로서 그 법술이 특출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면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한편 전후사정을 모르는 운녹산은 경의상에 비해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 역시 초조한 빛을 드러내기는 하나 경의상과는 달리
되물었다.
“정확히 보셨다 함은 무슨 뜻입니까?”
보천자는 짧은 신음과 함께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차분히 말했다.
“세간에서 흔히들 귀신에 씌었다고 하지. 이 아이의 경우는 세간의 말과 같으면서도 많이 다른 경우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천자는 운녹산과 경의상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면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운녹산을 보며 말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신(神)은 의미가 없어지고 정기마저 흩어지니 그 정기에서 파생된 혼백(魂魄)마저도 분리된다고 보지. 이
혼백 가운데 혼은 원래 양기가 정과 어우러져 생성된 것으로 그 성정이 밝고 가볍고 청정하고, 백이라는 것은 음기와 정이
어우러져 생성된 것으로 그 성정이 무겁고 탁한 것으로 보네. 만약 혼이 천부(天賦)의 수명을 다한 사람에게서 분리된 것이면
원과 한이 많지 않을 테니 그 성정에 따라 곧 다음 생을 구하기 위해 영계로 진입하나, 객사를 하거나 급사를 하거나 칼
맞아 죽거나 사고로 죽게 되면 스스로의 죽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오로지 원과 한만 남으니 시신과 함께 땅에 묻히는 백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네. 백과 분리된 가볍고 청정한 혼을 신명(神命)이라 부르는데, 백성(魄性)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혼을 일러 흔히들 귀신이라고 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보천자가 다시 반응을 살피자 운녹산은 고개를 끄덕여 따라가고 있다고 표시하고 경의상은 진지한 얼굴 그대로 침을 꿀꺽
삼켰다.
보천자의 말이 이어졌다.
“신명이야 그 성정이 가볍고 청정하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마는, 문제는 귀신일세. 음기와 정 사이에서 파생된 백성의 영향을
받아 점차 음습하고 탁하고 감정적으로 변하네. 이성은 없고 오직 죽을 당시의 고통과 분노와 원한만 기억하지. 이미 육신을
떠났으니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못하고, 죽기 직전의 살아있었던 삶을 그대로 기억하고 떠돈다는 것이지. 이 귀신이란
것은 곧잘 정기가 약한 사람에게 들러붙어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을 호소하고 풀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풀어보려 하네. 이를
일러 귀신에 씌었다 하지.”
보천자는 잠시 말을 끊어 한숨을 내쉬고 운녹산과 경의상의 반응을 살핀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아이가 그러한 상태에 있네. 내 아까 말하기를, 같으면서도 다르다 했지? 내가 보니 이 아이는 그 정도가 심하여
무려 아홉이나 되는 귀신들이 들러붙어있구먼. 물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귀신에 씌었다 해도 본인은 대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아이는 이상하게도 귀신의 영향력을 받기 보다는 그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일세. 그러니 늘 울밖에. 한이 맺힌 귀신의 모습은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며 아픔도 그대로이고 그 기운도
참으로 어둡고 칙칙할 테니, 아이가 어찌 참을 수 있겠나? 정감어린 사람의 목소리보다 귀신의 음침한 소곤거림을 먼저 느낄
테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어떻게 이 어린 것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참으로 묘한 일이야.”
보천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서 경의상과 운녹산의 반응을 살폈다. 경의상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운청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운녹산은 기이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의상은 간절한 목소리로 보천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 아이를 구제해 줄 방법이 없겠습니까, 진인?”
보천자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빈도와 같은 사람이 천도재(遷度齋)를 열고 귀신을 불러, 이미 죽었으니 고통과 원한을 잊고 내생을
기약하라, 달래고 타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대개의 귀신들은 쉽게 수긍하고 신명으로 화하여 영계로 올라가지요. 하나
앞서 말했다시피 이 아이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아홉 귀신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여귀만이 아이에게 스스로 붙어
설득이 가능할 뿐, 나머지 남귀 여덟은 자의가 아니건만 금제되어 붙은 것이니 해원(解怨)이 불가능한 지경이지요.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는 귀신들이란 말입니다.”
경의상은 질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저주라 하더니---.”
순간 보천자가 급히 물었다.
“저주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럼 그 내용도 아시는지요? 원인을 안다면야 해원이 불가능하지도 않지요.”
경의상은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급히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운녹산을 바라보며 주저했다. 그러나 곧 결심을 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 믿지 않았습니다만, 전해 듣기로 이 아이의 어미는 임신 초기부터 땅에 두 발이 묶여 있었고 출산
당시에는 하반신이 나무와 같이 변했더랍니다. 결국 출산을 위해 자신의 배를 갈랐다 하더군요. 이 아이를 길러준 사람이
부족의 현자에게 물으니, 저주일 것이라고 했답니다.”
말을 마친 경의상은 흥건하게 물기 고인 눈으로 운녹산을 살폈다. 운녹산은 너무나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떠
운청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의상이 보천자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해원이 가능하겠습니까?”
보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수령신입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피 흘린 혼귀들을 이용하여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러니 풀어줄 수
없지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신령이 저주를 내렸을까요? 허! 문제로고. 신령이라면 웬만해서는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데, 무슨 까닭이었을까? 어찌한다? 태 내림이니 어미가 살아있어야 시도라도 해볼 텐데?”
처음에는 경의상의 물음에 답하던 보천자가 나중에는 홀로 중얼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보천자의 반응에 절망한 경의상은 눈물을 흘리면서 운청산을 토닥였다.
“불쌍한 것!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때 운녹산이 보천자에게 물었다.
“아홉이라 하셨지요? 그들이 생전에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겠습니까?”
보천자가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해 하며 운녹산을 응시하자 그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이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는지요?”
보천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네. 허나 여혼에게는 아직도 신명이 느껴지네. 내 눈을 피하지 않는 그 부드러운 눈빛하며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나에게 보내는 간절한 눈빛으로 미루어 보아, 아이의 모친이 아닌가 싶으이.”
순간 경의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후에 손을 뻗어 판자 하나를 앞으로 당겨왔다. 경의상은 판자를
보지도 않고 단지 표면을 더듬는 것만으로 읽어나갔다.
“몸은 먼저 가게 되었지만 가가 곁에 아이가 있는 한 청수도 함께 있습니다. 아이가 행복하면 청수도 행복합니다. 그냥 한
말이 아니었어. 약속을 지켰어. 이런 아이가 또 있을까?”
경의상의 감겨진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새어나왔다. 반면에 운녹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두려운 듯, 운청산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보천자에게 다시 물었다.
“나머지 여덟 남귀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아이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보천자는 운녹산의 창백한 얼굴과 다급한 음성이 아비로서 당연하게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감히 나를 보지 못하고 밀착하여 여인의 뒤로 몸을 숨기려 해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네. 행색을 보니 살아생전에
무인인 듯 했어. 정확한 것은 아니나 전원 녹의를 입은 듯 했고, 모두가 극심한 자상을 입고 있네. 그들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생전에 절친한 사이인 듯 하고, 귀기 또한 크게 드러내지 않으니 아직은 아이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을 듯
하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이 여인을 해코지하지 않는 것일세. 앞서 말했듯이 귀신은 이성을 간직하지
못한다네. 자신들끼리도 쉽게 다투는데, 신명에 가까운 기운을 지닌 여인을 쫓아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구먼. 여인이 금제에
걸린 것은 아니니 그들의 힘이면 못할 것이 없는데, 이상해.”
말을 끝내고 난 후, 보천자는 운녹산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흘끔거리는 것만으로도 경의상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귀신들이 운청산에게 해코지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운녹산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운녹산은 보천자의 눈길을 의식하고 급히 표정을 바꾸어 물었다.
“혹시 귀신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고 있을까요? 의사소통이 될는지요?”
보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눈을 통하여 볼 수는 있을 것이네. 아이의 능력이 곧 그들의 능력이지. 그러니 보는 건 가능해도 그들이 지금 당장
우리와 의사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그들도 한때 사람이었으니 아이를 통해 알아들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인간의 말과 귀신의 말은 크게 다른 탓에 과연 아이의 입을 빌어 정확한 의사전달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로군.”
운녹산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일 때, 경의상이 이어 물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귀기를 드러내지 않으니 큰 위해를 가하지는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허면 이대로 큰다
해도 무탈하다 이 말씀이신지요?”
보천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귀신은 귀신이지요. 아무리 얌전한 귀신일지라도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아이의 건강에 좋을 까닭이 없지요. 귀신은 그 자체로
음기나 마찬가지인 탓입니다. 아직 어린 동안에는 보약으로 양기를 보하고 나이 들면 양기를 취하는 호흡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기가 강해져서 귀신이 견뎌내지 못하고 날뛰게 되면, 빠져나가지 못하니
아이가 힘들게 되겠지요. 빈도가 보기에는 아마도 여인이 여덟 남귀들과 아이 사이에 완충 역활을 하는 것 같은데 양기가
강해지면 여인도 힘들어질 터이니, 허허 이거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하겠습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보천자는 안타까운 듯 원시천존을 연호하며 경의상을 보면서 계속 머뭇거리는 듯한 인상을 드러냈다.
경의상이 얼굴에 절망감을 드리우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보천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서 입을 열었다.
“빈도가 보기에도 대부인의 기운이 무척이나 강하면서도 따뜻합니다. 혹시 대부인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지 않으면 아이가 심하게
울지 않습니까?”
보천자가 거의 단정을 짓다시피 물었다. 경의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천자가 다시 말했다.
“아마도 귀신들마저 대부인의 기운에 감화되어 아이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같군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수고스럽더라도
아이는 대부인께서 손수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경의상은 겨우 그런 말이었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리 하기로 작정을 보았습니다. 어차피 할 일 없는 늙은이, 기운이 닿는 데까지 힘껏 키울 것입니다.”
보천자가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허나 아이가 커서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귀신들이 다투어 아이의
몸을 빌려 제 뜻을 이루고자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정신력으로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순간 경의상은 운청산을 끌어안고서 앞뒤로 달아 흔들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세상에 나면서부터 이런 혹독한 형벌을 받다니, 불쌍해서 어찌하누? 어찌해?”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경의상이 번쩍 머리를 쳐들고 보천자에게 사정하듯 물었다.
“진인! 정녕 이 불쌍한 것을 구제해 줄 방도가 없겠습니까? 건강하게 사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 편하게만 살게
해주십시오. 제발 방도를 찾아 주세요, 진인!”
보천자는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보며 연신 원시천존을 연호했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빈도가 조언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아이가 거동할 수 있게 되면 기운이 맑은 산에 위치한 도문이나 사찰로 보내어 도사나
승인으로 만들라는 것뿐입니다. 소산생귀요 대산성선이란 말처럼 선기가 가득한 큰 산에서는 귀기가 힘을 쓰지 못하는 법입니다.
귀신들을 얌전하게 만들어 살아있는 동안은 친우처럼 함께 살아나가는 방법뿐이군요. 그 경우 혹시라도 연이 닿아
삼라만상(森羅萬象),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를 꿰뚫는 선인을 만난다면, 선인께서 아이에게 얽힌 인과(因果)를 읽고
악연의 매듭을 풀어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경의상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 손바닥으로 운청산의 볼을 쓸었다. 그때 운녹산이 붉어진 눈으로 보천자에게 물었다.
“진인 아니 처숙어른! 귀신들이 제 마음을 읽을 방도는 없는 것입니까? 이 찢어지는 아비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보천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신이 자네나 나 같이 정기가 세찬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는 없는 일이네. 감히 근처에 접근할 꿈도 꿀 수 없지. 지금은
어쩔 수 없겠으나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때가 되면 자네를 피할 걸세. 그것은 아이의 뜻이 아니라 귀신들의 뜻일 테지.”
운녹산의 두 눈에서 마침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천자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운녹산의 얼굴을
외면하며 연신 도호를 외웠다.
운녹산은 눈물 가득한 얼굴로 운청산의 얼굴을 한없이 응시했다.
잠시 동안 앉아있던 보천자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사과하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보천자를 배웅한 운녹산이 붉은 눈시울을 훔치고서 경의상에게 말했다.
“어머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다가갈수록 청봉이 힘들어진다 하는데 제가 어찌 그 아이를 안으려 할 수 있으오리까.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못난 아들이 다 커서까지 어머님을 편히 모시지 못합니다.”
경의상은 눈물 어린 눈으로 운녹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이 어미, 십수 년은 끄덕 없다. 청봉이 되도록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키울 것이니, 넌 네 할
일이나 신경 써라. 처숙어른을 보아서라도 며늘아기에게 잘 하고. 네가 편하면, 이 어미는 오직 이 아이에게만 정성을 쏟을
수 있지 않겠느냐?”
운녹산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경의상이 다시 말했다.
“내일부터는 할 일이 많다 들었다. 네가 힘든 건 안다만 이럴 때 더 잘해야 하느니라. 언젠가는 네 아버지도 마음 풀릴
날이 있을 게다. 참아라. 지금 당장은 하루하루 최선만을 생각하고 살아라. 가 보아라. 편히 쉬고, 내일 처숙어른께서
일보시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운녹산은 경의상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나서 잠깐 동안 운청산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을 나선 운녹산은 의미모를
긴 한숨을 내쉰 후에 굳게 닫힌 경의상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할까? 오 년? 아니면 십 년? 마음을 엿보지 못한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청봉을 볼 때마다
좌불안석(坐不安席)할 수밖에는 없겠구나. 어디가 좋을까? 나를 위해서도 또 아이를 위해서도 먼 곳이 좋으련만---. 처숙의
무당? 그곳은 안 되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찾아봐야지.’
운녹산은 경의상의 방문 위에 불현듯 나타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다시 보았다. 허상이었다.
‘청수야. 너만은 아니다. 네게만은 내 마음을 엿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오직 너에 대한 내 마음만.’
운녹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감상에서 벗어나려고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청수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산 사람 곁에 죽은 사람이 방황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자신도 모르게 경의상의 방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흩뿌리는 태양과 그려놓은 듯한 하얀 만월이 공존하는 유시 중반경이었다. 뜨는 달과 지는 태양이었건만 그 기세는
오히려 태양이 더 등등하다.
붉은 노을 등지고 검각산 칠십이봉 동향의 마지막 봉우리를 빠져나온 보천자와 두 제자 그리고 운녹산이 길도 아닌 봉우리
초입에서 멈추어 섰다.
보천자가 운녹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참요검을 주게.”
운녹산은 보천자에게 참요검을 건넸다. 살펴보니 사척의 양인검(兩刃劍)인데, 검배(劍背)에는 벽사주인(辟邪朱印)이 새겨져
있고 검격(劍格)에는 삼두육비(三頭六臂) 괴인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보천자는 오른손을 참요검을 세워들고 왼손으로 검결지를 지어 검격에서부터 검첨까지를 부드럽게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탁탑천왕의 영력을 빌어 요괴사마의 출입을 봉하려 하니 힘 잃은 산신은 망령되이 놀라지 말고 영력을 받들어 율령처럼 급히
행하소서.”
보천자는 말이 끝나는 즉시 검파를 놓았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뭉툭한 참요검의 검파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은 것은 서늘한 은광을 뿌리는 이척 정도의 검신뿐이었다.
보천자는 두 팔을 옆으로 펼치며 뒤로 물러섰다. 두 제자와 운녹산도 뜻을 알아차리고 그의 팔 뒤로 물러섰다.
순간 검배에 조각된 벽사주인에서 찬란한 노을이 칼날같이 뻗어 나와 좌우로 펼쳐졌다. 그 노을은 봉우리 하단부를 따라 한없이
뻗어나가서 마치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산의 위쪽과 아래쪽을 가르는 붉은 장막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붉은 장막은 어느 순간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보천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참요검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참요검이 반쯤 묻힌 그 자리에서 여섯 치 가량의 노란 종이부적 한
장이 튀어 올라 보천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천자는 괴황지로 만든 종이부적을 운녹산과 두 제자들에게 보이고 특히 운녹산을 주시하며 말했다.
“요물들 가운데 상당히 강한 놈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더니만---. 자네에게 주기 위해 참요검을 빌리고 이
벽사퇴마부(辟邪退魔符)로 하여 자리를 메웠건만, 반나절 만에 이리 되어 버렸어. 약해진 것을 알고 집중공략한 모양이야.
새벽녘까지 돌아오지 못했다면 참요검 봉산 결계에 구멍이 뚫릴 뻔 했군.”
법술에 대해서는 상식 이상의 지식을 지니지 못한 운녹산도 부적을 보는 즉시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표했다.
보천자가 검을 빌리면서 피로서 벽사퇴마부를 그리는 동안 그 역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 뜻을 알지는 못해도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운녹산이 보는 부적은 그 모양이 많이 훼손되어 피빛 문양이 흐려진 것은
물론이고 하단부의 상당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보천자가 앞서 걸었다. 두 제자와 운녹산도 따랐다. 보천자가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어땠나? 자네도 무언가 느꼈을 텐데---.”
운녹산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귀기라면 잘 모르겠으나 뒷머리가 간지럽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어 번은 등골이 오싹해진 적도 있었지요.”
“그렇지. 양광 아래서는 요마사귀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보니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금새 달려들
것 같은 놈들이 몇 보이더군.”
운녹산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보천자는 앞을 보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칠 년 전, 가주께서 이상한 기운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나를 청하신 것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네. 참요검으로
봉산결계(封山結界)를 치지 않았다면 오늘 날 요물들의 기세는 그 때와 또 달랐을 것이야. 아마도 수 년 후에는 적지 않은
마물들이 출몰하여 이곳 검각현에는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네. 자네 집안의 어른들이나 살아남으시겠지. 다행히
오늘 보니 참요검의 영능이 참으로 뛰어나더군. 참요검의 영기에 상처를 입은 요물들이 감히 산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어. 우리 정도의 기운을 느꼈으면 당연히 몸을 숨기고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을 미천한 요물마저도 은근한 살기를
드러냈네.”
운녹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요물들이 살기를 드러낸다면 오히려 나쁜 징조가 아닐는지요?”
보천자는 흐릿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다행이지. 그것은 발악일세. 감당하지 못할 능력자를 만나면 숨어야 할 놈이 살기를 드러내니 처리하기가 쉬울 밖에.
미물들에게 있어 본능이야 말로 생존을 가능케 하는 최대의 무기 아니겠는가? 약자가 본능을 넘어선 행동을 하니 결과는
죽음뿐. 물론 현민들에게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긴 해도 이미 요물의 출입을 금하여 놓았으니 결계 안으로만 들어서지 않는다면
안전할 걸세.”
운녹산은 쉽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천자가 말했다.
“허나 내가 느끼기에도 만만치 않은 요물이 셋은 되는 것 같더구먼. 자네들 젊은이들은 그들을 처치함에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할 걸세. 만에 하나 놓쳐서 결계 밖으로 나가기라도 한다면 정녕 적잖은 피를 볼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이에 보천자 등은 이미 검각현의 초입에 들어섰다.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들은 텁텁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굳게 문이 잠겨있었고 문의 좌우에는 천사지인과 종규의 그림 같은 온갖 부적들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보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현민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구먼.”
운녹산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현 외각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지면 방문 밖 출입을 아예 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대소변까지 방안에서 해결한다 하니 요새 같이 더운 날씨에는 그 고생이 참담할 지경이겠지요.”
보천자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검각산 근동에서 운가를 칭송하는 소리가 하늘에 닿게 될 걸세. 그 동안 참으로 곡절이 많았으니 더욱 더
뜻 깊은 일이 될 게야.”
곡절이라 함이 금의대의 몰살을 의미하는 것임을 즉시 깨달은 운녹산은 슬픈 눈빛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천자는 실언했음을 깨닫고 웃음을 거두며 운녹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픈 데를 건드렸군. 하나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만월이 뜨는 모레가 지나면 검각산 주변의 수많은 민초들은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게야. 장차 민초들이 운가를 진정한 협가(俠家)로 칭송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자네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 질 걸세. 그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일이니.”
운녹산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이 오가는 사이에 보천자 등은 어느새 운가의
정문에 이르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