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79)

무산을 어렵게 뚫고 천북에 이른 곽자렴에 의해 상자 하나가 전해졌을 때, 상자는 전해진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졌다. 그리고 

가주 운기정을 포함한 일백여 명의 장년인들과 초로인들이 지친 곽자렴을 앞세우고 세가를 나섰다. 

산이 쪼개졌다. 세상사람 그 누구도 발을 디뎌보지 못했던 천북고원과 무산 그리고 의창을 잇는 일직선상에 폭우를 하늘로 

되돌리는 검광이 충천하면서 길이 뚫렸다. 

그들은 운가의 정예, 음양대가 아니었다. 아버지들이며 숙부들이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고 지휘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삼협 북안(北岸)을 묵묵히 돌파했다. 

의창에 이르러 도강하는 동안, 곽자렴은 단 한번도 제대로 숨을 쉬어보지 못했다. 말없는 가운데 뻗쳐오르는 살기와 절통한 

심정이 하늘을 닿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창의 강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초소이는 또 다시 십년은 늙은 듯한 곽자렴의 바짝 마른 노안에 안타까워하다가 그의 뒤를 

따르는 살기에 놀라 인사조차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길을 재촉한 지 닷새. 아버지들과 숙부들은 마침내 비후봉을 휘돌아 비후방의 폐허를 보았다. 

계속된 비로 인하여 피비린내는 이미 가시고 없었건만 비후방을 훑는 아버지들과 숙부들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혈기가 뻗어 

나왔다. 

그들이 마침내 굳게 폐쇄된 비후방의 가장 큰 목옥을 열었다. 곽자렴은 숨을 멈추고 급히 몸을 돌렸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피비린내 그리고 부패한 시신이 풍기는 악취는 평생 염장이로 살아온 

사람이라도 외면하고 말리라. 

모두가 자신처럼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을 거라 생각했던 곽자렴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열린 

문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리고 숨을 멈췄었다. 

곽자렴은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으로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누구도 곽자렴을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오직 한 곳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버지와 숙부들은 문 안쪽에 흘깃 보이던 그 녹의만으로도 그때까지 흘려내던 살기를 거두었다.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눈을 

부릅떠 멈춰 세우고,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입술을 깨물어 참아냈다. 바르르 떨리는 두 손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어 견뎌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두르던 그 기세를 거두고 가능하면 확인을 늦추려는 듯 천천히,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우기에 열닷새가 지났다. 같은 피에 비슷한 성정을 지닌 아이들을 모아 놓았기에 찢기고 부패된 시신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일 턱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분별이 쉽지 않은 그들의 얼굴을 쉽게도 알아보았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검갑과 

패옥 같은 소지품과 옷섶 안쪽에 놓아진 자수로 너무도 쉽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아버지들은 열 한 구의 시신들을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안아 밖으로 나왔다. 누구도 울부짖지 않았다. 오히려 시신을 안고 

있지 않은 숙부들의 입에서 억지로 참는 듯한 끅끅거림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땅바닥에 시신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들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쓰다듬어 펴고 옷을 벗기고 

손발을 폈다. 그리고 등짐에서 새옷을 꺼내 정성스럽게 갈아입히고 다시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들은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에 눈을 맞추었다. 그들의 눈에 부딪힌 빗방울들이 굵어져 뺨을 타고 흘렀다. 

아버지들은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일각이 지났다. 꺼이꺼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던 숙부들이 비후방을 돌아다니며 가장 깨끗한 모옥을 다시 

치웠다. 

이각이 지났다. 아버지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천억 개의 빗방울에게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케 하고 아들들의 시신을 삼촌들에게 

넘겼다. 

삼촌들은 시신들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시신들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들 가운데 몇몇 장년인들이 결국 참고 있던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운기정으로부터 낮은 질책이 터져 나왔다. 울음소리는 단번에 잦아들었다. 

단지 운기정이 가주여서가 아니었다. 세 아들의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고 아프고 불안한 

사람이 운기정임을 아는 탓이었다.

시신들의 안치가 끝났다. 아버지와 숙부들이 일제히 운기정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일백여 명이 모여도 단 한 마디 말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운기정은 아버지가 아닌 숙부들을 셋 추려 비후방에 남기고 

다른 둘을 곽자렴과 함께 의창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흔적을 찾아 숲으로 들어갔다. 

장마철 열닷새의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숲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기에, 아버지와 숙부들은 거의 사라져버린 아들들의 

자취를 겨우겨우 찾아가며 긴 시간을 숲 속에서 방황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입에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비후방의 시신들은 비록 떨어져나갔어도 짝을 맞추어 놓을 수는 있었건만, 

숲에서 찾아낸 시신들은 온전한 것이 한 구도 없었다. 

창칼이 만들어 놓은 상흔은 아예 찾을 수도 없었다. 짐승들이 상흔에서부터 뜯어먹고 갉아먹었으리라. 아버지들은 시신의 반을 

찾는 것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운기정은 더 이상 아비와 숙부들의 울부짖음을 잠재우지 않았다. 가주이기에 앞서 아비인 그였기에 실성한 듯 숲을 헤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들이라 할만한 시체 한 조각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흘렀다. 조각난 시신들을 끌어안고 아비와 숙부들이 하나 둘씩 비후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서야 마침내 모두가 돌아왔다. 

숲에서 찾아낸 시신들은 음양쌍도를 마지막으로 모두 열 구 정도였다. 그러나 머리와 뼈만 찾아낸 것까지 합하면 열세 구. 

비후방에 남겨진 시신 열한 구를 합하면 스물넷이니, 모두 죽었으리라 예상하면 아직 열한 구를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비와 숙부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비 떨어지는 처마 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의창으로 간 곽자렴 등이 운가에서 나중에 떠난 후위대를 이끌고 관과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곽자렴 

등은 쉬 돌아오지 않았다. 

날씨와 배 그리고 사람에게서부터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아비와 숙부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성과 감정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비와 숙부들은 오직 한 사람, 한때 성정 급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운기정의 노안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시신을 발견한 그 목옥 앞 계단에 주저앉아 검을 두 다리 사이에 놓고 검파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운기정은 마침내 두 

손으로 검두를 눌러 일어섰다. 그리고 왼손으로 검갑의 상단 부위를 세차게 비틀어 쥐었다. 

며칠 째 안내자 역할을 하며 그들의 행사를 지켜보던 상초소이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모조리 곤두서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부끄럽지 않은 토가족의 전사라 자부했건만 비후방 구석구석에서 한꺼번에 일어나는 살기는 감히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상초소이가 그들의 족장이라고 생각하던 운기정이 일어서서 

철컥 소리가 나도록 검을 비틀어 쥔 것뿐이었건만, 한없이 침울한 기운만 내뿜던 일백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폭발할 

것만 같은 기세를 드러내며 운기정 앞으로 모여들었다.

범정산으로 간다는 한 마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상초소이는 또 다시 오금이 저리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운을 느끼며 할 수 없이 

등을 돌렸다. 단 세 명의 장년인들만 남고 모두가 운기정을 따라 비후방을 나선 후에야 상초소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났다. 그러나 운녹산은 눈을 뜨지 않고 느껴지는 것들을 음미했다. 맛있는 음식 아껴먹듯, 운녹산은 우선 느낌이 

모호하고 먼 것부터 떠올렸다.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방의 분위기가 먼저였다. 장마철임에도 눅눅하지 않고 오히려 포근한, 마치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태의 

안락함과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지난 이십여 일 간 지냈던 방은 모든 것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이불마저도 

나무를 정성껏 쪼개고 빻아 불에 그슬려 습기를 없애고 다시 태양빛에 말린 것으로 자아 만들었다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거슬리거나 기분 나쁜 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특수한 처리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습기의 문제는 그냥 넘어간다 하더라도, 마치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향긋한 냄새와 더불어 항상 포근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더욱 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한 집의 기운은 운녹산의 성정과도 적절히 들어맞아, 할 수 있으면 이 집을 통째로 운가로 옮겨놓고 싶었다. 

운녹산이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그가 등을 맞대고 있는 침상이었다. 아름드리나무의 밑둥을 잘라 세 치 정도를 파서 만든 

침상. 운녹산에게는 길이가 조금 짧은 듯했지만 침상이 전해주는 온기는 지난 이십여 일 동안 그를 늘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나게 했다. 집을 옮길 수 없다면 나무 침상이라도 꼭 가져가고픈 심정이었다. 

침상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막 또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던 운녹산이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꼼지락대는 작은 움직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운녹산은 코끝을 간질이는 무언가에 코를 박고 눈을 감은 그대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왼쪽 어깨에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운녹산은 잊고 있었던 그 통증으로부터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하! 이런 포근함도 나름대로 즐거운데. 이대로 살아볼까? 큭! 무슨 생각을---.’

운녹산은 자신과는 맞지 않는 꿈임을 깨닫고 눈을 감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돌아가야지. 마음고생이 작지야 않겠지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하하! 생각해 

보니 이제는 대공자가 아니구나. 홀로라? 그렇다고 소가주도 아니겠군. 곧 소가주가 될 비난받는 대공자라. 크크크, 

암담하군.’

운녹산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불의 한쪽 끝을 제치고 소리 없이 침상을 빠져나왔다. 

가슴 아래쪽 옆구리가 시큰거렸다. 운녹산은 부목을 댄 왼쪽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움직여 침상을 반 바퀴 돌았다. 그리고 

오른팔을 뻗어 침상에 웅크린 채 자고 있는 이청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청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아주 잠깐 동안 애잔함이 흘렀다. 요 며칠 운녹산이 이청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끔 그러했다. 

사랑스러움, 안쓰러움, 미안함이 점철된 눈빛. 그러다가 금세 식어버리기도 했고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내가 미쳤나? 알 수 없군. 이런 감정에 휩싸이다니---.’ 

“흐음!”

이청수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운녹산의 손을 향해 먼저 얼굴을 비틀고 또 전신을 비틀었다. 

운녹산은 자신이 이청수를 깨운 것은 아님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드러난 그녀의 봉긋한 가슴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머리로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좌우로 쓸어 넘겼다. 

묘한 얼굴이었다. 가녀린 골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무잡잡한 피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와 거기에 어울리는 귀여운 미소.

외양의 아름다움을 따지자면 운녹산의 아내 목추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귀엽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이청수에게는 목추경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천진난만함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쳐있는 운녹산에게 있어 최적의 

치료약이었다.

운녹산은 이청수가 늘 앉던 침상 옆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이청수가 발을 들어 이불을 반쯤 걷어내며 모로 누웠다. 운녹산은 

드러난 이청수의 봉긋한 가슴 한쪽과 반쪽 둔부와 한쪽 다리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청수와 처음 말이 통했던 그때부터 엊저녁까지의 유쾌했던 기억들을 회상했다. 

정신을 차린 이후 한 동안, 운녹산은 아프고 조급하여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늘 찌푸리고만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알 수 없는 말로 재잘거리는 여인은, 대소변 수발까지 들어주는 생명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짜증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그러다가 사흘째가 되는 날, 운녹산은 자신의 조급함이 결국 감정의 소모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귀가할 수 있도록 육체적 회복에 주력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선 내상을 회복해야 했다. 공력의 대부분을 소진한 후에 얻어맞은 흑면인의 수편에는 가공할 경력이 담겨 있었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인사불성이 되었으리라. 거기에 더해진 오랑하에서의 표류는 내상을 크게 악화시켰고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기에 상세는 더욱 깊어져 있었다. 

약이 필요했다. 운가의 요상단이면 흩어진 진기의 끝자락을 어떻게든 부여잡을 수 있으리라. 일단 공력이 모인다면 내부적으로 

뒤틀린 장부와 뼈를 맞추고 치유에 드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운녹산은 가시 공간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소지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물어야 했다. 여인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물어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손조차 편하게 놀리지 못하는 

운녹산에게는 더욱 짜증스러웠다. 

운녹산은 여인에게 고개를 돌려 입을 움찔거리다가 결국은 한숨을 내쉬고 홀로 중얼거렸다. 

“후! 뭐 하자는 것인가, 말도 안 통하는 여자에게?”

그때였다. 

“뭐가요?”

운녹산은 눈을 뚱그렇게 뜨고 여인을 응시했다. 대충 짐작하기로 묘족의 여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 우리말을 할 줄 아오?”

여인은 동그랗게 눈을 뜬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말? 아! 한어! 할 줄 알아요. 우리말이죠.”

틀림없는 한어였다. 비록 굼뜨고 발음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명료하기까지 한 사천 강남지방의 특색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거기다가 그 내용을 더듬어 보니 여인은 이족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운녹산은 여인의 얼굴을 처음으로 뜯어보았다. 오판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가려있는 그녀의 얼굴 생김생김은 남방계 한족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운녹산이 물었다. 

“왜 처음부터 우리말을 쓰지 않았소?”

여인이 잠시 뜸을 들여 생각한 후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말을 하지 않아서 벙어린 줄 알았어요. 잘 됐어요.”

운녹산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늦었지만 감사하오. 구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그런데 혹시 내게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소?”

여인은 운녹산의 말이 정확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 듯 갸웃거리며 침상 앞의 등나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침상을 빼앗은 탓에 여인은 등나무 의자에 구겨져 잠을 잤다는 사실을 불현듯 떠올린 

것이었다. 게다가 마음이 급한 탓에 생명을 구해준 사람의 이름조차 묻지 않고 먼저 보따리부터 찾고 있었다. 

운녹산은 소리 없이 심호흡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름도 묻지 않았구려. 결례했소이다. 뭐라 부르오리까?”

여인이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청수.”

그때서야 운녹산은 여인이 한인임을 확신했다. 여인이 이어 말했다. 

“숲의 사람들은 딴뚜사이난, 으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호족선낭(護族仙娘)? 아무튼 그렇게 불러요. 근데 무슨 

말이죠? 내가 남겨진 것?”

그 한마디로 운녹산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를 구할 때 칼이나 행낭, 가죽 주머니 같은 것들은 없었소?”

이청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 한 구석으로 줄달음질쳐서 도갑도 없는 청룡의 도파를 거꾸로 쥐고 바닥에 

질질 끌며 돌아왔다. 

“이걸 이렇게 꼭 쥐고 있었어요.”

이청수는 두 손으로 도파를 바로 쥐고 딴에는 무서운 얼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청수는 자신이 

운녹산을 어떻게 발견했으며 어떻게 목옥까지 끌고 왔는지를 쉬지 않고 말했다. 

동작까지 섞인 이청수의 구구한 설명을 모두 듣고 난 운녹산은 그녀가 상처를 다루는 데는 문외한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 당시에 주의를 기울여 옮겼다면 지금처럼 부러진 뼈들이 과도하게 어긋나지는 않았으리라. 

운녹산은 자신도 모르게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것뿐이었소?”

이청수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운녹산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이었다. 차라리 느긋하게 

마음먹는 것이 요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운녹산은 이청수에게 그가 필요한 조치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지시하여 행하게 했다. 부러지고 비틀린 팔과 다리를 바로잡고 

부목을 대고, 가슴을 튼튼히 조이고, 어깨의 상처를 치료했다. 이청수는 기꺼이 운녹산의 지시에 따랐다. 

서투른 그녀의 솜씨에도 운녹산은 아플 수가 없었다. 그가 신음을 뱉으면 같이 얼굴을 찡그렸고, 그가 입술을 깨물면 같이 

입술을 깨물었으며, 벌어진 상처를 치료할 때는 운녹산보다 먼저 아픈 소리를 내뱉었다. 

그 날 이후, 이청수는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해댔다. 처음에는 귀찮게 여겼던 운녹산도 차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내용이 흥미로워서가 아니었다. 듣고 있으면 원치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얼굴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탓이었다. 

이청수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는데다가 따로 길게 응대해 줄 필요가 없었던 

탓에, 운녹산이 할 일은 그저 얼굴을 바라보아 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가끔씩 경청하고 있다는 뜻으로 짧게 반문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다시 십여 일이 흐르고 나니, 운녹산은 이청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아비와 오빠가 함께 했던 그녀의 어린시절이며, 영혼의 이끌림이며, 숲의 사람들이 바로 묘족을 일컬음이라는 것과 그녀가 

그들에게서 호족선낭이라 불리는 일이며, 나무 할머니의 존재와 그 할머니가 두 달 동안의 긴 휴면에 들어갔다는 사실까지 

이청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청수의 음성에는 별 다른 감정이 섞여있지는 않았지만, 듣고 보니 추억하기 좋은 기억들이 아니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차치하고라도, 현재의 생활 역시 그녀가 원하는 삶은 아니라고 느꼈다.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자, 그것을 부족민에게 전하는 영언의 전달자, 호족선낭이라는 지위는 한인에게 하잘것없이 여겨질지 

모르나 묘족들에게는 떠받들어야 하는 정상의 지위였다. 

정상의 위치라는 것, 그것은 바라는 자에게는 행복한 자리일지 몰라도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한없이 외로운 자리임을 운녹산은 

알고 있었다. 이청수는 운녹산 자신과는 달리 원치 않는 편에 속해 있었다.

운녹산은 그녀의 담담한 말속에서 고독에 지친 이청수의 절규를 들었다. 그래서 함께 있어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을 받는 만큼, 그녀 또한 위로를 얻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와의 만남은 운녹산에게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환한 미소를 종종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물다섯이나 먹은 처녀면서 놀랍게도 때 묻지 않은 천진함을 간직하고 있는 이청수를 대하면 대할수록 웃음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길게 마주하지도 않을 존재가 하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 한 마디마다 미소 짓고, 웃기지도 않은 행동에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씩 운녹산은 진심으로 이청수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다. 운가의 교육대로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순수하게 운녹산 개인의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청수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었다. 

금방 정신을 차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놀라운 내면의 변화였다. 다리가 온전했다면 함께 숲을 거닐었을 것이고 팔이 온전했더라면 

하다못해 무공이라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 운녹산의 심정으로도 가끔은 이청수의 행동이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라 이미 이청수에게 못 보일 

것 없이 다 드러내 보인 그였지만, 때때로 느껴지는 여인의 향기는 운녹산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청수는 운녹산의 손을 만졌고, 가슴에 기댔고, 얼굴을 들이밀어 코를 비비기도 했다. 운녹산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이청수의 신체적 접촉은 욕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십수 년 동안 아무런 접촉도 없이 살아온 그녀가 드디어 실체를 

만나 외롭다고 절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운녹산의 육체는 결국 이청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능의 반응이 있었고 그러한 반응을 

경멸했다. 그러면서도 이청수에게 손을 뻗었고 침상의 한쪽을 비워주었다. 그는 결국 손을 뻗었고 쓰다듬었고 움켜쥐었고 마구 

비볐다. 그리고 결국은 선을 넘었다.  

그날 이후 이청수는 운녹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을 쓰다듬고 겨드랑이로 파고들고 하물을 매만지고 입술을 비볐다. 

운녹산은 온전한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가슴과 배와 사타구니 사이를 쓰다듬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배은망덕한 일은 

아니라고. 그녀의 천진함과 외로움을 사랑하노라고.

운녹산은 가슴에 안긴 이청수를 가볍게 밀어 침상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두 어깨를 짚고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일을 할 거야. 앉아서 눈을 감고 잠을 자듯 가만히 있을 거야. 그렇게 있는 동안은 내게 말하거나 

날 건드리거나 내 주위를 뛰어다녀서는 안돼. 청수가 그러면 아픈 게 빨리 낫지 않을 거야. 도와 줄 거지?”

이청수는 대답 없이 얼굴만 찌푸렸다. 운녹산은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서 바닥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하듯 이청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청수는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붕어처럼 튀어나와 

꼼질대고 있었다. 

운녹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토라진 이청수의 얼굴을 앞에 두고 운공에 몰입할 수도 없을뿐더러 

시도해 본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이청수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날에는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었다. 

운녹산은 할 수 없이 다시 일어나 이청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 순간 이청수는 한발은 나왔던 입술을 집어넣고서 환하게 

웃으며 운녹산의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운녹산은 얼굴을 찌푸렸다. 갈비뼈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여서 찌르르한 통증이 일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고통을 입 밖으로 토해내지 않고 대신 이청수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깊은 밤이 되자 운녹산은 이청수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침상을 벗어났다. 청룡을 지팡이 삼아 방문 

밖으로 나갔다. 

목옥의 문을 열었다. 저녁나절까지 지겹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 사인가 그쳤다. 운녹산은 벌거벗은 그대로 질척거리는 땅을 

밟았다. 

팔과는 달리 다리에는 여전히 부목을 대고 있는 탓에,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진창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운녹산은 애도 청룡의 도움을 얻어 숲으로 들어섰다. 

생명수를 마음껏 빨아들인 숲의 기운은 맑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 기운이야말로 운녹산의 성정과 가장 잘 동화되는 기운이었다.

이러한 기운은 단지 숲이 무성하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뿌리박은 토양의 질이 좋아야 하고, 그 토양이 모여 

이루는 산세가 좋아야 하며, 풍부하게 물을 머금어야 만이 비로소 지금처럼 강한 영기가 느껴지리라. 

운녹산은 이청수가 말한 나무 할머니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기운이면 틀림없이 수령신이 머물 것이라고 

확신했다. 단지 그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이청수가 과연 그 수령신의 대리자임에 틀림없는 것이냐는 것뿐이었다. 

운녹산은 숲의 영신에게 감사하면서 오른손 바닥으로 건강한 나무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몇 개의 나무들을 거친 후에 그는 

생명력이 가장 왕성하게 느껴지는 나무를 골랐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나무를 감싸 안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운가의 독문심법인 금련오엽진결은 목, 화, 토, 금, 수의 오기를 각각의 지엽으로 삼아 고루 단련하고 접붙여 하나의 

금련으로 완성시킴으로서 대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시작은 어디에서부터라도 상관없다. 목기에서 시작해도 좋고 수기에서 시작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단지 시작한 기운으로부터 

상생하는 기운으로 기를 변화시켜 종국에는 오엽을 이루면 될 일이었다. 

운녹산으로서는 행운이었다. 그가 타고난 천성 가운데 목성이 가장 강했다. 이런 경우 시작은 상극의 기운을 먼저 단련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미 진경에 가까운 성취를 이룬 운녹산이라면 그의 성정에 맞는 목기의 먼저 취하는 것이 상세를 치료하는 데는 

더욱 빠른 방법이 되리라. 

운녹산은 두 장심을 통하여 나무로부터 생명력 넘치는 목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기운이 약해지는 순간 또 다른 나무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여섯 개의 나무를 전전하고 나자, 이틀 전부터 운녹산의 요구에 약하게 반응하던 단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운녹산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숲의 한 가운데 서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단전의 기운이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운녹산의 전신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렇게 운녹산의 움직임은 반 시진 이상 지속됐다. 

운녹산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마침내 두 손이 내려오는 순간 운녹산은 가늘고 긴 숨을 내쉰 후에 천천히 눈을 떴다. 

서늘한 정광이 숲을 밝히는 듯 하더니 서서히 가라앉았다. 

“됐군. 이제 이 다리만 나으면---.”

그때 나무 사이사이를 뚫고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 가가, 어딨어요? 운 가가, 어디 갔어요? 운 가가!”

운녹산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운녹산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 후에, 청룡을 집어 들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없이 숲을 헤매는 이청수를 발견했다. 

“왜 나왔니? 더 자지 않고?”

이청수는 눈물 그득한 눈으로 운녹산을 바라보다가 진흙을 튕기며 달려들었다. 운녹산은 가슴의 울림을 예감하고서도 이빨을 질끈 

깨물고 두 팔을 벌렸다. 

이청수가 그의 품안으로 꽂히듯 안겼다. 운녹산은 두 팔로 그녀의 뒷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격렬한 떨림이 

느껴졌다. 마치 비 맞은 참새처럼 바르르 떨고 있었다. 

“말도 없이 어딜 갔었어요? 가버린 줄 알았단 말이야.”

운녹산은 혼란스러웠다. 이청수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으로부터 아릿한 감동과 통증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건만 자꾸만 약해지고 있었다. 

운녹산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이청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말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이렇게 곁에 있잖아. 울지 마. 뚝!”

운녹산은 이청수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하염없이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운녹산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기광이 흘렀다. 운녹산은 여전히 이청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오랑하를 보고 있었다. 

운녹산이 이청수의 목옥에서 거한지도 벌써 달포는 지난 것 같았다. 숲의 영기에 힘입어 내상을 치료했고 어깨의 상처와 부러진 

왼팔도 완전히 아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부러지고 심하게 비틀렸던 왼쪽 다리뿐이었다. 

이청수는 눈빛 가득 호기심과 기대를 담아 등나무 의자에 엉덩이만 걸친 운녹산을 주시했다. 운녹산은 이청수에게 싱긋 웃어주고 

허리를 접어 부목을 묶은 끈을 풀어냈다. 

뻣뻣하고 뻐근한 느낌은 있었지만 힘을 주어도 통증이 오지는 않았다. 운녹산은 의자에서 일어나 이청수가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침상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여전히 어색한 느낌은 있었지만 운녹산은 조금씩 속도를 더했다. 

“됐다아.”

이청수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소리 지르고 박수를 쳤다. 운녹산이 미소를 지으며 왼발로 마루를 찍었다. 그의 신형이 

이청수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것도 모자라 구름을 탄 듯 느릿하게 방을 가로질러 방문 앞까지 이르렀다. 

이청수의 즐겁고 놀란 눈을 바라보며 문기둥을 가볍게 찍은 운녹산은 다시 침상으로 돌아와 이청수의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청수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운녹산은 고개를 비틀어 활짝 열려 있는 동창을 바라보았다. 옅게 낀 먹구름 사이로 

오랜만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운녹산이 문득 흥이 돋아 이청수의 팔목을 붙잡고 말했다. 

“가자.”

집밖으로 나서자 운녹산은 이옥수의 왼팔로 자신의 목을 잡게 하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몸을 날렸다. 

“캬아아아아!”

이청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운녹산은 이청수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속도를 늦추면서 부드럽게 허공을 누볐다. 

나무 가지를 밟고 숲 위쪽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한 없이 뻗은 나무들, 그 위로 낮게 깔린 먹구름들, 그리고 그 사이로 장마철 내내 억눌렀던 기운을 뿜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붉은 태양이 장관을 이루었다. 

운녹산은 밟고 있던 나뭇가지에 무게를 실었다. 활처럼 휘어졌던 나뭇가지는 운녹산이 신형을 가볍게 함으로서 다시 활개를 

쳤다. 운녹산과 이청수는 다시 허공을 날았다. 

계속되는 나무들의 도움을 받아 허공을 맘껏 부유하던 두 사람은 숲을 끊어놓는 오랑하의 물줄기 앞에 이른 후에야 멈췄다. 

“하아, 하아, 하아!”

이청수는 안겨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거친 숨을 내쉬면서 운녹산의 목에 감겨있던 팔을 풀고 대신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고 

얼굴을 가슴에 기댔다. 

운녹산은 이청수의 머리를 안아 쓰다듬다가 불현듯 오랑하의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청수가 운녹산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물었다.

“운 가가, 지금 어디 있어요?”

운녹산의 눈망울이 흠칫 떨렸다. 

“무슨 말이야? 여기 이렇게 함께 있잖아.”

이청수는 운녹산의 가슴에서 볼을 떼고 운녹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죠? 나와 함께 있는 거죠? 그런데 이상해요. 멀리 있는 것만 같아요. 차고 아프고 슬퍼요. 왜 이렇죠?”

운녹산은 대답 없이 이청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오랑하의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잠에서 깬 운녹산은 이청수의 머리 아래서 팔을 빼는 대신 목침을 괴어 놓고, 허리를 감고 있는 그녀의 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조용히 침상을 빠져나온 운녹산은 방금 이청수의 머리와 발을 만졌던 두 손을 맞잡아 보았다. 

“웬일이지? 이런 적이 없는데 웬 식은땀을 이렇게---.”

운녹산은 땀에 젖은 이청수의 머리카락을 좌우로 걷었다. 늘 평온하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는 것 같았다. 운녹산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두 볼로 가져갔다. 

운녹산은 그녀 볼 앞에서 갑자기 손길을 멈췄다. 

‘펴주고 싶다. 네 얼굴에 웃음만 심어주고 싶다. 진심이 아니어야 하는데 진심이야. 하지만---.’  

운녹산은 손을 거뒀다. 그리고 침상을 돌아 탁자 위에 널린 하의를 입고 방구석의 탁자 위에 곱게 개어진 상의를 입었다. 

이청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입는 상의였다. 

깨끗이 빨린 옷이긴 하지만 찢어지고 구멍이 뚫려 너덜거렸다. 운가에서라면 걸레로도 쓰지 않으리라. 운녹산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혹시라도 이청수가 깰세라 옷자락 펄럭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옷을 다 차려입은 운녹산은 한 동안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나 결국 다시 탁자로 돌아와 이청수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운녹산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오른손 검지를 세웠다.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운녹산은 오른손을 거뒀다. 그리고 다시 

이청수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망울이 그의 복잡한 심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휘유!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군. 이런 이상한 기분이라니---.’

그렇게 이청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운녹산은 다시 검지를 세워 탁자 위에서 휘둘렀다.   

<기다려. 데리러 올께.>

운녹산은 자신의 몸을 뒤적였다.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이청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운녹산의 

시선이 탁자 옆에 세워진 청룡에 이르렀을 때, 그의 눈빛에서 다시 갈등이 일었다. 

운녹산은 결국 도두 끝에 달린 수실을 뜯어냈다. 수실에는 작은 금패가 달려있었다. 운녹산의 이름 석자가 음각되어 있고 

반대편에는 청룡이 조각되어 있는 한 치 가량의 금판이었다. 

운녹산은 그 수실을 글 옆에 내려놓고 청룡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여 문 앞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운녹산은 다시 한번 이청수의 등을 바라보고서 밖으로 나왔다. 

집밖으로 나선 운녹산은 뒤돌아보지 않고 오랑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강변에 이르자 방향을 틀어 상류 쪽으로 움직였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강폭은 좁아지고 강과 강변의 높이가 달라졌다. 

백여 장을 움직이니 처음에는 옆에서 볼 수 있던 오랑하가 삼십여 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멀지 않으리. 기다려라, 현산. 네 공이 작지 않으니 영혼만은 거두어 주리라.”

운녹산은 발끝에 힘을 가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통곡이라 해야 할 울음소리와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  

운녹산은 발끝에서 힘을 뺐다. 바위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왼쪽 발목이 뒤를 향해 비틀렸다. 몸이 움찔거렸다. 운녹산은 

비틀린 발목을 바로하고 이청수가 앞에 있는 듯 슬픈 눈빛을 하고 중얼거렸다.

“청수! 이해해 다오. 동생과 수하를 산중고혼(山中孤魂)으로 만들고 홀로 돌아가는 처지다. 무슨 염치로 여인을 데리고 

갈까? 조금만 기다려다오.”

운녹산은 몸을 세차게 휘돌려 바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깨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낯설었다. 온통 푸른색의 차갑고 날카롭고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청수는 가슴을 

저미는 한기에 오한을 느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전신이 쓰라리고 갑갑증이 일었다. 이청수는 고개를 숙여 몸을 살폈다. 침상에서 솟구친 수백만 개의 

가는 나무뿌리들이 그녀의 팔과 다리, 몸통과 목을 얽매었다. 심지어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 잡아당겨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청수가 놀라 눈을 부릅떴을 때 갑자기 집이 살아 움직였다. 벽이 꿈틀대고 마루가 일렁이며 문짝이 들썩였다. 

“으으으으으으.”

안된다고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혀가 구르지 않았고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천정이 비틀리며 뭉클대다가 이청수의 코앞까지 늘어졌다. 커다란 얼굴이었다. 백 년이 넘도록 세월의 풍상에 

시달린 노파의 얼굴처럼 쪼글쪼글 주름살이 세로로 얼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찢어진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선혈들이 좌우로 쉬지 않고 구르고, 옹이 같은 뻥 뚫린 두 개의 구멍은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쉬지 않고 벌름거렸다. 

벌름거리던 두 개의 구멍이 축소되어 조그만 점들로 화하는 순간, 선혈 같은 눈망울이 커져 혈안으로 돌변하여 이청수를 

노려보았다. 

이청수는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몇 가닥 나무뿌리들이 그녀의 눈꺼풀을 잡아 위아래로 당겼다. 이청수의 두 눈이 

찢어졌다. 눈의 좌우에 핏방울이 맺혀 눈물과 함께 귀로 흘러내렸다. 

큰 얼굴의 아래쪽에 그어져 있던 긴 선이 덜컥 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동혈이 드러나자마자 그 속에서 거칠고 

날카롭고 붉은 혓바닥이 이청수의 눈앞까지 흘러나와 날름거렸다. 

이청수는 고개를 좌우로 비틀어 붉은 혀를 피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검은 동혈에서 칼날 같은 음성이 흘러나와 이청수의 

귀를 찌르고 머리를 뒤흔들었다. 

이녀어언!  

너를 귀여워하여 내 몸을 잘라 편히 잘 자리를 마련하여 주었고, 내 팔을 잘라 편히 쉴 집을 마련하여 주었다. 양식을 주고 

옷을 주고 평안을 주었다.

이 할미가 뭐라 일렀더냐? 오직 하나, 이슬처럼 순결하게 살아 달라 했었다. 그것 하나 지켜 달라 했었다. 

이것이 이 할미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더냐? 내 몸 가득 더러운 사내놈의 악취와 정액을 묻히고 추악한 숨결을 채우고 

심어지어는 살기 가득한 피마저 뿌렸다. 그것도 모자라 더러운 씨앗을 품고 있어? 

배은망덕한 년! 네 년이 정녕 나를 거역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오냐. 이제 이 할미, 네 년에게 쏟았던 사랑과 자비를 거두리라. 그리고 저주하리라. 

너 이제 나무처럼 살아가리라. 대지는 너의 발을 옭아매고 산은 네 입을 내리 누르고 사람은 너를 증오하리라. 

네 아이 또한 무엇이 다르랴? 축복을 내려주마. 

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 또한 귀신을 보리라. 그러나 너와는 또 다르리라. 자비의 신은 없으리라. 칼끝에 피 뿌린 원념이 

쌓아 가둔 귀신들을 볼 것이다. 평생을 따라 다니리라. 누구도 풀어 주지 못하리라. 

이청수는 그때서야 자신의 눈앞에서 흉광을 뿜어대는 것이 그토록 자애롭던 나무 할미임을 깨달았다. 

이청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나무 할미가 주지 못했던 실체의 손길뿐이었다. 그것이 그리도 큰 죄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용서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침상에서 돋아난 촉수는 그녀의 눈만이 아니라 그녀의 입술마저 지배하고 있었다.

“으으으으으으아아!” 

이청수는 더 이상 자비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아량을 구하고 싶었다. 따뜻한 접촉을 원했던 것이 죄라면 벌은 

자신에게만 국한되기를 소원하고 싶었다.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아이에게까지 벌을 준다는 것은 너무나 비정하다 항변하고 

싶었다. 

나무 할미는 무자비했다. 단 한마디 변명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이청수는 스스로의 의지로 나무할미를 직시했다. 눈으로 애원했다. 그러나 나무할미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안 돼요.”

절규가 터져 나왔다. 입술을 얽어매고 있던 가는 나무뿌리들 탓에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끄아아아아아아.”

팔을 옥죄고 있던 나무뿌리들이 후두둑 끊어졌고, 그녀의 팔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청수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배를 

가리고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무할미를 응시했다. 

“안돼요, 할머니. 아이만은 안돼요. 제발!”

나무 할미는 자신의 힘을 거부하는 이청수의 본능에 놀라 치뜬 두 눈을 움츠러뜨렸다. 그러나 이내 원래의 기세를 회복하고 

다시 분노를 더해 이청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요망한 것!”  

분노한 나무 할미의 얼굴이 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훼르르르륵!

방안에서 돌풍이 몰아치고 가구들이 부서져서 침상주변을 휘돌고 나무 바닥이 통나무 조각으로 부서져 바람을 따라 돌면서 벽도 

부서지고 천장도 부서졌다. 

이청수는 돌풍의 한 가운데 앉아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이청수는 눈을 뜨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안은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있다면 한 가지, 어둡고 음습하여 예전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청수는 식은땀이 흥건한 나무침상을 손바닥으로 확인하고 불현듯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청수는 문득 천장을 올려다본 후에 급히 침상을 벗어났다.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목으로 가져가 거기에 달랑거리는 금패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쾅! 

굉음과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창을 꼬나 쥔 건장한 청년 둘이 먼저 방으로 들어서고, 그 뒤로 색색이 화려한 옷을 

입고 괴장을 든 노파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이청수는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노파와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청수의 집은 금남의 지역이었다. 청년들은 감히 집은커녕 근처의 흙조차 밟지 못했고, 어린 처녀들만이 옷과 음식과 기타 

생필품을 전달하기 위해 출입이 허락되었다. 

한때 이청수는 처녀들과 친해져보려고 노력했으나 그녀를 대하는 처녀들은 오체투지도 모자라 무릎에서 피가 나도록 급히 무릎걸음 

질치며 물러섰다. 그들이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청수는 친구로 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가급적이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했었다.   

그나마 사이난이라고 불리는 노파는 조금 나았다. 부족의 중대사를 묻거나 이청수가 받은 나무할미의 영언을 전달받기 위해 자주 

들렀고, 오직 노파만이 조심스럽게나마 이청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노파마저도 감히 이청수의 방안까지 들어온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청수를 향해 노파가 괴장을 뻗으며 울부짖었다. 

“배덕한 년! 수령신께서 그토록 사랑해 주셨건만 신덕(神德)을 저버렸으니 독사 굴에 처넣어도 그 죄를 사하지 못하리라. 네 

년 덕에 이 늙은 것이 할 수 없이 신언(神言)을 이어받으니, 감히 몇 번이나 수령신의 음성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죽일 

년 같으니라고.”

이청수가 놀란 눈으로 살펴보니, 겨우 두어 달 전에 만났던 노파의 얼굴이 십 년은 늙은 것 같았다. 

이청수는 노파의 절규에 찬 한 마디를 잘라,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몇 번이나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이청수만이 나무할미의 음성을 많은 노고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는 말이리라. 그랬기에 울부짖듯 소리쳤으리라. 

노파가 다시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수령신의 뜻에 따라 저년을 내쳐라. 영생토록 대지를 방황할 것이로다. 죽음보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로다. 

끌어내!”

사내들이 다가섰다. 감히 얼굴도 바라보지 못하고 오체투지하던 그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이청수를 붙잡았다. 

이청수는 처음 깨달았다. 숲의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통해 수령신을 대하였을 

따름이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원치 않는 호랑이 흉내를 내며 살았던 이청수는 수령신이 그녀는 내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천한 여인이 되어버렸다. 

이청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전신에서 힘을 뺐다. 두 발끝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발톱이 깨지고 피가 

흘렀다. 섞은 나무토막처럼 다루어져서 마침내 질퍽거리는 땅에 내팽개쳐졌다. 

이청수는 힘겹게 일어섰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어서 무작정 걸었다. 

두 발을 질질 끌어 한참을 걷고 난 후에 멈춰서보니 오랑하의 앞이었다. 야속한 운녹산과 몇 번이나 함께 왔던 곳이어서 

무의식중에 오랑하로 발걸음을 잡은 것이리라. 

이청수는 멍한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세상천지 그녀가 아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던가? 이청수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여기 있어야 되는데---. 운 가가가 데리러 오겠다고 했었는데---.”

이청수는 문득 오랑하의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운녹산이 늘 그 방향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드리웠던 것을 기억해낸 

것이었다. 

이청수는 걸었다. 강변을 따라 운녹산이 갔을 그 벼랑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외로움에 어두움을 접붙이면 무서움이 피어난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느낌 속에서 무작정 걷기만 하던 이청수는 눈앞에 땅거미가 

짙어지자 불현듯 몸을 떨었다. 

좌우를 둘러보았다. 우측으로는 세상보다 더 어두운 숲이 드리워져 있고 좌측으로는 수십 길 낭떠러지였다. 이청수는 급히 

주변을 훑어 가슴까지 오는 굵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밝은 벼랑 쪽으로 바싹 붙었다. 

파스스스스스!

이청수의 발끝에 밀린 흙더미들이 벼랑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한 발 숲 쪽으로 다가갔다. 

오우우우우우!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다시 벼랑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파스스스스스!

흙더미 떨어지면서 눈물도 왈칵 흘러나왔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한 밤중에 숲을 돌아다녀도 무서움에 몸을 떨었던 기억은 전무했다. 가끔 길을 잃고 이청수의 집에 이른 

동물들은 그녀의 손짓 한번에 길들인 짐승처럼 온순해졌고, 맹수들마저도 꼬리를 내리고 그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었다.

경험도 없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는 것, 그것은 이청수로 하여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것이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청수는 나뭇가지를 버팀목 삼아 힘겹게 일어섰다. 

“난 혼자가 아냐. 운 가가가 있고, 여기에---.”

이청수는 문득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내게도 이제 가족이 있어. 가야지. 찾아야해.”

이청수는 후들거리던 다리를 진정시키고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가고 또 가다보면 틀림없이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운녹산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걸었다. 

이청수는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한발만 더 내딛으면 바로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을 택했다. 본능이 있는 

짐승이라면 그 어떤 맹수라도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끼도록. 

밤이 되었다. 그래도 이청수는 걸었다. 소경처럼 나뭇가지 끝으로 한발 한발 앞길을 짚어가며 걷고 또 걸었다. 낮과 밤이 

교차하여 다시 밝음이 찾아올 때까지 걷고, 뙤약볕 아래서도 쉬지 않고 걸었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갈증만큼은 견뎌낼 수 없었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바로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데 마실 수 없었기에 더더욱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옥수는 처음으로 진로를 바꾸어 숲에서 가장 그늘 곳으로 들어갔다. 아직 장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축축한 땅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옷자락을 넓게 펴서 땅 위를 덮었다. 두 손으로 땅을 내리눌렀다. 땅이 토해낸 물기가 옷자락을 적시자 그 위로 혀를 

대고 수분을 얻었다. 짜고 핥고 짜고 핥고---. 옷을 적신 물에서 흙냄새 가시지 않는 것처럼 갈증도 쉬 가시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그러하리라. 물로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이 되지 않으니 갈증은 여전할 수밖에 없으리라. 겨우 

목이 말라붙는 것을 면하자 물 핥기를 포기한 이청수는 자포자기 한 듯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숲에서 기어 나온 화사 한 마리가 이청수의 두 다리를 넘어 반대쪽 숲으로 들어가도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늘어져 있던 이청수가 문득 자신의 아랫배에 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아이야! 넌 정말 있는 거니? 아무 것도 못 느끼겠는데, 정말 있는 거야? 그래, 있을 거야. 나무 할머니가 있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런데 넌 세상을 보고 싶니? 외롭단다. 전에는 몰랐지만, 힘들기도 할 것 같아. 그런데도 

보고 싶니? 왜 대답이 없니? 하기야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 문 앞에서 그만두긴 그렇지? 알았어. 조금 더 힘을 낼께. 네가 

세상을 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

이청수는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고 어렵게 일어났다. 이상했다. 진이 빠질 정도로 지친 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발 떼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마치 수십 개의 징이 박힌 쇠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그래서 발을 끌어도 보았지만 발과 땅 

사이에 질긴 끈이 달린 것처럼 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청수는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힘겹게 걸었다. 각 발로 한 발씩 떼고 나니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걷노라면 힘겹기는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아? 나무처럼 살리라?”

이청수는 공포에 휩싸인 눈으로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뛰다시피 걸었다. 발바닥에서 내려온 기운이 땅에 뿌리박히기 전에 쉼 

없이 걸었다. 지치고 갈증 나고 힘들었지만 걷지 않으면 땅에 뿌리박혀 버릴 것만 같아서 한없이 걸었다. 

어느새 다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청수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우측의 숲이 끊겼다. 그리고 

벼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낮은 풀과 황토가 대부분을 차지한 넓은 고원이었다. 그 앞으로 멀리 또 다른 숲이 있었다. 

이청수는 힘겹게 눈을 치뜨고 고원 너머 숲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 고원만 지나면 나무 할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명을 질러대며 발을 떼었다. 

이청수가 고원의 반 정도를 가로질렀을 때였다. 

“크르르르르르!”

소리를 듣는 순간 등에서 차가운 한기를 느껴졌다. 보지 않고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그러나 발은 여전히 천근만근. 

그녀 스스로는 뛴다고 생각했지만 발가락에서 뭉클뭉클 피가 터져 나오도록 빠르게 발을 옮겼을 따름이었다.

등골 서늘해지는 느낌이 점차 강렬해졌다. 

쉭!  

왼쪽 귀에서 낮은 파공음이 들렸다. 그 순간 칼날 같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이청수는 본능적으로 우측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결과 그녀와 벼랑 사이가 일장 가까이 벌어져 버렸다. 

바닥을 뒹굴던 이청수가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

이빨을 드러낸 늑대 한 마리가 이청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청수는 급히 일어나 벼랑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그쪽에도 또 다른 늑대가 그녀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우측과 뒤를 보았다. 거기에도 각각 한 마리씩이 더 있었다. 

모두 네 마리. 평소의 이청수라도 감당할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늑대들은 미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똑똑했다. 바로 

덮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이청수의 좌측을 위협하여 벼랑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청수는 물기 고인 눈에 독기를 품고서 나뭇가지를 굳게 쥐었다. 그리고 고통이 가득한 비명을 지르며 한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늑대들이 점차 간격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면의 늑대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청수는 있는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무엇인가와 부딪치는 느낌이 있었다. 이청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동 

탓에 나뭇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덤벼들었던 늑대가 입에 물고 있던 나무를 옆으로 팽개치고 있었다. 

이청수는 공포에 질린 채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단 두 발을 움직이는 순간 왼발 허벅지에서 격통이 일었다.

“아악!” 

이청수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서 덮친 늑대가 이청수의 허벅지를 깨물어 좌우로 계속 비틀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좌우에서 두 마리 늑대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쉐엑!

“케켕!”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고 늑대 두 마리가 동시에 죽창을 옆구리에 꽂은 채 울부짖었다. 이청수의 다리를 물고 있던 늑대는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와 전면에 있던 늑대와 함께 크르르거리며 이청수의 앞쪽을 노려보았다. 

이청수도 고개를 들었다. 십여 장 앞쪽에서 겨우 하물만 가린 네 사람이 이청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의 두 사람은 

허리춤에서 박도를 빼어들었고 뒤의 두 사람은 죽창을 든 채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항할 기색을 보이던 두 마리 늑대가 숫적 열세와 달빛에 반사되는 금속의 차가움을 발견하고는 결국 이빨을 숨겼다. 

그리고 곧장 꼬리를 내린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이청수는 자신의 바로 코앞에 사람의 발이 보이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정신을 잃었다. 

느안카이와 상초소이는 여인을 새로 생긴 듯한 무덤에 기대어 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군, 느안카이. 무슨 사연일까? 한족이라기엔 장소가 이상하고, 묘족이라고 하기엔 생긴 게 묘하군.”

느안카이는 상초소이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이청수의 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이것 봐! 발톱이 다 까졌어. 발바닥엔 상처투성이고. 고운 발등을 보면 이렇게 다닐 여자가 아닌데, 정말 이상하군?”

상초소이와 나머지 두 사람도 느안카이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 동감을 표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청수를 바라보던 상초소이가 박도를 빼어들어 이청수의 하의 끝자락을 찢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청수의 

허벅지를 친친 감으며 말했다. 

“어쨌든 다행이야. 그 사람 부탁을 받아 할 수없이 이곳을 살피고 있었으니 구했지, 안그랬다면 젊은 여자 하나 늑대 밥이 

될 뻔 하지 않았나?”

느안카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청수가 눈을 떴다. 이청수는 흐릿한 눈빛으로 느안카이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느안카이는 이청수의 말라붙은 입술을 바라보며 수통을 들어 여인의 입에 기울여 주었다. 입술이 젖고 혀가 젖고 목구멍이 

젖었다. 이청수는 만족하지 못하고 한없이 물을 원했다. 마시고 또 마셨다. 느안카이가 되었다 싶어 수통을 거두려는 순간에도 

애절한 눈빛을 보내 그로 하여금 다시 수통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상초소이가 말했다. 

“배가 고팠나 봐.”

상초소이는 가슴에 사선으로 맨 가죽 가방을 열어 그 속에서 구운 감자 두 알을 꺼냈다. 그것을 본 이청수는 상초소이가 

내밀기도 전에 손을 뻗었다. 

상초소이가 우호적인 미소를 머금고 감자를 건네자 이청수는 빼앗듯이 받아들고 급히 먹기 시작했다. 느안카이는 수통을 흔들어 

물이 바닥에서 찰랑거린다는 것을 확인하고응 상초소이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수통을 이청수의 옆에 내려놓았다. 

감자 두 알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이청수는 다시 수통을 들어 남은 물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상초소이가 그때서야 이청수에게서 눈을 떼고 멀리 이청수가 나섰던 반대쪽 숲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묘족의 영역,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오래 있을 곳이 못돼. 숲으로 들어가자고.”

“음! 안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이상해. 낮에 햇살이 그리도 좋았는데 여기 오니 이상하게 축축한 것 같아.”

느안카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고 나서 이청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어찌할 것인가 묻는 듯한 눈빛으로 상초소이를 

응시했다. 

상초소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청수를 바라보았다. 

힘없는 눈빛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발은 상처투성이에다가 입 주변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는 연약한 여인을 남겨두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 몇이나 될까. 

상초소이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이청수의 얼굴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나?”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이청수는 그저 멀뚱멀뚱 상초소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초소이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서 다시 한어로 물었다. 

“무-무슨 일?”

그 순간 이청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입을 열려했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분명 입술을 

꼼지락거리는데 나오는 소리는 절망에 찬 신음밖에 없었다. 

이청수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산이 네 입을 옭아매리라?’

이청수는 절망에 차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상초소이와 다른 사람들은 그 반응을 보았다. 더듬더듬 한어로 물으니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이청수가 원래 벙어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상초소이가 슬픔과 절망에 가득 찬 이청수를 외면하고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쨌든 돌봐줘야겠지?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몸이 회복되면 그때 갈 길로 가라 그러자구.”

모두들 동의하자 상초소이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느안카이와 나는 여기에 남아 이 무덤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자네들 둘이서 이 여자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 가서 

우리 안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맡기라구.”

조금 더 젊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초소이의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이청수의 지친 기색을 읽고 그녀를 

좌우에서 부축하려고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이청수와 사람들 주변에만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흐윽!”

이청수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으며 두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 활처럼 등을 들었다. 그녀의 하복부가 꿈틀거렸고 다시 둔부가 

땅에 닿았다. 

사람들이 놀라 눈을 치떴다. 바로 그 순간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어 무려 여덟 번이나 이어졌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청수의 신음은 더욱 고통스럽게 변했고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산통을 연상케 하는 여덟 번째 고통을 호소하고 난 이청수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식은땀을 흘려버리면서 겨우 눈을 떴다. 

파랗던 입술이 서서히 제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청수의 눈은 지친 기색 속에서도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이청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등을 대고 있는 것이 아직 땅도 

마르지 않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아이에게 무엇인가가 붙었어. 그것도 여덟이나. 귀신을 보리라 했었지? 평생을 따라다닌다 했었지? 누구도 풀지 못한다 

했었지? 아가야, 어쩌면 좋으니?’

이청수는 아이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편 기이한 광경을 목도한 네 사람은 할 말을 잃고 이청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청수가 다시 눈을 뜨고 물기 그득한 눈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에 정신을 차린 상초소이가 물었다.

“같이 가?”

이청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초소이는 젊은 사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들이 이청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그녀를 들었다. 

작고 연약한 이청수는 번쩍 들려 일어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청년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청수의 두 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힘을 주어 당겼다. 두 발바닥이 아교 칠을 한 듯 

달라붙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상황에 익숙해진 이청수는 상체를 흔들어 두 사람을 떼어냈다. 그리고 상초소이의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박도를 가리켰다. 

상초소이는 처음에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겨우 뜻을 알아차리고 박도를 건넸다. 

이청수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땅과 두 발 사이에 박도를 찔러 넣었다. 모두가 놀라 눈을 치뜨는 사이에 박도는 피가 번지는 

땅과 이청수의 두 발바닥 사이를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발가락 밑으로 들어갔던 박도가 발꿈치 뒤로 나왔다. 

이청수는 급히 일어나 발걸음을 떼었다. 

네 사람은 걸음을 옮긴 이청수를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두 발바닥이 조금 전까지 붙어있던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피가 

번져있을 뿐, 그 자리에는 오로지 황토뿐이었다. 

영문을 몰라 다시 이청수를 보는데, 겨우 되찾은 안색이 다시 하얗게 된 그녀는 늑대에게 물린 자리가 아플 텐데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제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모두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것을 느낀 이청수는 박도를 상초소이에게 건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청년에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전심이랄까? 말이 안통하는데도 모두가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상초소이에게는 감사의 뜻이 그리고 두 청년에게는 

가자는 뜻이 마음 그대로 전달되었다. 

두 청년이 이청수의 좌우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청수는 상초소이와 느안카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청년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아내는 즐거운 고양이라는 뜻의 상메오라는 이름을 가졌다. 멀지 않은 과거의 상처를 대부분 잊은 듯, 항상 유쾌한 

웃음을 달고 다녔다.

이청수가 상메오의 친절하고 부담 없는 이틀 동안의 보살핌으로 기운을 차렸을 때, 상초소이가 부족의 다른 사람들과 임무를 

교대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상초소이는 상메오와 이청수에게 얼굴도장을 찍자마자 우선 마을의 최고어른이며 현자이며 토지신과 조상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부룬카 노인을 찾아갔다. 

상초소이는 부룬카 노인에게 그 기이한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기대와는 달리 부룬카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상초소이에게 이청수를 격리하여 돌보라고 권고했을 따름이었다. 

상초소이는 느안카이를 찾아갔다. 격리라는 말에 느안키이는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내 집이 마을의 끝에 있으니 그 여자를 거기에 두세.”

상초소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 기회에 합치게?”

느안카이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룬카께서 재촉하시는 것도 있고,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탄흐츄이와 나에게도 함께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슬픔을 오래 간직하면 병이 되기도 하지.”

죽은 사람에게는 매정하게 여겨질 일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토가족의 전통이었다. 미망인이 있고 홀아비가 

있어서 짝을 지워줄만 하다 싶으면, 마을 어른이 월하노인이 되어 재혼을 시켰다. 

그것은 “젊음이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힘”이라는 토가족의 오래된 금언과도 관계가 있지만 결국은 힘없고 작은 부족을 

이어가려는 본능의 소산이리라. 

느안카이와 탄흐츄이의 경우가 그에 속했다. 느안카이가 아내를 비후방에서 잃었다면 탄흐츄이는 그 복수를 위해 나섰던 남편을 

잃었다. 두 사람은 마을 사람이 나서서 짝을 지워줄 만 했고 두 사람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서로에게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느안카이의 결심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토가족의 마을 안에 이청수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이청수는 저주받은 자신의 인생이 과연 불행한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자신을 저주받게 만든 운녹산이라는 존재는 짧으나마 

그녀의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아 한 동안 슬프고 불안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무 할미의 말을 믿음으로 해서 그 존재를 느끼게 된 아기는 그녀의 굳건한 의지처가 되었다. 이청수는 붙박이가 되기로 

작정했다. 

잘라내야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잘라냄으로서 그만큼 쇠약해지는 것도 알아차렸기에 불편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제 나무처럼 살리라는 저주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었다. 단지 불편함일 따름이었다. 

다른 불편함도 없지는 않았다. 늘 남도록 먹을 수 있었던 맛난 음식들은 이제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몸이 요구하는 

음식물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상 오래갈 불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만 깨끗한 물이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녀의 배설량도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불편했다. 하지만 토가족과 사는 한, 말이란 의미가 없었다. 말은 있고 글이 없는 토가족과는 

어차피 입으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느낌으로 통하는 것은 가능했고 그림으로 통하는 것 역시 

이족(異族)이 상동(相同)이었다. 

이제 이청수에게는 저주가 저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저주받음으로서 그녀는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얻었다. 작고 누추하지만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집을 얻었고, 같은 눈높이로 마주하여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얻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밖은 왁자했다. 이청수는 생각에서 깨어나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지 그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탓이었다. 

이제 그녀가 주인이 된 집의 원주인인 느안카이가 어제 함께 인사하고 갔던 여인의 집에 들어감으로서 혼인이 성사되었다는 것을 

상매오의 그림과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엊저녁에도 한바탕 주연이 벌어지는 것 같더니 오늘 아침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청수는 까닭을 알기에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속 깊이 느안카이의 행복을 빌었다. 

그때 작은 동창으로 한줄기 햇살이 스며들어 이청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청수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햇살을 음미하듯 지그시 눈을 감으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내 아이야. 기분 좋지?’

그때 또 다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청수는 가만히 눈을 뜨고 그녀의 옆에 있는 나무통에서 물 한바가지를 퍼서 두발에 

부었다. 그리고 다시 한 사발을 떠서 마셨다. 

햇살과 물과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청수를 평안하게 만들었다. 이청수는 다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으로 활짝 열린 

문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어제의 혼사 분위기가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살펴보니 집 앞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도와 죽창까지 챙겨 든 장정들뿐이었다. 

이청수는 귀를 기울이고 의아한 눈으로 사람들을 살폈다. 그때 집 앞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토가족 사람들과는 

달랐다.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는데 그 얼굴에 어울리게 옷마저 흑면경장을 입었다. 

나이든 세 사람이 지나갔고 그 뒤로 관을 든 청년들 두 사람이 지나갔고 또 다른 청년 일곱이 사람 상반신만한 목함을 들고 

지나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이청수의 시야에 들어섰다. 

‘운 가가!’

이청수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틀림없이 운녹산이었다. 예전의 그 넝마 같은 옷에 산발한 머리가 아니라 단정하게 

차려입은 말쑥한 모습이었지만, 달포 이상 살을 맞대고 살았던 그 운녹산을 못 알아 볼 이청수가 아니었다. 

‘운 가가!’

이청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소리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이청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여자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려 나무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막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운녹산을 향해 집어던졌다. 

딱! 

나무바가지가 문기둥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이청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팔로 바닥을 긁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두 

손으로 오른발을 붙잡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발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것은 불편이 아니라 저주였다. 

이청수는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나무 할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피가 터지도록 ‘운 가가’를 외쳤다. ‘나 여기 있다’고 외쳤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이청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이청수는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목에 걸린 

운녹산의 금패를 주먹으로 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청수는 운녹산을 보고도 만나지 못한 그 비통함에 결국 반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근 보름이나 넋을 놓고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다른 어떤 외부의 자극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난 꿈틀거림 때문이었다.

성심껏 이청수의 수발을 들어주던 동정심 많은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그녀의 회복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탄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이청수의 눈빛이 너무나 영롱하고 포근하여 두 여인마저도 그 품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 

세월이 흘렀다. 토가족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왔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이청수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작은 동산 만하게 부풀어 오른 배가 출산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을 직감한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이청수에게 더욱 더 신경을 썼다. 

이청수를 옆에서 돕는 그들은 늘 감탄했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성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퍼석거리는 피부와 

회색빛 도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는 달리, 이청수의 전신에서 풍기는 자애로운 기운은 너무나 눈이 부셔서 보기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청수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발바닥 아래로만 변화할 줄 알았는데 나무껍질 같은 딱딱한 

기운이 보드라운 이청수의 다리를 서서히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고 겨울을 거치자 그녀의 허벅지까지 침범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경화되어 가는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상매오와 탄흐츄이의 걱정은 거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출산 때가 되면 경화는 그녀의 허리까지 침범하리라. 그렇게 굳은 

하체로는 도저히 아이를 출산할 수 없으리라. 두 사람은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그런 데까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청수는 굳은 다리 탓에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그래서 상초소이와 느안카이는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서있는 침상’을 만들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별 달리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이청수는 두 사람의 호의에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마침내 출산의 시기가 다가왔다. 이청수는 얇은 나무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손짓을 이용하여 상초소이에게 나무판자와 

비수를 부탁했다. 

여전한 얼굴이었음에도 상초소이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상초소이는 이청수의 요구에 응했다. 

이청수는 나무판자에 비수를 사용하여 글을 새기고 나서 그것을 상초소이에게 넘겼다. 그리고 비수를 서있는 침상에 꽂아두고 

나무막대기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배부른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그 배 안에 아이를 그렸다. 또 그 옆에 하체가 나무인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손을 잡은 아이와 그 아이의 다른 손을 잡은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상초소이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때 이청수가 상초소이에게 목걸이처럼 차고 있던 금패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사내의 목에 목걸이를 그렸다. 상초소이는 그것도 이해했다. 

이청수는 다시 사내의 뒤에 집을 그렸다. 그리고 나무막대기로 상초소이가 들고 있는 나무판자를 가리켰다. 이청수는 간절한 

눈빛으로 상초소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초소이가 이청수에게 나무막대기를 건네받아 그림을 그렸다. 벌거벗은 남자가 판자와 아이를 이청수가 그린 목걸이 남자에게 

건네는 그림을 그렸다. 그때서야 이청수는 간절한 눈빛을 거두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틀이 지났다. 토가족 사람들이 모두 걱정스런 얼굴로 이청수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나무여인이라고 부르는 이청수의 

진통이 시작된 탓이었다. 

이청수의 진통은 여느 여인들과는 달리 조용했다. 그래서 더욱 더 처절했다. 

이청수는 나무였다. 양수가 경화된 두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진통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는데도 신음성 한번 뱉어보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상체는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아픔을 호소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초소이를 비롯한 부족의 장정들이 모두 동원됐다. 그들은 쉴 사이 없이 물을 길러 날랐다. 아낙네들이 

연신 물을 퍼서 이청수의 전신에 퍼부었다. 그러나 굳은 하체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청수가 ‘서있는 침상’에 꽂혀있던 비수를 뽑아들었다. 여인네들이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청수는 

서슴없이 비수를 배꼽 아래에 꽂았다. 비수는 그대로 그녀의 음부까지 가로질러나갔다. 

이청수는 나무가 아니었다. 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면서,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성스런 어머니였다. 

이청수의 뜻을 알게 된 아낙네들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목을 놓아 통곡했다. 이청수는 그들에게 힘겨운 

미소를 보여주고 나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상체를 내리 눌렀다. 

뿌드드득!

“으아아아악!”

놀람과 기적이 동시에 일어났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굳게 잠겨있던 이청수의 두 다리가 고사목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고, 동시에 토가족 사람들이 아는 한 처음으로 이청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주저앉은 이청수는 힘겹게 손을 까닥여 상매오와 탄흐츄이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두 팔로 연신 눈물을 

훔치다가 비장한 몸짓으로 이청수의 다리 사이를 헤집었다. 

“응애, 응애, 응애!”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다. 상매오는 이청수에게 보통아이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울어 제치는 아이를 들어보였다. 이청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상매오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입을 가져가 탯줄을 끊었다. 

상매오는 탄흐츄이가 들이미는 물통에 아이를 담아 정성스럽게 씻겼다. 그리고 누렇게 빛바랜 마포에 싸서 이청수의 품안에 

넣어주었다. 

이청수는 하얗게 웃음 지었다. 어떤 이상한 조짐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아이의 입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눈빛에서 힘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급히 이청수에게 달려가 그녀의 등을 받히고 있는 서있는 침상을 치우고 그녀를 눕혔다. 이청수는 다시 

한번 감사의 미소를 보낸 후 한 팔로 아이를 지탱하고 다른 한 팔을 바닥에 뻗어 힘겹게 청산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이청수가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하는 저주는 없단다. 내 아기, 삶이 조금 힘들더라도 늘 푸른 산처럼 맑고 꿋꿋하게 살아다오. 내 

아기, 청산(淸山)!” 

그랬다. 저주는 풀렸다. 이청수가 말을 함으로서 풀렸고, 토가족과 같은 순박한 사람들을 만난 탓에 사람이 싫어하리라는 

저주는 아예 효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제 죽음으로서 영원히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이청수. 

스물여섯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등졌으나 그 강한 모성은 토가족 사람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살아남았다. 훗날 토가족 사람들의 

입에서는 성스러운 어머니의 노래가 자장가처럼 구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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