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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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왕기주 토비연(土飛燕)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두루 확인하고 대리석 기둥이 즐비한 통로를 지나 대전에 

이르렀다. 

대전의 끝에 위치한 태사의를 확인한 그녀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온전한 눈빛을 되찾아 태사의 앞에 

이르렀다. 

“제자가 두 분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녀의 고개가 태사의 비켜나 좌우로 달아 숙여졌다. 태사의 좌우에 자리한 두 개의 의자에 앉아있던 온화한 표정의 초로인과 

차가운 얼굴의 노부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연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온화한 얼굴의 초로인이 입을 열었다. 

“인사 올리거라. 천궁(天宮)에서 오셨느니라.”

토비연은 태사의에 느긋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선풍도골의 노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금새 정신을 

차리고 깊숙이 부복했다. 

“오행신문 토기령주 토비연이 삼가 존체를 뵈옵니다.”

선풍도골의 노인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여쁘게 생겼구나. 일어나라.”

토비연은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인 채로 기다렸다. 

“결과를 들어볼까?”

선풍도골의 노인이 물었다. 토비연은 소리 나지 않게 심호흡하고 나서 가능한 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운가의 금의대와 폐문의 금혼기가 부딪친 결과, 금혼기는 기주를 제외하고 전멸했으며 금의대는 서른 둘 가운데 열 하나의 

사망자가 났습니다. 그 뒤로 화령기를 제외한 나머지 삼기가 모두 출문하여 금의대를 전멸시켰습니다만, 그 와중에 토왕기병 

예순 둘, 목정기병 서른 셋, 수신기병 마흔 다섯이 죽거나 크게 다친 바, 이번 일로 오행기의 전력 오할이 감소했습니다.”

태사의 좌우에 자리한 두 남녀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태사의에 앉아있는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군. 아직 멀었어. 급조한 세력으로 저들의 일각을 부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 났구먼. 헌데 생각보다 

더 많이 밀렸어. 역시 전통이란 것은 무시할 수가 없구먼.”

말끝에 노인이 좌측의 초로인을 바라보자 초로인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만합니다.”

노인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질책하자는 게 아니야. 세월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안타까워 그렇지. 기다린 세월만큼 또 기다려야 할 것 같구나. 

무인들끼리의 대결에서 이리도 밀리니, 어찌 할꼬?”

초로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창의 일은 아직 이오니까?”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점창이라? 멀었지. 거기도 아예 까마득해. 강병을 키우는 일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게야. 더 큰 문제는 점창의 일이 

마무리 된다 해도 운남일통(雲南一統)일 뿐, 대세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거야.”

초로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찌 그렇습니까, 노야?”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디 온전히 접수할 수 있겠나? 반 이상은 죽여야 될 일이야. 그 후의 점창은 아미에도 미치지 못하고 지금의 청성에는 

견줄 바도 못될 테지. 몰락한 곤륜의 상대나 될까나?”

“애초에 점창에서 원한 것이 무력은 아니질 않습니까?”

노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방술사들 말인가? 결국에는 우상(右相)과 천기신사(天旗神使)가 직접 나설 테니 그쪽이야 큰 손실 없이 얻을 수 있을 

게야. 그리되면 방술사의 힘에서는 점창이 청성이나 아미보다 낫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드러난 면에서만 

그렇지. 내가 이번에 굳이 어렵게 키운 오행신문의 전력을 반이나 희생시켜가면서 운가의 금의대를 시험한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초로인이 고개를 젓자 노인이 다시 말했다. 

“사천 무림을 가능한 한 무인들만으로 상대하기 위해서일세. 이는 궁의 수뇌진 모두가 동의한 일일세. 아미나 청성의 산속 

깊이 칩거해 있는 괴물들을 건드리지 않고 일을 끝내자는 것이야. 칼 대 칼이면 노괴들은 세상일에 참견하지 않을 것이니까. 

허나 우리가 일단 신귀를 부리기 시작하면 저쪽도 궁금해서라도 나설 거야. 그리되면 천궁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일. 누가 

이긴다 해도 양쪽 모두 파멸 전에는 끝내지 못해. 싸움 끝에 쥐는 것이 없다는 거지.”

“설마, 그렇게까지?”

초로인의 놀라는 어투에서 천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노인은 빙긋이 웃었다. 

“냉정하게 내린 분석이야. 그건 지금 당장 붙자고 난리치는 우상마저도 인정한 사실이지. 무력일세. 알겠나?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자네와 동료들의 노고가 적지 않았지만, 우리가 도모하고자 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삼십 년 전에 우리가 지녔던 힘의 

열배가 필요하네. 오늘 일을 생각해 보면, 천궁은 역시 오행신마(五行神魔)가 필요해.”

초로인은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주게.”

노인이 일어섰다. 초로 남녀 모두 급히 일어섰다. 노인이 말했다. 

“아! 나올 필요 없네. 제자들 상심이 클 테니, 아이들이나 잘 다독여 주게.”

노인이 태사의를 떠나 허리를 접는 토비연의 곁을 스쳐 지났다. 한 줄기 미풍이 코끝을 간질였다 싶은 순간 노인은 어느새 

대전의 끝에 이르러 있었다. 

토비연은 급히 고개를 들어 귀주의 패자이면서 오행신문의 두 문주이자 사사로이는 부부이며 그녀의 사부들이 되는 초로인들을 

훔쳐봤다.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노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범정산은 포기하고 운남으로 간다. 준비하도록.”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토비연은 자신도 모르게 토를 달고 말았다. 

“하지만 사부님. 어찌 일군 터전인데---.”

여인의 눈에서 새파란 한기가 감돌았다. 토비연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그때 초로인이 말했다. 

“연아.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 미련을 두지 마라. 운가에서 본문을 찾는 것은 시일이 걸릴 따름인 게야. 알다시피 본문은 

너희들이 결국 정예, 그러나 운가는 다르다. 음양대가 나선다면 본문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네 노고가 적지 않아 

아쉽겠지만 대의를 위한 일. 미련두지 말아라.”  

토비연은 다시 한번 이마를 찍으며 외쳐 말했다. 

“바로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초로인이 엷은 미소를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하여라.”

토비연은 두 사람이 대전을 빠져나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다가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토비연도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긴 통로를 빠져나가는 동안 오늘 들었던 말들을 되뇌어 보았다. 

많은 말들을 들었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점창도 그렇고, 그녀의 사부들이 노복이라 자처하면서까지 

떠받드는 천궁의 세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노괴물도 그렇고, 분명히 그녀가 몸담고 있는 오행신문과 절대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오행신마는 더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도 있었다. 스스로를 아무리 귀하게 여겨도 그녀와 그녀의 사제들은 결국 언제나 버릴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없는 성을 쓰는 인간, 고아로 지금의 복락을 누렸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하기 싫었다. 잠시 서글픈 눈빛을 

드러냈던 토비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나서 중얼거렸다. 

“이십 년이라 했던가? 우선 살아남는다. 다섯 가운데 둘! 화 사제와 함께라면---.” 

잠을 잔다.

천신께서 명하시고

우제께서 행하시니

천지자연 옥토만림

생명수가 넘치도다.

사랑하는 나의 아기

이슬처럼 고운 아기

할미 변덕 받느라고

심신일체 고달팠다.

기력 쇠한 이 할미는 

천제께서 내려주신 

생명수를 취하려고 

깊은 잠에 빠지노라.

사랑하는 나의 아기 

이슬처럼 고운 아기

자는 할미 품속에서 

순결하게 노닐거라.

<대수령신(大樹靈神)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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