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르르르르르.
곽자렴은 폭우를 뚫고 명확히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의 진원지로 짐작되는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곽자렴은 미세한 공기의 파동을 느끼며 바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짤막하게 끊어지는 낮은 파공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 금의대원들의 묘도에서 청기가 피어오르는 것과 금의대원들이
급작스런 이동에서 기인한 고인 물 차는 소리가 나는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금의대원들은 일제히 좌우 상방을 향하여 묘도를 휘돌렸다. 묘도에서 뿜어져 나온 청기의 잔상이 수십 개의 푸른 원반을
형성하는 순간 금의대원 몇몇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운현산이 소리쳤다.
“태을구성진(太乙九星陣)!”
묘도를 중단으로 뻗은 금의대원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운녹산과 운현산 그리고 곽자렴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파파파파파파파!
삼십여 명의 금의대원들이 청기를 내뿜으며 팔방으로 휘돌자 푸른빛 소선풍들이 어지럽게 서로 교차하며 거치적대는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그들이 운녹산 등을 중궁(中宮)에 두고 나머지 팔방을 메워 태을구성진을 형성한 순간, 그들로부터 전방 삼장은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잘려진 나무와 풀과 넝쿨들이 폭우와 하나 되어 바닥으로 떨어질 때,
“큭!”
네 명의 금의대원들이 하얗게 질리더니 낮은 비명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들은 바로 가부좌를 틀고서 두 손바닥을 세차게
마주쳤다. 안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아예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가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흐아합!”
맞잡은 두 손이 부르르 떨리는 순간 그들의 팔목에서 어깨에서 다리에서 혹은 배에서 시커먼 독혈이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검은 피가 다 빠지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순간 네 명의 금의대원들은 맞잡고 있던 두 손을 늘어뜨리고 뒤로 넘어갔다.
사주경계를 행하던 금의대원들은 부는 화살에 맞은 동료들이 역혈제독법(逆血霽法)으로 무사히 독을 배출시키자 안도의 한숨 대신
강한 살기를 뿜어내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살기를 발산할 대상을 찾지 못했다. 대상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 대상에게서 전의(戰意)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의 안에는 이미 혈구가 되어버린 수십 구의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폐허의 공간 바로 바깥쪽에 서있는
수십여 명의 대상들마저도 멍한 눈으로 금의대원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감히 덤벼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를 앞에 둔 탓에, 죽어 나자빠진 동료들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 죽창을 든 장년인 하나가 무작정 앞으로 뛰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아!”
공포로부터 흘러나온 절규였으나 동시에 결단코 공포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외침이었다. 장년인은 잘려나간 나무의 밑둥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운명산에게로 내려 꽂혔다.
안그래도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운명산이 묘도를 내리그었다. 청기가 장년인의 등과 가슴에서 동시에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순간 독액이 번들거리는 죽창의 끝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동시에 장년인의 몸뚱이도 두 조각으로 나뉘어져 힘없이 떨어졌다.
그것이 신호였다. 멍하게 서있던 토가족 사람들은 일제히 절망과 광기에 휩싸여 소리 지르며 장년인처럼 무모하게 금의대를 향해
돌진해왔다. 순간 살기를 누르고 있던 금의대원들로부터 폭풍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라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곽자렴이 눈을 치뜨고 전신공력을 일시에 끌어올려
사방으로 휘돌며 소리쳤다.
“스뚜가! 스뚜가! 스뚜가!”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달려오던 토가족들은 일순간에 나무가 된 듯 멈추어 서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의대원들이 묘도에서 청기를 회수했다. 운녹산과 운현산은 의아한 눈빛으로 곽자렴을 바라보았다. 차츰차츰 들리는 토가족의
얼굴이 일제히 곽자렴의 얼굴에 꽂혔다.
곽자렴은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와 닿는 눈빛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리고 발을 질질 끌어 뒤늦게 대열에 합류한
부앙느안카이와 부앙초소이에게로 다가갔다.
곽자렴은 투명한 물막이 차오른 붉은 두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토가족의 말로 말했다.
“상초소이! 느안카이! 날세. 나야. 곽자렴이야.”
부앙초소이는 자신들의 말로 멈추라고 절규하고 이제는 자신의 옛 이름까지 부르며 다가오는 초로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곽자렴? 곽 노야?”
곽자렴을 알아본 부앙초소이는 속이 빈 고사목이 되어 전신의 맥을 놓아버리고 빗발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이 대신
울어주고 있어서일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을 장정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짧은 싸움이 대상조차 잘못 잡은 것이라면
누구인들 허탈하지 않으랴.
곽자렴도 부앙초소이를 외면했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하고, 주는 대로 받고 더
요구하지 않아서 더 주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자신이 이끌고 온 금의대원들이 무참하게 베어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현장을 목전에 두고서 무슨 위로를 하랴.
그렇게 두 사람이 한동안 서로를 외면하고 침묵하자 운녹산이 곽자렴의 등 뒤로 다가왔다.
“토가족입니까?”
곽자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녹산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했는지, 또 그들의 뒤에 누가 있는지 여쭈어 주시지요.”
곽자렴은 고개를 홱 돌려 운녹산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말이요? 순박한 사람들이오. 나인 것을 알았다면 공격했을 까닭이 없는 사람들이오. 그런 사람들을 우리 칼로 베어놓고
당장 추문을 하란 말이오?”
분노가 드러나는 곽자렴의 말에도 운녹산의 태도는 냉정하기만 했다.
“스스로를 방어했을 뿐,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지요. 갈 길이 멀다는 건 국주께서도 아실 터. 물어 주시지요.”
곽자렴은 질렸다는 듯한 눈빛으로 운녹산을 바라보다가 금의대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금의대원들은 착잡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호초출인 그들로서도 오늘 같은 대량살상의 현장은 처음 보는 것이고 더구나 그것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바에야 마음이 편할
턱이 없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곽자렴의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 자신에게 꽂힐세라 슬며시 고개를 비틀었다.
곽자렴은 다시 운녹산을 응시했다. 그러나 운녹산의 표정만큼은 처음과 다름없이 차가웠다. 곽자렴은 결국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운가의 앞날도 평탄하지는 못하리라. 양금택목(良禽擇木)이라 했고 태산불사토양(泰山不辭土壤)이라 했거늘, 대가문의 수장이
될 인물이 이리도 냉정하고 종잡을 수가 없으니 어찌 인재를 모을 것이며 사람을 두루 포용할 수 있으리오. 수성(守成)마저도
난망(難望)하리라.’
곽자렴은 자신이 무의미한 생각을 하고 있다며 고개를 저어버리고 부앙초소이의 앞에 털버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부앙초소이의 늘어진 두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미안하네. 내가 먼저 왔어야 할 것을. 그랬다면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을 것을. 정말 미안하네. 미안해.”
부앙초소이는 멍한 눈으로 곽자렴의 노안을 바라보았다. 곽자렴의 진심은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미안했다.
불과 한 달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이 지금처럼 늙어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터라, 그것이 꼭 자신들의 탓인 것만
같았다. 오늘의 참사에 있어서 곽자렴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적절치 못한 시기에 적절치 못한 장소에 온 것 뿐이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조상신이 되지 못한 채 장강을 떠돌 타이순과 네 동료들을 생각하면, 오늘의 죽음은 오히려
나을지도 몰랐다. 다만 복수의 칼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덧없이 죽어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부앙초소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데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곽자렴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나서 부앙느안카이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에 부앙초소이는
부앙느안카이와 함께 부족의 장정들을 위로하고 독려하여 살수 있는 사람을 치료하고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곽자렴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운녹산을 외면한 채 곽동량을 불러 토가족 사이사이를 누비며 고통을 줄여주고
지혈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성과는 미미했다.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단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끝날 뿐 사람이 죽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망연자실한 채 시간을 낭비한 후라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살아남은 자들이 죽어가는 혹은 죽은 자들을 업고 금의대가 향하던 숲 속으로 차례차례 사라졌다.
억지로 참고 있던 운녹산의 두 눈에서 한광이 솟구쳤다.
그때 마지막 남은 두 사람, 부앙초소이와 부앙느안카이가 곽자렴에게로 다가섰다.
곽자렴은 두 사람을 자신의 앞에 앉히고 슬프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응시했다. 곽자렴의 판단으로도 두
사람은 이미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부앙느안카이가 무정한 운녹산의 눈을 적의가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는 사이에, 부앙초소이가 곽자렴의 물음에 답했다.
과연 용문비선 일호가 탈취된 것은 대충 짐작하고 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벌어졌던 참상도 곽자렴
일행을 복수의 대상인 비후방 사람들로 오인한 탓이었음도 밝혀졌다.
곽자렴은 못마땅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운녹산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운녹산은 부앙느안카이의 적의가 가득 찬 눈을 흘끔 보고서 곽자렴에게 차갑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들을 앞세우시지요. 그 복수, 우리가 대신할 수 있겠군요. 그러면 국주님의 찜찜함도 털어버릴 수 있겠지요?”
운녹산은 다시 한번 웃으며 차갑게 돌아섰다.
곽자렴은 운녹산의 등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토하고서 부앙초소이와 부앙느안카이에게 운녹산의 말을 윤색하여 전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결과는 미안하다 하는구먼. 복수를 대신해주겠다 하니, 길잡이를 맡아주겠나?”
두 사람은 곽자렴의 말이 운녹산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는 듯 곽자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들지 않는다.
비후방의 부방주 혈후도(血猴刀) 목원은 그들이 보고(寶庫)라 부르는 창고 문을 열었다. 그는 바로 창고 문 앞까지 쌓인
쌀가마니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한동안은 산월이 년 사타구니만 파고 있어도 되겠구나. 그까짓 일로 이런 보답을 받을 줄이야---.”
‘그까짓 일’은 오행신문(五行神門)의 명이었다.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고 어려웠다 하더라도 죽지 않으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명을 수행하는 중에 재미 본 일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밀림 안으로 들어가라 했을 때, 계집 맛을 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벌거벗다시피 돌아다니는 미개인들 중에 쓸만한 계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결과는 달랐다. 근동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미모의 계집들이 셋이나 있어서, 그의 형제가 즐기고 수하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갔다. 그 외에도 늘 그렇듯이 공포에 질린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도 적지는 않았다.
단지 재물을 얻는 일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아쉬웠건만, 오늘 오행신문에서 별 일도 아닌 것으로 수고했다며 여러 가지
재물을 보내와 마지막 한 가지 아쉬움마저 해소시켜 주었다.
목원이 대충 둘러보니 호북과 귀주의 경계가 되는 산중고원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쌀이 삼백 섬이나 되었다. 거기에 산중호걸
찜 쪄 먹는 여우같은 계집들이 좋아할 최고급 소주비단 백 필에, 옥 노리개도 한 상자 그득 있었다.
그것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던 목원은 보고 안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옥노리개 두 개를
집어 품속에 넣었다.
“크크크! 산월이 년이 아주 돌아버리겠군. 자랑해야 비로소 보옥의 가치가 빛나는 법인데, 자랑할 수 없는 처지가 될 테니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
낄낄대던 목원이 갑자기 처연한 표정으로 옥 노리개 상자를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생각해 보니 정말 엿 같네. 명색이 부방주에 사사로이 동생인데 이 따위 노리개 몇 개 드러내놓고 차지하지
못하다니---. 씨팔! 정말 치사한 인간 아닌가? 벼락 맞아 콱 뒈져버리면 좋을 텐데---.”
목원은 부질없는 망상임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귀혈쌍후도(鬼血雙猴刀)라 불리지만 형제가 아니라면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악명에도 형 만한 아우는 없다고 귀후도가 기궤한 잔혹한 무공에 따른 별호라면,
혈후도는 무공보다는 미친 형의 위세에 빌붙어 잔인한 행각을 벌린데 따른 별호였다.
목원은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일단 화나면 물불을 안가리는 형의 화난 얼굴을 떠올렸다.
“에그! 무서워라.”
목원은 몸서리를 치고 고개를 저어 목정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정나미 떨어진다는 듯 옥노리개 상자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렸다. 목원의 시선이 문득 쌓여있는 비단 아래로 향했다. 거기에 커다랗고 검은 상자 하나가 있었다.
“이건 뭐야?”
가만히 살펴보니 사람 두엇은 들어갈 정도로 꽤나 큰 나무상자였다. 투박한 모양의 궤였지만 옻칠까지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함부로 다룰 물건은 아닌 듯싶었다.
상자와 뚜껑의 이음새 부분에는 노란색 바탕에 알아보지 못할 붉은 글씨가 쓰인 부적이 봉인처럼 붙어있었다.
목원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선물이라지만 사실은 수고한 개에게 뼈다귀 던져주며 먹고 떨어지라는 의미에 불과했다.
귀주의 패자 대오행신문이 주구로 취급해도 끽 소리 못할 자신들에게 봉인까지 붙이는 정성을 들일 까닭이 없었다.
목원은 연신 갸웃거리면서 혹시라도 비단이 찢어질 세라 조심하며 상자 옆으로 비단을 내려놓았다. 목원은 비단을 모두
내려놓고서도 함부로 뚜껑을 열지 못했다. 이 상자에 대해서만은 방주도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목원은 두 손을 비비며 상자를 노려보았다.
“이걸 열어야 돼, 말아야 돼? 욕심 많고 미친 원숭이가 봉인돼 있는 물건인 것을 알고 있다면 죽은 목숨인데---.”
목원은 상자의 뚜껑에 살며시 손을 얹고서 입술을 핥았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죽으면 온갖 잡일은 누가 다 하고?”
몇 번을 상자에 손을 얹었다가 떼어내며 주저하던 목원이 결국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막 봉인이 찢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
목청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뭐야?”
목원은 상자에서 손을 떼고 급히 몸을 돌렸다.
들릴 수 없는 소리였다. 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만큼 걷어 먹을 것 역시 많지는 않다하여도, 명칭과는 달리 통나무집
스물다섯 채로 이루어져 볼품없다 하여도, 비후방은 호북과 귀주의 경계가 되는 드넓은 고원지역을 통치하는 유일한
무림방파였다.
사람들이 비후방을 한낱 산적들 소굴 정도로 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세상물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근동에서 귀혈쌍후도
하면 상대하겠다고 나서는 고수가 없었고, 그 밑으로도 세상에 나아가 이류 소리 들을 만한 수하들이 스물 대여섯이나 되었다.
만약 호북에 무당과 그 속가들이 없었다면 혹은 귀주에 신비에 싸인 대오행신문이 없었다면, 비후방은 이런 한촌에서 썩을 작은
방파로 만족하지 않았으리라.
그 정도 위상을 가진 비후방을 누군가가 치려한다면 근동에서는 오직 한 부류, 얼마 전 그들이 오행신문의 명을 받고 장난질
쳤던 미개한 토가족들뿐이었다.
토가족이라면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올 것을 알고 있기에 귀찮지만 대비하라 일러두었으니, 겨우 일초반식이나
하는 말단수하들이 무기의 흉험함만으로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더구나 온순하기로 소문난 토가족이, 아무리 원한에 사무치고
또 우중이라 하여도, 쌍방의 강약이 부동인 상황에서 대낮에 찾아올 리는 만무했다.
목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보고를 나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비명이 끊이지 않자 목원은 머리가 쭈뼛거리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여 문을 밀려던 손에서 힘을 빼냈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조심스럽게 문틈을 벌린 목원은 그 사이로 오른쪽 눈을 들이댔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모두 스물다섯 채의 통나무집들로 둘러싸인 방의 중앙공터는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어림잡아
삼십여 구는 족히 될만한 시신들이 물 고인 공터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의 피로 빗물이 핏물로 변한지 오래였다.
녹의인들은 냉정했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자들에게는 그래도 관용을 베풀었으나 덤벼드는 자들은 실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겨우 반이나 남은 수하들이 무기조차 던져버리고 공포에 질린 채 구명(救命)을 청하는 괴성을 지르며 공터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깜짝 놀란 목원은 급히 시야를 넓혔다.
“헉!”
목원은 겨우 반치 열린 문틈마저 메워버리고 주저앉아 등으로 문을 막았다. 그리고 방금 전 그가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녹의인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공터의 중심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들은 흔하디흔한 묘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푸른빛 도기를
쭉쭉 뿜어대며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으아! 저 새끼들은 뭐야? 어린 새끼들뿐인데도 어느 한 놈도 만만지 않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형이 나
모르는 사이에 사고 쳤나?”
목원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원인을 따져보는 와중에도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들키지 않고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창고의 후벽 앞은 오행신문이 보내온 삼백 섬의
쌀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목원은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개죽음 당할 수는 없지. 암! 살날이 창창한데 죽긴 왜 죽어?”
목원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쌀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내려놓을 때 소리가 나서도 안되고 잘못 내려 무너져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빨을 악다물고 안간힘을 다했다.
열두 섬을 옮겨 놓고서야 겨우 한 사람 빠져나갈 공간을 확보한 목원은 등에서 장도를 꺼내 창고 벽을 겨누었다. 그의 칼에서
붉은 기운이 흐릿하게 감돌았다.
막 칼을 내뻗으려던 목원이 고개를 돌려 옥노리개가 담긴 상자를 노려보았다. 목원은 도기를 거두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서서
상자를 닫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쌀섬 위로 올라가려 했다. 바로 그때 쉬지 않고 들려오던 비명소리가 뚝 끊겼다.
목원은 그가 애써 만들어 놓은 공간과 굳게 닫혀져 있는 창고 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갈등했다. 그는 결국 창고 문으로
다가갔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살짝 틈을 만들고 밖을 살폈다.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 한다하는 놈들은
하나같이 죽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말단수하들 사십여 명만이 공터의 중앙에 모여 무릎을 꿇은 채 두 다리 사이로
머리를 박고 두 손을 마구 비벼대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는 겨우 네 명의 녹의인들이 무표정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나머지 녹의인들은 두 명이 한조가 되어
통나무집 하나하나를 수색하고 있었다.
대충 보아도 열 개조 이상이 수색에 나서고 있었다. 통나무집 두 개씩만 살펴도 비후방의 대부분을 훑는 것이 되리라. 목원의
짐작이 맞다고 친절하게 알려주듯이 쿵쾅대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목원이 벌떡 일어섰다. 순간 그의 무릎에 놓여있던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옥노리개들이 쫘르르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목원은 하얗게 질린 채로 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흐릿한 붉은 도기가 막 벽을 닿으려는 그 순간.
쾅!
조금 전까지 목원이 의지하고 있던 창고 문이 산산조각 나면서 굵은 통나무 파편들이 목원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목원은
겨우 한 사람 움직일 좁은 공간에서 절묘하게 몸을 말아 앞뒤의 위치를 바꾸고 두 발로 창고 벽을 박찼다.
다시 문 쪽으로 쏘아져 나간 목원은 도를 휘둘러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통나무조각들을 좌우로 흩뿌려 버리고 바닥에
내려섰다.
콰직!
옥노리개 두 개가 그의 발에 밟혀 산산조각 난지도 모르고 목원은 재차 허공으로 몸을 날려 막 부셔진 문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창고 밖으로 빠져나온 목원은 재빨리 몸을 휘돌려 후방을 살폈다. 목원은 방금 빠져나온 창고문의 좌우
외벽에 기대어 흐릿한 미소를 띠고 있는 두 명의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유 만만이랄까? 목원의 눈빛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제기랄! 그깟 옥 나부랭이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멍청한 놈! 죽어도 싸다.’
목원이 스스로를 질책하는 그 순간 두 청년이 벽에서 등을 뗐다. 목원의 눈망울이 급격히 흔들렸다. 목원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목원은 또 한번 절망했다. 좌우에서 사람들이 느긋한 기색으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좌측에서 다가오는 이들은
그 차림새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겨우 하물만을 가린 건장한 두 중년인들, 바로 토가족이었다.
토가족을 발견한 순간 목원은 살려달라고 빌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토가족들에게서 느껴지는 원독이 그의 좌측 관자노리를 관통할
듯 찍어 누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명산 형님! 제가 할까요?”
정면에 서 있는 두 청년들 가운데 겨우 소년티를 벗은 청년이 삼십 줄 초반은 되었을 듯한 다른 청년에게 말했다.
나이든 청년은 먼저 발을 움직여 목원을 독점하고서야 대답했다.
“장유유서, 이 자식아!”
“쳇! 그럴 줄 알았어.”
어린 청년이 나이든 청년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다시 창고 외벽에 등을 기댔다.
“이런 육시랄 놈들!”
삶의 포기라는 벼랑 끝까지 내몰린 목원이 욕설을 터뜨리며 대원탐과(大猿貪果)의 초식을 담아 도를 휘둘렀다. 전신 공력을
한데 모은 듯 도신에 감도는 도기는 자못 예리했다.
그러나 나이든 청년 운명산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도기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묘도를
휘둘렀을 따름이었다.
묘도에서 뻗어 나온 반월모양의 청기가 압도적인 힘으로 목원의 도기를 튕겨버렸다. 목원은 속절없이 허공을 휘돌아 물러서야
했고, 그 순간 자신이 많은 녹의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막 그가 고인 물에 파동을 일으키며 착지하는 순간 운명산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미끄러지듯 다가서고 있었다.
“풋! 원숭이라더니 제법 재주를 부리는 구나. 어디 한번 돌아보아라. 돌아.”
청룡팔영(靑龍八影)이라 했다. 운가의 오대무법 가운데서도 선두를 다투는 청룡무상도(靑龍無上刀)의 절초, 분신술과 같은 빠른
움직임으로 상대를 휘감으면서 단숨에 여덟 번이나 도를 떨쳐 낸다고 했다.
바로 그것을 펼친 듯 일순간에 여덟 명의 운명산이 겹쳐 나타나 뱀이 나무를 감아 올라가듯 목원의 전신요혈을 아래서부터
위쪽으로 두루 건드렸다.
포기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되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삶에 대한 미련이리라. 목원은 어쩔 수 없이 운명산의 그림자를 쫓아
제자리를 맴돌며 마구 도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아래에서 치켜 올리고 위에서 내리 누르는 운명산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난자당한 채 바닥을 굴러야했다.
“명산 형! 그도 무인입니다. 희롱해서는 안된다구요.”
한발 물러서서 목원을 바라보고 있던 운명산을 향해 어린 청년 운추산이 소리쳤다. 운명산은 나뒹구는 와중에도 도를 들어
허공을 휘젓고 있는 목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추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다.”
운명산이 도를 휘둘렀다. 푸른 기운이 목원을 팔을 훑고 지나갔다.
“크윽!”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가자 목원은 왼팔로 피가 솟구치는 오른팔을 잡고 몸을 뒤집어 움츠렸다. 운명산은 잠시 동안 목원의
등을 바라보다가 운추산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지켜보던 부앙느안카이가 몸을 날렸다.
“으아아아아아!”
말릴 새가 없었다. 죽창은 목원의 등에 박혀서 배로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목원은 이미 절명한 것
같은데도, 부앙느안카이는 잘 빠지지 않는 죽창을 발까지 사용하여 뽑아 다시 찔러 넣었다. 핏줄기가 벌거벗은 부앙느안카이의
전신으로 튀어 그의 모습은 마치 악귀와 같았다.
운명산은 불쾌한 기색으로 부앙느안카이를 노려보았다. 그가 목원의 생명을 깨끗이 거둬주지 않은 것은 추문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앙느안카이가 일을 저지르고만 것이었다.
운명산은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부앙느안카이의 붉어진 두 눈을 보는 순간 이미 들었던 사연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부앙초소이가 부앙느안카이의 몸뚱이를 껴안았다.
“그만! 느안카이! 이미 죽었다.”
부앙느안카이는 진저리를 치다가 전신에서 힘을 빼고 목원의 몸에 꽂혀있는 죽창에 기대어 바닥에 무릎 꿇었다. 부앙초소이가
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들기자 부앙느안카이는 붉어진 눈으로 부앙초소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창고를 살피던 운추산이 소리쳤다.
“찾았다.”
녹의인들이 메뚜기 떼처럼 일제히 몸을 날려 순식간에 창고 앞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운명산과 운추산이 상자 하나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창고를 빠져나왔다. 상자를 본 녹의인들도 환한 웃음을 참지 않았고, 운녹산마저도 보기 드물게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런데 유독 곽자렴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자를 바라보았다. 곽동량이 곽자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 뭐가 잘못되기라도---?”
곽자렴이 말했다.
“너무 쉬워. 이상하지 않느냐? 조금 전의 싸움을 너도 봤다시피 수뇌급으로 보이는 인물의 무공조차도 대단할 것이 없었다.
만약 이들이 용문비선 일호에서 표물을 강탈해간 그들이 맞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지.”
곽동량도 그때서야 뭔가 깨달은 듯 아비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군요.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자강 형님을 감당해낼 수 없지요. 만에 하나 다른 요인이 있다할지라도 산도적에 불과한
이들이 삼협에서 용문비선 일호를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운녹산도 의혹을 느꼈는지 미소를 거두고 중얼거렸다.
“온전한 표물에 쉬운 해결?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운녹산이 운현산을 불렀다. 운녹산은 공터에서 고개를 처박고 벌벌 떨고 있는 비후방원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운현산이 절도
있게 목례하고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몇 사람을 지명했다. 굳이 위협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운현산은 짧게 물어 긴 답을
들었다.
운현산이 돌아와 목원의 시신을 가리키며 보고했다.
“저 자는 부방주 목원이란 자고 귀후도라 불리는 방주 목정은 한 시진 전에 대처로 나갔다 합니다. 표물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어제 오행신문으로부터 보내져왔답니다. 자신들은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고 단지 오행신문의 명에 따라
토가족의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납치하여 보름 동안 감금하고 있다가 풀어준 것뿐이랍니다.”
운녹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귀주 범정산의 그 오행마문?”
오행신문, 이미 귀주의 패자로 공인받았지만 크게 알려진 바가 없는 신비의 문파였다. 이는 그들이 무림에서 특별히 활동하지
않는 탓도 있었고, 무림의 중심을 형성하는 이들이 귀주나 운남 그리고 그 이남에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다만 입소문에 따르면 그 무공이 기궤하고 사특하여 사술에 가까운 바 있어, 정도무림에서는 오행마문이라고도 불렀다.
운현산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운녹산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수작인가? 잘못 건드렸다 싶으니까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
운녹산의 말에 운현산이 고개를 저었다.
“귀주의 물산이 비록 풍부하지 못하다 하나, 오행마문은 귀주의 패권을 지녔습니다. 천리(千里)를 움직여서 한낱 표선을
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지요. 그것은 이곳에 표물의 대부분이 돌아와 있다는 것으로도 쉽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를 보시지요. 이 정도의 산채라면 금의대원 다섯이면 멸구할 수 있습니다. 굳이 배후를 드러낼 필요가
없겠지요.”
곽자렴이 끼어들었다.
“그렇소. 그들 정도라면 만 표두가 당한 것도 납득이 되오. 하지만 귀찮게 토가족과 이런 잡배들을 끌어들이느니 차라리 같이
없애버리는 게 속이 편했을 것인데, 굳이 복잡한 방법을 택해서 배후를 드러낸 것은 결국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소?”
운녹산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꿍꿍이라? 곽 국주께서는 혹시 오행마문과 특별한 갈등이 있었습니까? 본가는 그들과 관련지을 것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곽자렴이 고개를 젓는 것을 확인하고서 운녹산이 다시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그때 운현산이 말했다.
“그들에게 직접 듣기 전에는 짐작할 도리가 없는 문제 같습니다. 이곳은 그들의 영역. 참요검을 회수했으니 일단 귀가한 후에
가주께 여쭙는 게---”
운현산은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운녹산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운녹산과 곽자렴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목책의 트인 공간에 지금껏 없던 사람들이 있었고, 비후방도들에게는 없던 가공할 기세도 있었다. 순간
흩어져 있던 금의대원들이 몸을 날려 운녹산의 전면을 막아섰고, 없는 사람들 같은 음양쌍도가 운녹산의 좌우에 서면서 새로
나타난 사람들과 비견될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들이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빗발 대신 햇빛이 있었다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을 철립(鐵笠)을 쓴 오십여 명의
백의인들과 붉은 기운이 감도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적의인이 문을 막아서는 형국으로 늘어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철립 밑으로 살짝 드러나는 눈빛이 점차 강렬해질 따름이었다.
오직 한 사람, 적의인만이 비후방을 전모를 살피며 눈에 노화를 드리우다가 급기야는 홀로 앞으로 튀어나왔다.
“우오오오오!”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터뜨리며 한번 도약할 때마다 오 장을 지나친 적의인은 귀화가 감도는 눈빛으로 금의대 전체를 노려보면서
어느새 십장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도에서 붉은 도기가 이장이나 뻗어 나오자 금의대원 하나가 즉시 대열을 이탈하여 맞이해 나갔다.
쨍!
사선으로 날아올라 적의인과 높이를 맞춘 사내는 금의대의 그 누구도 뽑지 않았던 사척 장검을 쾌속하게 뽑아내는 즉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붉은 도기를 향해 휘둘렀다.
초식은 무공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직지단천(直地斷天),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것이었다. 그러나 뽑혀 나오는
그 순간에 이미 구름 같이 하얀 기운을 뿜어내던 검은 어느새 삼장을 넘어 붉은 도기를 정확히 가르고 사내의 정수리를
찍었다.
백색의 검기가 적의인의 등과 사타구니에서 번득이는 동시에 두 개의 혈구가 좌우로 갈라졌고, 금의대원은 그 사이를 지나
바닥에 내려섰다. 거의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혈구에서 뒤늦게 피분수가 솟구쳤다.
금의대원은 마보세(馬步勢)와 비슷한 구부정한 자세로 검을 바닥에 대고, 백의인들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올 테면 와보라는
오만한 기색을 드러낸 이는 바로 운경산이었다.
그러나 백의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처음 들어와서 포진한 그 자리, 그 자세에서 점차
강한 기세만 드러낼 따름이었다.
침묵을 깨고 첫 번째 반응이 있었다. 백의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철립을 쓰지 않은 차가운 얼굴의 중년인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 그대로 운경산을 응시하며 말했다.
“귀후도 목정을 일초에 양단했다? 운가의 오행무대 가운데 최강이라더니, 역시 좋군. 쳐라!”
쩍도 않고 서있던 백의철립인들이 일제히 앞으로 튀어나와 중년인을 스쳐 지났다. 그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자마자
운현산을 제외한 나머지 금의대원들 역시 일제히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삼십여 장의 거리가 양측의 동시 쇄도로 순식간에 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촤촤촤촤촤촤촹!
양측이 거의 동시에 병기를 뽑았다. 백의인들은 도를 금의대원들은 검을 뽑았지만, 그들의 병장기에서 일어나는 기운들은 양측
모두, 폭풍우치는 날에 백사장을 덮치는 하얀 포말같이, 힘차고 거칠었다.
직선으로 파도치듯 밀려오던 백의인들의 대형이 변했다. 포위하려는 듯 각각의 사이를 벌리고 반월처럼 휘어져 이동했다.
금의대원들의 대형도 순간적으로 변했다. 중앙을 뚫고 좌우를 방비하기 위해 화살촉과 같은 대형으로 쇄도했다.
기세는 막상막하, 그러나 병장기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은 금의대가 우세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거리가 오장으로 좁혀지는 순간, 백의인들은 앞으로 내뻗고 있는 도를 움직이는 대신 채찍질하듯 왼손을 휘둘렀다.
쇄에에에에에에엑!
그들의 머리에 쓰고 있던 철립이 재질을 알 수 없는 가느다란 줄에 의지하여 금의대원들을 향해 팽이처럼 회전하며 날아갔다.
금의대원들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금의대가 주종으로 익히는 백호참마검에의 입문이 가장 늦은 운추산마저 삼장의 검기를
뽑아내는 마당이었다. 가공할 속도와 회전력을 겸비하고 있다 해도, 철립을 개개인이 막아내는 것은 하등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형이 밀집되어 있는 탓에 비켜나가고 부서져나간 철립과 그 파편들이 동료를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구원의 목소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운현산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태극무형(太極無形)!”
운경산을 포함한 서른 한 명의 금의대원들이 일제히 등이 땅에 닿을 때까지 몸을 눕혔다가 하늘을 보는 그 자세 그대로
제자리에서 휘돌았다.
철립들이 금의대원들의 머리 위에서 난비하다가 서로 부딪혀 불규칙하게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백의인들이 왼손으로 당기는 시늉을
하자, 통제력을 잃고 어지럽게 난비하던 철립들이 또 다시 휘돌며 주인에게로 되돌아갈 기색을 비쳤다.
“잠룡출호(潛龍出湖)! 백호제천하(百虎制天下)!”
운현산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오는 순간 금의대원들은 빗발을 막아주던 철립들을 향해 튀어 올랐다.
쩌쩌쩌쩌쩡!
날카로운 검기들이 철립들의 중심을 뚫어버리자 고막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금의대원들이 철립의
파편들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가느다란 핏방울들이 비에 섞여 떨어져도 금의대원들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왔다.
그와는 반대로 백의인들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감도는 그 순간, 허공에 떠있던 금의대원들은 일제히 왼손을 내뻗어
서로의 손을 후려쳤다.
파파파파파파파팡!
금의대원들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백의인들에게 내리꽂혔다. 가히 백 마리 호랑이가 천하를 제압한다는 장관이 펼쳐졌다.
쉐에에에에에엑!
구름 같은 하얀 검기가 사방으로 파도치자 철립을 잃은 백의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도를 휘둘렀고 그때까지 철립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던 백의인들은 오히려 물살을 가르며 금의대원들의 발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쩌저저저저저정!
검기와 도기가 충돌하자 바닥에 고였던 빗물들이 일제히 물보라를 일으켰고 그 위로 몇몇 백의인들이 토해낸 핏물들이 떨어져
내렸다.
첩첩첩첩첩첩첩!
밀려나는 백의인들의 발뒤축에서 튀어 오른 흙탕물을 밟고 금의대원들이 일제히 쇄도했다.
쉐에에에에에엑!
금의대원들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었다. 그들의 발 아래로 스쳐지나갔던 백의인들이 다시 철립을 날린 것이었다.
기운을 감지한 금의대원들이 일제히 왼발을 비틀어 짚고 몸을 휘돌리며 사선으로 검을 내돌렸다.
하얀 검기에 부딪힌 철립들이 산산조각나면서 여러 곳에서 낮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금의대원들은 이미 산개한 상태여서
마음껏 검을 휘둘렀고 그 파편은 가운데 몰려 있던 백의인들에게 날아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무력해진 백의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겨우 세 사람만이 수십 개의 철편에 격중 당하여 널브러졌을 뿐, 나머지
백의인들은 오히려 기세를 더하여 금의대원들에게 쇄도했다.
최초의 충돌로 물러섰던 백의인들도 다시 쇄도하자 금의대원들은 양쪽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서 결국 양측 모두
대형의 의미를 상실한 채 난전에 돌입했다.
더 이상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확인한 운현산은 입술을 깨물며 운녹산에게로 다가갔다.
“쉽게 끝나지 않을 형세입니다. 싸울 것이 아니라 길을 뚫고 물러나야 합니다.”
전장을 바라보던 운녹산이 차가운 눈빛으로 운현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린가? 저들이 우리를 이곳에 불러들인 배후임에 틀림없거늘, 잘 싸우는 수하들을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유리한 상황에서
물러서자니?”
운현산은 질끈 감고 싶은 눈을 치뜨며 간곡히 말했다.
“동료이자 동생들입니다. 승전(勝戰)보다는 하나라도 더 이끌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이곳은 저들의 영역, 후위
세력이 언제 당도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형님이라는 소리에 운녹산의 차갑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차가운 눈빛을 회복하여 말했다.
“있다면 한꺼번에 닥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운용일 터. 후위는 없다. 금의대주는 싸움에 합류하라.”
운현산은 마침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로 몸을 휘돌려 전장으로 쇄도했다.
“합!”
단숨에 십장을 날아 검을 아래에서 위로 치켜 올리자 하얀 검기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등을 보이는 백의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일검에 양단된 백의인을 외면한 운현산은 또 다시 먹이를 찾아 분노의 검을 휘돌렸다.
운현산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운녹산이 곽자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곽 국주님. 참요검을 가지고 저 사람들과 함께 먼저 돌아가십시오.”
곽자렴은 운녹산이 가리킨 부앙초소이와 부앙느안카이를 흘끔 바라보고서 운녹산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오? 표물을 잃은 것은 이 늙은이. 이제부터라도 제 몫을 할 요량이오.”
곽자렴의 말에 운녹산은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금의대주의 말처럼 후위대가 온다면 상황이 어렵게 됩니다. 곽 국주님께서는 하다 못한 본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본가에 참요검을 전해 주시고 가주께 오늘의 일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자렴은 말없이 운녹산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의 불안한 눈빛에서 진실을 읽었다.
‘내가 이 청년을 또 잘못 봤나? 정녕 종잡을 수 없구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곽자렴은 포권을 취하며 힘차게 느껴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용문수로표국의 국주 곽자렴은 표국의 흥망과 우리 부자의 목숨을 걸고 책임을 완수하도록 하겠소이다. 다시 봅시다.”
운녹산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말은 없었지만, 지난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처음으로 대하는 진정어린 인사였다.
곽동량도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부앙느안카이와 부앙초소이마저 진심을 담아 목례했다. 오해로 인하여 자신들의 부족을 살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직접
경험하고 보니, 그들을 만나지 않고 바로 왔었다면 휠씬 더 많은 사람의 죽음을 봤으리라.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운녹산 등은
토가족의 복수를 대행해 준 사람일 수도 있었기에, 두 사람은 어색하나마 중원인들의 방식을 흉내 내어 인사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끝내고 곽자렴과 곽동량은 부앙느안카이와 부앙초소이의 도움을 받아 상자를 들고 비후방의 후면으로
내달렸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운녹산은 음양쌍도에게 비후방 주변을 살피라 명하고 자신도 애도 청룡을 뽑아 내달렸다.
운녹산은 직접 전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터를 크게 돌아 문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 상대가 있었다. 전세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백의인이 있었다.
백의인이 운녹산의 기세를 느끼고서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한 즉시 도를 뽑아들고 마주 달려들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오 장,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를 휘둘렀다.
쾅!
푸른 도기와 하얀 도기가 맞부딪치면서 굉음이 터지고 빗방울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충격으로 인해 비슷한 거리를 물러선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직시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의인이었다.
“검 아닌 도인가? 그렇다면 네가 운가의 대공자 운녹산?”
운녹산은 백의인의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도로 눈길을 돌려, 백의인의 눈빛과도 같은
하얀 도기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것이 오행마문의 금혼기주가 익힌다는 묘금마도(卯金魔刀)인가?”
백의인의 입술 끝이 묘하게 비틀렸다.
“마문? 자신들의 편이 아니면 마문에 마도인가? 흥! 묘금신도냐고 묻는 거라고 그렇다고 대답해 주겠다.”
운녹산이 차갑게 웃음 지으며 다시 물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것. 무슨 의돈가? 본가와 맞부딪쳐서는 별 재미 못 볼 텐데?”
백의인의 입가에 미소라고 할만한 움직임이 감돌았다.
“몰라.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할 뿐이야. 어쨌든 난 간만에 재밌군.”
운녹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모른다? 흥! 금혼기주라는 지위가 그 정도 밖에 안되나? 그럼 아는 놈이 나설 수 있게 도와다오.”
백의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짙어졌다.
“죽어 달라는 뜻? 풋! 내가 돕지는 못하겠고, 능력 되면 언제든지.”
순간 운녹산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번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한자 남짓의 단걸음을 이어나갔다.
그 발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오직 앞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듯한데 묘하게도 바닥에 고인 물은 밟히는 즉시 방울방울 좌우로
튀어나갔다.
백의인은 무표정한 원래의 얼굴을 되찾고 도를 낮게 깔린 수면 아래로 내렸다.
쉐, 쉐, 쉑!
백의인의 전신 구석구석 세찬 경풍이 먼저 도달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것이 머리를 내리찍고 가슴을 베어오고 다리를
자르려는 세 사람의 운녹산이었다.
운룡삼현(雲龍三現)!
백호참마검이 금의대의 주공(主功)이라면 청룡무상도는 운녹산이 주종으로 익힌 도법이었다. 운가의 다섯 가지 무공 가운데서
목성이 짙은 사람들이 주종으로 익히는 청룡무상도이고, 그 도법 팔초식 중에서도 오랜 수련을 요구하는 절초가 운룡삼현이었다.
백의인은 두 발을 좌우로 쫙 펴며 주저앉으며 아래서 위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도를 휘둘렀다. 하얀 기운이 반월(半月)을
그리는 순간 운룡삼현이 만들어 낸 세 줄기의 청기가 토막토막 끊어졌다.
“금극목(金克木)이라 이 말인가?”
운녹산이 뒤로 퉁겨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바로 되퉁기면서 왼손 중지를 퉁겼다. 핏방울처럼 붉은 기운이 손가락 끝을
빠져나가자마자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웠다.
백의인은 두 다리를 모으는 즉시 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어 자신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는 혈화를 쪼개버렸다.
“화극금(火克金)이다 이 말이지? 흥! 호롱불에 녹는 쇠를 본 적이 있더냐? 그슬림이야 닦으면 그만이지.”
백의인이 비웃듯 말했다.
운녹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금련오엽진결의 지엽을 이루는 다섯 가지 무공을 두루 익히고 합일하여 오기조원지경에 이르기
전이라면, 언젠가는 백의인과 같은 강한 금기의 무공을 만나 낭패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서 청룡무상도
외에도 금기를 극할 수 있는 금련오엽진결의 화엽(火葉), 주작기(朱雀氣)에 제법 심혈을 기울였건만, 역시 주공인
주작화운창(朱雀火雲槍)이 아니어서 백의인의 말대로 화후가 딸렸다.
운녹산의 눈빛이 번득였다.
“운가가 괜히 운가가 아니다. 제대로 된 것을 알지 못해 편법을 쓰는 주제에 감히!”
순간 비틀어 쥔 청룡에서 흐릿하던 도기들이 또 하나의 푸른 칼날을 이루었다. 운녹산이 다시 말했다.
“쇠를 부러뜨리는 나무도 있지.”
운녹산의 도강을 대한 백의인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도를 고쳐 잡았다.
“쉽게 봐서 미안하군.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보자꾸나.”
“풋! 제대로 해보자고? 난 좋다만 넌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 들리지 않는가?”
백의인이 도기를 한층 강화시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들렸다. 계속해서 낮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백의인은 두 발을
교차시켜 옆으로 움직였다. 운녹산은 한층 여유 있는 움직임으로 백의인과 보조를 맞추어 자리를 옮겨주었다. 백의인은 결국
운녹산의 어깨 너머로 전장을 주시할 수 있었다.
암담했다. 맞붙기 전에는 쉽게 끝내리라 생각했었고, 직접 붙는 것을 보았을 때는 개인의 능력이 딸린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수적인 우세가 모자라는 능력을 메워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전장에서 아직 병기를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은 피아 구분 없이 마흔 남짓이었다. 그 가운데 반수 이상이 녹의를 입고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완전한 결과가 나온다고 봐야 옳았다. 그는 홀로 남을 것이고 운녹산은 조력자들을
얻으리라.
백의인은 문득 운녹산만큼이나 상부의 지시에 의문을 느꼈다. 끌어들여 놓고 굳이 정면승부를 하라한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유추해 낼 수가 없었다.
“어찌할 텐가? 꼬리를 말아야지?”
이번에는 운녹산이 비웃었다. 백의인은 눈빛을 더욱 차갑게 굳히고 낮게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하지 맛!”
동시에 하얀 도인(刀刃)들 수십 개가 한꺼번에 운녹산의 전신을 두드렸다. 운녹산은 급히 물러서면서 손목을 따라 도를 휘돌려
전신을 보호했다.
날카로운 검기들이 일시에 도막을 두드렸고 두 사람은 울컥 솟아오르는 혈기를 억누르며 뒤로 물러섰다.
운녹산이 소리쳤다.
“그래. 웃으라는 소리였다. 놈! 죽은 이들이 네 놈에게는 수하일 뿐이지만 내게는 핏줄이다. 네 놈이 도주하게 놔 둘 것
같으냐?”
운녹산의 신형이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어느새 백의인의 주변을 휘돌며 상승했다.
운명산이 목정을 상대로 펼쳤던 청룡팔영이었으나 그 화후를 따지자면 같은 것이라 할 수 없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늘어날
때마다 백의인을 두드리는 칼질의 수는 배로 늘었고 그 움직임마저 도기가 아닌 채찍처럼 불규칙하게 휘어졌다. 거기다가 허공을
박차는 발놀림마다 송곳 같은 경기가 뿜어져 나와 백의인의 전신을 찍고 짓눌렀다.
백의인은 제자리에서 선풍처럼 휘돌면서 점차 하늘을 향해 쉼 없이 도를 휘둘렀다.
째재재재재재쟁!
청기가 날아가고 백기가 막아내고 청기가 파고들고 백기가 다시 막았다. 그러나 청기가 빠른 것은 둘째 치고라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들처럼 불규칙적으로 현란하게 움직여 백의인은 미처 다 막아낼 수가 없었다.
따다다다다다당!
청기가 백의인의 옷자락들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순간 도기가 몸에 맞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묘한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겼다고 생각하며 도를 거뒀던 운녹산이 눈을 치떴다. 그 순간 백의인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감돌았다. 그리고 한 줄기
백광이 번득였다.
운녹산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하얀 도기로 벽공장을 내뻗었다. 그러나 도기에 대항하기에는 벽공장의
출수가 너무 늦었다. 벽공장은 도기의 방향을 겨우 한치 비트는 것으로 제 임무를 다하고 소멸되어 버렸다.
“크윽!”
어깨가 화끈거리는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터뜨린 운녹산은 힘겹게 몸을 돌려 바닥에 착지했다. 왼팔이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운녹산의 신형이 활처럼 휘어지며 주르륵 뒤로 미끄러져 갔다.
백의인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녹산에게 조롱기어린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심각함을 가득 담은 체 전장에
가있었다.
남은 백의인들은 열 남짓. 이제 전세가 역전이 되어 금의대원 둘이 금혼기 수하들 하나에 붙었으니 백의인도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된 것이었다.
그때 운녹산이 도기가 스쳐지나간 왼쪽 어깨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금갑호체마공(金甲護體魔功)?”
그러나 백의인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한 말을 중얼거려 운녹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꼴로 돌아갈 수는 없지. 여기서 끝내자.”
바로 그때였다.
“대공자! 후위가 있습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찰을 내보냈던 음양쌍도 가운데 양광도(陽光刀) 사기평의 목소리였다.
운녹산은 잠시의 고려도 않고 소리쳤다.
“금의대주. 철수한다.”
그 순간에도 비명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고 끝났다. 열아홉 명의 금의대원들이 운녹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백의인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허무하게도 보이고 초탈한 것처럼도 보이는 미소였다.
금의대원들이 전신에서 살기를 뿜으며 운녹산을 스쳐서 백의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멈춰!”
운녹산이 소리쳤다. 금의대원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운녹산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운녹산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백의인을 향해 말했다.
“쫓아올 테니 시신을 거두지 못한다. 부탁한다. 이곳에 대충 묻어다오. 언제 다시 만나겠지.”
백의인이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새 깨달은 듯 쓴웃음을 지었다.
“풋! 내 후위였던가? 그렇게 하지. 여기 표시 나게 묻어둘 테니 살아 벗어날 수 있다면 후에 찾아 가. 다시 보면 그때는
반드시 죽여주지.”
백의인은 차가운 얼굴 그대로 포권을 취하며 막고 있던 길을 비켜섰다.
운녹산은 눈으로는 백의인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떠난다.”
운녹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금의대원들은 아교로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눈가에 번지는
물기로 녹여 떼고 운녹산의 뒤를 따랐다.
백의인은 운녹산 등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혈호(血湖)가 된 전장과 거기에 둥둥
떠다니는 혈구 사이를 무표정하게 걸었다.
“내가 소모품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금혼기를 쉽게 키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쓸데없이 희생시켰을까? 후!
역시 짐작이 안되는군.”
백의인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다가 결국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때 비후방의 남쪽 목책으로부터 검은 인영 하나가 떨어져
내렸고 그 뒤로 또 다른 흑의인들이 셀 수도 없이 따랐다.
먼저 떨어져 내린 흑의인영은 붉은 빗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와 조금 전에 백의인이 바라보고 있던 그 광경을 살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휘유! 장난이 아니네. 혼자 어떻게 살았소?”
백의인은 흑의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수 사제, 너 때문인 것 같구나. 사저가 분명히 도움은 없다 했거늘, 웬일이냐?”
흑의인이 검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당연한 걸 묻고 있네. 금생수(金生水) 아닙니까? 나야 금 사형이 없으면 사는 게 힘들어지니까---.”
백의인이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객쩍은 소린 말고.”
흑의인이 움찔하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새로이 명이 떨어졌소. 결과가 난 시점에서 남는 자가 운가 쪽이면 살려 보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전에 개입하지는
말구요. 물론 명받은 시기가 너무 늦어 어차피 개입할만한 여유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소제가 사형을 살리기 위해
똥줄이 탔던 건 사실입니다. 그건 믿어주셔야 해요.”
백의인은 흑의인의 천진한 얼굴을 직시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겠지.”
“에이, 안믿는 눈친데---. 근데 어디로 갔어요?”
백의인은 흑의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너 혼자더냐?”
흑의인은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입가를 씰룩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징그러운 화 사형만 비 온다고 빠지고 나머지는 다 나왔어요. 근데 어디로 갔냐구요?”
백의인은 다시 한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가겠느냐? 결국 왔던 길로 가겠지.”
흑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히 그렇겠지요. 아는 길이 그길 뿐일 테니---. 좋아! 나도 사냥에 동참해 볼까? 안 가시려우?”
백의인이 먼저 전장을 훑어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금혼기가 할 수 있는 바는 다 한 것 같구나. 약속한 것도 있고. 빠지련다.”
흑의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려. 나중에 문에서 봅시다.”
흑의인은 대답 없는 백의인을 외면하고 도열해 있는 흑의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 쏟아지고 물 많아 좋지? 하늘이 놀아 보라고 이렇게 멍석까지 깔아주는데 우리 수신기(水神氣)가 제 할 일을 못하면 나
무척 기분 나쁠 거야. 알아서 잘들 해. 좋아. 가보자구.”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서있는 백의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정문을 향해 미끄러져갔다.
백의인의 수신기 사람들이 모조리 빠져 나가자 다시 한 번 전장을 훑어보았다.
“어디나 물 천지군. 쯧, 쓸데없는 약속을 해버렸어.”
바닥에 고인 물을 툭 차는 것으로 난감한 심정을 드러낸 백의인은 비후방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에게 더 야박하게 군다.
특별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있다면 단 한 가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는 것뿐이었다.
누구도 그 일이 어렵다고 생각지 않았다. 폭우 내리고 수림 울창하며 날은 저물어 가도, 오는 중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살갗 위로 흘러내리는 핏물처럼, 확연히 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히려 천지자연이 추적자들로부터
그들이 지나간 자취를 지워줄 것이라 여겼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핏줄로 이어진 동료들의 시신마저 거두지 못하는 슬픔뿐이었다.
헉, 헉, 헉, 헉!
운경산은 분노로도 제어할 수 없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기가 거치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베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넝쿨과 나무들뿐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사자의 시신을 남겨둔 슬픔마저 속으로 삭이며 길을 찾아 헤맸다. 일단 비후봉만 돌아들면 금의대가
거칠게 파괴하며 만들어 놓은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산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들에게 길을 열어주지
산뿐만이 아니었다. 사람 같은 것들도 있었다. 양광도 사기평에 따르면 적의 후위대는 몸에 밀착되는 흑의를 입은 자들 백여
명이었다. 그러나 금의대의 길을 막은 이들은 그들이 아니었다. 나무가 갑자기 칼을 휘둘렀고, 바위가 절로 쪼개져 튀어
오르고, 땅이 꺼지고 때로 솟구쳤다.
처음에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때로는 길을 열기 위해 펼친 검기에 꼼짝하지 않던 나무와 바위가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렸고 땅이 선혈을 내뿜기도 했었다.
그러나 숲길 헤매기를 한 시진. 잠시도 쉬지 못하고 쫓기다 보니 비후방에서 이미 상처를 입었던 이들이 하나 둘씩 뒤쳐지기
시작했다. 전체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큰 장애가 되지 못하던 적의 매복이 그때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해서 길도 못 찾고 두 시진을 허비하고 나자 하나
둘씩 희생자가 나타났다.
남은 인원은 열두 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숲의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운경산은 검에 분노를 실어 전방을 난자했다. 숲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멈춰!”
운현산이 소리쳤다. 운경산이 붉어진 눈으로 운현산을 돌아보자 모두의 시선이 운현산에게로 꽂혔다.
운현산은 앞뒤로 시선을 돌려가며 손짓으로 모두에게 모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앞에서는 운경산이, 후미에서는 운명산과 운추산이
운현산과 운녹산에게로 모였다.
대원들의 상태를 확인한 운현산의 눈빛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칼에 찢기고 나무에 긁혀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찢어진
사이사이로 빗물과 핏물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눈빛은 슬픔과 자괴감 그리고 피로함이 한데 어우러져 총기를 잃었고, 늘어진
두 팔은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건들거렸다.
운현산은 보라는 듯이 눈에 기운을 북돋고 나서 운녹산에게 말했다.
“이미 가야할 곳을 지나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속 간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운현산을 먼저 보고 나머지에게도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우리는 지금 사냥 당하고 있다. 더듬어 생각해 보니 적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고 있었어. 대주의 말대로 계속 간다 해도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이곳에서 체력을 회복하고 가야할 방향을 정한다.”
운녹산은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듯 운현산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운현산이 목례로 알아들었음을 표시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태을구성진을 취하고 자신의 전방 삼장의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라.”
그의 말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졌다. 운경산이 이미 길을 뚫어놓은 그곳에 운녹산과 음양쌍도 그리고 상처가 심한 운평산이
자리하고 그 주위로 운현산을 비롯한 나머지 일곱 명이 둘러섰다. 그들이 일제히 검을 떨쳤다.
나무가 잘려지고 풀과 넝쿨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세 군데에서 피가 튀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수십 차례나 경험한 일이었고 적들의 죽음 따위에 눈살을 찌푸릴 만한 동정심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운경산이 왼손을 휘둘러 덩그렇게 남은 바위를 후려쳤다.
“컥!”
바위가 꿈틀대며 비명을 지르고 울컥 피를 토했다. 운경산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얀 검기가 바위를 위에서
아래로 가르자 시뻘건 선혈이 칼날처럼 운경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운경산은 차가운 시선으로 피 흘리는 바위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왼손을 뻗어 바위를 밀어버렸다.
금의대원들은 거치적대는 모든 것들을 아직 파괴되지 않은 숲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운현산의 명령대로 사방이 열린 널찍한
공간이 확보되자 금의대원들은 아직도 막힌 숲을 향해 예리한 시선을 보내며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운현산에 앞서 운녹산이 다리를 심하게 다친 운평산을 오른쪽 어깨로 떠받히고 공간의 가장자리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쌍도는 바닥을 정리하도록!”
음양쌍도 서가 형제는 운녹산이 목인대주의 직을 벗어나 소가주로서의 자질검증에 들어간 오 년 전부터 그의 수행호위로
지내왔다. 비록 운가 사람은 아니나 운기정이 재질을 알아보고 이십여 년 전부터 가르친 터라 그 무공이 금의대원 개개인에
못지않았다.
그들이 도를 뽑았다. 두 사람은 따로 상의하지 않았음에도 빈 공간을 반으로 갈라 등을 마주하고 서로의 오른쪽 가장자리부터
왼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바닥을 그어나갔다.
파랗고 붉은 도기가 바닥을 한 자 간격으로 연이어 갈라나가자 서기평이 움직이는 공간에서 한 줄기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바로 그 순간 유음도 서도평의 공간에서 땅이 꺼지며 시커먼 무엇이 솟구쳐 올랐다.
서도평은 땅을 가르던 도를 비틀어 수평으로 그었다. 파란 도기가 번득이는 순간 또 다시 피가 튀고 육편이 떨어져 내렸다.
서도평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작업을 마무리 하고 이미 일을 끝낸 서기평에게로 돌아와서 운녹산을 응시했다.
운녹산이 다시 운평산을 떠받히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쌍도에게 운평산을 넘겼다.
“상처를 봐 주게.”
운녹산이 운현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다시 지휘권을 넘겼다.
운현산은 운녹산의 곁으로 다가와 모두를 모았다.
“사인 일조로 사방을 경계하고 나머지는 조식을 취한다.”
운현산이 운녹산으로부터 일장을 벗어나 먼저 외각으로 나갔다. 운경산이 따라 반대편을 맡자 운명산과 운추산이 각각 빈 공간을
채웠다. 네 사람이 검을 쥔 채 바닥에 앉아 사방을 살피자, 남은 이들도 운녹산을 중심에 두고 반 장을 벗어나 외각의 네
사람 사이사이를 채우고 가부좌를 틀었다. 네 사람이 앞으로 반장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 즉시 태을구성진이 발동될 수 있는
위치였다.
바깥의 네 사람이 형형한 안광을 드러내며 오감을 증폭시키는 동안 안쪽의 네 사람들은 검을 두 무릎 위에 얹고서 피로한 눈을
감고 호흡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음양쌍도가 운평산의 상처를 살펴 금창약을 바르고 옷으로 단단히 감싸는 동안, 운녹산은 복잡한 감정이 엿보이는 눈으로
운현산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옆에 두고 보아온 운현산은 재질도 뛰어나고 사내다웠다.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보였으며 이끌 줄 알고 포용력도
있었다. 같은 배에서 난 아이였다면 운현산만큼이나 믿음직한 동생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는 친동생이 아니었다.
운녹산은 문득 운가를 떠나기 전날의 운기정을 떠올렸다. 그날 운기정은 금의대를 언급하면서 평소와는 다르게 부탁하는 어조를
사용했고, 운녹산은 그것이 더 거슬렸었다.
‘왜요? 제가 현산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습니까? 왜요? 저 놈이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저와
비교하실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어찌 키우셨습니까? 네가 장차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 하셨습니다. 무엇 하나 남보다
모자라서는 안된다, 하셨습니다. 현산이 제 어미 품에서 어리광 부릴 때 저는 팔이 부러져라 도를 휘둘렀습니다. 늘
의젓하라, 하셨습니다. 현산은 안아주시고 저는 무덤같이 컴컴한 연공관에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두 손에
얹어놓으시고 무게를 재시다니요? 그러면서 품에 안으라 하십니까? 쿠쿠쿡!’
속에서 시작된 웃음이 겉으로 새어나왔다. 웃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금의대의 삼분지 일을 잃고 운녹산 본인도 살아
돌아갈 확률이 희박한 상황이었다.
운녹산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의적절하지 못한 자신의 웃음을 누군가 볼까봐 고개를 숙였다.
“윽!”
다행히도 웃음은 멈췄지만 대신 살이 찢어지는 통증이 찾아왔다. 백의인이 날린 한칼은 운녹산의 가슴 위쪽에서 어깨까지의
살덩이를 한주먹이나 날려버렸다. 대충 응급처치는 했었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과도하게 고개를 숙임으로서 잊혀졌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운녹산은 눈짓으로 의사를 묻는 서도평에게 왼쪽 어깨를 내맡기고 품속에서 근상속요환(筋傷速療丸)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금창고의 싸한 냄새가 면포에 가려진 순간, 운녹산은 조식에서 눈을 뜬 금의대원 네 명이 운현산 등과 자리를 바꾸는 것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얕은 호흡으로 체력회복에 들어간 지 이각. 외각의 네 사람이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운녹산이 정광이 드러나는 차가운
눈빛을 발했으며, 동시에 운현산 등도 앉은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촤촤촹!
검 뽑는 소리 일제히 들리는 순간 외각의 네 사람이 허공에서 몸을 휘돌려 자신의 발밑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기운을 향해
백기를 뿜어냈다.
“크아아!”
네 개의 흙덩이들이 피를 뿌리며 산산이 흩어지는 그 순간 운현산 등도 땅 바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검이 빠지자 네 줄기
핏물이 분수되어 솟구쳤다.
서도평이 운평산을 부축하여 일어서고 서기평이 일어서는 운녹산의 곁으로 다가왔다.
태을구성진은 흐트러졌으나 그 구성원들은 운녹산을 중심으로 더욱 작은 원을 그리자 운현산이 운녹산에게로 다가와 의중을
물었다. 운녹산은 유독 나무가 굵고 높고 무성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얼마나 될 지도 모르는 적을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느니, 체력을 회복한 이상 이동하는 게 낫겠군. 왔던 길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무조건 비후봉을 등진다.”
운녹산의 말에 운현산도 동의했다. 운현산은 주변 나무들의 높이를 살폈다. 오장을 넘어서는 꽤나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운현산은 운경산을 불러 옆에 세워두고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을 펼쳐 허공으로 솟구쳤다. 바로 그 순간 운경산도 몸을
날렸다. 운경산이 오장을 솟구친 때 운현산이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운경산은 허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운현산의
발바닥을 후려 찼다.
운현산이 선풍처럼 몸을 휘돌려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사위를 살피는 동안 운경산은 몸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잠시
후 운현산이 땅에 안착하여 그들이 애초에 향하던 방향의 우측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운경산이 먼저 움직이자 나머지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그때 막 운평산을 업은 서도평이 눈을 번득이며 도파를 쥐었다. 그의
도신이 반쯤 드러나는 순간, 업고 있던 운평산의 정수리에서 한 줄기 핏물이 솟구쳤다.
“크윽!”
서도평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내려보았다. 그곳에서 주르륵 쏟아지는 핏물을 보는 순간 그의 두 다리가 꺾였고
운평산과 서도평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서도평의 두 다리 사이에서 올라온 무엇인가가 그의 사타구니를 뚫고 내부를 뒤흔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 업혀있던 운평산의 턱을
지나 정수리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흐아!”
서기평이 지금껏 그들이 지나왔던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바닥으로 도를 휘둘렀다. 붉은 도기가 땅을 가르려는 순간 사람만한
흙기둥이 달아 솟구치며 도기의 진행을 막아섰다.
“돌아와!”
운녹산이 소리치는 그 순간 금의대가 평지로 만들어 놓은 숲의 가장자리에서 흙기둥 하나가 사람 크기로 부드럽게 솟아올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흙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흙으로 빚은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여인이었다. 흙에 감싸져있어 확신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허리와 둔부를 잇는 부드러운 선과 주먹 만하게 튀어 오른 두 가슴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운녹산의 명에 따라 할 수 없이 멈춰서야 했던 서기평이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흙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때 흙 인형이
눈을 떴다. 안개가 낀 듯 탁한 눈빛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묘한 정광이 드러나 보이는 기묘한 눈이었다.
서기평이 도를 앞세워 몸을 날렸다. 삼장 앞까지 다가온 도기를 바라보며 흙 인형이 두 팔을 뒤로 제치며 박치기 하듯 머리를
앞으로 흔들었다.
오로지 일도양단 내겠다는 기세로 날아가던 서기평은 갑작스레 전신을 압박하는 수백 덩이의 작은 흙덩이들을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흙 인형의 긴 머리카락에 붙어있던 흙이었다.
하나하나가 비수 같은 기운이 느껴지자 서기평은 최대한 몸을 말아 공격받는 면적을 좁히고 백회혈을 중심에 두고 여덟 번
잇달아 도를 휘둘렀다.
도기의 우산을 쓴 듯 붉은 기운이 서기평의 작아진 전신을 보호했다. 충돌이 있었고 전진하던 서기평의 기세도 사라졌다. 그
순간 여인이 오른발을 내뻗어 바닥을 굴렀다. 순간 바로 서기평의 코앞에서 사람 크기만 한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서기평은 어쩔 수 없이 흙기둥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즉시 흙기둥을 뚫고 여인을 향해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흙기둥
속으로 먼저 손 하나가 파고들어 서기평의 목을 휘어잡고 비틀었다.
시작과 끝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일행 가운데 가장 가깝게 서있던 운명산이 자신이 할 일을 깨닫고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지만 흙으로 싸인 여인은 물처럼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운명산이 막 서기평을 먹은 흙기둥 앞에 이르렀을 때 여인이 서 있던 그 자리에는 여인의 얼굴만 남아 사이하게 웃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는 자, 아무도 없으리라. 오호호호호!”
웃음소리의 끝자락을 따라 운명산이 검을 뻗어 여인의 머리를 찔렀지만 튀어 오른 것은 흙덩이들 밖에 없었다. 운명산은 즉시
검을 거꾸로 고쳐 쥐었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해 내리꽂아 보지도 못하고 검을 거두었다.
운명산은 여인이 서있던 자리에서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서기평을 삼킨 흙기둥을 바라보았다. 그냥 흙기둥이었다. 특별하다 할
것이라고는 상단부에 뚫린 작은 구멍 하나와 중단쯤에 삐어져 나온 세 치 가량의 도첨이 전부였다. 운명산은 머리를 흔들며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운녹산은 사자가 된 세 사람을 한번씩 바라보며 이빨을 악다물었다. 운평산이 핏줄이라면 음양쌍도는 충직한 수하들이요
친구였다. 소가주 검증이 시작되면서부터 출가할 때면 언제나 함께 다니던 이들이었다. 어찌 보면 세가의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었다.
“기력을 소모해가며 길을 만들지 말라. 비후봉을 등지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운녹산은 핏발이 서려는 눈을 씰룩거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돌아서서 움직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운평산을 흘끔거리고 나서 말없이
운녹산을 따랐다.
폭우는 여전히 내리고 있으나 그 소리만은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에 분명히 강이 있었다. 그것도 지척에 있는 듯,
이틀을 연이어 내리는 폭우로 인해 수룡이 신이 나서 물장구치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쟁알대고 있었다.
검은 얼굴의 흑의인은 이십여 장 앞에 있는 숲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가 좌측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화령기(火靈旗)도 다 떼어두고 홀로 웬일이요? 오지 않겠다더니? 비 맞는 거 싫어하지 않소?”
흑의인으로부터 오장 가량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있던 적의인이 말했다.
“들었다. 금혼기가 전멸했다고?”
“아하! 거기에 꼬였구려. 뭐 하나쯤 양보해도 많이 남으니까---.”
적의인의 입 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흑의인이 바라보던 숲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하필 이곳이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어조였다. 흑의인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냥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소? 아무리 구석에 몬다고 해도 결국에는 직접 찔러야 하는 법이오. 여기서 더 가면 우리도 잘
모르는 묘족들 영역. 이쯤까지 몰다보면 지쳐있을 게고 여기서 삼기가---. 아! 화 사형도 왔으니 사기가 되겠구려. 아무튼
모두 모여 확실하게 찔러 주자, 이 말이지요.”
적의인이 코웃음 쳤다.
“장황하나 부족해. 쓸데없는 사냥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정확하게 말해.”
흑의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쯥, 난 역시 말주변이 없어. 아, 뭐라더라? 원하는 수치는 이미 얻었으리라. 그러니 최소한의 피해로 죽여라. 뭐 이런
명이시던가? 그래서 토왕기(土王旗)와 목정기(木精旗)가 밀림 안에서 진을 빼놓으면서 이쪽으로 몰아온 후에 저와 함께 여기서
끝장낸다. 뭐 이런 이야긴데요. 장소는 뭐 뒤에 오랑하(烏浪河)가 흐르고 시야가 넓은 이곳이 이 사제에게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물론 화사형이야 싫겠지만, 또 이곳까지 이르려면 숲 속을 많이 헤매야 할 것이라서 토 사저와 목 사형에게도 나쁘지
않아 여기로 했지요. 됐어요?”
적의인이 다시 코웃음 치며 숲을 지나 시작되는 고원을 향해 턱짓했다.
“흥! 네 녀석 수하들과 저 밑에 토 사저 수하들로 충분할까? 듣기로 금혼기가 전멸하는 동안 놈들은 겨우 열하나
죽었다던데?”
“뭐, 안될 것 있나요? 토 사저와 목 사형이 책임지고 반 수 이상 줄여놓는다고 했으니 나오는 놈들 해봐야 열 두엇 정도
되겠지요. 각자 할만 하다싶은 놈들 하나씩 잡고 애들은 나머지 처리하면 되는데---. 어? 저기 나오네. 에게? 겨우
아홉? 비 오니 기분도 안 좋을 텐데, 화 사형은 구경만 해도 되겠네요.”
적의인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을 뿐, 가타부타 대답 없이 전면만 응시했다.
운녹산 등도 수림과 고원의 경계에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비 오고 날은 저물어 이십여
장의 거리에서는 윤곽밖에 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적의인과 흑의인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서 반원을 그린 채 서있는 백여 명의
어피인들은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운녹산 일행의 얼굴들이 반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몇이 그들이 나왔던 곳을 돌아보았다. 잠시 후, 희미한 은빛을
드러내던 그들의 병장기에서 돌연 눈부신 백광과 청광이 솟구치는 순간 그들도 일제히 좌측 흑의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 한번의 탄신으로 이십여 장의 거리를 반으로 단축한 운녹산 일행이 다시 몸을 날리자, 바로 밑에서 전후좌우 할 것 없이
흙 폭죽이 터져 올랐다.
운녹산 일행은 비행하는 흙더미를 향해 급히 병장기를 휘둘렀다. 흙더미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낮은 비명 소리 연이어 들리고
흙인지 사람인지 모를 덩어리들이 무광의 좁고 예리하여 침 같이 생긴 검을 놓으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운녹산 등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원래 그들이 노렸던 흑의인들로부터 수십 줄기의 살기들이 쏟아져 날아왔고 그들의
좌측 숲에서도 녹색의 잎사귀 같은 비도들이 수십 자루나 날아왔던 탓이었다.
검기도풍이 허공을 난무했고, 몇 가닥 핏줄기가 솟구쳤다. 녹엽비도와 아미자들의 공격을 막아낸 운녹산 일행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병장기를 땅을 향해 휘돌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이 튀고 흙들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바닥이 안전함을 확인한 운녹산 일행은 다시 몸을 뒤집어 땅에
내려서는 즉시 운녹산을 중심으로 팔방을 점하였다.
물 고인 바닥에서 물결이 일더니 사방에서 운녹산 일행을 향해 파도치기 시작했고 좌측 숲에서 나무들이 떨리기 시작했으며
흑의인들이 빠르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어라! 이건 아닌데? 한 놈도 안 남겠다.”
흑의인이 적의인에게는 말도 없이 주르륵 미끄러져 나가자 적의인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뒷짐을 진 채 흑의인을 뒤쫓았다.
그 와중에도 운녹산 쪽에서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팔방을 점하고 있던 운현산 등은 구궁에 위치한 운녹산을 향해
밀착하여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진형을 작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덤벼들 수 있는 범위를 좁히려 했던 것이다.
과연 흑의인들의 쇄도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대신 늘어난 것은 쉬지 않고 날아오는 아미자들과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녹의인들의
녹엽비도들이었다. 아미자는 빠른 속도로 허를 찔렀고 녹엽비도는 너무나 느린 속도로 허공을 선회하다가 불현듯 닥쳐들었다.
그것들을 막아내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운현산을 포함한 여덟 명의 금의대원들이 검을 선풍처럼 휘돌려 검막의
우산을 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기력이었다. 적들의 숫자를 줄이지도 못하고 한없이 기력을 소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땅 속을 파고드는 무리들이었다. 드러난바 무공으로 치자면 열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금의대원 하나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고 또 이미 숲 속에서 많은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남은 이들의 숫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풀잎에 묻어있던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고 땅바닥이 잔물결쳤다. 그것을 보고 있던 운녹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미자와 비도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곧 지치게 될 것인데, 땅에서 공격해 오고 있으니 금방 허점이 드러나리라.
운녹산은 도를 도갑에 돌려보내고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았다. 바로 그 두 손이 떨어지는 순간 운녹산은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두 발을 힘차게 굴렀다. 그렇게 연이어 하기를 다섯 차례, 조금씩 방향을 비틀어 한 바퀴를 돌고나니 운녹산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쿠쿠쿠쿠쿵!
용천혈을 통해 땅속 사방을 파고든 금련오엽신공의 기운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를 중심으로 풀잎들이 흔들리고 물방울들이
솟아올랐다. 땅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피를 토하며 사람들이 기어 올라와 널브러졌다.
“호보동지(虎步動地)!”
때를 같이 하여 운현산이 외쳤다. 그 순간 수비에만 급급하고 있던 금의대원들이 자신이 점한 방향을 향해 일보를 크게
내딛었다.
쿠쿵!
갈라진 땅들이 뒤집혀, 피 흘리며 널브러져 있던 토령기병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 아미자와 녹엽비도를 막아주었다.
운현산이 달아 외쳤다.
“비호답풍(飛虎踏風)! 노호개산(怒虎蓋山)!”
바로 그 순간 바람 탄 호랑이처럼 금의대원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 토령기병들을 지나치며 세차게 도를 휘둘렀다.
“크아아아아아!”
팔방으로 삼장에 이르는 검기들이 뻗어나가자 수십 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퇴(退)!”
운현산이 발뒤축으로 땅을 찍으며 소리치는 순간 여덟 명의 금의대원들이 바람처럼 원래의 자리로 복귀했다.
침묵이 전장을 감싸 안았다. 운녹산이 자신의 기력을 크게 소모시켜가며 펼친 일수에 운현산의 즉각적인 대응이 합쳐져 일거에
사십여 명이 죽어버리자, 공격일변도의 적들이 잠시 멍한 상태에 빠졌던 것이었다.
운녹산 등은 그 기회를 이용해 최대한 기력을 회복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운추산의 바로 앞쪽 땅이 불룩 솟구쳤다.
운추산은 바로 코앞에서 질 나쁜 옥 같이 혼탁하면서도 묘한 광채를 드러내는 눈빛을 대하고 아차 하여 검을 내뻗으려 했다.
그러나 단전에서 불에 타는 듯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맥을 놓아버렸다.
운추산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검을 꼭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배에서 빠져나오는 얇고 예리한 장침을
바라보며 스르륵 무릎을 꺾었다.
“추산아!”
운명산의 외침이 들렸다. 운추산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세찬 바람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명산의 검기가 사이한 미소를 지으며 땅을 찍어 뒤로 물러서는 흙 여인을 쫓는 순간 여인은 검기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여인의 전신에 묻어있던 흙들이 한순간에 이동하여 그녀의 내뻗어진 손앞에 모였다. 검기가 이르고 여인이 손을 흔든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팍!
흙더미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여인의 벌거벗다시피 한 신형은 벌써 토왕기병들 사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토왕기병들이 그녀의
앞을 잠시 가리는 순간 여인은 또 다시 물처럼 땅으로 스며들었다가 금세 솟구쳐 올라 흙으로 전신을 가리고 섰다.
“오호호호호! 살아나갈 자, 아무도 없으리라 했었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흑의인들 사이로 검은 얼굴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멀찍이 떨어져서 적의인이 나타나고, 여인의
좌측 녹의인들을 헤치고 바짝 마른 청의인이 등장했다.
운현산과 운녹산은 자신들과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동서남북을 점한 네 사람의 면모를 훑었다. 단 한 사람 쉬워 보이는 이가
없었다. 기척도 없이 운추산의 바로 지척에서 솟구쳐 오른 여인의 능력은 차치하고라도, 나머지 세 사람 역시 하나같이
운녹산이 상대했던 백의인과 버금갈 정도의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운녹산은 운현산에게 전음을 날렸다.
<흑의인의 뒤쪽으로 강이 있는 듯 하다. 그쪽을 뚫어 생사는 하늘의 뜻에 맡기자. 하나라도 살아 돌아가야 넋이라도
거두리라.>
운현산은 즉각 알았다는 전음을 날리고서 주위를 둘러보는 듯한 시늉을 하며 모두에게 운녹산의 뜻을 알렸다.
그때 여인이 손을 들며 말했다.
“무슨 공론을 하시나? 무릎이라도 꿇으시려고? 원치 않아.”
여인의 손끝이 흔들렸다. 떨어지는 순간 모두가 움직이리라. 그때 운현산이 외쳤다.
“군호진천(群虎震天)!”
운현산을 정점으로 하여 좌측에는 운경산과 다른 두 사람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운명산과 다른 두 사람이 붙어 삼각진형을 이루고
그 가운데 운녹산을 세운 일행이 일제히 검을 떨치며 흑면흑의인을 향해 쇄도했다.
“쳐!”
여인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었다. 운현산 등의 검기는 서로를 구속하며 거대한 기둥을 이루어 흑면인의
지척에 이르고 있었다. 그 앞을 막아서던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바람 앞에 가랑잎처럼 검기에 휘말려 난자되어 튕겨나갔다.
“어이 씨! 왜 나야?”
흑면인은 감히 맞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용천혈로 수기를 빨아들였다. 주변의 물들이 흑면인의 기의 움직임만큼이나 빨리
빨려 들어가 그의 발아래 기둥을 이루면서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 순간 흑면인은 물뱀의 도움을 받아 이 장 옆으로 순간이동
했고, 운현산 일행이 일으킨 검기는 아쉽게도 물뱀의 꼬리를 부숴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운현산 등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 주변의 수신기병들을 뒤로 물리고 흑면인을 지나칠 수 있었다.
“이런 씨팔!”
흑면인은 분에 겨워 욕설을 내뱉으며 기검을 뽑아내고 운현산 일행의 뒤를 쫓았다. 순간 그의 검 끝으로 흩어진 물뱀의
시신들이 순식간에 빨려들었다.
흑면인의 반대쪽에서는 두 손을 붉게 물들인 적의인이 이미 따라붙고 있었고 뒤로 흙 여인과 녹의인이 바짝 뒤를 쫓았다.
운현산과 운경산 그리고 운명산은 전방을 향해 난마처럼 날뛰며 검을 내뻗었다. 흑의인들이 분시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아미자가 날고 수차들이 날았다. 그것들을 모조리 퉁겨내는 순간 세 사람의 앞으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하얀 물기둥이 채찍처럼 일행의 옆구리를 찍었고 반대쪽에서는 붉은 화염이 폭우를 뚫고 날아들었다. 후미의 두
사람이 몸을 휘돌리며 검을 내쳤다.
하나의 검기가 하얀 채찍의 허리를 끊었으나 수편의 여력은 달아 다섯 번이나 천근추를 펼친 후 겨우 버티는 운녹산의 등을
후려쳤다. 운녹산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다.
공격을 막아내고 지칠 대로 지친 후미의 두 사람이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왼손을 휘둘러 멈춰선 운녹산의 등을 부드럽게
밀면서 소리쳤다.
“대주!”
운현산이 몸을 휘돌려 운녹산을 받았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수편과 홍염이 그들을 후려쳤고 두 사람은 결국에 피를 토했다.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두 사람의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수십 개의 아미자가 그들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흙으로 된 여인이 그들을 밟고 지나쳤다. 그 뒤로 수십 명의 토령기병들이 그들을 짓밟았다. 그러나 운녹산 일행은 이미
약속한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물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지척이었다. 이십여 장 앞쪽으로 커다란 동혈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곳이리라.
운현산 등은 눈물을 삼키고 달렸다. 지친 몸놀림으로도 세 번의 도약이면 닿으리라. 한 번 뛰는 순간, 또 다시 두 마디
비명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넷!
네 사람은 또 다시 도약했다. 이상했다. 그렇게 급하게 뒤를 쫓던 적들이 걸음을 늦춘 것만 같았다.
뒤쳐져 달리던 운명산은 자신의 감을 확인하기 위해 도약 후 몸을 휘돌렸다. 그랬다. 아무도 달리지 않았다. 스치듯 보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흐릿한 비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멈춰!”
운명산이 소리쳤다. 이제 막 마지막 도약으로 강물에 몸을 맡기려던 운현산 등이 급히 몸을 가라앉혀 어두운 동혈 바로 앞쪽에
떨어졌다.
그들은 상대가 여유를 보이는 이유를 눈으로 확인했다. 거기에 분명히 강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오랑하라고 부르는
강이었다. 그러나 강이면서 벼랑이기도 했다.
고원의 틈새를 가로지는 좁은 강!
언뜻 보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천장 단애, 실제로 천장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능히 백 장은 될 높이였다.
뛰어내린다? 불가능했다. 떨어지는 와중에 바람이라도 분다면 백이면 아흔아홉은 벽에 부딪치고 말리라. 무사히 강물에 떨어진다
해도 내장이 흔들리고 정신을 잃어 결국 수장되고 말리라.
겨우 운현산의 부축에서 벗어난 운녹산은 절망에 빠져 강물을 등졌다. 그 순간에도 상대는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우아아아!”
운명산과 운경산이 강물로 밀려날 것 같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쇄도했다. 운현산과 운녹산이 급히 손을 잡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힘없이 손을 내리고 말았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결과가 기다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운명산과 운경산은 선천지기마저 뽑아낸 듯 오장에 이르는 검기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그러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네 사람은 상대하지 않고 슬쩍슬쩍 피하기만 했다.
마침내 운명산과 운경산의 기력이 다했다. 두 사람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서로 등을 맞대고 주저앉았다. 검파를 잡은 손끝이
부르르 떨리다가 마침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신기, 토왕기, 목정기 할 것 없이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발 한 발 다가들었다. 불 본 나방처럼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한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던 그들도 역시 사람인 듯, 동료를 잃은 분노를 두 눈 가득 심은 채 병장기 끝에 살기를
드리웠다.
살갗을 찢어놓을 듯한 살기를 감지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맞댄 후에 목을
비틀어 운녹산과 운현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 반을 가린 눈물을 확인한 운명산과 운경산은 흐릿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운명산이 말했다.
“제기랄! 토가족들 죽인 게 그리도 찜찜하더니만 결국은---. 고생했다. 편히 쉬어라.”
운경산이 말했다.
“또 봅시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상체가 크게 휘청거림과 동시에 울컥 피를 토했다. 수십 자루의 병장기들이 그들의 등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와 코와 입을 마주하고 점점 밑으로 늘어져갔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눈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들은
눈가에 고통스런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녹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조용히 도파에 힘을 주었다.
‘제길! 이렇게 될 줄이야. 이게 아닌데. 아니야, 아직은---.’
공을 세워 미적거리는 후계자에 대한 공식 인증을 받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사천제일세(四川第一勢)를 이루겠다는 야망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운녹산은 비장함과 분노로 무장한 운현산의 옆얼굴을 힐끔 살폈다. 운녹산의 목젖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는 큰 결심을 마친 듯 고개를 비틀어 운현산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 동안 미안했구나. 현산!”
순간 운현산의 두 눈이 분노 대신 격정으로 채워졌다. 운현산도 고개를 비틀어 운녹산의 얼굴을 직시했다. 운녹산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운현산도 흐릿한 미소로 화답했다.
운녹산은 늦췄던 도파를 힘차게 움켜쥐어 곧추세워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을 내딛었다. 바로 그때 운현산이
검파를 놓는 대신 운녹산의 왼손을 잡았다.
운녹산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운현산은 운녹산의 놀란 눈을 눈물 가득한 웃는 눈으로 마주했다.
“왜?”
운현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힘차게 도약하여 몸을 뒤로 눕혔을 따름이었다. 두 사람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벼랑으로
떨어져 내렸다.
“뭐야? 어이 씨팔! 저 새끼들 뭐하자는 짓이야?”
흑면인이 가장 먼저 벼랑 끝으로 달려와 아래를 확인했다. 그들은 비명도 없이 한없이,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수 사제! 어떻게 좀 해 봐!”
토왕기주가 흑면인의 옆으로 다가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것은 흑면인의 욕설 밖에 없었다.
“어이 씨팔! 개좆같은 새끼들이 그냥 칼 맞아 죽지 자살을 해? 이런 젠장 할!”
“강이잖아?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야!”
토왕기주가 다시 소리쳤다. 흑면인은 그녀의 흙칠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강이라고 다 통하는 줄 아슈? 그럼 나보고 저 놈들 따라 떨어지란 말이오? 젠장!”
토왕기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다시 벼랑 끝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냉정한 눈빛을 되찾은
토왕기주는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돌아간다.”
그들이 떠나버리자 전장은 겨우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피비린내 사라지려면 폭우가 닷새는 지속되어야 하리라.
운녹산은 다시 한번 외쳤다.
“왜?”
운현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잡은 손을 비틀고 몸을 휘돌려 운녹산과 등을 마주했다. 마치 운현산이 운녹산을 등에 업고
허공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하강은 가속이 붙었다. 십장에 십장을 더하는 순간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거세어만 갔다. 그렇게 팔십여 장을
내려왔다. 강까지는 겨우 사십여 장. 협곡은 점차 좁아져 운현산의 발에 닿을 것만 같았다.
운현산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팔을 다리 쪽으로 내려 운녹산의 두 발을 잡았다. 운녹산은 그때서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현사안!”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운현산은 아예 천근추를 펼치며 굳건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귓가에 애타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듣는 순간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두 다리를 구부렸다가 힘차게 뻗어 벼랑에 툭 튀어나온 바위를 짚었다. 그리고 동시에
잡고 있던 운녹산의 두 발을 머리 위로 당겨 밀었다.
우두두두둑!
몸속에서 둑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귀 밖으로 터져 나왔다. 팔십여 장을 강하하고 힘주어 밟은 바위였다. 천하제일의
강골이라도 견뎌낼 재간이 없으리라.
운현산은 갑자기 가벼워진 등에서 허전함을 느끼기에 앞서 완전히 박살나버린 하체와 터져버린 오장육부로부터 오는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비명을 토했다.
가물거리는 의식을 힘겹게 붙잡고 벼랑을 구르던 운현산은 한 사람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평생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의 뜨거운 눈물을 본 것만 같았다.
‘형님! 꼭 사시구려.’
첨벙하는 소리를 들은 운현산은 튀어나온 바위에 머리를 박으면서도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