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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놀란 외침과 함께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막 바닥에 내려선 운추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십 수 년 동안 무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어둡다고 균형을
잃는다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었다.
운추산은 그러나 곧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어 바닥을 더듬어 보니 밧줄 몇 개 널려있는
갑판과는 달리 배의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군데군데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널려있었다.
운추산은 일단 어둠에 적응하고 나서 두 시진 동안의 말동무를 찾아보기로 하고 마지막 계단에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위에서
밝은 불빛이 내려왔다.
“어이! 여기 불.”
운경산이었다. 운추산은 반갑게 호롱불 두 개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경산 형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네.”
운추산은 받아든 호롱불 두 개 가운데 하나를 옆으로 건넸다. 호롱불이 어둠을 스쳐지나가며 금의대원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밝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금의대원들은 두 개의 호롱불에 의지하여 대충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운경산이 대원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배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어. 불조심들 하라구. 잘못하면 물고기들이 화식(火食)이라며 좋아할 게야.”
조금 전 곽동량과 시비가 붙었던 운명산이 소리 질렀다.
“부정 탄다, 이 자식아. 빨리 꺼져버려. 화식이라니---.”
운경산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허! 이 자식이라니? 일개 대원이 부대주에게 못하는 말이 없다. 떽! 근데 설익으려나?”
운명산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똥 기저귀 갈아가며 얼러 키운 게 엊그제 같은데, 머리 커졌다고, 쯧쯧쯧. 가르친 바 없거늘 저런 버르장머리는 누구한테
배웠을까? 아하! 누구를 탓하랴. 내가 잘못 훈도한 탓이거늘---.”
“어? 뭐야?”
웃음을 터뜨리려던 운경산이 흔들리는 몸뚱이를 가누기 위해 다급히 계단을 잡았다. 배가 선착장을 벗어난 것이었다. 운경산은
급히 계단을 되짚어 올라서며 말했다.
“난 맡은 바 책임이 있으니 어쩔 수 없으나, 형제들은 푹 쉬라구. 크크크!”
운경산이 갑판 위로 올라간 후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배가 강의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물결들을 넘는 와중에
심하게 울렁거리는 탓이었다.
“어이 씨!”
“어! 어!”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발바닥과 엉덩이만으로 앉아있던 금의대원들이 두 손을 선저에 대고 급기야는 등을 바닥에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만 당황하여 허둥대는 줄 알았던 금의대원들은 일제히 서로의 상태를 살피며 절로 붉어졌던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운명산은 계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못된 자식! 푹 쉬라고?”
그러나 운명산은 운경산의 상태가 자신들보다 더욱 처절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금의대와 떨어져 곽동량이 선타를 잡고 있는 선미의 왼쪽 난간에 기대어 섰던 운경산은 죽을 맛이었다.
배가 선착장에 대어져 있을 때는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배의 흔들림이 묘하게 기분이 좋았고 동료들과는 달리
눈앞이 탁 트여 곧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마저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운경산은 배가 떠나자마자 두 손의 자유를 잃고 말았다. 난간이 뿌드득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꽉 움켜쥔 것도 모자라
입에서는 절로 “악!” 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다.
정선하고 있을 때에는 그저 물이 흘러간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일단 배가 움직이는 순간 물이 곧 수백 갈래 물결들의 집합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곽동량의 뒷자리는 경관 좋은 곳을 오가는 배를 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서있고픈 자리일 것이다. 비록 작은 선실에 가려 선수
쪽 갑판을 비롯한 배의 전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에 선수의 앞쪽 전경은 물론 후면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운경산은 원래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선수 바로 앞쪽의 강물을 볼 수 있었다. 배가 한 물결 올라설 때마다
전경은 사라지고 눈앞에 하늘이 나타났으며, 그 물결 내려설 때마다 누런 강물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부동심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난간을 놓는 즉시 몸이 날아가 황톳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속은 메스꺼웠고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평소에 겁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자타가 공인했던 자신이 공포심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운경산은 입술을 깨물고 두 다리에 기운을 북돋아 꼿꼿하게 섰다.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아예 선미의 높은 부분을
내려서 선실 앞에 이르렀다. 뒷모습으로 보던 곽동량의 얼굴이 정면에서 올려다보였다.
곽동량은 침착했다. 두 다리는 무쇠처럼 굳건하고 두 눈은 차분하게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곽동량은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운경산은 부끄러웠다. 금의대의 망신을 자신이 시키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그 순간 곽동량이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처음이시오?”
고개만 끄덕이려던 운경산은 곽동량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했다.
“그렇소.”
곽동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담력이구려. 이 정도의 흔들림이라면 자주 배를 타던 사람들도 바닥에 엎드리고 만다오.”
“놀리시는 게요, 곽 대협? 당신은 꼿꼿하게 서있지 않소?”
곽동량은 선타를 좌측으로 조금 비틀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익숙할 따름이오. 내 나이 다섯에 배를 탔고, 여덟에 처음 타를 잡았소. 비록 선타를 놓기는 했지만 그 후로도
셀 수 없을 만큼 이 강을 오갔다오. 산악에서 자란 운 부대주도 몇 번만 오가다 보면 이 정도는 금세 익숙해질 것이오.”
운경산은 곽동량이 비웃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아님을 그의 어조와 표정에서 분명히 알아차렸다. 운경산은 순간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용신제를 지낸 이유는 무엇이며 선부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곽동량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곧 알게 될 것이오.”
그 순간 배의 요동이 줄어들었고 좌측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던 선체도 바로 섰다. 대신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곧 알게 된다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생각에 빠져있던 운경산이 갑작스런 변화를 반기며 선실 외벽으로부터 등을 떼었다.
그때 마침 곽동량도 전면을 응시하던 시선을 운경산에게 돌리며 전신에 깃들어 있던 긴장감을 풀었다.
“이젠 올라오셔도 무리가 없을 것이오.”
운경산은 입술을 씰룩였다. 곽동량은 이미 자신이 무서워서 선미에서 선실 앞으로 내려섰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왕 들켰는데 아니라고 변명할 운경산이 아니었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처음에 서있던 자리로 올라섰다.
“광룡처럼 요동을 치더니 어떻게 이런 변화가?”
운경산의 물음에 곽동량의 입술 끝이 미약하게 비틀렸다. 곽동량은 좌측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운경산의 눈길이 따라갔다.
그곳에 선착장이 보였다. 곧 배는 전진한 것이 아니라 옆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강은 하나이나 강물은 수많은 물살들이 실타래처럼 꼬여 있소. 물살을 타면 배는 빨라지고 물살을 넘으면 요동을 치는 것이
당연하지요.”
“허면 굳이 왜 이곳까지?”
곽동량이 고개를 돌려 운경산을 바라보면서 또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거부감이 드는 미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하는 의미가 느껴져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첫째는 수심이오. 강변의 수심이 낮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운경산은 자신이 바보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요동을 감수하면서까지 넓은 강의 중심까지 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 순간 곽동량이 말을 이었다.
“물은 부드럽지 않소? 딱딱한 것을 만나면 뚫지 않고 돌아 흐르오. 결국 수심이 낮은 곳에서는 물과 맞닿는 지형과 어우러져
물의 변화도 심하오. 거기서는 물살들이 교미하는 뱀처럼 엮이고 꼬이고 비틀리지요. 그 상태라면 바닥에 선저가 닿지 않아도
배를 제어하기가 어렵소. 반면 물이 깊은 곳, 특히 지금 눈앞의 광경처럼 직선으로 뻗은 물길에서는 물살들이 나란히 흐를
뿐만이 아니라 그 속도 또한 빠르오. 일단 물살을 타기 시작하면 빠르고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이오.”
듣는 것만으로도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운경산은 곽동량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렇게 무력한 동안이라도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운경산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풍광이
미풍처럼 눈앞에서 흘러지나갔다.
운경산은 점차 안정되어가는 배의 움직임에 차분히 몸을 맡기고 두 손의 도움 없이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러나 그는 잊고
있었다. 곧 알게 될 것이라는 곽동량의 말처럼, 그 진의를 알게 되는 시간이 ‘곧’ 이라는 사실을.
협과의 인연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곽가의 원래 가업은 지금처럼 표국이 아니라 삼협을 오가는 여객들을 실어 나르는
운송업이었다. 그 탓에 곽자렴은 어려서부터 배를 탔고 약관 이전에 이미 누구 못지않은 조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그가 용문수로표국을 시작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그런 그도 오랜 만에 잡는 선타의 느낌은 생소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자렴은 최악의 조건 하에서
표물이 아닌 사람들을 최악의 장소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 그러니 곽자렴의 뒤만 쫓으면 되는 곽동량과는 달리, 그가
느끼는 긴장감은 더 이상 당길 수 없는 시위처럼 팽팽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강의 중심에 진입함으로서 잠시 긴장을 풀게 된 곽자렴은 그때서야 겨우 운녹산과 운현산을 살필 여유를 얻었다. 좌우를
돌아본 곽자렴은 출항 전의 모습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두 사람의 자세를 확인하고 감탄에 앞서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녀석들! 이만한 기상조건은 나로서도 몇 번 경험치 못한 것인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배는 처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공포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다. 결국 녀석들은 내색하지 않을 뿐 공포를 초월한 것은 아닐 터. 쉽지 않은 일이군. 명가가 달리 명가는 아닌가
보군.’
하지만 곽자렴도 두 사람의 손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들이 잡고 있는 난간을 본다면 크게 의아해
하리라. 왜 그렇게 찌그러져 있는지 쉽게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하얗게 변했던 그들의 손가락 끝마디도 어느새 제 색을 찾았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단 한 번도 서로의 상태를
살피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반 시진이 흘렀다. 어깨에 뭉쳐있던 압박감을 채 풀기도 전에 곽자렴의 눈에서 다시금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침착하려 해도 머리가 쭈뼛거리는 공포감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곽자렴은 두 후학들이 좌우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소리를 내어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입술을 질끈 깨문
그가 낮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 기문이오. 두 분께서는 조금 더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세를 낮추는 것이 좋겠소.”
운녹산과 운현산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배는 여전히 안정감 있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마치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안그래도 빠르다 느꼈던 배의 속도는 조금씩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에서 흐릿한 공포감을 느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시선을 외면하고 전면을 직시했다. 확실히 강폭이 줄어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협곡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는 울퉁불퉁 튀어 오르며 서로를 앞으로 밀며 안 가려고 발버둥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녹산은 이미 찌그러진 배의 난간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때 운현산이 말했다.
“형님! 내려서시지요.”
운녹산은 흠칫 놀라 운현산을 응시했다. 겁나면 내려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공포감이 그대로 운녹산의
가슴에 전이되고 있었다.
운녹산은 형님이라는 말조차 되새겨 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선미 높은 곳에서 내려서서 곽자렴의
맞은 편, 즉 선실의 후위 벽에 들러붙듯 주저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삼성 공력을 일으켜 하체를 무겁게 내리 누른 두 사람은 동시에 곽자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곽자렴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오로지 전면만을 주시하며 지지 않겠다는 불굴의 투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은 좋은 동풍. 이단까지 돛을 올려라. 단류노(斷流櫓)를 준비하고 북을 쳐라.”
곽자렴은 사자후를 터뜨리듯 힘차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 속에는 지금 그의 눈빛에 흐르는 긴장이나 공포 등이 한 점도
드러나지 않았다. 듣는 순간 힘이 되고 용기가 솟구칠 구심점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였다.
둥둥둥둥둥둥둥둥-----.
끼르르륵! 끼륵! 끼르르르르!
북소리와 함께 도르레 돌아가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우오오오! 우오오오! 어이 차!”
십 수 명의 사내들이 동시에 힘을 보태어 기백을 드러내면서 연신 소리쳐 대기 시작했다. 삼협과는 반대 방향으로 돛이 부풀어
오르자 배가 뒤집어질 듯 휘청거렸다가 금세 자세를 잡았다.
운녹산과 운현산은 배의 속도에 갑작스런 제동이 걸렸음을 확연하게 느꼈다. 운현산은 기듯이 움직여 곽자렴의 발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곽자렴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돛은 꼭대기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중간쯤에 걸쳐져 있었다. 운현산이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일이었다. 바람은 격류의 흐름을
반대하는 역풍. 돛이 크게 펼쳐질수록 바람을 많이 받아 배의 속도는 느려질 것이 아닌가.
“곽 국주, 돛을 왜 중단까지 밖에---?”
배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돛이 올랐음에도 또 다시 배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짐에 따라 그가 느끼는 공포심도 커지는 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곽자렴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상단의 바람은 하단에서 받는 바람의 세 배. 잘못하면 밑은 격류에 휩쓸리고 위는 바람에 힘을 받아 작은 물살 하나에도
튕겨서 뒤집힐 수 있음이오. 대주! 지금부터는 이 늙은이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마시오.”
운현산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곽자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순간 운현산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물살 하나하나를 살펴도
모자랄 지금 곽자렴은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포기했단 말인가?’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운현산은 촌각도 지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겪어보지 못한 곽자렴이지만 조금 전과 같은 기백은
처음 느꼈었다. 그런 기상을 드러낸 인간과 포기라는 말은 아무리 엮어 보려 해도 연관된 고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운현산은 다시 곽자렴의 얼굴을 살폈다.
‘흐름에 자신을 동화시킨다는 것인가?’
검을 쥐면 신체의 일부로 느끼는 경지에 이른 운현산이었다. 곽자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장엄한 기색이
신수합일(身水合一)에 이르렀음을 느끼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처음부터 알아차렸을 일이었다.
‘그라면 믿어도 될 터.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방해하지 않는 것뿐인가?’
운현산은 애초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운녹산의 얼굴을 마주했다. 운녹산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에 굴복한 눈감음이 아니라 곽자렴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행위임이 틀림없어서 차분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녹산 형도---.’
운현산도 문내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운녹산이 소가주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운현산은 운녹산이 과연 소가주가 될 자격이 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산은 그 즉시 자리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아아! 촤! 촤! 촤!
격류가 흐르는 소리, 뱃전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그가 물에 몸담고 있는 듯 크게 느껴졌다. 몸이 휘돌았다. 숨이 가빴다.
발버둥쳤다. 그러나 한번 빠진 의식은 거대한 뱀에 감겨 점점 더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눈을 뜨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의 눈을 꼼짝할 수 없이 짓눌렀다.
운현산은 의식 속에서 격류에 휩싸이는 몸뚱이를 포기했다.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편해졌다. 관조하듯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소리 사라지고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몸뚱이는 구름조각처럼 물 위를 휘돌면서 두둥실 흘러 다녔다. 꼬이고 휘돌고 뒤덮여서
도대체 몇 줄기의 물살들인지 알 도리가 없었건만 허리를 감고 다리를 건드리며 가슴을 스치는 물살 하나하나가 낱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운현산은 관조의 범위를 넓혔다. 물 위를 떠다니던 그의 육신이 어느새 배가 되었다.
‘그래, 여기서 요 녀석을 넘으면---.’
잘못된 판단이었다. 곽자렴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운현산이 생각했던 그 물줄기가 아니라 그 다음에 따라오는 더 작고 안전한
물줄기를 타넘었다.
‘아! 그걸 넘었다면 그 다음에는 크게 흔들렸을 거야. 그렇지! 이번에 이걸!’
그 즉시 배가 물결 하나를 넘었다.
‘옳지! 이번에는---. 어? 어엇!’
그때 곽자렴의 목소리가 운현산의 귀를 두드렸다.
“돛을 하단으로! 좌측 벽수판(壁水板)을 올려라.”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급하고 격렬한지 운현산은 눈을 뜨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헛!”
두 마디 헛바람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운현산과 운녹산이 동시에 눈을 떴고 동시에 소리쳤던 것이었다. 노룡의 꼬리
같은 물결이 좌측에서부터 배를 덮칠 듯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우측으로 한 자 가량 솟구쳤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풀렸던 천근추의 공력을 운용하여 몸을 갑판 위로 내리 누르고 손바닥으로 갑판을 후려쳐 몸을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순간 우측으로 뒤집어질 듯 기울어졌던 선체가 안정을 되찾았다.
왼발을 크게 좌측으로 내뻗어 천근추로 배를 내리 누른 자세를 유지하던 곽자렴이 흘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선수가
허공으로 급격하게 치솟았다.
“천근추를 푸시오.”
곽자렴의 외침에 즉각 반응한 두 사람이 몸을 가볍게 하는 순간 뒤로 휘돌아 전복될 것 같던 배가 부서질 듯한 충격과 함께
다시 강물로 곤두박질쳤다.
운현산과 운녹산의 신형도 즉시 갑판에 맞닿았다.
“아시겠소?”
밑도 끝도 없는 곽자렴의 물음이었건만 운현산과 운녹산은 눈빛을 번득이며 그 즉시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인간과 광룡의 전투. 광룡의 분노에 따라 노도가 배를 비틀고 후려치고 삼키려할 때마다 운녹산과
운현산은 곽자렴의 행동에 맞춰 천근추를 시전하고 풀고 자리를 이동하며 사투를 벌였다.
콰아아아아아아!
광룡이 울부짖고----.
둥둥둥둥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단류노가 광룡의 혈맥을 끊고----.
흐합!
곽자렴과 운녹산 그리고 운현산의 합일된 기세가 광룡의 기세를 억눌렀다.
그렇게 사투가 시작된 지 한 시진. 세 사람이 완전히 진이 빠져 녹초가 되려는 순간, 곽자렴의 최후의 기운을 모두 뽑아내어
사자후를 터뜨렸다.
“운망계가 보인다. 우측 물줄기를 쉬지 말고 끊어라.”
세차게 흐르는 격류 속에서 지류로 방향을 트는 일은 배가 옆으로 뒤집히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이었다. 지금 곽자렴은 그것을 하려하고 있었다.
피곤에 찌든 운현산과 운녹산의 눈빛에서 한 줄기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분명 처음 타는 배였지만 곽자렴의 조정을 적극
도운 지금에 와서는 자신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었다.
크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배는 조금씩 우측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운현산과 운녹산은 흩어졌던 기운들을 짜듯이 모아
순식간에 천근추를 펼칠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북을 쳐라! 돛을 내리고 우측 벽수판을 올려라. 물 흐름을 끊어라.”
핏방울이 튈 것 같은 곽자렴의 명령이 어김없이 시행되는 순간 선타를 쥔 곽자렴의 손등에서 핏줄이 굵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이 차!”
선타가 오른쪽으로 돌고 곽자렴의 오른발이 우측으로 크게 뻗어나가는 순간 배가 빠른 속도로 운망계로 방향을 틀었다. 순간
배의 우측 선면에 격류가 부딪치며 배가 우측으로 기우뚱거렸다. 그래도 배가 충분한 선회를 할 만큼 기울어지지 않았다.
“합!”
순식간에 배의 우측으로 신형을 이동시킨 운녹산과 운현산이 동시에 기합을 터뜨리는 동시에 천근추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배를
내리 눌렀다.
뿌지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갑판이 뚫리며 두 사람의 신형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그 즉시 두 손을 호조(虎爪)로
만들어 선면에 박아 넣었다.
스르르르르르륵!
언제 그리도 거센 파도를 헤치고 다녔냐는 듯, 배는 속력을 줄이며 부드럽게 운망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운망계의
물은 본시 삼협으로 합쳐지기 위해서 내려오고 삼협의 불어난 물은 운망계 속으로 빨려 들어감에 따라 두 물살들이 서로를
밀어내어 흐름을 없애버리는 특징 탓이었다.
곽자렴은 배를 좌초시키다시피 모래 둑 위로 얹고 선타를 놓으며 갑판 위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운녹산과 운현산이 기듯이 갑판 위로 올라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여유가 생긴 두 사람의 시선이 곽자렴에게 꽂히는 순간
곽자렴은 바닥을 기어 선미의 난간을 붙잡았다.
운녹산과 운현산도 갑작스럽게 생각난 후위선의 안위를 떠올리며 후다닥 뛰어 곽자렴의 옆에 이르렀다.
좁은 협곡 사이로 선수가 엿보이더니 어느새 배의 전모가 드러났다. 배가 우측으로 기울어지면서 밀렸다. 일순간 다시 중심을
잡는 것 같았다. 운경산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도우고 있을 것임에도 그리 되어서는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선체가 급격히 기우뚱거리다가 운망계의 입구로 머리를 디밀었다.
“후!”
곽자렴 등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엇!”
그러나 배는 격류에 삼분지 일의 선체를 걸친 채 옆으로 나뒹굴었다.
“갑시다.”
곽자렴이 몸을 퉁겨 모래 뚝 위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세 사람은 이미 울퉁불퉁한 벼랑의 바위들을 차며 조금씩 뒤로 밀리는
후위선으로 다가갔다.
배까지 십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갑판이 폭발하면서 푸른 청광이 연달아 솟구쳤다. 금의대원들이 반쯤 물에 잠긴
배의 갑판을 뚫고 튀어 올랐다. 그들은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노수들을 하나씩 짊어지고 벼랑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에게 이른 운현산은 그 즉시 머릿수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쿠쿠쿠쿠쿠쿠!
선체가 삐꺽대다가 급기야는 묘한 소리를 내면서 점차 삼협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완전히 삼협까지 빨려간
배는 수차례 휘돌다가 조각조각 부서져 어느새 사람들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라는 아찔한 상상을 하며 선도선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인원수를 파악하고 배의 상태를 조사했다.
난간이 부서진 몇 곳과 운녹산과 운현산이 뚫어버린 갑판 말고는 배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후위선에서는
삼협을 뚫고 내려오면서 노수들 열 하나가 사라져 버렸고 고수(鼓手) 역시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곽자렴은 붉어진 눈으로 무사히 돌아만 갈 수 있다면 죽은 자들의 가족을 위해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겠다는 말하며 선부들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