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9)

  

남포현(南浦縣)은 사천의 남동쪽 장강 변에 위치한 포구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동으로 점차 물살이 거세져 기문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바로 삼협이 시작된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천의 물산들은 결국 남포현에 모여 배를 기다리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물산들 역시 남포현에 와서야 

한숨 돌리고 사천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천사람들은 남포현을 사천의 동쪽 문이란 뜻으로 

천동문호(川東門戶)라 칭했다. 

천동문호라는 표현에 어울리게 남포현에는 작지 않은 표국이 다섯이나 있으며, 사천의 타 지역에서 몰려드는 표대(鏢隊)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뜨인다. 그러니 그와 관련한 상인, 하역부, 잡부들이 바글거렸고 다루, 객잔, 창루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많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그들 전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연명해가는 관원들까지 포함하면, 현에 불과한 남포지만 번잡함으로 따진다면 사천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못지않은 것이 당연하리라.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남포현의 중앙대로 천중로(天中路)를 따라 포구 쪽으로 가다보면 상인, 표사, 잡부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다루와 술집들이 줄을 잇고 그 뒤쪽으로 간간히 호쾌한 웃음소리와 간드러진 교성이 들려오다가 갑자기 뚝 끊긴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이 규모는 크나 외향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다섯 채의 큰 집들이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으나 유독 대문만큼은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그 집들은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집들의 주인들과 드나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종의 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표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천중로의 일부라 생각지 않고 그곳만 따로 떼어 집표로(集鏢路)라고 불렀다.

이러한 표국끼리의 군집은 특이하다 할 것이다. 동종의 작은 상점들이 함께 손님을 끌고 손님들은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옹기종기 붙어있는 경우가 많으나, 표국은 다르다. 무인과 상인의 중간에 위치하는 그들은 출신 문파에 따라 

영역을 정해 두고 거리를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경쟁을 한다 해도 이웃으로 붙어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표로가 형성된 것은 이곳 남포현이 천동문호인 탓이고, 표국의 표국이라 할 수 있는 용문수로표국이 있는 

탓이기도 했다. 

용문수로표국이 나머지 네 표국들의 청탁을 받아 외부로부터 표물들을 실어오면 나머지 표국들은 남포현을 기점으로 하여 내륙의 

동, 북, 서 그리고 수로의 서쪽을 각각의 영역으로 지키며 다시 표물을 운송한다. 그러니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고, 그 결과로 집표로가 생긴 것이었다. 

표국도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인데 어떻게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용문수로표국이 청성에 

배경을 둔 것과 같이 나머지 네 표국들도 아미(峨嵋), 운가(雲家), 또는 당가(唐家) 등의 명문명가를 배경으로 둔 탓에 

함부로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표국들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으니 집표로 근동 또한 천중로의 중심부와 다름없이 늘 번잡할 수밖에 없다.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물론 상인들이 드나들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이 당연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수도 확연하게 적었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또한 급하고 무거웠다. 특히나 

천중로를 가로막듯이 서있는 남포현 제일의 표국 용문수로표국의 대문 앞은 기둥을 대신한 두 마리 청룡들만이 외로움을 드러낼 

뿐 지나가는 이 하나 없어,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표물로 가득 차 있던 넓은 청석 마당은 수레 하나도 없어 썰렁하고, 

종복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넓은 마당을 놓아두고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인 채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제룡당(制龍堂) 앞에는 청의무복 차림의 중장년인들과 표사복 차림의 사내들 일곱이 오직 대문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었고, 제룡당의 대청에는 검은 색 화복 단삼 차림의 초로인이 오락가락하다가 가끔씩 대문을 바라볼 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초로인은 다시 한번 대문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젓고서 다시 대청을 오가기 시작했다. 뒷짐을 진 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락가락 하다가 그마저도 초조함을 달래주지 않는다는 듯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계속해서 후려쳤다. 

그때 대청 아래쪽에서 초조한 눈빛으로 대문을 바라보고 있던 청의 무복 중년인이 초로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국주님! 저기.”

초로인, 용문수로표국주 곽자렴은 황급히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허! 가장 늦게 오기를 바랐던 이들이 먼저 오는군. 되는 일이 없어.”

곽자렴은 대청을 내려서며 말했다.

“내당에 손님 오셨다 이르고 재물당주(財物堂主)에게 대기하라 이르게.”

표사 한 사람이 급히 제룡당의 우측으로 달려가는 동안, 곽자렴은 청의무복 중, 장년인 셋을 이끌고 대문을 향해 걸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막 세 필의 준마(俊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견무복 차림의 

준수한 사내가 가운데서 앞서고 흑의무복 차림의 중년인 두 사람이 그의 뒤쪽 좌우에서 보조를 맞추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마중 나오는 곽자렴 등을 확인하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제룡당 앞에 뒤쳐져 있던 표사 세 사람이 급히 달려가 

말고삐를 넘겨받자 사내와 두 중년인들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곽자렴 등에게로 다가갔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곽자렴 등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운대공자(雲大公子).”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주님.”

곽자렴은 눈을 감고 싶었다. 예의에 어긋남은 없으나 말 속에 성의(誠意)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칼바람이 스치는 듯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아무리 사내가 사천의 동북지역을 대표하는 천북제일무가(川北第一武家) 운가의 대공자라지만 곽자렴 또한 작으나마 일문의 수장,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곽자렴의 입장은 그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외려 운가의 대공자 

운녹산(雲綠山)이 숙이라면 땅에 이마를 댈 수밖에 없으리라.

곽자렴은, 한번 웃으면 남포현의 기녀들이 속곳 바람으로 달려들 것 같이 준수한 사내 운녹산의 얼굴에서 감도는 한기를 

외면하며, 몸을 비틀어 제룡당으로 손을 뻗었다. 

“들어가십시다.”

운녹산은 곽자렴에게 고개를 까닥이고서 앞서 걸었다. 곽자렴은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청의무복의 중, 장년인 셋이 거의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운녹산과 동행한 두 중년인들이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말없이 운녹산의 뒤를 좇았다. 

표국의 외양에서 느껴지는 을씨년스러움과는 달리, 제룡당 접객방의 분위기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웠다. 방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가구며 분재며 그림이며 글씨 하나하나까지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중년인들을 뒤에 서있게 

하고 홀로 앉은 운녹산은 그 어디에도 눈을 두려하지 않고 그저 싸늘한 기운만 흘릴 따름이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곽자렴은 등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며 혹시라도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국주님?”

운녹산이 서늘한 눈빛으로 곽자렴을 직시하며 물었다. 곽자렴은 차마 한성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그의 눈을 마주 응시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놈 참 잘 생겼다며 구석구석 뜯어볼만도 했지만, 지금의 곽자렴은 당황하여 품속을 뒤질 뿐이었다. 

한참을 꼼지락대다가 겨우 손수건을 찾아낸 곽자렴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아직은 귀가의 표물을 실은 용문비선 일호가 사라졌다는 것 말고는 그리 아는 것이 없소이다. 허나---.”

“성의가 없으시군요.”

운녹산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차갑게 곽자렴의 말을 끊었다. 

“성의가 없다?”

곽자렴은 운녹산의 말을 되풀이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남에게,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후배에게 들어야 할 말이 아니었다. 

곽자렴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사천 물산의 흐름을 유심히 살피다가 삼협운송이 곧 성공의 열쇄임을 찾아내어 지난 삼십 년 

간을 쉬지 않고 일했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용문수로표국이 사천 이대 표국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표국과 관계된 것이라면 말 못하는 용문비선의 돛대마저도 그의 손에서 윤이 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성의 없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결코 들을 일이 없는 말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 곽자렴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아실 터. 이미 본가에 도착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모르신다? 성의 없다는 제 말이 

지나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다시 이어진 운녹산의 말에 곽자렴은 한숨을 내쉬는 것 말고는 달리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차라리 천금을 들여 보상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눈앞에 앉아서 건방 떠는 젊은 놈에게 호통을 쳐보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가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물건은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백련정강(百鍊精剛)으로 만든 철검 이백자루!

병기에 대해서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었다. 신병(神兵)이라 소문난 절검(絶劍)이 아닌 이상, 상질의 

검이라 하더라도 그 거래가격이 삼백 냥을 넘는다면 제 값 이상의 가격을 치루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운가의 표물가격을 최고로 잡아준다 하여도 은자 육만 냥에 불과했고, 위약금으로 세배를 지불한다 하여도 

이십만 냥을 넘지 않는다. 그 정도라면 용문수로표국이 충격을 받아도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철검의 값어치는 그렇게 단순히 산술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검 이백자루는 확실히 시중에 나도는 

보통의 검과는 달랐다.  

탁탑참요검(托塔斬妖劍)이라 했다. 

왜 이백 자루나 되는 검을 새로이 주조하게 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요괴를 퇴치하는 천장(天將) 

탁탑천왕(托塔天王)의 오대신병 가운데 하나인 참요검을 빈 검명(劍名)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일반의 용도와는 다른 주술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리라.  

곽자렴도 표물을 맡기 전부터 이미 사천의 사대거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천북제일무가 운가의 가주인 무극신검(無極神劍) 

운검정(雲劍正)이 그 검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운검정이 직접 상질의 철을 구했고,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다는 무당파의 재전장로(齋殿長老) 

보천자(補天子)가 모든 제례(祭禮)를 도맡았으며, 단지 검을 주조하기 위하여 검각현과 주조소(鑄造所)가 있는 호북성 

홍호현(洪湖縣)에 탁탑천왕을 모시는 사당을 열었으며, 그것을 위해 투입된 자금만도 물경 이십만 냥에 이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철검주조를 위해 투입된 시간이었다. 

오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천 사대 세력의 하나인 천북제일무가의 가주가 장장 오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나온 

결과물이 탁탑참요검이었다. 

그런 물건을 잃어버렸으니 곽자렴으로서는 용문수로표국을 내어 놓으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곽자렴은 일언반구도 하지 못한 채 흥건하게 젖은 손수건을 다시 이마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길을 비틀어 꽉 닫힌 방문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용문수로표국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남포 포구도 예전과 달리 썰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물론 잔뜩 찌푸린 하늘이 예고하는 

것처럼 곧 우기가 시작되면 남포현은 근 두 달이나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구에 실어달라고 

기다리는 화물들을 볼라치면 정작 포구가 썰렁한 이유는 용문수로표국에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움마저 감도는 포구로 팔노등선 한 척이 힘겹게 들어서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탓에 물길을 

역행해야 하는 사공들의 노질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지만 사공들은 이상하게도 기운을 돋우는 말이나 노래조차 없이 묵묵히 

노질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배가 마침내 포구에 닿았다. 선수에서 선타를 잡고 있던 털북숭이 중년인이 사람은 없고 화물만 가득한 포구의 전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선수 근처에 돌돌 말려있던 밧줄의 끝을 잡고 선착장에 올라섰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선착장의 말뚝에 

고정시키고 배 쪽을 향해 말했다. 

“올라오게.”

오른쪽 팔에 부목을 댄 창백한 얼굴의 청년 하나가 노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선착장으로 올라섰다. 중년인이 청년을 다시 

부축했다. 

“가세.”

중년인이 청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 말을 무시하고 힘없는 눈으로 포구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환희가 흐르고 

슬픔이 겹치며 괴로움으로 비틀린 그의 눈에서 결국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버렸구나. 살아서 이 땅을 다시 밟을 줄이야. 나 혼자서 이렇게---.”

청년의 감정을 이해하여 기다려 주던 중년인이 다시 청년을 잡아끌었다. 

“장오! 서둘러야 하네. 아버님께서는 지금 자네가 절실하게 필요하실 걸세.”

용문비선 일호의 유일한 생존자인 장오는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듯 한숨을 내쉬고서 중년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주! 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듣자마자 곽자렴은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곽자렴은 방안에 운녹산과 말없는 두 

중년인이 있다는 것마저도 잊고서 방문으로 달려갔다. 

곽자렴이 막 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이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곽자렴은 털북숭이 사내의 어깨 너머로 언뜻 엿보이는 왜소한 

청년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장오? 너 장오가 아니냐?”

털북숭이 중년인은 말없이 곽자렴과 장오의 사이에서 비켜섰다. 

장오는 놀람과 기쁨이 동시에 감도는 곽자렴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마자 억눌러두었던 참괴함이 터져 올라 자신도 모르게 무릎 

꿇었다.

“국주님! 으허허허헝! 이 놈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으허허허헝!”

곽자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물 흥건한 장오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장오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일어나라. 이렇게 울지만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다오.”

도대체 몇 번이나 정리했는지 모른다. 곽자렴을 만나게 되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기 위해 떠올리기도 괴로운 그 날의 일들을 

수백수천 번이나 더듬어 혹시라도 빠진 부분이 없는지 점검했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비겁함마저 떠올라 몇 번이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막상 곽자렴의 얼굴을 대하자마자 정리해 두었던 말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혼자 살아왔다는 자괴감과 

표사답지도 무인답지도 못했던 비겁함만이 떠올라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막을 모르는 곽자렴은 장오의 울음이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운녹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회의 기쁨은 뒤에 나누어도 될 것 같습니다만.”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싸늘한 음성이었다. 

곽자렴은 눈을 감고 고개를 살래 흔든 후에 털북숭이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털북숭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죽어가는 걸 파동(巴東)에 사는 어부가 구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오는 도중에 다 들었습니다.”

곽자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냐? 그럼 네가 먼저 들어오너라.”

곽자렴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는 장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에 방안으로 들어갔다. 

곽동량(郭棟亮)이 그 뒤를 따랐다. 

곽동량은 그가 조사하고 뒤에 장오로부터 들은 사건의 전말을 차분하게 보고했다. 

곽자렴은 만자강과 표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사색이 되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몇 번의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곽동량에게 물었다. 

“허면 토가족 사람들은?”

곽동량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일을 해주는 토가족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삼협 근동에 흔히 보이는 토가족 사람들마저 종적이 묘연합니다. 아마도 모두 

부락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곽자렴이 난감한 눈빛을 드러내며 다시 물었다.

“용문비선은? 용문비선은 우리 표국만이 가지고 있는 배다. 삼협을 오가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진데 

아무런 흔적도 못 찾았단 말이더냐?”

곽동량은 곽자렴의 기대를 짓밟으며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서릉협에서 보았다는 사람은 몇이 있으나 거기서야 의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의창을 넘는 것은 야밤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곽자렴은 다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살아 돌아온 장오 또한 선타를 잡고 있어 옷차림 외에는 제대로 본 것이 없고,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결국 

알아낸 것은 어피 같은 괴상한 흑의를 입은 수적들에게 당했고 토가족이 미리 알고서도 방조했다는 것뿐인가?”

곽동량이 덧붙였다. 

“아마도 불가피한 협박에 의한 것 같습니다. 장오의 말에 따르면 그날따라 평소에 늘 부르던 사공의 노래 대신에 비장함이 

느껴지는 전사의 노래라는 것을 불렀답니다. 게다가 살 수 있다면 복수를 하겠다는 말도 했다하니, 부족 전체가 커다란 위협에 

직면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들지요.” 

곽자렴이 눈을 뜨고 운녹산을 직시했다. 이제 사건의 전말은 대충 알았지만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는 오직 운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운녹산은 곽자렴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를 마주보지 않았다. 그로서도 수적에 의한 표물의 강탈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배가 전복되거나 좌초되어 표물이 모두 삼협의 격류 속에 빠졌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예상과 다른 결과를 

듣고 나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홀로 중얼거렸다. 

“삼협에 수적이라? 단순히 표물을 노린 것인가? 아니면 본가의 물건임을 알고 노린 것인가?”

고심 끝에 운녹산이 고개를 들고 조금은 한기가 풀린 목소리로 물었다. 

“토가족? 부족의 위치는 아십니까?”

곽자렴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수삼 년에 한번은 방문하지요. 어차피 산길이라 그쪽의 안내를 받지 않는다면 고생 좀 할 것이나 더듬다 보면 찾아갈 수는 

있을 것이오.”

운녹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레면 본가의 사람들과 함께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출발하도록 하지요.”

곽자렴이 깜짝 놀라며 튕기듯 일어섰다. 

“대공자! 토가족을 찾아가려면 삼협을 지나야 하오. 곧 장마가 시작될 터인데---.”

운녹산이 예의 차가움을 되찾아 쏘아붙였다. 

“좌초가 아니라 노략질 당했다고 지금 책임을 회피코자 하시는 겝니까? 표국이 하는 일이 운송만은 아닐 텐데요?”

곽자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노부가 걱정하는 것은 이 늙은 목숨이 아니오. 잘못하면 귀가의 인명 피해를 막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만류코자 하는 

것이오. 허나 소가주가 한사코 그리 하겠다면 죄진 이 늙은이는 그저 따를 수밖에.”

운녹산은 딱딱해진 곽자렴의 어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이레 후에 뵙겠습니다.”

운녹산은 곽자렴의 포권지례는 보지도 않고 찬바람이 돌도록 돌아서서 방을 벗어났다. 

곽자렴은 운녹산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장오를 흘끔 바라보고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천하를 제압했다. 그러나 오직 한곳 첩첩 산줄기 속에 자리 잡은 천혜의 땅 촉(蜀)나라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진나라는 고심 끝에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진나라에는 금우(金牛)가 있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금똥(金糞)을 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소문을 들은 촉나라는 금우를 빼앗기 위해 빼어난 장사 다섯 명을 보내어 촉에서 섬서 땅으로 나가는 검각산에 잔도(棧道)를 

놓았다. 

그렇게 길을 만들어 진나라로 나아가려는 그때 진나라가 먼저 그 길을 이용해 촉나라를 점령했다. 후에 사람들은 다섯 장사가 

놓은 검각산 잔도를 일러 금우고도(金牛古道)라 불렀다. 

금우고도는 사천과 섬서(陝西)를 직접 잇는 유일한 길이서, 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출사표(出師表)를 내고 위나라를 칠 

때도 이 길을 여섯 번이나 통과하였다. 

사천성 성도에서 섬서로 가려하면 우선 면양현(綿陽縣)으로 길을 잡아 칠곡산(七曲山)에 이르러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검각산 칠십이봉의 굽이굽이 험준하기 그지없는 협곡로를 지나 검각현(劍閣縣)에 이르면 곧 섬서성으로 이어지는 금우고도를 볼 

수 있다.  

사천과 섬서를 잇는 관문 검각현. 

영웅호걸들이 저마다 왕이라 자칭한 난세에는 사천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였지만 천하가 하나의 황제를 받드는 당금에 이르러서는 

그 전략적 중요성이 퇴색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도 검각현은 한 가문으로 인하여 영웅호걸들의 땅임을 

천하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바로 천북제일무가 운가의 땅이 그곳이었다.

운가의 역사는 송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하가 하나의 황제를 떠받들게 되자 힘없고 배경 없는 소수의 군인들만이 

검문관에 남아 형식적인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적의 침략이 없다고 도적의 노략질마저 끊어진 것은 아니었으니, 

백성들은 산줄기를 따라 근동을 노략질하는 도적들의 등살에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군인들만으로는 도적들을 막아낼 수 없는 일이었으니, 죽음을 두려워한 주둔 병사들은 오히려 도적과 결탁하여 노략질을 

방관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참하여 도적들의 세를 불리는데 일조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 분연히 일어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운가의 시조 운벽진(雲璧眞)이었다. 운벽진은 원래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사천으로 몽진(蒙塵)할 때 군관으로 따라와 결국에는 검각현에 안주한 운씨의 후예였다. 

그는 가문의 검법을 익히고, 검각산의 기묘한 기세를 타고 들어온 기인(奇人)으로부터 얻은 다섯 가지 무법(武法)을 얻어 

그것을 가전검(家傳劍)에 조화시킨 숨은 고인이었다. 

그가 검을 떨쳐 검각산 일대를 휘어잡고 있던 도적들을 단숨에 소탕하니, 사람들은 그를 벽력검협(霹靂劍俠)이라 칭하고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작된 운가는 이제 사백여 년 십오 대를 거쳐 당금 사천의 사대세력 가운데 하나인 천북제일무가가 된 것이었다. 

심소발인(心笑勃仁) 검명휘협(劍鳴煇俠)

‘마음이 웃으면 인이 드러나고, 검이 울면 협이 빛난다’는 편액의 글씨는 그 여백이 조금 박한 듯 하나 한 획 한 획마다 

무인의 힘찬 기세가 느껴졌다. 그 아래 검가(劍架)에는 고풍스런 물소가죽 검갑에, 포효하는 맹호와 성난 청룡이 얽혀 태극의 

문양을 이룬 검파가 멋들어진 사척 장검이 얹혀있다. 

그 외 장식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검각산 칠십이봉을 담은 산수화 한 장이 걸려있을 뿐이지만, 구석구석 놓여있는 꼭 필요한 

가구들은 담백하고도 단순한 멋이 느껴진다. 

그 방 중앙의 대탁에 지금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다. 편액을 등진 초로인은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고, 그 맞은편에는 이제 막 남포현으로부터 돌아온 운녹산이 있었다. 

곽자렴에게는 그토록 차갑게 굴던 운녹산이 조심스럽고도 공손한 태도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맞은편에 앉은 초로인은 바로 

운녹산의 아비이자 사천 사대거두 가운데 한 사람인 운가의 가주 운검정이 틀림없으리라. 

묵묵히 운녹산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운검정이 입을 열었다. 

“무리다. 너도 알다시피 곧 우기가 닥치면 삼협의 격류는 인간의 접근을 불허할 것이다. 탁탑참요검에 들인 공이 작다할 수는 

없겠다만 그것을 위해 가문의 아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 검각산도 아직은 특별한 조짐을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우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곽자렴에게 직접 회수해 오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운녹산이 두 눈에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했다. 

“아버님, 기다린다 해도 곽 국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사천이대표국이라 하지만, 그것은 곽 국주가 좋은 안목을 

가지고 적절한 길목을 차지한 탓이지, 그 세(勢)가 이대표국에 걸맞아 그런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아버님께서도 만자강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젊은 나이에 이미 곽 국주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녔다 했습니다. 그런 그가 표물을 지켜내지 못했는데, 

곽 국주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상황으로 보아서는 협상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협상을 하겠다는 놈들이면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요. 시간이 길어지면 쫓기도 힘들어 집니다.” 

운검정은 운녹산의 초조한 눈빛을 외면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실 운검정에게는 반드시 탁탑참요검이 필요했다. 

육년 전부터 검각현 근동에서는 요상한 일들이 가끔씩 발생했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피 빨린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놀란 

사람들이 요괴가 설치고 다닌다면서 검각현의 지주와도 같은 운검정에게 퇴치를 부탁해왔다. 

운검정과 운가 사람들은 짐승의 짓이거니 생각하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뒤로 사람들이 아예 갈가리 

찢긴 시신조각들이나 뼈들을 증거를 들고 찾아오니 결국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한두 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호환(虎患)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목만 떨어져나간 시신이 발견되고 갈기갈기 찢긴 채로 발견되는 시신은 제법 많았으며 가끔은 삐쩍 말라붙어 

목내이(木乃伊)처럼 보이는 시신들도 발견되었다. 

운검정은 가문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곳을 조사하는 한편 밤마다 순찰 돌도록 명하였다. 그 일로 투입된 

인원만도 모두 삼백여 명. 검각현의 지주이며 천북제일무가라는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이상 노소를 불문하고 참가시켰다. 

그러나 두 달에 걸친 조사와 순찰에도 불구하고 요괴의 종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계속적인 순찰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사건 하나 외의 다른 사건은 종적을 감춰버려서 겨우 체면유지를 할 수 있었다. 

가문의 사람들을 한없이 내돌릴 수는 없는지라 운검정의 마음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평소에 친분이 깊던 무당의 

장로 보천자를 초빙해서 검각산 일대를 살펴보게 했다. 

두 제자를 대동하고 야심한 밤에만 연 사흘 검각산 칠십이봉 일대를 둘러본 보천자는 운검정이 듣기를 원치 않았던 대답을 

확신하여 꺼냈다. 

“검각산에 요기가 감돕니다. 가주께서도 역사를 아시다시피 검각산은 인간의 피에 젖은 산이올시다. 그 살을 뜯은 짐승들과 그 

피를 마신 나무들은 요기가 흐르지요. 거기다가 원혼들마저 한 수 거든다면 요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검각산의 기세 

또한 그렇습니다. 큰 산에는 신령(神靈)이 맺히고 작은 산에는 사기(邪氣)가 맺히며, 영산(靈山)은 빼어나고 요산(妖山)은 

날카롭다 했는데, 검각산은 사귀요마(邪鬼妖魔)가 살기에 참으로 적절하지 않습니까? 창칼에 찢긴 살을 먹은 짐승이며 흘린 

피로 목을 채운 나무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요사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빈도가 보기에는 오히려 요괴의 발현이 늦은 

감이 있군요.”

그때 운검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가조의 유시를 떠올렸다. 

내가 낮에는 산을 갈아 받을 일구고 밤에는 홀로 검을 익히니 부족함이 없었을 때, 우연히 검각산을 돌아다니며 제를 행하는 

선인을 만나 금련오엽진결(金蓮五葉眞訣)과 다섯 가지 오묘한 무법을 얻고 한 가지 부탁을 받았다. 

선인께서 이르시기를, “검각산의 기세를 보아하니 후에 크게 요기가 성하여 인명을 해칠 것이라. 노도가 산을 돌아다니며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는 했으나 이는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하여 언젠가는 다시 요괴들이 출몰하여 사람들을 상하게 할 것이라. 

너의 자질이 돋보이니 노도가 전해 준 무법을 갈고 닦고 전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불쌍한 사람들이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보탬이 되어라.” 하셨다. 그러니 후손들은 본가의 근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헤아리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선인께서 말씀하신 

요사한 기운이 엿보이거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하라.

시조의 유시를 되새긴 운검정은 보천자에게 방도를 물었다. 보천자는 지금으로서는 당장 해결할 방도가 없다했다. 요기라 하나 

아직 요물로서 도통한 것이 아니니, 자신이나 운가 사람들처럼 기세가 강한 인물을 느끼는 순간 우선 몸을 숨겨서 쉽게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다했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요괴를 물리치는 천장인 탁탑천왕의 신당을 지어 요괴가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를 올리고, 

산 구석구석에 도력이 깃든 검을 묻어 요괴의 도통을 방해하며, 나아가서는 그 검력에 상처입고 드러나는 요괴들을 퇴치해야 

한다고 했다. 

운검정은 가조의 유훈과 선인의 부탁에 따라 아낌없이 금전을 썼고 오년을 기다렸다. 탁탑참요검의 제작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잃었다. 금전적인 손실이야 용문수로표국에 떠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언제 억눌러 두었던 요기가 

성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오년의 세월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검정은 첫째 아들이자 소가주로서의 자질을 검증 중인 운녹산의 초조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긴 시간을 바라보는지라 운녹산은 입술이 바짝 말라버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아비의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초조하고 답답했던 게야. 무인이 무인답게 살 수 없는 한가한 시절이라 역량을 발휘해 볼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운검정의 무심한 얼굴을 보면서 초조함을 더해가던 차에, 마침내 시작된 운검정의 말은 운녹산의 마른 입술에 수분을 공급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좋다. 네 뜻대로 하여라. 소가주의 자리가 핏줄만으로 인정받고 또 그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 시조께서 

내리신 유시를 받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너의 앞날도 순탄할 수 있으리라. 그래. 누구와 함께 가겠느냐?”

운검정의 말이 진행되는 순간순간마다 입가에 맺힌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던 운녹산이 운검정의 시선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금의대(金義隊)면 되겠습니다.”

무심하던 운검정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운검정의 마지막 질문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리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던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녹산은 기대와는 다른 요구를 했다. 

원래 운가의 젊은이들은 그 성정과 자질에 따라 오행의 성질에 맞춘 어느 한곳의 무대에 소속되거나, 가문의 전체적인 번영과 

안정을 기하기 위해 무가 외적인 업무, 이를 테면 가문의 사업체를 관리하는 일이나 정보를 수집 등 주로 가문 내에서 

활동하도록 키워진다. 

목인(木仁), 화예(火禮), 토신(土信), 금의 그리고 수지대(水智隊)로 구성된 다섯 개의 무대 가운데, 금의대는 그 

성정이 굽힐 줄 모르는 고집불통들로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강골들이 많았다. 그리고 성정에 맞게 운가의 

오성귀원도법(五星歸元道法) 가운데서도 패도적인 성격이 짙은 백호참마검법(白虎斬魔劍法)에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 그러나 

운녹산은 원래 목인대의 대주를 지낸 바 있었다.

운검정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다시 물었다. 

“네가 잘 모르는 곳에 가서 일을 보아야 하니, 차라리 잘 아는 목인대나 수지대 아이들이 낫지 않겠느냐? 그것이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에도 적절할 듯한데. 그도 아니면 각대에서 몇 명씩 차출하여 필요한 때에 필요한 아이들의 도움을 

받든지.” 

운녹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생각을 아니 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아이들입니다. 힘든 시점에서 각 대별로 의견이 흩어져 

우왕좌왕하느니 차라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낫다 생각하며, 실력이 미지수인 도적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금의대 아이들의 

단호한 성정과 실력이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운검정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걱정은 다른 것에 있었다. 

운검정은 잠시 생각한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일임하기로 한 이상 네가 뜻한 대로 행하여라.” 

운녹산이 허락에 감사하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자 운검정이 다시 말했다. 

“내일 바로 출발할 테지?”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가서 준비하여라.”

운녹산이 허리를 접어 절하고 방문을 열었다. 

“녹산!”

운녹산이 돌아섰다. 운검정이 눈에 따듯한 기운을 담아 지금껏 하지 못하고 참았던 말을 토해냈다.

“금의대가 왜 금의대인지 상기해 보거라. 때로 건방져 보이고 고집불통 같은 성정을 지녔다하나 한번 맹세한 의리는 죽음 

앞에서도 꿋꿋하게 지켜나갈 아이들이다. 너는 장차 이 아비의 뒤를 이어야 할 사람. 이번 길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그 

아이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보듬어 보아라. 마음을 넓게 쓰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평생의 동반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운녹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노력하겠습니다.”    

운검정은 변함없는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운녹산이 방을 나가자 운검정은 마침내 한숨을 

터뜨렸다. 

“자신감도 좋고 단호함도 좋아. 하지만 어둡고 차갑다. 책임자란 완벽한 인간보다는 조금 모자란 듯 하여 주위 사람들이 

채워서 완벽해질 수 있다고 느껴지는 인간이 좋은데---. 내가 너무 몰아 붙였던가? 그랬어. 현산, 경산과는 다르게 

키웠어. 하아! 이번 일이 약이 될 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텐데. 후우우! 하필이면 녹산과 현산(玄山)이라! 

별일도 아닌데 왜 이리 불안하단 말인가? 과연 그들을 함께 보내는 것이 잘 하는 일인가?”

운검정은 이제는 굳게 닫힌 방문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믿어야겠지. 진즉에 소가주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을 것을 괜히 미뤘어. 자질이 충분한 아이거늘 이상하게 현산이 걸려 

미뤘더니 심란해지는구나. 쯧쯧!”

한편 조심스런 태도로 방문을 나선 운녹산은 홀로되자마자 어깨를 쭉 펴며 절도 있게 걸었다. 그리고 마루를 내려서서 닫힌 

방문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버님. 소자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경산(庚山)이야 아버님 말씀대로 포용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아이도 

없습니다만, 현산은 속에 감춘 것이 많은 녀석입니다. 그것을 아시고 경산, 현산이라 이름 지으신 것이 아닙니까? 저는 현산 

그 아이가 부담스럽습니다. 맹목적으로 현산을 따르는 경산도 그렀습니다. 그래서 금의대를 택한 것입니다. 소자의 미래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이 필요하니까요.”

운녹산은 얼굴을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어미가 다르다는 이유로 동생들을 믿지 못한다면 난 내 자식에게 그런 형제를 갖게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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