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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척의 배가 힘겹게 물살을 헤치며 삼협의 시발인 구당협을 빠져나오고 있다. 배가 계류를 탄 낙엽처럼 갈지자로 움직이며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어 심히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나 삼협의 뱃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배를 모는 사람이 삼협의 바닥구조까지
샅샅이 꿰고 있다고 감탄하리라. 위태롭게 보여도 그 한번 한번의 움직임이 결국은 격류의 약한 결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는 삼협의 격류를 헤쳐 나가기 적합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팔노등선(八櫓等船)은 아니었다. 팔노등선보다 더 길고 옆이
통통하여 길이가 칠장에 배의 중심 폭이 이장 반에 이르렀으며, 무려 열여덟 개의 남목(楠木)으로 된 노들이 배의 좌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대오리를 엮어 만든 돛은 중년 아낙의 넉넉한 둔부처럼 사천 방향으로 펑퍼짐하게 부풀어
있어, 배가 순풍을 만났음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칠장에 이르는 삼나무 돛대의 끝에는 물살을 가르는 용 문양의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데, 그 표식은 바로 배가 삼협의 교통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용문수로표국(龍門水路鏢局)의 용문비선(龍門飛船)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배안의 풍경은 독특했다. 열여덟 명의 가무잡잡한 피부의 노수들이 누런 천으로 하물만을 가린 채 뻘뻘 땀을 흘리며 노를 젓고
있었다.
선수 부근에서는 노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여섯 명의 청의경장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있었다.
청의의 가슴 부위에 붉게 용문이라고 수놓아져 있고 주위에는 반드시 병장기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용문수로표국의 표사들이었다.
뾰족한 선수 쪽에 가장 가까운 난간에 기대어 앉아있던 동안의 신출내기 표사 장오(張娛)가 노를 저을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
보이는 노수(櫓手)의 하물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른 표사들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자 곧 지그시 눈을 감고
노수들이 노질에 맞추어 부르는 이국 말의 뱃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곡조는 빠르지만 왠지 구슬프고 비장하게 들렸다.
잠시 후 장오가 눈을 뜨며 비슷한 자세로 옆에 앉아있는 선배 표사 오량의 옆구리를 찔렀다. 별명이 마두(馬頭)인
오량(吳良)은 긴 얼굴을 찡그리며 장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오는 오량의 귀찮다는 기색을 무시하고 노수들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형님. 처음 듣는 뱃노랜데요. 무슨 뜻인지 아시우?”
오량이 얼굴을 더욱 길게 늘어뜨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러게? 이상하네. 토가족(土家族) 친구들과는 벌써 수년을 함께 다녔는데, 저 노래는 처음이야. 어째 좀 다른 걸.
힘을 돋우어야 하는데 왜 저런 노랠 부르지? 왠지 힘 빠지는 노랜데.”
모르고 있다가 물으니 더 궁금증이 생긴 듯, 오량은 주변의 동료들에게 두루 물었다. 그러나 모두들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용문비선에는 용문수로표국이 표사들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조타와 노질 그리고 돛대의 조종과 기타
배의 모든 잡일까지 도맡아 하는 스물 세 명의 토가족 사람들이었다.
이족인 토가족은 호북(湖北)과 사천의 삼협 주변 고원지대에 몇 개의 부락을 이루며 사는 부족인데, 그 성정이 선량하고
성실하며 특히 삼협의 물길에 가장 밝은 부족이었다.
삼협의 깎아지른 절벽에 구멍을 내어 그곳에 조상의 시신을 안치하는 풍속을 지닌 그들에게 있어, 삼협은 선산(先山)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삼협 구석구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꿰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리라.
그들은 마치 서로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 놓은 듯, 보통의 노수들이 도선수의 구령이나 물길에 밝은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노질의 완급을 조절하고 돛을 운용하는데 반해, 동시에 부르는 노랫가락 하나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냈다. 그래서
용문수로표국은 도선수의 일이라 할 수 있는 조타까지 그들에게 아예 맡김으로서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용문수로표국주 수룡신검(水龍神劍) 곽자렴(郭慈廉)이 그들을 얼마나 중히 여기나 하는 것은 “수신(水神)과 풍신(風神)의
가호(加護)와 토가족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본 표국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라고 한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토가족 사람들을 내심 미개한 이족이라고 비웃는다 하여도 대놓고 멸시하는 표사들은 아무도 없으며, 대부분의
표사들은 오히려 편안하고 안정된 여정을 제공하는 친구라며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장오는 혀를 차고서 다시 난간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오량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장오의 옆구리를 찌르며
훈계조로 말했다.
“막내야. 모르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할 것 아니냐? 젊은 놈이 그렇게 금방 포기해 버리면 쓰겠어? 갔다 와.”
장오는 괜히 물었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밥 먹은 지 금방이라 너무나 노곤하여 한번은 뻗대어 볼 요량으로
말했다.
“어딜 갔다 오라구요?”
오량이 난간에서 등을 떼고서 안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며 왼손으로 오른손 주먹을 어루만졌다.
“쓰으---.”
오량의 묘한 손놀림과 절정의 위협음에 굴복한 장오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운을 모아 하체로 보내고서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에 자신의 몸을 동화시켰다. 그는 선미(船尾)로 이동하면서 선 채로 노를 젓는 토가족 사람들에게 일일이
미소를 보냈다.
‘하! 신기하기도 하지. 난 우보천리(牛步千里)를 시전하고도 이렇게 힘겨운데 어떻게 저렇게 여유 있게 노를 저을까?’
말이 통했다면 굳이 선미까지 갈 필요도 없을뿐더러 노 젓는 비결까지 물어보았으리라. 장오는 토가족 말을 배울까 고민하면서
비틀거리며 움직였다.
쏴아아아아!
장오는 뱃전을 비켜나가는 격류의 울부짖음을 예사롭게 들으며 사람보다는 표물에게 더 안락한 선실 옆의 좁은 통로를 지나
선미로 이동했다.
장오는 선타에 손을 얹고 있는 무표정한 토가족 초로인 타노를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선실의 외벽에 등을 기대어 신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도선수나 다름없는 타노의 옆에서 등을 진 채 삼협의 장관을 바라보고 있는 청의경장인을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청의경장인이 호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아, 아주 좋아. 수신께서는 곤히 주무시고 풍신께서는 무리 없이 밀어주시는구나. 마지막 표행이 이리도 순조로우니 올해는
재수가 좋으리라.”
장오는 깜짝 놀랐다. 사내는 장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표국의 피붙이도 아니면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용문비선 일호의 책임자가
된 용문수로표국의 표두(鏢頭) 비천어검(飛天漁劍) 만자강(万自强)이 바로 그였다.
장오는 그를 보면서 십 오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마지막 표행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만 표두님?”
만자강이 돌아섰다. 느슨하게 속발 튼 머리는 단정하고, 각이진 얼굴과 두툼한 입술은 사내다움이 흐르며, 날카로운 눈매에는
흐릿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만자강이 눈가에 맺혔던 미소를 얼굴 전체로 퍼트리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장오. 여전히 어색하구나.”
표사들 가운데서 체구가 유난히 작은 편인 장오가 삼척 반이 넘는 도를 차고 다니는 모습은 언제나 웃음거리였다. 그래서 그의
걸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좌향보(左向步)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평소의 장오 같았으면 얼굴을 심하게 붉혔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만자강의 장난스런 말마저도 무시하고 급히 물었다.
“만 표두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 표행이라니오?”
“하하하! 오해를 했구나. 네 녀석은 귀를 닫고 사느냐? 장마철이 되면 장강 수위가 올라가서 삼협의 물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어진다. 그때가 되면 여기 타노마저도 삼협에 발을 담구지 않는다.”
만자강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타를 잡고 있는 토가족 초로인 타노를 흘끔거렸다. 그러나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물길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장오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아! 하신(河神)의 기지개 말입니까? 벌써 때가 되었나? 그렇네요. 장마철이 다 되어가는군요. 에이! 별로 쉬고 싶지
않은데---.”
만자강은 투덜거리는 장오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기야 네 녀석에게는 한참 재미있을 때구나. 반년이 조금 넘었지? 하지만 난 그 기간이 좋다. 비록 상계의 일각에 발을
담고 있다만 나 또한 무인!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장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어디를 가나 애송이 취급을 받고는 있다지만 그 또한 무인이라면 무인이었다. 그것도 십
수 년 후에는 만자강처럼 되겠다는 포부를 지닌 무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련보다는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근데 무슨 일로 왔더냐?”
만자강의 물음으로 정신을 차린 장오는 타노를 힐끔 보았다가 물었다.
“저 노래 들어보셨어요? 처음 듣는 거라며 무슨 뜻인지 모두 궁금해 하는데요?”
만자강이 바람에 실려 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 그렇군. 물소리 경쾌해 흘려들었어. 과연 평소에 부르던 사공의 노래가 아니구나.”
만자강은 뜻풀이를 기다리는 장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만자강은 토가족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필요한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을 외운
것에 불과했다.
사실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영역이 달라 의사를 교환할 일이 별로 없었고, 타노는 한어를 할 줄 아는 탓이었다.
하지만 한 마디 말도 섞지 못하는 다른 표사들은 만자강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만자강은 띄엄띄엄 몇 개의 단어를 알아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결국 뜻 파악하기를 포기한 만자강은 타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타노가 문득 만자강을 응시했다. 만자강은 간만에 마주한 타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만자강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타노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야 했다.
타노는 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장오가 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죽창 깎고 화살촉 만들어
가시덤불 헤치고 산을 헤매겠지
짐승 되고 마귀 되어
피로 물든 개울을 건너야 할 거야
그러나 나 잊지 않으리
내가 한 때 인간이었음을 잊지 않으리
피 튀고 살점 떨어져 나가도
눈감지 않고 찌르고 베리라
울지 않고 웃지 않고
나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리라.
아들 되고 지아비 되고 아비 되는
인간으로 돌아갈 그 길만 생각하리라
위대하신 나의 선조들이시여
두려움에 떨고 슬픔에 젖어
당신의 연약한 자식들이 울부짖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거둬가소서
공포에 무릎 꿇지 않게 힘을 주소서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보듬어 안게 하소서
타노는 느리고 무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노랫말을 읊었다. 그리고 “전사의 노래”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고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만자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타노를 응시했다. 평소에는 늘 말을 아끼던 타노였다. 그래서 늘 간단히 묻고 간단히 답했다.
타노가 한어에 능통할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가 용문비선의 노질을 처음 시작한 것이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의지와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만자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로 흥이 나는 사공의 노래를 접고 느닷없이 전사의 노래를 뱃노래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만자강은 타노의 무표정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장중하게 들려오던 전사의 노래가 갑자기 뚝 끊겼다.
“빠탐!”
만자강은 선수 쪽에서 들려오는 그 한 마디 외침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탐? 온다는 뜻이던가?”
만자강은 의혹어린 눈빛으로 타노를 응시했다. 하지만 타노는 만자강을 보지 않고 바로 소리를 질렀다.
“헤이가!”
헤이가? 만자강이 알기로는 가라는 뜻이었고 더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용문비선이 삼협을 오가는 배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한다 해도, 길이 칠장에 너비가 길어 봐야 이장이 조금 넘었다. 그 안에서 가 봐야 어디를 가겠는가. 만자강은
자신이 뜻을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첨벙,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저러는 거야?”
표사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만자강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표사들이 왜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돛이 방향을 잃고 펄럭이고 있었고 배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만자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당협의 입구를 향해 수십 개의 사람 머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만자강은 타노를 찾았다. 타노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미안하오.”
만자강은 그 슬픈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노는 선미의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슬프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만자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자강은 타의 반대쪽에 서서 타를 움켜쥐고 타노에게 외쳤다.
“왜?”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을 아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구려. 하! 그간 용문수로표국 덕에 우리 일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인연을 끊어야 하다니---. 미안하오. 목숨 값은 목숨으로 치르는 법. 이 늙은이는 살고자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저 아이들은 살고자 할 것이오.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들의 목숨으로 당신들의 피 값을 갚을
것이오.”
“타노오! 무슨 뜻이오?”
만자강의 외침은 공허했다. 대답해야 할 타노가 지그시 눈을 감고서 뒤로 넘어졌다.
첨벙!
지금껏 어안이 벙벙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장오는 급히 선미의 난간으로 달려가 타노를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배로
인하여 갈라졌던 물살들이 다시 한데 뭉쳐 생기는 소용돌이와 거품뿐이었다.
“장오! 돛을 잡으라, 이르고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햇!”
“예? 옛!”
만자강은 뒤뚱거리며 선수 쪽으로 달려가는 장오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삼협을 다 빠져나왔거늘! 용문수로표국의 코앞까지 왔는데 이런 일이---.”
선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만자강은 고개를 들어 돛을 살폈다. 드디어 바람을 맞이하는 정 방향으로 돛이 세워졌다. 단
한번도 돛을 잡아본 적이 없는 표사들이었지만 수년간 본 것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돛의 위치를 잡아낸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순풍에 돛을 달았다 해도 삼협의 격류 앞에서는 전진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제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버거우리라.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은 순전히 노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미숙한 솜씨로 서너 개의 노밖에 저을 수 없는
상황이니 이제 배는 삼협의 입구에서 옴짝달싹 못할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만약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격류에 휩쓸려 암초에 받히거나 뒤집히거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리라.
만자강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언뜻 떠오른 것은 현 지점에서 기다리는 것과 배를
돌려 다시 삼협을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것도, 배를 돌리는 것도 현실적으로 모두 불가능했다.
바람이 머리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기다린다는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배를 돌린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서 단순히 타를 트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격류의 틈새를 넘나드는 절묘한 조타술과 함께 그에 호응하는 숙련된 돛의 운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 함부로 행하다가는 배의 넓은 옆구리가 격류에 휩싸여, 방향을 트는 순간 전복되기 십상이었다.
만자강은 제 삼의 선택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강변으로 붙인다. 닻을 내리고 기다린다.”
좌초되더라도 최소한 표물의 안전을 확보하고 표사들의 목숨까지 구할 수 있는, 만자강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만자강은 좌우를 둘러보고 더 가까워 보이는 왼쪽 벼랑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평소에는 절경이라 감탄했던 곳이었으나 이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 내리쳐질 것만 같은 거대한
천도(天刀)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만자강은 크게 심호흡하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가끔씩 들려 준 타노의 무뚝뚝한 음성을 떠올렸다. 물결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물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때가 느껴진다고 했고 손이 절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랬다. 즉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심으로 느끼려 하니 물소리도 없고 표사들의 당황한 목소리도
없었다. 오직 너울거림에 동화되어가는 만자강 그 자신뿐이었다. 만자강은 선타를 잡은 손에 불현 듯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표두우!”
장오의 경악에 찬 울부짖음이 만자강의 청정경(淸淨境)을 깨버렸다.
만자강은 선타를 비틀려던 힘을 빼고 눈을 떴다. 선실 옆 좁은 통로를 막 벗어난 장오가 사색이 되어 만자강과 시선을
마주쳤다가 손을 뻗어 선수를 가리켰다.
“수-수적이---.”
만자강은 당황했다. 삼협에 수적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누가 있어 삼협의 격류 앞에서 당당할 것인가.
용문표국은 삼협을 통하는 사천의 물류(物流)를 거의 독점하고 있다 할 정도로 많은 표물을 운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여섯 명의 표사들이 표선을 호위하는 이유는, 그들의 운송로가 삼협에서 가까운 남포현에서부터 삼협의 끝이라 할
수 있는 호북성 의창까지, 수적질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호호탕탕한 격류 팔백 여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오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배의 양쪽 옆구리에서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선체가 급격하게 휘청거렸다.
투투투투투투퉁---!
갑판에 우박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잇달아 들리면서 선체가 좌우로 쉬지 않고 흔들렸다.
만자강은 갈등했다. 수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많은 수의 인원들이 배에 승선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선타를 아무 것도 모르는 장오에게 맡기고 가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먼저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놓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바로 그 순간,
채채챙!
도검 뽑는 소리가 들리면서 욕설이 이어졌다.
만자강은 아득한 심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차라리 쌀 천 섬, 비단 천 필이나 옥 노리개 천 개라면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으리라. 용문수로표국의 재력이라면 손실로 인한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만자강이 운송하고 있는 것
중에는 돈으로 되갚아 줄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닌 것도 있었다.
‘아직 바람이 바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선부가 아니라 표두! 표물의 안전이 우선이다.’
만자강은 각오를 다지고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장오에게 급히 말했다.
“선타를 잡아라. 당황하지 말고 흐름에 맞추어 이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 봐. 만약 위기가 닥치거든 그때는 생사(生死)는
하신께 맡기도록.”
장오는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생사를 하신에게 맡긴다 함은 격류 속에 몸을 던지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동료들을 놓아두고
홀로 살겠다고 물 속에 뛰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오는 자신의 대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만자강은 장오가 선타를 인계받기도 전에 등에서 검을 뽑아들고
선실 위로 솟구쳤다.
장오는 급하게 휘돌아가려는 선타를 보고 엉겁결에 움켜쥐었다. 겨우 선타의 안정을 되찾은 장오는 문득 어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청의경장의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촘촘한 바느질 자국이 보였다.
“이 따위 것에 의지할 이 장오가 아니야.”
장오는 입술을 깨물면서 상의 앞섶을 외면했다. 그러나 선타를 잡고 있는 손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장오는 경련이 이는
듯한 손을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빨을 악다물고 상체로 선타를 눌러 지탱하고 오른손을 왼쪽 허리로 돌려 도파를
힘껏 움켜쥐었다.
표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용문수로표국의 인기는 압도적으로 높다. 그것은 단지 용문표국이 사천내륙에 위치한
표국들로부터 독점적인 위치에서 의뢰를 받는 표국 위의 표국인 탓만은 아니었다.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일단 용문수로표국의
표사가 된 후라면 급여가 후할뿐더러 편하기 때문이었다.
용문표국표사가 표물에 주의를 기울이며 바짝 긴장할 때는 의창에서 짐을 실은 후부터 서릉협의 초입에 들어서거나 서릉협에
들어서서 의창에 짐을 내리기 전까지 삼십 여리의 짧은 거리 안에서 뿐이었다.
용문표국의 표사 칠년 차인 마두 오량은 오늘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과 병장기를 부딪칠
일은 장난칠 때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았었다. 요즘은 쓸데없는 뱃살을 빼기 위해 다시 연무라도 시작해 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지금 오량은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팔노등선 두 척이 격류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어피(魚皮)와 같은 몸에 밀착되는 요상한 흑의를 입은
사내들이 세 발가락으로 된 갈고리로 비선의 옆구리를 찍어 배를 갖다 붙였다.
막을 새도 없었다. 표사 다섯이 좌우에서 쉬지 않고 솟구쳐 오르는 스물이 넘는 인원들을 어찌 막을 것인가.
표사 다섯 가운데 둘은 여전히 돛 끝에 달린 화장(火杖)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품속에 오른손을 넣고 있었고, 오량을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을 보호하려는 기색으로 도파를 움켜쥐었다.
기묘한 흑의를 입은 사내들은 등에 삼지창과 같은 기이한 무기를 맨 채 양손 중지에 한 자가 채 못 되는 아미자를 꽂아
빙글빙글 휘돌리며 표사들을 압박할 뿐,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오량은 그들의 얼굴에서 비웃음을 느끼면서 이빨을 악다물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정도로 무서웠다. 하체가 풀려 넘어질 정도로 두려웠다.
‘손들어버리면 살려줄까? 그래, 놈들이 원하는 것은 표물이지 목숨이 아니야. 우리 뒤에 누가 있는데. 대청성(大靑城)이
버티고 있어. 감히 목숨까지야---.’
살고 싶다는 욕구가 표사로서의 의무를 압도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검은색 어피의에 버금가는 검은 안색의 사내가 어깨에
희한하게 생긴 검을 걸친 채 느긋하게 배 위로 올라섰다.
이제 서른이나 된 듯한 그 사내가 갑판의 대치국면을 흘끔 바라보고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 기다려? 얼른 죽여 버리지 않고 뭐하는데?”
툭 던져버린 그 한마디에 한 가닥 삶의 희망을 떠올리던 오량은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마자 오량은 도파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
채채챙!
두 동료들이 따라 병장기를 뽑는 순간 화장을 잡고 있던 두 표사들 역시 품속에서 손을 빼냈다.
“도적놈의 새끼들!”
쉐에엑!
용문수로표국의 표사들이 주로 애용하는 광한표(光扞鏢) 열 자루가 좌우로 빛살같이 날아갔다. 순간 오량과 다른 두 표사들도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피의의 사내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중지에서 느릿하게 돌던 아미자를 맹렬하게 휘돌리며 손을 앞으로 내뻗을
따름이었다.
파르르르륵, 휘도는 아미자는 너무나 빨라 아미자가 아니라 원형의 작은 방패를 내미는 것 같았다.
티티티티팅!
열 자루의 광한표가 좌우로 퉁겼다가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오량 등은 암담한 심정이 되어 도에 실었던 날카로운
벽력개산(霹靂蓋山)의 기세를 잃었다.
어피의의 사내들은 너무나 쉽게 오량 등의 도검을 피해내고 휘돌리던 아미자를 세워 내질렀다.
수십 줄기 예리한 기운들이 사방에서 닥쳐오자, 오량은 팔비도룡(八臂屠龍)의 수법으로 도와 함께 선풍처럼 휘돌며 갑판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동료들의 처지도 오량과 다름이 없는 듯 했다. 모두가 갑판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는 돛대를 지탱하던 두 사람마저
화장을 놓아버린 채 오량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다섯 사람이 작은 원을 그리려는 순간, 훼르르르르륵,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작은 돌풍들이 휘몰아쳤다. 오량 등은 그것의
정체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병기를 휘둘렀다.
치치치치치칭!
크으으윽!
다섯 사람이 사력을 다해 펼친 도풍검풍(刀風劍風)도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아미자의 폭풍을 모두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오량이
왼쪽 어깨에 아미자를 깊숙이 장식한 것을 필두로 모두들 한 두 개의 아미자를 몸 어디엔가 꽂은 채 비명을 토해냈다.
표사 두 명이 넘어지면서 배도 비명을 질렀다. 역류 속에서도 떠밀리지 않고 견뎌낼 수 있게 해 주던 풍신의 힘을 잃는 순간
배가 뒤집어질 듯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리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선수의 난간에 느긋하게 기대어 서있던 흑면 사내가 주저앉을 듯한 육신을 바로 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놀라라. 야! 뒤집어질 때까지 기다릴래? 돛부터 잡아. 무섭잖아, 자식들아.”
어피인 두 사람이 흉흉한 기색을 거두고 돛으로 다가가 표사들이 놓았던 화장을 움켜쥐었다.
“야! 빨리 끝내. 뭐야? 다섯 놈 밖에 안되구만 왜 그렇게 빌빌 매고 있어?”
다시 소리친 흑면 사내는 찡그린 얼굴로 배 전체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비천언가 뭔가 하는 놈이 표두라더니만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 그렇지. 조타 중이겠구만.”
바로 그 순간 아미자 대신에 삼지창 같은 수차(水叉)를 꺼내든 어피인들이 오량 등에게로 쇄도했다. 요동치는 배 위인데도
불구하고 어피인들은 발바닥에 빨판이라도 달린 듯 안정된 자세를 잃지 않고 미끄러지듯이 전진했다.
오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이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셋. 상대는 티끌만한 상처조차 없는 스물하나의 괴인들이었다. 이제
죽음은 확정되어 있었다.
어피인 너머 흘끔 강물을 바라본 오량은 힘겹게 기를 모으며 하늘을 향해 애원했다. 살려달라고. 그러나 보이는 것은 무자비한
수차의 흐릿한 경기뿐이었다.
오량은 전신을 난자할 것 같은 기운을 향해 사력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가가가가강!
힘겹게 돋운 기운이 허무하게 가로막혔음을 깨닫는 순간 오량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제 좌우에서 몰려드는 기운에 산적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전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던 기운들이 그의 머리카락들을 곤두서게 만들면서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아!
자신이 내뱉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비명 소리에 눈을 치뜬 오량은 어피인들이 분분히 물러서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피를 뿌리며 배의 난간에 부딪혔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아! 멋지군, 정말 멋져! 암향표(暗香飄)에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인가?”
이제는 익숙한 흑면사내의 말을 듣는 순간 오량은 누군가가 그와 흑면사내 사이의 시야를 가리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본능적으로 도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연달아 들려오는 괜찮냐는 말에 급하게 힘을 빼고 외쳤다.
“표두!”
오늘따라 만자강의 등이 왜 이렇게 넓어 보인단 말인가. 평소에도 오량은 만자강을 성실함의 표본이요 무인의 귀감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를 존경할 수 있을 것이냐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만자강이 크게 보이는 것은 지금의 절망과 공포 속에서 오직 그만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만자강은 야속하게도 그의 검 한 자루에 목숨을 내걸고 있는 오량과 두 표사들을 살펴보지도 않고 단 한 마디 말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