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43화
118장 표기장군(驃騎將軍)(3)
늦은 오후가 돼서야 감숙성은 난리가 났다.
그때쯤 되면 슬슬 일어나야 할 연춘왕과 연자전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의문이 가시기 전에 성문 밖에 묶인 둘이 떡 하니 나타났다.
둘은 헬쭉해진 얼굴로 연왕부의 군사들을 향해 항복을 권유했다.
“……반항하지 말고 성문을 열어라!”
“황군에 항복해라. 명령이다!”
어제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연왕부의 군관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별개로 군사들은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을 감추지 못했다.
군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철용을 쳐다봤다.
하지만 철용은 심드렁하게 철수를 명령내렸다.
“우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네. 장로님!”
그들은 대충 진백천과 철용 사이에 밀약이 있음을 눈치채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곧 성문이 열리고 연왕부의 군사들은 전부 항복했다.
막상 전투가 끝나자 군사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제는 죽을 일도 없고 황군이 내주는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 * *
감숙성을 탈환하자 용호대장군은 내기대로 진백천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끝이 날지 몰랐는지 놀람보단 허탈함이 더 가득했다.
이 같은 소식은 빠르게 황궁에 전해졌다.
“뭐? 감숙성을 되찾아?”
황제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크게 흥분하며 기뻐했다.
한동안 연전연패만 하던 황군에게는 모처럼 기세가 살 만한 소식이었다.
“연왕부의 개들은 어떻게 잡았지?”
“표기장군이 수하들 몇 명과 뛰어들어 가 붙잡았다고 합니다.”
“역시 표기장군이다! 처음부터 그를 보냈어야 했어!”
그 밖에도 이미 진백천이 수만 발의 화살을 튕겨냈다는 신기는 소문으로 퍼진 지 오래였다.
용호대장군과의 마찰에 대한 상소문도 한가득 왔지만 지금 상황에서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다친 곳은 없다죠?”
“물론입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고유빈은 남몰래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십만대산인가?”
“표기장군이라면 그곳도 곧 토벌을 끝낼 것입니다.”
사례감의 말에 팔걸이를 잡은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로소 전쟁의 끝이 보였다.
* * *
용호대장군 막사.
아니, 이제는 진백천의 막사가 되어버린 곳.
진백천 앞으로 용호대장군을 비롯해 군관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용호대장군은 떨리는 손으로 금검을 내밀었다.
“내기는 내기니까.”
진백천은 금검을 거두고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노려봤다.
이제부터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대로 목을 쳐버리겠다는 압박의 시선이었다.
용호대장군을 비롯해 그 밑에 있는 자들은 모두 헬쑥해져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무위를 보기 전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은 감히 상대가 안 됨을 알기 때문이었다.
“혹시 주변에 있을 마인과 패잔병들을 생각해서 병력의 일부를 감숙성에 두고 바로 십만대산으로 향하지.”
그 말에 감히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황실상단의 보급은 충분했고 승전으로 인해 황군의 기세는 한창 오르는 중이었다.
“뭣들 하느냐! 표기장군의 말씀대로 움직여라!”
그들은 멈추지 않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30만 대군이 이동을 시작하자 그 앞을 막을 이들은 없었다.
간혹가다 마인들이 진백천을 노리고 기습했지만, 그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잡혀 죽었다.
십만대산은 신강의 방대한 천산산맥(天山山脈)에 걸쳐 존재했다.
매우 험악하고 농사짓기가 힘들어 살기가 척박했다.
그것이 그들이 중원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청해를 지나 서서히 눈 덮인 산맥이 들어왔다.
“이제 곧 도착하겠군.”
천산에 가까워지자 진백천은 무림군과 함께 회의를 많이 했다.
화산신검과 검왕에게는 그간의 일을 숨김없이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마의 심장을 비롯해 마뇌가 십만대산에 펼쳐 놓았을 대법까지 전부였다.
그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과연 마교라 해야 할지. 영생을 얻는 대법이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화산신검에게는 새로운 유혹처럼 들려올 수도 있겠지만 그는 죽음에 미련 따위 없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 싹을 트고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면 다시 열매를 맺고 시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회주의 계획은 무엇이지?”
“황군으로 십만대산을 틀어막고 그들로 시선이 흘린 사이 소수정예로만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마뇌를 잡고 마천영을 잡은 후에는 미련 없이 물러선다.
괜한 피로 십만대산을 붉게 물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군. 나는 찬성일세.”
화산신검이 동참하고 검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했다.
진백천은 환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마천영을 상대하는 데 둘만큼 힘이 되는 자들은 없었다.
그리고 황군이 묵묵히 십만대산이 있는 천산산맥의 입구에 들어설 때쯤.
다른 이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회주. 늦었군.”
“한참을 기다렸다!”
황군에 합류하지 않았던 사패천을 비롯해 무당파, 하오문, 개방, 종남파와 녹림…… 등등의 그가 그동안 동맹을 맺어왔던 이들 전부였다.
한없이 크게만 보이던 십만대산이 이들과 함께 있으니 왠지 작게만 느껴졌다.
“……쯧. 뭘 이렇게 다들 몰려왔지?”
“강호 대부분의 전력이 이곳에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디 현명하게 선택해서 강호를 승리로 이끌어다오.”
각각 개방의 태상장로와 하갈후의 대답이었다.
진백천은 마음을 무겁게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때마침 하얀 설맥의 천산이 조금씩 검게 물들었다.
밤이 찾아온 것은 아니고 그들을 기다리던 마인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중에는 정도회에서 전멸에 가깝게 당했던 오마군종대를 비롯해 오마 중 살아남은 3마의 모습도 보였다.
“한판 붙자고 도발하는 것 같군.”
“어차피 패잔병 놈들만 잔뜩 모아놓은 것 같은데 붙어볼까?”
기세가 등등한 것은 이쪽이었다.
진백천은 애써 그들을 말리며 작전을 설명했다.
“우선은 경계만 합니다. 어차피 이쪽은 급할 게 없으니까 말입니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마인들의 애만 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놈들이 간을 보듯 공격을 시도했다.
“전열을 갖춰!”
황군이 움직이고 무림인들마저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놈들은 곧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시도하더니 감시하는 자들만 놓고 돌아갔다.
하지만 놈들은 새벽에 재차 공격을 강행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마교주 마천영이었다.
“천마신공이다! 조심해!”
달빛마저 가리는 마기가 스멀거리며 밤하늘을 적셔나갔다.
닿는 족족 살과 무기를 가리지 않고 으깨 버렸다.
진백천의 마기와 닮았지만 더욱 흉포했다.
다른 점이라곤 그의 천마신공의 마기는 제대로 통제가 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불안전해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급하게 나서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천영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진백천의 파사의 기운이 마기와 부딪칠 때마다 강한 반발력이 터져 나왔다.
‘크윽! 내 내력 정도면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괴물 수준이 아니잖아!’
마천영은 가부좌를 튼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장의 지배자가 되어 수많은 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던 마기와 마천영은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물러났다.
남겨진 것은 수천 구의 사체뿐이었다.
“……강하군. 역시 마교주……!”
“하지만 그의 기운은 불안했다.”
화산신검은 그를 살피는데 주력했을 뿐 전력을 다해 부딪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마천영의 몸은 그 많은 마기를 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그릇이었어.”
“맞아요. 저런 상태라면 오래 싸우지 못하겠는데요?”
그들의 생각이 맞다면 오래가지 않아 스스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게 분명했다.
진백천은 그 전투 이후 발 빠른 자들을 뽑아 십만대산을 살펴보게 했다.
주목표는 마인들의 규모와 병력이 아니라 소악마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말이 맞다면 마뇌가 숨겨져 있는 곳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을 때 확신을 하게 되었다.
‘소악마의 말이 맞았다.’
진백천은 곧바로 마뇌를 잡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모두를 모아두고 회의를 하며 인원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었다.
마뇌를 잡고 십만대산에 펼쳐진 술법을 깨뜨릴 자들과 마교주를 상대하고 그를 잠시라도 잡아둘 자들이었다.
“나는 마교주를 상대하지. 그의 실력이 궁금하다.”
사자혁과 사패천의 무인들은 화산신검과 함께 마교주를 상대하기로 했다.
그 밖의 화산파와 개방을 비롯해 대부분의 구파일방이 그를 따랐다.
“마뇌와 그의 사이한 술법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우리가 필요할 걸세.”
진백천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것은 무당팔검과 검왕, 정도회의 무사들이었다.
대충 가름이 되자 진백천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밤에 마교주가 나타나면 바로 움직이죠.”
바로 오늘이라고 하자 몇몇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마교주가 그날 밤 다시 나타났을 때 진백천은 일행을 이끌고 미리 알아낸 천산으로 향했다.
멀리 하늘을 뒤덮이는 마기와 그것을 가르는 흰 빛이 그들을 배웅했다.
“화산신검 어르신이라면 믿을 수 있지.”
내심 불안했는지 굳이 입 밖으로 되뇌이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뇌가 있다는 곳까지는 제법 길이 험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깎아지듯 가파른 절벽이 보였다.
‘소악마에 따르면 저 절벽에 숨겨진 동굴이 있다고 했지.’
진백천은 상단전에 내력을 불어넣고 호무살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이 일렁이며 환상이 깨지며 숨겨진 입구가 드러났다.
‘저기다!’
진백천은 일행들과 눈을 마주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자 중에서 그곳을 못 들어갈 이들은 없었다.
스스스슥-
“흐음!”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머릿속을 긁어대는 듯한 기이한 소리와 함께 두통이 몰려왔다.
혹시 모르게 들어올 동물과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마뇌가 만들어놓은 진법이었다.
무당팔검은 대사형인 현강을 중심으로 검진을 펼쳤다.
그러자 두통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뇌는 그 누가 여기까지 들어올 것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진법 이외는 설치해놓지 않았다.
“저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통로를 얼마 지나지 않아 마뇌를 지키던 지살대의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호의 개들이구나!”
하지만 천살대라면 모를까 지살대 정도로는 검왕과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빠르게 그들을 처리하며 진백천은 마뇌가 있을 곳을 수색했다.
촛불로 가득 찬 좁은 굴에서 마뇌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유난히 새하얀 피부와 상대적으로 붉은 입술이 어딘가 기괴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다니. 후우. 평범하지 않은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짐작이 되지 않는 건 당신뿐이야.”
말과 달리 그녀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걸 알았다면 이제 순순히 죽어주겠어?”
마뇌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나도 물론 죽어주고 싶지. 하지만 회주도 이제 알 텐데?”
마뇌는 어딘가 싸늘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죽지 못한다는 걸.”
“그토록 자신하던 마기자도 내 손에 죽었지.”
“놈은 불완정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가진 영생은 완벽하다. 네놈들도…… 나를 상대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 서둘러야 할 거다.”
마뇌의 비틀림이 더욱 커졌다.
“십만대산을 뒤덮은 마기자의 술법은 전보다 더 강하게 발동되는 중이거든.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의 피를 대가로 펼쳐지겠지!”
“뭐?”
마뇌는 진백천이 더 뭐라 묻기 전에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역시나 한계에 다다른 구촉비전(口燭非典)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녀의 손끝에 현강의 어깨 살점이 뜯겨나가며 피가 흩날렸다.
동시에 반격했지만 칼날은 튕겨 나갈 뿐 흠집도 나지 않았다.
“모두! 조심해라!”
무당팔검이 자랑하던 검진은 몇 번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강하다! 모두 긴장해!”
마뇌는 전에 보이지 않던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다.
검왕의 절단검을 맨손으로 잡고 튕겨내면서 손에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진백천의 파강식도 아무렇지 않게 튕겨냈다.
“진백천 순순히 천마가 되어라.”
“……멍청하긴. 천마는 이미 따로 있는걸 몰라?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겠냐?”
그 말에 천천히 다가오던 마뇌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 얼굴에 담긴 것은 의문과 함께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천마를 증오하는 자의 표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