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41화
118장 표기장군(驃騎將軍)(1)
소악마가 사라지자 진백천 또한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역시나처럼 모래바람이 그를 반겼다.
제법 소악마와 이야기를 한 듯했지만, 현실의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휘이이이이-
모래바람과 장작 타는 소리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진백천은 소악마가 한 이야기를 상기했다.
그중에는 마뇌의 대법을 깨뜨릴 방법을 비롯해 그녀가 숨어 있을 공간까지도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십만대산에서의 승부를 단번에 가를 만한 중요한 정보들이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했는데 거짓일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였다.
소악마는 스스로를 천마라 소개했다.
그렇다면 마기자의 대법은 성공했고 심장 조각으로 천마는 부활한 셈이었다.
원래의 가장 큰 유력한 후보자는 진백천이었지만 천마의 영혼은 악인곡에 있던 심장 조각에 담겨 있었다.
‘나한테는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어쩐지 복잡해지는 속내였지만 지금 미리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감숙에서 고전하고 있는 황군을 생각할 때야.’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의미 없는 전쟁의 희생자는 계속해서 나오는 중이니까.
진백천은 해가 뜨자마자 곧바로 이동했다.
다행히 어제까지 몰아붙이던 모래바람은 밤사이에 사그라들었다.
“감숙성까지 단숨에 이동하자!”
“네. 회주님!”
진백천은 춘득에 올라타 가장 앞서서 달렸다.
춘득은 적혈마답게 스스로 뛰기 좋은 땅을 찾아냈다.
그 뒤를 수라검대의 무사들이 따랐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달리자 마침내 목표했던 감숙성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황군입니다!”
황군은 꽁꽁 걸어 잠근 성으로 돌진하며 의미 없는 공격을 진행 중이었다.
관군들은 쏟아지는 기름이나 화살에 맞아 사막을 물게 물들었다.
그나마 공격에 대응하는 것은 동창들과 함께 싸우는 무림군이었다.
그중에는 정도회의 무사들도 어렵지 않게 보였다.
“성문을 뚫어라! 벽을 올라!”
뒤편에 장수로 보이는 자가 그들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며 독촉했다.
진백천은 그 모습을 보며 뇌리에 뭔가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얇디얇은 이성줄이었다.
“저 새끼. 설마 우리 애들로 저 X랄하는 거냐? 내가 잘못 본 거지?”
“……아마 제대로 보신 걸 겁니다.”
“……다들 내 뒤만 따라와.”
진백천은 두 번 볼 것도 없이 그들을 향해 질주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진백천을 보고 관군이 막아섰지만 당당히 꺼내는 금검과 금패에 기겁하며 무릎을 꿇었다.
진백천은 뒤에서 명령을 내리던 장수 앞까지 가서야 멈춰섰다.
“헉! 표, 표기장군?!”
염소같이 생긴 놈은 눈치를 살피면서도 상급자에 대한 예우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되었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당장 무림군 불러들여.”
“그, 그건 안 됩니다! 오늘 기필코 성문을 열라는 용호대장군의 명이…… 커헉!”
진백천은 더는 참지 못하고 놈의 가슴팍을 후려 찼다.
그리고 직접 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당장 의미 없는 싸움 말고 뒤로 물러나!”
“……표기장군의 명이다! 다들 후퇴하라!”
“후퇴하라!”
진백천의 명령이 곳곳에 울려 퍼지며 의미 없이 목숨을 내던지던 관군들과 무림군이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표기장군이라고 해도 이럴 수 없습니다! 엄연히 군법이 있거늘!”
“그래. 그 군법이라는 것 좀 물어보자. 상급자에게 예를 보이지 않고 명령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거야…….”
염소 얼굴은 대답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질책하려는 그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알아챈 탓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황제의 군권(軍權)마저 받아왔는데도 내 말을 무시했지? 이럴 때는 최대 어떤 벌이지?”
진백천은 바로 옆에 서 있던 무관을 향해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사형입니다!”
“사형이라. 그거 마음에 드네.”
진백천은 그대로 금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단순히 위협이 아닌 정말로 팔 하나라도 자르려고 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막상 어깨에 닿기 직전 거친 노호성이 들려왔다.
“표기장군! 그만하게!”
뒤돌아보자 염소 얼굴을 닮은 노인이었다.
화려한 복장과 주변의 반응만으로도 진백천은 그자가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임을 알아봤다.
그의 허리춤에는 진백천이 들고 있는 금검과 비슷한 것이 메어 있었다.
“크흠! 자네 나와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용호대장군은 통보하듯 말하며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하지만 진백천은 바로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저깟 늙은이와의 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내 새끼들 몸은 괜찮냐?”
정도회의 무사들은 진백천의 등장에 크게 반색했다.
특히 그들을 이끌던 황대원을 비롯해 전등신과 같은 대주들은 안도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나같이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상처가 가득했다.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고 해도 수만 단위의 규모가 서로 맞부딪치는 전쟁은 다른 이야기였다.
“쯧. 저 새끼들이 단단히 굴렸나 보네.”
“저희는 괜찮습니다.”
“괜찮긴 무슨. 다들 털 빠진 생쥐 꼴인데. 전부 다 앞으로는 용호대장군이든 뭐든 내 명령만 들어.”
진백천이 자신의 금검을 두드리며 말하자 모두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산신검을 비롯해 검왕과 같은 인원은 성을 탈환하기 위한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교주를 비롯해 남은 5마를 상대해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백천이 그들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자 따라오는 군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기장군. 용호대장군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시지?”
“그게…….”
가뿐히 군관의 말을 무시하며 무림군의 막사를 찾아갔다.
화산신검을 비롯해 검왕이 그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먼저 나와 있었다.
“회주. 드디어 왔군.”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늦긴 무슨. 사천에서의 일은 이미 들었네. 정말 큰일을 해냈어.”
화산신검은 진백천의 바뀐 기세에 놀라며 기꺼워했다.
마교주를 상대하기 전에 가졌던 부담감이 비교적 상쇄되었다.
“그런데 두 분밖에 안 계시는 겁니까?”
“다른 이들은 이미 진즉에 빠져나갔지.”
사자혁은 군관의 명령질에 크게 비웃어주며 떠났고, 녹림을 비롯해 다른 문파들도 따로 움직였다.
그들은 흩어진 마인들을 상대 중이라고 했다.
“쯧. 군관이 문제네요.”
“공을 세우려고 눈이 돌아갔어. 멍청한 놈들!”
검왕은 거침없이 그들을 욕했다.
만약 전쟁터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목을 베어버렸을 터였다.
이렇게까지 화내는 것을 보면 이미 여러 차례 맞부딪친 모양이었다.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보죠.”
진백천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용호대장군의 막사로 향했다.
자연스레 그의 뒤편에 황대원을 비롯해 대주들이 따라붙었다.
막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눈이 붉게 달아오른 용호대장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자신이 보자고 했음에도 기다리게 한 진백천이 무척이나 괘씸했다.
그의 언짢은 기색을 눈치챈 양옆의 무관들이 대신해서 열 낸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무리 표기장군이라고 해도 용호대장군을 기다리게 하다니! 너무 건방진 것 아닙니까?!”
“이건 명백히 상급자에 대한 불충이오!”
“당장 금검을 반납하고 전쟁터를 떠나시오!”
내력이 담긴 그들의 목소리가 막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진백천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명백했지만 굳이 그가 나설 것도 없이 황대원이 도끼를 내려놓자 잡음 따위 사라졌다.
쿠우우웅-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부절도부(不絶刀斧)는 그 위용 자체로 압박감을 내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석에 끌리듯 황대원의 도끼로 향했다.
그 침묵의 사이로 진백천의 목소리가 담담히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진백천이 막대기처럼 금검을 어깨 위로 걸치며 말을 이었다.
“……나보다 계급 낮은 놈이 말하면 바로 목을 날리지.”
목소리에 담긴 살기가 진심인 것을 느꼈는지 군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마땅한 듯 쳐다보던 용호대장군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건방지군. 황상의 마음에 들었다고 기고만장해.”
“기고만장한 건 내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지. 황제 때문이 아니야.”
“……불, 불충이다!”
누군가 진백천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다름 아닌 염소 얼굴이었다.
이미 한 번 봐준 놈이었기에 진백천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목을 가르기 직전 용호대장군의 대검이 가까스로 진백천의 검을 막아냈다.
나잇값으로 용호대장군직에 오른 것이 아닌 듯 제법 몸놀림이 뛰어났다.
‘딱 그뿐이야.’
단순히 막아내었지만 둘 사이의 격차는 명확했다.
용호대장군은 단 일검에 옆으로 주르륵 밀려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금세 일어났지만 주제 파악이 끝낼 정도로는 충분했다.
“이곳은…… 전쟁터다!”
“그러니까 더더욱 실력 있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
“네놈이 나보다 무인으로써 뛰어날지는 몰라도 전쟁은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 마교에 연전연패하고 지금은 생사람을 성벽에 밀어붙이는 중인가?”
용호대장군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했다.
그렇다 해도 진백천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실력이 없으면 혀라도 길지 말든가. 뭐가 이렇게 다 늙어서 주책이야?”
“그 소리는 꼭 표기장군이라면 저깟 성 따위 언제든 탈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적어도 지금보다야 낫겠지.”
용호대장군은 그런 진백천의 자신감을 비웃었다.
“그렇다면 나와 내기라도 하겠느냐? 3일 안에 저 성을 탈환하고 연왕부의 반역도들을 잡아낸다면 내가 표기장군의 수하임을 자처하지. 대신 그러지 못한다면 금검을 내어놓고 내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라라!”
다른 무관들조차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진백천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막 감숙성에 들어선 터라 이곳의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진백천은 상단전의 내력을 불어넣으며 군관들과 용호대장군의 속마음을 엿들었다.
-한심한 놈! 방금까지 기세는 어디로 가고 입도 뻥긋 못하는군!
-성문을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마인들에 의해 큰코다칠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게 비록 5마는 아니어도 무려 천마신교의 장로(長老)이니까!
‘천마신교의 장로라고?’
진백천은 문득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떠올랐다.
“황대원. 저 성안에 있는 마교의 장로가 누구지?”
“그러고 보니 회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있는 자로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과 염라대입니다.”
“그으래애?”
진백천은 예상외의 상황에 목소리를 길게 늘이며 용호대장군을 쳐다봤다.
잘하면 그의 콧대를 뭉개주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 내내 찍소리도 못 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용이라고 한다면 3일이 아니라 하루 만에도 성벽을 열 수 있지.’
그의 웃음이 짙어질수록 용호대장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일이라. 뭐. 까짓거 해보지.”
“뭐라? 3일 안에 성벽을 열고 성을 탈환하겠다는 거냐?”
“늙어서 그런지 난청이라도 왔나? 왜 했던 말을 반복해?”
진백천이 과장하듯 금검을 들고 허공을 휘두르자 용호대장군과 염소 얼굴이 기겁하며 움찔거렸다.
하지만 금검이 향한 것은 바로 허리춤의 검집이었다.
스릉-
“쯧. 쫄기는! 여튼 내기는 내기니 나중에 가서 괜히 딴소리하지 말지. 뭣하면 목으로 대신 받아갈 테니.”
협박 비슷한 말을 남기고 진백천은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다들 배부터 채워!”
거나하게 한 상 차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