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35화
115장 대격돌(1)
스으으으-
마기자를 집어삼킨 마기는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계속해서 허공을 휘몰아쳤다.
“쯧. 이제 적당히 들어와라?”
진백천은 심상세계에서 봤던 검은 용을 떠올리며 마기를 다시 흡수했다.
처음에는 반항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가려던 마기가 곧 포기하며 다시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동굴은 차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마기자가 죽었음에도 지영반은 의외로 담담했다.
환호라도 지를 줄 알았건만 오히려 씁쓸한 얼굴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죽지도 살지도 못한 마지막의 순간이 찾아왔지만 그 감정은 결코 후련하지 못했다.
어차피 죽게 되면 또 다른 지옥에 떨어질 것이란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흐음. 마기자와 달리 유언 정도는 들어줄게.”
머리를 굴리며 잠시 생각하던 지영반은 이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부디…… 마뇌를 용서하게.”
처음에는 마교에 숨어든 정파의 간자였고 지금은 천마의 부활을 위해 가장 앞서서 움직이는 자였지만 그 근원은 역시나 살아 있음의 고통이었다.
지영반은 그녀가 매 순간 살아 있으며 느끼는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공감할 수 있었다.
“마뇌를 미워하지 않나?”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미워하기는 무슨…… 어차피 흘러가는 세월에 비하면 우리 같은 인간사야 저 하늘의 티끌…… 조차도 못 되는 거야. 단지 후 하고 불면…… 사라져 버릴…… 그런 티끌!”
지영반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진백천은 별말 없이 손을 뻗어 마찬가지로 마기를 내뿜었다.
마기자를 처리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는 고통 없는 최후였다.
다른 나머지의 머리마저 전부 없애자 비동을 유지하던 진법이 파괴되며 거칠게 진동이 일어났다.
드드드득-
“후우. 결국 보물 따윈 하나도 없었군.”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행이 빠져나갔던 통로로 향했다.
통로는 비동의 입구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동굴이 무너져내리며 비동은 땅속 깊은 곳으로 파묻히기 시작했다.
지진이 사라진 후에는 비동이 존재했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회주님! 괜찮으십니까?”
먼저 올라왔던 이들이 진백천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몇몇이 유난히 궁금증을 많이 품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후우. 그 강시 처리하고 났더니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더라고.”
“역시 회주님이십니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천강시를 베어 죽이시다니!”
“마기가 통로를 통해 솟구치는 것을 보며 큰일이 난 줄 알았습니다!”
전부 진백천의 마기였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때 중혁과 강량호가 무척이나 낡은 상자를 들고 왔다.
안에서 보지 못했던 상자였다.
“회주님. 빠져나오는 통로에 있던 상자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꼭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말을 줄이는 강량호가 수라검대의 무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이 주변을 막아서며 벽을 만들었다.
“대체 뭐길래 그래?”
끼이익-
오래된 상자는 입구를 여는 것만으로도 거친 쇳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상자와 달리 새것처럼 깨끗했다.
“……어라?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종이에 곱게 쌓인 것은 다름 아닌 마교의 영단인 마기단(魔氣丹)이었다.
게다가 그 영단들이 상자 가득 수북이 쌓여 있었다.
* * *
아낌없이 베푸는 마화린과 적조녀.
진백천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비밀리에 이곳에서 만나던 둘은 서로 밀약을 맺고 그 대가를 나눠왔다.
그 물건을 교환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진백천이 빠져나온 통로였다.
‘허허. 종유석이 그대로였던 것을 보면 마지막 방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곳에 이런 식으로 물건을 쌓아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것은 분명히 적조녀가 강시를 채워 넣으며 만들어놓은 단약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노괴답게 연단술에도 제법 실력이 있었다.
워낙 기괴하고 요상한 짓을 많이 하던 혈화궁(血花宮)일 테니 이만한 단약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 이대로 두었다면 마화린이 가져가서 마인들에게 먹였겠지.’
진백천으로써는 가만히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호박이 굴러온 격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면 별다른 문제 없는 단약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꽁꽁 숨겼다.
정도회로 보내 약왕단주에게 살펴보라고 한 후 문제없으면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것들 들고 정도회로 복귀하자.”
“네. 회주님. 바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떠나기 전 유석경의 얼굴을 한 번 더 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주변을 지키는 무관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나중에 정도회에 놀러 오라는 서신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바빠 보이는군.”
백면신투는 어딘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다가왔다.
마기자의 마지막을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그답지 않게 진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아버지일 테니.’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끊을 수 있어도 못 끊는 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이었다.
진백천은 가능한 담담하게 그의 마지막을 말했다.
“그랬군. 자네가 고생했겠어.”
그는 단 반나절 사이에 수년은 더 늙은 얼굴이었다.
청서생을 쓰다듬던 손이 무언가를 건넸다.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서책이었다.
[백리만투(百里萬偸)]
“이건 어르신의 자서전 아닙니까?”
“이번에 느낀 바가 많아. 물이 고이면 썩듯이 지식과 경험도 마찬가지겠지. 거기에는 내 유령신법(幽靈身法)과 함께 내 무덤이 될 비고가 적혀 있네. 부디 시간이 나면 한번 놀러 와줬으면 해.”
평생 혼자 살았고 제자도 없는 백면신투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그의 유산을 이어줄 자로 진백천을 선택한 것이다.
“함정이 잔뜩 설치되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쉽게도 나는 그런 악취미 따위 없어서.”
백면신투는 진백천의 농담에 그제서야 슬쩍 웃었다.
“백리만투는…… 제가 소중히 보관하면서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더 고맙지. 그럼 나는 가보겠네.”
그는 고개만 쏙 내민 통통이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는 뒤돌아섰다.
왠지 멀어지는 그의 등이 전보다 훨씬 왜소해 보였다.
진백천은 백면신투가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며 배웅했다.
왠지 다시 찾아와달라고 했지만 이번 만남이 백면신투와의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약해지는 법이지.’
하지만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딘가 사라졌던 하갈후가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는 하오문에서 쓰이는 암호문이 들려 있었다.
“회주! 큰일 났다!”
“왜 그러세요? 설마 어디서 또 비동이라도 발견됐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마교가……!”
하갈후의 이어지는 목소리에 진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천당가(四川唐家)를 공격 중이다!”
* * *
하갈후가 가지고 온 소식은 주변에 있던 모두의 혼백을 빼기에 충분했다.
정마대전(正魔大戰)을 선포한 것이 정도회였지만 그동안 마교는 비교적 유순한 태도를 보였다.
전과 마찬가지로 뒷공작을 더 펼쳤고 황군(皇軍)과의 전면대결조차 피해왔다.
그러던 마교가 무슨 이유에서 인지 단 하루 만에 전면전을 선택했다.
그 가장 앞에서 선 자는 다름 아닌 마교주 마천영과 5마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황군은 어쩌고 당가를 공격해요?”
“황군은 마교주인 마천영과 연왕부가 이끄는 반역군에 기습당해서 감숙으로 밀려난 상황이다. 그 틈을 노려서 5마 중 화마왕(火魔王)과 금마왕(金魔王)이 당가를 쳐들어갔다.”
당가에 암왕(暗王)인 당염이 있다고 하지만 그 둘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화마왕의 무공인 염형태혈공(炎型太穴功)은 독공을 사용하는 당가에게는 최악의 상성이었다.
“……상황은요?”
그것을 묻는 진백천의 얼굴이 어두웠다.
5마 중 두 명.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마인을 생각하면 냉정하게 단 일주야를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아직까지는 버티는 중이야. 다행히도 아미파(峨嵋派)에서 봉문을 풀고 당가를 지원 중이다.”
그 중심에는 진백천도 잘 아는 비구니가 있었다.
적월신니가 죽고 새로운 장문인이 되었던 조혜사태는 구음진경(九陰眞經)을 익히고 화마왕을 상대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가까스로 버티는 중이라지만 지원이 필요하다.”
문제는 공격을 당하는 곳이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신강, 청해, 서장에서 출발한 마인들 뿐만 아니라 강호 전역에 숨어들었던 자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역시나 주된 대상은 하오문을 비롯해 개방과 같은 정보단체였다.
다행히도 하오문은 전에 당했던 것을 교훈으로 삼아 이번에는 그다지 피해가 없었다.
“마교주가 직접 움직였다라.”
진백천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복잡한 속내를 정리했다.
‘마교주와 3마가 함께 있다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역시나 화산신검과 같은 급의 오왕들뿐이야.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절대 부딪쳐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파도처럼 물결치는 마인들을 베어 넘기다 보면 마교주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지쳐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정도회와 정파의 무인들이 아무리 각오를 다진다 해도 10배 이상씩 차이 나는 인원수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황군과 함께 싸워야 마교주와의 승부를 점쳐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런 것조차 이미 마뇌가 염두해 두지 않았을까?’
회귀 전의 기억을 토대로 짐작해 본다면 마교는 압도적인 공세 속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하나둘씩 무너뜨려 나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강호를 떠받치는 기둥이고 그것이 무너지면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질 테니까.
‘아니면 다시 한번 더 정도회를 노릴지도 모르지.’
진백천은 지끈지끈해지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위험을 안고 나아가는 절벽길인 건 같았다.
‘역시나 가장 최선은 지금 당장 당가로 가서 놈들을 막아내고 황군과 합류해 마교주를 상대하는 거겠지.’
하지만 최선(最善)의 선택을 하려면 그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도사렸다.
그것보다는 차선(次善)을 선택해야 이후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지금 차선이라는 것은 당가를 포기하고 전력을 집중해 마교주를 밀어붙이는 것.
하지만 정도회에 있을 당천아와 당천기를 생각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회주 어떻게 할 거냐? 지금 당장 말만 하면 정도회로 서신을 보내 마.”
하갈후는 계속해서 선택을 강요했다.
마차를 가지러 갔던 강량호도 돌아와 상황을 파악하고 붉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젠장. 당가를 포기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버티라고 하는 무책임한 말은 통하지 않았다.
진백천은 손으로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리며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는 하갈후가 건넨 서신에 자신의 명령을 옮겨적었다.
[정도회의 무력대대 중 천군지사대와 응풍검대, 복건추룡대 전원은 황군과 합류해 마교주와 그의 본대가 더는 강호로 못 밀고 들어오게 막는다. 또한 검왕을 비롯해 화산신검, 사패천주, 정도회 동맹 전원에게도 감숙으로 와달라고 지원을 요청한다.]
서신을 작성한 진백천의 얼굴은 곰의 쓸개라도 씹은 듯 씁쓸했다.
하갈후마저 그것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괜찮겠냐? 이대로라면 당가는 버티지 못하고 멸문(滅門)하고 말아.”
진백천은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당가에는 따로 갈 사람이 있으니까요.”
“대체 누구…… 혹시?”
하갈후의 시선에 진백천이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네. 제가 직접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