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30화
113장 마기자의 비동(秘洞)(5)
번져 나가는 불길이 가장 먼저 집어삼킨 것은 흑강시와 검을 휘둘렀던 무인이었다.
둘은 눈 깜빡하기도 전에 화염에 휩싸이며 까맣게 타들어 갔다.
흑강시는 그 와중에도 무인에게 달려들어 끝끝내 이빨을 박아넣는 집요함을 보여줬다.
“모두 입구로! 수라검대는 나를 따라 흑강시를 쳐낸다!”
“네! 회주님!”
진백천과 수라검대는 일행의 가장 앞에서 창끝처럼 날카롭게 서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일일이 베어낼 시간도 없이 옆으로 쳐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크아아아악!
흑강시들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상처라도 내기 위해서 손톱을 세워 휘둘렀다.
“멈추지 마라! 뒤쪽에 있는 동료를 믿어라!”
앞에서 멈춰섰다가는 빠르게 번져오는 화마에 모두가 휩싸일 뿐이었다.
진백천이 화살촉 대형으로 나아가자 그 뒤로 흑지림과 강릉오제가 따라붙었다.
지금은 누가 한편이냐를 떠나 살아남냐 죽느냐가 문제였다.
“부, 불길이……! 끄아아아악!”
가장 뒤편에서 쫓아오던 신법이 느린 이들은 화마에 휩싸이며 몸이 여기저기 뜯겨나갔다.
흑강시들은 그 불길 속에도 존재했다.
“회주! 멀었냐?!”
“거의 다 왔어요!”
말이 거의 다 왔다지 아직 반도 채 가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 바로 옆의 도홍경과 강량호가 이를 악다물었다.
이대로면 그들이 문으로 도달하기도 전에 유황불에 휩싸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 불길을 꺼뜨릴 순 없어. 잠시 막아낸다고 해도 숨이 부족해서 죽고 말겠지.’
진백천은 옆으로 달려드는 흑강시를 쳐내며 뒤를 힐끔 쳐다봤다.
벽과 바닥 통로 전체를 채우며 넘실대는 화마는 가히 끔찍했다.
질주하는 화마의 혀가 무인들의 발목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어떻게든 해야 돼.’
진백천은 강량호에게 선두를 맡기며 뒤편으로 물러섰다.
“회주님 위험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
지금으로써 불길을 완벽하게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잠시나마 늦추는 것은 가능했다.
‘통로를 막아버리면…….’
문득 천장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진백천은 유난히 불길이 위쪽에서 더 맹렬히 타오르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기름과 유황은 그 위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혹시라도 천장을 부쉈다가는 터져 나오는 오히려 더 화염이 강해졌을 터였다.
‘젠장. 참으로 여러 번 꼬아놨네.’
진백천은 그대로 검으로 바닥에 꽂아 넣으며 내력을 뭉텅이로 쑤셔 넣었다.
검 끝에서 터져 나온 강기가 바닥의 벽돌을 터뜨리며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주 잠시지만 불꽃이 뻗어오던 기세가 늦춰졌다.
진백천은 재차 바닥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움푹 파인 바닥은 그 자체로 화염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됐다!’
진백천은 다시금 땅을 박차며 일행을 뒤따라 갔다.
수없이 우글거리는 흑강시들이 달려들었지만 그의 옷깃을 스치는데 그칠 뿐 감히 붙잡지 못했다.
-크아아아악!
“저리 비켜라.”
콰드득-
뇌수가 흩뿌려지는 흑강시를 뒤편에 집어 던지며 통로 끝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일행이 다음 방으로 이어진 통로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자동으로 사람이 들어서면 내려가게 되어 있는지 천장에서 두꺼운 문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쿠구구궁-
아직 뒤편에는 신법이 느린 이들이 달려가는 중이었다.
“우, 우리도 데려가!”
“멈춰! 멈추라고!”
진백천은 다리에 힘을 주며 강하게 땅을 박찼다.
백면섬보(百面閃步).
동시에 뒤떨어진 자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문으로 향했다.
진백천은 반쯤 닫힌 문 아래로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에게 끌려온 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쩌억 벌리고 멍하니 쳐다봤다.
순간 뭔가 몸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문을 통과한 후였다.
콰아아아-
뒤늦게 닫힌 문 뒤쪽으로 화염이 부딪치며 지진과 같은 떨림이 전해졌다.
얼핏 틈새 사이로 검은 연기와 함께 흑강시들의 처절한 괴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자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주!”
“별말을 이럴 때 도와야지.”
진백천이 구한 자들은 강릉오제의 막내 둘이었다.
강릉오제를 비롯해 제3부류에 속하던 이들의 시선이 어딘가 달라졌다.
실력이면 실력, 인품이면 인품, 진백천에 대한 것이 소문보다 좋으면 좋았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주. 저희 강릉오제는 이번 비동에서 얻게 되는 것의 절반을 포기하겠오.”
어차피 이곳에서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진백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 자체로 이득이었으니까.
“후우. 이번 통로에서 조금 쉬다 가자. 순간적으로 무리했더니 머리가 다 아프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독한 기름 냄새뿐만 아니라 흑강시가 내뿜던 적의 어린 시선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하갈후는 쉬고 있는 진백천에게 다가와 은근슬쩍 다음 방에 대해 물었다.
마기자의 비동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위험할 줄 알았지만 지금까지 겪은 바로도 충분히 그 상상 이상이었다.
“회주. 혹시 다음 방에 대해서 아는 건 없냐?”
“흐음. 확실한 건 몰라도 다음이 마지막 방인 건 알죠.”
“마지막이라고?”
진백천의 말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흑지림의 삼 형제였다.
이대로 정도회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에 신물이 나는데 보물까지도 전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 때문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지 않은 것에 가졌던 일말의 감사함도 욕심에 가려져 사라졌다.
‘역시나 먼저 움직이려나?’
진백천은 조용히 일어서는 흑지림의 무인들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 방의 이름은 중합(衆合).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거대한 두 개의 황금의 산이었다.
실제로는 겉에만 도금이 발라진 철산(鐵山)이었지만 욕심에 눈먼 이들이 그것을 알아챌 리 없었다.
‘보물에 욕심을 부려 그 위로 오르면 두 개의 철산이 합쳐지며 곤죽으로 만들어버리지.’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보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기자의 비동에 있는 유일한 보물은 두 개의 철산을 지나면 그 뒤에 있었다.
보석이 가득 담긴 상자는 철산을 넘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영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함정은 그 보물을 건드렸을 때지.’
보석을 건드리는 순간 두 개의 철산이 아니라 방 전체가 내리 앉으며 모두를 찍어 죽였다.
살아남는 방법은 애초에 보물을 뒤로 두고 돌아가든지 회귀 전 이곳을 들어왔던 이들처럼 철산을 올라 천장을 뚫고 빠져나가는 방법뿐이었다.
‘지금은 통로가 막혔으니 천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지.’
진백천은 굳이 흑지림의 무인들을 잡지 않았다.
어차피 붙잡고 위험하다 설명한다고 해도 삼 형제는 언제고 그의 뒤를 노려 기회만 엿볼 터였다.
차라리 함정의 위험함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런 방 따위가 아니라 숨겨진 곳이니까.’
도홍경과 진법의 대가인 백황과 고두랑은 진백천이 말한 대로 방을 지날 때마다 진법을 살피며 따로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런 곳이 없는지 별말이 없었다.
“흐음. 기이하군.”
“뭐가 말입니까?”
백면신투는 세 개의 방을 지나쳐오면서도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장소를 살펴봤고 그중에는 이곳과 비슷한 무덤도 존재했다.
“무덤이라면 보통 묻힌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이곳에는 마기자에 대한 흔적이 전혀 없어.”
마교의 손이 닿았다고는 하나 진법이나 설계 자체는 마기자의 것이었다.
하나하나 끔찍한 함정이나 진법이 설치된 방들뿐이었다.
“그냥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 걸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애초에 첫 번째 방에서부터 전부 죽여 버리면 되었겠지. 설마 그럴 능력이 없어서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려울 것도 없이 뒤편을 철문으로 막아버리고 칼날을 쏟아지게 하면서 화염을 불태우면 살아남을 자들은 손에 꼽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마기자는 일일이 탈출구를 눈앞에 제공하며 침입자들을 몰아붙였다.
“이건 마치 어서 내게로 오라는 듯이 유혹하는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깊숙이 들어오라고 말이야.”
백면신투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으로는 청서생들의 북실북실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들도 그 손길이 좋은지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말씀대로라면 마기자가 저 안쪽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렇지. 자네라면 그게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쯤은 잘 알겠지.”
‘유난히 죽음을 두려워했던 마기자. 불사(不死)를 위한 술법을 만들어내려 했지.’
그것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천마가 남긴 심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마기자도 그 술법을 자신에게 펼쳤다면 비슷한 형태로나마 살아 있을지도 몰랐다.
진백천은 속내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먼저 간 흑지림의 무인들이 슬슬 함정에 맞닥뜨릴 때가 된 것이다.
‘뭐가 됐든 다음 방을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
진백천은 중합(衆合)이라 적힌 문구를 지나 방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두 개의 철산을 오르는 흑지림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도금된 것도 모르고 죽음의 산을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흑지림의 삼 형제는 철산 앞을 막아서며 단호히 소리쳤다.
“이건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 눈독 들이지 마라!”
“누구든 저 금산을 노리는 자는 낭인도로 찢어 죽여주마!”
강릉오제를 비롯해 다른 무인들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정작 진백천은 별 반응 없었다.
“지금까지 뒤편에서 꽁무니만 쫓아오던 것들이 뭐라? 회주 저 괘씸한 것들을 가만 놔둘 거냐?”
“어차피 저희가 나서기 전에 큰코다칠 거예요.”
진백천의 말투에서 뭔가를 느낀 하갈후와 무인들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철산 위에 오른 흑지림의 무인이 황금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것은 도금된 철이었다.
“어어? 이거 금이 아니잖아!”
“뭐? 금이 아니라고?”
소혈랑의 물음에 수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철산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움직였다.
드드드득-
“허억! 뭐냐?”
이상함을 느낀 이들이 주변을 경계했지만 철산을 오른 이들에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두 개의 철산이 강하게 맞부딪치며 그 위에 있던 이들이 전부 피와 살점으로 으깨져 버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을 정도로 빨랐다.
도금된 황금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등장한 것은 피로 물든 두 개의 철탑이었다.
“제, 젠장! 저건 또 뭐냐!”
철탑은 그 위에 올라선 자들을 으깬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지 주변에 있는 자들을 덮치려 했다.
흑지림의 삼 형제 중 맏형인 대묵랑의 발이 철산에 깔리며 몸부림쳤다.
“허억! 아우! 나를 잡아당겨라!”
“같이 죽자는 거냐! 이거 놔!”
그가 소혈랑의 팔을 잡고 소리쳤지만 날아든 것은 낭인도였다.
스걱!
한쪽 팔이 잘려나가며 대묵랑은 그대로 철산 밑에 깔리며 곤죽이 되어버렸다.
역시나 우애와 협의가 없는 낭인들의 세상에서는 형제 따위는 필요할 때나 써먹는 핑곗거리뿐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작자들이군.”
진백천은 철산이 보여주는 학살에도 방 안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도홍경은 이상해 보이는 장소를 발견해냈다.
그것도 무려 2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