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28화
113장 마기자의 비동(秘洞)(3)
비만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통통이었다.
-비만이라니! 더 늠름해진 것뿐이라고!
고개를 들며 열심히 소리쳤지만 백면신투에게는 단지 찍찍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것저것 많이 주워 삼키기는 했죠.”
“그렇군. 뭐가 제일 좋았는지 물어도 되겠나? 나는 주로 묵철을 많이 먹였지. 덕분에 비고에 무기가 남아나질 않을 정도야. 허허허.”
백면신투는 마치 자식을 자랑하듯 말했다.
말년에 청서생을 거두더니 꽤나 재밌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면신투의 청서생에게 들려오는 목소리만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세 마리의 청서생은 유난히 크고 위협적인 통통이를 경계하며 백면신투의 몸에 올라왔다.
-아빠. 무서워.
-엄청…… 커!
-뚱땡이!
통통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의사 표현이 뚝뚝 들려왔다.
“청서생들이 아빠처럼 따르나 봐요.”
“그런 편이지. 새끼 때부터 직접 키웠으니.”
백면신투는 각각 한 마리씩 쓰다듬으며 직접 지은 이름을 알려주었다.
각각 일청, 이청, 삼청이었다.
진백천은 청서생의 소개를 하는 백면신투를 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백면신투 어르신만큼 마기자에 대해 잘 아는 자도 없겠지.’
마기자의 유일한 아들이 바로 백면신투였다.
물론 서로 소원했다고는 하나 혈연의 끈은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비동이 드러났다고 하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일 터였다.
‘이곳은 거대한 마기자의 무덤이니까.’
“어르신 이렇게 된 거 저희랑 같이 다니시죠?”
“허허. 그래도 되겠나?”
백면신투는 내심 그 말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통통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기도 하고 예전과 다른 몸 상태 때문이기도 했다.
하갈후와 강량호는 새로운 인물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진백천이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대하는 자는 보기 드물었다.
“예전에 황궁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분이십니다.”
“허허. 조용히 있을 테니 나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게들.”
말투에서부터 역용을 알아챈 강량호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백면신투와는 아주 잠깐의 인연을 갖고 헤어졌지만 오랫동안 만나왔던 사람처럼 대화가 잘 통했다.
그 이유는 확실히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흑마패(黑魔牌)라는 것을 먹고 난 뒤에 저렇게 변했단 말이지?”
“네.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흑마패라.”
잠시 오래된 기억을 뒤져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빛바랜 이야기를 꺼냈다.
“고루혈마(骷髏血魔) 옥관패. 기괴한 방법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자라고 아버지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지. 하지만 결국 불멸의 방법은 아니야.”
그가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흑마패를 만드는데 마기자의 대법이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혼을 담아두었다가 다른 이에게 씌이는 방법으로 이어지지. 다만 그것이 지속될수록 그 안에 담긴 영혼은 끊임없이 찢기고 갈라지지. 그런 영혼이 정상일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인형처럼 살육을 반복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옥관패는 그런 과정에 있던 자일 뿐이었다.
그런 흑마패를 통째로 갉아먹었다고 하니 백면신투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은 만년한철까지도 갉아냅니다.”
“허허. 엄청나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밤은 깊어갔다.
진백천은 슬슬 일행을 모아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정도회의 무인들이 움직이자 방 안에 슬슬 긴장감이 흘렀다.
“도홍경. 진법은?”
“충분히 약해졌어요.”
진백천은 마치 하늘을 올려다보듯 천장을 쳐다봤다.
분명 지금쯤 만월이 그들의 머리 위로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터였다.
그는 거침없이 방의 중앙으로 걸어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벽은 보다시피 다 막혔고 천장도 길이 아니니 남은 것은 바닥이겠지.”
“회주. 바닥 또한 단단히 막혔소.”
진백천의 의견을 반대한 것은 실눈의 중년 남자였다.
강릉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다는 강릉오제(江陵五弟) 중 큰형이었다.
정파와 사파, 그 어중간한 위치에 선 자로 현재 정도회와 흑지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통솔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도회에 속한 기관진식 대가들의 말로는 아닌 듯한데?”
진백천은 그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쿠우웅-
강한 진각에 바닥 벽돌의 일부가 아래를 푸욱 꺼졌다.
“아래 빈 공간이 있군! 우리가 먼저 뚫는다!”
진백천이 재차 진각을 밟기도 전에 나선 것은 흑지림의 삼 형제였다.
유난히 들어간 벽돌을 향해 둘째인 중철랑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콰아앙!
그 무식한 공격에 하갈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쯧. 생긴 것답게 멍청한 놈들이군. 그러다 바닥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늙은이! 쫄리면 밖으로 나가라!”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백천은 이미 놈들이 서두를 것쯤은 예상했었다.
수라검대와 하갈후에게 뒤로 물러나고 하며 벽면에 바싹 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강릉오제 또한 따라 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이야.’
그리고 중철랑의 두 번째 공격이 바닥을 내리치는 순간 드디어 두꺼운 벽돌이 부서지며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문제는 촘촘히 끼워져 있던 벽돌의 경계가 무너지자 주변에 있던 벽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흑지림의 삼 형제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려고만 했다.
이내 구멍이 급속도로 넓어지자 당황했다.
“이, 이건 뭐냐!”
“허억! 다들 물러서라!”
그들의 경호성이 굴에 울렸지만 흑지림의 무인들이 피하기에는 구멍이 넓어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그들은 발밑이 허전함을 느끼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둠만이 가득 찬 구렁텅이는 족히 5장(15m) 가까이 지속되었다.
“커헉!”
“내, 내 다리!”
흑지림의 무인들은 제대로 된 낙법조차 펼칠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기도 했지만 삼 형제가 그들을 완충제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거구의 대묵랑이나 중철랑 밑에 깔린 자는 비명을 내뱉을 새도 없이 즉사했다.
“후우. 큰일 날 뻔했군.”
“대형 괜찮습니까?”
“역시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아우들뿐이 없군.”
그들은 밑에 깔려 죽은 이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다 아래쪽으로 뚫린 통로를 향해 수하들을 밀어 넣었다.
“뭣들 하느냐! 다른 놈들이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 나아가라!”
진백천은 그들을 내려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저런 놈들을 따르는 수하들이 불쌍할 지경이군.”
진백천은 가장 먼저 벽면을 밟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남은 이들이 잘 내려올 수 있게 붉을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로 뒤이어 하갈후와 백면신투가 내려왔다.
“신법이 많이 나아졌군. 그때만 해도 제대로 움직일 수나 했는데 말이지.”
“지금은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하갈후는 진백천이 백면신투에게서 신법을 배웠다고 하자 둘을 번갈아 봤다.
평범한 자는 아닌 줄 알았지만 무공까지 배웠을 사이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설마 숨겨진 회주의 스승일까?
같은 청서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짙은 확신이 들었다.
진백천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들으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무공을 이어받았으니 스승이라면 스승이었으니.
뒤이어 강량호와 수라검대의 무인들이 내려왔다.
흑지림의 무인들과 다르게 다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부터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
“네. 알겠습니다!”
진백천은 그들을 돌아보며 가장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처음 드러나는 공간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단지 사람의 정신을 흔들어놓을 뿐이지.’
그렇기에 더더욱 진백천이 앞장서야만 했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벽면에 경고라도 하듯 붉은 글씨로 규환(叫喚)이라 새겨져 있었다.
풀어쓰자면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앞서간 흑지림 무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다, 다들 도망쳐!”
“주, 죽는다아아!”
처절한 비명 소리에도 진백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곧 거대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그들을 반긴 것은 펄펄 끓어 불타오르는 구리물(銅汁)과 달궈진 쇳덩어리였다.
흑지림의 무인들은 구리물과 쇳덩어리에 깔려 비명을 질러댔다.
“……사, 살려줘어! 이런 곳에서 죽기 싫어!”
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지켜봐도 이상한 점이 곳곳에 드러났다.
갑자기 이런 지하 공간에 저런 것들이 갑자기 나타날 리 없거니와 구리물에 휩싸인 자는 끝없이 고통스러워할 뿐 죽지도 않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허상이라는 거지.’
이 거대한 공간은 진법으로 현실과 비슷한 환상을 만들었다.
당하는 자가 실제의 고통을 느낄 만큼 철저하게 말이다.
진백천의 머리 위에 있던 무쇠솥이 흔들리며 구리물이 쏟아졌다.
“헉! 회주님!”
강량호가 놀라며 다급하게 다가오려 했지만 진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구리물을 뒤집어썼다.
온몸이 타들어 가듯 검은 연기를 뿜어냈지만 역시나 가짜였다.
“전부 환상이야.”
진백천이 허상을 꿰뚫어 보자 주변의 현혹이 사라지며 곧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변은 단지 퀘퀘한 냄새를 풍길 뿐 지극히 평범한 공간일 뿐이었다.
그의 담담한 태도에 강량호를 비롯해 다른 무인들도 허상에서 벗어났다.
흑지림의 무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허허. 정말 실제 같은 환상이군.”
“진법의 힘이 약해졌음에도 이 정도라니 절대 방심해선 안 되겠는데요.”
도홍경은 화들짝 놀라며 성령목부를 휘둘러 주변에 남은 진법의 기운을 쓸어냈다.
하지만 잠시뿐인 듯 뒤이어 들어서는 자들은 똑같이 환상에 빠지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나마 환상을 벗어나는 자들은 내력 수준이 뛰어나거나 심지가 곧은 자들이었다.
“이건 환상이니까 정신 차려!”
소혈랑이 수하의 몸을 베면서까지 소리쳤지만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쳤다.
빠져나오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흑지림의 삼 형제는 진백천과 그 뒤의 무인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버리고 간다!”
그들은 가차 없이 남겨진 이들을 버리고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진백천 입장에서는 고마울 일이었다.
그들이 있지도 않은 보물에 욕심을 부리며 나아갈수록 뒤따르는 입장에서 더 안전하게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진백천은 일부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곧 기다란 통로가 끝이 나고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이번에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벽면에 문구가 적혀 있었다.
흑승(黑繩).
흑승은 먹물을 묻힌 끈을 말했다.
목수들이 이것을 나무 위에 대고 튕겨 선을 그을 때 사용했다.
“흑승이라. 회주. 이게 무슨 뜻인지 짐작 가냐?”
하갈후의 질문에 진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지나쳤던 규환(叫喚)의 방에 비하면 끔찍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흑승으로 선을 긋고 다음 행동을 떠올리면 대충 짐작할 수 있죠.”
“다음 행동? 목수가 선을 그으면 다음은 당연히 잘라내는 것밖에 더 있냐?”
하갈후는 자신이 말해놓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환상은 아니겠지?”
“아마도요.”
진백천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강량호와 수라검대도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긴장하며 뒤따랐다.
마침내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사색이 된 흑지림의 무인들과 사방에 늘어진 토막 난 사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