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25화
112장 유석경과의 재회
성도는 잠잠했다.
아직 진백천이 벌인 일이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성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가 내민 금패를 보고 기겁하는 수위대장은 덤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다급히 진백천의 뒤를 쫓아왔다.
“금의위?”
진백천이 찾으려 했던 금의위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자는 이미 잘 아는 얼굴이었다.
“장우량 교위?”
이제는 교두로 진급한 장우량이었다.
그는 진백천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표기장군을 뵙습니다!”
금의위의 예의 주변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진백천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조용한 객잔으로 향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또 저자는 무엇이고요?”
혈도를 짚어져 있는 연기백은 여전히 굳은 상태로 옆자리에 짐짝처럼 놓인 상태였다.
두 눈만큼은 두리번거리며 진백천과 장우량을 노려봤다.
한눈에 봐도 적의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아아. 짐짝. 오다 주웠는데 지금 내가 바빠서 말이지.”
“대체 무슨 짐짝이길래 저런…… 으음?”
그때 장우량이 그가 입고 있던 옷 안쪽의 갑옷을 확인했다.
일반적인 황군의 것이 아닌 그들과 전투 중인 연왕부의 갑옷이었다.
“설마?”
“맞아. 연기백이야.”
장우량을 비롯해 금의위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을 경계하며 기세를 피어 올렸다.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진백천이 먼지 털 듯 손을 흔들자 기세가 전부 사그라들었다.
“……더 강해지셨습니다.”
“한창 클 때니까.”
진백천이 장난식으로 말했지만 그들의 놀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지금은 몸이 마비된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지만 무려 반역을 일으킨 연춘왕의 손자였다.
이런 자를 오다가다 주웠다고 말하는 진백천을 보며 장우량이 혀를 내둘렀다.
“예전부터 느끼지만 표기장군은 과연 폭풍을 몰고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이놈이 알아서 오더라고.”
진백천은 슬쩍 아무것도 아닌 듯 용가에 대해 물어봤다.
용가에 대해서는 장우량도 잘 알고 있었다.
“용주명이라면 얼마 전까지 추승직 2품까지 지냈던 자입니다. 사적인 이득을 취하다 황실에서 쫓겨났습니다. 현재 연왕부와 연통을 주고받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최근 저희도 조사…….”
말을 하던 장우량이 진백천을 쳐다봤다.
설마 하는 시선에 진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굳이 안 가봐도 돼. 가봤자 폐허밖에 안 남았을 테니까.”
“……용주명의 집은 그 크기만 무려 천 칸의…….”
“응. 다 부수는데 꽤나 힘들더라고.”
진백천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모습에 장우량은 더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제서야 연기백이 어디서 잡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뒤처리 좀 해줄 수 있지?”
“혹시 제가 더 알아야 하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아. 그런 건 없어. 그냥 용주명이 가지고 있던 빚과 땅문서를 전부 태워 버렸거든. 그러니까 과거의 기록이라도 찾아서 사람들한테 적당히 나눠줘.”
“……네. 알겠습니다.”
일대가 전부 그의 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 일은 무척이나 고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놈에게 땅을 잃었던 마을 사람들의 삶은 충분히 나아지겠지.’
진백천은 장우량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헤어지기 전 지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아 참. 이거는 앞으로 고생할 텐데 적당히 기름칠 좀 하고 다녀.”
“표기장군. 이러지 않으셔도…….”
“어허. 한 식구끼리 이런 것도 있어야지.”
진백천은 통 크게 상자에서 금원보를 세 개씩 꺼내 금의위들에게 건넸다.
장우량은 기껏해야 은자, 아니면 금자라 생각했는데 큰돈에 깜짝 놀랐다.
“타지에서 돈 없으면 개고생이야. 혹시 모르니까 이건 비상금.”
백천은 오히려 금원보 몇 개를 더 꺼내서 건넸다.
사실 이 돈은 용가의 일을 떠넘기며 떠나는 탓에 미안한 마음에 주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돈의 힘은 위대한지 금의위들이 진백천에게 더더욱 깍듯해졌다.
“나중에 또 보자고.”
“표기장군. 부디 안전히 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진백천이 떠나고 나서도 그들은 한동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표기장군께서는 여러모로 대단하십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들은 묵직한 품속의 금원보와 함께 혈도에 집혀 침을 질질 흘리는 연기백을 보며 절로 뿌듯해졌다.
* * *
진백천은 맡겨놨던 춘득을 찾아 곧바로 길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곧 마구간지기가 황망해진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공자님. 말이 군마면 말씀을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왜 그런가 봤더니 진백천이 잠시 이야기하는 사이 춘득이 기존에 있던 말들과 싸움, 아니, 일방적인 폭행이 벌였다.
그동안은 마구간이라고 해봤자 춘득 혼자 이용했기에 딱히 싸움이랄 것도 없었지만, 이 객잔은 여러 말이 함께 머무는 중이었기에 춘득이가 무척이나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춘득은 무려 스스로 도검을 피할 정도의 명마인 적혈마(赤血馬)였고 때문에 보통의 말들은 뼈도 못 추렸다.
“다른 말들이 많이 다쳤나?”
“다치다 뿐이겠습니까. 완전히 들이받아서 오줌만 지리는 중입니다.”
진백천이 가보자 마구간지기의 말대로였다.
춘득은 그 넓은 마구간을 혼자 독차지하고 유유히 여물을 먹는 중이었다.
다른 말들은 구석에 박힌 채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푸르륵-
춘득은 진백천을 발견하자 콧김을 내뿜으며 다가왔다.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기색이 가득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좁은 곳을 줬나 보구나.”
갈기를 쓰다듬자 기분이 풀리는지 춘득이 가만히 서 있었다.
마구간지기는 그 얌전한 모습에 눈을 크게 뜨며 쳐다봤다.
“허허. 그렇게 날뛰던 말이 공자님 손길에 저리 얌전해지다니.”
“말들이 다친 값과 여물값은 넉넉히 주지. 말들이 좋아하는 것 좀 갖다 주게.”
마구간지기는 생각지도 못한 큰 보상금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만들어놓은 영양식이 있는데 드리겠습니다.”
꿀과 견과류를 빻아 뭉친 경단이었다.
주로 말들에게 보양식으로 먹이는 음식이었다.
춘득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 날름거리며 받아먹었다.
-나도 먹을래!
품속에서 자던 통통이도 고개를 쏙 내밀며 외쳤다.
조금 떼어주자 그것을 들고 품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진백천은 춘득을 타고 다시 이동길에 올랐다.
해남도를 제외하면 최남단답게 따듯한 날씨가 확실히 느껴졌다.
“날씨 좋네.”
눈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일찍 피는 꽃들이 봉오리를 벌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진백천은 곳곳의 새로운 풍경을 즐기며 광동성으로 향했다.
마기자의 비동이 나타난 렴강(廉江)으로는 곧바로 가지 않았다.
우선 광동성에 들러 주변을 살피고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유석경의 얼굴도 보고 말이지.’
성주인 그의 도움을 받으면 마기자의 비동 주변을 통제하기도 쉽고 사태파악에도 좋았다.
어차피 마기자의 비동을 가로막은 그 두꺼운 문을 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가능한 많은 사람이 모이길 마교에서 의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 시간은 충분해.’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산수의 자연경관은 서서히 성벽과 크고 작은 건물들로 바뀌어 갔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진주언가에서의 일 이후로 본 적이 없었고 가끔 서신을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차마 철중화(鐵重花)인 언해원과는 잘 되어가는지 묻지 못했다.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이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안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광동성으로 향한 진백천은 곧바로 금패를 보이며 유석경을 방문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타 다른 성들과 달리 관군들이 기합 있게 움직였다.
“성주님의 손님이시다!”
진백천은 깍듯한 대우를 받으며 객당으로 안내되었다.
곧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등장한 것은 유석경이었다.
그는 반가운 감정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백천! 대체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러게. 안 본 사이에 더 몸이 좋아졌는데?”
“하하하. 그런가?”
단순히 안부로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유석경은 진백천과 헤어진 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 훈련 방법은 전부 진백천과 함께 다닐 때 배운 것들이었다.
“손목과 발목에 철고리를 끼고 수련하는 방법 말이야?”
“맞다.”
유석경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철고리를 보였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성내의 병사들에게도 이 독특한 수련법을 널리 알렸다.
그래서 막 무관이 되거나 훈련을 받는 관군들은 한동안 의무적으로 철고리를 끼고 다녀야 했다.
어쩐지 성의 무관들이 유난히 씩씩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허허. 너도 대단하다. 지금까지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다 너에게 보고 배운 거지.”
유석경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동안 진백천에 대한 것도 듣고 싶어 했다.
한동안 강호는 정도회와 진백천의 이야기로만 가득 찰 만큼 특별한 사건이 많았다.
“사패천주는 어땠지? 소문대로 그렇게 강했나? 그의 무공이 파두혈사(破頭血事) 삼재부(三災斧)의 것이라던데? 아, 참. 무림대회의 우승자들은 어땠나? 다른 이들은 다 이해가 가지만 무명악인 권진 그자가 우승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더군. 그 때문에 광동성의 마인들이 한참이나 떠들썩했으니까.”
유석경은 예전의 침착한 모습은 어디 가고 말이 굉장히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이해하는 게 진백천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그는 성에서만 머물렀을 테니 궁금했을 게 분명했다.
진백천은 그가 묻는 말에 하나하나 대답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나저나 광동성의 마인들이 떠들썩하다니? 그게 무명악인 권진하고 무슨 연관이야?”
“아아. 사혈방(使血房)의 잔재들 때문이지.”
사혈방은 마화린이 강호로 넘어와 만들었던 자신의 흑도방파였다.
정도회에서 진백천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해체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새롭게 그들을 규합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진백천도 잘 아는 흑지림(黑地林)이었다.
“낭인들이 흑도방파를 집어삼켰다고?”
“흑지림에 대해 잘 아나 보군. 전에는 낭인들끼리만 뭉쳤다면 지금은 사혈방을 흡수하며 광동성의 가장 큰 흑도방파로 커졌어. 최근이 그놈들이 추종하는 자가 바뀌었기 때문이지.”
“……설마?”
“맞아. 무명악인(無名惡人) 권진이야. 놈들의 뒤에 그자가 있는 게 분명해.”
‘미친……!’
진백천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참았다.
무림대회에서부터 느꼈지만 권진이라는 이름만 엮이면 되던 일도 안 되는 느낌이었다.
그의 일그러지는 표정에 유석경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무림대회 우승자기도 하니까 무명악인을 잘 알지?”
“……모르지는 않지?”
“하여간 그자 때문에 겨우 흩어지던 사혈방이 흑지림으로 합쳐지면서 꽤나 위협적이야. 최근 들어서는 마기자의 비동인지 뭔지를 차지하겠다고 그 주변에 진을 치고 있어.”
흑지림의 무인들은 비동의 문을 열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흠집이 조금 생긴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너무 이야기만 했군. 밥이라도 먹지. 소개시켜 줄 사람도 있고 말이야.”
진백천은 유석경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언해원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였다.
마주 대답하려던 진백천의 시선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배에서 작은 심장박동이 전해져왔다.
진백천이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돌리자 유석경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축하해 주게. 아이가 들어선 지 두 달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