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24화
111장 탐관오리(3)
금원보 상자는 무척이나 단단했다.
무려 두 명의 골을 박살 내면서도 조금도 갈라지거나 흠집이 생기지 않았다.
“호오. 괜찮은데?”
“네, 네놈은 누구냐……!”
그 와중에 정신을 잃지 않은 용주명이 분노에 찬 눈으로 진백천을 올려다봤다.
진백천은 서서히 몰려드는 사병들을 보며 품속에서 금패를 꺼내 들었다.
“나? 표기장군.”
“……표기장군?”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용주명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어갔다.
“표기장군이 대체 여길 왜?”
진백천은 방금 용주명이 건넨 밀약서를 꺼내 보였다.
“원래는 저놈 버릇 좀 고쳐주러 왔는데 이걸 보니까 당신도 가만둬서는 안 되겠네.”
“그, 그게 오해요! 나 또한 놈들에게 포섭되는 척하려 한 것뿐이오!”
“오해는 개뿔.”
만약 진백천이 아니었다면 혹시나 하고 넘어갈 만한 연기력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러운 속마음을 들어버린 지 오래였고 그걸 떠나 마을 사람들을 수탈한 탐관오리를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용주명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진백천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어린놈이 겁도 없이 자신의 집에 혼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황제에게 신임받는 표기장군이라고 해도 내 사병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겠지.
“어쭈?”
쥐 새끼가 아무리 모여봤자 호랑이를 잡을 수는 없다.
용주명은 이러한 간단한 이치도 모르고 서서히 주변으로 모이는 사병들을 보며 기가 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군. 당장 저놈을 죽여라!”
“……표기장군을 말씀이십니까?”
“표기장군은 무슨! 사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용가에 와서 난리를 피울 리 없지 않느냐!”
용주명의 말을 들은 사병들은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창을 움켜쥐고 진백천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차피 한 사람 처리하는 것 정도야 그들에게는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진백천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다 생각했는지 오히려 의기양양했다.
“쯧. 이곳에서 죽더라도 나를 원망 마라! 다 네놈이 자초한 것이니!”
“허허.”
반면에 진백천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병들은 자신들의 인원수를 믿는 건지 두려움 따위 보이지 않았다.
‘외딴 지역이라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내력조차 없는 창날로 진백천을 위협할 리 없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같았다.
‘죄다 패버릴 수도 없고.’
이 중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와 사병이 된 자도 있을 터였다.
잘못한 것은 용가이니 그 벌도 용가가 받아야 했다.
진백천은 이내 검을 뽑아 들며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다.
“이놈 가만히 있어라!”
바로 옆에서 위협적으로 창을 내질렀지만 가볍게 휘두른 진백천의 검에 창 목이 잘려나갔다.
그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사병들의 창은 언제 검이 뻗어왔는지도 모르게 툭툭- 창 목이 잘리며 짧은 봉이 되어버렸다.
“허억! 고, 고수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 다음은 창 목이 아니라 네놈들 목일 테니까.”
사병들은 화들짝 겁을 먹으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쓸데없는 충성심이 강한 자가 존재했다.
그런 자는 용주명의 눈치를 살피며 진백천을 향해 기습적으로 창을 내질렀다.
‘이런 놈까지 살려둘 필요는 없겠지.’
진백천은 단숨에 놈의 목을 베어냈다.
피 분수가 솟구치며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네놈이 고혈을 짜내서 만든 이곳이 어떻게 망가지는 잘 봐.”
진백천은 서서히 내력을 끌어올리며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의 두 눈이 하늘 위의 태양처럼 백색으로 이글거렸다.
파강식(破彊式).
가장 먼저 그의 검이 향한 대상은 방금까지 그가 있던 전각이었다.
지금까지 묵묵히 모은 내력이 폭발하듯 검 끝으로 빠져나갔다.
거칠게 물결치는 강기의 파도가 공간을 가득 메우며 그대로 전각을 집어삼켰다.
콰드드드득!
빛무리는 폭풍처럼 전각을 산산조각 내며 흩어졌다.
그 위력을 직접 본 자들은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됐다.
“허억!”
“건, 건물이 사라졌다!”
“모두 물러서!”
진백천의 파강식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곧바로 쉬지 않고 바로 옆의 건물을 차례대로 박살 냈다.
하나의 건물이 사라지기 무섭게 바로 옆의 것도 산산조각 나며 쓰러졌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막아라! 막으라고!”
자신의 궁궐 같은 집이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에 용주명이 다급히 외쳤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저 강기에 휩쓸리기만 해도 자신들은 피떡이 되어 사라질 것쯤은 잘 알았다.
오히려 건물에 있던 자들도 모두 뛰쳐나와서 몸을 피했다.
콰아아아앙!
이미 사방은 번쩍이는 진백천의 강기로 가득 차올랐다.
“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왔단 말인가!”
용주명은 피로 붉게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아무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할 수 있는 것은 부서지는 집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집을 부숴대는 진백천도 힘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뭔 집이 이렇게 커?’
재활용조차 못 하게 하려면 기둥부터 싹 다 무너뜨려야 했다.
어중간하게 부수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남의 땅을 빼앗고 피눈물 나게 했으니 네놈들도 똑같이 당해야지!”
느리지만 확실히 용가의 궁궐은 천천히 지워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층의 거대한 전각만 남았을 때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쏠렸다.
용주명이 여기만은 안 된다는 듯 겁도 없이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 그만해라! 이곳만은 안 된다!”
“왜? 그동안 모은 땅문서와 빚문서를 여기다 모아두기라도 했나?”
-이, 이놈이 그걸 어떻게?!
놀라는 속마음에 진백천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만둘 수가 없었다.
“더 확실히 망가뜨리는 수밖에.”
진백천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재차 검을 내리그었다.
강기의 물결은 배고픈 아귀처럼 전각의 가장 밑에서부터 기둥을 무너뜨리며 집어삼켰다.
산산이 조각나 무너진 건물을 용주명은 멍하니 쳐다봤다.
혹시라도 잔해 속에서 남아 있을 문서를 생각해서 삼매진화로 불꽃을 일으켰다.
잔해는 순식간에 까맣게 재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쌀이 수북이 쌓여 있는 창고뿐이었다.
이것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네, 네놈이…… 내 모든 걸……!”
“시끄러워.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들은 사람들의 한에 비하면 네놈이 잃은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진백천은 싸늘한 눈으로 용주명을 노려봤다.
그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진백천은 그를 지나치며 주변의 사병들에게 말을 이었다.
“용가는 오늘부터 무너졌으니 그에게 진 빚도 전부 사라졌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
사병들은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이 재차 설명하기 전에 다시 나타난 사람들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으음?’
다름 아닌 진백천이 지금까지 들리며 만나왔던 마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용가의 잔해를 보며 놀라면서도 서둘러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 헤맸다.
그중에 객잔 주인이었던 노인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석용아!”
“아버지!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표기장군께서 용가를 벌주러 간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한 손 도우러 왔다!”
사병들은 전부 누군가의 아들이며 손자이며 가족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나타난 가족의 모습에 모두 쥐고 있던 창을 내려놓고 가족을 품에 안았다.
“용가가 망했구나! 하늘이 벌을 주신 거야! 꼴 좋다 이놈들!”
“이 친구야! 하늘이 아니라 표기장군이야.”
“그게 그거 아닌가!”
진백천은 좋게 풀려가는 상황에 만족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창고 문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잘라내며 문을 활짝 열었다.
“다들 창고에서 쌀을 나눠가시길 바랍니다. 저 정도 양이면 이곳에 모인 모두가 나눠 갖고도 남을 겁니다. 그동안 고생한 보상은 가져가셔야죠.”
사람들은 다시 한번 진백천을 환호했다.
용주명은 자신의 창고마저 텅텅 비자 멍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재빨리 도망쳤어야 했다.
그들의 패악질에 당했던 이들이 곧 그들 부자를 끌고 갔다.
“허억! 그, 그만!”
그들은 멍석에 깔리며 원한에 찬 사람들의 매질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름 낀 몸으로 견뎌내기에는 너무 많은 원한이었다.
채 절반이 지나기 전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전부 자기 업보겠지.’
진백천은 상황이 정리되자 그 자리에서 말없이 빠져나왔다.
지금은 그들과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연기백 이놈도 잡아놔야 하고.”
용가에 들렸던 연기백과 연왕부 사람들은 진백천이 건물을 부수기 시작하자 기겁하며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쳐봤자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었다.
춘득은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놈들의 뒤를 따라잡았다.
“연기백?”
“허억! 표기장군?!”
“알면 반항은 하지 말지?”
그의 말이 무색하게 연기백의 주변에 있던 자들이 다급히 진백천을 막아섰다.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연왕부의 무사들이었다.
조금 전 용가의 사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움직임을 예상한 검로가 사방을 가로막으며 각기 사혈을 노렸다.
‘제대로 훈련된 자들이야.’
춘득은 과연 명마답게 다급히 머리를 틀며 공격에서 멀어졌다.
뒤늦게 검이 쫓아왔지만 진백천이 안장에서 뛰어오르며 전부 튕겨냈다.
카앙!
연기백은 무사들이 막아선 사이 도망치려 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호무살(虎武殺).
진백천이 만들어낸 의념상의 비수가 말의 다리를 끊어내며 연기백이 바닥을 굴렀다.
“커억!”
“또 도망치려 하면 그때는 팔을 잘라내지.”
“닥쳐라!”
“연 공자님 어서 도망가십시오!”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진백천을 포위했다.
말에서 내렸으니 자신들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그들이 자신 있는 것은 합격진이었다.
“표기장군이 그토록 강하다더니 실력을 보자!”
무사들은 훈련이 제법 잘 된 듯 익숙하게 검을 뻗어왔다.
검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공격이 이어졌다.
과연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쫓기다 치명상을 입었을 위협적이었다.
문제는 진백천은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튕겨오는 공격쯤이야…….’
진백천은 일부로 몸을 숙이며 공격이 뻗어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전방위에서 무사들이 검을 내질렀다.
‘……튕겨내면 그만이야.’
파류식(破流式).
휘이이이익-
진백천의 검로에 따라 무사들이 검이 자석처럼 따라붙었다.
“어엇!”
그리고 이내 뻗어오던 것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내상을 입었는지 피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후우. 이 정도면 내 실력을 보기에 충분했나?”
진백천은 그대로 연기백에게 걸어갔다.
겁에 질린 놈이 다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힘조차 제대로 실리진 않은 공격이 통할 리 없었다.
그대로 날을 손을 낚아채며 반 토막 내자 절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걱정 마. 너는 안 죽여. 협상할 때 필요하거든.”
진백천은 그의 혈도를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연왕부 무사가 타던 말 위에 올렸다.
“머, 멈춰라! 쿨럭!”
“서둘러서 운기조식하지 않으면 기혈이 뒤틀려서 죽을 거다. 그대로 일어난다고 해도 나한테 죽을 거고.”
그 말에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진백천은 춘득의 등에 올라타 유유히 움직였다.
목적지는 남녕(南寧)에 있는 성도였다.
‘언제까지 이 짐덩이를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성도에 있는 금의위나 동창에 적당히 던져주고 넘어갈 셈이었다.